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분재와 아름다운 蘭香 천리               


 

 

목 분재와 아름다운 蘭香 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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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종점 / 은방울 자매                           


  이 노래는 마포구 도화동에 살았던 작사가 정 두수선생이 발착을 알리는 구슬픈 종소리와 함께 서민의 애환과 정취를 싫어 나르는 전차가 사라진다는 아쉬움에 전차와 더불어 어느 두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얽힌 아련한 옛기억을 회상하면서 만든 노랫말에 작곡가 박 춘석선생이 곡을 붙혀 1967년 봄, 가수 은방울자매(박애경, 김향미)가 노래를 불러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노래가사는 마포종점을 바라본 한강을 낀 마포의 야경이 잘 나타나 있어 마포주변의 옛 모습을 회상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마포가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서민의 발이요, 애환을 실어 나르던 전차는 '마포종점'의 노래가 발표되던 이듬해 세월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19681130일 운행이 전면 중단된 전차는 그 당시로는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었지요. 지금은 불에 타서 복원중인 남대문을 기점으로 마포, 원효로, 영등포, 왕십리, 청량리, 돈암동, 혜화동에 전차 종점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서울의 도심이 여러곳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명동이 핵심 상권이었고 그밖에 동대문, 마포, 청량리도 중요한 상권에 속했습니다.

 

영등포는 당시 각종 공장들이 밀집한 공업단지로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따라서 영등포는 이농후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구직자들이 몰려들던 인구밀집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마포는 이농한 빈곤층들이 모여사는~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대표적인 달동네였지요. 이에따라 인적,물적 자원이 풍요로웠던 영등포에 수많은 유흥업소가 생기고, 급작스럽게 팽창한 신시가지 답게 범죄 발생 빈도도 당시에는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홍익대와 인접한 마포구 당인동의 서울발전소는 예전에 당인리 발전소라고 불렸습니다. 일제 치하인 1930년에 서울 외곽이었던 당인리에서 화력발전으로 전기 생산을 시작하며 서울특별시 발전의 동력 역할을 톡톡히 하였지요.

 

이후 시설 확충을 계속하며 성장하여 왔으나 지금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자 지역 주민들에게는 공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퇴출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지요. 지금도 존폐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2014년에는 폐쇄 예정이라 하네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지만 여의도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비행장으로 1958년 김포로 이전하기 까지 국제공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포종점 노래가 발표될 당시(1968)에도 미공군 기지로 사용되며 군용기들의 이착륙이 활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내리는 밤, 마포에서 건너다 보이는 여의도의 비행장 불빛이 쓸쓸하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시호(諡號)충무공( 忠武公)이순신

            

◈시호(諡號)충무공( 忠武公)이순신(李舜臣)◈

 

 지난(4월28일)은 이순신(李舜臣) 장군 탄신 4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무한한 애국애족 정신에 새삼 감사드린다.

나라가 유난히 어려운 올해 그를 기리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특히 국난이 그렇다.

임진왜란으로 망국 위기를 겪고도 유비무환 교훈을 무시해 병자호란을 당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며,

그 뒤에도 6·25 남침과 같은 참화를 치렀다.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맞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장군을 이야기할 때 이름 앞에 '충무(忠武)'라는 공신 호(號)를 먼저 부르는데,

다소 문제가 있다. 우리 역사에 충무라는 공신 호를 받은 이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열두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공신은 국가나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결국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왕조 시대의 공신 호를 아직도 쓰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의 공신 제도는 고려 초에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공신을 비롯해 28가지 공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충무는 무신(武臣)에게 내려준 시호다. 그 대표적 장수가 이순신이다.

즉 충무공은 이순신 한 사람만이 아니다.

충무공과 이순신을 같은 호칭으로 여기는 것은 역사 교육이 불충분했던 탓도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장 우성 화백의 표준영정)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시대에 셋, 조선시대에 아홉 명 있었다.

최초가 고려 개국 공신이자 강릉 최씨 시조인 최필달(崔必達)이다.

그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박병묵(朴炳默)과 공민왕 때의 명장 지용수(池龍壽)이다.


조선조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조영무(趙英茂)이다.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인물이다.

두 번째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인 이준(李浚)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 초에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웠다.

세 번째 충무공은 '소년 장수'로 유명한 남이 장군이다.

남이와 이준의 시호가 모두 '충무공'이니 공교롭다.


네 번째가 이순신 장군이다. 다섯 번째는 임란 때 순국한 김시민(金時敏)이다.

진주 목사로서 겨우 민군 3800명을 거느리고 7일 격전 끝에 2만여 왜군을 물리쳤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인 진주대첩이다.

여섯 번째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이후 여진족을 소탕했다.

일곱 번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에 참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웠다.


여덟 번째 충무공 구인후(具仁垕)는 인조의 외사촌 형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아홉 번째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는 광해군 때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참고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명이므로

 '충무공'을 이순신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단독으로 써서는 곤란하다.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무공 김시민'처럼 반드시 본명을 붙여야 옳다.


-황원갑 역사 소설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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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진미 설경구경하기-1


























               

영롱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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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 Dongsimcho (1959)                 

           

 


           

                                                      

                 




구멍난 양말을 꿰매신었던 그때 그시절 
구멍난 양말을 꿰매는 지혜로운 어머니

우리들의 어린시절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떨리도록 져러오는 싸~한~ 아픔이랄까? 아니면 너무도 그리운 늘 꺼내어 보고픈 아름다운 추억이랄까? 오늘따라 유난히 우리들의 초등학교 시절이 불쑥 생각납니다. 그 당시의 어머님들은 학교(學校)에 갔다 오면, 양말 꿰매는 것이 일과(日課)이다시피 했었다. 학교 교실 바닥이 나무 바닥인데다가 나무의 결도 그리 좋지 않아서 교실을 걸어 다니면 양말이 튀어나온 나무결에 걸려 찢어지기도 했고, 날카로운 나무가시에 발이 찔리기도 했었다. 멋지고 이쁘다는 엄마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구제품의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얼레리~ 꼴레리~"라는 친구들의 그런 놀림을 받고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땡깡을 부렸던 그런 기억도 납니다.

날이 추우면 발이 시러워 고무신 안에 짚을 넣어 신었다. 발까지 피가 잘 돌아야 단잠을 잘 수 있고 발이 추위 얼었다면 바로 동상이 걸리기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또 검둥 고무신조차 너무 귀해 웬만큼 헤져도 꿰매고 또 꿰매어 바닥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신고 다녔다. 때문에 아침에 꿰매어 신고 간 고무신이 하학(下學)길에는 다시 헤져서 ‘왕모래’가 신발 가득 스며들기도 했다. 이 경우는 기워 신은 헌 양말이 모래와 마찰(摩擦)되거나 양말 안에까지 모래가 들어가 ‘빵꾸’가 나기 일쑤였고, 발가락을 파먹기까지 했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면, 발이 시리더라도 양말을 벗어 책보에 싸들고 귀가(歸家)하는 경우가 많았다. 밤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어머니가 덧대어 꿰매 준다지만 꿔매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수십번 꿰매대니 나중에는 양말 모양이 이상하게 되기도 했고 아이들이 놀린다고 그 양말 신을 자식들이 아니지요. 그렇게 그 양말은 어느날 슬그머니 아궁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답니다.


 

 

겨울이 되면 그때 혹독했던 추위와 유행했던 나일론 제품들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너무 좋은 옷과 양말이 많아 추위에도 외출 걱정이 없답니다. 요즘 누가 헤진 양말를 신고 다니던가요. 가격도 저렴하고 흔하고 흔한 게 양말인지라 조금만 목 부분이 늘어나거나 닳아서 헤어지면 버리고 새 양말을 신지 않습니까. 까마득하게, 그러나 또렷이 발뒤꿈치 헤어진 나이론 양말을 두 겹 세 겹 기워서 신고 다니던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히려 발바닥을 여러 겹 기운 양말은 맨발로 다니던 나무 마루바닥에 미끄럼 타기가 더 좋아서 함부로 미끄러지며 좋아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이 추억으로 잠시나마 스쳐갑니다. 그러나 눈앞이 흐려지며,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헤어진 양말 이 주는 상징성과 주소지를 옮기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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