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 -

4. 불꽃처럼 타오른 성령충만


성령충만의 불길 한국을 넘어 세계로
교회학교 기구 정비, 여의도성전 건축
 
순복음의 영향력 국내를 넘어 해외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우리 교회의 첫 해외선교 시작은 1964년이었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 요청으로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 창립 5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첫 선교여행길에 올랐다. 미국 하나님의성회교단 창립 50주년에서 한국 하나님의성회 대표로 참석한 조용기 목사는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의 상황과 비전을 제시하고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전했다. 기념식 후에도 조용기 목사는 2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한국과 한국기독교를 전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1967년 5월 31일 세계오순절총회에 아시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스라엘, 이란, 태국, 베트남, 중국, 일본 등 18개국 30여 개의 도시를 100여 일간의 일정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최자실 목사도 10월 28일 일본선교여행을 떠났다. 일본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최자실 목사는 비자를 연장하면서까지 동경지방을 중심으로 선교집회를 약 40일간 계속했다. 1966년에는 대만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최자실 목사는 약 50일간 신소회를 비롯해 내포교회, 기룡신소회 등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대만에 성령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한편 조용기 목사는 1966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1967년에는 오순절세계협의회 고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를 통해 1969년 7월 7일 제3회 하나님의 성회 동북아아세아대회를 우리 교회에서 개최하게 됐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피지, 말레이시아, 호주 등 13개 국가 대표 130여 명의 목회자 및 성도들 그리고 방송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7월 11일까지 진행된 이 행사에는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과 김현옥 서울시장 등 정계 관계자들도 참석해 축하를 전했다. 이 대회를 통해 전 아시아에 한국교회의 위상을 보이는 한편 아시아 교회들간의 교류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교회학교 기구의 정비

 서대문으로 교회를 이전하면서 장년 성도들의 증가와 더불어 아동 및 청소년 성도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주일학교 설립의 시급함을 느껴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국민학생과 미취학 아동들이 중심이 됐다. 여러 가지로 준비가 미비했던 주일학교는 서울 지역에서 교육제도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다는 19개 교회를 선정해 매주 견학과 탐방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 제도를 정비했다. 수개월의 과정을 거쳐 정비된 행정제도를 통해 주일학교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됐고 뒤이어 C.A(Christ’s Ambassador)중·고등부가 발족했다. 당시 교사들은 주일 저녁 예배 후 조용기 목사의 사무실에서 주일 공과 공부를 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면 성령 충만한 믿음과 탁월한 열심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매주일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는 물론이고 여름성경학교, 부흥회 등에는 교사들이 큰 북을 둘러메고 교회 인근 동네인 서대문 네거리와 금화초등학교, 미동초등학교 등을 돌며 어린이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방법이나 시설 등이 많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교단 차원의 어린이찬송가도 없던 시절 처음으로 어린이 찬송가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300여 곡의 찬송가를 실어 1000권을 출간했는데 순식간에 절판되어 재판을 발행하기도 했다.

 1964년 1월에 청년선교회를 설립했다. 청년선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선교단체로서 근로 청소년들의 영적 신앙교육과 ‘청년선교는 청년들이 담당한다’는 큰 사명을 가지고 시작됐다. 이후 구로공단 내 가스펠 하우스를 설치하고 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대문을 넘어 여의도를 바라보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는 나날이 부흥성장을 거듭해 1968년에는 8000명에 이르렀다. 3부로 나뉘어 주일예배를 드렸지만 그래도 좌석이 없어 일부 성도들은 주차장에 비닐을 깔고 앉아 스피커를 통해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특히 예배가 있는 날이면 서대문 로터리 일대가 마비가 되면서 서울시내 교통혼잡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당회에서는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대지를 물색하였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터가 부족하지 않으면 너무 비쌌다. 그 때 비행장만 있는 모래벌판의 섬 여의도가 논의됐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반대했지만 조용기 목사는 내일에 대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여의도로 이전할 것을 천명했다.

 결국 당회에서도 여의도로 이전을 결정, 1969년 4월 여의도 땅에서 첫 삽을 떳다. 당시 당회에서는 공사비가 부족해 교회 옆에 아파트를 지어 공사비를 마련코자 아파트 건축을 강행했다. 1970년 가을, 아파트는 완공되었으나 교통불편 등의 이유로 입주자가 거의 없었다. 거기다가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오일쇼크와 달러 하락으로 건축자재의 값이 엄청나게 오르면서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됐다. 당시 오일쇼크로 많은 성도들이 직장을 잃었고, 은행의 신용융자가 축소되는 등 교회의 재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기 목사는 냉천동 집을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지만 당시 교역자들에게 사례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정도로 시련의 깊이는 더해갔다.

 조용기 목사는 지붕도 씌우지 못한 교회 건물의 녹슨 쇠기둥을 붙들고 울며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성도들도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함께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골조만 겨우 서 있던 여의도성전에 매일저녁 수백 명의 성도들이 여의도 특유의 칼바람 속에서도 금식하며 기도했다.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기도할 때 결코 하나님은 그 기도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기도회에서 한 80대의 할머니 성도가 대대로 쓰던 놋그릇이라며 돈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내놓겠다는 말에 조용기 목사는 통곡하며 “이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성도들은 조용기 목사와 같이 함께 울며 한 명, 한 명 교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패물을 팔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여성도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팔아 헌금하기도 했다. 이런 성도들의 헌신 속에 1973년 8월 18일 1만 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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