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선교유적지 (노고단, 왕시루봉          

           

한국 최초 남감리교회/고양감리교회

            

 

  대성전 전경


   중국과 평양으로 넘나들 수 있었던 고양은 육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곳에 민족을 사랑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윤치호 선생의 열의가 씨앗이 되어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회 고양감리교회가 세워진다. 고양감리교회를 기지로 역시 100년이 넘은 서울의 광희문교회, 종교교회, 자교교회, 배화학교가 뒤따라 세워졌다. 고양감리교회는 111주년을 맞은 할아버지교회이지만 청년처럼 봉사한다. 역사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문지역아동센터 등을 통해 지역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한다.


   고양동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다. 나지막하고 소박한 주택, 땅뙈기가 한 평이라도 여유 있을라치면 고추며 상추 모종이 무럭무럭 자란다. 한쪽엔 으리으리한 아파트가 즐비해 신도시의 면모를 풍긴다. 고양 지역은 조선시대 조선과 중국을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고양감리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이 숙박 휴식하던 사적 제 144호 벽제관지(碧蹄館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11년 전, 바로 이 곳 고양동에 고양감리교회가 세워졌다.

 
   윤치호 선생

 


   윤치호 선생의 초청과 미 남감리교회 리드의 내한


   고양감리교회는 좌옹(佐翁) 윤치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토포사(討捕使)에 등용된 부친을 따라 9세에 상경한 윤치호는 1881년 봄 17세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개화사상가이자 기독교인인 나카무라(中村正直, 1832~1891)가 설립·운영하던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유학중 영어를 터득한 윤치호는 1883년 5월부터 주한 미국 공사 푸트(L.H. Foote)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함께 귀국한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로 임명된 부친이 유배당한다. 윤치호는 1885년 1월 푸트의 소개장을 갖고 상해로 망명 겸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 중등과에 입학한 윤치호는 2년 뒤인 1887년 중서서원 교수 본넬(W.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1888년 10월 중서대학에서의 공부를 마친 윤치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서 3년,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도합 5년에 걸쳐 신학과 현대 학문을 공부했다. 윤치호는 틈틈이 순회강연을 하고 받은 돈과 학비를 절약해 모은 돈 2백 달러를 1893년 3월, 에모리대학 총장 캔들러(W.A. Candler)에게 위탁하며 한국 젊은이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 해 11월 상해 중서서원 교수로 부임했던 윤치호는 1895년 2월 3일, 조국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1972년 신년 주일예배 후 양총재 담임 목사와 교우들


   같은해 8월에 윤치호의 한국선교 요청이 이루어져 10월 13일 핸드릭스(Bishop Hendrix) 감독이 남감리교 최초의 주재 선교사 리드(C.F.Reid, 한국명 이 덕) 목사와 함께 인천을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리드 선교사는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선교 기지를 구입하고 출국했다가 1896년 8월 14일에 가족과 함께 이사해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감리사였던 상동교회 담임목사 스크랜턴(Scranton)은 자신이 맡고 있던 상동교회 교인인 김주현과 김흥순을 리드에게 보내 선교를 도왔다. 남감리교회는 다른 교파가 선교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여 선교하려고 했다. 따라서 미개척지였던 강원도 선교를 목표로 경기도 북부의 요지인 고양(高陽)을 우선적인 선교지로 삼았다. 지금의 고양동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첫 번째 역관(驛館)인 벽제관이 있던 곳으로 당시로는 번성했던 마을이었던 까닭이다. 김주현과 김흥순은 매서인으로 <인가귀도> <천로역경>과 같은 책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1897년 5월 2일은 남감리교 첫번째 교회인 고양읍교회가 조직된 날이다. 리드 선교사가 장년 24인과 유년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했던 것. 첫 교회는 윤치호가 예배당 용도로 사서 기부한 한옥에서 시작됐다.

 
   백사겸 전도사


   전도사로 거듭난 시각장애인 복술가 출신의 백사겸


   매서인 김제옥이 전도지를 전한 인물 가운데는 백사겸이라는 유명한 복술가도 있었다. 백사겸은 시각장애인으로 고양 땅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모셔갈 정도로 이름난 복술가였지만 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미신과 우상이 판치는 세상이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23년 간 사람을 속이면서 명성을 쌓아왔던 터였다. 어디를 가든 백사겸이 자리만 펴면 “백 장님이 왔다.”하면서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백사겸은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걸인을 잘 대접하는 등 선행을 하였으나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여전했다. 그러던 중 매서인 김제옥에게 전도지 <인가귀도(人家歸道)>를 받고, 며칠 후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보이지 않아 헤매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는 좌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우편에 있는 사람이 은으로 만든 산통을 주면서 “나는 예수이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산통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통이다. 그는 꿈에서 받은 은산통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바로 며칠 전에 받은 전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전도지를 읽어보니 인가귀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신 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다는 말에 통곡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세례를 받았다. 이 날이 바로 고양읍교회가 조직된 날이다.


   교인이 된 후 백사겸은 거짓되게 모은 재물을 정리했다. 가구를 파니 3천 냥이나 되었다. 백사겸이 돈 쓸 곳을 고민하던 중 돈을 몽땅 강도에게 빼앗겼다. 백사겸은 불의한 재물이니 잃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마저도 공짜로 남에게 주고 가족을 이끌고 고양을 떠나 행주 땅으로 이주했다. 행주 땅에 도착하니 소문을 듣고 전도를 부탁하는 이들이 많았다. 남감리교에서는 이런 백사겸을 사역자로 임명, 1899년부터 리드 선교사와 함께 개성으로 파송했다. ‘조선의 삭개오’라 불린 백사겸은 개성, 장단 등지에서 13년간 전도하면서 장단읍교회, 감암리(甘岩里)교회, 개성남부교회 등을 세웠다.

 
   창립100주년기념비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 김흥순


   1895년 6월 1일에 기독교인이 되어 상동교회에 출석하던 김흥순은 그 해 10월 1일 스크랜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남감리회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리드 선교사를 도와 전도활동을 펴고 고양읍교회의 창립에 기여한다.


   매서인들의 주요활동이 성서 판매였지만 목적은 아니었다. 매서인들은 회개한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지역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역할도 담당했던 것. 매서인들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확인하고, 복음으로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고자 했다.


   김흥순은 1896년 12월부터 엄동설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경기도 고양읍을 중심으로 성서를 판매하면서 전도를 시작, 많은 교인을 얻게 되었고 1897년 5월 2일 리드 목사를 통해 교회를 조직했다. 이 고양감리교회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설립한 남감리교회다. 김흥순은 계속해서 불교신자 김온양과 김억실 등을 고양읍에서 전도했다. 1911년 성경학원·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남감리교회의 초대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 뒤 경기·강원도 일대의 각 교회 목회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한국 최초의 원로목사(元老牧師)로 추대되었다.


    하늘문지역아동센터


   고양감리교회는 일제시대 당시 폐쇄된 적이 있었다. 이후 다시 모인 교인들은 또 흩어져야 했는데 선교구역분할 협정으로 인해 고양 지역이 장로교회 구역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재건되어 신앙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양감리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를 모토로 지역 섬김에 앞장선다. 고양동 거리를 청소하는 작은 일부터 방과후학교를 통해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그 모양은 다양하다. 고양감리교회 내에 위치한 하늘문지역아동센터는 이미 지역의 명물이다.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아이들의 쉼터가 되고, 맛있는 저녁을 제공하는 식당이 되고, 독서·영어·풍물·미술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또 다른 배움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더 나이 먹었으므로 더 많이 사랑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홍기 담임목사

   노인센터 등 지역에 필요한 복지와 섬김 늘릴 것


   1983년부터 미국에 있는 감리교회를 섬기다 21세기가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왔다는 이홍기 목사. 3년 전 고양감리교회에 부임한 뒤 목사 사무실의 ‘목양실’이라는 간판을 뗐다. 목사도 기도하고 섬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홍기 목사는 ‘목사는 목자고 교인은 양’이라는 인식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 양이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 발자취 (진해 웅천교회, 마산 문창교회, 부산 초량교회)       

       


진해 웅천교회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교회가 있다. 주 목사는 13세 때인 1910년 12월 25일 경남 진해시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됐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를 근거로 호주장로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경남지방 특성상 그들의 영향으로 웅천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웅천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수련관을 건립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글·이주희 기자)

 


주기철 목사 생가, 현재 공터인 생가는 복원 작업이 추진중이다.

 

진해 웅천 주기철 생가, 교회 기념관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주기철 목사가 웅천교회 집사일 때 기록한 헌금록,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시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25), 앞줄 중앙이 주기철 전도사 

 

웅천교회 마당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사진·김용두 기자)  

 

< 마산 문창교회 >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naver.com/ma77)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는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남 지방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이 붙은 문창교회는 바로 이같은 배경으로 마산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창립시에는 마산포교회였다가 1919년 신축예배당을 추산동으로 옮기면서 문창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1931년 7월은 교회내부 사정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떠날 때까지 교회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이를 기념해 문창교회 역사관에는 무학산에서 주 목사가 기도하던 십자가 모양의 금 간 바위를 축소 보관하고 있다.

(마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성경최초성경전례지(서천마량리, 동백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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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최초성경전례지,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한국기독교 역사상 제1호 문화재 탄생 예정

 

 2002년 경 유승광 공주고 교사가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다 우연히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는 부분을 발견하고 성경이 아니냐는 의견을 군청에 전달했다.

이후 서천군은 관련 기록(조선왕조실록, 멕레오드의 '극동항해기', 홀의 '조선 류큐 항해기')을 찾아내어 이같은 사실을

교계와 학계에 알리는 한편 연극으로 재현하는 등 주변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서천군은 2003년 4월 충남도와 문화관공부에 공식 브리핑을 실시하는 한편, 5월에는 각급 기관과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참여하는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사업회'를 발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마량진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사업회 발족(2003. 5. 서천군민회관)> <제1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고증세미나(2003. 7. 도둔감리교회)>

<제2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학술세미나 및 선언식(2003. 10. 서천군민회관)> <제3차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지 학술 심포지움(2004. 9. 서울 새문안교회)>

<한영 문화교류 학술 세미나(2005. 9. 서천군민회관)> <사업설명회 및 기자간담회(2006. 2.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 이어,

<마량진한국최초 성경전래190주년 기념예배'(2006. 9. 성경전래지 현장)>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최초 성경전래가 독일의 귀츠라프 선교사에 의해 보령 고대도에 상륙해 성경을 전했던 1832년보다 16년 앞선 것으로

1816년 9월 5일 마량진에 한국최초 성경전래가 되었음이 학계에 의해 고증된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따라 '마량진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6-3번지 7,200여평의 대지에

494평 규모의 종교문화박물관과 722평 규모의 한영 문화교류 기념관, 부대시설로 조각공원, 상징탑, 문화광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최초 성경전래지를 통한 역사교육의 장 조성과 내외국인 즐겨 찾는 관광지, 기존 관광자원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 등으로 개발되게 된다.

이에 따라 기본계획 용역 수립, 문화재 지정, 사전 환경성 검토, 문화재 지표조사 등을 거쳐 실시설계를 통해 성지 조성 사업을 마칠 계획이다.

이를 위한 건축 예산액 190억원은 서천군과 충청남도와 문화관광부가 지원할 예정이며, 부지 매입에 필요한 40억원은 기독교계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부지 매입비 40억원 중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아펜젤러선교사 순직지 기념관 건립을 조건으로 10억원, 예장합동 통합 각각 5억원,

기장 기성 예장정통 대신 순복음 각각 4억, 예장합보 개혁 3억, 침례교 예성 2억 등의 비용이 배당되었다.

 

 

성경최초성경전례지, 한국 최초 성경전래 190주년


순조 16년 1816년 9월 5일, 당시 중국을 거쳐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탐험하며 해도를 작성하던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맥스웰 함장)와 리라호(바실 홀 함장)가 

닻을 내리고 정박한 곳이 바로 '마량진 갈곶'(현재 충남 서천군 서명 마량리)이다. 

이들이 해안에 정박해 있을 때,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이 중앙의 명령으로 찾아가 의사소통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두 배의 함장인 맥스웰과 바실 홀이 조대복에게 전달한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이었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경이 전래된 지 190년만에 마량리에서 '한국최초 성경전래 19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또한 예배후 2부순서로 서천군기독교연합회는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 건립 부지매입의 빠른 추진 등을 위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업무 협약식을 맺었다.

 황대근 목사(서천군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사업위원회 대표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는 한상명 목사(실무회장)의 기도,

함필주 목사(기획위원장)의 경과보고, 나소열 서천군수와 이상만 의원의 축사, 윤여생 목사(공동회장)의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

최희범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는 설교에서 "여러분이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을 위해 한국교회 뿐 아니라 세계교회를 향해서 엄청난 일을 한 지 3년이 되었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업무협약식을 계기로 더불어 함께 홍보하는 일에 전력하자"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마량진이 한국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는 날이 속히 이루어지며, 세계교회가 주목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고 기도했다.

 

나소열 군수(서천군수)는 대독한 축사에서 "우리 군의 입장에서 문화유산의 계승은 물론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성역화 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며, "지금은 작은 한 알의 밀알이지만 남다른 열정과 내실있는 활동을 통해서

우리 군의 마량진이 유서깊은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자리의 계신 모든 분들의 전폭적인 성원과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기대했다.

2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서천군기독교연합회 업무 협약식'을 가졌다.

박종순 목사(한기총 대표회장)를 대신하여 참석한 최희범 목사(한기총 총무)와 윤여생 목사(서기연 공동회장)는 업무 협약서에 사인하여 교환함으로

이후 성역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한국교회의 동참을 주도할 예정이다.

 

 

성경최초성경전례지

 

성경최초성경전례지  

   

한국 측 기록   (1816.9.5. 순조실록 제19권, 조선왕조실록 제 48권) - 순조 16년 7월19일 병인조의 충청수사 이재홍의 징계 기록

영국 측 기록   (1818년 출간된 "한국 서해안 항해기")

전해진 성경    (1611년 초판 킹 제임스 역본으로 추정) 

 

성경최초성경전례지

 

영국함선 항해도, 바실 홀의 항해일지에 언급된 서면 마량리 일대 항해도

 

성경 전래 상상화

 

성경 전래 상상화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마량진 성역화 사업회

 

 

<아펜젤러 목사 추모비>

 

아펜젤러 추모비,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가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펜젤러 추모비, 글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정진삼 목사

 

아펜젤러 순직 기념비, 정진삼 목사

 

아펠젤러 추모비 후면

 

아펠젤러 추모비 후면


요나의 무덤과 니느웨(니네베)

 

 


성경상의 니느웨 사건들

 

니느웨(니네베·Nineveh)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 때 노아의 둘째아들인 함의 계통에서 니므롯이란 영걸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곳에 큰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니느웨이다(창 10:8∼12).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이며 이라크 전쟁으로 일반인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술에서 곧바로 티그리스 강을 건너면 니느웨이다.

 

요나무덤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고도로서 이곳의 유적지는 2개의 커다란 쿠윤지크(Quyunjiq·많은 양무리)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선지자 요나) 언덕으로 나눠져 있다.

약 13㎞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하며 성벽 위에는 6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그리고 성은 매우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성 내부에는 병영과 무기고,군량창고 등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니느웨성을 한번 도는데 3일이 걸린다고 요나서 3장 2절에 기록돼 있을 만큼 매우 넓어서 220만평에 달한다.

 

니느웨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을 보면 당시 니느웨의 규모가 다른 어도시보다도 컸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하룻밤에 몰살되었고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피살됐다.

니느웨성은 상업이 번창하여 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해져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했으나 요나는 이방인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게 된다.

 

니느웨  

 

이에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한 후 니느웨로 가 멸망을 경고,

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써 멸망이 보류되었다(욘 3:4∼10). 그후 BC 606년에 바벨론에 멸망되었는데

이것은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나 3:7,습 2:13).

 

니느웨성벽

 

오늘날 요나의 무덤은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에살핫돈 왕궁에 있다.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로 피살된 부친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위에 오른 자이다(왕하 19:37). 

1845∼50년 발굴로 니느웨의 도서관 규모가 밝혀지고 점토로 만든 서판들과 설형문자 비문도 발굴되었다.

 

니느웨 성문   

 

도서관에는 언어학,천문학,점성술,종교적 문헌,법전,과학 서적과 기구,문학과 예술,역사서와 연대표,상업서,

각종 서간 등 서판이 무려 2만6000개나 소장돼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니느웨는 이라크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원이 많고 고대 앗수르의 수도답게 많은 유적이 있다.

에밀 보타의 발굴에 의해 당시 규모가 많이 드러났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니느웨 성벽  

 

오늘날 모술에는 57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시민 대부분은 쿠르드족이다. 기후는 자그로스 산맥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영하까지 내려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400㎜로 남부에 비해 비가 많이 온다. 산업은 중세부터 직물로 유명했으며 바그다드 다음 가는

대도시로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다.

특히 1939년 북쪽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채굴기지와 교통요지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 쇠퇴하고 있다

 

 

 


요나의 무덤이 있는 에살핫돈 모습

 

요나의 무덤이 있는 회교사원 Nebi Yunis

세겜(이스라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