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그리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오늘 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3.1운동 100년, 그 시대를 돌아본다
처음부터 우리나라와 민족의 실체였던 한국교회
잃어버린 거대한 민족적 신앙동력 회복해야


역사는 진실하다

모세는 그의 고별사에서 옛날을 기억하라는 말을 남긴다. 성서는 도처에 역사를 기록하라는 말을 한다. 역사에는 실체가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남기 때문이다.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왕조실록을 가장 오래 쓴 나라인데 네 가지가 있다. 곧 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이다. 역사에 일어났던 일은 수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확성을 기하노라고 네 가지를 쓰게 한 것이다. 무엇이든 대개 사방에서 보면 정확하다. 복음서도 사복음이다. 동서남북 춘하추동 연월일시 인의예지 건곤감리 그런 것들이다.  
 3.1독립운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특히 일제 한국통치 시대의 어간에 있었던 유일한 전 민족적 전국적 저항 독립운동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일제 군경이 그 계획진행을 몰랐고 같은 시간에 동시에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蜂起)하고 있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위대한 역사의 역할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주도한 것이다.


3.1독립운동 100년

역사는 한 100년쯤 지나서 되돌아보아야 의미와 가치가 크다. 정서적으로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3.1운동을 이제 냉정하게, 거리를 둘만큼 두고 바라보아야할 때가 온 것이다. 모세가 그 고별사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말한 뜻이 바로 여기 있다. 너무 역사가 가까우면 역사의 문맥에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이 목표

사실 3.1독립운동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랑할 것이 많다. 우리는 일제 치하 선정이나 참정 인도적 대우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과 똑 같이 대접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 같은 동급의 관리라도 봉급의 격차는 반토막이었다. 경찰 경부(警部)의 경우 일본인은 월급 133원 33전인데 한국인은 동급인데도 62원 50전이었다. 우리가 외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막바로 한국의 ‘독립’이었다.
 3.1독립운동에서 외친 한국의 독립이란 것은 당시로서는 번영 안정 인도적 대우 일본본토 일본인과의 동등한 대우, 그런 것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무조건 독립이었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 사람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나 죽으나 한번 우리들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우리가 이루어 나가는 그런 독립된 나라였다. 한데 당시로서는 일본 천황의 적자(赤子)로 은혜를 베풀고 인도적 정신으로 비추어 한국인을 선대하라고 한 소위 지식인들이 미국이나 일본 안에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3.1독립운동의 실상을 밝혀야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것은 나라라고 하는 것이 제나라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목숨을 내 놓을 만한 것인가를 확인해 주는 기회가 된 것이었다. 


교회는 사회의 실체이자 역사였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우리 나라와 민족의 실체 그것으로 우뚝 서 왔다. 그 존재가 그런 엄청난 인상을 처음부터 주어 왔기 때문에 더러는 한국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 일 것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더러는 게르만 민족을 몰아낸 훈족이 그 선조일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1888년은 기독교가 들어 온지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던 때이다. 우리나라에서 선교하던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이런 보고서를 낸다. 곧 “한국은 기독교의 열매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고 심지어 강대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 1000명 정도 때의 일이다. 1000명 정도의 기독교인의 열매 결실 행위 업적으로 보건대, 한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다는 예언이요 판단이었다. 믿음의 선조들이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런 말까지 들었을까.
 1909년은 1907년 정미조약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조정을 일제가 완전히 장악하였을 때이다. 그런데 바로 그해 미 국무성에 이런 글이 전달된다. 곧 “한국은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다.” 기수(旗手)는 그 팀을 대표하고 상징하고 선도하고 뭉치게 하고 선양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상징하고 대표하고 이끌고 뭉치게 하고 선도하고 선양하는 교회였다는 뜻이 아닌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1910년에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한국을 통치하는데 가장 우려되는 저해요소는 한국기독교회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는 한국 인구 1300만 명에 22만 명에 불과한 기독교인 곧 1.6%에 불과한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대대적인 기독교 괴멸정책을 전개한다. ‘105인 사건’이 그것인데 전국에서 지도자급 기독교인 700명을 구속하고 고문한다. 가혹한 고문으로  결국 105명을 실형에 살게 한다.


한국교회는 거대한 민족 동력 동원체제

3.1독립운동 때에 기독교인 인구 비례는 1.4%에 불과하였다. 1700만 인구에 기독교인 25만 명이었다. 한데 구속된 자의 40%가 기독교인이었다. 일제 군경이 소위 3.1독립 소요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였다는 증거이다. 이 거대운동의 주도세력이 기독교요 그 중심이 기독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회는 유일한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한국교회가 1907년 처음 독로회를 조직한 것이 한국의 전국적인 자발적 조직의 시작이다. 교회만이 전국적인 조직 곧 핏줄을 가진 유일한 실체였다. 한국을 상징하고 뭉치게 하고 선도하고 그리고 그 내재한 동력을 밖으로 치솟게 하는 유일한 메커니즘이 교회였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상징이요 그 대표였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우리교회가 소리치면 전국이 따를까.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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