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하나님의 부르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단일교회로는 세계최대교회라는 타이틀처럼 전 세계적으로 부흥성장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큰 교회로써가 아니라 오순절성령강림 역사의 재현이라는 평가와 함께 전 세계에 불고 있는 성령바람의 근원지다. 기독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성장의 아이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보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1958년 5월 18일 창립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내년이면 창립 60주년을 맞이한다. 이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성령의 역사를 다시한번 발견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사과 상자를  강대상 삼아 드린 첫예배…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하는 씨앗 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효시(1958∼1961)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조동 깨밭에 세워진 천막교회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성령과의 동행이었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 이전에 조용기 목사와 성령과의 만남 그리고 최자실 목사와 성령과의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조용기 목사 

 조용기 목사는 조두천 장로와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1936년 2월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동래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조용기 학생은 갑작스러운 폐병으로 그의 삶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당시 폐병은 전염성이므로 가족들과도 격리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그는 병마와 함께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술을 총동원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그에게 누나의 친구가 전해준 것이 성경이었다. 조용기 목사가 처음 복음을 접한 순간이기도 했다.

 별다른 차도가 없어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조용기 목사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켄 타이스 선교사가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 들려오는 말에 이끌려 천막에 들어선 조용기 목사는 그 곳에서 선교사의 기도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맛보게 됐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통곡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됐다. 부흥회를 마치고 선교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켄 타이스 선교사는 조용기 목사의 영어실력에 깜짝 놀라며 통역을 부탁하게 됐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선교사를 따라 다니며 그의 설교를 통역하게 되는데, 통역을 하며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신유체험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생기게 됐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제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오늘밤이라도 주님이 저에게 현현해 주신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지 사흘 때 되던 날 새벽 2시경 인기척에 잠을 깬 조용기 목사는 흰 옷을 입은 사람의 형체를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인줄로 착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버지가 아닌 선교사가 말한 그 예수님임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라게 됐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줄테니 평생 내 종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네 저를 치료해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일순간의 체험이었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폐병에서 자유함을 얻는 조용기 목사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됐다.
 조용기 목사는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신학교에서 목회 동역자인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된다. 

동역자 최자실 목사와의 만남

 최자실 목사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7세에 간호원을 시작으로 이후 서울에서 성냥공장과 비누공장 등을 운영하며 사업가로서 기질을 보였다. 6.25전쟁으로 진해로 피난한 그녀는 다시 사업을 시작하며 재물에 집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심지어 어머니와 맏딸을 하늘나라로 보낸 이후 그녀의 삶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운영하던 사업체들이 도산하면서 삶에 대한 남은 의지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자실 목사는 자살을 결심하고는 극약을 들고 삼각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부흥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체험하게 됐다. 이후 신학을 결심하고 순복음신학교에 응시해 합격해 조용기 목사를 만나게 됐다.

 신학교시절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는 각각 학생회장과 전도부장으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노방전도에 앞장 섰다. 특히 조용기 목사는 노방전도시 설교를 도맡아 하며 신학생들을 이끌었다.
 조용기 목사는 원래 목회자의 길을 가기보다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 신학자로서의 꿈을 꾸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둔 조용기 목사가 급성폐렴을 앓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의 꿈에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고열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는데 최자실 목사가 앞장 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간호하면서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건강을 회복한 조용기 목사는 감사의 뜻을 담아 최자실 목사에게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최자실 목사가 고민 끝에 조용기 목사의 뜻을 수락하면서 서로가 기도로 중보하는 동역자로서 첫 발을 딛게 됐다. 

다섯 명이 드린 첫 예배

 신학교를 졸업한 최자실 목사는 교회개척을 결심하고 기증 받은 대조동 산기슭 땅 위에 집을 짓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됐다. 조용기 목사를 초청해 드린 첫 예배에서 최자실 목사는 강대상이 없어 사과상자를 세로로 세워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대신했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 그리고 최자실 목사의 자녀들인 성혜, 성수, 성광 삼남매 다섯 명이 예배를 드렸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마가복음 16장 17절을 본문으로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비록 다섯명이었지만 조용기 목사는 언제나처럼 강한 성령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 예배가 세계최대교회를 이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첫 예배로 영원히 기록될 줄은 당시 말씀을 증거하던 조용기 목사조차 상상도 못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알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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