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경 집사(마포2대교구)

- ‘죽음의 벼랑’에서 건져주신 주님

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기도로 주님께 맡길 때 치유 받고  대학도 입학

 나는 딸 영주(사진 오른쪽)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영주의 코에 손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음의 강을 건너는 집중치료실에서 오늘도 살아있음에 안도했다.

 “엄마, 나 괜찮아”라며 도리어 영주가 나를 위로하는 이 상황에서 나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2011년 영주가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은 그 해 여름 소아암(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성장기에  발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골수이식보다는 먼저 항암치료로 상태를 보자고 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질 않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성장기였던 터라 항암제 투여량도 많았다. 영주는 약을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기를 매일 반복했다.

 1년이 지났을 때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결국 무균실로 옮겨졌다. 그런 딸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제발 살려만 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했다. 우는 나를 도리어 영주가 “엄마 왜 울어, 하나님이 고쳐주실거야”라며 위로했다. 그랬던 영주도 같은 병실을 쓰던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천국으로 갈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가기 시작했다. 나보다 믿음이 강하던 영주도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 “엄마 나 먼저 천국에 가 있을게”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영주를 붙들고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기도가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께 영주를 맡기겠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데려가신다고 하셔도 기쁨으로 보낼 수 있도록 온전히 주님께 아이를 내어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마음에 알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그날 밤 영주는 꿈에 커다란 황소가 날카로운 뿔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들었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그 황소가 자기 바로 앞에서 거꾸러져, 그 소를 밟고 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하나님이 영주를 곧 치료해주시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그날부터 영주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기도했다. 기도하러 오고 가는 길에 우리 모녀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주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서 웃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영주를 치료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실제로 영주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통원치료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는 중학교 내내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고등학교 과정부터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영주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위로하고 치료해줄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법 성적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약해진 몸은 영주의 꿈을 가로막았다. 항암치료로 몸이 망가진 탓에 공부는커녕 걸어서 등교도 못할 정도였다.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동생의 첼로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소개로 지금의 멘토가 되는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영주는 그 교수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의사대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입시가 약 1년이 남은 상황이라 걱정도 되고 막연했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입시준비를 한 영주는 체코 브루노 콘서바토리 서울캠퍼스에 합격할 수 있었다.

 현재 영주는 베들레헴찬양대 글로리아오케스트라에서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올해 8월 23일 그 지겨웠던 소아암과의 전쟁에 마침표도 찍었다. 영주가 드디어 완치판정을 받은 것이다. 할렐루야. 나와 영주는 매주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한주동안 받은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적은 아직 끝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임을 확신하며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리=정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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