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부 이야기

한 부부가 숱한 고행을 하면서 돈을 모아

 

80여평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어가면서

온갖 고생끝에 장만한 아파트입니다.

거기다 최첨단 오디오 세트와 커피 머신을 사서

베란다를 테라스 카페처럼 꾸몄습니다.

이제 행복할 것 같았지만 사실 두 부부는

이 시설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회사에 출근한 후

집에 무엇을 놓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놓고 온 물건을 가지러 집에 갔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가정부가 음악을 틀어 놓고

커피 한 잔을 뽑아서 베란다의 테라스 카페에서

집 안의 온 시설을 향유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부부는 허겁지겁 출근해서 바쁘게 일하고

다시 허둥지둥 집에 들어 오기에

자신들이 장만한 시설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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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기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 ♣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불러와 비싼 음식 앞에서는 빨리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늘 돈이 넉넉히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 당신의 자식이었을때는 미처 몰랐더랍니다. 당신이 그랬듯, 나도 이제 당신처럼 내 자식의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제서야 알아차린 당신의 가슴과 그 눈물을 가슴에 담고 당신의 사랑이 무척 그리운 이 시간에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시는 고마운 두분께 외쳐봅니다. "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 " - 정용철의 "마음이 쉬는 의자" 中에서 - -<html 제작김현피터>
가을 움직이는 아이콘 예쁜라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어머니 은혜 / 연주곡 ♬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껄, 껄, 껄 하며 떠나는 인생인 것을...

            
      껄, 껄, 껄 하며 떠나는 인생인 것을... 사람은 죽을 때, '껄, 껄, 껄' 하며 죽는다고 한다. 호탕하게 웃으며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세 가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후회하며, '~했었으면 좋았을 껄' 하면서 죽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껄'은 '보다 베풀고 살 껄!'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죽은 다음 재산을 정리해 보면 약간의 돈은 나온다. 그 돈을 두고 가는 것이 너무 아까운 것이다. '이렇게 다 놓고 갈 껄 왜 그토록 인색하게 살았던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껄'은 '보다 용서하고 살 껄!'이다. 죽을 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사랑한 사람들의 얼굴도 떠오르지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이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아, 이렇게 끝날 것을 왜 그토록 미워했던가! 이게 마지막인데, 다신 볼 수 없는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화해할 시간도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껄'이 가장 중요하다. '아, 보다 재미있게 살 껄!'이란다. '어차피 이렇게 죽을걸. 왜 그토록 재미없게,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하며 살았던가!' 한다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니 비로소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다. '왜 그토록 내가 이미 소유한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이토록 재미없이 살다가 가야 하는가'. 이제 노년에서야 깨닫는 껄, 껄, 껄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의 빚을 먼저 갚고 마음 편히 살아보자. -- 글 : 김규성 --


흐믓한 쪽지 한 장의 사연

 
  

★ ★

어떤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사업실패로 거액의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나자 마지못해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의 일을 하게되었습니다.


허지만 그동안 집안에서 살림만 하던 여자가
그 험한 보험 일을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만 아니면...하루에
수십 번도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였습니다.



추운 겨울 날이었습니다.
거액의 보험을 들어준다는
어느 홀아비의 집에 방문했던 아주머니는
그만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녀는
근처에 있는 어느 한적한 공원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자살까지 생각하며
한참을 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그녀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손수레를 끌고다니며 공원에서
커피와 음료수 등을 파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아주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고 하더니
갑자기 손수레에서 꿀차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따뜻한 물을 부어 몇 번 휘휘 젓더니
아주머니 손에 살며시 쥐어 주며 빙그레 웃어 보였습니다.


마치 방금 전에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그 따스한 미소는 그 아주머니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침까지 굶고 나와서
너무나도 춥고 배고팠던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따뜻한 정에 깊이 감동하면서
눈물로 꿀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힘을 얻어 다시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 후 몇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공원에서 차를 팔고 돌아 가던 할머니가
오토바이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수술이 무사히 끝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뺑소니 사고였기때문에 할머니는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퇴원하는 날이 가까워 오면서 할머니는 거액의 수술비와
병원비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딸이
퇴원수속을 위해 원무과로 찾아 갔을 때였습니다.
원무과 여직원은 할머니의 딸에게
병원비 계산서 대신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수술비 + 입원비 + 약값 + 기티비용 / 총액 = 꿀차 한 잔


할머니의 딸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래자
서무과 여직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5년 전.... 자살을 생각했다가 꿀차 한 잔에 다시 용기를 얻고
지금은 보험왕이 된 어떤 여자분이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딸을 사랑한는 아버지의 목발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 함께 여행을 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큰 사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아버지와 딸은 모두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딸의 상처가 깊어서

오랫동안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했으나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딸보다 먼저 퇴원한 아버지의 신세도 딸과 다름이 없다고 알려졌습니다.

사고 당시 사춘기에 있었던 딸은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다른 친구들이 조잘거리며 신나게 몰려다닐 때도 그 딸은 늘 혼자

목발을 짚고 외로이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같은 목발 신세인 아버지가

말동무처럼 딸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대해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주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딸은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투정을 부리는 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가 나서서 말없이 그 투정을 받아 주었습니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공원 벤치에 나란히 목발을 기대어놓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습니다. 어려운 사춘기를 잘 넘기고 딸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입학식 날 아버지가 학교에 같이 참석하여 딸을 껴안아 주며 말했습니다.

“네가 내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구나. 너는 나의 자랑이며 보람이란다.”

딸은 정말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해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나란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딸은 목발을 짚고 가야 했습니다.

길을 걷는 그들 앞에서는 작은 꼬마 하나가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이 큰길로 굴러갔습니다. 꼬마는 앞뒤를 살피지도 않고 공을 주우러 큰길로

뛰어들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큰 트럭이 전 속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딸의 아버지가 목발을 내던지고는 길로 뛰어들어

꼬마를 안고 뒹굴어 위험의 순간을 넘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꼬마를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길을 건너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순간적인 행동은 너무나 날쌔고

자연스러웠습니다. 목발 집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동작이었습니다.

딸은 자기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다가와서 딸을 꼭 껴안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애야, 이제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너의 아버지는 다리가 다 나았단다.

퇴원 후에 곧 정상이 되었거든. 그러나 네가 목발을 짚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도 목발을 짚고 다니기로 작정하셨던 거야. 내가 말렸지만 너랑 아픔을 같이 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벌써 5년이 되었구나. 이 사실을 아버지 회사원도,

우리 친척도 아무도 모르지. 나와 아버지밖에 모르는 비밀이었지.”

길 건너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를 보며

딸은 주제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어느 시골 청년의 사랑이야기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준수한 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 섬세한 배려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촌을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
청년은 결혼을 못했습니다.

청년은 어느 날부터 컴퓨터를 장만하고 인터넷을 하면서
도시에 사는 젊은 사람들과 카페에서 활동을 하다가
어느 여자와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바다"라는 닉네임을 가졌고
여자는 "초록물고기"였습니다.

청년이 느끼기에 여자는 박학다식하면서도 검소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보였으며
농촌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를 하고 있어 보였습니다.

여자와 주고받는 메일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청년의 가슴속에는 여자를 향한 분홍빛으로 사랑이
싹틈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메일을 1000여통을 주고 받으면서
두 사람이 무척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뜨거운 마음을 담아 프로포즈를 보냈습니다.

그런나 그가 가까워지고자 할수록
여자는 점점 움츠려 들며 멀어져 갔습니다.

마치 눈덩어리에 입김을 불어 넣어서
따뜻한 온기를 넣어 주고 싶어 하지만
그 온기에 눈물로 녹아지는 눈덩이처럼
여자는 자꾸만 작아졌습니다.

청년이 사랑을 고백하기 전에는 하루에 열통씩 오가던 메일이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는
일주일을 기다려야 답장이 오곤 했습니다.

그 마저도 답장은 늘 한, 두 줄의 짧은 답이였습니다.
청년은 절망을 했습니다.

그토록 믿어 왔던, 또 믿고 싶었던 늦게 찾아온 사랑에
더욱 더 절망을 했습니다.

누구도 시골은 싫은가 보구나... 다 이상일 뿐이야...
나처럼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농촌을 지키고자 하는 내가 바보지.
누가 봐도 이건 바보짓이야...

그렇습니다.. 청년은 대학을 나와서
다른 친구들 좋은 직장으로 취직을 하고자 할 때,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촌이 신음을 할 때
농촌을 지키고자 부모님 반대를 무릎 쓰고
농촌에 정착을 했지만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였습니다.

청년은 도무지 일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의 닉네임이 "초록물고기"란 것밖엔...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이렇게 빠져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 무엇에도 두렵지 않던 자신이
이제는 초록물고기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이있습니다.
한 달째 멜 수신확인이 안되였습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청년은 다시 절실하게 여자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너무나 절실해서
가슴으로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남들은 쉽게 잠이 드는 밤에
술기운을 빌려서 잠이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맨 정신으로 잘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유를
비 오는 밤 사람이 그리워서
여기저기 수첩을 뒤적여도 맘 편하게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전화기를 들지 못할 정도로
서글퍼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을.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 걷는 거리를
바쁘고도 무거운 걸음으로
혼자서 걸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왜 무거워 하는지.
누가 건들지 않아도 늘 깨질 것처럼 바람불면 날아갈듯
위태하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기댈 사람이 없어 늘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쓸데없는 생각의 깊이...
여기에 질식되어 죽을 것 같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가슴으로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사랑하는 이가 그리워도 보지 못하는 아픔을
견뎌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속이 타서 얼마나 쓰린지...
한 달 후 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초록물고기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바다님!
나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하고 많은 시간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적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를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얼굴도 어릴 적,
덴 화상으로 흉터가 많이 져 있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커녕 집안에서
어둔 커텐으로 햇살을 가리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몸마저 이래서 누구하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 동안 사이버 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다들 저를 보면 그만 등을 돌렸습니다.

그 이후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워
저에게 호감을 주는 남자가 있다면
먼저 등을 돌리곤 했습니다.

사랑을 하기도 전에 버림을 받는 제 자신이
너무 가여워 서지요.

바다님에게 메일을 받은 순간 기쁘고 설레였으나,
바다님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다시 아픔을 줄 수가 없어서
바다님에게 다가갈 수 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을 합니까?

청년은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자의 소식이었지만
여자의 결점을 알고 나니 갈등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의 실망 하시는 모습을 떠올리자
청년은 너무 괴로웠습니다.

육체보다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자부하던 청년이었기에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일에는 정신을 중요시 하면서
자신의 일은 껍데기를 더욱 중요시 하는 것이없습니다.

몇 날 몇 일을 고민하던 청년은 여자에게
다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사랑하는..이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단 한 사람....
초록물고기님 당신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또한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말한 당신의 결점은
오히려 나에겐 기쁨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위틈에 조용히 피어나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제비꽃처럼
저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록물고기가 바다의 품에서 맘대로 헤엄치는 날
나는 비로소 내 스스로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초록물고기가 넓은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칠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청년은 여자의 불편한 몸이 걱정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지만
사는걸 보고 싶어 하는 여자의 부탁으로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여자는 그녀의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3월 14일 학교에서
가장 큰 나무 밑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14일..
청년은 여자가 혹 못 찾을까봐
한 시간 반이나 먼저 나가서 여자를 기다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애 간장을 다 태우고 20분이나
늦게 도착을 했습니다.
교문에서부터 웬 날씬한 여자가 목발을 짚고
머리엔 노란 스카프를 두른 채
뚜벅뚜벅 거리며 청년의 눈에 점점 크게 다가왔습니다.

혹 초록물고기님이시나요?
그럼 바다님 맞나요?
여자는 부끄러운 듯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제 저를 보여 드리겠어요 하더니
여자는 안경을 벗고 스카프를 벗어서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그 순간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여자는 얼굴에 흉터하나 없이 우윳빛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목발을 내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 밑 벤치에 앉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면 놀랬나요?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 영혼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바다에서 헤엄쳐도 될까요?

청년은 물기어린 눈빛으로 와락 여자를 껴안았습니다.
멀리 바라보는 보리밭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ㅡ글쓴이 미상인 글에서ㅡ



선생님, 나의 엄마!                     

            


 


 

 
선생님, 나의 엄마!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뺑소니차에 당한 사고라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했고, 
네 살 많은 누나와 저만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졌습니다.
적은 액수였지만 부모님 앞으로 나오는 보험금이 있었는데 
누나 이름으로 된 통장을 큰아버지가 관리한다고 가져가셨습니다
저희는 의지할 곳이 없었고, 
너무 어렸기에 통장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고
정신적 충격이 컸던 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 했습니다
생각을 하고 뭐라고 말도 하고 싶은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라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문제라면서 병원엔 데려가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격이 까칠했던 큰어머니는 집안에 머리카락 하나 
뒹구는 것도 용납을 안 하는 분이라서 
저와 누나가 들어온 후로 부쩍 신경이 남카로워지셨습니다
손에 테이프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바깥에서 닦고 들어오게 하셨지요
큰아버지에게는 자식이 한 명 있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으로 유학을 간 상태라 
방이 비어 있었는데도 그 방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저와 누나는 다용도실로 쓰는 방을 사용했습니다
간혹 친척들이 다니러 오거나 손님이 오실 때만 
그 방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지냈고,
손님들이 돌아가시면 바로 다용도실로 가야 했습니다
누나는 큰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 쓸고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매일 손빨래까지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누나는 코피를 자주 쏟았고 
누나가 코피를 쏟으면 큰어머니는 더럽다고 난리를 치셨습니다  
성적이 좋았던 누나는 점점 성적이 떨어졌고 
"시험기간이라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큰어머니는 "집안일은 누가 하냐?"며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밥값은 해야지 니가 안 하면 
니 동생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기에 
누나는 저 대신 그 많은 일을 다 해냈습니다
아직 말도 못하는 동생에게 힘든 일을 시키다 
혹시 영원히 말을 못 하게 될까봐 
누나는 저에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큰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누나와 저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은 더욱 심해졌고, 말끝마다 
"고아원에 안 보내고 데리고 살아주는 걸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점점 술 마시는 날이 늘어갔고, 
유학 간 아이에게 돈을 부쳐줘야 하는데 
왜 돈을 안 주느냐고 싸우는 일이 잦더니 
큰어머니의 잔소리가 그치지 않자 술을 마시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겨울날, 누나와 저는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에서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큰아버지가 들어와 허리에 매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도 맞으니까 누나가 제 앞을 가로막고 
"왜 자꾸 때리느냐?"며 
"이럴 거면 고아원으로 보내주라, 
차라리 고아원에 가겠다" 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아버지는 "키워주는 은혜도 모르고 대든다"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누나를 무섭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때리던지 누나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누나 때리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까지 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큰아버지는 제가 말을 하는데 놀랐는지 때리는 걸 멈추고 방을 나갔습니다. 누나는 제가 말을 하자 너무 기뻐하면서 "집을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말도 못 하는데 고아원에 가면 혹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봐 누나는 꾹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니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아원에 가서 살자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 나쁘기야 하겠냐?"며 그 밤에 누나와 저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습니다. 고아원에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경찰서에서 큰아버지한테 연락을 할까봐, 그래서 다시 큰집으로 가게 될까봐 저희들은 밤길을 오래 헤매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민을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의 담임선생님이었던 분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나한테 힘내라고 매일 전화해주고 챙겨주던 고마운 선생님이셨습니다. 누나가 전화를 하자 선생님은 멀리 지방에서 밤새 달려 저희가 있는 곳까지 와주셨습니다. 누나와 제 얼굴을 보더니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시고 그냥 꼭 안고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선생님이 사는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누나는 선생님께 "고아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자세히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큰집으로 가셔서 저희 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더러 "함께 살자"고 하셨습니다. "아들 딸 다 결혼해서 그동안 혼자 살기 적적했는데 너희가 함께 살아 주면 외롭지 않아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저희 남매에게 엄마가 되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는 누나와 달리 저는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쭉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선생님도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누나와 제가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봐 모든 면에서 소홀하지 않게 신경을 쓰셨습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도 저희들을 꼭 챙기셨고, 누나와 형들도 저희를 가족처럼 생각해 주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을 하고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을 때도 선생님은 수소문을 해서 저를 찾아와 "니가 이렇게 살면 내가 나중에 너희 친부모님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눈물을 흘리셨고, 제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 중국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전 선생님이 고마우면서도 도움을 받는 제 입장이 너무 싫었습니다. 혼자 자립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매일 저를 기다리던 선생님께서 학교 끝나고 저를 보러 오시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친부모님도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마저 돌아가시면 저는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는 내내 '선생님이 살아만 계시면 앞으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보니 선생님은 수술실에 계셨고,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큰 수술이어서 석 달 동안 입원을 하셔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저는 선생님의 간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속 썩인 것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선생님을 화장실에 모셔다 드렸는데, 화장실을 나오면서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씀에 제가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이렇게 많으세요?" 제가 처음 뱉은 '엄마'라는 단어에 선생님이 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셨고, 저는 그렇게 선생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릅니다. 이젠 퇴직을 하셔서 텃밭을 가꾸고 주말에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는 엄마. 엄마가 안 계셨으면 저와 누나가 이만큼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겁니다. 공무원이 된 누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저. 저희들은 엄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가 제게 하신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든든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엄마가 제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감동실화 옮겨온 글 --

   늘 건강한 날 되십시요 



               

어머니와 우유 한

                     



 

 

 

 어머니와 우유 한 병 

  

 

옛날
어느 곳에 집안이 가난하여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자식은 다른 집 어머니처럼
잘 해 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하여
거리를 쏘다니다가 나쁜 친구를 사귀었다.


그러다가 아들은 그만 무서운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쁜 물이 너무나 깊이 들어 버린 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 뻔뻔스러움에 분개하여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았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감옥으로 찾아왔다.


아들과 어머니는 창살을 두고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창살 사이로 우유 한 병을 넣어 주었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유를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이튿날도 또 이튿날도 어머니는
날마다 따뜻한 우유 한 병을 가져와
아들에게 주었다.
추운 겨울이 되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다.


이 날은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오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들을 찾아오던
어머니가 오지 않으니 어쩐지 이상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못 오시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취침나팔이 울릴 무렵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을 테지만
가여운 어머니가 하도 간청을 하니
그곳의 책임자가 특별히 허락을 한 것이다.  

 

아들은 자려고 누웠다가
어머니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면회실로 나왔다.
얘야
많이 기다렸지?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아들을 맞아 주었다.
오늘도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식지 않게 가슴에 품고 집을 나섰는데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그만 잘못하여 넘어지고 말았구나.  


그 통에 아까운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지 뭐니?
우유를 살 돈이 없어서 다시 돌아가 일을 하여
품삯을 받아가지고 우유를 사 오느라
이렇게 늦었다.
자 식기 전에 마셔라.



어머니가 품 속에서 따뜻한 우유 한 병을 꺼내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던 아들의 마음이 풀리고
비로소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벽 가족 중에서

 

 

 

 

 

 

 

 

 여섯 가지 참회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데도 생각하지 않은 것과
말해야만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
행해야만 하는데도 행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생각한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말한 것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행한 것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소서.


- 류시화의《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중에서 -

 

 

*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가 처음 안아주던 감촉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 편안함과 따뜻함이 아스라한 기억 저편의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되어 우리의 정서와 품성을 만들고,
그 너머의 무의식과 본성까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 이전에 받았던
사랑과 냄새와 목소리와 어루만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

나이가 먹어도 어머니 앞에선
늘 어린아이같이 철없고 못난 자식이
이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서야
어머니의 사랑이그리워서일까요 ?
어머니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어머니~~
-펜더 김병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영국의 모 방송국에서 수년 전에 청취자들에게
좋은 상품을 걸고 현상문제를 내었었답니다.
그 문제라는 게 무엇인가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였답니다.


아침에 풀잎에 맺힌 이슬.
장미 한 송이.
호숫가에 핀 수선화.
오래된 바위 위에 낀 이끼.
잘 닦여진 유리 구슬.
안개 낀 템즈강..등등 여러 가지가 응모되었는데,
심사위원들의 숙고 뒤에 1등으로 당선된 응답은
'우리 엄마의 눈'이었답니다.


어머니의 한쪽 눈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마음의 문을 철저히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쪽 눈만이라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 가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며칠이지나 드디어 아들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풀고 앞을 보는 순간 아들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습니다.


- 행복 수첩 중에서-
음악 : Mother of mine - Jimmy Osmond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생각들


힘들 땐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외로워 울고 싶을 때
소리쳐 부를 친구가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할
머리가 내게 있어
나는 행복합니다.

슬플 때 거울 보며
웃을 수 있는 미소가 내게 있기에
난 행복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목소리가 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비록 우울하지만
나보다 더 슬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발이 있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가진 것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편지 하나 보낼 수 있는 힘이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가슴 활짝 펴
내 작은 가슴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어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희망을주는 감동사연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54살입니다. 가정이 없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아 독신입니다. 자녀도 없고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습니다. 공부도 하지 못 하였습니다. 중국집에 취직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자장면 배달하는 배달원입니다. 한달에 70만원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재산이 없어 겨우 한명 누우면 꽉 차는 쪽방에서 혼자 잠만 자고 있습니다. 이 분을 계절로 말하면 봄 일가요? 여름일가요? 가을일가요? 겨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겨울입니다. 인생의 겨울입니다. 그의 이름은 김우수입니다. 5년전 9월 23일 중국집에서 자장면 우동을 배달 하던 중 승용차와 충돌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25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명박 대통령과 김 윤옥 여사가 조문을 갔습니다. 나경원, 등 정계 거물들이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왜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을 가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월 5만원-10만원을 어린이 재단을 통하여 소년소녀 가장을 도왔습니다. 2006년부터 쉬지 않았습니다. 보험 4000만원짜리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그 돈을 타서 어린이를 돕게 하였습니다. 어린이 재단 후원회장 최불암 이 상주 역할을 맡아 장례를 주도하였습니다.그의 영정 앞에는 그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애도하는 편지가 쌓였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고 항상 격려하여 주시던 아저씨를 가슴에 묻고 평생 살아가겠습니다.”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영정 앞에서 말했습니다. “기부나 봉사는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잘 보살펴 드리십시다.” 이명박 대통령도 고인 앞에서 말했습니다.“ 고인은 가진 것을 나눔으로서 그것이 더욱 커지고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진정한 나눔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그가 그렇게 죽은 후 어린이 재단 홈페이지에는 기부가 꼬리를 이었습니다. 댓글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천사 중국집 배달원 아저씨의 뜻을 이어 기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에 이렇게 많은 씨를 꾸준히 뿌리고 나니 아름다운 마침이 되었습니다. 김우수 씨는 겨울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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