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Dooman River)                         

            

두만강 (Dooman River, 2009)

감독 :장률

출연 :최건, 이경림, 윤란

요약 :한국 | 드라마 | 93분

줄거리 :희망도 절망도 소리 없이 얼어가는 곳, 두만강…

삶의 슬픔이 침묵으로 흐른다.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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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공원의 가을은 이렇게 오네요

2016년 9월 23일

하 늘 공 원  사 진 탐 방

마포구 상암동 482

 

하늘공원서울 마포구 상암동 482 |02-300-5501


我 : 지하철로 가기

1호선 외대역  --> 동묘역에서 6호선환승 (응암역행)  -->월드컵경기장역1번출구

 도보이동 -->맹꽁이 전기차 (왕복 요금3천원) 이용이 편함. 


좀 다른 느낌으로 표현하고저

흑백사진으로 시작


하늘 공원하면 갈대



여러모양의 새집들

코스모스와 노랑꽃


 

 











나비와 사람들이 꽃을 즐기고

코스모스가 와 노랑꽃이 엄청나











하늘공원의 사징 바구니형전망대

성산대교와 한강건너의 도시 풍경





풍력발전용 바람개비








멀리 북악산 ,,,?








 



           

함박눈이 펑펑내려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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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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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피는 야생화 무릇꽃 무릇효능   






 

가을에 피는 야생화 / 야생화종류 무릇꽃 무릇효능/
구황식물.보릿고개


여름에부터 피기 시작한 야생화종류 무릇꽃은 지금은 가을에 피는 야생화 답게 한껏 뽑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오늘은 가을에 피는 야생화 무릇꽃을 소개하면서 무릇효능도 알아 봅니다.
그리고 무릇에 대한 사량도의 구황식물.보릿고개에 대한 옛날 얘기도 할까 합니다.







가을에 피는 야생화 무릇꽃은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연한 홍자색으로 7~9월에 피고
약간 습기가 있는 들판이나 밭둑에서 잘 자라며
분포지는 아시아 동북부 온대지역에서 아열대 입니다.




무릇의 특징
무릇의 특징으로는 줄기는 곧게 서며, 높이 20∼50cm이다.
땅속에 길이 2∼3cm의 달걀모양의 둥근 형태의 비늘줄기가 있고, 잎은 봄과 가을에 2개씩 나온다.
꽃은 7∼9월에 피고 길이 20∼50cm의 꽃줄기가 나와 끝에 길이 4∼7cm의 총상꽃차례가 발달한다.
꽃은 연한 홍자색이고 화피갈래조각과 수술은 각각 6개이며 암술은 1개이다.
씨방은 타원형이고 잔털이 3줄로 돋아 있다.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 길이 4mm이다.

비늘줄기와 어린 잎을 엿처럼 오랫동안 조려서 먹으며,
구황식물(救荒植物)의 하나이다. 뿌리를 구충제로 사용한다.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무릇(for. alba)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릇 [Chinese squill] (두산백과)




무릇의 효능

무릇의 효능:무릇은 식용식물이면서 약용식물 이며 구황식물이기도 합니다.

무릇의 생약명으로는 면조아(綿棗兒), 천산(天蒜), 지조(地棗), 지란(地蘭).

무릇은 알뿌리를 약용으로 사용하는데,

꽃이 피기전인 초여름에 굴취하여 햇빛에 말려서 사용하는데 생으로 사용하기도 한답니다.

무릇의 효능

무릇의 효능으로는 진통효과가 있으며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부어오른 것을 가시게 하는 효능이 있다.

적용질환은 허리나 팔다리가 쑤시고 아픈 증세를 비롯하여 타박상 등의 치료약으로 쓴다.

그밖에 종기나 유방염, 장염 등의 치료를 위해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

무릇의 용법

말린 알뿌리를 1회에 3~4g씩 200cc의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팔다리나 허리가 쑤시고 아픈 증세와 종기, 유방염 등에는 생알뿌리를 짓찧어서 환부에 붙인다.
비늘줄기와 잎을 알코올에 담가 추출한 물질은 강심작용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릇 (몸에 좋은 산야초, 2009.11.15, 넥서스)


무릇의 식용법
무릇의 식용법으로는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알뿌리를 캐어서 잎과 함께 약한 불로 장시간 고아 엿처럼 된 것을 먹었다고 하는데,
단맛이 나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어린아이들의 간식거리로 소중히 여겨왔다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약간 검은 색갈의 조청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


무릇의 다른 이름으로는 물구,물굿 인데요,
사량도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보릿고개 시절의 먹거리 무릇
무릇하면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고난의 기억으로 떠올리실것 같네요.
왜 냐구요? 옛날 보리고개 시절의 먹거리로 무릇을 식용으로 먹었답니다.
사량도에도 섬인지라 생선은 무지 풍부했으나 쌀,보리는 너무 귀하던 곳이었습니다.

저의 서너살 기억으로는 무릇을 캐어다가 죽 비슷하게 만들어 먹은 기억이 있네요.
그때 제 입맛에는 씁쓸한 첫맛때문에 먹질 못했는데(사실은 단맛이 남),
사카린으로 달게 해 주셨는데도 역시 잘 못먹은 기억이 아련합니다.

옛날 섬 처녀는 태어나서 쌀 세말을 먹고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섬에서는 특히 쌀이 귀했지요.
그때야 무릇 말고도 풀이나 나물종류도 못먹는게 없을 때였겠네요.
저는 그나마 조금 알고 있는데, 요즘 얘들은 보릿고개란 말을 이해 못하겠지요.

구황식물(救荒植物).보릿고개의 유래
구황식물.보릿고개는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심할때 농작물 대신 먹을수 있는 야생식물, 피,아카시아,쑥,소나무 등으로
조선시대에서는 국가에서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하고자 구황식물을 개발하여 백성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특히 봄철에 먹을것이 귀할때라 봄에 나는 나물종류는 거의 다 먹었다고 보면 되겠네요.
이때가 보리가 익어가는 때라 하여 보릿고개란 말이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꽃말은 "강한 자제력,자랑" 이라고 하네요.


가을에 피는 꽃 /야생화종류 무릇꽃 무릇효능
구황식물,보릿고개
가을에 피는 야생화종류 무릇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출처다음


임금 부름을 세번이나 거부한사람 등...

 

◈임금 부름을 세번이나 거부한사람◈

▲ 화암서원 전경
ⓒ 정만진

 

화암서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로3길 16-5에 있다. 본래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장기동,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기동에 있었지만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1년 복원되면서 지금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21년부터 화암서원이 현재와 같은 면모를 두루 갖춘 것은 아니었다. 서원의 핵심 시설인 강당과 사당, 그리고 동재와 서재 등의 부속건물을 한꺼번에 모두 새로 짓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까닭이다. 결국 처음에는 재실인 경선재(景禪齋)만 일단 건립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가 심해지자 아예 서원을 복원하자는 중의가 모아졌다. 그 결과 1993년 12월에 착공을 하여 1997년 3월에 서원 복원이 완료되었다.

화암서원이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1년

재실 이름에 선(禪)이 들어 있는 것은 화암서원이 선정(禪亭) 백인관(白仁寬, 1341~1421)을 기려 세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1921년과 마찬가지로, 1789년(정조 13) 영남 지역 사림들이 장기동에 처음 서원을 세울 때에도 강당 등을 완비한 거대 규모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백인관 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여 건립한 사당 화암사(華巖祠)가 시초였다. 그후 서원에는 6세손 백문련과 13세손 백용채를 더불어 모셨다.

 

▲ 화암서원 현판
ⓒ 정만진

 

현재의 서원 경내에는 외삼문인 모송문, 묘우(廟宇, 사당)인 숭의사(崇義祠), 강당인 경선당, 동재 수덕재(修德齋)와 서재 박학재(博學齋) 등이 있다. 외삼문,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 화암서원이다. 화암(華巖)은 고려의 서울인 송도(松都)를 그리워하는(華) 마음이 바위(巖)와 같이 변함이 없다는, 일편단심이라는 뜻이다. 외삼문의 이름 모송문(慕松門)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의 서울(松)을 그리워하는(慕)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이성계의 조선을 거부하고 여전히 고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 많이 쓰는 말로 고려 유신(遺臣)이다. 고려가 남긴(遺) 진정한 신(臣)하라는 의미이다, 즉 화암서원과 모송문의 이름은 백인관의 학문적 벗들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백인관은 1368년(공민왕 17)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나중에는 대제학에 이르렀다. 대제학이라면 대략 현대의 서울대학교 총장 정도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벼슬아치들이 권력을 쫓아 해바라기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조정을 떠나 수원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수원 백씨였다.

길재와 함께 금오산에서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다

 

▲ 화암서원 동재
ⓒ 정만진

 

그는 부모를 모시고 수원의 외진 산골에 묻혀 살았다. 직접 밭을 갈고 곡식을 심었으며 추수를 하여 부모님을 봉양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백인관을 세 차례나 불렀다. 태종은 백인관을 새 나라의 신하로 끌어들이는 것이 정권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그의 능력과 덕망을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인관은 태종의 심부름꾼이 자꾸 찾아오자 아예 경상도 금오산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금오산은 길재가 숨어 산 도선굴이 있는 곳이다. 백인관은 금오산에서 길재와 더불어 고려가 남긴 마지막 충신의 한을 나누며 은거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12세 연하인 길재가 67세의 나이로 1419년에 타계해버렸다. 당시 백인관은 이미 79세의 고령이었고, 임금도 세종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금오산을 떠나 대구의 노곡동까지 이주하였다.

 

▲ 화암서원 서재
ⓒ 정만진

 

그는 노곡동에 생애의 마지막 정자 선정(禪亭)을 지어 수양과 학문에 힘쓰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이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오롯이 삶의 좌표로 삼은 행동이었다. 정자의 이름을 선정이라 한 것 또한 정치 권력으로 어수선한 세상의 혼탁한 풍파 속으로는 생애를 마치는 그날까지 결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곡은 어지러운 세파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부산과 대구 사람들이 옷을 벗지 않고 금호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서유교가 자기 재산을 털어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때부터였다. 서유교는 1849년(헌종 15)부터 1851년(철종 2)까지 2년 동안 대구판관으로 근무했다. 백인관의 노정은 서유교의 다리보다 430년 전에 지어졌다. 백인관이 정자를 세울 무렵의 노곡은 속세의 권력에 물든 무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공자의 고향 노(魯)나라를 흠모하는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노곡(魯谷)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에서 백인관은 흔들림없는 선비 정신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백인관이 은거한 노곡에 후손들이 서원을 옮겨짓다

노곡에 정착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21년(세종 3) 백인관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지 어언 20년이 되는 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인관은 이제 고려의 시대가 끝나고 조선의 세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했을까? 다시 그로부터 368년이나 지난 1789년에 이르러 백용채를 비롯한 후손들이 사당을 세우면서 편액을 화암사라 정한 것을 보면 백인관의 의지는 영세불망(永世不忘) 이어졌던 듯하다. 화암서원 낙성문은 백인관의 절의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特地營移告闕成 좋은 땅에 옮겨지어 낙성을 이루고 나니
山增佳氣水增聲 산은 더욱 아름답고 물소리도 더욱 좋네
風來園竹塵紛絶 대밭에 바람 부니 세상 시끄러움 들리지 않고
月霽窓梧道意生 창가 오동에 환한 달 뜨니 도의가 살아나누나

노곡은 공자의 노나라 고향땅과 지형이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백인관만이 아니라 김문기를 모시는 태충각(泰忠閣)도 있다. 태충각은 큰(泰) 충(忠)신을 기리는 집(閣)이라는 뜻이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399~1456) 선생은 사육신 중 한 분이니 큰 충신이라 일컬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 태충각 전경
ⓒ 정만진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는 7기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름은 사육신이지만 실제로는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시는 것이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추가하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사실 사'육'신은 고유명사화되었을 뿐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임금자리를 빼앗는 수양대군의 비인륜적 처사에 반발하다가 죽임을 당한 충신이 어찌 여섯 명 뿐일까! 결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미 굳어버린 사육신이란 명칭은 그대로 두되 김문기의 행적을 사육신과 동일하게 인정하여 사육신 묘역에 함께 모시는 조치를 취했다.

 


▲ 태충각
ⓒ 정만진

 

태충각에 왔으니 당연히 사육신 사건이 발생한 때를 잠깐 돌이켜본다. 1456년(단종 4) 6월, 단종 복위를 노리며 기회를 엿보던 여러 선비들과 장군들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을 맞아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작전을 세운다. 칼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이 잡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 사전에 누설되었고, 거사 동지였던 김질 등이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모두들 체포된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고문 끝에 죽고, 하위지는 참살당한다. 유성원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김문기도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아 죽는다.

태충각은 노곡마을을 가운데에 두고 화암서원과 서로 맞은편인 산기슭에 있다. 태충각에서 보면 화암서원의 서재가 보이고, 화암서원 강당 뒤에서 쳐다보면 태충각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충의와 절의의 선비 정신이 가득한 노곡마을 앞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6호인 노곡산성이 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일념을 뽐내며 오늘도 높게 솟아 있다.


 


           

소름끼치는 무서운 물...!!
인도에서 생긴일



 

 

 



 돈 벼락 맞고싶나요?

쿠쿠쿡..돈벼락이 떨어집니당~

아래의 세종대왕님을 마우스로 긁어보세요!

조금 필요하시면 콕콕.. 많이 필요하시면 쭈~~욱~

"돈 벼락도 함께 받으십시요"

 

 

 

 

돈 벼락이나 맞아 봅시다 ^&^

 

 

 

필요 하신분 많이 많이 가지셔유.








 


 

 

 

 

 

 

돈벼락 맞아 봤나요 ^^

 

돈 다발은 ↓↓↓ 저 밑에 있니더...\

 


우선 돈다발 구경하시고

돈방석에

앉으시기 바라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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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고백(남인수) ♬ /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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