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잠든 자를 깨운다/조용기목사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71절)

서론

 ‘고난은 잠든 자를 깨운다’ 바로 나보고 하는 말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그 누구도 고통의 문제를 피하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생이 고난으로 가득하였습니까?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그렇게 경고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모든 인생이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인류의 조상이 가시와 열매를 얻는 것을 먹음으로 인류는 고통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모든 인생이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사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죄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한 관심을 그렇게 가지고 있느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은 지혜와 총명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시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다.” 하면 아담은 “안 좋습니다.” 하와가 “참 예쁘다.” 하나님은 “예쁘지 않다.” 이런 경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두 쪽, 세 쪽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결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경쟁하며 우주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려면 이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되는데 사탄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인생을 망치려고 한 것입니다. 사탄의 미혹이 이 세상에 계속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이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탄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죄를 통하여 사람들을 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욕의 노예가 되어 이 세상에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이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죄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본론

1. 고난의 원인

고난의 원인은 정욕에 따라서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욕이 인간을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타락한 성격, 방종, 마치 돌로 떡으로 변한 것과 같은 방탕이 있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쾌락의 환경, 자기의 잘남을 천하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력이 못 미쳐도 재력을 취득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을 떠나 무신론을 주장하고 물질 만능주의를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고난받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을 떠나 무신론을 주장하고 물질 만능주의를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기독교의 작가,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신앙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귀먹은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고통의 메가톤을 불고 호통을 당하도록 허락해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야 사람들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둘째가 달라는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방탕히 다 쓰고 돼지소굴로 들어가서 돼지 열매를 먹어도 없는 처지에 처해 고통으로 굶어 죽을 지경이 되니까 그는 회개했습니다. “내가 아들이라 일컬음 당하고 아버지에게 빈 손들고 가니 아버지께서 날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돌아왔는데 고난이 선생이었습니다. 고난을 당했음으로 이 사람이 회개할 수가 있던 것입니다.

전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노인들이 이야기 할때 소 움막에 불이 나거나 집에 불이 나면 빨리 가서 그 밥그릇을 소의 밥그릇, 짐승의 밥그릇을 뒤엎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밥그릇을 바로 세워놓고 짐승이 따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려고 하면 불빛을 무서워하는 소는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고분고분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소도 자기 장래가 여물통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물통 뒤엎어버리면 굶어죽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물통을 따라가지요. 우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사람들도 어려움을 당하면 어려움 당하는 그것을 따라서 나갑니다.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우리는 따라 나가지요. 먹을 것이 있는데 버린 사람 없습니다.


2. 새로운 인생

새로운 인생을 예수님을 믿으면 죽은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장 5절~6절)”

중생한다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난 영혼을 성전 삼고 거하시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모신 사람이거니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지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 양은 내 말을 따른다. 양의 성격이 이상한 것입니다. 양은 자기 주인의 말은 듣고 따라가지만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양 앞에서 아무리 인도하려고 해도 양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어 영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 우리들은 새로운 인생, 즉 중생 거듭난 삶을 갖게 된 사람으로 영도 살고, 혼도 살고, 몸도 살아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을 따라서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장 1절~2절)” 유신론적인 삶을 주장하며 성령으로 중생하여 천국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고난의 유익

고난은 고난 당하는 사람을 깨우치게 됩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인생길을 따라 회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녀들이 잘못을 하면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로 징계를 했습니다. 부모가 이렇게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도 우리를 그의 친 자녀로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징계의 유익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장10절~11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 우리가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세아 6장:1절)” 이사야도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장7절)” 그러므로 우리가 징계를 당하는 것은 변화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잘못된 길을 가다가 고난을 만났을 때는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를 고치고 치료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밭에 대나무가 울창하다가 바람이 불어도 대나무는 좀처럼 꺾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대나무는 줄기에 대나무 둥지가 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 둥지가 대나무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대나무는 좀처럼 부러지지 않습니다. 또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먼저 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그리고 나서 뜨거운 불에 넣어 굽습니다. 그러면 거친 그릇이 매끈하고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고난을 통할 때 더 아름다운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욥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10절)”

대나무가 바람이 불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것은 중간에 마디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162층인데 이 빌딩도 30층마다 대나무의 마디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넣었기 때문에 바람을 견딜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나무는 마디가 생기는 동안 성장을 멈춥니다. 겉보기에는 성장이 멈춘 것 같지만 실상은 마디를 속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생도 갖가지 장애물을 만나나 마치 성장이 멈춘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에 실패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인생의 마디가 생기는 시간이지, 버림받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인생의 마디가 많이 생길수록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욱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라도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고 다시 한번 힘을 내어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들의 삶에는 다 가슴 아픈 죄악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변화된 삶을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조용기목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장 6∼7절)

서론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6~7)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근본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본론

1. 기도로 맡기는 삶

 무슨 일이 생기면 기도로 맡기는 삶, 이것은 고난 없는 인생이 없듯이 다 시행되어야 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 17)

 여러분, 땅이라는 것은 지구 아닙니까? 지구 어느 곳에 가도 다 저주가 있습니다. 어디 가도 아담의 자녀로 지구에 사는 사람은 어느 곳에나 저주를 받고 고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났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일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늘 좋고 기쁜 하나님으로 알고 품에 품고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할 것이 이 하나님은 악인도 제 자식들 돌보는데 “하나님이 자식 돌보지 않겠느냐?” 우리에게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도 좋은 하나님에게 좋은 일로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폐병으로 누워 있을 때, 누님이 수를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틀을 앞에 세워놓고 수를 놓는데 나는 그 건너편에서 드러누워서 보이는 것은 수틀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온갖 붉은색, 흰색, 노란색. 엉망이에요 엉망. 그래서 “누나, 누나. 억지로 수를 놓을 줄 모르니까 이렇게 혼돈스러운 수를 놓지.” 그러니까 “야, 잔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나중에 결과를 봐라.” “결과야 뭐 나쁠 것있나? 한 가지지.” 그런데 그 수가 점점 이루어져서 탁 들춰내면서 “이제 보아라.” 아주 깜짝 놀라게 아름다워요. 수가. 그래서 ‘야, 좋은 요술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우리 생활이 수놓기야. 그저 이 일도 받아들이고 저 일도 받아들이고 이 일도 폐가 되고 저 일도 폐가 될지라도 나중에 결과에 보면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수놓기를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초청을 하고 있어요. 고난을 당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난당하는 자는 주님께 와서 기도하라는 초청장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에게로 와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는 초청장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문제를 가지고 나가서 기도해야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으로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성령께서 맡아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녹 18:1)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의 반대는 낙심하는 것과 빈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낙심하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도 낙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승리합니다. 시편 10편 17절은 “야훼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인간적인 힘과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자체, 즉 기도하는 것을 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100만 대군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사람의 힘을 의지하여 대적하고 나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야훼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야훼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 14:11) “나는 약한 자요, 나를 도와줄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놀라운 승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가야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반드시 기도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만 대군이 들어왔을 때에도 조그마한 숫자의 군대로 막으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말을 하고 각오하고 나오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서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건강이 악화 되어 영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심지어 편지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에 누워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상에 누워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선교 편지를 써 주고 18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병상에 드러누워서 다 했던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나중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내 생각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 중에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저 대신 주님께서 모든 일을 처리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주님께 맡기고 기뻐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로 맡기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일을 맡기는가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2. 감사로 맡기는 삶

 감사로 맡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7~18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빈손 털털 털어도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손에 있는 것 다 털어 버려도 아무것도 없는데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털털 털어버린 것은 내 손이고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거듭나서 아버지가 있는 자식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나 같은 하나님 아버지가 돌보아주지 않겠냐?”하는 내용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꿈과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해도 마음에 감사와 찬양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소망과 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소망과 꿈을 마음에 심으면 그것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 5)’

 하나님께서는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소망과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꿈이 있고 그 꿈을 믿고 그 다음엔 그것을 고백하면 성령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이 일을 합니다. 꿈을 꾸고 꿈을 믿고 또 입으로 시인하고. 이것은 금식하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입술에 말로써 귀에 들리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속으로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 안 합니다. 우리가 듣고 하나님이 듣고 들리는 소리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감사도 입술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 윌리엄 워드는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선물을 정성스럽게 싸 놓고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입술로 들리도록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의 말에는 권세가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에는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입술로써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으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들리게 말을 하면 우리의 생활 속에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귀로 들리게 하나님께 아뢰고 내 자신이 그것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조용기 영광 받으라.”

 여러분 자기 보고 자기가 말 하는 것,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지, 자기가 자기를 보고 기도하는 것은 아닌 줄 아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제일 처음에 아브람인데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서 불렀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하나님, 아브라함. 하나님, 아브라함.”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불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은 아브라함 아닌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자기 아내의 이름도 사라, 사란데 사래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사라로 바꾸었으니까 자기 마누라를 부를 때, 사라로 이름을 부르니, 아 하나님을 향한 이름, 자기 마누라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 자기가 부르는 이름, 등재해 있는 이름으로 이름을 부르고 이야기를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굉장한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분이 예배드리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의 부르는 입술의 소리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군대 앞에 행진하며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게 했더니 찬송이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셔서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서 감사 찬송을 드릴 때, 매여 있던 모든 것들이 풀어지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찬양을 부르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로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꼭 여러분 소리를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주시옵소서.” 그러면 “조용기 먹을 것, 입을 것 하나님이 주신다.” 들리는 소리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의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을 우리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내 가슴에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소리를 내어 아버지에게 아뢰는 것을 늘 게을리 하지말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 목회할 때에는 기도할 때, 내가 나를 불러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기를, “내가 귀가 어두워서 못 듣는 것 아니요. 다 듣고 있지만 너의 진실한 기도가 나에게 하고 너 자신에게도 하고 이것이 합동이 되어야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때부터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 나를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조용기, 하나님이 너를 치료하신다.” 하나님과 나에게 들리는 입술로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들리는 입술로 이야기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나가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의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의심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을 들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고 난 다음에 마음이 편안히 가라앉고 평안하고 잔잔한 기쁨이 가슴에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응답했다는 표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시기 전에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손과 발로서도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신앙적으로 어릴 때는 그런 것을 못했지만 신앙이 좀 자라자마자 제가 찬송하면 하나님이 박수치고 춤추고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있을 때, 우리가 이 몸의 즐거움을 가지고 “이 몸의~” 내가 할 줄은 몰라도 춤을 춰요 하나님 앞에. 춤을 추고 하면 하나님이 저를 보고 “오냐. 오냐. 오냐. 오냐. 춤추어라.” 이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을 때, 어찌나 괴로움이 많은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에 맨 자리에 와서 나 혼자 밤에 실컷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막 좋다고 춤을 추고 하면 마음이 편안히 가라앉아요. 그래서 춤을 추는 주의 종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숨어서 춤을 늘 추었어요. 생각하니까 이제 들켜도 괜찮다고 내가 생각됩니다. 좋은 결과가 되니까.

  잠언 16장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연약한 지라 자기 힘으로는 염려와 불안, 분노와 미움을 다스리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에서 ‘지킨다’라는 말은 군인이 성벽을 지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에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해야 성령께서 그 말 안에 꿈, 믿음을 통해서 말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서 살면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입술로 시인하며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을 택하여 구원하여주시고, 이렇게 존귀한 자로 저희들을 세워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이제 하나님 영광 위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로서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 받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너는 내 것이라/이영훈목사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이사야 43장 1~3절)

 귀한 은혜의 찬송 감사드립니다.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이번 한가위, 추석 명절을 맞아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개인, 가정, 생활, 범사 위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에 통일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북한에 들어가야 진정한 통일이 됩니다. 북한과 남한에 정권이 들어선 지 70년이 됐습니다. 사상적으로 너무나 다른 이질적인 두 나라가 됐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만이 우리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어서 8000만 명이, 우리가 주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그 날이 바로 진정한 통일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주시고 우리가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모두가 되도록, 우리 사명을 가지고 힘써 하나 되기를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이사야 43장 1절로 3절 말씀 가지고 “너는 내 것이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한 번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사람의 일생은 만남의 일생입니다. 만남. 태어나면서 부모님과 만나고 자라면서 형제와 친구들과 만나고 장성하여 평생 함께 살 배우자를 만나고, 그리고 또 자식을 낳아 자식을 만납니다. 이 만남이 그 삶의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관계. 중국 사람들은 이 관계를 ‘꽌시’라 그러는데, 이 ‘꽌시’가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해요. 한 5년은 그 사람과 교제하고 나서 믿을 만하다 하면 ‘꽌시’가 형성된다고 하는데,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 되고, 보람 있는 삶이 되고,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세 가지 모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이사야 서 43장 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만물의 영장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진화론자는 이 세상의 시작이 우연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저 수억 년 전에 우연히 아메바가 생겨나서 이것이 진화하고, 진화하고, 진화하고, 진화해서 사람이 되고 이 우주 만물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여기 있는 종이 한 장도 만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우주 만물은 말씀 하나로 지으셨지만, 흙으로 빚으셔서 그 코에 ‘훅!’ 생기를 불어넣어서,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동물들은 영이 없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두 손 모으고 기도하고 밥 먹는 것 봤어요? 그 개나 고양이가 혼은 있지만 영이 없어요.

 영은 하나님과 나와 교제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 된 장소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게 하시기 위해. 영광 돌리게 하시기 위해서. 이사야 43장 7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원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어디서 있든지, 나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가정주부는 그 집에서 가정 일을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장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이 찬양”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찬양은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고 이 찬양은 영원토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우리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상 16장 29절은 말씀합니다.

 “야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야훼께 경배할지어다”
 42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산간벽지 저 외딴 섬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을 찬양하라! 시편 113편 1절로 3절입니다.
“할렐루야, 야훼의 종들아 찬양하라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야훼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야훼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이스라엘의 찬양과 기도를 담은 시편 150편 마지막 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호흡이 다하는 그 날까지 주님을 찬양하다가 주님의 부름 받고 저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원자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고 둘째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구원자 하나님에 대하여 이사야 43장 1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성경에 구속하였다는 표현은 ‘값을 지불했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지불하셨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모든 빚을 다 갚으시고, 청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고귀한 구원을 받은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지만, 이 구원은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일생 다 바쳐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부족할 것이 구원에 대한 감사요, 감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물론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긴 했지만, 야곱이라고 하는 그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 사기꾼’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라고 부를 때는 ‘너희들이 그렇게 허물많고, 남을 속이는 자고 사기꾼 같은 그런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런 너희를 내가 구원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여주셔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할 때에는 당시 앗수르라고 하는 그 거대한 나라가 중동 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이 유다까지 멸망시키기 위해서 계속 침공해왔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완전히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남 왕국 유다를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산헤립 왕 때 18만5000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 왕국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쌓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사야서 37장 20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야훼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야훼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
 하나님께서 그 눈물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날 밤에 18만5000명 모든 대군이 다 멸살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37장 36절 보니까,
“야훼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000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날 밤에 18만5000 명의 대군이 한꺼번에 다 몰살당한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말하기를 페스트 같은 아주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아서 떼죽음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페스트는 얼마나 세계 역사 가운데 많은 피해를 입혔는지, 한때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이 페스트로 죽었습니다. 손만 잘 씻어도 이 전염병을 옮기지 않을 텐데 그런 위생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하면서 병이 또 옮고, 또 옮겨서 집단적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으니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나라는 이렇게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앗수르처럼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어려움, 고통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주님께서 위대한 승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내 마음속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먼저 다가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너지고 육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할렐루야!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사야 43장 3절입니다.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구원하신 하나님이 매 순간순간 어려울 때마다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시편 116편 6절입니다.
“야훼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116편 8절입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할렐루야! 얼마나 주님 은혜 감사한지.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시셨나이다! 이사야 43장 2절은 이와같이 고백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불의 시험도, 물의 시험도 우리를 어떻게 해치지 못합니다. 왜? 주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주님께 딱 시선을 고정하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NIV 성경을 보면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예수님께 초점을 딱 맞추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 초점을 딱 맞추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위대한 축복이, 승리가 우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자꾸 낙심하고 절망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났을 때, 내게 중병이 다가왔을 때, 여러 가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통을 당할 때,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동행자 하나님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동행자가 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 외롭고 힘들고 멀고 긴 인생길에 주님이 동행자가 되어주십니다. 이사야 43장 2절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내가 예수님 믿은 그 날부터 천국 갈 때까지 한평생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모든 환란과 시험에서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을 때에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홍해 바다였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고 전 군사들을 풀어서 쫓아옵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바로 군대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장사 지낼 데가 없어서 이 광야에 나와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오늘 너희에게 행할 일을 지켜보아라!” 그래서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 밀매 바다가 쫙 갈라져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넙니다. 그 뒤를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니까 물이 합쳐져 모든 군대가 한꺼번에 거기에서 몰살당하고 멸망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 11절, 12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
 할렐루야!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가게 하시고, 낮에 40도, 50도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데 시원한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주시고, 밤에는 너무 추워서 그들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추운, 그러한 온도가 떨어지는 기온인데 불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서 따뜻하게 해주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의 구름 기둥과 성령의 불기둥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 일생을 인도하시고 우리 일생을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승리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가나안 입구에 도달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한 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회고록이요, 설교입니다. 1장 30절에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3절에,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가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넘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다가온다고 낙심하여 주저앉지 말고, 여러 가지 어려움 다가온다고 몸이 아프다고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예수님은 위대한 승리자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 승리를 지금도 선물로 부어주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하지만, 문제를 만나지만, 질병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내게 상처가 다가오고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담대하라! 마음을 지키고 담대하여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만들어주시고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영국 최대의 설교자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님. 3대째 목사님 가정에 태어나서 벌써 16살 때부터 설교를 시작했고요, 스무 살 때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그 설교가 은혜롭고 성령이 충만하고 능력이 나타났는지, 스물두 살에 이미 영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그러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가 런던 중심부로 옮겨서 교회를 지었는데, ‘메트로폴리탄 테버나클’이라고 하는 이 어마어마한 교회를 지었는데, 지하철이 들어왔을 때 이 교회 때문에 지하철 노선이 이렇게 굽어서 가야 했다고 하는 그런 기록도 남겨져 있고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데, 그러나 그 목사님의 이면을 살펴보면 목사님이 많은 병에 시달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류머티즘 성 통풍과 신장병을 앓았는데, 너무나 통증이 심해서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있어서 외출을 하는 것이 참 힘들었고, 또 젊은 나이에 너무나 목회 잘하고 잘나가니까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많아 온갖 비난을 퍼붓고 그를 공격해서, 요즘으로 말하면 SNS 같은 것으로 막 공격해서 잘나가는 사람을 넘어뜨리려는 그런 모습과 똑같아요. 너무 스트레스도 받고 힘들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 우울증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냥 깊이 우울증에 빠져서 낙심했다가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고 그러면서 우울증과 싸웠고요. 또 그 아내 수잔나 역시 삼십 대에 신장병이 발병해서 평생 동안 아팠습니다.

본인도 아프고, 아내도 아프고, 사람들은 ‘젊은 녀석이 뭐하느냐’고 손가락질하고. 그런데 강대상에만 딱 올라가면 불을 토하는 설교를 합니다. 지금이야 과학이 발달해서 이렇게 좋은 마이크도 있고 스피커도 있어서 이 많은 성도님들이 한꺼번에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마이크가 없이 육성으로 만 명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어요. 불을 토하는 설교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어요. 그 소리를 듣고 은혜받고 변화되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평생 3,500번 이상의 설교를 했는데 그가 너무나 설교하는 데 전력투구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쉰여덟 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모님이 말씀하기를 “너무나 설교하는 데 집중해서, 온 에너지를 쏟아 빨리 돌아가셨다.” 그랬어요. 그 정도로 그냥 설교에 올인한 거죠. 목숨 걸고 말씀을 전했는데 이와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주께서 사역에 더 큰 축복을 베푸시려 준비할 때마다 낙심의 파고가 나를 덮쳤다. 해가 나오기 전 검은 구름이 뒤덮듯이 절망이 찾아왔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보다 내게 많은 축복을 주셨다. 문질러 닦아서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해주셨다. 광야를 통과해야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골짜기가 깊어야 산은 더 높다! 패배를 맛본 후에 승리하게 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문제가 다가온다고, 몸에 치료하기 힘든 병이 생겼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한평생 여러분과 동행할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신명기 1장 31절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고 상처 입고 지쳐서, 쓰러져 걸어갈 힘도 없고 일어날 기운도 없을 때, 나와 동행하시던 주님이 나를 덥석 안으셔 가지고, 그 사랑의 품에 우리를 안고 인생의 굽이굽이 어려운 시간을 다 이기게 만들어 주시고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지. 우리를 안고 가시는 하나님. 여러분, 세상에서 나 혼자밖에 안 남았다고 외롭다고, 슬프다고 눈물 흘리지 마세요. 주님이 그 눈물을 아시고, 슬픔을 아시고, 그 외로움을 아시고 여러분을 안고 가십니다. “낙심하지 마라. 슬퍼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한평생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와 동행하리라.” 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날마다 주님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보면 부끄러움뿐입니다. 상처도 많고, 슬픔도 많고, 문제도 많은, 또 여기저기 아픈 데도 있고, 말 못 할 고민도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우리를 사랑하여주셔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안고 가시는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절대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붙잡고 의지하며,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땐 우리를 안고 가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가슴속의 희망/조용기목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오늘 아침예배에 ‘저는 희망을 갖자.’ 이와 같은 내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경제적인 문제, 전투적인 문제, 국가적인 문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문제가 쌓여 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세계에 개인, 가정, 사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소망을 달라고 하면 “소망을 주지. 내가 바로 소망인데.”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1. 빛이신 예수님

 세상이 하도 추해지고 어두워지니까 우리들을 건져달라고 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기 위하여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어둠을 빛으로 정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은 죽어있으니까 하나님이 오시면 사람의 마음에 영의 등불이 다 켜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걸 통해서 인생에 빛으로 들어오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당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600년 전에 예수님 오시는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9장 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빛이 비치는 이 세상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말미암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우리가 넘어지지 아니하고 길을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해 시민희망지수를 조사했는데 전체 연령 중에서 30대가 가장 비관적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30대라면 가장 힘차게, 가장 의욕적으로 일할 나이인데 우리나라의 30대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우울증에 걸려 있고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지치고 고달픈 삶을 살고있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누가 그들을 구출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 힘과 생명을 주어야 하는데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빛과 힘을 줄 곳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힘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그러므로 그 예수님이 들어와야 힘과 능력과 용기와 미래가 있지 그렇지 않고는 아무것도 희망을 얻을 데가 없습니다.

 주님께 희망이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이라는 깊은 바다속에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면서 “내 삶에 희망이 있을 것인가?” 그 질문을 늘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주님 내게 희망이 있습니까?” “있고말고. 내가 그 희망 아니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얼마나 깜짝 놀랄 좋은 소식입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있고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이 일들은 찬란합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오중복음의 축복속에 들어가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모든 흉악한 죄가 다 용서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주님이 시인해주셨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행위가 없이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평생의 용서를 영원히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통을 통해서 병의 세계를 다스립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채찍에 맞을 때마다 우리들의 병이 고침을 받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채찍에 맞은 것을 믿어야 주님 얻어맞은 그 피가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에 허덕이는 이 세계에 오셔서 저주를 청산해버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로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성경을 해석을 정직하게 하지 못하고 너희로 부요케 할 것이라고 너희 영혼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육체의 생활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와서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벌로 저주를 받아서 헐벗고 굶주리고 살아온 그 모든 세월과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가 십자가 못 박히고 피 흘림으로 모든 가난과 저주를 처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살게 됩니다. 제가 건방진 말인 것 같지만 한참 6.25 전쟁을 하는 그 마당에 남쪽에서 남부여대하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 시내에 조그만 틈만 있으면 천막을 치고 들어가 살 때였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린 여러분은 그때 상황을 잘 알 것입니다. 내가 강단에 서서 내려다보면 이 4부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나하고 같이 주님을 믿었으니까 고생을 많이 같이 했어요. 여러분이 고생을 한 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제가 함께 고생했으니 친숙함이 깊기때문에 고생한 사람이 많이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물지게 지고 잡상인도 있고 가난하고 어려움을 해보려고 고통 많이 했는데 우리교회 와서 예수 믿고 용기와 힘을 얻고 난 다음 요사이는 그 사이 빵빵 자가용을 타고 와요. 굉장히들 부자가 됐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흘린 보혈로 네 죄와 병만 아니라 물질문제도 주님이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한 그가 가난하게 된 것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를 부요케 하려 함이라. 우리가 축복을 받고 부요케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다음엔 죽음,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하셨는데,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가장 큰 절망은 죽음입니다. 60년 동안 제가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의 장례에 참석하기도 하고, 또한 장례식 설교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거나, 어린 자녀들을 둔 어머니가 세상을 뜬 것을 볼 때는 정말 마음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죽음이라는 이 권세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죽음을 다스릴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관에 넣어서 묻으러 가는데, 통곡을 하고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가는데 예수님이 “거기 서라. 잠시 서라.” 그리고 관 뚜껑을 열고, “왜 이렇게 잠을 오래 자냐? 일어나” 그러니깐 “와, 오래 잤네.”하면서 일어났습니다. 뭐가 대단합니까? 완전히 죽어 파묻으러 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에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이들이 한 가정으로 사는 것인데, 여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가 죽어서 예수님께 연락을 해도, 그때의 통신수단으로는 빨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파헤쳐서 흙을 얹지 않고, 굴에 그냥 넣습니다. 다 묻으면 산굴에 무덤을 넣어서 무덤 문을 돌로 만들어서 막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사로는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됩니다.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마다 다 절망을 느끼고, 그 누이들은 ‘예수님이 너무 섭섭하게 일을 해주신다. 평소에 우리를 사랑해 주시더니 우리 형제가 이렇게 죽어서 무덤에 가서 안치하도록 기다릴 수가 있나. 이렇게 형편없이 대해주니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무덤에 가서 “무덤 문을 열어 놓아라.”하니깐 마르다가 “주님, 열어 놓는다고요? 무덤에 이미 들어가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무덤의 돌문을 열어서 뭐합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마르다를 딱 정면으로 보고, “날 봐.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을 볼 것이라고 늘 말하지 않았냐. 너희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을 믿으라.” 믿으면 돌문을 옮겨 놓고, 믿지 않으면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 그 여형제가 돌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돌문을 열어놓은 믿음은 행위를 믿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릇입니다. 적은 믿음은 적은 그릇이고, 큰 믿음은 큰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작게 믿으면 작은 기적밖에 체험 못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힘이 얼마나 큰지, 그 작은 겨자씨의 믿음도 태산을 옮겨 놓을 수가 있다. 그럼 그런 겨자씨 믿음이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것이 마음에 심어지면 태산을 옮기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엄격해졌을 때, 그 여자 형제들 마음속에 겨자씨보다는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나흘 만에 수의를 입은 채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2. 희망으로 가득한 삶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는 신앙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죄의 어두움이 세상을 다스릴지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모시면 희망찬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흑암의 권세 즉 마귀의 지배 아래 섬기던 자를 예수님의 나라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실천적인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믿을 때, 그 믿음대로 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나라로 이미 옮겨진 우리는, 마음속에 오중복음을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어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무얼 해야 되냐? 마음에 오중복음을 채워 넣으면 기막힌 사람이 됩니다. 오중복음을 만들어 놓으면 여러분 마음에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서 오중복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중복음까지는 물질적인 생각입니다. 그 다음, 4차원의 영성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오중복음을 4차원의 영성이 다스립니다.

 우리 환경은 생각과 꿈과 믿음과 신앙 선포를 통해서 다스립니다. 창조하고 다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었는데, 그거를 쓰지 못하고 있느냐?”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생활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4차원의 영성을 사용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차원의 영성을 사용하려면, 생각의 밭에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 생각이 있지요? 여러분은 생각이 있으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생각이 있는데, 생각에 무엇을 심느냐? 꿈을 심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무슨 꿈이냐?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여러분 마음에 소원하는 것을 마음의 생각에 꿈을 심습니다. 그러고 꿈을 심고 기도하면 믿음으로 변하고, 믿음을 가지고 창조적인 선언을 하면 오중복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결론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더 설교하겠는데, 오늘은 이것밖에 못 하겠군요. 우리가 여하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셔드리면 희망찬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중복음이 있으면, 오중복음까지는 물질이지만 그게 4차원의 영성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4차원의 영성을 통하여 꿈, 믿음, 창조적인 선언이 돼서 우리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 보면, 우리는 기막힌 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아멘.


보배로운 산 돌 예수 그리스도/이영훈목사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젖서 2장 1~5절)


귀한 찬양을 감사드립니다.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 대한민국에 통일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잘 진행되어서 북한에 복음이 들어가 복음을 통한 진정한 통일의 날이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복음성가: 약한 나로 강하게>

(1절)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2절)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3절)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후렴)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고 우리 기도에 웅답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북한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내려주셔서, 복음이 북한 전역에 증거되게 하여주심으로 무너졌던 모든 교회가 다시 수축되게 하여주시고, 북한 전역에 교회마다 부흥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남북 8천만이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통일의 날이 속히 다가올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2장 1절로 5절 말씀 가지고 “보배로운 산 돌 예수 그리스도”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제목을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배로운 산 돌 예수 그리스도” “보배로운 산 돌 예수 그리스도”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합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 어떠한 조건도 갖추지 못한 우리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첫 출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신앙이 시작하게 된 것이고, 우리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일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 일생은 감사의 일생이 되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택하여 구원하여주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영광 위해 살기 원합니다!” 날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 자녀답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버릴 것과 사모할 것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먼저 버릴 것이 있고, 또 사모할 것이 있다고 저들에게 권면합니다. 버릴 것과 사모할 것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2절은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은 평생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 원하는 대로 맘대로 선택하고 결정했지만, 예수를 믿고 난 다음부터는 그 선택이, 그 결정이 주님 보시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냐, 기뻐하지 않는 것이냐에 기준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하면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먼저 이러한 것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버릴 것이 무엇입니까? 2장 1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랬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죄에 속한 사람들이 늘 행하는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다. 이러한 나쁜 것을 버리라.”하고 말씀합니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제 더 이상 악한 의도를 갖고 남을 해치는 그러한 악독을 버리고, 남을 속이는 기만을 버리라.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모습을 버리라.”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듣는 거리에 나가서 크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합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말씀을 지켜 행합니다. 난 이렇게 거룩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탐욕과 교만과 분노와 시기, 질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러한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시기를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서 고쳐야 될 것이 하나 있어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해주고, 가서 “참 잘됐다.”하고 그렇게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말로 남을 참소하고 비판하고 물고 뜯는 이러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 SNS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이야기들이 부정적인 이야기입니다.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얘기는 적고 대부분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그 사람을 끌어내리는 그런 부정적인 말로 뒤덮여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같은 잘못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절대 그러한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이 좀 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고, 좋은 것은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그리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참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나 없나 들춰내 갖고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는 주님 앞에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모습을 버려야 되고,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장 2절에,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아이가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한 끼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을 아는데, 말씀을 하루 이틀 건너뛰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데도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늘 사모하는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믿음이 자라게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돼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로 17절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 목사님. 기도의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도의 사람이기 이전에 앞서서 그는 성경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성경을 200번 정도 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말씀을 사모했는데, 100번 읽을 때 그 성경을 읽는 것이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무릎을 꿇고 말씀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경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영적인 생명력은 우리의 생각과 생활에 말씀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가와 정확하게 정비례합니다. 저는 100번이 넘게 성경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매번 기쁨이 점점 커졌습니다. 성경은 늘 저에게 새로운 책으로 다가왔습니다. 날마다 성실하게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날 성경을 읽지 않았던 시절을 저의 ‘잃어버린 세월’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성경을 읽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TV 드라마 앞에서 ‘헤...’ 하고 정신을 빼놓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까? 신문 보며, 잡지 보고 이런 시간은 얼마나 시간이 흘러가는지 모르고 거기 빠져있는데, 말씀 보는 것은 너무나 소홀히 했다는 것을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일생이 말씀과 동행하는 일생이 되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1년에 한 번 이상은 통독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지구역장 하려면 열 번 이상은 읽어야 합니다. 아멘 소리가 잘 안 나오네. 안수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돼서 교회를 섬기려면 한 20번은 읽어야 될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섬기는 직분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에 굳건히 서서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뜻을 실천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께 나아가라

둘째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3절, 4절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날마다 우리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로 나아가고, 찬송으로 나아가고, 예배를 통해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라!” 체험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야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만남의 체험인 것입니다. 내가 지식적으로 아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감동이 오고, 기쁨이 넘쳐나고, 감사가 넘쳐나는 그러한 체험을 날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배 구경꾼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예배 시간에 구경꾼으로 왔다 가는 것처럼 그 삶이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이 나의 운명을 바꿀 그런 축복의 시간인데, 그런 기적의 시간인데,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복된 시간인데. 예배를 통해서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 예배 시간마다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 은혜 감사합니다. 내 일생 다 가도록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에, 소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 믿음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그 기독교 박해를 피해서 뿔뿔이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버린 바 된 모습으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네로 황제 시대 이후로 시작된 기독교 박해가 약 250년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어서, 또 불에 타서, 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귀족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버린 바 되었지마는 주님은 그들을 붙드시고, 세워주시고, 함께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핍박을 당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가서 핍박을 당할 수도 있고, 어려움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면 주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을 모든 고난을 이기게 만들어주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시편 118편 17절에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를 핍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주님이 다 심판하시고 우리를 그들 앞에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고난 뒤에 다가올 영광과 축복과 이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의 때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또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나를 도우시고 함께하여주옵소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힘든 일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일이 다가옵니다. 요즘 참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업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중학교만 올라가면 벌써 사춘기가 와 가지고 반항하고 집을 뛰쳐나가고,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다가오지만, 그때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인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눈물의 기도를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셔서 주님의 기적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3.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며 거룩한 제사장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셋째로,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할렐루야! 여기 보니까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들어와 계셔서 내가 신령한 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집인 우리의 집을 잘 보전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관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신령한 집을 함부로 내버려두면 안 되요.

성격이 부지런한 사람은 일을 찾아서 합니다. 쉬는 시간이 없어요. 집에서도 계속 바닥을 청소하고 또 닦고 또 닦고 반짝반짝하게 만들고, 설거지통에 그릇 쌓이는 것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주저 없이 또 닦고 또 닦고 또 닦아요. 그런데 성격이 원래 게으른 사람은 막 설거지 이만큼 쌓아놓고. 집안에 청소하지 않아서 먼지가 쌓여 가지고 이렇게 만져보면 막 먼지가 묻어나오고.

그런데 여러분은 신령한 집이기 때문에 그 집을 아름답게 가꿔야 됩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집을 아름답게 가꿔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말씀도 보지 아니하고, 예배드려서 예배드릴 때도 전혀 그냥 구경꾼으로 앉아 있으면, 그 집에 먼지가 가득 앉아서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집을 잘 가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집인 우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 건물은 예배드리는 우리를 예배 잘 드리도록 건물이 되어서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고, 진짜 교회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령한 집이 되어서 주 앞에 거룩한 제사장으로 예배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주춧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춧돌을 빼내면 건물이 흔들리고 집이 무너지게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 교회의 주춧돌이 되시고,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이 전부가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희망이 되시고,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지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바로 세우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이 믿음의 고백의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 터인데, 그 어떠한 흑암의 권세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기독교와 맞서서 이긴 정부가 없습니다. 기독교와 맞서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그 악한 세력을 하루아침에 와르르르르 무너뜨려버리시는 것입니다.

1917년, 기독교 국가였던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잘살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의 문을 닫고, 기독교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74년이 지난 후에 1991년에 소련은 와르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한때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과 맞서는 대국이라 했지마는, 소련이 무너진 다음 들어가 보니까, 어떻게 이 나라가 이렇게 유지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1993년도, 94년도, 제가 6개월마다 모스크바에 들어가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그 당시 한 달 평균 생활비가 20달러입니다. 2만 원, 별로 놀라지도 않으시네. 2만 원, 20만 원도 아니고 200만 원도 아니고 2만 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 두 끼만 먹습니다. 딱딱한 빵, 요만한 것 하나가 한 끼입니다. 정말 딱딱하고 질기고 맛이 없는데, 그게 한 끼에요. 그것도 세 끼를 못 먹고 두 끼만 딱딱한 빵 하나를 먹고 지내는데, ‘아!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핍박하더니 이렇게 가난과 저주가 다가왔구나.’ 완전히 소련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마음껏 주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이 놀라운 일을 감사해야 됩니다. 이 우리는 주 앞에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우리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택하고 부르셔서 위대한 사명을 맡겨주신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택하신 족속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은 여생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33년 동안 몸담고 있던 불교에서 벗어나 승려였다가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서건석 성도를 소개합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사춘기 때 방황하면서 나쁜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먹을 휘두르며 깡패로, 폭력배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서 그는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주도까지 도망을 갔는데 한밤중에 목탁 소리를 듣고 찾아가 보니, 그곳이 절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주지 스님을 따라서 훈련을 받으면서, 하루 삼천 배씩 하면서 승려가 됩니다. 승려가 돼서 나와가지고 금산에서 이제 절을 짓고 승려로 살게 되었는데, 이분이 결혼을 합니다. 승려도 결혼을 하는 모양이에요. 그래 결혼했는데, 크리스천인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변화되어서 하나님 일꾼 되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합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심방 오신다고 하니까, “제 남편이 승려예요.” 그래 목사님도 놀래고, 교인들도 놀라고. 그래서 교인들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분 남편이 변화되어서 예수 잘 믿게 하여주옵소서.” 본인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 남편이 청년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 만나 변화된 것처럼 변화되어서 하나님 사람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되는 분이 나가던 교회가 오래되어서 건물에 금이 가고, 비가 새고, 건물을 다시 짓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 남편이 그 소식을 마을 사람에게서 전해 듣고 한 번 가보니, 건물이 낡아서 다시 안 지으면 굉장히 위험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집에 와서 그 부인에게 말합니다. “교회 짓는 데 돈이 얼마나 드냐?”고. 그래서 승려가 건축 헌금을 해가지고 교회를 다시 지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교회 올 때마다 교회에다 데려다주고 본인은 가는데, 성탄절 날, 부인을 따라 교회 들어와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찬송을 들으니까 마음이 뭉클해지고, 내가 어떻게 살았나 주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부인을 따라서 교회를 나오게 되는데 부흥회 때 나와 가지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강사 목사님이 아픈 데에 손을 얹고 기도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고쳐주신다고 하니까, ‘아니, 저 사람 사기 치는 것 아니야?’ 그러나 혹시 하는 마음에 오랫동안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는데, 허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하나님 살아 계시다면 제 허리를 고쳐주옵소서. 약으로 또 의학적으로 못 고치는 이 허리를 고쳐주옵소서.’ 기도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까 허리가 말끔히 나아버렸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33년 동안 승려 생활에서 완전히 돌이켜 모든 자기의 삶을 정돈하고 올해 첫 주부터 교회를 열심히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주님께 돌아오기까지 3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죄 짓고 불의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용서하여주옵소서. 너무나 많은 세월을 방황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을 직접 더 간절히 만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절을 처분하고 거기다가 기도원을 짓는답니다. 할렐루야!

우린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것은 이 어둠이 깊은 세상에 사랑의 빛, 치료의 빛, 용서의 빛, 구원의 빛을 비추라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여생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아름답게, 위대하게 쓰임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 것, 주님 용서하여주시고 이제부터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게 하여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을 다스리는 믿음/조용기목사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 8장 23~27절)

서론

 ‘고난을 다스리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이고 난 다음 주님이 이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를 건너서 자기가 옛날 고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풍랑 위 바다에 띄워진 조그마한 배의 뒷머리에 주무시면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제자들은 곧장 물에 빠져 죽겠거든요.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파도야, 바람아, 잠잠하라.” 그러니 파도도 그렇게 큰 파도가 삭 없어져버렸어요. 바람이 삭 그쳐버렸어요. 놀랍고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주 놀란 얼굴로 예수님을 쳐다보니 예수님께서 “왜 두려워했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작은 자들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살아가면 인생의 파도를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역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지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큰 고통을 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론

1. 절대 믿음의 모범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 과거의 마귀의 수단은 통과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큰 놀입니다. 적은 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큰 놀이라 하면 한강같이 조용한 강물이 아닙니다. 태산을 뒤엎을만한 파도가 친 것입니다. 근데 거기에 조각배 하나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태워서 건너가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눈도 깜짝할 사이 없이 물에 빠져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조각배에 타고 그 놀을 겪으면서 주무십니다. 사람이 생각해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감당하시고 거기에서 주무시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의지하면 못 의지할 것이 없다.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참말인 것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놀과 같은 시련을 겪을 때, 적은 시련이나 큰 시련이나 예수님이 오시면 까딱없다고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랜 목회생활 동안에 하나님 앞에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 교훈이 뭐냐 하면, ‘귀신과 같이 살지 마라. 항상 귀신을 쫓아내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귀신이 와글거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귀신이 가는 곳마다 와글거린다는 것을 못 보니깐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귀신과 같이 살지 말라’고 나보고 ‘항상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수차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그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잠 잘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 더러운 귀신아! 나하고 같이 잘 수 없다. 내 어느 곳을 괴롭히는 괴로움을 데리고 물러가라!” 그리고 어떤 때에는 밤중에 소변을 보고 싶고 몸이 괴로울 때, 그대로 자면 안 됩니다. “하나님, 몸이 괴롭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너 더러운 귀신아! 네가 나를 괴롭혀도 예수님이 계시므로 내가 너의 압박에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 다음 잠을 깨고 난 다음 새벽에 일어날 때, “이 귀신아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나하고 관계가 없다. 너희가 훼방을 할 수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러고 내 몸에 허약이 있고 괴로우면 주님께 기도하여 치료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이 와글거리는데, 이걸 우리가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면, 우리의 생활에 귀신의 방해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나니’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귀와 상관없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대적을 해야 피하지, 가만히 있는데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풍랑이 일어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보면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주님이 주시는 이 보증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풍랑이 불어 닥치는 상황에서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절대 믿음을 가져라’ 그냥 믿음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가져라. 절대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 적은 믿음을 꾸짖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옮길 수가 있는데 그보다 더 작은 믿음을 가지고 꾸짖음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은 단순히 마음이 약한 문제가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해도 하나님이 그 길을 완성하는 것이니깐, 아무리 능력을 다해서 하나님 없이 길을 계획해도, 하나님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집을 짓는데 도움을 주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가 헛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절대 신앙인 것입니다. 절대로 믿고, 절대로 맡긴다.

 인생이 위기를 만났을 때 절망하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피난처가 되신다는 겁니다. 시편 34편 18절로 19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믿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바람처럼 생각하고 맙니다. 이제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 예수님께 절대 의지하고, 절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느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구원을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깨웁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의 교회를 흔들고 깨우는 것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는 교회가 세계를 다니면 열 손가락을 헤아려서 얼마 안 됩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을 강조하면 놀랍니다. 왜? 새벽에 기도한다는 것은 그 시간이 잠이 제일 달콤하다고, 새벽기도를 할 수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고 금요일 날 철야기도도 말만 철야기도지 방문기도입니다. 교회 와서 한번 보고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들이 놀에 흔들리면서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철야기도, 새벽기도 이 여러 가지 기도의 방법을 통해서 기도해서 예수님을 깨우시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이 우리가 시험을 당해서 낭패하게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고난을 다스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제일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2.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

 그 다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면,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에게 재앙을 주거나 환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평안하게 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시험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친구에게 상처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었다는 우리들은 두려움에 떨리는 것이 나이를 먹을수록 두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생활에 시험이 들까, 일이 잘될까, 몸이 병들까, 이러한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자녀의 앞날 때문에 두렵고, 병에 걸리지 않을까 두렵고, 불안한 노후가 두렵습니다. 혹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마음에 들어와서 억누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놀이 내려치는데 그 위에 조그만 조각배에 예수님이 주무시니깐, 예수님은 안 보이고 그 놀과 물결만 보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다스리는 삶을 살려면,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계신데, 십자가를 보지 않고 갈보리 산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 주를 믿는 사람도 문제가 다가오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고 탄식을 하고 뒤로 물러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4절에 ‘내가 야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장 17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고, 기도하고, 이런 것이 합쳐져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과 기도, 우리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면 터널을 통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가 이 도로에서 저 도로 가는데 터널이 몇 개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이 터널을 지나갈 때 겁을 내서 떠는 사람 있습니까? 핸들 잡고 덜덜덜덜~“아이고 이거 어쩌나” 그렇게 하는 운전수가 없습니다. 택시뿐만 아니라 자기 자가용을 끌고 갈 때도 차를 터널을 통해서 갈 때 안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터널에 들어가면 출구(입구)가 있으니 반드시 나가는 입구(출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긴 터널을 간다고 해도 들어갈 때 벌써 마음속에 출구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터널이 겁나지 않습니다.

 인생에 터널이 많이 다가옵니다. 우리 인생에 적은 터널, 큰 터널이 다가오는데, 겁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들어가는 데가 있으면 나오는 데가 있습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못하게 나오는 길이 없는 인생의 터널은 없습니다. 들어가면 나갑니다. 주인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터널은 두려워 떠는 사람이 없는 것이 출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난이란 터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지만, 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내 말을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모든 터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나도 출구가 있기 때문에 컴컴한 터널을 지금 지나가고 있어도, 얼마 안 있으면 출구가 나올겁니다. 여러분도 어려움을 당하면 출구를 바라보면서 출구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1절~2절)’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멋있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야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편 14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말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근데 이 말이 4차원의 영성으로서 말은 우리가 형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이 있는데 보질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권능이 큽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지금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저희와 함께 있으니깐 우리가 말하는 것이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것도 말을 통해서 축복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줄 때 언제나 말부터 먼저 하신 것입니다. “동쪽을 보라. 서쪽을 보라. 남쪽을 보라. 북쪽을 보라. 네가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식들에게 주겠다.” 축복도 말로써 주셨지, 실제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주시되 시간이 지나매 그 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굉장한 언약의 은혜를 여러분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야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편 14절)’ 입의 말, 마음의 묵상, 이것이 이루어지길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축복을 주려거든 창조적인 말을 이웃에게 하십시오. 말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이고 일이 잘 되겠네,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잘된다.” 그 말은 축복이 그 말을 신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잘되게 하기 위해서 축복을 해야 되는데, 아들과 딸에게 되기를 원하는 말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웃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면 ‘빛이 있으라’ 할 때 빛이 생긴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 16장 24절)’라고 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언 20장 19절)’ 화도 말로 따라옵니다. 말을 통해서 축복이 가기도 하고, 말을 통해서 화가 따라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 많은 사람 친구 삼지 말라고 성경에 말하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계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장 45절)’ 입을 손수건으로 닦는데 이거는 괜찮아요.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이 축복을 싣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병자를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이 나을지어다!”, “믿습니다.”하고 받아들이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왜 말이 무서우냐,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모세가 열두 지파의 열두 스파이를 가나안 땅에 미리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탐을 하러 간 다음에, 열두 명을 보냈는데, 열 명이 아주 흉악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을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듣고 그 말에 동요를 해서 반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계획한 일에 대해서 대항을 하고 반대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진노해서 그 사람들은 다 죽고 말았지만요. 거기 가나안 땅에 곧 들어갈 것을 그 사람들 말 잘못해가지고서 못 들어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했으면 그 말을 가지고 나가야 되지, 자꾸 변화를 시키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과 열 사람의 입에서 나온 불신앙의 말 때문에 열 명의 정탐꾼이 전한 부정적인 보고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퍼져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높고 이처럼 무서운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을 말을 통해서 받은 사람은 욥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자식들 다 죽고, 곡식 거둔 것 다 빼앗기고, 몸은 병들고, 아주 불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부정적인 말을 안 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신앙고백을 보면, 비록 자기가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은, 하나님의 고통이 자기를 금 같은 사람이 되게 만든다고, 고통을 통해서 모든 찌꺼기가 불타버리고 순수한 순금이 되어 하나님께 나간다고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욥은 입에서 좋은 말만하고 원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이와 같이 욥이 말한 것입니다.

 불을 통과함으로서 찌꺼기가 불로써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고단한 땅에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 고난을 태우고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이익을 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건져주는 경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서 힘있는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제사가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말은 하나님이 한없이 좋아하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언어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언어가 감사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받으셔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한 수필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인데, 한 곳은 천국이요, 한 곳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 곳은 천국에 하나님의 거처가 있으면, 따로 이 땅에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러니 여러분 감사한 성도들이 이 4부에만 해도 굉장히 많으신데, 거기 다 하나님이 들어가 계시니깐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아끼지 않고 해야 될 것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장 17절)’고 바울선생이 말하고 있는건데, 바울선생이 신약성경에 들어와서 제일 일도 많이 하고, 제일 감사를 많이 한 분입니다. 여러분도 일생에 감사를 많이 하십시오. 기억에 남는 축복이 감사를 따라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장 9절)’ 이것은 바울선생이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없으면 낮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병이 들어봐야 건강이 좋고 건강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병이 있으면 건강이 있습니다. 천당이 있으면 지옥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왜 고난이 다가오느냐고 묻습니다. 고난을 당해야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장 6절)’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주님은 내 편이시라/이영훈목사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야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야훼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편 118편 5~9절)

 

오늘은 시편 118편 5절로 9절 말씀을 가지고, “주님은 내 편이시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큰 소리로 한 번 따라 해주세요. “주님은 내 편이시라” “주님은 내 편이시라” 오늘 이 말씀의 제목으로부터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문제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고, 또 고통 가운데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감기 한 번 앓은 적이 없다.”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잔병치레하면서 날마다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문제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헤쳐 나아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밝히 그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갑자기 내 몸이 약해지고 큰 병이 임했을 때, 큰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1. 부르짖는 신앙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부르짖는 신앙으로 무장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 5절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안전한 자리에, 견고한 자리에 세워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난의 때에 우리가 깨어지고 낮아져서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만드는 훈련 과정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해집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낮아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가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갑자기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 탄식하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주님, 나를 도와주셔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여주시옵소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세운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선포해라.”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인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는 ‘아니, 내가 왜 우리 원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까?’ 그래서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고난의 풍랑이 일었습니다.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온 배에 있는 사람이 다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때때로 나 하나의 잘못 때문에 온 집안이 풍랑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요나가 깨닫고 “저 때문에 이런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저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까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큰 물고기가 딱 기다리고 있다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여러분,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다는 것은 죽음의 상태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위에 음식이 들어오면 위가 산을 내가지고 음식을 소화시켜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내려보내는데, 마찬가지로 이 물고기도 뭔가 큰 걸 털푸덕 받아먹었으니깐 이것을 소화시키려고 막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위에서 분비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냄새나고 고통스럽고 힘든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나는 부르짖었습니다. 캄캄한 물고기 배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요나서 2장 2절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부르짖었더니!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절망의 자리에서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의사가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그때 주님께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에서 자유함을 받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를 명하여 육지에 토해놓게 했습니다. 육지에 토해놨는데 그곳이 바로 니느웨 성 앞입니다. 가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 온 백성이 다 회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켰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더 자라게 하고 말씀에 더 순종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문제를 만났을 때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상시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움 당할 때는 우리가 기도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늘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기도의 습관을 쌓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40편 1절, 2절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구렁에서 끌어올리시고!” 할렐루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그 깊은 절망의 자리에 처했을 때 깊은 웅덩이에 빠짐 같은 그러한 상황에 있는 모습에 처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편 111편 4절입니다.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야훼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예레미야 33장 3절을 다 같이 고백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에 주님의 응답과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19절은 말씀합니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나를 구원하셨도다! 할렐루야!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문제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여 응답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임합니다. 주님의 치료가 임합니다. 주님의 회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2.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

 그런데 주님께서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평안을 허락해주십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편이라.” 할렐루야! 둘째로,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118편 6절에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할렐루야! 시편 56편 4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위대한 선언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계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 바울은 선포한 것입니다. 시편 54편 4절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할렐루야! 대부분 환란이, 시험이, 고난이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참 강한 것 같고 과학이 발달하여 달나라에 로켓도 쏘아 올리고 온갖 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을 정복한다고 하지만, 말 한마디로 무너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그러더라 하면 그 말에 상처가 되어서 그냥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려앉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1980년대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요. 공부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일 년에 집을 나가는 청소년들이 300만 명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의 ABC 방송에서 집 나가는 아이와 부모를 연결시켜주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왜 집을 나갔느냐? 어느 날 부모 중에 한 사람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릅니다. “보기 싫으니까 저기 꺼져버려. 어떻게 너 같은 것이 태어나서 날 괴롭히느냐?”하고 부부가 싸움하다가 아이를 보고 소리친 것인데, 아이는 그 말에 그냥 마음에 탁 상처로 비수처럼 말이 꽂혀가지고 ‘난 잘못 태어난 인생이구나. 엄마 아빠가 날 쓸모없다고 그러고, 보기도 싫다고 그러고, 왜 너 같은 것이 태어났냐고 그러고. 나는 이 집에 있을 가치가 없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는 거예요.

 우리 어른들이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화가 났다고 내가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다 쏟아내면 그것이 아이에게,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너 같은 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날부터 ‘난 잘못 태어난 인간이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 난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가고, 많은 문제 속에 살고 있는 그러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혹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 다투고 싸우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나를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온갖 악한 말로 나를 참소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 듣고 무너지지 말고 주님께 딱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8편 7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로마서 12장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난 다음, 감정이 폭발해서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무슨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 쫓아가서 “너 그때 그런 말 했다면서.” 확인도 안 해보고 먼저 큰 소리가 나가지고 서로가 감정이 폭발하면 큰 싸움이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끼리 큰 소리 내고 싸우고, 싸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부부 싸움 잘하는 사람 보면 끝까지 서로가 안 질라고 그러고, 그래서 자꾸 싸움이 커집니다. 한 말하면 두 말하고, 두 말하면 세 말하고, 세 말하면 네 말하고, 그래가지고 밤새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이긴들 이기는 게 아니에요. 이기고 나면 그 마음만 씁쓸하고 집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끼리 다툼이 생겼을 때에 져주는 게 낫습니다. 왜 억울하게 져줍니까? 져주시면 되요. 그럼 내 마음이 편안해요. 주님이 책임져주시니까. 주님이 그 사람을 또 야단쳐주실 것 아닙니까. 쪼금 억울한 것 같아도, 쪼금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렇게 살면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손해 보며 살지요 뭐. 아, 유행가도 있잖아요. ‘바보처럼 살았군요.’ 좀 바보처럼 살자고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지적으로 좀 저능한 사람이래요. 늘 웃으니까. 허허허허허. 누가 욕을 해도. 허허허허.

 좀 그렇게 살면 안 될까요? 우리 인생이 왜 너무나 그렇게 따지고 이것이 옳고 이것이 그르고, 그래서 소리 지르고 내가 이겨야 되고, 내가 저 사람을 갖다가 밟아야 되고, 꼭 내가 승리해야 되냐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내가 너의 마음을 알고 내가 너의 그 진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다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와서 여러분을 물고 뜯는다고 할지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전진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이 찬송가 88장인데 2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맘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도 주님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나를 지키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

내 맘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도 주님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나를 지키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아멘!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할렐루야! 참 주님의 은혜 감사하지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돌보아주시는 우리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3.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가 환란에 처했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118편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야훼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을 당하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보세요, 시편 146편 3절에도,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권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권력이 없습니다. 영원히 힘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모든 기도를 응답해주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시편 118편 21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118편 23절에, “이는 야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할렐루야!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절대긍정의 믿음입니다. ‘주는 나와 함께하신다. 반드시 나는 이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한다. 반드시 주님께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건져주신다. 내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절망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여, 우리 모두가 큰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로부터 응답받고 상급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아멘은 했는데, 나오면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문제가 다가오면 흔들리고 절망의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있으면 안 되고, 환란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시험이 다가와도 억울한 일 당해도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 다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믿음의 전진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넘치는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8편 28절 29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3편 1절로 2절, “할렐루야, 야훼의 종들아 찬양하라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야훼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할렐루야! 성경은 우리에게 찬양하라고,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했던 지난 7월 달에 태국에 있는 그 동굴에 갇혔던 13명 그 구조 소식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 사건에서 화제가 되었던 한 소년이 있는데, 한 소년의 이름이 바로 ‘아둔’입니다. 유일한 크리스천인데, 이 동굴의 길이가 얼마나 길고 먼지 약 4킬로미터 정도 되는 동굴인데, 물이 들어차가지고 중간 중간에 다 물이 차서 이 굴을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갇힌 지 열흘이 지나도록 아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잠수부원 하나가 그 긴 길을 굴속을 잠수하고 헤엄쳐 들어가서 가보니, 그들이 살아있는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이가 이 아둔 하나였습니다.

이 아이는 그 태국에 와서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그곳에 컴패션이라고 하는 단체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곳에서 신앙생활하고, 영어도 배우고, 미얀마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또 찬양을 잘하는 그러한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유일한 크리스천인데, 이 소년이 이 굴에서 절망 가운데 ‘이제 우리 모두가 죽는구나’라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 이 소문이 알려져서 전 세계에서 잠수부들이 한 백여 명의 전문가들이 오고 많은 구조대원들이 왔는데 구조대원 한 사람이 이 아이들을 구조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그 세상을 떠난, 순직한 구조대원을 위해서 절에서 추도식을 갖게 되었는데, 본인은 크리스천이라고 교회 와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고립된 지 10일째가 되자 저희는 참을성을 잃어갔어요. 희망도 사라지고 기운도, 용기도 없어졌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저는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너무 어린 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모든 것에 능하십니다. 지금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지켜주세요. 이 자리에 함께해주시고 저희 13명 모두를 도와주세요!”
코치 한 사람과 열두 명의 축구단인데, 열한 살부터 열여섯 살짜리의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굴 속에서 열흘 넘게 굶주리면서 이제는 다 죽었다고 희망의 끈을 놓고 있었을 때, 이 아둔은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했는데, 기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저 컴컴한 어두운 곳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그가 영국인 잠수부원입니다. 구조대원이 와서 이 아둔과 영어로 대화를 해가지고 소식을 밖에 알리고 구조해내게 되었는데, 그는 간증했습니다. “구조대원이 우리를 구하러 왔을 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랐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할렐루야.
이 소식이 알려져서 미국 컴패션에서 이 아이가 자랄 때까지 모든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했고, 또 국적을 갖지 못했는데 태국 시민권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절망이 찾아오고, 문제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아직 희망이 있다/조용기목사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복음 10장 46∼52절)

서론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다른 데 목을 내밀고 찾지 말라. 네가 숨 쉬는 곳에 내가 있고, 네가 고함치는 소리에 내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니, 나를 너희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여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이 수렁에 빠지면 누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수렁에서 절망하고, 절망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스트레스를 받아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참 무서운 일인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려야 해요. 스트레스에 끌려다니면 안 됩니다. 스트레스를 여러분께서 언제든지 다스리고 그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가 와서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절망함을 주어서 우리를 죽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막아주시고, 생명을 주되 영원한 생명을 우리 마음속에 주셔서, 스트레스를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본론

1. 길 위의 인생

 오늘 말씀 가운데 보면 우리가 종종 보던 말인 것입니다. 한 가족이 있었는데, 아버지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스스로 사는데 힘이 들고, 아들은 거지였습니다. 그 옛날에는 거지가 길거리에 앉는 데에도 상좌와 하좌가 있어서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살기가 힘들었어요. 절망 일보 직전에서 목숨이 걸린 일인데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여리고 성의 밖에 그래도 제법 좋은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의 삶이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는 구걸을 통해서 인생을 사는 그가 좌절 일보 직전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라고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성문 밖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에게 가면 전에는 걷지 못하던 사람도 벌떡벌떡 일어나 걷고, 말 못 하는 사람 말을 하고, 못 듣는 사람 듣고, 못 보는 사람 보게 해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이야기로 들었으나 점점 이것이 진실하고 사실적인 것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마음속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탄식을 잘하고 울고 하던 사람이 웃고 희망이 찼습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의 병이 나았냐?” “오늘은 맹인이 나았다.” 매일 매일같이 병 나은 소식을 듣고 ‘나도 병이 나을 수 있다. 나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지만 예수를 만나면 내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불꽃을 태울 수가 있으니 예수님을 나는 만나야 되겠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가 돈 한 푼 달라고 손을 내밀고 간구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언제 한번 지나가느냐’ 그것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맹인이니깐 눈이 안 보이니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오는지 안 지나오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곤두세워서 있는데, 하루는 사람들이 많이 여리고 성을 지나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왔다, 갔다 하네.”, “야 이 사람아 그것도 모르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어? 예수가 지나가요? 아이고 이때를 놓치면 안 되겠다.” 그는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 말소리가 너무 마음을 진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이 “아 거 참 시끄럽다. 좀 조용히 해라.” 그러니 바디매오는 시끄러운 것이나 조용한 것이 상관 안 됩니다. 일생일대의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얼마나 크게 고함을 쳤던지, 여리고 성 입구가 쨍쨍 울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다가 말 걸음을 중지시키고 뒤돌아 바디매오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좀 보십시오. 예수님이 바디매오 곁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찾아야 예수님이 응답한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쳐다보기 전에 바디매오를 돌보아 줄 수 있을 땐 그 바디매오 곁을 지나오면서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예수님이 서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르짖는 것 흉보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때는 체면불구하고 고함고함을 치고 하니, 점잖은 사람이 보기가 사납다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병 든 점잖은 체를 하겠습니까? 손가락질 받아도 사는 게 좋지, 점잖게 죽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점잖을 빼고 “예수님 오셔서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목숨을 다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서셔서, “내게 오라 하라” 그래 옆에 있는 사람이 “야, 너 오라고 한다. 팔자 폈다. 빨리 가라” 그러니 바디매오가 일어나서 제일 먼저 처리한 것은 돈 깡통입니다. 돈 있는 깡통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겉옷을 벗어서 내던집니다. 그때는 거지들이 옷 한 벌입니다. 단벌신사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가는데 일초라도 걸리적거리면 안 되기 때문 겉옷을 벗어서 던져버렸습니다. 그 겉옷은 그 몸을 가리는 예의를 차리게 하는 겉옷입니다. 겉옷은 추울 때 외투가 되고, 더울 때 햇볕을 가리어주는, 그에게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 옷을 낮에는 체면 차리게 하지만, 밤에는 덮어야 추움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국가에서 옷을 전당 잡거들랑 해가 지기 전에 옷을 돌려주라고 그래요. 국법으로 정했습니다. 그만큼 귀한 것이 겉옷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라는 소리를 듣자 겉옷이 체면차림이라고 팔을 꿰고 단추를 다 채우고 그러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저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은, 양복 입을 때나 셔츠를 입을 때마다 성가셔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뒤를 돌려서 옷을 입자니 어깨가 아프고, 그 많은 단추를 질서를 지키지 않아서 옷이 비뚤어지면 또 옷을 벗어서 새로 입어야 되고, 우리 자매님들, 누님, 어머님들 이런 많은 단추 옷을 입지 않은 분은 체험을 해보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맹인 거지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마가복음 10장 46절에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우리 사람은 누구나 절망을 상속받은 인간들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 질병과 가난 그리고 죽음을, 절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인간의 삶이 저주 아래에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바디매오는 그 일생에서 그 장님이 눈을 뜬다는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돋아 올랐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못 삽니다. 독에 쌀을 잔뜩 부어놓아도 그 가슴에 희망이 없으면 독에 있는 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살지, 세상 양식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바디매오는 동전을 구하고 살았지 희망은 들락날락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희망을 발견하고 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2. 아직 희망이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내게 부르짖으라. 노래와 같이 조용하게 하지 말고. 우리 성가대 노래 참 잘 부르잖아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짖어 노래하는 것을 기쁘게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라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120편 1절에 다윗은 “내가 환난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부르짖으니까 응답을 하셨더라. 점잖 빼지 마십시오. 남에게 시끄럽게 한다고 숨을 죽여서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부르짖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한국에 저하고 신현균 목사하고 감리교 대표들하고 여러 대표들이 모여서 한 달에 한 번씩 기도를 했는데, 그때에 우리 소원은 기독교인이 백만 명만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기 전에 천만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고함을 치고 기도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백만 명의 성도를 달라고 기도를 할 때는 목이 터져라고 고함을 쳐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원같은 곳에 통성으로 기도한다고 하니깐 기도원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고함을 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는 이상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살아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을 얻느냐? 들어야 됩니다. 바디매오가 구걸을 하는데, 동전을 구걸하더라도 지나온 사람이 무심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셨고,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죄인들을 구원한다고. 그런데 바디매오는 이것이 복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싣고 있는 이 말을 들었은즉 꼭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결심하면 있는 힘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날은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 어떤 날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놀라운 소문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바디매오는 자기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을 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바디매오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떠야 되겠다’ 그 마음속에 꿈과 희망이 생겼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가 앉아있는 그 길을 지나가실 것을 날마다 꿈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달리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기회가 오면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은 바디매오가 앞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꿈을 품고 있었던 바, 바디매오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잠잠하라. 너 장님 거지, 너를 알아줄 이가 없다.” 사람들이 꾸짖어도 바디매오는 더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여기 나를 불쌍히 보아 주옵소서!”

 꿈을 가진 사람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장애물이 다가와도 꿈이 있는 사람은 장애물 위에 올라타고 나오지, 장애물에 짓밟히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께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야, 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고 기다려줍니다. 아멘.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내가 환난 중에서 야훼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편 18편 6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목소리가 컸습니다. 부르짖어서 하나님 귀에 목소리가 들리게 한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점잖을 빼고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을 하나님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예수께 뛰어 나갔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9절로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구태여 맹인이라고 말한 것은 옷이 그렇게 귀할 때입니다. 바디매오는 옷을 귀하게 귀하게 간수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옷을 뒤에 던져버리고 발에 거슬리니까 짓밟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간 것입니다. 겉옷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습니다.

 유대 땅은 일교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밤이 되면 외투로 걸쳤던 겉옷을 이불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2장 26절은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이게 하나님 말씀이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겉옷이 한 벌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옷을 돌려주어야 추위에 떨지 않기 때문에 옷을 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거지로 살아가는 바디매오에게는 겉옷은 전 재산이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자 미련 없이 겉옷을 던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디매오의 꿈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얼마나 믿음이 굳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죽기 살기로 믿는 것입니다. 고함을 치고, 뛰고, 구르고, “예수여! 나를 보아 주시옵소서!” 간구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뛰어나올 때, 이때 응답 못 하면 이제 절망입니다. 이제 죽는 것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절대 신앙이 절대 불신앙이 되고, 절대 생명이 절대 파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앞을 보겠다는 간절한 꿈을 품고,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반드시 고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뛰어 나간 것입니다. 바디매오처럼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 구역장님들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전도를 했습니다. “의사는 못 고쳐도 예수님은 고칠 수 있습니다. 나랑 교회 갑시다!” 그렇게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와서 병이 낫고 치료함을 받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우리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에 하나님께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다 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중복음을 통하면 신약성경을 환하게 들여다볼 수가 있습니다.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님, 의로움을 주시는 예수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예수님, 죽음에서 살려주시는 부활의 예수님, 이 예수님을 성경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예수를 알고 나면 그 예수를 통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차원의 영성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바람과 같은 세계가 있습니다. 삼차원의 세계까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림을 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차원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사차원은 바람인데, 바람과 같은 성령인데 그려보십시오. 못 그리거든요. 못 그리기 때문에 마음에 뜨거운 믿음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순복음을 알고, 사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꿈꾸고 믿고, 그 다음에는 명령 내리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있는 것 같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꿈꾸고 믿고, 그 다음에는 고함치는 것입니다. “생명아 돋아라. 곡식아 잘 되어라. 아들, 딸 건강하라.” 입술로 축복하는 것 굉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로 스스로 축복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3. 예수님만이 희망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장 9절)”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인데,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들어가고, 나오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니 귀신은 도둑입니다. 내가 우스운 것은 요사이 나에게 자꾸 연락이 오고 핸드폰에 문자가 더러 오는 것은, ‘조목사님, 1936년 2월 14일에 태어난 것 아는데, 몇 시에 태어났습니까?’ 날짜를 대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귀신같은 소리 하지 마라. 날짜 같은 거 뭐가 필요가 있냐?” 그러면 그래도 날짜가 들어가야 내 팔자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날짜가 들어가야 내 팔자를 알 수 있다면, 내 팔자가 일어나서 날짜를 올라 맞추는 듯 하면 될 것이지 왜 자꾸 묻느냐고 묻지 말라고. 내가 예배 마치고 핸드폰을 보면 오늘도 올라와 있을 것입니다. 날짜 알려달라고. 희한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라 희한합니다. 날짜가 무슨 희망을 주는 게 아니라 예수님만이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기에 영원한 용서가 있고, 영원한 의로움이 있고, 영원한 치료가 있고, 영원한 축복이 있고, 영원한 부활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으면 절망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좌절감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절망적인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은 마귀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그 일을 하도록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꿈꿀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의와 정결함과 치료와 아브라함의 복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로 17절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말씀으로 성령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저주받게 하고, 말씀으로 축복받게 하는 것입니다. 내 입의 말로 우리가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이므로, 입술의 말로 서로 칭찬하고 서로 축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어떤 상황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은 쌀독의 쌀이 떨어져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 속의 꿈이 떨어져 가면 죽습니다. 내 가슴 속에 꿈이 떨어지면 그건 죽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꿈을 붙잡고 있을 수 있나요? 예수님 십자가.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으면 꿈은 우리와 같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생활은 귀한 생활인 것입니다. 꿈을 품고 사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이가 95인데 인터넷에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해서 인정을 받았고, 65세 때 당당하게 은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95세 생일을 맞던 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은퇴 이후 ‘이제 다 살았다’ 그런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데, 그 기다림이 30년이라는 세월을 허송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살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 희한한 사람이지요. 95세 생일도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고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이끌었고, 갈렙은 85세에 꿈을 품고 헤브론을 정복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가 예수님 곁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네 눈이 열려서 볼지어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번쩍 뜨여서 사물을 보게 될 때, 여리고 성 문 밖에 아주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도로 돌아갔느냐?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았은즉,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길 위에 앉아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바디매오는, 이제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바디매오처럼 그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오,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꿈과 희망을 품고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맹인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갖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청산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은 내 편이시라/이영훈목사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야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야훼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편 118편 5~9절)

 오늘은 시편 118편 5절로 9절 말씀을 가지고, “주님은 내 편이시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큰 소리로 한 번 따라 해주세요. “주님은 내 편이시라” “주님은 내 편이시라” 오늘 이 말씀의 제목으로부터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문제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고, 또 고통 가운데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감기 한 번 앓은 적이 없다.”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잔병치레하면서 날마다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문제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헤쳐 나아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밝히 그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갑자기 내 몸이 약해지고 큰 병이 임했을 때, 큰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1. 부르짖는 신앙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부르짖는 신앙으로 무장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 5절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안전한 자리에, 견고한 자리에 세워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난의 때에 우리가 깨어지고 낮아져서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만드는 훈련 과정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해집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낮아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가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갑자기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 탄식하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주님, 나를 도와주셔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여주시옵소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세운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선포해라.”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인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는 ‘아니, 내가 왜 우리 원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까?’ 그래서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고난의 풍랑이 일었습니다.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온 배에 있는 사람이 다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때때로 나 하나의 잘못 때문에 온 집안이 풍랑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요나가 깨닫고 “저 때문에 이런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저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까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큰 물고기가 딱 기다리고 있다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여러분,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다는 것은 죽음의 상태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위에 음식이 들어오면 위가 산을 내가지고 음식을 소화시켜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내려보내는데, 마찬가지로 이 물고기도 뭔가 큰 걸 털푸덕 받아먹었으니깐 이것을 소화시키려고 막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위에서 분비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냄새나고 고통스럽고 힘든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나는 부르짖었습니다. 캄캄한 물고기 배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요나서 2장 2절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부르짖었더니!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절망의 자리에서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의사가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그때 주님께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에서 자유함을 받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를 명하여 육지에 토해놓게 했습니다. 육지에 토해놨는데 그곳이 바로 니느웨 성 앞입니다. 가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 온 백성이 다 회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켰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더 자라게 하고 말씀에 더 순종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문제를 만났을 때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상시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움 당할 때는 우리가 기도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늘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기도의 습관을 쌓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40편 1절, 2절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구렁에서 끌어올리시고!” 할렐루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그 깊은 절망의 자리에 처했을 때 깊은 웅덩이에 빠짐 같은 그러한 상황에 있는 모습에 처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편 111편 4절입니다.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야훼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예레미야 33장 3절을 다 같이 고백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에 주님의 응답과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19절은 말씀합니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나를 구원하셨도다! 할렐루야!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문제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여 응답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임합니다. 주님의 치료가 임합니다. 주님의 회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2.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

 그런데 주님께서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평안을 허락해주십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편이라.” 할렐루야! 둘째로,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118편 6절에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라!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할렐루야! 시편 56편 4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위대한 선언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계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 바울은 선포한 것입니다. 시편 54편 4절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할렐루야! 대부분 환란이, 시험이, 고난이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참 강한 것 같고 과학이 발달하여 달나라에 로켓도 쏘아 올리고 온갖 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을 정복한다고 하지만, 말 한마디로 무너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그러더라 하면 그 말에 상처가 되어서 그냥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려앉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1980년대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요. 공부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일 년에 집을 나가는 청소년들이 300만 명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의 ABC 방송에서 집 나가는 아이와 부모를 연결시켜주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왜 집을 나갔느냐? 어느 날 부모 중에 한 사람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릅니다. “보기 싫으니까 저기 꺼져버려. 어떻게 너 같은 것이 태어나서 날 괴롭히느냐?”하고 부부가 싸움하다가 아이를 보고 소리친 것인데, 아이는 그 말에 그냥 마음에 탁 상처로 비수처럼 말이 꽂혀가지고 ‘난 잘못 태어난 인생이구나. 엄마 아빠가 날 쓸모없다고 그러고, 보기도 싫다고 그러고, 왜 너 같은 것이 태어났냐고 그러고. 나는 이 집에 있을 가치가 없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는 거예요.

 우리 어른들이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화가 났다고 내가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다 쏟아내면 그것이 아이에게,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너 같은 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날부터 ‘난 잘못 태어난 인간이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 난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가고, 많은 문제 속에 살고 있는 그러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혹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 다투고 싸우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나를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온갖 악한 말로 나를 참소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 듣고 무너지지 말고 주님께 딱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8편 7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로마서 12장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난 다음, 감정이 폭발해서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무슨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 쫓아가서 “너 그때 그런 말 했다면서.” 확인도 안 해보고 먼저 큰 소리가 나가지고 서로가 감정이 폭발하면 큰 싸움이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끼리 큰 소리 내고 싸우고, 싸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부부 싸움 잘하는 사람 보면 끝까지 서로가 안 질라고 그러고, 그래서 자꾸 싸움이 커집니다. 한 말하면 두 말하고, 두 말하면 세 말하고, 세 말하면 네 말하고, 그래가지고 밤새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이긴들 이기는 게 아니에요. 이기고 나면 그 마음만 씁쓸하고 집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끼리 다툼이 생겼을 때에 져주는 게 낫습니다. 왜 억울하게 져줍니까? 져주시면 되요. 그럼 내 마음이 편안해요. 주님이 책임져주시니까. 주님이 그 사람을 또 야단쳐주실 것 아닙니까. 쪼금 억울한 것 같아도, 쪼금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렇게 살면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손해 보며 살지요 뭐. 아, 유행가도 있잖아요. ‘바보처럼 살았군요.’ 좀 바보처럼 살자고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지적으로 좀 저능한 사람이래요. 늘 웃으니까. 허허허허허. 누가 욕을 해도. 허허허허.

 좀 그렇게 살면 안 될까요? 우리 인생이 왜 너무나 그렇게 따지고 이것이 옳고 이것이 그르고, 그래서 소리 지르고 내가 이겨야 되고, 내가 저 사람을 갖다가 밟아야 되고, 꼭 내가 승리해야 되냐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내가 너의 마음을 알고 내가 너의 그 진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다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와서 여러분을 물고 뜯는다고 할지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전진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이 찬송가 88장인데 2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맘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도 주님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나를 지키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

내 맘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도 주님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나를 지키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아멘!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할렐루야! 참 주님의 은혜 감사하지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돌보아주시는 우리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3.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가 환란에 처했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118편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야훼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을 당하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보세요, 시편 146편 3절에도,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권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권력이 없습니다. 영원히 힘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모든 기도를 응답해주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시편 118편 21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118편 23절에, “이는 야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할렐루야!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주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절대긍정의 믿음입니다. ‘주는 나와 함께하신다. 반드시 나는 이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한다. 반드시 주님께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건져주신다. 내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절망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여, 우리 모두가 큰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로부터 응답받고 상급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아멘은 했는데, 나오면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문제가 다가오면 흔들리고 절망의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있으면 안 되고, 환란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시험이 다가와도 억울한 일 당해도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 다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믿음의 전진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넘치는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8편 28절 29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3편 1절로 2절, “할렐루야, 야훼의 종들아 찬양하라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야훼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할렐루야! 성경은 우리에게 찬양하라고,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했던 지난 7월 달에 태국에 있는 그 동굴에 갇혔던 13명 그 구조 소식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 사건에서 화제가 되었던 한 소년이 있는데, 한 소년의 이름이 바로 ‘아둔’입니다. 유일한 크리스천인데, 이 동굴의 길이가 얼마나 길고 먼지 약 4킬로미터 정도 되는 동굴인데, 물이 들어차가지고 중간 중간에 다 물이 차서 이 굴을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갇힌 지 열흘이 지나도록 아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잠수부원 하나가 그 긴 길을 굴속을 잠수하고 헤엄쳐 들어가서 가보니, 그들이 살아있는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이가 이 아둔 하나였습니다.

이 아이는 그 태국에 와서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그곳에 컴패션이라고 하는 단체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곳에서 신앙생활하고, 영어도 배우고, 미얀마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또 찬양을 잘하는 그러한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유일한 크리스천인데, 이 소년이 이 굴에서 절망 가운데 ‘이제 우리 모두가 죽는구나’라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 이 소문이 알려져서 전 세계에서 잠수부들이 한 백여 명의 전문가들이 오고 많은 구조대원들이 왔는데 구조대원 한 사람이 이 아이들을 구조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그 세상을 떠난, 순직한 구조대원을 위해서 절에서 추도식을 갖게 되었는데, 본인은 크리스천이라고 교회 와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고립된 지 10일째가 되자 저희는 참을성을 잃어갔어요. 희망도 사라지고 기운도, 용기도 없어졌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저는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너무 어린 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모든 것에 능하십니다. 지금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지켜주세요. 이 자리에 함께해주시고 저희 13명 모두를 도와주세요!”
코치 한 사람과 열두 명의 축구단인데, 열한 살부터 열여섯 살짜리의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굴 속에서 열흘 넘게 굶주리면서 이제는 다 죽었다고 희망의 끈을 놓고 있었을 때, 이 아둔은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했는데, 기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저 컴컴한 어두운 곳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그가 영국인 잠수부원입니다. 구조대원이 와서 이 아둔과 영어로 대화를 해가지고 소식을 밖에 알리고 구조해내게 되었는데, 그는 간증했습니다. “구조대원이 우리를 구하러 왔을 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랐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할렐루야.
이 소식이 알려져서 미국 컴패션에서 이 아이가 자랄 때까지 모든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했고, 또 국적을 갖지 못했는데 태국 시민권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절망이 찾아오고, 문제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야곱의 3대신앙/이영훈목사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세기 28장 18~22절)


 오늘은 창세기 28장 18절로 22절 말씀을 가지고 “야곱의 3대 신앙”,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한 번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3대 신앙” “야곱의 3대 신앙”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고, 더 큰 축복이 없고,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죄와 절망 가운데 살다가, 거기서 우리 인생이 마쳐지면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되는 운명이었는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내가 택함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렇게 주님 은혜 가운데 복된 삶을 살게 되었으니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한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면 우리 일생은 복된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야곱이 형의 미움을 받아서 그 집에 같이 있을 수가 없어, 집을 떠나 먼 길을 가다가 광야에서 잠이 들게 되었고, 잠을 자는 가운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에서 깨어나고 난 다음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리는데, 이 기도 가운데 세 가지의, 우리의 야곱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첫째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입니다. 창세기 28장 20절 21절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그가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있는 하란까지 가야 했었는데, 그 거리가 무려 800 km입니다. 그 먼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말을 타고 간 것도 아니고, 혼자 그냥 보따리 짐 하나 메고 가는 것입니다. 정처 없이 가는데 그 길이 또 광야 길입니다. 가도 가도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다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쉴 데가 없어 그냥 광야 한 바닥에 푹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돌을 굴러다가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외롭고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 쓰러져있는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늘부터 사닥다리가 촤악 내려오더니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위를 올려다보니 빛나는 광채 속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래서 야곱이 너무 너무 감동을 하고 탁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서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야훼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20절, 21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야훼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여주셔서 나를 돌봐주시고, 내가 무사히 다시 부모님 계신 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신다면, 나를 그렇게 이끌어주신다면 나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야곱이 살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유익을 따라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또 두려워하는 존재들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하늘에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큰 바위를 섬기고 나무를 섬기고 어부들은 바다를 섬기고. 각자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많은 신을 섬겼는데, 야곱은 고백하기를 나는 이러한 어떤 신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그것이 다 우상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이 뭐냐? 물질이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여!’ 그래 가지고 돈을 섬겨요. 요즘은 그런 일이 흔치는 않지만, 옛날에는 건물을 지을 때는요, 고사를 지내는데 거기다가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돼지 입에다가 돈을 갖다 이렇게 물렸어요. 물려 가지고 복 달라고 그랬어요. 아니, 돼지머리가 건축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요. 사람들이 그만큼 미신적으로 섬기면서 돼지머리에다가 돈을 물려놓고 복 달라고 그랬어요.

 이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 것은 잘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돈은 잘 쓰라고 주신 거예요. 움켜쥐고 있으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돈은 잘 쓰라고 주신 것이고, 섬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베풀고 쓰라고 주신 것인데, 돈을 섬기니까 탐욕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가 좋았던 형제들이 부모님이 재산을 많이 남겨놓고 가서, 세상을 떠나시면 재산 때문에 막 장례식 중에 막 싸우는 거예요. 싸우다 못해 재판 걸고 소송하고 완전히 원수가 되요. 물질이 무엇이관데 물질이 우상이 되어가지고 우리에게, 가정의 화목이 깨지고 형제들이 원수가 되는지요.

 그리고 우리가 조심해야 될 우상 중의 하나는 권력이라고 하는 우상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꼭 부패하게 되어있어요. 권력을 오래 쥔 사람의 말로가 아름다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 권력은 썩기 때문에. 권력은 섬기라고 준 것인데, 권력을 내 것인 줄 알고 휘두르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총리가 총리가 되고 난 다음, ‘내가 다 가졌다’ 해서 돈을 막 끌어 모았대요. 결국 그는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전의 총리가 너무나 그들의 존경받는 총리였기 때문에 다시 세웠는데 나이가 93세에요.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목사님 만나니까, 지난번 총리가 너무나 많은 돈을 갖다 그가 횡령을 해가지고, 모든 재산을 환수하고 감옥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권력이 그를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6장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생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물질을 따라 살지 말고, 권력을 따라 살지 말고, 만군의 주 야훼, 우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를 세우는 신앙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교회 중심의 신앙입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 교회를 세우는 신앙. 창세기 28장 22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잠에서 깨어난 다음 자기가 누워서 베개로 베고 자던 돌을 세워가지고 기름을 붓고,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임을 고백했습니다. 28장 16절, 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야훼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아무리 건물을 잘 지어놓고, 그 인테리어를 잘해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그냥 건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성령의 은혜가 넘쳐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었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해야 되요. 하나님의 집이니까 함부로 굴리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인 우리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라기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곳이 건물이지, 진짜 교회의 참모습은 우리들의 모임입니다. 이 교회는 구원의 방주요, 선교센터요, 축복의 통로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열흘째 되는 날 성령이 임해서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돌에 기름을 붓고 나서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는데, 벧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8장 18절, 19절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벧엘’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벧’하고 ‘엘’인데 이 ‘베이트’라고 하는 말은 ‘집’이고, ‘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벧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 그런 뜻인데,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주님 앞에 드려진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일생동안 우리의 신앙이 교회 중심의 신앙, 예배 중심의 신앙,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머리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은 설명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의 머리가 누구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그럼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되요.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이 교회의 최고 주권자도 예수님이시고, 이 교회에서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될 것이 예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절대로 교회를 인간의 왕국으로 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왕국이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이 거하는 주님의 전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20년 영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의 동북부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1620년 늦가을에 미국의 동북부 쪽에 도착을 했는데, 그 먼 길을 와서 피곤하고 지치고 어떤 분은 몸이 쇠약해서 아픈데,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온 것이고, 예수 잘 믿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 교회부터 짓자!” 교회를 잘 지어놨어요.
 이것이 바로 미국의 건국 정신인것입니다. 미국이 세워진 것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와서 세운 것이 바로 미국이 세워진 그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외 없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려면 성경책에 딱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백성을 잘 섬기겠습니다.” 대통령 선서 맨 마지막이 “So help me, God! 내가 이렇게 이 백성을 잘 섬길 때 하나님 날 도와주세요! 하나님 나 도와주세요.” 선서의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국을 복 주시고 복 주신 것입니다.

 말씀에 선 나라, 교회 중심의 신앙을 가진 그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셔서,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플리머스를 방문에 보니까 400년이 지났는데도 교회가 견고히 서있어요. 할렐루야! 여러분의 신앙이 교회 중심의 신앙, 예배 중심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가 70년이 지났을 때, 회개하고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주후 70년, 지금부터 약 1900년 전에 로마의 디도 대장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나라가 사라져버렸습니다. 190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뭐냐면, 그들이 정착할 곳에 가서 그곳에 성전을 세운 일입니다. 회당을 세웠습니다. 회당을 세워놓고, 회당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어서, 그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1900년 동안 그 성전 중심, 회당 중심의 신앙을 지켜오다가 1948년 5월 14일 그들이 독립해서 올해 7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전 세계의 역사 가운데 1900년 동안 나라가 없다가 다시 생겨난 나라는 이스라엘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고구려가 망한 것은 지금 1300년도 안 지났어요. 그런데 저 중국한테 “저 만주 땅이 다 우리 거니까 내 놓으라!” 그러면 내 놓겠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셨어요. 1900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곳에 이스라엘이 탄생이 되게 만들어주셔서 올해 건국 7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고 성장하고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한 그러한 성장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신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북한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1883년에 우리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 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데,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했던 서상륜이란 분하고 동생 서경주란 두 분이 이 황해도 장연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선교사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 한국 제물포항, 인천항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우리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부터 먼저 세웠어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렇게 교회가 막 부흥하게 되니까, “이제 우리, 교회를 건축하자!” 그래서 저들이 이제 다들 힘들고 어려웠을 때인데 모금을 하기 시작하니까,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선교부에서 도와줄까요?” “아닙니다. 자손만대에 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하는데 우리의 힘으로 교회를 짓겠습니다.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우리 힘으로 짓겠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자기 소유의 서낭당을 교회 대지로 바쳐서 귀신을 섬기던 그 서낭당을 허물어버리고 그 교회의 대지가 되었고, 성도는 십시일반으로 헌금만 십칠만 냥을 모았고, 어떤 이는 선산에 좋은 나무를 소나무를 베어서 건축자재로 기증했고, 어떤 사람들은 재능 기부로 교회 건축에 나와서 70일 동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한 양반 댁 과부는,
 당시 양반들은 일을 안 합니다. “이리 오너라!” “물 떠 오너라!” 이렇게 시키기만 했지,
그런데 이분은 남편을 잃고 외롭고 힘들게 살던 과부인데,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캐서 그 조개를 껍질을 벗겨내 가지고 모아서 헌금으로 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감동을 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게 없었지만, 양반 댁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 나가 무릎까지 갯벌에 빠지면서 조개를 파서 그 판 돈 전부를 하나님의 집을 돕는 데 연보했다. 이 부인은 매 주일 40리 이상을 걸어서 교회에 오는데, 개종한 후 지난 1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주일도 빠지지 않았다” 할렐루야!

 그때는 얼마나 순수하게, 열심히 믿었던지 예수를 믿은 그날부터 단 한 주일도 빠지지 아니하고,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가고. 교회를 건축한다고 하니까 나가서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가지고 그걸 팔아서 건축 헌금을 하고. 그래서 그 자손들이 복에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가 1895년 7월 달에 준공되어서 언더우드선교사 외 많은 선교사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이 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예배 중심의 신앙이 될 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예배 잘 드리는 사람. 시험에 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사람이 시험에 든 사람이에요. 참 희한합니다. 시험에 들면 교회에 나오기가 싫어요. 예배드리기가 싫어요. 기쁨이 넘쳐나면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나 기다려지고 예배 시간을 사모하게 되는데, 구역 식구들끼리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난 다음 구역식구들끼리 다투는데, 주일 날 교회가 나가기가 싫어져요. 여러분,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3.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

그리고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신앙이 우리의 생활 속에 믿음으로 드려지는 신앙이 바로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입니다. 28장 22절에 이와 같이 야곱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앞으로 제가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내 수입이 생길 터인데, 나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그 중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주님께 도로 드리겠습니다.”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믿음의 결단을 보일 때 더 큰 은혜와 축복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서 십분의 일을 도로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십니다.”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자라나면서 하나님 앞에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리는 믿음의 결단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주시는데, 여러분의 믿음이 성숙한 믿음이 되어서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국내 최초로 대학에 ‘부자학’을 개설해 가지고  ‘부자학연구학회’를 창립한 서울여대 한동철 교수님이 그의 책, ‘新한국의 부자들’에서 10의 2조를 드려서 복 받은 사람들을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2011년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통해서 말라기 3장 17절의 축복의 말씀이 확실한 하나님 약속이라고 말씀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크리스천 부자들은 대부분 십일조 생활이 철저합니다. 10의 1조가 아니라 10의 2조, 10의 3조를 내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크리스천 부자들은 대부분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도 크리스천 부자들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크리스천 부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느냐 가만 살펴보니깐 그가 3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는 십일조 이상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새벽 기도를 잘 드리는 분이었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신앙을 가진 분이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늘 입에서 남을 헐뜯는 얘기만 한 사람들은 절대로 복을 받는 적이 없습니다. 잘되는 게 없어요. 왜? 본인의 부정적인 말로 자신이 묶여버리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백년 역사 가운데 가장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사람이 록펠러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그가 가진 그의 벌었던 돈을 갖다가 환산해보니까, 지금 세계 최고의 부자인 그 빌 게이츠의 3배 정도 되는데, 172조 정도 된데요. 172조! 별로 안 놀라시는데, 내년도 우리 1년, 우리나라 대한민국 전체 일 년 예산이 470조인데, 이분이 혼자서 벌은 돈이 172조라니까요. 물론 록펠러가 돈을 버는 과정에서 비판도 있었습니다. 전체 석유 시장을 독점해가지고 돈을 막 쓸어 모았거든요. 그리고 또 어떤 비판을 보면 그가 십일조를 한 것은 인정하지만 노동자들에게 탄압한 기록도 있다. 막 기업이 일어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하는 그러한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삶을 보면 그가 40대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0대 세계 최대 부자가 됐는데, 그때까지는 돈을 버는 일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까 이런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말년, 그가 97세까지 살았거든요, 살면서 많은 선한 일을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의료 시스템도 바꿔놓고, 미국의 대학교에 대학교마다 도서관을 짓고, 시카고 대학을 짓는데 전액을 내서 시카고대학을 짓고, 그분에게 교회를 짓겠다고 도움을 요청하면 다 교회를 지어주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비결이 뭐냐? 6살 때부터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해서 십일조를 한 일에 그렇게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용돈을 주면서 “너, 십일조 해라!” 그 말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고, 먹을 것이 없는 어려운 시절을 지난 그가 40대가 되어서 미국 최대의 부자로, 50대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되어서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그러한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십일조 뿐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도 드려서 하루에 활동하는 시간의 십분의 일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 여러분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여주실 것입니다.

 계산적으로 보면 십일조를 한 사람이 십일조를 안 하는 사람보다 더 부족할 것 같아요 왜냐면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그런데 가만 보면 그 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일조 드리는 사람이 더 여유가 있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하나님 편에서는 다 십일조를 받으신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복을 주시지만 자발적으로 안내면 다른 방법으로 그 돈을 쓰게 만드시는데, 약값, 치료비, 사고 나서 사고 수습하는 비용, 그래서 돈이 더 나가게 하신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이 십일조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서 가축 큰 두 떼를 부리며, 열두 자녀를 데리고 당당하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광야 길 같은 인생을 살아갈 때 잠시 잠깐 지나가는 인생길에서 무엇보다도 첫째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교회 중심의 신앙, 십일조 드리는 신앙으로 한평생 복 받은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십일조 신앙으로 무장하여 복 받은 인생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