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후반으로 생각되는 조선시대의 생활상   

 

 1800년대 후반으로 생각되는 조선시대의 생활상.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입니다.

 

 골목 안 풍경

 

 가을걷이 풍경

 

 가족 나들이

 

 마나님의 행차

 

 시골 골목 풍경 

 

 농가 풍경

 

 시골동네 어귀 다리

 

 여인의 행차

 

 마을 골목

 

 여인의 기다림

 

 가난해도 여유와 평화가 엿보이는 농가

 

 마을 풍경

 

물 길러 가는 아낙과농가 앞

 

 바다 위의 돛단배

 

 빨래터

 

 빨래터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낙네

 

 소달구지를 끌고 개울을 건너는 농부

 

 소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시골 초가

 

 시골 초가

 

 시골집 앞 풍경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농부의 뒷모습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정답기만

 

 시골 장터의 깨끗한 옷 차림이 인상적

 

 여름 냇가

 

나들이

 

나들이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할아버지 댁으로(?)

 

 공동 우물

 

 말 대신 당나귀 

 

 농사일을 마치고

 

 나룻배

 

 마을 사람들

 

 시골마을 풍경

 

 조선시대 여인

 

 운송 목선

 

 마을 나들이

 

 조선여인

 

 조선시대 산골 마을

 

 조선시대 아낙네들

 

 

좀 쉬어가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보이는 농부의 모습.

그러나 천천히 꾸준히 하리라는 여유가 보인다.

 

가져와서 올린글



추억의 거리
 

 

 

 

 

 

 

 

 

 

 

 

 

 

 

 

 

 

 

 

 

 

 

 

 

 

 

 

 

 

 

 

 

 

 

 

 

 

 

 

 

 

 

 

 

 

 

 

 

 

 

 

 

 

 

 

 

 

 

 

 

 

 

 

 

 

 

 

 

 

 

 

 

 

 

 

 

 

 

 

 

 

 

 

 

 

 

 

 

 

 

 

 

 

 

 

 

 

 

 

 

 

 

 

 

 

 

 

 

 

 

 

 

 

 

 

 

 

 

 

 

 

 


*가져와서 올린 자료 *

 




6.25 한국전쟁이 남긴 귀한 사진들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필자 주>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2004 박도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2004 박도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2004 박도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2004 박도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2004 박도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2004 박도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2004 박도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2004 박도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2004 박도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2004 NARA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2004 NARA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2004 NARA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NARA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2004 NARA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2004 NARA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2004 NARA



1950. 8. 15. 피난민 행렬ⓒ2004 NARA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2004 NARA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2004 NARA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2004 NARA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2004 NARA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2004 NARA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2004 NARA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2004 NARA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2004 NARA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2004 NARA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2004 NARA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2004 NARA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2004 NARA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2004 NARA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2004 NARA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2004 NARA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2004 NARA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2004 NARA



1950. 10. 1. 소공동 일대ⓒ2004 NARA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2004 NARA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2004 NARA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2004 NARA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2004 NARA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2004 NARA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2004 NARA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2004 NARA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2004 NARA

 

여기 귀한 자료인 6.25 한국전쟁이 남긴 귀한 사진들 작품은 울님들을 

위해서 스크랩 해와서 약간의 편집을 했습니다만 펌해가는 것은 자유이나

수고 하신 분들을 위해 원본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50~60년대 모습 ~ 추억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2-01-21)

공산권·중립국가 휴전선 감시위원단 탈퇴요구 시위(1955-08-13)

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광경(1957-05-14)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아기들(1957-05-15 )

성형수술 장면(1957-08-27) 

김영복씨 귀국 의상 발표회(1960-12-18)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1960-10-01)

약현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사절 환영 플래카드(1959-03-09)

인기 영화배우 최은희씨(1959-08-19)

4.19혁명 희생자 49제(1960-06-05) 

펄벅여사를 접견중인 윤보선 대통령 내외(1960-11-02) 

화폐교환 및 극빈자 쌀 배급(1962-06-10 )

화폐교환하는 시민(1962-06-10)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낙선재 입궁(1962-06-14 )

한산모시 직포 광경(1962-07-23) 

대한항공사 취항식(1962-12-01 )

이화여자대학교 77주년 기념 5월의 여왕 대관식(1963-05-31)

경복궁서 군인위문공연(1961- 5-29)

대학생 농촌문맹퇴치계몽 활동(1962-01-11 )

KBS의 전신인 서울방송국 위문단 제주도 위문공연(1962-03-24 )




가슴 아팠던 그 시절
 

 

 

 

 

 

 

 

 

 

 

 

 

 

 

 

일제시대 가슴미어지도록 슬픔에 숨죽여살았던 우리의 옛-모습입니다.



♡눈물겹고 고달팠던 지난 시절♡

 

 

 

 

 

 

 

 

 

 

 

 

 

 

 

 

 

 

 

 

 

 

 

 

 




흰옷입은 순박한 이들의 피난행렬

 

여기 올린 사진은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이 사진의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화보가 50여 년 전의 한국전쟁을 모르는 이에게는 실증의 자료로, 그 당시의 참상을 아는 이에게는 지난 세월을 곱씹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사진들은 모두 미군과 미 종군기자가 남긴 사진으로, 그들의 시각으로 앵글을 잡아서 촬영하였다는 것을 군더더기 말로 보탭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기록으로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필자 주>



1950. 8. 20. 경북 어느 지역,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있는 여인은 내 고모 아니면 이모일지도. "같이 갑세" "퍼뜩 안 오고 머하노. 쌕쌕이가 벼락친데이. 싸게싸게 따라 오이라."

ⓒ2004 NARA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를 타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할아버지 등에는 온갖 가재도구가 짊어져 있고, 오른 손아귀에는 손자가 잡혀 있다.

ⓒ2004 NARA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표를 사고자 늘어선 피난민들로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있다.

ⓒ2004 NARA


▲ 1950. 8. 23. 경남 함안,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2004 NARA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꼭 필자의 고향(구미) 마을 같다. 온갖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 행렬.

ⓒ2004 NARA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뙤약볕 속의 피난 길. 어데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지.

ⓒ2004 NARA


1950. 8. 24. 경북 왜관 부근. "피난 간 새 지발 집이나 무사해야 할 건데..."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2004 NARA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할배, 어데 갑니까?" "나 집에 간다." "못 갑니다." "와! 나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어이 비켜라."

ⓒ2004 NARA


1950. 8. 25. 장소 미상, 기총소사에 쓰러진 피난민들. "이렇게 객사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죽을 걸."

ⓒ2004 NARA


1950. 9. 6. 경북 칠곡 다부동, 가도 가도 끝없는 피난 행렬.

위정자를 잘못 만난 불쌍한 무지렁이 핫바지 백성들이여!

ⓒ2004 NARA

6월이면 잊지 못할 사진들!

벌써 61년 전 일인가?


 

 

 
 
잊혀진 대한조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우리의 마지막 황실 귀한자료임니다 

잘간직하고 후세에 전합시다

 
 
서울대박물관이
'마지막 황실, 잊혀 진 대한제국'
 특별사진전을 개최했다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 진전.
-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
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 촬영)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각계인사들을 모 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 하는 영친왕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 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 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이다.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인듯.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1925년 3 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
(1925년)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1918년 1월25일 경성
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 촬영)


영친왕이 조선 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
(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1919년 2월 9일 고종 황제가 승하한 창덕궁
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
(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2006/05/26 15:27]
출처 : 인터넷 한겨레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
(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 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
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
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독일어로 ‘Palastdame’(궁녀),
영어로 ‘ 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


상중의 이건 연미복 입은 고종 황제


영녕전 참배 의식중인 영친왕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홍릉 입구의 홍살문 -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하지 않는 문이다


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에 참여 한나인들 -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


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습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황실 가족사진
-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 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 가마에 탄
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 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 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기념으로 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 발견.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회장은 그동안 미공개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 1962년 일 본에서 귀국한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촬영된 사진이다.


오열하는 궁녀들
-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左부터)


구한말 황족 한자리에
-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대원군의 62세 생일 기념
-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처음 마주친 것은 DVD 물로만들어진 조선황실의 기록이었다. 아는 것은 아는대로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은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선포 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 통감을 설치,
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황실의 어른으로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2월 3일 73세로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에 순종과 순명효황후와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 례식

 
어떠한 뜻을 지닌, 무슨 내용의 사진인지
잘 모르겠다.

 
창경궁 인정전은 아닌것 같고 어디지?

 
운현궁 양관

 
창경궁 궁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펌)
 
 


 



그때 그시절 짚으로 만든 생활용품

 






 




<두고 온 산하, 구한말 평양의 풍경 >

구한말 평양의 풍경이다. 당시 평양의 인구는 6만 명 정도였고 개성은 3만 명쯤 되었다고 한다.

 

 

<평양시가, 멀리 대동강이 보이고 오른쪽에 대동문과 왼쪽의 련광정이 보인다.>
 
 
< 련광정과 종각, 련광정은 평안감사가 기생들과 연회를 벌이던 곳이다. >
 
 
< 모란대와 대동강, 평양에서 경치가 가장 좋다는 곳이다. 모란봉정상에 최승대가 보이고 아래 강변 쪽의
건물이 부벽루다. > 

 

 

< 부벽루와 평양의 명물 기생들 >
 
 
< 강을 건너 시집가는 행렬, 멀리 모란대가 보인다.>
 
 
 
< 모란대의 입구, 전금문 >
 
 
 
< 나룻배가 대동강을 건너고 있다. > 
 
 
 
< 대동강물을 나르던 북청물장수 >
 
< 아낙들이 대동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 
 
 
< 보통문 아래의 빨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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