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에스더 권사(여의도순복음새평양교회)

생명과 실명의 위기에서 살려주신 나의 하나님

가족과 함께 탈북, 위기 때마다 주님 인도해주셔
권사 직분받고 여선교회장으로 교회 열심히 섬겨


 나는 북한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러다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중국으로 돈을 벌러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중 딸도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그만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딸을 찾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중국에 갔지만 문제가 생겨 한달 넘게 중국에 지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발단이 돼 결국 나는 탈북하게 됐고, 이어 북에 두고 온 또 다른 딸과 9살된 아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게 됐다.

 중국에서의 삶은 참 험난했다. 다행히 소식이 끊겼던 딸을 찾았고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신분을 감추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10여 년 동안 적발을 피해 많은 지역을 옮겨다니며 흩어져 살았다. 그러다 A지역에 정착해 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공안에 적발되고 말았다. 나와 아들 그리고 손주 둘은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지만 두 딸은 탈북자라는 꼬리가 붙어 결국 강제 북송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은 가족을 어떻게든 돌보고, 두 딸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를 악물었고, 2010년 남한에 오게 됐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아파트 청소 일을 시작했다. 그런 중에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다는 여의도순복음새평양교회를 알게 됐고, 전도를 받아 교회를 출석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됐다. 날마다 북송된 딸을 위해 기도하며 살려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렵게 딸의 소식을 들었다. 북송된 두 딸 중 큰 아이는 상상조차 어려운 수감 생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단다. 시체 사이에 버려졌던 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 감옥에 함께 있던 동생과 마침내 탈북에 성공, 먼저 남한에 온 우리와 2012년 재회할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 재회의 기쁨도 잠시, 나는 그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는지 국립의료원에 6개월 반 입원해 있는 동안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물조차 다 토하며 제대로 걷지 못했다는 나는 가족의 말에 따르면, 주일이 가까워지면 ‘교회에 데려다 줘’라고 했단다. 그러면 차만 타면 토하는 나를 아들이 자전거에 태워, 그래도 힘들어하면 두 팔로 안아 교회까지 데려다 줬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오직 예배 뿐이었음을 알았나보다.

 박상식 담임목사님의 헌신적인 돌봄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나는 기력을 회복했고, 하나님 앞에 더욱 열심이었다. 지난해에는 탈북자 최초로 권사 직분도 받아 여선교회장직을 더욱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축복도 많이 받았다. 두 딸은 각각 회사원, 세무 회계 일을 하게 됐고, 아들은 명문대 공대에 재학 중이며 기독동아리에서 활동할 정도로 신앙이 뜨겁다.

 그런 나에게 지난해 10월 두 번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앞을 볼 수 없어 병원에 갔더니 뇌에 이상이 온 것 같다고 했다. 세종병원에서 MRI를 촬영한 결과 뇌혈관 70%가 막혀 생명과 실명의 위기가 발견돼 당장 수술이 불가피했다. 12시간이 소요되는 대수술이었지만 자녀들은 1시간 걸리는 간단한 수술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수술 전 의사는 내 몸에 약을 투여했다. 그러는 사이 내 옆에서는 의료기계들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수술 중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내가 받을 12시간 대수술을 위한 준비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사가 “어머니! 어머니! 하늘이 도왔다. 기적이다”는 말을 했다. 알고 보니 뇌수술 전 뇌혈관이 확장되면서 생명의 위험도 실명의 위기도 넘기게 된 것이다. 기적 중 기적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할렐루야! 나는 분명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온 북한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고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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