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 성도(국제사역국 영어예배부)

- ‘꿈’꾸고 기도해 美 명문 컬럼비아대학 합격

넓은 세상 향해 탈북, 국제사회에 북한 실상 보고
한반도 평화 통일한국 위한 외교 전문가 비전


 꿈에 그리던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대학교로부터 드디어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을 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미국 유수 대학을 방문하게 된 나는 국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컬럼비아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학장님을 만나 내가 가진 꿈을 얘기했을 때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꿈이 이뤄지기까지 나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계속 환경의 문이 열리길 기도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라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한대로 꿈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게 됐다.

 나는 탈북자다. 세상과 단절된 곳,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10살 즈음이었다. 김일성 사후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배고픔의 고통이 심했다. 강 건너 보이는 중국 땅은 환한 불빛으로 부유해 보였지만 북한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하루는 집 앞 강으로 놀러갔다가 중국 아이와 맞닥뜨렸다. 그 아이는 나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었다. 초콜릿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고, 그 달콤함에 놀랐다. 그 뒤로 중국 아이는 나에게 몇 번 더 초콜릿을 갖다 줬다. 순수한 마음에 중국 아이와 친해진 나는 강을 건너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가게 됐고, 내가 살던 북한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 일은 결국 내가 더 큰 세상을 동경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은 내가 아닌 누나가 먼저였다. 돈을 벌어오겠다고 중국으로 떠난 누나는 탈북자에 대한 북한의 경계가 강화되면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남한 땅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누나에 이어 2010년 나를 비롯한 가족이 남한에 오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게 됐다. 자유의 땅을 밟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한에서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이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단어 암기장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 학원을 다녀보았지만 시간과 돈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영어 강의 프로그램을 듣게 됐고, 틈만 나면 영어공부에 열중했다. 화장실에 스피커를 달아 샤워할 때도 영어공부를 했다. 2012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UN)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영어로 북한의 실생활을 보고했다. 이듬해는 캐나다 정부의 초청으로 캐나다의회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것이 기적 같았다. 

 지난해 초 탈북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행사에서 나는 이영훈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목사님께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우리 교회 국제사역국 영어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하고 있다.

 나는 힘들 때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을 묵상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기도로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또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으로 위안을 주셨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나는 이제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간다. 9월부터 미국에서의 공부가 시작된다. 비자와 경제적인 문제 등 아직 해결할 과제도 있다. 하지만 어려움을 이기고 지금까지 오게 해주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앞으로 유엔본부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외교 전문가로서 남북통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 그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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