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가슴앓이 공수대원 속죄의 참배

 

17일 낮 망월동 묘역에서는 한 시민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805월항쟁 때 광주에 투입돼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야만 했던 당시의 공수부대원이 희생자들을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공수부대원이 망월동까지 오는데는 무려 15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죽이겠다며 명령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쳐들 면목도 없는 제가 망설이기만 하다가 오늘에야 찾아왔습니다."

이날 무명열사 묘 앞에 엎드려 오열한 공수부대원은 당시 제3공수여단 본부중대 소속으로 광주에 배치돼 520일 광주역 앞에서 비무장 시위대와 맞부딪쳐 총을 쏴야 했던 이상래(37.건설노동자.광주시 광산구 신가동)씨다.

오전 내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망치를 두드리다 망월동 묘역을 찾은 이씨는 묘역이 눈앞에 들어오자 발걸음을 선뜻 내딛지 못했다. 머뭇머뭇하다 무명열사의 묘앞에 선 이씨는 들고 온 국화꽃다발을 묘비 앞에 바치고 소주잔을 올리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전남 승주군 별량면 출신으로 79년 입대한 이씨는 당시 일병으로 520일 아침 전남대에 투입됐다. 그날 오후 8시께 광주역에 시위대가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밀려오자 작전에 동원됐다.

실탄을 지급받고 출동하다 다른 부대원이 장갑차에서 M50 기관총으로 시민들에게 갈겨대는 것을 보고 이 일병은 눈을 감고 말았다.

격전 현장에 대열을 자추자 작전 참모가 권총을 들이대며 쏘라고 명령했다. "쫄따구' 군바리였죠. 무조건 전진, 전진하라니까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어요. 뒤돌아보면 권총으로 죽이겠다고 위협해대고...."

`어쨌든 내 고향땅 형제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총부리는 허공을 향했다. 이날 시위대는 비무장이었고, 택시승강장에서 역전 분수대까지 붉은 피가 흥건했다.

포승으로 두 손을 묶고 등뒤 러니셔츠에 `폭도'`운전'이라고 써넣은 연행자들을 감시하다 이튿날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한 일병은 다음날 아침 가마니에 덮여 손수레에 실려온 `폭도'주검 4구를 교도소 마당에 파묻었다.

"이 두 손으로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용서란 말은 차마 꺼낼 수도 없습니다."

고참에게 전라도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죽도록 두들겨맞다가' 82년 제대한 이씨는 식당 주방일을 하다가 88년 같은 고향 출신의 부인과 결혼해 올해 국민학교에 들어간 아들을 두었다.

"고향이어선지 80년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90년 봄 광주로 이사온 이씨는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망월동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다가 지난해 겨울 혼자 슬쩍 둘러본 뒤 이날은 술과 꽃을 들고 제대로 참배에 나섰다.

5월이면 해마다 가슴앓이를 해온 이씨는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낸 것 같다"면서 "이곳에 묻힌 영령들의 유족들과도 언젠가는 만나 용서를 빌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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