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 아침 메일

 시리아의 팔미라 고대 도시와 교도소

 팔미라를 2000 년 된 대도시의 IS가 탈취했다고 알려졌다

유네스코는 고대 도시의 파괴가 "인류에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라고 경고

다마스쿠스 근처 감옥에 수감자는 강력범들이 수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또IS가 민간인을 포함 17명을참수

 

아래사진은 시리아 와 IS가 전투전 사진임

 

 

 

 

 

 

 

 

 

 

 



마가의 다락방 내부           

       


마가의 다락방은 다윗왕 무덤 윗부분에 있다. 
이 다락방의 크기는 막 14:15에 큰 다락방이라고 하였고,
행 1:15에 의하면 120명이 모일만한 꽤 큰 방이었다.
시온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 성찬예식을 제정하시고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한 곳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곳(요 20:19-29)이고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신 곳으로 유명하다.(행 2:1-4)





마가의 다락방의 한쪽 벽면의 모습


원래 마가의 다락방은 지금처럼 천장이 없었다고 한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막 2:4)
처럼 마가의 다락방도 그런 모습이었는데 비잔틴시대 때 지금의 천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예수님 세례터 (요르단 세례요한 기념교회)

       

 

베다니, 당시 지명은 베타바라 Bethabara, 현재 지명은 와디 카르나르)  

 

 

폐허가 된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     (글, 사진출처-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요 르단강의 전체 길이는 260km이며 헤르몬산(최고봉 2814m)산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과 함께 4개의 수원지를 가지고 있다. 요르단이란 말은 ‘단에서 흐르다’, 즉 ‘단 지방에서 흘러 내리다’라는 뜻이다. 요르단강은 가장 낮은 계곡을 흐르는 강으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사해까지의 길이가 105km이다. 사해는 요르단강의 종착지가 되는 셈이다. 갈릴래아 호수의 수면이 해저 215m이고 사해의 수면은 396m이므로 사해는 갈릴래아 호수보다 180m 낮다. 오 늘날은 요르단강을 경계로 하여 동서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나라가 갈라져 있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 사이를 잇는 요르단 강변은 군사 지역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1967년 6일 전쟁때 이스라엘군들이 점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예리고에서 8km 떨어진 엘렌비 다리가 예루살렘과 암만(요르단의 수도)을 잇는 교통로이다. 구약의 성지인 느보산을 갈려면 이 다리를 통해야 한다. 요르단강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과 예수님의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겐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마르 1,5; 마태 3,5-6; 루가 3,3).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기 위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오셨다(마르 1,9; 마태 3,13). 그러나 요르단 강 어느곳에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사가만이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한번은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1,28; 3,26; 10,40, 공동번역에서는 베다니아)라고 이야기 하고 있고, 다른 한 번은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3,23)이라고 언급한다. 애논은 아라메아어로 샘터란 뜻을 의미하는’에나반‘의 희랍어식 발음이다. 애논은 오늘날의 벳산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이며, 이곳에는 다섯 개의 샘터가 있는데 그들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사가가 말하는 ‘요르단강 건너편’은 어느곳을 이야기 하는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더구나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사가는 유다 광야에서(마태 3,1; 마르 1,4), 루가 복음사가는 요르단강 주변에서(3,3)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쯤에 보이는 건물(요르단쪽에 있는 정교회 수도원)까지 행진

 

옆에 칼을 차고 지팡이를 든 사람은 공식 전례때 행렬을 인도하는 사람

 

1884 년에 발견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오래된, 6세기경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사해 바로 위쪽 베타바라에 세례자 요한의 기념 경당이 표시되어 있다. 초세기의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세례 장소는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고, 기념 경당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그 주변에서 비잔틴 시대의 건물 흔적들을 발견함으로써 추정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4세기에 씌여진 보르도(Bordeaux)의 순례기에 사해로부터 7-8km 떨어진 곳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장소가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예리고로부터 8km 떨어진 요르단강 근처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세례자 요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1967년 6월전쟁 이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군사지역이 되었다. 세례자 요한 수도원이 있었던 곳은 이미 비잔틴 시대부터 기념 경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요르단강 가까이에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가 1933년에 세운 기념 경당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완전히 파괴되어 방치된채로 남아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요르단강의 성지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1985년 이래  매년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 단 하루만 들어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성지관구는 이날 예수님 세례 기념 대축일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한다.

 

순례자 행렬,  1985년 이래  매년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 단 하루만 들어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순 례자들은 예루살렘 뉴게이트 앞에서 아침 7시 30분에 버스로 출발하였고, 예리고를 지나 요르단 강 근처에는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다. 요르단강의 예수님 세례터는 현재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로 우리나라의 38선 철책 안과 비슷한 상황이다. 강을 사이로 요르단 군인들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이곳은 6일전쟁 이전에는 카톨릭 수도원과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전쟁때 파괴 되었고,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9시에 행렬을 시작하여, 세례터 옆에는 9시 15분에 도착. 세례 갱신과 미사가 성지관구 수호자의 주례로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도로 양 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지뢰밭 표지

 

경계 근무 서고 있는 이스라엘 병사들

 

강건너에 보이는 사람들은 요르단 병사들

세례터 물

세례터 물

 

<카톨릭 미사 처>

 

가톨릭 소유의 임시 미사 처, 임시 제대를 만들고 여기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아동 세례자

세례터 광장

세례터 광장

 

요르단 강 근처의 광야

 

<요르단 쪽 세례요한 기념교회- 그리스 정교회> 

 

세례터 안내석                    (이하사진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5750)

 

 그리스 정교회               

 

예수님 세례터로 가는 길

 

예수님 세례터로 가는 길

 

예수님 세례터로 가는 길

 

예수님 세례터로 가는 길

 

그리스 정교회, 강건너 반대편은 카톨릭 성지

 

예수님 세례터 

 

세례요한 기념교회      (http://holyland.maru.net)

 

신 약성서에는 베다니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하나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 베다니(요 11장)이고 다른 하나는 요단 동편지역에 위치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베다니이다. 우리에게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았던 감람산의 베다니가 익숙하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이며 현재는 요르단 지역에 속한 요단 동편 베다니도 매우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28절에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장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또한 베다니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게 되자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었던 이 장소에 오셔서 잠시 거하셨던 장소로 다시 성서에 등장하고 있다(요 10:40).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요단 동안지역(east bank)에서는 1899년 이래 베다니를 발견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이후 많은 발굴과 노력 끝에 교회, 수로, 세례터 등의 유적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이를 근거로 남 요단강 계곡지역에 속하는 여리고 맞은편에 위치한 현재의 분지를 학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인 베다니로 부르고 있다. 학자들의 이러한 추정에 근거하였을 때 신약시대 베다니는 구약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여리고 맞은편 지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이 지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고단한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던 장소가 바로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와 일치하고 있다(민 36:13). 또한 구약시대에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더욱 유명한 사건은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던 사건이다. 열왕기 하에 의하면 엘리야는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과 벧엘 그리고 여리고에서 선지자의 생도를 만나고 요단강을 건너 그 곳에서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였는데 엘리야가 승천했던 언덕도 여리고 맞은편 지역에 위치한 이 곳 베다니가 아니었을까 하며 많은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현재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고 고고학 발굴 결과 이전 이곳에서 행하였던 세례터의 흔적과 기념 교회의 흔적들이 발굴이 진행 중인 가운데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베다니에는 요단강 주변에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한 때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들도 살았다고 전해지는 관목 숲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갈대밭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요단강 주변의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단강 최 서쪽 지역까지 가볼 수 있고 비록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 세례 받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  세례요한 기념교회 (예수세례터교회)   (http://blog.naver.com/jjkkhh2232 )

 

예 수님이 세례를 받은 곳은 여리고 평지를 지나는 요단강이다. 여리고 평지에 애논이라는 곳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바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장소로 추정된다. 현재 예수님의 세례터에 교회적 전통의 성지로 기념장소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곳은 현재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일반 순례객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감안해 현재 이곳에서 백 수십키로 더 올라가 요단강 상류 갈릴리 호수에서 요단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유대인들의 한 키브츠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여 만들어 놓은 관광장소 야데르닛 (Yadernit)이 있다. 현재 매년 10월 셋째주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날로 세례터 기념 예배가 열린다. 이날만큼은 국경에 일반 순례객의 방문이 허락된다. 로마카톨릭의 요구를 받아들여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틴 정부의 공동 협조로 방문이 이루어진다. 보통 2-3개월 전에 예루살렘의 카톨릭 교회를 통해 방문자 접수를 받는다. 미리 국적 여권번호 등 보안에 관한 정보를 기재하여 제출하면 허락된다. 그리고 행사 당일 예루살렘에 모여 이름을 확인해 버스에 탑승해서 요단강으로 향한다. 물론 최근에는 그 절차가 점점 간소화 되어 카돌릭 교회를 통해 통과 버스만 미리 신고 하면 당일에라도 버스에 동승해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세례터 기념 교회 예배는 오전 10시 경 시작되므로 그 전에 도착해야 한다.   (출처- http://blog.naver.com/jjkkhh2232) 

 

세례자 요한의 샘                     (출처- http://blog.paran.com/jhd112/14818027)

 

그리스 정교회, 세례요한 기념교회 (예수세례터교회)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이하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세례요한 기념교회 내부       (http://holyland.maru.net)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정교회 내부

 

요르단 왕국쪽 예수님 세례터

 

요르단 왕국쪽 예수님 세례터

 

예수님 세례터  

 

예수님 세례터 

 

예수님 세례터

 

세례터 유적

 

세례터 유적

 

세례터 유적

 

예수님 세례터

 

예수님 세례터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시는 성화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5750)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문 기념 모자이크

 

예수님 세례터

 

예수님 세례터

 

요르단 왕국쪽 예수님 세례터

 

작은 시냇물을 사이로 요르단 강 동편과 서편이 나뉘어져 있다. 건너편은 이스라엘 쪽

 

작은 시냇물을 사이로 요르단 강 동편과 서편이 나뉘어져 있다. 건너편은 이스라엘 쪽

 

강 건너 보이는 건물쪽에서 성지관구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예수님 세례 기념 미사를 봉헌한다

 

요르단 강 건너편 예수님 세례터에 건축 중에 있는 가톨릭 성당. 이곳 성당이 완공되면 예수님 세례 기념 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할 수 있을 것이다.

 

요르단 강 건너편 예수님 세례터에 건축 중에 있는 가톨릭 성당

 

요르단 강 건너편 예수님 세례터에 건축 중에 있는 가톨릭 성당

 

 


두오모 대성당 / 이태리세계 문화유산

 

 두오모 대성당 / 이태리

세계 문화유산

 

 

두오모는 1292년에 착공되어 1436년에 완공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다. 깜비오(Arnolfo di Cambio)가 설계를 하였고,106m의

          높이를 자랑하는 돔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작으로

1420년 착공후 14년간 이 건축 공사에 종사했으며 사후 1461년에 완성을 보았다.

          대리석 모자이크 장식의 벽체는 장관을 연출하며,

내부는 전성기 고딕 아치형 천정이 아치들로 받쳐져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 두오모 앞에 피렌체의 수호성인에게 바쳐진 8각형의 건물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 두오모 앞에 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에게 바쳐진 8각형의 건물

 

Ghiberti 가 제작한 동문은 1425년부터 28년 걸려 구약성서를 내용으로 만들었으며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천국의 문’이라고 지칭하였다 한다.

 

 

세례당의 3개 청동문 부조가 유명한데, 1330년에 만들어진 남문이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성지사진(마사다)

 

마사다 요새 전경

 


마사다 요새

 


마사다로 올라가는 케이블 카

 


마사다 헤롯궁

 


마사다위에서 내려보는 광경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헤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

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

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

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성지사진(나사렛,예루살렘교회)
 


나사렛 전경

 


나사렛 수태고지 교회

 


수태고지 교회

 

이 훌륭한 교회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무찌오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그는 고대의 교회의 유적을 보존하면서 교회 위의 교회를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래서 아래 교회의 바깥벽은 십자군 교회의 기초에 따라 지었고 다만 바쁜 도로에서부터 조금 떨어지도록 몇 미터를 옮겼다. 두 교회의 높이는 24m 길이가 40m 이다. 서쪽과 남쪽면은 부활과 수태 고지를 상징하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52m 높이의 놀라운 지붕은 돌과 콘크리트로 지탱된다. 천정은 구리로 덮여 있으며 둥근 천장은 전등을 둘러싸여 있다. 전통적으로 인정 받은 수태 고지 동굴은 옛 나사렛의 남쪽 끝에 있다.

 


수태고지 교회 2층

 


1층 마리아 집터

 


수태고지 교회 1층 마리아의 집 터

 


수태고지교회 야외 조각

 


나사렛 마리아 우물

 

마리아의 우물은 성지에서 가장 확실한 장소 중에 하나이다. 현재까지 이 도시의 유일한 식수 공급원이다. 예수도 어머니와 함께 이 우물에 와 다른 부녀자들처럼 물을 길렀음이 분명하다. 산에서 솟는 샘물은 하루종일 부녀자들이 물을 긷는 공공샘터까지 수로를 따라 흐른다. 희랍정교회는 마리아가 수태의 계시를 이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받았다고 믿어 교회를 그 옆에 세웠다.

 

 


나사렛 회당

 

 

 

 

 

 

 

 

 

 

 

 

 

 

 

 

 

나사렛 성 요셉 기념교회

 


성 요셉교회 내부

 


성 요셉교회 창문

 


성 요셉교회 지하 경당 제단

 


지하 경당

 


지하 경당 창문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평화의 땅」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이미 모세 때부터 있어 왔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평화가 절실한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원 1천년 전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래 36번이나 전쟁에 함락되었고, 점령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열 차례나 무너졌던 피의 살육이 점철된「 전쟁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채는 1537년 터어키의 오스만 제국 당시 재건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내 올드 시티라고 부르는 곳은 지금도 아랍 지역, 유대 지역, 기독교 지역,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구획되어진 채, 종족마다 종파마다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면서 외견상으로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아주 좋은 예로 금요일은 이슬람의 성일이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의 주일(主日)로 저마다 종교의식에 따라 엄격히 지켜진다. 지금은 황금색 돔의 오마르 회교 사원이 서 있는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사진은 예루 살렘 신시가지 홀리랜드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예수 당시 성전건물의 모형이다.


성지사진( 다메섹 바울교회,아나니아 기념교회(시리아)                 

            

 

다메섹 바울기념교회, 아나니아 기념교회(시리아)


현재의 시리아 다메섹 시내

 


다메섹 성

 

 바울의 회심으로 유명한 곳이다. 해발 685m에 있는 고지대 도시이며 아람 왕국의 수도였다. 지금은 시리아의 수도이다. 위치는 서남아시아의 바라다 강변, 안티레바논 산맥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다메섹의 대부분 지역은 바라다 강의 서편에 있으며, 근대에 들어 북쪽 강변으로 지역이 확장되었다.  ‘다메섹’이란 명칭은 ‘투트모세 3세’(B.C. 1484~1450)의 정복지 가운데 하나로 처음 소개되었다. 다메섹은 ‘아케나톤’(B.C. 1372~1354)의 통치 때까지 이집트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B.C. 15C에 이집트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다메섹은 도시국가들의 수도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B.C. 732에 다메섹은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앗수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B.C. 333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는 셀류커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고, B.C. 64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었다. A.D. 635에 이슬람에 정복되었다. 1076에 셀주크 터키에 의해, 1154에는 이집트에게 멸망되었다. 1860년 회교 인구가 급증하여 기독교가 파멸되어 기독교인들의 학살을 초래하기 전까지 이집트와 터키(옛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시리아를 공격하고 다메섹을 점령했다. 1946년,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현재,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며 인구는 약 1,451,000명으로 추정된다.

 


다메섹 바울 기념교회, 바울을 창에 내렸던 곳이다

 


다메섹 교회 내부

 


교회안의 성화

 


교회안의 석판

 


우마야드 모스크 (Omayyad Mosque)

 

다메섹은 200개 이상의 회교 사원이 있는데, 그중 70개의 사원만 사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원은 ‘우마야드’ 사원인데 마야드 모스크는 시리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아랍 권을 통틀어서도 매우 크고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기원 후 705년 우마야드 할리파 왕조 시대의 알 왈리드 1세(Al-Walid) 에 의해 대규모로 지어진 사원으로 수차례의 재앙과 더불어 1898년 대화재 때 대부분 손실 되었고 현재는 복구된 모습이다. 사원의 돔(dome) 또한 목조였으나 화재 후 복원하였다. 사원이 들어서기 전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이 건물의 코린트식 기둥이 현재 사원의 외벽으로 남아있고 이 때 교회 지하 납골당에서 사도 요한의 머리가 발견되어 현재 사원 안에 보관 중이다. 3개의 첨탑이 있고 사원의 중요한 물품을 화재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리하는 작은 보고가 있다. 건물 정면의 벽면에 있는 인상적인 그림은 전원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 기도 홀은 길이 130미터로 그들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챠도르를 빌려입고 입구를 들어가면 왼쪽으로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살라딘의 묘(Mousoleum of Salah Ad-Din)이다. 3차 십자군 전쟁시 이들을 물리치고 이집트 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통일한 역사적인 이슬람 세계의 인물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이 모스크는 규모뿐만 아니라 사원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우마야드 모스크의 모자이크는 아랍 모자이크 예술의 백미라는 평이다. 이 대사원은 다마스쿠스의 장구한 역사 변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원래 이 사원이 서있는 자리는 원주민 아람인(Aram)들의 하다드신전이 있던 곳이다. 하다드(hedad)는 비를 주관하고 땅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고대 시리아의 최고신이었다. 로마제국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는 로마인들의 최고신을 위한 주피터 신전이 건축되었고, 그후 기독교 시대였던 비잔틴 제국 때는 세례요한 교회로 전환되었다.

 


세례요한 머리무덤 교회 (SHRINE OF ST. JHON THE BAPTIST)


우마야드 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홀 중앙에 돔형의 작은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모슬렘 통치자들의 무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부인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마케루스 하궁에서 효수당한 후 처형에 대한 증거로 다메섹에 주재하던 시리아 총독에게 보내졌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아랍 모슬렘 시대 세례요한 교회는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바뀌었다. 그 후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메섹 직가 거리

 

직가는 다마스커스 구 시가지에 동서로 곧은 도로이다. 택시나 승용차들이 일방 통행으로 서에서 동으로 지나 다닌다. 도로가 협소하여 차가 지날 때는 차를 주의하여 걸어가야 한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도 이 도로가 언급된다. 사울(Saul)이 기독교인들을 잡으로 다마스커스 근교(코아 캅)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빛이 비쳐 사울은 그만 눈이 멀게 되었다. 이곳에 사는 아나니아스(Ananias)의 꿈에 예수가 나타나 곧은 거리로 가서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아나니아스가 곧은 거리에 살고 있던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곧은 거리에는 로마 시대의 아치문도 있다. 당시의 이 곧은 거리는 지금의 4배쯤 되고 석조 기둥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가 건물들이 차 한대 지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바로 붙어 있어 좁은 도로가 되어 버렸다. 또한 도로도 다소 비틀 비틀 하여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볼 수 없는 말하자면 곧은 도로가 되지 못하고 있다.  



다메섹 아나니아 기념교회 입구

 

다메섹 아나니아 기념교회 내부
 
 

직가가 끝나는 동편은 지금도 크리스천 구역이어서 교회가 밀집해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 아나니아 교회다.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세례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곳에 세운 교회가 아나니아 기념교회다. 아나니아스 교회는 지하로 되어 있다. 교회의 측면에는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에 기독교인들을 잡으로 오는 장면도 있고 장님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면,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터키, 그리스, 로마 등에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장면과 그리스에서 배가 난파되어 고초를 받고 있는 장면 등 사도 바울에 관한 모든 그림이 벽면에 죽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빌립보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 기념교회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기념교회안의 세례대

 


교회안 돔에 그려져있는 모자이크 그림

 

루디아의 회심과 세례를 기념하여 지은 그리이스 동방정교 교회의 주요 돔의 모자이크로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의 형상이다.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도 있다

 


바울이 세례주던 곳(루디아의 기도처)

 

빌립보의 광장의 서쪽면에 있는바울이 기도하고자 모인 여인을 만난 전통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Krenides강과 현재 만들어 놓은 세례처이다.

사도행전에서는 회당이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빌립보(로마의 식민지)에서의 유대인 사회는 매우 작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룹으로부터  Thyatira(아시아/터어키)에서 자주장사였던 루디아는 개종을 하였다(행 16:14-15).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기념교회안의 바울

 


 바울과 루디아

 


 기념교회안의 루디아 성화

 


루디아

 

루디아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과 빌립보 전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비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

현재 빌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등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종교교회 (서울 종로구 도렴동)                             

       

 

종교교회 연혁   (출처- http://chongkyo.net/)


1896. 05 좌옹 윤치호의 요청으로 리드(C.F.Reid)목사 한국선교사로 내한

1900. 04. 15 캠벨부인이 설립한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부활주일 예배드림 ( 자골교회라 칭함)

1901. 09 지금의 서울시경옆 내자아파트자리에 2층으로 된 붉은벽돌예배당신축

         (건축비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Louise Walker Chaple로 명명)

1904. 03 R.Hardie 선교사의 서울부흥회 주최하여 대부흥

1909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초대 정춘수 목사 취임(민족대표33인중 한명)

1910. 06. 09 지금의 도렴동자리에 십자형벽돌 2층 성전신축하고 종교교회라 칭함

1916. 01 웹?청년회가 종교노동야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영신축하동서양음악회 개최

1919 - 1921 양주삼목사 봉직

1930. 12. 08 북감리교회(정동,상동,동대문의 동자 계열)와 남감리교회(종교,자교,수표교등 교자 계열) 가 양주삼목사와 윤치호선생의 노력으로 통합. 양주삼목사가 통합감리교단 초대 총리사로 취임

 

현 교회 내부

 

아시아 7교회 성지(터키,그리스

           

 아시아 7교회 성지(터키,그리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
 
필라델피아는 현재명으로 알라세히르이다. 주님께 칭찬만 받았던 교회로 초대교회 당시 교회는 크지 않았으나 디오니소스 신전과 황제 숭배의 핍박을 이겨낸 교회였다. 현재의 유적은 동 로마 제국 비잔틴 시대(AD600년경)에 세운 것으로 성 요한의 교회로 세워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버가모교회(세라피스신전)
 
세라피스 신전은 레드 홀(Red Hall)로 이 신전 밑에는 세리누스(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하였다. 이 신전은 2세기에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위해 지은 것이어서 이집트 신전이라고도 하며, 붉은 벽돌로 지어져 ‘붉은 정원’이란 뜻의 '크즐 아블루'라고도 불린다. 신전의 규모는 가로 100m, 세로 260m에 이르고, 높이도 20여m에 달해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한 편이다. 지금은 건축물의 벽채만 남아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거리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7교회 위치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