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사마리아의 그리심산>

 

 

신약성경에서 많이 언급되는 지역 이름 중에 사마리아는 예수님의 행적과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좋은 이웃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사마리아지방의 수가성에 들어가시어 그곳의 한 여인을 만나신 사건으로 인해 수가성 여인이라는 단어를 많은 곳에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열명의 문둥병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셨으나 한 명의 문둥병자가 찾아와 감사인사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B.C. 876 년 분열왕국시대에 오므리(Omri) 왕에 의해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사마리아란 이름은 사마리아의 산 주인이었던 세멜에게서 기인한 것입니다. 오므리왕의 아들 아합왕은 두로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사마리아를 베니게(페니키아)의 큰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왕궁의 화려함은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남아있습니다. '겨울궁' '여름궁' '상아궁' 그리고  '큰 궁'등의 표현은 바로 그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아합왕 시대에 유명한 엘리야선지자의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의 현장인 갈멜산이 그 사마리아지역에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앗수르제국(앗시리아)이 북 이스라엘왕국을 치고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 군대를 주둔 시켰으며, 바사제국(페르시아)이 그곳을 지배하였을 때에는 그 지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B.C. 108년에 유대의 일시적인 독립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는 이 성을 재건하였으며, B.C. 30년에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 황제를 위해 이 도시를 수축하여 그에게 헌정하면서 도시의 이름을 세바스티아(Sebaste Augustus  헬라 이름)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의 이름은 세바스티입니다.

 

현재도 그리심산에 살고 있는 인구 400명 정도의 사마리아인 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족입니다. 한때 강력한 힘을 지녔던 사마리아인 들은 2,500년간 순수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같은 핏줄이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분리된 것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부 이스라엘왕국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앗수르에게 망하면서부터입니다. 남 유대왕국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유대지방에서 북부의 갈릴지방을 갈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주민들이 정복자인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적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과 분리하여 그리심산에 별도의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옛 율법에 따라 예배하며 제사장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모세 5경만을 믿는 그들은 양피지에 적힌 모세 5경의 고사본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마리아인 들은 이것이 손으로 기록한 것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3,600년 전에 모세의 형 아론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매년 양을 잡아 그들의 성스러운 산인 그리심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지금도 유월절 제사는 정확히 구약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한 주간 예수님이 좋은 이웃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을 비유하였듯이 이 시대에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 소원을 가져봅니다

 

 


          

           

                                                      팔복교회              

            

갈릴리 가까이에 있는 팔복교회 입니다

 
경관이 제일 수려한 곳이었어요
 
교회 현관 입니다,,,깨끗함이 돋보이는군요
 
교회 내부 모습입니다
 
천정을 보고 계십니다^^
 
천정 바로밑에 창이 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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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룩소 (Luxor)

 

 

 

 

 

 

 룩소  luxor

 

룩소는 카이로의 남쪽에 위치하며 비행기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고대 이집트 중왕국의 수도 테베의 일부인 룩소는 최전성기

 

1500 B.C.에는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전해진다

 

이곳에 그 유명한 카르낙 신전과 룩소 신전이 거대하게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으며  오벨리스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룩소 신전의 오벨리스크 둘중 하나는 나폴레옹 침공시

 

프랑스로 옮겨져 현재는 파리의 콩코드광장에 있다.

 

물론 고대이집트의 많은 유물들은 콩코드 광장만이 아니라

 

유럽곳곳에 흩어져있어 룩소는 폐허가 된듯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당시의 위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규모는 여전하다.

 

룩소는 나일강에 의해 동서로 나눠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뜨는 나일강 동쪽에 신전을 지었고,

 

태양이 지는 서쪽은 주로 묘지나 제전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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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e)

 

트레비 분수[Trevi ,Fontana di] -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을 받아 N. 

  살비(1639~1751)의 설계로 1732년에 착수하여 1762년에 완성했다

 분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가 서 있는 모습이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두오모 대성당 / 이태리

세계 문화유산

 

 

두오모는 1292년에 착공되어 1436년에 완공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다. 깜비오(Arnolfo di Cambio)가 설계를 하였고,106m의

          높이를 자랑하는 돔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작으로

1420년 착공후 14년간 이 건축 공사에 종사했으며 사후 1461년에 완성을 보았다.

          대리석 모자이크 장식의 벽체는 장관을 연출하며,

내부는 전성기 고딕 아치형 천정이 아치들로 받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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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그리스)

 

성지순례-고린도교회(그리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했고, 57년 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
를 써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고린도전서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고린도전서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고린도 전서 7:1-10)
.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고린도전서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고린도전서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고린도전서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고린도전서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고린도전서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 이었다. 신자들 간에는 바울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도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지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도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코라의 구세주 교회, 터키어로 카리예 사원으로 불려진다.

이 건물은 알레기우스 1세의 장모 도우카니에 의해 11세기 후반(1077-1081)에 세워 졌다.

이곳은 건물 보다도 훌륭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더 유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어린 시절, 공생애와 기적들, 최후심판, 천사들 등 신약성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이해하기 좋게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이 교회는 1500년에 회교 사원으로 개조 되었다가 , 1984년부터 1954년에 걸쳐 미국의 비잔틴 협회에 의해 정리 보존된 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교회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면에서 비잔틴 문예 부흥기의 초기 예술성을 잘 반영해 주는 작품들로 정평이 나있다. 사진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프레스코화


욜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Jordan의 고대도시 페트라 (Petra)

1985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인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좁은 통로와 골짜기가 많은 산 중턱 바위를

반쯤 깎아내고 세워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유적지중 하나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있으며

아직까지 4분의 1밖에 발굴되지 않은 광활한 유적지이다.

찬란한 고대도시 요르단 페트라는 중동의 숨은 보석으로

198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다,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다가.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하였다

알 카즈네

암벽 사이의 좁은 협곡인 시크를 걸어들어가면 '보물창고'라는 뜻을 가진

알 카즈네가 나온다.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

알 카즈네

아랍어로 '보물창고'를 뜻하는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건물.

기원전 1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 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로마식 원형극장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7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페트라 유적지 입구

진 블록(Djinn blocks)이라 불리는 이곳은 무덤길이자 페트라 유적지의 입구이다.

처음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 알려졌다가 후에 무덤으로 밝혀졌다.

왼쪽에는 둥글둥글한 모양이, 오른쪽에는 직각 모양의 형태가 있다.

시크

페트라로 들어가는 폭 2m 정도의 좁은 협곡으로 그 길이는 약 2km에 달한다.

수도원

이 건물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부 벽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수도원으로 추정한다.

이 부근은 기독교인들이 바위 굴 속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묘지문

요르단 페트라.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영위하다가 7세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지진등의 자연재해로 묻히게 된다.

4층 무덤군

요르단 페트라.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Nabataean kingdom)의 수도였던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영위하다가

7세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지진등의 자연재해로 묻히게 된다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클리니움 무덤

윗층이 오벨리스크 무덤이며, 아래층은 로마의 식탁과 비슷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어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두사자 신전

요르단 페트라.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에

사자들이 조각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족 무덤지역

실크 무덤

단층 지괴의 낮은 부분에 조각되어 있는 무덤으로서

물결모양의 바위때문에 실크(silk)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납골당

왕궁 무덤

4개의 입구가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단층 지괴의 낮은 부분에 조각되어 있다.

로마 병사의 무덤

 

주기도문 교회           

            

주기도문 교회




 
우리나라 글씨

온통 교회는 천주교에서 지었


폼페이 화산 폭발로 죽은, 벨릭스의 아내

                                     

            

 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폼페이를 방문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20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놀라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세탁소와 극장, 약국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도관을 연결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전문가에 의하면 선거 벽보도 발굴되었는데, “나를 찍어 주면 시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게 된다.

이곳은 BC 8-7세기경에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했던 도시다. 그 후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정복되어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나폴리를 지배했고, 거기서 가까운 이곳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실 나폴리라는 말은 헬라어 네오폴리시(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들의 후예라서 그런지, 나폴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과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폼페이에서 멀지 않은 살레르노의 파에스툼(Paestum)도 그리스 사람들이 BC 5세기에 세운 도시다. 거기에 있는 두 신전은 얼마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지, 아테네에 있는 신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다. 이런 여러 면을 볼 때,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도착하는 항구들마다 신도시를 건설한 것 같다. 그리스에는 섬이 약 5천 개나 존재하기에,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을 내야 했고,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다.

▲폼페이 유적지. ⓒ한평우 목사

그런데 폼페이를 공중에서 보면 생선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경기장은 그 머리 부분에 있기에 마치 생선의 눈처럼 구성되었다. 그런데 꼬리 부분에는 치미테로(Cimitero, 공동묘지)가 있다. 이런 건설은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웬일인지 폼페이 멸망 전에 살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들에 대한 관심이 간다. 역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무리들 중에는 대단했던 인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동질감도 작용할 것이고……

폼페이는 화산재로 묻혀 잊힌 도시였다가, 1549년에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갔고, 그 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56년경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투스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여자를 불같이 사랑했지만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원로원의 허락을 얻을 수 없자, 홀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는 야망이 세조 만큼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버지가 형에게만 세자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했는데, 형이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두면 반란도 불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폼페이에 존재하기에 그 부분을 써 보려고 서론을 길게 나열했다.

사도행전 24장 24절 이하에 보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나오는데, 그의 아내는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였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미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행 24:25).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드루실라는 AD 39-44년 유대를 통치했던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막내 누이로, 버니게(행 25:13)와 자매였다. 그녀는 콤바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절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파혼했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그가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 후 그녀의 미모에 미혹된 총독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벨릭스에게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옥스퍼드성경원어대전에서 인용함).

당시 폼페이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로마인들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환락이 함께한다. 남편이 유대 총독 출신이었고 평소 탐욕이 대단했던 자였기에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고, 그 결과 이런 별장 지대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이곳 폼페이에 거주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폼페이는 우리의 제주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려한 환경과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휴양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폼페이에 살던 중, 아들과 함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만났다. 당시 폼페이에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날은 폼페이 사람들이 불의 신 ‘불칸’(Vulcan)을 섬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는 불을 섬기는 축제 중에 불로 망하고 말았다.

보통 이탈리아의 8월은 더위가 최고로 치닫는 때니, 이때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뜨거운 화산재, 또는 유독가스가 무더운 기온을 더욱 상승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폼페이 뒤에는 두 개의 산, 즉 베수비오(Vesuvio, 1,277m)와 솜마(Somma, 1,132m) 산이 쌍둥이처럼 있는데, 불을 뿜은 것은 솜마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화산재가 그곳에서 12km나 떨어진 폼페이까지 날아와 이 도시를 수 미터나 덮어 버렸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화산으로 인해 2천여 명이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폼페이가 화산재와 가스로 멸망하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 마즈노 곶(사도 바울이 하선했던 보디올 근처)에 있었던 대 플리니우스(Plinius)였다. 그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유독가스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함께 있었던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18세의 나이로 그 처절한 광경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인 리튼 발워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썼다.

폼페이는 아주 방탕했던 도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당시 이곳에 술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는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춘소였다. 매춘소를 방문하면 손님들이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매춘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진다. 죄의 양태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추구하는 길은 방탕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검은 구름과 가스 속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과 함께 삶을 마무리해야 했던,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삶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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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알렉산드리아市 (Alexandria)

                                                                                                                                                    보낸사람:/이영기  

 

 

 

 

   알렉산드리아市 (Alexandria)

 이집트 (Egypt)

크레오파트라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市는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후 수도로 삼았으며,

지금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83㎞ 떨어져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고대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파로스의 동쪽 끝에는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거대한 등대(파로스의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고대도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폼페이의 기둥과

히드리아누스 지하묘지는 아직 그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이 훼손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375만명 정도 되며,

이집트에서는 두번째 큰 도시로

이집트의 중요한 항구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해변을 따라 클레오파트라와 줄리어스 시저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옥타비아니우스의 비극이

연출됐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BC 3세기초 프톨레마이우스 1세에 의해 세워졌던 세계 최대의

도서관 자리에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1990년 부터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도서관이 재건되었으며

외벽에 각 나라의 문자를 새겨 기념하였는데

우리 문자도 몇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대왕 흉상

 

 

 

 

 

 

 

 

 

 

 

 

 

 

 

 

 도서관내부

 

 

 

 

7대 불가사의 파로스 등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콰이트베이 성채

이 요새는 1480년 술탄 카트이베이가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등대 위에 세운 것이다.

지금은 오래된 성채의 안에서 등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등대는 높이가 125m에 아래에

노동자들을 위해 약 30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7대부가사의의 하나인 파로스(Pharos) 등대

BC 280∼250년 무렵 Alexandria 파로스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등대인데

1100년과 130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알려져 왔는데,

지난 1994년 바닷속에서 높이 4.55m, 무게 12t에 이르는 여신상을 비롯한

등대 잔해 수백 점이 인양되어 그 존재를 드러냈다

파로스의 등대가 바빌론의 성벽을 밀어내고 세계의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등대는 서기 646년 사우디아라비아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할 당시만 해도 건재했었단다.

박물관에 당시 등대 모습을 복원해 그린 그림만 남아있다.

 

 원형 경기장 (The Roman Amphitheater)

2세기 경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함

 

 

 

 

 

 

 

 

 

 

 

 

 

 

 

 

 

 

 

 몬타자 궁전 (Montaza Palace)

 

 

 

 

 

 

 

 

 

 

 

 

 

 

 

 

 

 

 

 

 국제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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