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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의 소련군

            


 

동부전선의 소련군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기습공격을 해옵니다.

물론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소련은, 독일의 침공계획을 날짜, 규모, 이동경로까지 모조리 알고있었지만

스.탈.린 한사람의 무능함과 안일함, 그리고 얼마전에 있었던 '예조프시나 - 대숙청' 로 유능한 지휘관을 상실한 상태였죠.

더군다나 스탈린은 '설마 히틀리가 침공하겠냐' 하면서 대비조차 안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하루만에 소련공군이 거의 궤멸당했고

기습공격에, 가뜩이나 없는 지휘능력, 더 능력없는 국가원수 때문에 공격 첫날부터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공군비행장을 폭격하려 나섯던 독일군 파일럿은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시작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보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엄청난수의 소련병사들 -1941년-

 

 

포로로 붙잡힌 소련전차병.

독일장교는 그를 심문하지만, 전차병은 증오스런 눈빛으로 장교를 노려보기만 합니다.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것은 거의 일상이 되었고

남아있는 소련군들도 후퇴하거나 스탈린의 'Hold' 명령으로 죽을때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햇죠.

 

특히 독일군의 '전격전'은 소련군의 혼을 완전히 짜내기에 충분했고

1941년 동안 소련의 광활한 들판은 독일 기갑부대의 레이싱 경주장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속에서도 소련군 지휘관들은 이렇다할 반격작전을 시도하지 못했는데,

일단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매우 빨랐고

소련군 자체의 전투력이 독일군보다 훨씬 떨어졌으며,

무슨 작전을 구상하려고 하면 스탈린이 이것저것 간섭했으므로

제대로된 반격작전을 구상하지 못했다는거죠.

 

물론 모든 소련군들이 대책없이 녹아내리기만 한건 아닙니다.

그중 우크라이나 쪽을 담당한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다른지역의 독일군보다 진격속도가 더뎠는데,

이유는 우크라이나, 남서쪽 지역은 소련의 곡창지대이자 중요지역이기에

이곳의 소련부대들은 비교적 훈련이 잘 되있고, 독일군의 포위공격을 잘 피해가며

효과적인 반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늦추는 역할을 했기때문이죠.

 

하지만 무서운속도로 진격해오는 독일군은 조금씩-혹은 뭉텅이로- 소련땅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모스크바로 가는길을 거의 뚫렸고, 후퇴하던 소련군들은 모스크바쪽으로, 혹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퇴각합니다.

 

 

전선으로 행진중인 소련병사들. -1941년-

 

'10월쯤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 라는 히틀러의 예상이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는상황에서,

히틀러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게됩니다.

 

즉 모스크바까지는 이제 한걸음이고, 그전에 우크라이나에 갇혀있는 소련군들을 먹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실제로 독일군은 모스크바까지 얼마 남겨두지도 않은상태였고, 소련군의 사기는 땅을파고 기어내려갔으며

키예프에 엄청난수의 소련병력이 후퇴한 상태였죠.

 

당시 독일군은, 싸울의지가 완전이 사라진 소련군은 그냥 내버려두고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자고 했지만

히틀러는 이 엄청난 숫자의 소련군을 먹어치워야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킨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키예프로 진군을 명령합니다.

 

물론 키예프를 점령하면, 그곳에 남아있던 엄청난숫자의 소련군대를 붕괴시킬수 있을뿐만아니라

카프카스 유전까지 손에 넣을수있기에, 아주 틀린생각은 아니죠.

하지만 키예프를 치는동안 소련은 모스크바를 요새화할것이 뻔했고,

만일 키예프전선이 정체된다면  다가오는 겨울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모스크바 점령' 이 독일군의 가장 큰 목표였는데 말이죠. 

 

하지만 히틀러는 결국 키예프공격을 명령했고

키예프에서 방어하던 소련군은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게됩니다.

이 키예프 전투는 '2차대전중 독일이 거둔 가장 큰 승리' 라고 전해지고있죠.

 

하지만 소련군은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진것은 아직 아니였습니다.

독일이 키예프를 공격하느라 한눈파는사이 소련측은 재빨리 모스크바를 요새화시킵니다.

즉 키예프에있던 대병력을 독일에게 헌납(?)하는 댓가로 귀중한 시간을 얻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거죠.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1941년-

 

독일이 키예프를 점령한뒤 모스크바로 진격할때는, 이미 소련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상태였습니다.

수많은 대전차참호와 대전차포, 지뢰, 그리고 '겨울'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소련군은

전투전, 붉은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높히려는 목적이였겠지만, 당시 소련의 승리를 짐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겨울이다! 진격!'

 

어쨋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공격햇고, 서서히 모스크바의 숨통을 조여가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겨울추위,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과,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 때문에 공격속도는 점점 늦어졌고,

결국 공격3개월만에 독일은 모스크바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사실상 개전이후 소련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모스크바는 한숨을 돌리게?고, 소련군의 사기도 다시 높아졌습니다.

 

독일이 잠시 주춤해지자, 소련군은 대반격으로 '툴라' 같은 도시들을 탈환하기도 하죠.

 

하지만 독일역시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 공격실패이후 독일이 잠시 주춤한것은 사실입니다만

빠른속도로 전선을 안정화했고, 다시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독일군부에서는 코카서스유전, 볼가강을 점령하여

소련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코카서스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는 볼가강을따라 소련 전역으로 배분?으며

볼가강을 점령하면 소련경제는 말라죽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탈린'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이 도시는 상징적으로도 중요했죠.

 

결국 독일은 1942년 5월, '청색작전' 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실시합닌다.

즉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게 된거죠. 스탈린그라드로 가는길은, 독일에게는 순조로웠습니다.

수많은 소련부대가 포위,섬멸당했고 대부분의 반격역시 쉽게 제압했기 때문이죠.

 

 

독일군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소련군 공병-1942년 겨울-

 

하지만 도시로 진입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소련군 지휘관인 '추이코프'는, 전형적인 시가전으로 독일군에 맞섰고

좁은 도시에서 독일군은 적절한 탱크를 활용하지못한채, 보병vs보병전에 휘말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이 자랑하던 기동력은 건물의 잔해에 막혔고

독일군이 자랑하던 탱크는 소련군이 던진 화염병에 불타올랐습니다.

특히 '바실리 자이체프'같은 유명한 소련 저격수들의 활동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죠.

 

하지만 소련역시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은 서서히 도시를 점령하기시작했고,

또다시 소련군을 상대로한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마마에프고지, 붉은10월 바리케이트공장, 트렉터 공장 등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스탈린 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자랑하던 공중지원,포병사격을 제대로 할수없엇는데,

이유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너무 근접해서 전투를 별였기 때문입니다.

 

추이코프는 독일군이 강력한 이유가, 포병과 항공지원때문이라는것을 꿰뚫엇고

병사들끼리 근접전을벌이면, 독일군은 포병지원을 받을수 없기 때문이엿죠.

 

 

시가전을 벌이는 소련군 -1942년-

 

소련군에게 있어서 전선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볼가강 강변만을 남겨둔채 도시전체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합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더이상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의 저항은 무지막지했습니다. 남은 동료들이 모두 죽어도 최후의 일인이 끝까지 독일군에게 저항한 사례는

그리 어렵지않게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점점 의기소침해졌으며 전선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아있던 제 62군은 민간인,노동자 등을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냇으며,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건물에서는

여전히 소련군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다행히, 시베리아에서 온 증원군이 대기중이였고, 제2 친위사단 병사들이

62군과 합세해 방어를 계속 이어나갔죠. 독일군은 더이상 진격할수없었고, 소련군은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강해졌습니다. 이미 볼가강 건너, 소련군의 증원군이 모여들었고, 독일군이 거의 점령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기위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고있었죠. 반면 독일군의 상황은 그리 좋지못했습니다.

엄청난추위와 소련군의 저항, 거기다 히틀러의 '후퇴불가'명령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했고

지휘관들은 끝날것같지않은 이 전투때문에 골머리를 않앗다고 합니다.

 

결국 소련군은 대반격을 시작합니다. 먼저 강력한 독일군은 남겨두고, 시원찮은 독일의 동맹국-이탈리아,루마니아 등등..

을 먼저 공격합니다. 예상대로 순식간에 박살난 동맹국 군대는,소련군에게 진격을 허용했고, 독일군이 미처 손쓰기도전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재 포위합니다.그리고 소련군은 최후의 공격으로 '쇠고리 작전'을 실시합니다.

 독일군은 강력하게 저항햇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로인해 서서히 도시로 밀려들어갓고, 결국 1943년 2월에 결국 항복하죠.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긴 전투였습니다.

수백만명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독일이 앞으로 전투를 수행할때 필요한 전차,항공기등을 이 전투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독일군에게 있어, 더 큰 손실은 바로, 앞으로의 작전시 히틀러가 지휘권을 갖게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다지 군사적재능이 뛰어나지않은(정확히는 형편없는) 히틀러가, 한명의 의견이 아까운 현 시점에서 직접 지휘를 한다는것은

어떻게보면 독일군의 어두운앞날을 암시하는것이죠.(그럼에도 소련군,연합군의 진격을 예상보다 3달이나 지연시킨

독일 장군,병사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더 재밌는것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태도가 서로 바뀌었다는겁니다.

전쟁초기, 스탈린은 자신의 형편없는 군사지휘력을 과대평가하여, 작전시 이것저것 참견했다가

결국 모스크바까지 위기에 처하는 아찔한(?)경험을 했죠.그러다 결국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인정하고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넘긴데반해, 히틀러는, 위에쓴데로 군사지휘권을 자신이 통솔하게되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끝난이후, 소련군은 하르코프에서 다시 반격작전을 시도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입은피해만큼의 피해를입고 결국 물러나게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독일군에비해 소련군은 엄청난수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 숫자는 독일군의 몇배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소련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게아니라, 패배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햇다는겁니다.

소련군의 병력충원능력은 대단함을넘어 경이로울정도로, 어느날 한개의 사단이 전멸당하면, 다음날 바로 보충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했을정도였습니다. 소련이 가지고있는 엄청난숫자의 인적,물적자원은, 독일에게는 없는 소련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압도적인 숫자로 독일군을 밀어붙여 전쟁에서 승리하게된는, 가장 큰 힘이됩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군은 질적으로도 향상되며, 전쟁후반이 되면 독일군과 대등한-혹은 약간 우수한- 무기와

전술로, 소련을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망을 무참히 깨뜨리죠.(물론 전쟁내내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본건 안자랑)

 

 

 

전투전, 작전을 구상하고있는 소련군전차병들 -1943년-

 

1943년이되자 소련군의 반격은 점점 거세졌고, 독일군의 전선은 계속 축소?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아직 죽지않아서, 여전히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을 훌륭히 막아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다시 전세를 역전하기위해 작전지도를 펼쳐들었고, 소련쪽에서 혹처럼 튀어나와잇는 '쿠르스크'를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작전은 소련의 정보요원들에게 노출되었고, 곧 소련군은 방어준비를 합니다. 쿠르스크 외각으로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으며, 이곳에는 대전차포대, 대전차참호, 지뢰밭등 강력한 방어선이 건설?습니다. 문제는, 독일군은

자신들의 계획이 소련군에게 노출되고있다는걸 알지못했고, 소련군의 대병력이 은밀히 전투준비를 한다는것도 알지못했습니다.

 

더욱이 독일군은 5월경에 시작한다는 '성채작전'을, 북아프리카전선에서의 패배로 7월로 미뤄야했고, 결국 소련군에게

더욱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줍니다.

 

이윽고 7월5일, 독일군의 강력한 기갑부대는 쿠르스크를 향해 돌진해옵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튼튼한 방어선에 엄청난피해를 입어야했고, 41~42년에 보여주었던 무서운 기동력을 보여줄수없게 됩니다.

결국 공격5일만에 독일군은 예상외의 대피해를 입었고, 잠시 물러나야했습니다.

 

 

진격중인 소련지상군 -1943-

 

진격할때마다 큰 피해를 본 독일군은 '프로호로브카'라는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3일뒤 도착한 소련군 전차부대와 격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는 '인류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루만에 수백대의전차가 박살난, 악명높은 전투로 기록됩니다.

수천대의 전투기가 출격했고, 수백대의 전차들이 초 근접전을 벌이며, 서로 들이받고 뒤엉키며, 탈출한 전차병들은 상대전차병들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난사하며 무자비하게 싸웠다고합니다. 결국 이 전투로 독일은 더이상의 공격작전을 수행할수 없을정도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죠.

소련역시 그 피해가 심각하여, 더이상 진격을 못햇다고합니다.

 

얼마전에 보니까 쿠르스크전투때, 사실상 패배한것은 소련군이라는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독일군전차는 600대라고 하는데, 사실 프로호로브카 에 배치?던 독일군전차는 200대 정도였다네요.

이 전투에서 700대의 전차가 파괴?다고하는데....

독일군 전차가 200대라는게 맞다면

그중 파괴된 전차를, 아무리 심하게 잡아봐도, 대충 100대라 치면..

그럼 나머지 600대는 소련군 전차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어쨋든...그때 읽어본 기록에서 보면, 사실상 궤멸직전으로 몰린건 소련측이였고

독일군은 그 소련군을 잡아먹기위해 출동준비를 했지만,

시실리섬으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히틀러가 동부집단군을 전투에서 빼냈다고합니다.

결국 독일은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해야했고, 소련은 만신창이가 된채, 승리햇다는 소리죠.

 

 

"복수의 시간이 왔다!" 포격중인 155mm포 -1943~44년-

 

하여간 독일군의 힘은 약해졌고,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합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점령하고잇던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독일군은 밀어붙였습니다. 독일군의전선을 계속해서 축소되었지만, 히틀러는 '후퇴불가'만 외쳤고,

결국 수많은 독일군부대가고립, 궤멸당합니다. 소련군은 세바스토폴 요새를 탈환했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도 풀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독일의 동맹군중에서 '가장'강력한 핀란드를 공격했고, 파르티잔을 이용해,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 전력을 약화시켰죠.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독일군은 어떻게라도 반격을 해야햇지만, 이미 쿠르스크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터라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을 '완전축출'할 작전을 구상하고 있엇습니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국가존망의 위기까지 겪었던 소련은, 독일에게 복수한다는 의미로

1944년 6월22일, 날짜만 같은날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시합니다.

사방에서 발빠르게 진격하는 소련군과는 달리, 독일군은 소련의 거짓정보와, 파르티잔의 방해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할수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습니다. 60만명의 인명피해와, 2000대의 탱크, 그보다 더 많은수의 무기들까지, 이 전투로 독일군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고, 결국 서쪽으로 패주하게 됩니다.

소련역시 독일군보다 많은피해를 입었지만, 독일에게 없는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주며 독일군을 추격했죠.

 

이제 소련본토에서 독일군은 '완전축출' 되었으며 핀란드,루마니아 등을 공격,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

 

"베를린으로!" -1944년-

 

소련은 독일군을 추격하여 동유럽국가를 공격, 수중에 넣엇으며 폴란드로 진격햇습니다.

독일군의 전선은 급속히 축소되엇으며, 수많은 포로,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히틀러는 거의 광적으로 자신의 지휘관을

질타,해임햇으며, 결국 훌륭한지휘관을 제손으로 밀어치운꼴이 ?죠.

당시 독일군의상황은 최악이였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성공, 프랑스땅을 점령해갔으며

이탈리아군은 일찌감치 항복해버렸죠. 사실상 혼자서 연합군.소련군을 상대해야하는 독일의 앞날은 매우 어두웠고,

전세를 뒤집어보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예를들어 벌지전투), 결국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지못하고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하여튼 당시 소련군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바그라티온작전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엄청났고, 보충하는데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햇던 것이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독일이 바르샤바봉기때문에

정신이팔린틈을타서 잠시 여유를 얻었다는것 정도. 독일이 간신히 바르샤바봉기를 진압하자,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진입,

다시 점령하게됩니다.

독일군은 용감하게 반격하지만 소련군은 파도처럼 달려들었고, 독일본토로 점점 다가가고있었습니다.

 

 

민간인을 징집해 조직된 '국민돌격대' -1944~45년-

 

연합군과 소련군이 독일본토로 진출하였습니다. 이제 전쟁초기,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루프트바페의 날개는 부러졌고

독일군의 자랑이였던 전차부대는, 한낱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렷습니다. 하지만 나치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전쟁은 계속됫습니다.

싸울 병력이 부족해지자 히틀러는 징집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년부터, 40세이상의 중년층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습니다.

그들은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소련군대와 싸워야햇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련군보다는 '자비로운' 연합군쪽으로 투항하기위해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독일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않았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능한 지휘관과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수잇엇지만, 그들역시 자신들이 패배할것이라는것은 알고있었습니다. 반면 히틀러는 거의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엿다죠.

용감하게 싸우는 병사들이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붉은군대는 그들을 무참히 부수고 결국 베를린 동쪽에 진입하게 됩니다.

 

 

베를린 -1945년-

 

이제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입했습니다. 소련포병대의 포격이 베를린을 불바다로 만들엇고, 수많은 소련병사들은 히틀러를 잡기위해

베를린을 공격했습니다. 전투는, 말그대로 '생지옥'이였습니다. 양측모두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앗으며 무시무시한 전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습니다. 독일병사들은 3년전,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그랫던것처럼 지하도, 건물잔해 속에 숨어서 전투를 계속했고,

소련군은 화염방사기로 그들을 불태우거나 직접가서 사살했습니다. 독일군은 맹렬하게 저항햇으나,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헛된것이 되었고,

'히틀러에게 충성' 하느니, 가족들과함께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독일군의 침략을 당했던 소련군은, 독일군이 그랬던것처럼 독일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햇고, 포로는 모두 총살햇습니다.

 

소련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지만, 계속해서 공격햇고, 결국 독일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국회의사당 내부에서도, 남아있던 SS무장친위대 들과의 잔인한 근접전이 기다리고있었죠.

하지만, 소련군은 그런 친위대들의 저항을 무찌르고 결국 붉은깃발을 국회의사당에 휘날리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소련군은 베를린에서 -혹은 그 이전부터 - 잡은 포로들을 시베리아 포로수옹소로 보내버렸고,

그곳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은 극소수라고 합니다.

 

 

국회의사당 위의 소련군 -1945년-

 

 

전투가 끝난뒤 '브라덴부르크 문' 앞에서 잡담하는 소련전차병들 -1945년-

 

독.소 전쟁은, 2차대전당시 가장 참혹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말그대로 '대 학살극' 이였습니다.

'국가' VS '국가' 가 아니라 '게르만족' VS '슬라브족' 의 '인종싸움' 이였기 때문이였죠.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하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끔찍한 결과물이엿습니다.

 

동부전선에서의 싸움은, 사실상 2차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하고 거대한 전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것 같더군요....

 



역사적으로 살펴본 맹수들

                 

 




역사적으로 살펴본 맹수들 

 

호랑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혼자 살아간다. 수컷은 교미가 끝나면 제 영역으로 돌아가고, 새끼 역시 생후 2년이 되면 어미에게서 냉혹하게 쫓겨난다. 피를 나눴다 하더라도 아비의 영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할 수 있다.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이다. 망막에 색깔을 감지하는 원추세포는 없지만 명암을 느끼는 봉세포가 많아 희미한 빛만으로도 물체를 판단할 수 있다.

 

 

호랑이는 북방기원설과 남방기원설이 있다. 북방기원설은 호랑이가 500만~200만 년 전 시베리아,  동북아시아 만주와 한반도 등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후 1000년간 기후 변화로 먹잇감인 초식동물들이 남하하자 호랑이도 따라 내려가면서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와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았지만 인접한 스리랑카나 일본 등에는 호랑이가 없다. 이미 대륙에서 섬이 분리된 뒤에 호랑이가 남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반면 남방기원설은 호랑이가 인도차이나에서 발원해 실크로드의 생태 통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등으로 퍼졌다고 본다. 한반도에는 1만2000~1만1000년 전쯤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호랑이는 원래 단일종이지만 지역에 따라 8개 아종(종을 세분한 분류 단위)으로 구분된다. 시베리아호랑이·중국호랑이·인도지나호랑이·벵골호랑이·수마트라호랑이·자바호랑이·발리호랑이·카스피호랑이 등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학술적으로 그중 최대 아종인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에 속한다. 이전엔 조선호랑이·만주호랑이 등으로 부른 적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들이 국경을 달리할 뿐 형태나 습성엔 차이가 없다고 보아 단일명칭을 쓰기로 했다. 시베리아호랑이의 수컷은 전장(주둥이 끝~꼬리 끝)이 3m를 웃돌아 남방산 중 덩치가 크다는 인도 벵골호랑이(285㎝)보다 크다. 한국의 호랑이는 밝은 황갈색의 푹신한 모피에 적당히 성긴 검은 줄무늬, 흰 이마에 새겨진 뚜렷한 임금 왕(王)자 등 늠름한 기품을 뽐낸다. 야생에서의 수명은 약 15년. 호랑이는 한 골짜기에 한 마리만 산다는 말이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300㎢당 1마리가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루에 80~100㎞를 걸으며 영역을 순찰하고, 보폭은 약 80cm다. 멀리뛰기 4~5m, 높이뛰기 2m. 10m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능력도 있고 사냥감을 덮치는 순발력도 대단하지만 전력질주할 수 있는 거리는 300m 정도로 지구력이 약한 편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목표물의 10~15m 근처까지 포복해 접근한 뒤 미동도 없이 머무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한다. 그러나 사냥 성공 확률은 20%. 첫 공격에 실패하면 대개 재시도를 하지 않는다. 초식동물들의 뜀박질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흘쯤 굶는 일도 다반사다. 대신 큰 짐승을 사냥하면 한꺼번에 포식한다.

 

 

청동기~초기철기 유적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가 가장 오래된 호랑이 표현이다.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 등이 14마리 나온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는 서쪽 방위를 지키는 신수(神獸)로서 백호가 나타난다. 좌 청룡·우 백호·남 주작·북 현무의 사신 중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상상의 동물이다. 신라에선 십이지를 형상화한 토우의 하나로서 호랑이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백제 유물로는 5~6세기께 제작된 남성용 소변 용기 '호자(虎子)'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에는 석호(石虎)가 배치돼 있다. 정식 왕릉에는 2쌍, 사후(死後) 왕으로 추존된 경우엔 1쌍이 설치된다. 살찐 몸집에 얼굴이 큰 가분수형에 동그란 눈, 매부리코, 귀밑까지 올라간 입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민화에도 많이 남아 있다.

 

 

* 배경 지식 (네이버, 다음, 야후 백과사전 인용) *

 

시베리아호랑이 [Siberian tiger]

시베리아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는 호랑이아종으로 아무르호랑이, 한국호랑이, 백두산호랑이 등으로도 불린다.

몸길이 수컷 2.7∼3.3m, 암컷 2.4∼2.75m, 몸무게 수컷 180∼360kg, 암컷 100∼167kg이다. 같은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는 없으며 한 호랑이 안에서도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줄무늬가 각각 다르다. 털빛깔은 황갈색이고 여름에는 다소 짙어지나 대체로 남방계 아종보다 엷으며, 몸 아래쪽의 흰 부분이 보다 넓다. 여름털은 짧으며 겨울털은 길고 빽빽하다.

1900년 무렵에는 한반도를 비롯해서 만주몽골 북부, 러시아 남부에 걸쳐 분포했었다. 남한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무차별 포획으로 1920년대 이후 생식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러시아 극동 남부의 하바롭스크 크라이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에만 남아있고, 만주북한에 극소수가 남아있다. 1930년대에는 야생의 개체수가 50마리 이하까지 감소했었으나 그후 수가 늘어 2005년에는 431마리에서 529마리까지로 예상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방도 시베리아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을 당시에 시베리아 호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지나,[출처 필요] 오늘날과 같이 극동지방을 시베리아에서 제외시키는 것으로 보면, 시베리아 호랑이는 그 이름과 달리 시베리아에 살았던 적이 없으며, 현재도 살고 있지 않다. 등은 짙은 적황색, 불규칙한 검은색 줄무늬가 많다. 배에는 갈색 반점이 매우 두드러진다. 가을털은 여름털에 비해 짧고 옅으며, 수염은 순백색이다. 얼굴에 있는 임금 왕(王)자가 특징이다.

 

「밀림 이야기 - 시베리아 호랑이 3대의 죽음」

EBS 다큐멘터리, 2003.8.14 ~ 15 방영

21세기 웅진학습백과사전 16권 '생물인체 2'

한국의 자연탐험 1권 '백두산'

 
 

 

 

바바리사자 [Barbary lion]

고양이과의 포유류. 몸길이 2.7∼3.3m, 몸무게 220∼270kg. 모로코이집트 바바리 지방에 서식했던 대형 사자로 1922년에 멸종했다. 털 색깔은 검은색이 도는 황갈색을 띤다. 갈기가 가슴과 배 밑까지 이어진 긴 털이 특징이다. 북아프리카 일대의 삼림지대에 널리 서식하던 바바리사자는 로마 제국시대 콜로세움 대경기장으로 많이 포획되어 검투사들과 싸웠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에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바바리사자는 거의 전멸했다. 마지막 생존지는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이었다.

 

케이프사자 [Cape lion]

바바리사자 못지않게 몸길이 2.2~3.3m, 몸무게 250~350kg의 큰 체격을 자랑하는 케이프사자는 귀에 독특한 검은색 털이 있고, 바바리사자와 달리 가슴에는 긴 털이 없다. 케이프(Cape)주에서는 1858년, 나탈(Natal)주에서는 1865년에 멸종했다.

주요 분포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며, 특히 케이프주와 나탈주에 서식했다.

케이프사자의 박제는 독일 슈트트가르트박물관과 비스바텐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서식지역의 특성상 사자는 초원에서 유리하고 호랑이는 밀림과 물속에서 매우 유리하다.

물을 싫어하는 사자에 비해 호랑이는 물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땅에서만 활동하는 사자에 비해 호랑이는 표범처럼 큰 나무나 급한 산비탈 혹은 바위도 잘 오르내린다.

집단생활하는 사자에 비해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한다.  

  

 

베르그만의 법칙 [Bergmann's Rule] :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항온동물은 같은 종일 경우 추운 곳에 살수록 일반적으로 몸의 크기가 크다는 법칙이다. 19세기 독일의 생물학자 베르그만(Karl Georg Lucas Christian Bergmann, 1814~1865)이 주창했다.
 
항온동물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추운 곳에 사는 항온동물일수록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으로 발산되는 몸의 열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더운 곳에 사는 항온동물의 경우 물질대사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열을 주변으로 발산해야 한다. 열의 발산은 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데 몸의 표면적이 좁을수록 발산하는 열의 양이 줄어든다. 몸의 크기가 커지면 몸의 총 표면적은 늘어나지만, 몸의 부피에 대한 표면적은 줄어든다. 수치로 계산해보면, 몸의 가로, 세로, 높이의 길이가 두 배가 될 때 부피는 8배로 늘어나는 반면, 표면적은 4배로 증가한다. 따라서 추운 지방에 사는 항온동물은 몸의 크기가 클수록 체온유지에 유리하고, 더운 지방에 사는 항온동물은 작을수록 유리하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양영순의 '학습마나')
   
 

불곰 (Ursus arctos laciotus)

식육목 곰과에 속하는 동물. 알래스카 코디액섬에 서식하는 알래스카불곰(코디액불곰) U.a.middendorffj는 몸길이 2.8m, 몸무게 700㎏ 이상이 되나, 유럽불곰 U.a.arctos는 200㎏ 미만이다. 이것은 북쪽에 서식하는 것일수록 몸이 커진다고 하는 베르크만 규칙에 들어맞는 예이다. 털은 주로 갈색이지만 적갈색·흑색인 것도 있다. 불곰의 분류에는 불곰을 1종으로 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이것의 아종으로 하는 것, 알래스카불곰과 회색곰을 독립시켜 1속 3종으로 하는 것, 회색곰만을 독립시켜 1속 2종으로 하는 것 등이 있다. 어릴 때는 나무타기를 잘 하지만, 자라면 그다지 능하지 않다. 땅 속에 판 구멍이나 나무의 빈 구멍 속에서 월동한다. 암컷은 겨울잠을 자는 기간인 12∼1월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주로 나무열매나 벌 등을 먹는데, 연어 등의 어류도 즐겨 먹는 잡식성이다. 유럽에서 시베리아, 나아가 베링해를 넘어 북아메리카까지 널리 분포한다.

 

 

 

회색곰 (灰色- Ursus arctos horribilis)

식육목 곰과 포유동물. 몸높이 90∼105㎝, 몸길이 180∼240㎝, 몸무게 160∼500㎏이고 갈색곰의 한 아종이다. 몸빛깔은 황갈색 또는 암갈색인데 털끝이 흰 빛을 띠어 서리가 내린 듯이 보인다. 머리가 비교적 크고 이마가 높으며 어깨 부분이 높게 솟아 있다. 헤엄을 잘 치며, 다른 곰에 비해 나무타기를 못하지만 어린 곰은 잘 오른다. 야행성이나 낮에도 활동하며 행동권이 넓다. 잡식성으로, 나무열매·풀 외에 곤충류·파충류·물고기·사슴 등을 잡아먹는다. 4∼5살이 되면 성숙하며 번식력이 낮아 2∼3년 마다 2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산악지대의 삼림에 서식하며 주로 알래스카에서 캘리포니아 일대 및 로키산맥에 걸쳐 분포한다.

 

 

 

 

  

호랑이 Vs 사자 (작성자 : 김진우)

 

 

고대 로마의 황제조차도 궁금해했다는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


 

먼저, 키는 사자가 크고 늘씬하지만 체격은 호랑이가 크고 무겁다.


사자와 호랑이의 힘은 모두 단단한 근육에 쌓인 골격에서 나오며 어른의 엄지손가락 만한 송곳니의 힘은 가공할 정도다.


힘과 공격무기에선 양자가 백중한 편이지만 공격력과 잔인성에선 호랑이가 한 걸음 앞선다.


호랑이는 먹이를 철저하게 확인해서 죽이는 습성이 있는데, 이런 점이 싸움에서는 앞선 지구력으로 나타난다.


기습방법에 있어서도 호랑이가 보다 나은 편이다.


호랑이의 경우 짐승을 습격할 때는 대상에 상관없이 용의주도하며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라도 혼신의 힘을 다한다.

 

먹이를 놓치면 수십 킬로미터를 쫓아가서 기어이 죽일 정도로 끈기와 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스피드는 사자가 빠르다.


사자가 평균 시속 64km이고 호랑이는 45∼50km 정도다.


스피드를 내세운 사자의 먹이사냥은 확실히 왕자다운 모양새가 있다.


먹이를 쫓아가다가 20m 정도 가까이 도달했을 때, 갑자기 전속력으로 치달아 앞발과  송곳니로 쓰러뜨린다.


반면, 호랑이는 먹이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숨어서 끈질기게 기다렸다 4∼5m를 점프하며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 넘어뜨리고

 

일격에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놓는 습성을 가졌다.


이 때의 충격으로 왠만한 동물의 골격은 으스러져 버린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습공격의 성공률은 98%에 이른다고 한다.


사자와 호랑이는 똑같은 고양이과에 속하면서도 개성이 다르다.


사자는 5∼10마리씩 집단생활을 하고 호랑이는 혼자서 고독한 생활을 한다. 기껏해야 두 마리 정도다.


사자는 물을 꺼리는데 반해 호랑이는 물을 좋아한다.


호랑이의 공격력은 물 속에서도 단연 빛을 발한다.


머리만을 내놓고 헤엄치는 실력은 육지동물에서 으뜸에 속한다.


사자가 더위에 강한데 비해 호랑이는 영하 30℃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그만큼 지방과 근육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왠만한 외부의 충격정도는 흡수할 수 있다.


사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이나 갑작스런 추격이 없으면 좀처럼 맹수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호랑이는 생후 1년 반이 되어 독립하면 자신을 길러준 어미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정도로 성격이 잔인하다.


학자들의 의견, 동물 관계 문헌 등을 참조해 보면 사자는 단체전·스피드·더위 등에서 앞서지만


호랑이는 공격력·기습력·잔인성·물에서의 싸움능력·지구력·추위 등에서 단연 강하다고 한다.


또한,사자는 싸움에 있어서 앞발로 후려치는 것이 주공격이며 이빨로 무는 것은 보조수단 정도인데,


호랑이의 경우 일격에 먹이의 숨통을 단숨에 끊을수 있는 훨씬 강력한 이빨과 턱을 가지고 있으며

 

앞발의 휘두름 또한 그 힘에서 사자에게 밀리지 않기 때문에 호랑이가 1:1 에선 우세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활동량에서도 단독생활을 하기 때문에 반경 1000Km 을 영역으로 삼는 호랑이와


단체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루 16시간을 잠자는 습성의 사자는 처음부터 비교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근육량과 밀도에서 호랑이가 우세한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


실제로 로마시대 콜로세움에 사자와 호랑이를 집어넣어 싸움을 붙였지만 사자가 졌다는 기록이 많다. 


7:3 의 비율로 호랑이가 승리했다는데, 그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보다 약한 카스피 호랑이었다고 한다.


덧붙여, 동물들에게는 포식자를 알아보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호랑이를 풀어놓으면 왠만한 동물들은 가만히 서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BBC 나 내쇼널지오그래픽 등의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최강의 고양이과 동물"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오직 시베리아 호랑이일 뿐이다.


- 인도의 뱅갈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은 실제로도 여러번 벌어졌다.


- 자료를 보면 뱅갈 호랑이가 이겼다고 나와 있는데,


- 시베리아 호랑이는 뱅갈 호랑이보다 훨씬 크고 잔인하다.


- 미국의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먹이사슬을 분류할 때


- 호랑이와 사자를 동일 서열에 놓았지만


- 유일하게 시베리아 호랑이와 그리즐리 회색곰만큼은


- 지상최강의 동물로 별도 분류했다고 한다. ㅎㅎ


 
P.S


멸종위기에 있는 동물들을 실제 싸우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서기 전부터 인류의 호기심과 본능을 자극해왔었던 만큼 재미삼아 글을 써봤다~! ㅎㅎ


주제에 딱 알맞는 무시무시한 사진들을 조합하느라 제법 힘들었음.


 예전에 네이버에 보면 동방신기 오빠들이랑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최홍만,크로캅 등이랑 불곰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등등의 글이 올라와 있던데,ㅎㅎ 베스트 답변으로 채택된 글이..


최홍만이 불곰을 붙잡고 크로캅이 하이킥을 조낸 날리면 이긴다던가?


뭐 이렇게 되어있던데..ㅋㅋㅋㅋㅋㅋ 맹수는 말 그대로 맹수다.ㅡㅡ;


인간은 그 앞에서 정말로 나약한 존재일뿐. 왜이리 바보가 많냐?ㅋㅋ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다들 너무 진지해서 정말 놀랬었다.


아무리 100명의 사람이 있어도 맨손이라면 굶주린 사자 한 마리를 당해낼 수 없다.


더구나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일단 몇 명이 사망하면 공포감 때문에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미 승부는 끝이다. 


싸움을 잘 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생각이 많으면 안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앞발에 실리는 하중이 800Kg인 맹수에게는 그저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의 뼈가 으스러져서 즉사할 텐데..


음..인류가 위대한 것은 지식과 도구의 이용에 있지,


사실 그 육체적 능력은 정말로 미미하다.


만약 지금이 구석기 시대의 아프리카라고 가정을 한다면..


사자,하이에나 같은 맹수는 커녕이고


밤마다 동굴로 들이대는 야생 족제비 몇 마리도 무서울껄? ㅠ.ㅠ


돌맹이 몇개 들고 "우가우가~!!" 하는 시대에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

출처: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

 



3000 계단의 논 - 운남성 원양(元陽)





 
 


3000 계단의 논 - 운남성 원양(元陽)
중국에서 아랫쪽으로 베트남과 국경지역에 있는 운남성 원양의 계단식 논의 풍경입니다.
운남성(雲南省) 애뢰(哀牢)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논들은 산정에까지
최고 3000여 계단이나 된다고 합니다.
>
필리핀의 바나웨의 라이스테라세스(계단식논.. 세계 8대 불가사의)가
5000년의 역사와 불가사의적인 가치를 가졌다면

이곳도 세계 자연유산 (自然遺産)으로 지정되어
대략 17만 마지기나 되는 이 계단식 논이 지금까지 30 여만 명의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탐내는 이곳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계단식의 논 정상에 서서 아래로 굽어보면
중첩되는 논들이 모든 산에 펼쳐져 있어 마치 수많은 사다리가
산정에서 산기슭으로 세워놓은 듯하여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망망한 구름바다 속에서 다락논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다시 나타나고
가옥들이 다락 논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을
현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서로 다른 계절과 다른 각도에서 심지어는 하루 중에
서로 다른 시간에 바라보는 것이 제각각이라 그 절경을 어디에 비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감탄! 예술입니다. 경이롭구요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스런 바위 ◑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시면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끝까지 감상하시면서

 

편안하고 여유로운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카파도키아(터키),

 

Rock formations in Cappadocia,

 

TURKEY,Photo by Christian Clausier

 


 


 

 

멋진 부라이스 협곡(미국),

 

Stunning rock formation, BRYCE CANYON

 


 


 

 

대만 동북부 Rock, N_E Taiwan by Matthew Fang
장가게(중국), Rock formations ZHANGJIAJIE

 


 


 

 

이상한 바위-쿠릴섬(러시아),

 

Unusual rock formations on the Kuril Islands, Russia

 


 


 

 

거대한 해변 언덕길(아일랜드),

 

The Giant's Causeway rock formation

 


 


 

 


 

 

물결바위,아리조나주-미국,

 

Wave rock formation in Arizona, USA, Marie

 


 


 

 

고기바위-자연석,

 

Natural rock formation - Fish rock

 


 


 

 

놀라운 바위,

 

awesome rock formation, C Cuenka

 


 


 

 

놀라운 바위-미 아리조나주,푸른 협곡 호피 인디안 보호구역,

 

Amazing rock formations Blue Canyon -

 

Hopi Indian Reservation Land, Arizona. S Bensimra

 


 


 

 

갈대 피리 동굴-계림,중국

 

Reed Flute Cave - Guilin , China , G Lemarlec

 


 


 

 

아름다운 바위조형물,

 

Beautiful rock formation

 


 


 

 

캐나다 노바스코티아주, 부라이아섬 해변의 화산암,

 

The volcanic rocks on the shore of Briar 's Island ,

 

Nova Scotia B Niklasson

 


 


 

 

모근 및 꽃가루 표피의 거미 표피조형물(카르바호 마리아 유작),

 

Spider Skin Texture of the skin of a spider,

 

with a hair root and pollen grains remains adhered to the skin

 

Courtesy of CARBAJO MARIA

 


 


 

 

단지아 지형(地形),

 

Danxia Landform Melinda

 


 


 

 

미 아리조나주의 "지리학자의 무지개"-굳어서 형성된 바위,

 

G eologist's Rainbow - Petrified Rocks, AZ, Linda Covert

 


 


 

 

미 서부 캔자스주 "기념물 바위" 의 열쇠구멍을으로 본 황혼,

 

Sunset Through The Keyhole - Monument Rocks -

 

Western KansasD Williams

 


 


 

 

미 유타주 동시온의풍화작용으로 형성된 바위,

 

Weathered Rock Formations ??¾ East Zion , Utah , D Williams

 


 


 

 

광물질로 풍부한 색채를 띈 "날렵한 간헐온천바위"

 

Geyser Rocks, rich colors given by minerals, D Williams

 


 


 

 

폴투갈 라고스 동굴,

 

Caves in Lagos , Portugal , D Williams

 


 


 

 

사슴계곡의 눈물 흘리는 바위,

 

The Weeping Eye - Antelope Canyon , D Williams

 


 


 

 

호주, 후린다스 산맥, 와라위나의 황혼,

 

Warraweena Sunset, Flinders Ranges , Australia , D Williams

 


 


 

 

중국 티안슈이 마이지샨 동굴,

 

Maijishan Caves, Tianshui, China, D Williams

 


 


 

 

불가리아 데베타슈카 동굴,

 

Devetashka Cave, Bulgaria by Silvia

 


 


 

 

미 아리조나주 거미바위,

 

Spider Rock - Arizona, D Williams

 


 


 

 

북 아이랜드 안트림 해안, 래리베인의 "양 섬"이 보이는 동굴



精彩煤 좋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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