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선교유적지 (노고단, 왕시루봉
한국 최초 남감리교회/고양감리교회
대성전 전경 1972년 신년 주일예배 후 양총재 담임 목사와 교우들 같은해 8월에 윤치호의 한국선교 요청이 이루어져 10월 13일 핸드릭스(Bishop Hendrix) 감독이 남감리교 최초의 주재 선교사 리드(C.F.Reid, 한국명 이 덕) 목사와 함께 인천을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전도사로 거듭난 시각장애인 복술가 출신의 백사겸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 김흥순 고양감리교회는 일제시대 당시 폐쇄된 적이 있었다. 이후 다시 모인 교인들은 또 흩어져야 했는데 선교구역분할 협정으로 인해 고양 지역이 장로교회 구역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재건되어 신앙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홍기 담임목사 노인센터 등 지역에 필요한 복지와 섬김 늘릴 것 주기철 목사 발자취 (진해 웅천교회, 마산 문창교회, 부산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교회가 있다. 주 목사는 13세 때인 1910년 12월 25일 경남 진해시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됐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를 근거로 호주장로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경남지방 특성상 그들의 영향으로 웅천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웅천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수련관을 건립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글·이주희 기자) 진해 웅천 주기철 생가, 교회 기념관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주기철 목사가 웅천교회 집사일 때 기록한 헌금록,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시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25), 앞줄 중앙이 주기철 전도사 웅천교회 마당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사진·김용두 기자) < 마산 문창교회 >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naver.com/ma77)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는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남 지방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이 붙은 문창교회는 바로 이같은 배경으로 마산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창립시에는 마산포교회였다가 1919년 신축예배당을 추산동으로 옮기면서 문창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1931년 7월은 교회내부 사정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떠날 때까지 교회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이를 기념해 문창교회 역사관에는 무학산에서 주 목사가 기도하던 십자가 모양의 금 간 바위를 축소 보관하고 있다. (마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성경최초성경전례지(서천마량리, 동백정교회)
성경최초성경전례지,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한국기독교 역사상 제1호 문화재 탄생 예정 2002년 경 유승광 공주고 교사가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다 우연히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는 부분을 발견하고 성경이 아니냐는 의견을 군청에 전달했다. 이후 서천군은 관련 기록(조선왕조실록, 멕레오드의 '극동항해기', 홀의 '조선 류큐 항해기')을 찾아내어 이같은 사실을 교계와 학계에 알리는 한편 연극으로 재현하는 등 주변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서천군은 2003년 4월 충남도와 문화관공부에 공식 브리핑을 실시하는 한편, 5월에는 각급 기관과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참여하는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사업회'를 발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마량진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사업회 발족(2003. 5. 서천군민회관)> <제1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고증세미나(2003. 7. 도둔감리교회)> <제2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학술세미나 및 선언식(2003. 10. 서천군민회관)> <제3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학술 심포지움(2004. 9. 서울 새문안교회)> <한영 문화교류 학술 세미나(2005. 9. 서천군민회관)> <사업설명회 및 기자간담회(2006. 2.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 이어,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190주년 기념예배'(2006. 9. 성경전래지 현장)>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최초 성경전래가 독일의 귀츠라프 선교사에 의해 보령 고대도에 상륙해 성경을 전했던 1832년보다 16년 앞선 것으로 1816년 9월 5일 마량진에 한국최초 성경전래가 되었음이 학계에 의해 고증된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따라 '마량진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6-3번지 7,200여평의 대지에 494평 규모의 종교문화박물관과 722평 규모의 한영 문화교류 기념관, 부대시설로 조각공원, 상징탑, 문화광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최초 성경전래지를 통한 역사교육의 장 조성과 내외국인 즐겨 찾는 관광지, 기존 관광자원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 등으로 개발되게 된다. 이에 따라 기본계획 용역 수립, 문화재 지정, 사전 환경성 검토, 문화재 지표조사 등을 거쳐 실시설계를 통해 성지 조성 사업을 마칠 계획이다. 이를 위한 건축 예산액 190억원은 서천군과 충청남도와 문화관광부가 지원할 예정이며, 부지 매입에 필요한 40억원은 기독교계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부지 매입비 40억원 중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아펜젤러선교사 순직지 기념관 건립을 조건으로 10억원, 예장합동 통합 각각 5억원, 기장 기성 예장정통 대신 순복음 각각 4억, 예장합보 개혁 3억, 침례교 예성 2억 등의 비용이 배당되었다. 성경최초성경전례지, 한국 최초 성경전래 190주년 순조 16년 1816년 9월 5일, 당시 중국을 거쳐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탐험하며 해도를 작성하던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맥스웰 함장)와 리라호(바실 홀 함장)가 닻을 내리고 정박한 곳이 바로 '마량진 갈곶'(현재 충남 서천군 서명 마량리)이다. 이들이 해안에 정박해 있을 때,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이 중앙의 명령으로 찾아가 의사소통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두 배의 함장인 맥스웰과 바실 홀이 조대복에게 전달한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이었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경이 전래된 지 190년만에 마량리에서 '한국최초 성경전래 19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또한 예배후 2부순서로 서천군기독교연합회는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 건립 부지매입의 빠른 추진 등을 위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업무 협약식을 맺었다. 황대근 목사(서천군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사업위원회 대표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는 한상명 목사(실무회장)의 기도, 함필주 목사(기획위원장)의 경과보고, 나소열 서천군수와 이상만 의원의 축사, 윤여생 목사(공동회장)의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 최희범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는 설교에서 "여러분이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을 위해 한국교회 뿐 아니라 세계교회를 향해서 엄청난 일을 한 지 3년이 되었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업무협약식을 계기로 더불어 함께 홍보하는 일에 전력하자"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마량진이 한국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는 날이 속히 이루어지며, 세계교회가 주목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고 기도했다. 나소열 군수(서천군수)는 대독한 축사에서 "우리 군의 입장에서 문화유산의 계승은 물론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성역화 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며, "지금은 작은 한 알의 밀알이지만 남다른 열정과 내실있는 활동을 통해서 우리 군의 마량진이 유서깊은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자리의 계신 모든 분들의 전폭적인 성원과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기대했다. 2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서천군기독교연합회 업무 협약식'을 가졌다. 박종순 목사(한기총 대표회장)를 대신하여 참석한 최희범 목사(한기총 총무)와 윤여생 목사(서기연 공동회장)는 업무 협약서에 사인하여 교환함으로 이후 성역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한국교회의 동참을 주도할 예정이다. 성경최초성경전례지 성경최초성경전례지 한국 측 기록 (1816.9.5. 순조실록 제19권, 조선왕조실록 제 48권) - 순조 16년 7월19일 병인조의 충청수사 이재홍의 징계 기록 영국 측 기록 (1818년 출간된 "한국 서해안 항해기") 전해진 성경 (1611년 초판 킹 제임스 역본으로 추정) 성경최초성경전례지 영국함선 항해도, 바실 홀의 항해일지에 언급된 서면 마량리 일대 항해도 성경 전래 상상화 성경 전래 상상화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아펜젤러 목사 추모비> 아펜젤러 추모비,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가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펜젤러 추모비, 글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정진삼 목사 아펠젤러 추모비 후면 아펠젤러 추모비 후면 요나의 무덤과 니느웨(니네베) 니느웨(니네베·Nineveh)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 때 노아의 둘째아들인 함의 계통에서 니므롯이란 영걸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곳에 큰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니느웨이다(창 10:8∼12).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이며 이라크 전쟁으로 일반인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술에서 곧바로 티그리스 강을 건너면 니느웨이다. 요나무덤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고도로서 이곳의 유적지는 2개의 커다란 쿠윤지크(Quyunjiq·많은 양무리)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선지자 요나) 언덕으로 나눠져 있다. 약 13㎞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하며 성벽 위에는 6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그리고 성은 매우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성 내부에는 병영과 무기고,군량창고 등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니느웨성을 한번 도는데 3일이 걸린다고 요나서 3장 2절에 기록돼 있을 만큼 매우 넓어서 220만평에 달한다. 니느웨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을 보면 당시 니느웨의 규모가 다른 어도시보다도 컸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하룻밤에 몰살되었고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피살됐다. 니느웨성은 상업이 번창하여 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해져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했으나 요나는 이방인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게 된다. 니느웨 이에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한 후 니느웨로 가 멸망을 경고, 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써 멸망이 보류되었다(욘 3:4∼10). 그후 BC 606년에 바벨론에 멸망되었는데 이것은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나 3:7,습 2:13). 니느웨성벽 오늘날 요나의 무덤은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에살핫돈 왕궁에 있다.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로 피살된 부친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위에 오른 자이다(왕하 19:37). 1845∼50년 발굴로 니느웨의 도서관 규모가 밝혀지고 점토로 만든 서판들과 설형문자 비문도 발굴되었다. 니느웨 성문 도서관에는 언어학,천문학,점성술,종교적 문헌,법전,과학 서적과 기구,문학과 예술,역사서와 연대표,상업서, 각종 서간 등 서판이 무려 2만6000개나 소장돼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니느웨는 이라크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원이 많고 고대 앗수르의 수도답게 많은 유적이 있다. 에밀 보타의 발굴에 의해 당시 규모가 많이 드러났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니느웨 성벽 오늘날 모술에는 57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시민 대부분은 쿠르드족이다. 기후는 자그로스 산맥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영하까지 내려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400㎜로 남부에 비해 비가 많이 온다. 산업은 중세부터 직물로 유명했으며 바그다드 다음 가는 대도시로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다. 특히 1939년 북쪽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채굴기지와 교통요지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 쇠퇴하고 있다 요나의 무덤이 있는 회교사원 Nebi Yunis
2000년 9월 28일 2차 인티파터(팔레스타인 무장봉기)로 인하여 한 동안 여리고는 일반인들이 출입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2004년 10월 아라파트 사망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지도자 아부마젠이 선출되었고, 이스라엘에 매일같이 일어났던 테러도 멈추었다. 이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웨스트 벵크와 가자지구 곳곳마다 보안장벽이라는 높이 9M 콘트리트 장벽이 세워지기는 했어도 이전보다는 훨씬 좋은 분위기 인 것 같다. 이제는 여리고를 일반인들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한 여리고는 해저 258m지역이다. 만년 된 구조물이 발굴되어진 것으로 미루어 도시역사를 만년으로 생각한다. 연중 강우량이 100mm에 불과한 사막과 농경지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주변에 6개의 샘을 통하여 충분히 물이 공급되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28km 가량 떨어져 있고, 요단강은 동쪽으로 9km정도 떨어져 있다. 처음으로 성벽이 건축 된 것은 이 도시를 열망하는 이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에 페르시아의 행정도시가 되었으며, 주전 336년 알렉산더의 권력자들에 의해 물이 독점되자 점차 도시가 황폐하게 된다.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세를 주고 샘을 사용하다 그녀의 사후 여리고를 차지하고 겨울 별장을 건설한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하셔서 처음으로 정복케 하신 도시이다.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수기인 요단강을 건너서 이 도시에 접근하였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본 사람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함락 작전명을 받았는데 오직 성 주위를 매일 돌되 엿새 동안하고 7일째는 7번 돌며 제사장이 나팔을 불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을 하나님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직 순종으로 이 말씀을 들고 나아 갈 때 견고한 진이 무너졌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한 번은 가본 적이 있는 역사적인 유적지 이다. 대사제 요나단이 기원 전 100년 무렵에 깎아지듯 한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그 후 헤롯왕은 자연의 요새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산을 보고 원래 있던 건물을 강화. 증축하여 호화로운 겨울 궁전을 만들었다. 마사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미를 갖는 것은 헤롯이 궁전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원 70년에 유태 인이 이곳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2년 이상이나 싸웠기 때문이다. 최후에는 로마군에게 모욕받는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900여 명이 5명의 여자 아이를 빼놓고 전원 자결했다고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또 다시 전멸을 거듭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노 모어 마사다‘라는 슬로건에 함축되어 있다. 15,000명의 로마군과 최후의 항전을 벌리던 유태인 967명이 급기야 자살이 아니라 타살?의 방법으로 최후를 마친곳이라 현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입대 선서 장소로사용하며 순결,순전함을 지킨 기개를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군의 돌대포 그당시 로마군의 주둔지 (저 아래 버스 근처에 있는 ) 돌대포로 로마군이 대포를 쏘아대면 이렇게 큰 돌들이 꼭대기까지 쏘아 올려진다는 것이다 (공성퇴) 로마군의 인공언덕 물저장소 비잔틴시대 교회 성벽위의 집/ 전쟁시엔 방어벽으로 쓰임 수로 채석장 헤롯궁 모형 헤롯궁 헤롯 목욕탕 사우나 회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