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로 폭발적 부흥 일어난 ‘천막교회’


대조동 빈민가에 일어난 기적천막교회, 기사와 이적 나타난 초대교회 행전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 주셨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으며 가시는 곳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도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조용기 전도사는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을 큰 소리로 읽고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믿으면 아멘 하시오”라며 믿음의 고백을 시켰다. 예배에 모인 사람이라곤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 그리고 최 전도사의 세 자녀와 그 집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뿐이었다. 그러나 설교하는 조 전도사의 목소리는 마치 수천 명을 상대하듯 우렁찼다. 조 전도사는 “하나님, 대조동 30호 모두가 몽땅 예수 믿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최 전도사의 자녀들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며 귀를 틀어막기까지 했다. 이날의 예배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이요, 출발이 되었다.

 1958년 5월 18일 굵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는 늦봄 저녁, 서대문구 대조동의 산기슭의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허름한 집에서 조용기 전도사의 설교로 예배가 드려졌다. 대조동은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빈민촌으로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근근이 살아가는 환경이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조용기 전도사는 더위와 추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대조동 빈민가를 발이 부르트도록 순회하며 읽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겉으로 보아도 가난에 찌든 오두막에 살던 무성이 엄마는 7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중풍병을 앓게 되어 단 한 번도 자기 발로 일어선 적이 없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조용기 전도사가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악취로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방치되다시피 한 두 아이의 위생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과 병자를 물로 씻긴 후 조용기 전도사와 함께 이 여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바싹 야윈 무성이 엄마가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했다. 두 사람의 방언기도가 다시 이어졌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는 성경말씀에 의지해 간절히 기도하며 병마를 쫓았다.
 30일간의 영적 전쟁 끝에 무성이 엄마는 걷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어서 교회에 나타나자,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7년간 중풍병을 앓던 무성이 엄마가 고침을 받은 이 사건은 천막교회에 첫 번째 일어난 신유의 기적으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부흥의 촉발점이 되었다. 천막교회의 놀라운 소식은 서울역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앉은뱅이 소년에게도 전해졌다. 어느 날 소년은 천막교회를 찾아와 조용기 전도사에게 걷게 해달라며 기도를 요청했다. 성도들과 함께 있던 조용기 전도사는 “하나님 저 소년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소년을 고치지 못하면 저도 이곳에서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라며 뜨겁게 기도했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리를 펴라”고 외쳤다. 그리고 소년은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떼더니 곧 뛰기까지 했다. 또 알코올 중독으로 10년간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 유화문과 심장병에 걸린 아내 이초희 씨 사이엔 9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들 부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 같은 신유의 기적이 거듭되면서 주민들은 물론 동네 불량배들조차 회개하고 천막교회를 찾아왔다. 심지어 무당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등 수많은 결신자가 생겨 났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마 11:12). 천막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는 극진한 정성과 능력 있는 설교, 거기에 신유의 기적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개척한지 1년 반 사이에 200여 명이 영혼 구원을 얻으며 급속도로 부흥했다.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세워진 천막이 일곱 개나 되었다. 가난한 성도들이 드린 헌금으로 더 큰 천막을 구입해 넓혀가는 일은 서대문 로터리로 교회를 이전할 때까지 계속됐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처럼 천막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키워드는 바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 교회 성장의 영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천막교회에 울려 퍼진 희망의 메시지

 1960년대 초기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국민들이 살 길을 찾아 서울로 대거 몰려들던 시기였다. 그들에겐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필요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헐벗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믿음과 꿈을 가지라고 도전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강단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천막이 찢어질 듯한 강렬한 음성과 깊고 오묘한 말씀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으며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했다. 

천막교회의 또 다른 영적 유산 ‘주일학교’

 천막교회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물려받은 영적인 유산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주일학교 운영이다. 천막교회의 주일학교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학교의 모태가 된 것이다.
 대조동 주민들은 낮에는 대부분 일을 나가고 어린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병자들은 집에 있었다. 천막교회가 세워지기 전 최자실 전도사는 고아원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아원 부지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서 육의 고아만이 아니라 영의 고아도 고아라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의 영적인 어머니가 될 것을 결심했다. 최자실 전도사는 동네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을 씻기고 품에 안아주면서 노래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미 천막교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인 아이들이 60∼70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해 주일학교는 천막교회 부흥의 또 다른 중심축 역할을 했다. 주일학교 규모는 점점 커지면서 주로 20대 후반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주일학교는 교회가 서대문으로 이전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20여 명의 교사가 3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됐다.
 성령의 역사로 역동했던 천막교회는 개척 3년만인 1961년 3월 그 동네 주민들 보다 많은 4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났다. 그 이듬해엔 800여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이렇듯 대조동 천막교회는 부흥의 뜨거운 열기 속에 서대문으로 이주하기 위한 모든 준비와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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