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로 향하신 십자가의 길<비아돌로로사>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비아돌로로사에서 눈물을 흘린다.

라틴어로 `비탄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의 비아돌로로사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언덕까지 연결된 1.5㎞정도의 길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따라서 비아돌로로사는 기독인들에게는 구원의 길이자 기독신앙의 완성을 의미한다.

비아돌로로사는 채찍교회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무덤교회에서 끝난다.

 

채찍교회는 빌라도의 집무실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예수는 이 곳에서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진 뒤 골고다로 걸어갔다.

비아돌로로사는 모두 14개의 스테이션으로 구분된다.빌라도법정,선고교회,채찍교회,첫번째 넘어진 곳,마리아를 만난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곳,베로니카를 만난 곳,두번째 넘어진 곳,예루살렘여인들을 위로한 곳,세번째 넘어진 곳,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옷을 벗긴 곳,

형틀에 못박힌 곳,운명한 곳,아리마데 요셉이 시체를 내린 곳,예수무덤 등이다. 돌로로사는 너비가 2m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은 아랍지역으로 좁은 길을 따라 아랍상인들의 가게가 줄지어 있다.



1 지점 빌라도법정

(The First Station) 빌라도의 법정(현재는 아랍학교가 있음)
안토니오 요새의 남쪽 부분으로 성전 뜰에 붙은 자리로 예수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9:4-16)

현재있는 알-오마리엘 대학(Al-Omariyel College) 의 교정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준 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손을 씻었던 그릇이라

전해지는 돌그릇이 있고, 그 마당은 네모나게 깎은 돌들을 세워 박아서 포장하였는데 그곳이 예수께서 재판받기 위해 서 계셨던 장소입니다.


2지점 가시관교회

(The Second Station) 예수께서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셨다는 곳(요19:17)
안토니오 요새의 북쪽부분으로 동쪽에서 부터 채찍질 교회, 선고 교회, 에코호모 교회와 왕의 놀이 장소가 있습니다.

채찍질 교회 와 선고교회는 한 울타리 안에 있고 다음 건물에 에코호모 교회가 있는데 "보라 이사람이로다"라고 한 장소입니다.

 

에코호모교회 를 거쳐 그 건물 안 쪽으로 들어가면 왕의 놀이라는 돌바닥이 있습니다.

이 돌바닥 밑에는 안토니오 요새가 있을 당시에 사용하던 큰 물 저장소가 지하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물이 저장 되어있습니다.


2지점 채찍질교회


채찍질 교회


채찍질 교회

"채찍질 교회" (The Flagellation) 는 천주교 소속의 성경학교 교정에 있습니다.

주후 1839년에 지어졌고 1929년에 십자군 시대 건물 모양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이교회의 천정에는 가시관이 아름답게 모자이크 되어 있습니다. 제단 주변의 3면은 색유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바라바가 놓임을 받고 좋아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채찍질 맞으시는 장면과 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선고교회" (The Church of Ecce Homo) 는 1868년에 봉헌된 교회로 현재는 시온 수녀원(Convent of the Sisters of Sion) 소속 건물입니다.

안토니오 요새의 한 부분이었으며 교회 제단에 있는 아취는 주후 2세기에 로마 사람들이 지은 개선문의 한 부분입니다.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보라 이사람이로다(에코호모)" 라고 고문 받으신 예수님을 내 보이셨다는 곳(요19:5)입니다.

"왕의 놀이"(The King's Play) 라고 불리우는 곳은 로마 군인들이 모여서 쉬고 놀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 돌바닥에는 놀이에 필요한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로마군병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마27:27-31) 라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곳 입니다


3지점 첫번째 쓰러지심


쓰러지심

(The Third Station)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다가 처음으로 쓰러지신 곳입니다.

에코호모교회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꺾어지는 모서리 지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처음 넘어지신 이 곳은 출발점에서 150여m되는 지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다가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 길바닥에 쓰러지셨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일어나

어머니 마리아가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미 모딘 채찍에 맞아서 힘이 거의 빠져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신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작은 예배소는 1948년에 순례자들에 의해 세워진 기도실입니다.


4지점 마리아를 만나신 곳


마리아를 만나심

(The Fourth Station) 3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입니다. 길가의 좁은 문 위에 예수님과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곳이라고 전해 지는 곳입니다.

처음 이곳에 교회가 선 것은 주후 7세기경 인데 현재 있는 교회는 1881년에 지어진 것입니다.

3,4,5지점은 예루살렘 성을 남북으로 통과하는 치즈 골짜기에 속하는 곳으로 십자가의 길 14지점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 하고 있습니다.


5지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The Fifth Station) 4지점에서 남쪽으로 10m 정도 가다가 서쪽으로 꺾이면서 치즈 골짜기를 벗어나 골고다를 향해 언덕 길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던 곳(마27:32) 입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주후 1895년 천주교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5지점 시몬 십자가 진 곳


5지점 경당


6지점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곳

(The Sixth Station) 제 6지점은 제 5지점에서 골고다를 향한 언덕으로 약 3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수녀원입니다.

이 곳은 열두해 혈루증을 앓다가 예수님의 옷 깃에 손을 대고 나은 여자 (막 5:25-34) 라고 전해지고 있는 베로니카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피와 땀을 흘리시던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곳이라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 비잔틴 시대에는 코스마스 수녀원이 있었으며 지금 있는 수녀원은 1895년에 지어진 것 입니다


7지범 두번째 쓰러지신 곳

(The Seventh Station) 6지점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그 세거리의 서쪽 건물이 제 7지점으로 문 위에 표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예수께서 골고다를 향해 가시다가 두번째 쓰러지신 곳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1875년 천주교에서 구입하여 학교 (School of the Arts and Crafts) 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8지점 마리아를 위로해 드린 곳

(The Eighth Station) 제 7지점의 바로 서쪽에 있는 희랍 정교회입니다.

이 지점의 표는 라틴 십자가에 희랍말(NIKA) 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검게 그을리고 더렵혀져 있어서 주의깊게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 곳은 십자가의 뒤를 따르며 슬피울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라고 말씀하셨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9지점 세번째 쓰러지신 곳

(The Ninth Station) 이 지점은 예수님 무덤 교회의 지붕 위에 있는데, 골도다 정상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입니다.

이곳에는 애굽 정교회인 콥틱 교회가 있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께서 세번째로 쓰러지신 자리입니다. 이 교회 지하로 큰 지하 물 저장고가 있습니다.


10지점 예수님 옷을 벗긴 곳

Kfont color=green>문 입구에서 돌 침상을 바라보며 오른쪽 옆으로 돌아서면 계단이 있고 , 몇개의 계단을 오르면 그곳이 골고다 정상입니다.

골고다는 예수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이고, 희랍어로는 "크라니온(Kranion), 라틴어로는 "칼바(Kalva)" 영어로는 "갈보리 (Calvary)" 이며 "해골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골고다 정상에는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의 10지점부터 13지점까지가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만나는 제 10지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옷을 벗긴 곳입니다.

그 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마 27:35) 인 11지점이며 천주교회 소속입니다.

제 11지점의 정면 벽화는 1938년에 새로된 것인데,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것을 어머니 마리아가 내려다 보고 있는 모자이크입니다.


11지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문 입구에서 돌 침상을 바라보며 오른쪽 옆으로 돌아서면 계단이 있고 , 몇개의 계단을 오르면 그곳이 골고다 정상입니다.

골고다는 예수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이고, 희랍어로는 "크라니온(Kranion), 라틴어로는 "칼바(Kalva)" 영어로는 "갈보리 (Calvary)" 이며 "해골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골고다 정상에는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의 10지점부터 13지점까지가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만나는 제 10지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옷을 벗긴 곳입니다.

그 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마 27:35) 인 11지점이며 천주교회 소속입니다.

제 11지점의 정면 벽화는 1938년에 새로된 것인데,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것을 어머니 마리아가 내려다 보고 있는 모자이크입니다.


12지점 예수님 운명하신 곳

제11지점보다 조금 안쪽(북쪽)은 제12지점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자리입니다 (마 27:45-53).

이 곳의 관리는 희랍 정교회에서 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모습이 금속 조각으로 만들어 져 있고 천정에 등잔이 가득 달려 있습니다.


13지점 예수님 시체를 놓였던 곳

제13지점은 11지점과 12지점의 중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십자가 상에서 딸에 내리신 곳 (눅23:53)입니다.

이 곳에 있는 제단은 천주교 소속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목상이 있습니다.

이 마리아 상은 포루투칼의 마리아 1세가 1778년에 기증한 것인데, 이 작품은 16-17세기 형이고 리스본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제단 밑에 있는 골고다 언덕의 자연석을 볼 수 있습니다.


14지점 예수님 묻히신 곳

제14지점인 예수님 무덤은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무덤 주위의 돌을 깎아 내리고 무덤과 골고다 언덕만 자연석으로 살리면서 그 둘레에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산 무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무덤은 주후 335년에 봉헌되어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 천주교와 희랍 정교회들이 공동으로 관리 하고 있으며,

개신교에서 말하는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 무덤은 천연적인 동산의 아름다움과 모형을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무덤 동산 (The Garden Tomb) 인데 그 무덤 동산의 역사는 약 100년 정도 되었습니다.


골고다언덕


성묘교회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한 19:17).

기독교의 가장 성스러운 곳.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다. 십자가의 사건은 성밖에서 행해졌다.

 성에서 가까운 고로 (요한 19:20). 324년에 첫번째로 건축된 후 성벽으로 둘러싼 시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11년 후에 골고다 언덕은 주후 44년에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새롭게 새운 성벽으로 인하여 성안에 위치하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러시아 호스피스 부근, 교회의 동쪽과 북쪽에서 고대 성벽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교회 안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무덤은 이 지역이 당시 성 밖이었다는 중요한 증거인데, 유대인의 법으로는 성스러운 성 안에는 아무도 매장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는 다음의 이유로 1세기 크리스찬들에게 경건히 모셔졌을 것이다.

 

주후 135년 하드리안 황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과 예수의 무덤에 쥬피터를 위한 로마 신전을 세웠다(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장소에도 똑같이 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았다. 2세기 후에 콘스탄틴 황제가 정권을 차지 하기 전까지 이 장소들은 잘 보존이 되었기 때문이다.

326년에 헬레나 모후에 의하여 하드리안 신전은 파괴되고 성서에 서술된 갈보리 무덤이 잘 보존되어 발견 되었다.

콘스탄틴의 명령과 그의 모후 헬레나 여왕의 감독 하에 갈보리와 무덤 위에 바실리카식 교회당이 세워졌다.

 

이 위대한 콘스탄틴 건물들은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 됐다. 그리고 아봇 모데스토스에 의하여 전보다는 작게 건축 됐다.

다시, 1009년에 칼리프 하켐에 의하여 파괴되고 이것을 이유로 십자군이 역사에 등장한다.

1048년에 콘스탄틴 모노모쿠스에 의하여 재건 되었다. 114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현재까지 보존된 성묘교회를 세웠다.

여러 번의 증축을 번복하였지만 교회는 십자군의기초 모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852년의 터키시대에 정해진 6개의 교단에 의하여 성묘교회는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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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 허무스강

 

사데는 허무스(Hermus)강 계곡 평야의 한 복판에 있다.

그 평야 북쪽으로는 트몰루스(Tmolus)의 긴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산맥에서 여러 구릉과 작은 산들이 톱니바퀴살 같이 뻗어나가고 있다.

그 산 줄기들은 각기 좁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의 사데는 이들 산줄기 중 하나의 위에 있었다.

고도는 450m였다. 그런 위치 때문에 사데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산맥의 양측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벼랑과 트몰루스 산맥이

만나는 그 곳에만 사데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 마저도 경사가 급하고 험준하였다.

 


사데 토몰루스 산 요새

 

고레스왕은 사데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크로이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데사람들을 가리키며 고레스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다.” 

고레스는 14일간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특별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 히에로에데스(Hyeroeddes)라고 불리는 한 군인이

사데성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사데 군병의 한 명이 실수하여 자기 철모를 성벽 총구 너머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히에로에데스는 그 곳에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바위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일단의 페르샤 군인들이 그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통해

사데성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포대 위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보초병 하나 없었다.

사데 사람들은 발포대에 보초가 깨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 잠자고 있다가 사데는 함락된 것이다

 


사데 교회 뒤편 언덕위에 양치는 사람의 모습

 


아데미 여신전

 


아데미 여신전

 


아데미 여신전 안내판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 두 개가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사데교회(비잔틴시대)

 


사데교회(아데미 여신전 뒤쪽 한 구석에 위치)

 


사데교회 입구

 


사데교회 입구

 


사데교회 내부

 

 

사데교회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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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이 여부스인들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았다. 이곳은 수원이 풍부하고 유다교, 예루살렘, 벤자민 3파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인가 하면, 모슬렘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모하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로 4,000년 역사를 가진 예루살렘은 그러나 어느 도시보다도 테러와 전쟁을 많이 겪었다. 현재 약 33(유다인 255,000, 아랍인 75,000)명이 살고 있으며 주요 묘지는 성곽 안에 있다. 유다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로 구시가의 성벽에 둘러 싸여 있다. 고적으로는 겟세마니 동산, 성모성당, 통곡의 벽이 있고, 신시가는 신 헤브라이 같은 문화 기관이 있다
.
예루살렘 성벽은 여량시대의 건축양식이 집약되어 있으며 1542년 슬레이만 지배 아래 터키에 의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신축되었다. 성벽 둘레가 25마일이고, 평균 높이가 40피트, 벽에는 34개의 탑과 8개의 성벽 문이 있다. 그리스도는 베타니아 동산에서 오시어 예루살렘을 돌아보신 후 멸망할 것을 영감으로 아시고 우셨는데 그곳이 통곡의 벽이다.

 

1.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

 

유다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이라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비록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3000년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산다.
모슬렘 교도는 기도할 때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성전을 건축할 때도 메카와의 방향을 고려해 짓는다. 모슬렘 교도는 단순해서 언행을 믿지 않고 유일신만 믿는다
.
70
Titus는 거의 모든 벽을 부수었으나 거대한 벽돌의 일부분은 그의 후손들에게 로마군대의 위용을 보여 주기 위해 남겨 놓았다. 로마 통치기간 동안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비잔틴시대에 들어와 그들은 사원 몰락 기념일에 신성한 사원의 잔해인 이 벽에 와서 그들 민족의 이산의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일년에 한번씩 방문이 허락되었다. 19481967년까지 유다인은 이 벽이 요르단 지역에 있기 때문에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
6
일 전쟁 후 통곡의 벽은 예배의 장소일 뿐 아니라 국가의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큰 광장은 수 천명이 예배드릴 수 있게 정돈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 올리브동산의 겟세마네동산 

올리브 동산은 300피트의 높은 산으로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님이 승천한 곳으로 예루살렘에 대해 예언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곳이며 명상에 잠기셨던 곳이다.
예수님이 배반을 당하고 체포된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다. 올리브 나무가 많아 올리브 산이라는 말이 붙여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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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리아산 바위

 

모리아산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봉헌한 곳으로 길이가 5야드, 폭이 12야드, 지상에서 2야드 높이이며 돌이 돔 아래 높여 있다.
바위는 희생제물의 제단으로 사용했고 바위 표면에는 희생된 제물의 피를 흘려 보낸 구멍이 있다. 십자군시대부터 있어온 바위를 둘러싼 철 휘장은 제거되어 최근 튼튼한 난간으로 대치되었다.

4.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갔던 전통적인 길이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이 길을 성역화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의류, 돌 등 각종 토산품을 파는 영세상점이 즐비하다.
이 십자가의 길 중 9개는 복음에 관계되고, 5개는 전통에 의해 전해진다. 그 첫 2개는 안토니오 자리 안에 위치해 있고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주례한다
.
이 길의 시작을 나타내는 아치는 Ecce homo로 알려져 있는데 본시오 빌라도가 ", 이 사람이다"(요한 19, 5)라고 한 곳에 이것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14처는 기도서에 있는 장면 그대로이다.
3
처는 옛날에 계곡이었고 첫 번째 예수가 넘어지신 장소
.
8
처부터는 밖으로 나옴
.
8, 9
처 처형 받고 묻히신 장소를 모아 교회를 세움
.
10
처 옷을 벗기신 곳
.
11
처 돌아가신 장소
.
12
처 갈바리아 산(처형당하고 묻히신 장소).


갈바리아는 큰 돌로 이 꼭대기에 두 개의 교회가 있다.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곳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이 옷을 벗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곳이다.
이 두 교회의 양끝은 실제 암반에 놓여 있다.

5. 예수무덤성당, (예수부활성당) -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The Church of the Resurrection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요한19, 41-42)
예수의 무덤은 갈바리아산 기슭에 놓여 있고 이 돌로 깎은 새 무덤은 아리마테아 요셉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리마테아 요셉의 무덤은 부유한 유다인의 묘 양식으로 되었는데 2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하나는 애도자를 위한 만남의 장소, 또 하나는 시체가 누워있는 돌로 된 침대 판으로 사용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왕후는 80세의 고령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 예수님의 무덤과 십자가, 승천하신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각각 성당을 지었다. 예수의 실제 무덤은 109년까지 존재하였으나 칼리프 하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헬레나 성녀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 성당에는 헬라나 성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
교회는 처형된 장소보다 묻힌 장소를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부활신앙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쪽에서 해가 뜨므로 교회도 동쪽을 향하고 있어 희망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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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후의 만찬 성당 (Coenaculum)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곳이며(마르 14, 12-16, 루가 22, 7-13) 부활 후 2번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사도 2, 1-4)
이와 같이 Coenaculum은 성체/신품/견진/고해성사를 행하신 곳이다. 13C 나폴리 임금이 이곳을 사서 교황에게 희사한 것을 교황께서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주었다. 성령강림 때의 견진성사가 이루어진 다락방에서는 회교도에 의해 추방되어 그곳에서 400년간 미사를 드리지도 못했고 1948년 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공식적인 기도도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은 프란치스코 수도원 식구들에게 공동기도만 할 수 있게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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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윗왕의 무덤 (Tomb of King David)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유다인의 성지 중 하나로 Tudela의 랍비 Benjamlne 1173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여기에 안치되었고, 다윗의 무덤이라 불렀다. 돌로 만들어졌고 수놓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Torah의 은관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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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금의 문 (Golden Gate)

 

이는 7C 비잔틴 건축으로 Mercy gate(자비의 문) 장소에 세워져 있다. 측면 벽의 일부는 원시 건축양식으로 이 문을 통해 예수는 개선 입장 후 도시에 들어갔다.
기독교인들은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곁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기억을 덧붙이는데(사도 3, 1-8) 이 아름다운 문이 '황금의 문'이고 이곳은 1530년 터키에 의해 완전히 벽을 쌓게 되었다.

9. 겟세마니 동산 (Gethemane)

 

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고 오늘날에도 2,000년 전 그대로를 보여준다. 키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반대 언덕에 현대 도시들이 줄지어 있으나 이 동산은 변한 것이 없다.
예수께서 가끔 은둔과 기도를 위해 이곳에 오시어 기도하셨고(루가 22, 39) 수난 당하기 전날 밤 가장 슬픈 수난의 시간을 체험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곳이다
.
"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 42) 라는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나 보니 제자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루가 22, 45) 예수께서 최후만찬 후 이곳에 계신 것을 알고 유다가 대제관의 하인들을 데리고 와 예수를 잡아 넘긴 곳이기도 한 이곳에 헬레나 성녀가 성당을 지으셨다.

10. 주님의 기도 성당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고 예루살렘의 몰락을 예언(루가 21, 5-7; 마태 24, 1-4)하셨으며 주님의 마지막 오심과 제3의 종말을 예고하셨다.(마르 12, 1-4)
콘스탄틴 로마 황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어 올리브산 정상에 교회를 세웠는데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몰락했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새로 세워졌다. 십자군이 멸망하자 교회도 몰락하여 모슬렘 교도에게 점령되었다
.
1868
Aurelia de Bassi 왕자는 그 교회가 있던 장소를 사서 프랑스에 기증했으며 1875년 프랑스는 가르멜 수녀원을 세워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교회 안의 회당 벽에는 주님의 기도가 62개 국어로 쓰여져 있고, Bassi 왕자는 회당에 묻혀있다.

11. 예수승천성당 (The Chapel of the Ascension)

 

사도행전 1, 9-12에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려왔고 그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셨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곳은 가장 정확한 승천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올리브산을 떠났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100야드 거리의 안식일 여행이었고 예수 승천 장소와 예루살렘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거리였다
.
원래 14세기에 이곳에 이미 비잔틴 교회가 지어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인에 의해 몰락, 또 다시 십자군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의 작은 성당은 예수 승천 시 남겨진 전설적인 예수 발자국이 난 돌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워졌고 아직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슬렘 사람들은 아치형의 벽을 쌓고 현재의 둥근 천장을 더했다. 회교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만, 예수 승천 날은 우리도 미사를 드릴 수 있다.

12. 베드로 회개기념성당 (닭울음성당) (The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키드론 계곡을 굽어드는 이 성당은 1931 Caiphas의 전통적인 집터에 지어졌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대제관 Caiphas의 집으로 인도되어 그 날 밤을 세웠는데 여기가 베드로의 첫 시험장소였다. 발굴 결과 신부들은 Caiphas집터에 세워진 것을 확인했고 거의 완전한 히브리척도(), 돌절구, 종들의 주거지, 법정, 비잔틴 교회의 잔재가 발굴되었다.

13. 성 안나 성당 (The Church of St. Anne)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을 때는 그들이 있는 동안 건축했거나 재건한 7개의 교회를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이 안나 성당이다.
1100
년 발드윈의 부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그곳은 성벽으로 된 천장과 아름다운 둥근 지붕, 고딕식 입구를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성모가 태어난 곳이고 그의 부모의 집이기도 하였다
.
1856
년 마지드는 전쟁 중 나폴레옹의 지원에 대한 답례로 이곳을 나폴레옹 3세에게 주었고 교회는 복원하여 화이트 신부에게 주었다

 

관련

   

버가모 교회 유적

 


                   버가모왕국 데메테르신전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버가모왕국 아테네 신전터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버가모 디오니소스 신전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세라피스(Serapis)

 

세라피스는 마케도니아 통치시기(BC.305-30)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신이다. 그는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곱슬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멤피스의 아피스 수소에 대한 예배에서 유래한 세라피스 숭배의 주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의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에 있었던 세라페움(Serapeum : 세라피스의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적적인 치료법을 찾아나선 순례자들을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세라피스는 첫째로 질병의 치유자이며, 운명을 초월하는 신이고, 오시리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격을 계승한 신이다

 

 

버가모교회

 


버가모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버가모  심리치료하던 텔레모스 신전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밧모섬 동굴교회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는, 밧모섬에 있는 동굴교회입니다.

 

 

계시 동굴에는 눈이 어두운 요한(당시에 사도요한은 이미 90세가 넘었습니다)
대신에 요한과 함께 거주하던 브로고로 집사가 계시의 내용을
대필하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이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행6:5>

 

 

계시동굴 내부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계시록에는 그날이 주의날이라고 했습니다(계1:10).
그는 주일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다가 계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굴내부인데..천장쪽에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때 갈라졌다고 하는 바위가 보입니다.
3가닥으로 갈라져 있는데,이는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요한은 이 방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 한편 바위벽 1m 정도의
높이에는 요한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어 파였다는 손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교회 (그리스 정교회)
 

 

키르벳 카나                  

 

오늘날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카나라는 지명은 두 곳이 있다.

키르벳 카나(Khirbet Qana)와 케페르 카나(Kefer Kana) 마을이다.

키르벳 카나는 세포리스(Seforis) 북쪽에 있는 나자렛에서 13km 떨어진 외딴 언덕 꼭대기에 폐허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무덤과 지하 유골 안치소 등 중세기의 흔적들이 발굴 되었지만 근처에 우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케페르 카나는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진 갈릴래아 호수 티베리아로 내려가는 754번 지방도로 변에 놓여 있는

현재는 작지 않은 규모의 지방 도시이다.

1881년 프란치스칸들에 의해 세워진 카나의 첫 기적 기념 성당은 마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서쪽에서 로마인들의 무덤과 함께 우물이 발견 되었다.

프란치스칸들은 1641년에 케페르 카나의 유적지를 사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의 200년이 지난 1879년 다마스커스 통치자의 도움으로

겨우 획득 할 수 있었다(이미 그리스 정교회는 1566년 카나에 기념 성당을 지었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칸들은 폐허가 된 유적지 근처에 있는 아랍 집에서 살고 있었다.

1881년에 프란치스칸 기념성당이 봉헌되었고 1901년에 성당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성당 정면이 만들어졌다.

1997년 가을에 성당을 보수하면서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 작업이 실시되었고,

초세기 유대교 시나고가와 그리스도인들의 무덤 그리고 5세기경의 아람어 모자이크 등이 발굴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대희년을 맞이하던 2000년에 아랍 본당과 성지 기념성당으로 재건축 된 것이다.

 

나자렛 일릿에서 카나를 내려다 본 카나 마을 전경

 

그리스 정교회 가나혼인잔치교회

 

프란치스칸들이 카나의 첫 기적 성당을 1881년에 짓기 훨씬 이전인 1566년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미 카나에 기념 성당을 지었고,

예수님의 기적과 관련된 항아리 두 개를 보관하고 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다보면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주요 장소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프란치스칸 성당이 함께 있다. 

 

그리스 정교회 가나혼인잔치교회, 프란치스칸  기념성당  앞 좁은 골목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 가나혼인잔치교회  

 

그리스 정교회 가나혼인잔치교회         

 

프란치스칸 기념 성당에서 약 50m 정도 더 들어가면 오른쪽에 정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서 문이 보이는 곳이 정교회 성당 문

 

대문 옆 이콘 성화상

 

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천상 혼인잔치와 카나의 첫 기적 이콘

 

천상 혼인잔치

 

카나의 첫 기적 이콘

 

 

 

성당 마당에 있는 세례대

 

성당 마당에 있는 세례대  성수반

 

세례대 성수반 위 천장,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들 그리고 천사들

 

정교회 성당 문

 

성 죠지  

 

정교회 수도원 건물

 

정교회 수도원 건물

 

정교회 수도원 건물

 

정교회 수도원 건물 

 

 그리스 정교회 종탑

 

나무로 된 종을 타종  

 

그리스 정교회에서 바라본 프란치스칸 가나교회

 

   

   

빌립보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 기념교회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기념교회안의 세례대

 


교회안 돔에 그려져있는 모자이크 그림

 

루디아의 회심과 세례를 기념하여 지은 그리이스 동방정교 교회의

주요 돔의 모자이크로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의 형상이다.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도 있다

 


바울이 세례주던 곳(루디아의 기도처)

 

빌립보의 광장의 서쪽면에 있는바울이 기도하고자 모인 여인을 만난

전통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Krenides강과 현재 만들어 놓은 세례처이다.

사도행전에서는 회당이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빌립보(로마의 식민지)에서의

유대인 사회는 매우 작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룹으로부터  Thyatira(아시아/터어키)에서 자주장사였던 루디아는

개종을 하였다(행 16:14-15).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기념교회안의 바울

 


 바울과 루디아

 


 기념교회안의 루디아 성화

 


루디아

 

루디아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과 빌립보 전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비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

현재 빌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등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성지의땅, 에집트를가다

The 100 most beautiful places in the world

 

 

 (4) 에집트 pyramids 와 sphinx

 

 

 

 

 

 

 

 

 

 

 

(5) 美國  Grand Canyon

 

 

 

 

 

 

 

 

 

 

 

 

 

 

 

 

 

 

 

 

 

 

 

 

 

 

 

 

 

 

 

 

 

 

 

 

 

 

 

(6) Tanzania 의 Serengeti 국립공원

 

 

 

 

 

 

 

 

 

 

 

 

 

 

 

 

 

 

 

 

 



 남은 인생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인 동시에 너와 나의 헤어짐입니다.
이별 없는 인생이 없고 이별이 없는 만남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오고
만나는 자는 반드시 헤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정든 가족, 정든 친구, 정든 고향, 정든 물건과
영원히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실존의 한계상황입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요 절대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 앞에 서면 숙연해지고 진지해 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죽더라도 태연자약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언제 떠나더라도 조용하게 떠날 준비를 하는
생사관을 확립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은 예고 없이
그리고 예외 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죽음의 차가운 손이
언제 나의 생명의 문을 두드릴지는 모릅니다.
그때는 사랑하는 나의 모든 것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합니다.

인생에 대한 집착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지상의 것에 대한 매목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이 어쩌면 나의 삶이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 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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