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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엘리야의 불의 제단)
갈멜산
갈멜산은 최고봉이 552m이며, 북서쪽으로 약 25km길이가 되는 산맥이다. 평균 높이가 500m, 길이가 23km, 폭이 10km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 지역 전체를 갈멜산 지역으로 부른다.
갈멜산의 뜻은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아름답고 풍요롭다. 엘리야 기념교회는 해발 482m의 무흐라카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무후라카(MUHRAQAH)
무후라카는 예언자 엘리야가 희생제물을 바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갈멜산 등성이 북동쪽에, 이즈르엘 평야를 내려다 보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높이는 482m이다. 하이파로부터 무흐라카까지는 약 27Km거리로, 45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무흐라카의 뜻은 ‘불의 장소’ 또는 ‘불이 내려온 곳’이다.
관련 사건은 성경 열왕기상 제 18장에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의 혼인이후, 레바논 시돈의 티르 왕의 공주인 사악한 왕후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엘리야는 왕후를 거스려 일어나 온 백성과 바알의 예언자들을 갈멜산에 모이게 하도록 아합왕을 설득하였고, 그 곳에서 이들에게 도전을 펼쳤다.
바알 예언자들은 하늘로부터 제단 위에 불을 내리는 데 실패하였고, 엘리야가 승리를 거두게 되니,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잡아 키손 개울가에서 죽였다.(왕상 18:40) 이 세부 묘사로부터 희생제가 벌어진 곳이 인접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유대 전통은 위에 언급한 사건이 펼쳐진 곳이 무흐라카임을 늘 인정해 왔다. 1165년경, 스랑스 투델라(Tudela)의 랍비 벤야민은 갈멜산 위, 엘리야의 제단 장소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파리의 랍비 야고버 또한 이 장소를 방문하였다. 이 두사람 다 이 장소에 12개의 돌로 쌓은 오랜 기념비가 있음을 기록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를 엘리야의 제단이라고 불렀다.
18세기 이후 갈멜회 순례자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12개의 돌들은 183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현 예배당 자리에는 이전에 큰 바위를 잘라 만든 기도소가 있었으며, 상기 언급한 랍비 야고버(1228년)는 회교도들이 이 기도소에 찾아와 예언자 엘리야에 경의를 표하여 촛불을 밝히곤 했다고 보고하였다.
십자군 시대 이전에 세워졌을 이 기도소는 폐허가 되었고, 1883년 현재의 건물로 대치되었다. 갈멜회가 100년 이상 이 터를 소유하고 있다. 최근 들어 예배당은 현대식으로 고쳐졌고 성경의 서술에 의거 엘리야가 쌓은 제단을 기념하기 위해 12개의 돌로 된 제단이 세워졌다(왕상 18:31).
더 멀리 서쪽으로 중요한 유대 도시, 수마카가 있는데, 이 또한 비잔틴 시대에 속한다.
갈멜산을 올라가는 길 양 옆에 있는 감람나무숲
엘리야 기념교회 전경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이는 모습의 석상
갈멜산에 흐드러지게 있는 감람나무
갈멜산 무흐라카 봉우리에서 기손강과 이스르엘 평야와 지중해를 뒤로하고 있는 이스르엘 평원
엘리야 기념교회 내부
주변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꽃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데....)
아름답게 장식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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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모교회 - 교산교회
교산교회는 교동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섬들에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강화도의 모교회이다.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감리회 소속 존스(조원시) 선교사로,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21세의 최연소 선교사로서 내한하였다. 존스 목사는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맡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의 사역을 하면서 인천과 가까운 강화를 선교거점으로 삼고자 1892년 강화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외세에 민감한 강화도민들에게 배척당해 강화남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곗날을 주일로 하여상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으나 계가 깨지면서 다 흩어지고 교인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강화 출신 이승환이다. 강화군 서사면 시루미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이승환은 내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에 자신이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고, 둘째는 주막집을 운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몇 달 후 존스 목사는 임종을 앞둔 이승환의 모친께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타고 강화에 갔었으나 그 곳 토박이 유학자인 김상임을 필두로 한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승환은 모친을 업고 갯벌에 빠지며 배로 올라가 달밤에 선상세례를 받게 하였고 곧이어 자기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이승환은 강화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았으며 마침내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강화도에 첫 교회를 탄생시켰으니, 1893년 봄 강화교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강화선교는 마침내 김초시(김상임)의 개종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그는 교항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훈학자였다. 그는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 소식에 깜짝 놀라며 그 양놈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이승환의 안내로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존스가 찾아와‘형님’하며 넙죽 큰 절을 하자 그의 사려 깊은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1894년 10월, 마을 최고 유지였던 김상임은 마침내 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의 종교로만 알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큰 계기가 되었다. 지방 유지였던 김상임은 1896년 5월부터 교항교회 전도사, 1898년 본처전도사직분을 받고강화구역 10여 곳의 교회(가정교회 포함)를 맡아 사역하면서 선교사업에 힘썼다. 그는 인천의 신학회와 1900년 평양신학회에서 공부함으로, 1902년 4월에 감리교에서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 목사 후보가 되었으나 이 영예를 넉 달 앞두고 열병환자들을 심방하다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헌신의 터전위에, 복음의 씨앗은 전파의 흐름을 타고 선교개시 10여 년 만에 강화도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17개의 감리교회가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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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 교회
예수님 께서 사형선고 받으시던 자리에 사형선고 교회 교회 안에는 멋진 스테인그라스가 눈길을 사로잡네요 천정의 아름다움 벽면에 그려진 성화 조각상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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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화산 폭발로 죽은, 벨릭스의 아내
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폼페이를 방문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20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놀라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세탁소와 극장, 약국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도관을 연결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전문가에 의하면 선거 벽보도 발굴되었는데, “나를 찍어 주면 시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게 된다. 이곳은 BC 8-7세기경에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했던 도시다. 그 후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정복되어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나폴리를 지배했고, 거기서 가까운 이곳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실 나폴리라는 말은 헬라어 네오폴리시(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들의 후예라서 그런지, 나폴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과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폼페이에서 멀지 않은 살레르노의 파에스툼(Paestum)도 그리스 사람들이 BC 5세기에 세운 도시다. 거기에 있는 두 신전은 얼마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지, 아테네에 있는 신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다. 이런 여러 면을 볼 때,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도착하는 항구들마다 신도시를 건설한 것 같다. 그리스에는 섬이 약 5천 개나 존재하기에,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을 내야 했고,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폼페이를 공중에서 보면 생선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경기장은 그 머리 부분에 있기에 마치 생선의 눈처럼 구성되었다. 그런데 꼬리 부분에는 치미테로(Cimitero, 공동묘지)가 있다. 이런 건설은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웬일인지 폼페이 멸망 전에 살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들에 대한 관심이 간다. 역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무리들 중에는 대단했던 인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동질감도 작용할 것이고…… 폼페이는 화산재로 묻혀 잊힌 도시였다가, 1549년에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갔고, 그 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56년경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투스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여자를 불같이 사랑했지만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원로원의 허락을 얻을 수 없자, 홀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는 야망이 세조 만큼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버지가 형에게만 세자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했는데, 형이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두면 반란도 불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폼페이에 존재하기에 그 부분을 써 보려고 서론을 길게 나열했다. 사도행전 24장 24절 이하에 보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나오는데, 그의 아내는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였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미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행 24:25).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드루실라는 AD 39-44년 유대를 통치했던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막내 누이로, 버니게(행 25:13)와 자매였다. 그녀는 콤바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절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파혼했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그가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 후 그녀의 미모에 미혹된 총독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벨릭스에게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옥스퍼드성경원어대전에서 인용함). 당시 폼페이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로마인들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환락이 함께한다. 남편이 유대 총독 출신이었고 평소 탐욕이 대단했던 자였기에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고, 그 결과 이런 별장 지대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이곳 폼페이에 거주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폼페이는 우리의 제주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려한 환경과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휴양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폼페이에 살던 중, 아들과 함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만났다. 당시 폼페이에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날은 폼페이 사람들이 불의 신 ‘불칸’(Vulcan)을 섬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는 불을 섬기는 축제 중에 불로 망하고 말았다. 보통 이탈리아의 8월은 더위가 최고로 치닫는 때니, 이때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뜨거운 화산재, 또는 유독가스가 무더운 기온을 더욱 상승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폼페이 뒤에는 두 개의 산, 즉 베수비오(Vesuvio, 1,277m)와 솜마(Somma, 1,132m) 산이 쌍둥이처럼 있는데, 불을 뿜은 것은 솜마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화산재가 그곳에서 12km나 떨어진 폼페이까지 날아와 이 도시를 수 미터나 덮어 버렸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화산으로 인해 2천여 명이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폼페이가 화산재와 가스로 멸망하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 마즈노 곶(사도 바울이 하선했던 보디올 근처)에 있었던 대 플리니우스(Plinius)였다. 그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유독가스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함께 있었던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18세의 나이로 그 처절한 광경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인 리튼 발워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썼다. 폼페이는 아주 방탕했던 도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당시 이곳에 술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는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춘소였다. 매춘소를 방문하면 손님들이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매춘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진다. 죄의 양태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추구하는 길은 방탕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검은 구름과 가스 속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과 함께 삶을 마무리해야 했던,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삶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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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이 여부스인들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았다. 이곳은 수원이 풍부하고 유다교, 예루살렘, 벤자민 3파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인가 하면, 모슬렘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모하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로 4,000년 역사를 가진 예루살렘은 그러나 어느 도시보다도 테러와 전쟁을 많이 겪었다. 현재 약 33만(유다인 255,000, 아랍인 75,000)명이 살고 있으며 주요 묘지는 성곽 안에 있다. 유다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로 구시가의 성벽에 둘러 싸여 있다. 고적으로는 겟세마니 동산, 성모성당, 통곡의 벽이 있고, 신시가는 신 헤브라이 같은 문화 기관이 있다.
예루살렘 성벽은 여량시대의 건축양식이 집약되어 있으며 1542년 슬레이만 지배 아래 터키에 의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신축되었다. 성벽 둘레가 25마일이고, 평균 높이가 40피트, 벽에는 34개의 탑과 8개의 성벽 문이 있다. 그리스도는 베타니아 동산에서 오시어 예루살렘을 돌아보신 후 멸망할 것을 영감으로 아시고 우셨는데 그곳이 통곡의 벽이다.
1.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
유다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이라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비록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3000년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산다.
2. 올리브동산의 겟세마네동산 올리브 동산은 300피트의 높은 산으로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님이 승천한 곳으로 예루살렘에 대해 예언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곳이며 명상에 잠기셨던 곳이다.
3. 모리아산 바위
모리아산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봉헌한 곳으로 길이가 5야드, 폭이 12야드, 지상에서 2야드 높이이며 돌이 돔 아래 높여 있다. 4.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갔던 전통적인 길이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이 길을 성역화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의류, 돌 등 각종 토산품을 파는 영세상점이 즐비하다. 14처는 기도서에 있는 장면 그대로이다.
5. 예수무덤성당, (예수부활성당) -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The Church of the Resurrection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요한19, 41-42)
6. 최후의 만찬 성당 (Coenaculum)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곳이며(마르 14, 12-16, 루가 22, 7-13) 부활 후 2번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사도 2, 1-4)
7. 다윗왕의 무덤 (Tomb of King David)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유다인의 성지 중 하나로 Tudela의 랍비 Benjamlne이 1173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여기에 안치되었고, 다윗의 무덤이라 불렀다. 돌로 만들어졌고 수놓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Torah의 은관을 가지고 있다.
8. 황금의 문 (Golden Gate)
이는 7C 비잔틴 건축으로 Mercy gate(자비의 문) 장소에 세워져 있다. 측면 벽의 일부는 원시 건축양식으로 이 문을 통해 예수는 개선 입장 후 도시에 들어갔다. 9. 겟세마니 동산 (Gethemane)
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고 오늘날에도 2,000년 전 그대로를 보여준다.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반대 언덕에 현대 도시들이 줄지어 있으나 이 동산은 변한 것이 없다. 10. 주님의 기도 성당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고 예루살렘의 몰락을 예언(루가 21, 5-7; 마태 24, 1-4)하셨으며 주님의 마지막 오심과 제3의 종말을 예고하셨다.(마르 12, 1-4) 11. 예수승천성당 (The Chapel of the Ascension)
사도행전 1, 9-12에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려왔고 그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셨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12. 베드로 회개기념성당 (닭울음성당) (The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키드론 계곡을 굽어드는 이 성당은 1931년 Caiphas의 전통적인 집터에 지어졌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대제관 Caiphas의 집으로 인도되어 그 날 밤을 세웠는데 여기가 베드로의 첫 시험장소였다. 발굴 결과 신부들은 Caiphas집터에 세워진 것을 확인했고 거의 완전한 히브리척도(자), 돌절구, 종들의 주거지, 법정, 비잔틴 교회의 잔재가 발굴되었다. 13. 성 안나 성당 (The Church of St. Anne)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을 때는 그들이 있는 동안 건축했거나 재건한 7개의 교회를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이 안나 성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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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탄생 교회
예수님 탄생 장소인 동굴의 중심에 세워진 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봉헌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한 곳에는 베들레헴의 별이 있고 바로 그 곁에는 구유에 누우셨던 장소가 있다,
겸손의 문, 들어올 때는 반드시 머리를 숙여야 한다, 로마군인들이 말을 타고 그대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임,
탄생교회 내관의 모습,
339년 콘스탄틴 황제의 모후에 의해 처음 세워졌던 교회 중앙 부분과 모자이크가 잘 남아 있으며 십자군 시대의 벽화가 아직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
은으로 만든 다윗의 별자리가 태어나신 장소를 말해주고 있다,
철망이 있는 부분이 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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