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하나님의 역사하심(1962∼1972)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서대문서도 부흥의 불 타올라

 서대문시대 개막

 

1961년 대조동 천막교회가 계속 부흥성장한 결과 400명이 넘어가면서 최자실 목사와 당시 조용기 전도사는 중요한 결단을 필요로 했다. 앞서 9월에 서대문 로터리에서 천막대부흥성회가 열렸는데 성회가 진행된 한 달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이 때 조용기 목사는 성령을 통해 천막대성회가 열린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라는 강한 소망이 생겼다. 그해 10월 15일 천막대부흥성회가 열렸던 서대문 네거리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개척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1962년 2월 18일 순복음부흥회관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4월 26일 조용기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5월 13일에는 교회명칭을 순복음부흥회관에서 순복음중앙교회로 변경했다. 서대문시절에도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꾸준히 부흥했다. 서대문으로 이전하면서 교회 성도수가 늘어 교회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첫 집사 임명이 1961년 거행됐다. 송재덕 집사를 비롯해 5명이 집사로 임명됐고 1966년 4월 5일에는 최초의 장로장립식이 거행됐다. 이 때까지 교회는 당회가 구성되지 않아 제직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장로를 세움으로 인해 조용기 목사를 당회장으로 하는 당회가 구성되어 교회를 치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1975년에는 장로들의 신앙향상을 위해 장로친목회가 결성됐다. 장로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교인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설립됐던 장로친목회는 1988년 장로회로 거듭나 사역변경을 보다 확대했다. 당시 초대회장에 이규화 장로가 선임됐다.
 


교회부흥 일조한 구역조직의 탄생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최대교회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구역조직도 이 때 시작됐다. 1964년 성도수가 3000명이 넘고 1965년에는 2배가 넘는 7500명으로 부흥했다. 이렇게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조용기 목사는 어느 날 오후 2시간에 걸쳐서 수백 명의 성도들에게 침례를 베풀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1주일간 요양했지만 그 다음주 주일 설교하러 올라갔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조용기 목사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는 도중 출애굽기 18장 18절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다음 주일 제직들을 부른 조용기 목사는 사역을 분담한 구역조직을 발표하게 된다.
 구역을 처음 조직하던 당시에 여성을 리더로 삼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조용기 목사는 20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구역을 발족하고 그들을 구역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각 구역에 있는 성도들을 모아 양육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나아가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구역모임과 교회로 초청할 것을 당부했다. 구역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고 운영될 수 있도록 구역장들을 교육하고 지침들을 발표했다. 구역원이 15명이 되면 분리하도록 한 결과 19678년에는 수백개의 구역으로 성장해 교회부흥에 크게 일조했다. 

 
남녀선교회 태동 남친목회·여전도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최대 봉사기관인 남녀선교회는 서대문시절에는 남친목회와 여전도회로 각각 창립됐다. 남친목회는 남성구역이 생기기 이전인 1962년 남성 성도들의 모임의 필요성을 느껴 송재덕 집사를 비롯한 남성 집사들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짐으로 시작됐다. 처음에는 회원들의 가정을 순회하며 정기모임을 갖고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독려하는 것이 주였다. 그러나 2차 정기총회 이후 본격적인 조직을 갖추어 노방전도를 실시하고 신설된 남성구역 심방, 교회의 환경미화, 시설 완비, 조용기 목사의 설교집 제작 등을 시작했다. 교회가 부흥될수록 남친목회의 회원도 증가함에 따라 회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적극적으로 활용,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성도들의 증가에 따른 교통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교통봉사를 비롯해 교회 대내외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선교회라는 명칭은 1968년 임시총회를 통해 개칭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봉사기구로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전도회는 1959년 대조동 천막교회시절 발족해 당시부터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서대문시절에는 교회 교구조직에 참여하며 노방전도, 가정심방, 병문안, 결신자 심방, 장례 등 교수 일에 우선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구치소 방문, 신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 등 사역영역을 지속적으로 넓혔다. 1970년에는 부인선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최자실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절대순종의 자세로 교회의 봉사에 임했다. 1975년 부인선교회는 지금의 여선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성찬 떡과 포도주를 만드는 등 교회를 위한 사역 지경을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다. 

 매스컴 통한 전도 시작

 1966년 12월 12일 순복음문서전도회 창립회의가 열렸다.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교회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월간 신앙계를 발간하게 됐다. 1967년 2월 5일 발간된 신앙계 창간호에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 최자실 목사(당시 전도사)의 일본 부흥성회 화보, 성도들의 신앙시, 간증 그리고 신앙상담 등이 있었다. 또한 성도들의 올바른 성경공부를 위해 ‘복음통신’이라는 통신성경공부가 실려 있었다. 이후 기관지의 성격에서 발전해 초교파적으로 기독교문화를 이끄는 대변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9월 4일에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극동방송을 통해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성도들의 간증이 담긴 ‘순복음의 시간’이 방송됐다. 또한 교회 5층에 녹음실을 갖추어 설교테이프를 제작, 전도용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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