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집사(강서대교구) -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탈북은 하나님 주신 기적

두 차례 한국행 시도 실패로 공안에 잡혀 북한 압송
복음 통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깨달아

 나는 북한에서 예술전문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국가가수로 소련 중국 등 해외공연에 참가했다. 또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국가 행사와 공연에도 다수 참가했다. 내가 활동했던 당시는 ‘온 사회를 김일성 주체 사상으로 일색화하자!’는 구호가 거리 곳곳에 걸려있었다.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충성 맹세 작업이 가장 최고조에 올랐던 때였다. 그때 내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공연단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나는 군인과 결혼했고 남매를 낳아 단란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목숨을 잃게 됐다. 젊은 나이에 살 길이 막막했던 나는 어린 딸만 등에 업고 1998년 하반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조선족 가정에서 몇 달간 딸과 머물렀지만 우리 모녀가 마음 편히 쉴 곳은 없었다. 다행히 주인집의 살림을 해주며 가정부처럼 살았다.

 그 당시 새해를 맞이하면서 북한 탈북민은 물론 불순한 자들을 잡아들이는 중국 공안의 대검거가 시작됐다. 그때의 살벌했던 공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더 이상 머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인집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인 회사에 화식모(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로 취직했다. 딸아이를 키울 수 없어 딸을 동북의 한 도시로 보내 위탁 공부를 시켰다. 그 시기 딸은 위탁 가정의 부인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딸은 주일만 되면 함께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 딸을 따라 한국인 교회에 갔는데, 그 날이 새신자를 위한 잔칫날이었다.

 성도들이 나에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불러줄 때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탈북자들이 중국에 많이 몰려들자 중국 공안은 해마다 설을 앞두고 탈북자 색출을 위한 대검거를 실시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한국행을 결심하고 2003년 초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진입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상해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딸과 함께 그만 중국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2003년은 탈북자들이 그 어느 해보다 한국행 시도를 많이 하고 또 북경에서는 탈북민이 대량으로 잡혀 북송되던 무서운 해였다. 상해 감옥에서 20여 일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북송되면 선택의 여지없이 정치인 수용소에 가거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엄마로서 딸에게 닥칠 불행이 무서웠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진실하고 간절했다.

 그러자 도움의 손길이 임했다. 중국 측 인사가 우리에게 대사관 진입 시도로 잡힌 것이 아니라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 잡힌 것으로 내용을 바꿔 그 서류를 북한 관계자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해 12월 초 우리는 지옥과 같은 북한 감옥에서 꿈같이 풀려났고, 2004년 3월 다시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2005년 3월 나 먼저 제3국으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5월 자유의 땅 남한에 안기게 됐다.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남한으로의 도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기적의 역사였다. 지금 3만 명의 탈북자가 이 땅에 왔지만 이 곳에 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중국과 제3국에서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후 딸은 무사히 남한에 올 수 있었고, 한국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 영주권자로 그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예비하심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바라기는 북한에 있는 아들도 머지않아 주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함께 살길 기도한다. 하나님을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주님의 딸로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북한 복음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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