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섭 장로(군선교회) -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항복문을 낭독하는 소리가 나오자, 내가 살던 황해도 구월산 주민 모두가 나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광복이 된 수요일부터 계속 놀고 있는데 ‘일요일에 학교로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받았다. 학교에 갔더니 두루마기를 입고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생 전부를 모아놓고 우리 학교가 원래 교회였고 자신은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리고 한지에 적어온 찬송가를 가르쳐 주셨다. 그날 배운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집에 오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누구에게 배웠냐며 놀라셨다. 대답을 하자 “목사님이 오셨네. 목사님이 오셨어”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목사님과 우리 할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두 분이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지만 할아버지는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목회자가 되어 고향에 오자 교회를 세우는데 큰 몫을 했다고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해방 후 우리 교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산당의 박해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학교를 다니며 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공부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기는듯 했지만, 끝없이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졌다.

 나는 어머니와 누님 두 분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군산항에 도착했다. 실향민이 된 우리는 군산에서 정부가 내어준 트럭을 타고 김제 공덕면 회령리 문씨마을에 정착했다. 길고 험한 피난길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족과 함께 하셨다. 부잣집 머슴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꿈을 주셨고, 희망을 주셨다.

 시집간 누님을 따라 대전에 갔다. 역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당시 군산보안부대에서 일을 하면서 군산상고를 다니는 친척형이 있었다. 나는 형을 만나 형처럼 일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형은 ‘알기 쉬운 영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면서 영어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황해도에서 공부했을 때는 소련어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독학으로 알파벳부터 공부했다.

 대전에서 장사를 하던중 5군단에 발령이 난 군인이 계셨다. 그분은 나를 심부름하는 아이로 쓰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난 그분을 따라 강원도 5군단 부대를 향했다.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는 나를 보신 대장님이 공부를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그러시더니 포천중학교에 넣어주셨다. 그분이  청주대장으로 발령을 받자 나를 청주중고등학교로 옮겨주셨고 거기서 졸업해 서울사범대학교 영문학과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청주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사람들은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부잣집 딸이 나를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고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한 후 청주지역에 학교 발령 요청을 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사범대학을 나오면 먼저 발령을 받고 1년간 학보로 가면 군복무를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군제도가 바뀌어 3년 사병생활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나 아찔해 장교시험을 봤다.

 하루는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로 착각을 했던 그 아가씨가 8년 만에 찾아와 결혼을 하자고 했다. 오랫동안 결혼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면서 말이다. 우린 결혼을 해서 2남 1녀를 낳았다. 나는 신앙생활을 계속 했지만 아내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대 안에는 교회도 있고 절도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종교대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좋으신 하나님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방법으로 아내를 교회로 인도하셨고, 교회에 나오자마자 십일조 생활을 했다. 군인의 월급은 뻔했다. 하지만 십일조의 축복은 물질의 축복을 넘어 자녀의 형통함으로 채워주셨다. 중령으로 예편한 후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감사뿐이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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