3.1운동 100년, 그리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④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1월 20일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3.1독립운동의 도덕적 차원
우리 겨레 정신과 육체 해체하려는 도덕적 학살 자행한 일제
한국 교회 도덕성 회복 위한 개혁안 제출하고 실행 요구


3.1독립운동의 도덕성 문제

정치에서 도덕성의 문제는 정치생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정치의 대의명분이 도덕성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성을 가진 많은 부류의 국민 전체의 국리민복을 성취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 같이 공명할 도덕성은 필수이다. 한데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에 이 도덕성의 문제는 행정 차원에서 처음부터 크게 문제 되어왔다.

 그러다가 3.1독립운동에 이 도덕성의 문제가 불붙는다. 3.1독립운동에 기독교와 함께 각 종교가 함께 발 벗고 나섰던 것은 종교적 이유 말고도 당시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심각하게 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영 성서공회는 바로 그 해 1919년에 3.1독립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의 현대적 가치나 윤리 도덕에의 저촉 때문에 터진 운동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식민통치의 도덕적 폐해

3.1독립운동의 격동이 지나고 나서 그해 8월 12일에 새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곧 문화정책이라고 해서 군사적 정치 행태를 벗어나는 정치개혁을 약속한다. 산업과 사회적 개혁도 약속한다. 그 정치적 변화를 천황의 선정조치라고 대서특필한다. 고문을 폐지하고 의료위생시설을 현대화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종교 자유 확대를 확인한다.

 하지만 사이토 총독은 부임한 뒤 처음 한 일이 비밀리에 조선에 육군병력 증강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통치상 당시의 병력은 과소하다는 것이고 그 독립운동 ‘소요’ 이후 조선 각도의 민심 안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가 나날이 거만해지고 있으니 조선인의 성질상 목전에 위력이 보여야 물러선다는 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육군병력은 통치상 과소하니 상당한 병력을 일본 본토에서 이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필로 쓴 ‘극비’문서를 동경에 보낸다. 이런 형편이면 육군 증파 문제에 국한하였겠는가. 선교사와 한국교회는 일제의 이런 시책을 ‘체계적인 기만’이라 맹비난하고 있었다.

 문화적 선정을 베푼다고 세계에 대놓고 약속한 일제가 바로 그 순간에 암암리에 군사 통치를 강화하려 하였다는 증거가 아닌가. 도덕성은 설 자리도 없었다.


식민통치에서의 비도덕성 ‘유곽과 아편’

3.1독립운동에서 교회는 도덕적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장 만연시킨 도덕적 폐해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의도적으로 만연시키고 확장시킨 도덕적 피폐와 그 병폐는 양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령 일제는 한국 도읍마다 유곽이라는 공창들의 집을 국비로 당시 50만 달러를 들여 세우고 있었다. 공창이 있는 거리를 홍등가라고 해서 번성시키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대세로 유명한 서북지방 선천에도 공창 유곽이 들어섰다.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박사는 가령 서울에서는 한국 남자 220명에 공창 1명 정도의 비율이라고 공개한 일이 있다. 이 비율은 통치 기간이 가면 갈수록 상승하고 있었다.

 아편의 실정은 땅을 치게 한다. 아편 생산은 정부에서 관할하였다. 행상인들도 아편과 모르핀 주사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한국 안에서 비도덕화는 총독부의 장려 후원 아래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한국인 선생님 두 분이 담임을 맡은 일이 있는데 두 분 다 ‘아편쟁이’였다. 그런 것이 일제 한국 통치의 뼈아픈 실상이다.  

 아편 생산은 1918년 2023관이었다. 그러다 3.1독립운동으로 격감하여 1920년에 41관으로 줄었다. 이 감산을 일제는 ‘처치를 잘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다시 늘다가 1929년에는 401관으로 상승한다. 총독부는 1929년에 아편생산과 판매를 전매청으로 옮긴다. 아편을 국가가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백주에 아편 판매에 바빴다. 총독부 수지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불성설이고, 그것만 가지고도 일제 한국 통치는 악마적 불의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체를 해체시키는 전대미문의 도덕적 대량학살을 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청청백일하에 자행하고 있었다. 문명과 인간, 그런 것을 완전히 떠난 악정이 대낮에 자행되고 있었다. 그 희생자는 몇 사람 중독자가 아니었다. 민족 그 전부였다. 


식민통치에서의 비도덕성/ 주초(酒草)

술 담배를 통해 우리 겨레의 도덕적 몰락 방조도 눈에 띄었다. 아홉 열 살 정도 어린이들의 흡연도 눈에 띄었다. 총독부의 주초 조세 비율 상승률을 보면 상처 깊어가는 우리 사회의 폐해가 가슴을 찌른다. 곧 1917년 11.5%, 1918년 13.91%, 1919년 33.1%, 1920년 39.98%였다. 국가 조세의 40%까지 주초세가 차지하게 했던 조선총독부의 범죄를 교회가 외면할 수 없었다.

 정치가 이렇게 악하면 교회가 뒷짐 질 수가 없다. 한국인의 심신을 흐리게 하고 해체시키는 그런 식민통치의 악정을 종식시켜야 했다. 3.1독립운동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일제가 공개 조장하는 아편 유곽 주초에 대한 저항이었다. 교회가 나서야 했다. 


도덕적 갱생으로서의 3.1독립운동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복음주의선교협의회는 개혁안을 제출한다. 그 항목 중 중요한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덕적 개선이다. 곧 관습 정서 인륜에 거슬리는 유곽의 폐기, 아편 모르핀 생산 제조 판매 금지, 주류 판매에 대한 법령 개정, 미성년 금주령을 일본 본토에서처럼 철저하게 실시하라는 것 등이었다. 이런 요구들은 일제의 의도적인 도덕적 폐습 조장 술책으로서 양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을 겪은 우리는 특히 정치의 도덕성에 예민하다.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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