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산상의 설교를 하신 곳, 팔복교회와 베드로수위권교회


『팔복교회 터 산상의 설교 : 예수님께서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 5:1~12)』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셔서 여덟 가지 참된 행복에 대해 설교하신 곳을 기념하여 세운 팔복교회가 높은 언덕에 있었다. 언덕의 성전 뒤편으로는 갈릴리호수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어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교회 밖에서 한 바퀴 빙 돌면서 보니 팔각형의 모서리를 볼 수 있었다. 성전내부에는 여덟 가지의 행복에 대한 말씀이 벽면을 따라가며 쓰여 있었다.

이 교회의 지붕이 팔각형인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여덟 가지 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의 정원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야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었다. 우리일행은 이곳에 앉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 후, 언제 들어봐도 마음 밑바닥을 흔드는 말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 좋은 말씀을 떠올리면서 베드로수위권교회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 시몬 베드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아 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다. 예수께서「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두 번째「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이르셨다.,.. (요한 21 : 1~14)』

이 베드로수위권교회는 1933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에 쓰인 「멘사 도미니(Mensa Domini)」는 「주님의 식탁」이란 뜻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었다라고 전해지는 장소이다. 위에 나오는 요한복음 21장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막혀 돌아가신 뒤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그의 사랑고백을 들으시고 지상 사명을 맡기시는 구절이 나온다.

이 베드로수위권교회 밖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중요한 사명을 맡기시는 조각상이 서있으며 검은색 현무암으로 된 교회건물 옆으로 돌아가면 갈릴리호수가까지 갈 수 있는 돌계단과 조그만 조약돌이 깔려있는 장소를 볼 수 있다. 또한 교회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작은 바위가 보였는데 거기에는 멘싸 크리스티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설명
                       1, 2, 3, 4-갈릴리 북쪽 산위에 위치한 팔복교회
                       5, 6-갈릴리 북쪽 산위에 위치한 팔복교회 내부
                       7, 8-갈릴리 북쪽 산위에 위치한 팔복교회정원
                       9-갈릴리호수가의 베드로수위권교회 주변
                       10, 11, 12-갈릴리호수가의 베드로수위권교회 내부


 

   

   

갈멜산(엘리야의 불의 제단)

 

                                갈멜산

 갈멜산은 최고봉이 552m이며, 북서쪽으로 약 25km길이가 되는 산맥이다. 평균 높이가 500m, 길이가 23km, 폭이 10km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 지역 전체를 갈멜산 지역으로 부른다.

 

갈멜산의 뜻은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아름답고 풍요롭다. 엘리야 기념교회는 해발 482m의 무흐라카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무후라카(MUHRAQAH)

무후라카는 예언자 엘리야가 희생제물을 바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갈멜산 등성이 북동쪽에, 이즈르엘 평야를 내려다 보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높이는 482m이다. 하이파로부터 무흐라카까지는 약 27Km거리로, 45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무흐라카의 뜻은 ‘불의 장소’ 또는 ‘불이 내려온 곳’이다.

 

관련 사건은 성경 열왕기상 제 18장에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의 혼인이후, 레바논 시돈의 티르 왕의 공주인 사악한 왕후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엘리야는 왕후를 거스려 일어나 온 백성과 바알의 예언자들을 갈멜산에 모이게 하도록 아합왕을 설득하였고, 그 곳에서 이들에게 도전을 펼쳤다.

 

바알 예언자들은 하늘로부터 제단 위에 불을 내리는 데 실패하였고, 엘리야가 승리를 거두게 되니,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잡아 키손 개울가에서 죽였다.(왕상 18:40) 이 세부 묘사로부터 희생제가 벌어진 곳이 인접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유대 전통은 위에 언급한 사건이 펼쳐진 곳이 무흐라카임을 늘 인정해 왔다. 1165년경, 스랑스 투델라(Tudela)의 랍비 벤야민은 갈멜산 위, 엘리야의 제단 장소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파리의 랍비 야고버 또한 이 장소를 방문하였다. 이 두사람 다 이 장소에 12개의 돌로 쌓은 오랜 기념비가 있음을 기록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를 엘리야의 제단이라고 불렀다.

 

18세기 이후 갈멜회 순례자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12개의 돌들은 183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현 예배당 자리에는 이전에 큰 바위를 잘라 만든 기도소가 있었으며, 상기 언급한 랍비 야고버(1228년)는 회교도들이 이 기도소에 찾아와 예언자 엘리야에 경의를 표하여 촛불을 밝히곤 했다고 보고하였다.

 

십자군 시대 이전에 세워졌을 이 기도소는 폐허가 되었고, 1883년 현재의 건물로 대치되었다. 갈멜회가 100년 이상 이 터를 소유하고 있다. 최근 들어 예배당은 현대식으로 고쳐졌고 성경의 서술에 의거 엘리야가 쌓은 제단을 기념하기 위해 12개의 돌로 된 제단이 세워졌다(왕상 18:31).

 

  더 멀리 서쪽으로 중요한 유대 도시, 수마카가 있는데, 이 또한 비잔틴 시대에 속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갈멜산을 올라가는 길 양 옆에 있는 감람나무숲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 기념교회 전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이는 모습의 석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갈멜산에 흐드러지게 있는 감람나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갈멜산 무흐라카 봉우리에서  기손강과 이스르엘 평야와 지중해를 뒤로하고 있는 이스르엘 평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 기념교회 내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꽃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정원

강화의 모교회 - 교산교회                   

                  

 

 

 

 

 

 

교산교회는 교동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섬들에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강화도의 모교회이다.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감리회 소속 존스(조원시) 선교사로,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21세의 최연소 선교사로서 내한하였다.

존스 목사는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맡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의 사역을 하면서 인천과 가까운 강화를 선교거점으로 삼고자

1892년 강화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외세에 민감한

강화도민들에게 배척당해

강화남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인천내리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로 하여상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으나 계가 깨지면서 다

흩어지고 교인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강화 출신 이승환이다. 강화군 서사면 시루미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이승환은 내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에 자신이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고, 둘째는 주막집을 운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몇 달 후 존스 목사는 임종을 앞둔 이승환의 모친께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타고 강화에 갔었으나 그 곳 토박이 유학자인 김상임을 필두로 한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승환은 모친을 업고 갯벌에 빠지며 배로 올라가 달밤에

선상세례를 받게 하였고 곧이어 자기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이승환은 강화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았으며 마침내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강화도에 첫 교회를 탄생시켰으니,

1893년 봄 강화교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김상임 공덕비



강화선교는 마침내 김초시(김상임)의 개종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그는 교항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훈학자였다. 그는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 소식에

깜짝 놀라며 그 양놈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이승환의 안내로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존스가 찾아와‘형님’하며 넙죽 큰 절을 하자 그의 사려 깊은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1894년 10월, 마을 최고 유지였던

김상임은 마침내 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의 종교로만 알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큰 계기가 되었다.

교산 교회는 믿음과 말씀으로 전념하면서 교인수가 50여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

지방 유지였던 김상임은 1896년 5월부터 교항교회 전도사,

1898년 본처전도사직분을 받고강화구역 10여 곳의 교회(가정교회 포함)를

맡아 사역하면서 선교사업에 힘썼다.

그는 인천의 신학회와 1900년 평양신학회에서 공부함으로,

1902년 4월에 감리교에서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 목사

후보가 되었으나 이 영예를 넉 달 앞두고 열병환자들을

심방하다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교산교회는 다른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헌신의 터전위에, 복음의 씨앗은 전파의 흐름을 타고 선교개시

10여 년 만에 강화도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17개의 감리교회가 세워져 있다.



9월 23일 아침 메일

시리아의 팔미라 고대 도시와 교도소

 팔미라를 2000 년 된 대도시의 IS가 탈취회다고 알려졌다

유네스코는 고대 도시의 파괴가 "인류에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라고 경고

다마스쿠스 근처 감옥에 수감자는 강력범들이 수천명 달한다고 한다

또IS가 민간인을 포함 17명을참수

 

아래사진은 시리아 와 IS가 전투전 사진임

 

 

 

 

 

 

 

 

 

 

 




성지 순례 모음           

            

 

 

 

성지 순례 모음

 

 


베들레헴
아인카렘
헤브론
예리코(여리고)
길벗 쿰란
사해
마사다
소돔
텔 아비브
텔 카실
야포
아슈케론
케이사리아
메기드
하이파
아코
나사렛
다볼산
티베리아호
카펠나오
다브가(팔복교회)
스팟트
기봇 아예럿트 허셔홀
고랑
바냐스
베르세브
디모너
아브다드
에이럿트

 


사형선고 교회           

           

예수님 께서 사형선고 받으시던 자리에 사형선고 교회

 
교회 안에는 멋진 스테인그라스가 눈길을 사로잡네요
 
천정의 아름다움
 
벽면에 그려진 성화
 

 
조각상 입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로 죽은, 벨릭스의 아내                             

                 

 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폼페이를 방문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20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놀라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세탁소와 극장, 약국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도관을 연결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전문가에 의하면 선거 벽보도 발굴되었는데, “나를 찍어 주면 시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게 된다.

이곳은 BC 8-7세기경에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했던 도시다. 그 후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정복되어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나폴리를 지배했고, 거기서 가까운 이곳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실 나폴리라는 말은 헬라어 네오폴리시(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들의 후예라서 그런지, 나폴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과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폼페이에서 멀지 않은 살레르노의 파에스툼(Paestum)도 그리스 사람들이 BC 5세기에 세운 도시다. 거기에 있는 두 신전은 얼마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지, 아테네에 있는 신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다. 이런 여러 면을 볼 때,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도착하는 항구들마다 신도시를 건설한 것 같다. 그리스에는 섬이 약 5천 개나 존재하기에,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을 내야 했고,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다.

▲폼페이 유적지. ⓒ한평우 목사

그런데 폼페이를 공중에서 보면 생선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경기장은 그 머리 부분에 있기에 마치 생선의 눈처럼 구성되었다. 그런데 꼬리 부분에는 치미테로(Cimitero, 공동묘지)가 있다. 이런 건설은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웬일인지 폼페이 멸망 전에 살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들에 대한 관심이 간다. 역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무리들 중에는 대단했던 인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동질감도 작용할 것이고……

폼페이는 화산재로 묻혀 잊힌 도시였다가, 1549년에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갔고, 그 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56년경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투스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여자를 불같이 사랑했지만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원로원의 허락을 얻을 수 없자, 홀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는 야망이 세조 만큼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버지가 형에게만 세자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했는데, 형이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두면 반란도 불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폼페이에 존재하기에 그 부분을 써 보려고 서론을 길게 나열했다.

사도행전 24장 24절 이하에 보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나오는데, 그의 아내는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였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미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행 24:25).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드루실라는 AD 39-44년 유대를 통치했던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막내 누이로, 버니게(행 25:13)와 자매였다. 그녀는 콤바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절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파혼했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그가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 후 그녀의 미모에 미혹된 총독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벨릭스에게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옥스퍼드성경원어대전에서 인용함).

당시 폼페이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로마인들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환락이 함께한다. 남편이 유대 총독 출신이었고 평소 탐욕이 대단했던 자였기에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고, 그 결과 이런 별장 지대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이곳 폼페이에 거주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폼페이는 우리의 제주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려한 환경과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휴양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폼페이에 살던 중, 아들과 함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만났다. 당시 폼페이에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날은 폼페이 사람들이 불의 신 ‘불칸’(Vulcan)을 섬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는 불을 섬기는 축제 중에 불로 망하고 말았다.

보통 이탈리아의 8월은 더위가 최고로 치닫는 때니, 이때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뜨거운 화산재, 또는 유독가스가 무더운 기온을 더욱 상승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폼페이 뒤에는 두 개의 산, 즉 베수비오(Vesuvio, 1,277m)와 솜마(Somma, 1,132m) 산이 쌍둥이처럼 있는데, 불을 뿜은 것은 솜마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화산재가 그곳에서 12km나 떨어진 폼페이까지 날아와 이 도시를 수 미터나 덮어 버렸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화산으로 인해 2천여 명이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폼페이가 화산재와 가스로 멸망하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 마즈노 곶(사도 바울이 하선했던 보디올 근처)에 있었던 대 플리니우스(Plinius)였다. 그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유독가스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함께 있었던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18세의 나이로 그 처절한 광경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인 리튼 발워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썼다.

폼페이는 아주 방탕했던 도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당시 이곳에 술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는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춘소였다. 매춘소를 방문하면 손님들이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매춘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진다. 죄의 양태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추구하는 길은 방탕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검은 구름과 가스 속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과 함께 삶을 마무리해야 했던,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삶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독,은혜의자료방 > 성지순례의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지 순례 모음   (0) 2017.09.11
사형선고 교회   (0) 2017.09.08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목사 (서울 중구 정동) / 6  (0) 2017.08.22
예루살렘 성지  (0) 2017.08.18
예수님 탄생교회  (0) 2017.08.15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목사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100주년 기념탑     (출처- http://blog.naver.com/areyoureal

 

100주년 기념교회 내부

 

정동 문화재예배당         (출처- http://blog.naver.com/chihirototo)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 담겨있는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 붉은벽돌 건물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최초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한국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연회에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허럭받은 후 4년동안 정동교회당 건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 예배당은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어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된 후 하나님의 축복속에 순조롭게 건축이되었습니다. 그해에 기초공사를 끝냈고, 1896년에는 지붕을 얹었습니다. 1897년 6월에는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첫 예배당에서 하였으며 정동교인들이 입당한 것은 10월 3일 주일이었으나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을 기해 하나님과 이 민족앞에 봉헌하였습니다. 이 예배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으나 1914년 대부흥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합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평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동 문화재예배당 당시의 사진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 

 

정동 문화재예배당,  복구된 정동예배당


1950년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6. 25전쟁으로 말미암아 주요 관공서 기관이 파괴되고 주요기관이 마비되었다. 정동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단이 폭격을 맞아 폭삭 무너져 내려앉았고 파이프 오르간이 망가져서 파이프가 휘고 부서져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교회는 절반이나 파괴되고, 목사관도 날아가고 없었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정동교회는 곧 1953년 11월 8일 임원회가 열리고 `정동교회당복흥위원회'가 조직된다. 그리고 최단시일 안에 중수할 것을 결의하면서 모은 헌금이 528,830원에 달했다. 한편 총리원에서도 보조금 70만원을 보내주어 총 수리비 1,225,000원을 조달하게 된다. 수축공사는 12월 3일에 착공하여 약 3주만에 완료된다. 그리하여 1953년도 성탄 축하예배는 새로이 복구된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문화재 예배당의 의의


이와 같이 정동(문화재)예배당은 1887년 건축, 봉헌될 때부터 한국 감리교회와 민족의 흐름 속에서 그 중심축 역할을 담담히 감내했습니다. 봉건적 신분 차별과 여성 차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새로운 빛을 던져 준 것입니다. 정동 예배당에서 남녀를 가르는 휘장이 벗겨졌을 때 낡은 봉건적 사고는 이미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도, 공산주의의 도정도 정동교회는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 많은 기독교 정신을 갖춘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정동(문화재)예배당의 벽돌 하나하나에 민족과 믿음의 선배들의 숨소리와 땀이 정결하게 배어 있습니다. 정동 예배당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들리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됨을 맛보게 합니다. 문화재예배당은 다가오는 21세기 에는 한국 교회와 민족의 등불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포근한 품과 같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껴안는 어머니 교회의 면모를 영원히 간직 함으로써 우리의 감동과 사명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정동 문화재예배당 정문

 

정동 문화재예배당 내부

 

감리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비


884년 6월 24일은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인천에 도착함으로서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1934년은 조선 감리교회의 50주년에 해당하는 해가 되므로 크게 기념행사를 갖게된다. 조선 감리교회는 1935년 4월 부활절을 기해 50주년 행사를 크게기념하는 행사를 갖게 된다.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을뿐더러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이다. 비석전면에는 "감리교회 조선선교 오십주년기념비. 기독교조선감리회교우일동건립"이라고, 후면에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 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제1,3대 담임목사 아펜젤러 목사, 50주년 기념비 

 

아펜젤러 목사 (제1,3 대 , 1885-1891, 1893-1902)


우리 나라 최초의 감리교 목사이자, 이 땅에 감리교 역사를 뿌리내린 아펜젤러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5일 부활 주일 날 감리교의 스크랜튼 목사와 함께 조선이라는 조그만 나라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나 드류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의 뜻을 품고 있던 중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고종황제의 허락으로 이 곳에서 선교사업, 교육사업, 봉사활동 등 무수히 많은 일을 하였는데, 그 첫째가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에 기독교문화를 꽃피운 일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최초의 감리교 모교회건물인 문화재예배당을 짓고 정동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신 분으로 조선인의 민족 복음화에 한 평생 힘쓰셨으며, 한글 신약성서 번역작업을 통해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도 큰 일을 하였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해 배재학당을 건립하고 민족의 지식사업에 열정을 다 하였다. 아펜제러 목사가 목포에서 해난 충돌사고로 순직하기 전까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한국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감리교회, 그리고 한글 신약성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진정 위대한 선교사요, 교육자요, 선각자로서 이 땅에 민족 복음화를 위해 죽는 날까지 몸바쳤으며 그 공은 실로 위대하다 하겠다.

 

최병헌 목사 (제 4대, 1902-1913)


1902년 최병헌 목사가 부임하면서 정동교회의 지도력은 선교사들로부터 한인 목회지로 완전히 전환된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쌓으며, 그 위에서 평생 목회 하셨다. 그의 사회적 복음이해는 이미 고찰한 그의 강연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탁사의 복음 이해를 위한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그의 글 `죄 도리'이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문제인 죄의 원인과 결과와 그 해결책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과 결부하여 풀이하였다. 또한 최병헌 목사가 일생동안 신학적 기초로 삼은 것이 재래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어떻게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주제해명을 위해 1900년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삼인문답"을, 그리고 1907년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를 각각 종교인간의 대화형식으로 연재했다. 그 후 "셩산유람긔"는 「성산명경」으로 ,"종교변증론"은 「만종일연」으로 각각 단행본이 간행되었다. 이렇듯 최병헌 목사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요, 철학자요, 문인으로서 정동신학의 기초를 집대성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정동교회의 초기역사  (사진, 글 출처- http://chungdong.onmam.com)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출처- 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http://chungdong.onmam.com

 

시병원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일라 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보구여관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 날 이화여대 부속 병원으로 발전한다. 

 

벧엘에서의 첫 세례식, 성만찬식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벧엘예배당


정동제일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 '벧엘예배당' 입니다.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중이었던 워른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사방 8*16 피트의 한옥 한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예배가 1887년 10월 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이야 말로 한국감리교회의 요람이요,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뿌리일뿐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나아가 한국기독교와 근대 이후 우리민족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을 돌아보게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전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1913년 아펜젤러 목사 사후 일어난 기념사업 중 기념비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아펜젤러 기념 현판과 기념종은 결실을 맺었다.

아펜젤러 기념 현판은 1903년 8월 11일 배재학당 현관에 부착하였다. 1907년 모금을 시작한 기념종은 1913년 결실을 맺었다. 최병헌은 아펜젤러 기념종의 명칭을 “세상을 깨운다.” 혹은 “세상을 깨우친다.”는 뜻으로‘경세종’(警世鍾) 혹은 ‘각세종’(覺世鍾)이라 하였다.  이 종은 지금도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다.

 

정동교회와 애국청년운동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말하자면 청년교회요, 학생교회이다. 따라서 이외의 교회활동은 주로 청년운동에 비중이 주어져 있다. 청년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주일운동이요, 또 하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다. 주일학교 운동은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을 목적하고 있는 데 비해, 엡윗청년회 운동은 신앙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엡윗청년회를 지도하고 프로그램에 직접 개입한 이들이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등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천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 두고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 우거하면서 배재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윤치호는 관직에 있으면서 배재학생들 위한 강연회를 자주 연다. 그리하여 독립문 기공식이 있은 지 열흘 만인 1896년 11월 30일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조직된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 관여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신앙 위에 선 민족구국운동이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의 경우가 많지만, 협성회의 회장, 부회장 등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또한 정동교회 엡윗선교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 인쇄소, 정동 삼문인쇄소


한국 개신교의 모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는 정동 34번지 일원은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기독교 문화지로 지정된 본 교회의 일원은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1885년 이곳에 와 처음 머물렀던 보구여관과 시병원 건물이 있었던 곳이며 이 두 건물이 헐린 후 이곳에는 배재식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어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고 이 곳 종람관(도서실)독서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이 밤낮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 한국 최초의 문예지 "백조"가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에 이어 삼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국 충군 애국 지사들의 모임장소이며 대피소이기도 한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문화재 예배당과 독립운동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거사전인 2월 26일 기독측 인사 10명이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독립선언문 초안에 동의하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측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으며 또한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주동력인 배재학생 동원을 김진호 전도사가 이화학생은 하란사 교수가 맡아 주도했으며, 선언문과 격문의 등사와 전달은 정득성 전도사가 전담하는 등 거사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주도하여 각각 외무차장, 의정원 부의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던 유관순의 일화는 오늘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문화재)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의 모습에서 신앙과 조국의 운명을 끌어 안았던 정동(문화재)예배당의 기품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선언의 이념과 내용, 3.1 운동의 진행 방향 등이 모두 정동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정신과 함께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예배당과 민족중흥


1945년 광복을 여러 국제 정치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 내면에는 신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민족을 위해 봉사했던 정동제일교회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적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 정동(문화재)예배당의 정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1950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과 함께 정동예배당의 절반이, 그것도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과 제단이 있던 곳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허망한 이념 때문에 동포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했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극복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시 파괴된 정동예배당의 복구 사업은 비단 정동교회 교인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감리교 전체의 과업이었습니다. 피난 생활 후 극심한 궁핍의 상황 속에서도 수축 공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지대한 관심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1953년도 성탄 축하 예배는 새롭게 복구된 예배당에서 성대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역사의 격동기인 조국 근대화 속에서도 정동제일교회는 중추적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앙과 교육의 병행을 목적으로 삼는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양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 기본 정신을 영성운동과 교육과 선교와 봉사라는 측면에서 발전시켰습니다.  

 

배재학당 동관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1886년 세워진 옛 배재학당의 동관이다. 다른 옛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이제는 1916년에 세워진 이 건물만 하나 남았다. 서울기념물 제16호로 H.G.아펜젤러가 세운 국내 최초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 중요 지표이다.

 

 

보수공사가 진행중인 배재학당 동관.  (출처- http://blog.naver.com/jcs89225)

 

동관 측문  

 

공사중인 배재학당    (출처-  http://blog.naver.com/hyotao)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이기도 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선교사로 이땅에 온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먼저 하게된 것으로 정동제일교회와는 한울타리(우리)에 있는, 말 그대로 "우리"이며 선교공동체 이다.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세운것은 이 학교를 한국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또한 배재하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고 그가 목표한 유능한 인재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었다.

 

배재학당

 

배재학당 자리

 

이화학당의 옛 모습, 1886년

 

이화학당, 1908년도, 스크랜튼 선교사가 지도하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aceman53)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위해 세운 최초의 신교육 여성학교이다. 봉건적 사고에 갇혀있는 이 땅의 여성을 신교육을 통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이화학당은 복음의 생명력을 입증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교육은 복음과 함께 생기 발랄한 신문화, 예컨대 문학과 음악, 미술, 체조, 율동등을 이 땅에 도입했고 생활문화 또한 이에 편승하게 됨으로 정동제일교회를 중심한 배재, 이화학당은 이 땅의 개화를 선도한 한국 신문화의 산실이었다. 이 모든 일에 정동제일교회는 깊숙이 관여했다.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어두운 시기에 젊은 청년들의 교육과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계속된 역사에서 줄기차게 조국과 민족을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스크랜튼 선교사 

 

이화학당의 옛 모습, 1886년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예루살렘 성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이 여부스인들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았다. 이곳은 수원이 풍부하고 유다교, 예루살렘, 벤자민 3파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인가 하면, 모슬렘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모하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로 4,000년 역사를 가진 예루살렘은 그러나 어느 도시보다도 테러와 전쟁을 많이 겪었다. 현재 약 33(유다인 255,000, 아랍인 75,000)명이 살고 있으며 주요 묘지는 성곽 안에 있다. 유다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로 구시가의 성벽에 둘러 싸여 있다. 고적으로는 겟세마니 동산, 성모성당, 통곡의 벽이 있고, 신시가는 신 헤브라이 같은 문화 기관이 있다
.
예루살렘 성벽은 여량시대의 건축양식이 집약되어 있으며 1542년 슬레이만 지배 아래 터키에 의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신축되었다. 성벽 둘레가 25마일이고, 평균 높이가 40피트, 벽에는 34개의 탑과 8개의 성벽 문이 있다. 그리스도는 베타니아 동산에서 오시어 예루살렘을 돌아보신 후 멸망할 것을 영감으로 아시고 우셨는데 그곳이 통곡의 벽이다.

 

1.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

 

유다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이라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비록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3000년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산다.
모슬렘 교도는 기도할 때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성전을 건축할 때도 메카와의 방향을 고려해 짓는다. 모슬렘 교도는 단순해서 언행을 믿지 않고 유일신만 믿는다
.
70
Titus는 거의 모든 벽을 부수었으나 거대한 벽돌의 일부분은 그의 후손들에게 로마군대의 위용을 보여 주기 위해 남겨 놓았다. 로마 통치기간 동안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비잔틴시대에 들어와 그들은 사원 몰락 기념일에 신성한 사원의 잔해인 이 벽에 와서 그들 민족의 이산의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일년에 한번씩 방문이 허락되었다. 19481967년까지 유다인은 이 벽이 요르단 지역에 있기 때문에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
6
일 전쟁 후 통곡의 벽은 예배의 장소일 뿐 아니라 국가의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큰 광장은 수 천명이 예배드릴 수 있게 정돈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 올리브동산의 겟세마네동산 

올리브 동산은 300피트의 높은 산으로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님이 승천한 곳으로 예루살렘에 대해 예언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곳이며 명상에 잠기셨던 곳이다.
예수님이 배반을 당하고 체포된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다. 올리브 나무가 많아 올리브 산이라는 말이 붙여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3. 모리아산 바위

 

모리아산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봉헌한 곳으로 길이가 5야드, 폭이 12야드, 지상에서 2야드 높이이며 돌이 돔 아래 높여 있다.
바위는 희생제물의 제단으로 사용했고 바위 표면에는 희생된 제물의 피를 흘려 보낸 구멍이 있다. 십자군시대부터 있어온 바위를 둘러싼 철 휘장은 제거되어 최근 튼튼한 난간으로 대치되었다.

4.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갔던 전통적인 길이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이 길을 성역화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의류, 돌 등 각종 토산품을 파는 영세상점이 즐비하다.
이 십자가의 길 중 9개는 복음에 관계되고, 5개는 전통에 의해 전해진다. 그 첫 2개는 안토니오 자리 안에 위치해 있고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주례한다
.
이 길의 시작을 나타내는 아치는 Ecce homo로 알려져 있는데 본시오 빌라도가 ", 이 사람이다"(요한 19, 5)라고 한 곳에 이것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14처는 기도서에 있는 장면 그대로이다.
3
처는 옛날에 계곡이었고 첫 번째 예수가 넘어지신 장소
.
8
처부터는 밖으로 나옴
.
8, 9
처 처형 받고 묻히신 장소를 모아 교회를 세움
.
10
처 옷을 벗기신 곳
.
11
처 돌아가신 장소
.
12
처 갈바리아 산(처형당하고 묻히신 장소).


갈바리아는 큰 돌로 이 꼭대기에 두 개의 교회가 있다.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곳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이 옷을 벗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곳이다.
이 두 교회의 양끝은 실제 암반에 놓여 있다.

5. 예수무덤성당, (예수부활성당) -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The Church of the Resurrection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요한19, 41-42)
예수의 무덤은 갈바리아산 기슭에 놓여 있고 이 돌로 깎은 새 무덤은 아리마테아 요셉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리마테아 요셉의 무덤은 부유한 유다인의 묘 양식으로 되었는데 2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하나는 애도자를 위한 만남의 장소, 또 하나는 시체가 누워있는 돌로 된 침대 판으로 사용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왕후는 80세의 고령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 예수님의 무덤과 십자가, 승천하신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각각 성당을 지었다. 예수의 실제 무덤은 109년까지 존재하였으나 칼리프 하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헬레나 성녀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 성당에는 헬라나 성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
교회는 처형된 장소보다 묻힌 장소를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부활신앙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쪽에서 해가 뜨므로 교회도 동쪽을 향하고 있어 희망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6. 최후의 만찬 성당 (Coenaculum)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곳이며(마르 14, 12-16, 루가 22, 7-13) 부활 후 2번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사도 2, 1-4)
이와 같이 Coenaculum은 성체/신품/견진/고해성사를 행하신 곳이다. 13C 나폴리 임금이 이곳을 사서 교황에게 희사한 것을 교황께서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주었다. 성령강림 때의 견진성사가 이루어진 다락방에서는 회교도에 의해 추방되어 그곳에서 400년간 미사를 드리지도 못했고 1948년 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공식적인 기도도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은 프란치스코 수도원 식구들에게 공동기도만 할 수 있게 허락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7. 다윗왕의 무덤 (Tomb of King David)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유다인의 성지 중 하나로 Tudela의 랍비 Benjamlne 1173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여기에 안치되었고, 다윗의 무덤이라 불렀다. 돌로 만들어졌고 수놓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Torah의 은관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8. 황금의 문 (Golden Gate)

 

이는 7C 비잔틴 건축으로 Mercy gate(자비의 문) 장소에 세워져 있다. 측면 벽의 일부는 원시 건축양식으로 이 문을 통해 예수는 개선 입장 후 도시에 들어갔다.
기독교인들은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곁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기억을 덧붙이는데(사도 3, 1-8) 이 아름다운 문이 '황금의 문'이고 이곳은 1530년 터키에 의해 완전히 벽을 쌓게 되었다.

9. 겟세마니 동산 (Gethemane)

 

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고 오늘날에도 2,000년 전 그대로를 보여준다.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반대 언덕에 현대 도시들이 줄지어 있으나 이 동산은 변한 것이 없다.
예수께서 가끔 은둔과 기도를 위해 이곳에 오시어 기도하셨고(루가 22, 39) 수난 당하기 전날 밤 가장 슬픈 수난의 시간을 체험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곳이다
.
"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 42) 라는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나 보니 제자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루가 22, 45) 예수께서 최후만찬 후 이곳에 계신 것을 알고 유다가 대제관의 하인들을 데리고 와 예수를 잡아 넘긴 곳이기도 한 이곳에 헬레나 성녀가 성당을 지으셨다.

10. 주님의 기도 성당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고 예루살렘의 몰락을 예언(루가 21, 5-7; 마태 24, 1-4)하셨으며 주님의 마지막 오심과 제3의 종말을 예고하셨다.(마르 12, 1-4)
콘스탄틴 로마 황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어 올리브산 정상에 교회를 세웠는데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몰락했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새로 세워졌다. 십자군이 멸망하자 교회도 몰락하여 모슬렘 교도에게 점령되었다
.
1868
Aurelia de Bassi 왕자는 그 교회가 있던 장소를 사서 프랑스에 기증했으며 1875년 프랑스는 가르멜 수녀원을 세워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교회 안의 회당 벽에는 주님의 기도가 62개 국어로 쓰여져 있고, Bassi 왕자는 회당에 묻혀있다.

11. 예수승천성당 (The Chapel of the Ascension)

 

사도행전 1, 9-12에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려왔고 그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셨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곳은 가장 정확한 승천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올리브산을 떠났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100야드 거리의 안식일 여행이었고 예수 승천 장소와 예루살렘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거리였다
.
원래 14세기에 이곳에 이미 비잔틴 교회가 지어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인에 의해 몰락, 또 다시 십자군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의 작은 성당은 예수 승천 시 남겨진 전설적인 예수 발자국이 난 돌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워졌고 아직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슬렘 사람들은 아치형의 벽을 쌓고 현재의 둥근 천장을 더했다. 회교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만, 예수 승천 날은 우리도 미사를 드릴 수 있다.

12. 베드로 회개기념성당 (닭울음성당) (The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키드론 계곡을 굽어드는 이 성당은 1931 Caiphas의 전통적인 집터에 지어졌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대제관 Caiphas의 집으로 인도되어 그 날 밤을 세웠는데 여기가 베드로의 첫 시험장소였다. 발굴 결과 신부들은 Caiphas집터에 세워진 것을 확인했고 거의 완전한 히브리척도(), 돌절구, 종들의 주거지, 법정, 비잔틴 교회의 잔재가 발굴되었다.

13. 성 안나 성당 (The Church of St. Anne)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을 때는 그들이 있는 동안 건축했거나 재건한 7개의 교회를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이 안나 성당이다.
1100
년 발드윈의 부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그곳은 성벽으로 된 천장과 아름다운 둥근 지붕, 고딕식 입구를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성모가 태어난 곳이고 그의 부모의 집이기도 하였다
.
1856
년 마지드는 전쟁 중 나폴레옹의 지원에 대한 답례로 이곳을 나폴레옹 3세에게 주었고 교회는 복원하여 화이트 신부에게 주었다.


예수님 탄생 교회           

           

예수님 탄생 장소인 동굴의 중심에 세워진 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봉헌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한 곳에는 베들레헴의 별이 있고 바로 그 곁에는 구유에 누우셨던 장소가 있다,

 

겸손의 문,  들어올 때는 반드시 머리를 숙여야 한다,

로마군인들이 말을 타고 그대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임, 

 

 

 

 

 탄생교회 내관의 모습,

 

 339년 콘스탄틴 황제의 모후에 의해 처음 세워졌던 교회 중앙 부분과 모자이크가 잘 남아 있으며

십자군 시대의 벽화가 아직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

 

 

 

 은으로 만든 다윗의 별자리가 태어나신 장소를 말해주고 있다,

 

 철망이 있는 부분이 구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