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자료] 누가의 묘(에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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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묘

 


누가의 묘

 


누가의 묘임을 입증하는 송아지그림(누가복음)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에 들어 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 뒤 쪽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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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로새

     


    골로새 전경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에서 찬 약수가 라오디게아로 가는 수로

     

    현재명은 Honas이다.  바울 당시보다 수 백년 이전에, 골로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어키)의 주도적인 성읍이었다. 골로새는 루카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게해 해변이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동서의 큰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골로새는 제 2류의 상업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그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3 참조)에게 세력이나 중요성에 있어서 오랫동안 눌려왔었다. 주요 산업은 직물업으로 '골로시누스(colossinus)'라는 직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해안에서 동쪽지방으로 이어주는 무역로는 이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주변에 살고있었다(성전세를 낸 수치를 기준하면 약 7,500명의 유대 자유인이 이 주변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골로새가 중요시된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 에바브라가 회심하여 복음을 골로새에 전달한 사실 때문이었다(1:7,8; 행 19:10 참조). 이때 아직도 연륜이 오래 되지 않은 이 골로새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에바브라나 바울에 의해 개종된 다른 어떤 신자의 노력 결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떤 것들은 가정 교회였다(4:15; 몬 2절 참조). 그런데 그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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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도시 에베소                        

           

로마도시 에베소: 괴레메 계곡(성경의에베소서)
마치  스머프가 사는 마을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사는 마을 같은 곳.가파도키아의 괴레메계곡은

 화산재로 형성되어 인위적으로 동굴을 파기가 좋아 이런

모습의 마을이 되었다함. 313년 로마교황이 기독교를

공인하자 근처의 지하도시에서 은거하며 살던기독교인들이

와서 바위동굴을 파서 교회를 짓고 집을 지어 살던 마을로
교회가 많아서 매일 새로운 교회를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함. 최근까지 주민이 거주 했으나 너무 많이

바위를 파고 동굴이 오래되어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터키정부에서 퇴거 명령을 내려서대부분 비어 있으나
일부 바위동굴에는 주민이 거주하거나 창고로 사용하고
일부동굴은 호텔과 카페로 개조되어 사용하고 있슴.
이곳에서 영화 스타워즈의 외계인 마을로 촬영했다고 함.

↓1.


↓2.


↓3.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교회 입니다


↓4. 교회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5. 교회 내부 정면의 벽화


↓ 6. 교회내부의 거주공간


↓ 7. 교회내부의 벽


↓ 8. 아무리 보아도 처음보는 신기한 풍경 입니다


↓ 9.이 근처에는 바위동굴 주택이 엄청 많습니다


↓10.


↓11. 동굴 주택과 벽돌 주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 12. 이곳에는 약 2만 여명의 기독교인이 살았다고 합니다


↓13. 신 시가지와 혼재된 모습입니다


파묵깔레와 히에라폴리스 그리고 올림푸스산(터키)
고대시대부터 현재까지 온천물이 엄청나게 많이 솟아 나오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온천은 조그만 구멍에서 나오거나 펌프로 퍼 올리는데,
이곳은 시냇물처럼 엄청많이 나옵니다.
게다가 온천물에 녹아서 함께아온 석회성분이 산을 이루어
마치 목화같이 보인다고해서 목화성(파묵깔레)으로 부르는곳
로마시대에는 로마에 있는 교황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며
그당시 세계 각국에서 병치료를 위해서 부자들이 왔었으며
병이 치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고,
치료를 못하면 이곳에 죽어서 호화로운 무덤을 남겼는데
현재 발굴된 석관만 1,700여가가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동양인의 무덤도 여러개 있는데 중국인으로 추정한다고

 하며 이곳을 죽은자의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합니다.
"나 어제 당신과 같았으나 내일은 당신이 나와 같으리라"

<- 묘비중 하나의 글귀> 
이곳은 온천물에 석회암이 녹아서 나와 흘러내리면서
마치 우리의 천수답 논처럼 기이한 형상을 만들고
그곳에는 온천물이 고여있으며 서양인들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않고 비키니등 수영복 차림으로 이지역을 활보하거나 온천물에

온몸을 담그고동양인들 특히 한국인 여자들은 양말만 벗은채 양산을

 쓰고 다닙니다.이곳 터키의 강한 햇빛을 피하느라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한국인 뿐 이라고 합니다.이곳에는 노천 온천

목욕탕이 별도로 있으며아래의 휴양도시에 있는 모든 숙박업소는

자체 온천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전경의 일부분


↓2. 전경의 일부분(오른쪽에 관광객 무리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3. 위 사진에서 보이는 언덕 넘어쪽 전경의 일부


↓4. 언덕에서 다시 앞쪽 부분을 향해


↓5. 이곳는 로마시대에 커다란 휴양도시로 대형 원형극장도 있습니다


↓ 6. 아래쪽에서 촬영


↓ 7. 도미테우스 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운 도미테우스 기념문,


↓ 8. 2000년 전에 이렇게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 9.대리석을 마치 두부 자르듯 정교한 쐐기 형태로 다듬어 끼워 맞추었답니다


↓10. 로마시대의 온천 목욕탕 건물


↓11. 죽은자의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일부분 (석관의 내부가 보이는 것)


↓ 12. 당시 세계 각국에서 모이다보니 무덤의 형태가 아주 다양 합니다


↓13. 이곳에는 수백년 동안 묘지로 사용하다보니 지진등으로 흙에 묻히고 그위에 또 무덤이 생겨났으며


나중에 발굴해보니 이렇게 이중으로 무덤이 형성된것이 여러곳에 있습니다 / 발굴위치에 복원


↓14. 동양인의 무덤 / 내부는 석실형태임


이곳을 지나서 고대 그리스 시대 올림푸스산의 꺼지지 않는 불을 보러 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이곳이 그리스의 영토이었고 이어서 로마의 영토로 서양인이

살던지역 이었으나 이민족인 터키(돌궐족)인은 1300년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때 이곳에서 성화를 채화 했다고 하고

비가 여러날 오면 불이 꺼졌다가 다시 햇빛이 비추면 자연 발화 한다고 합니다

↓15. 올림푸스산으로 가는길 도중에 차창 밖 풍경
  ↓ 16. 산으로 올라가는 길 / 소나무가 많더군요 

  ↓ 17.  서양인이 꺼지지 않는 불에 불을 붙여 보네요
  ↓ 18.  이곳에는 불이 붙는 장소가 약 10개소 정도가 분포해 있습니다
  ↓19. 고대 그리스 시대 신전을 세웠던 흔적들 

 



화려한 로마도시 에베소(에페소)


2,000년전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도시이며

성경의 에베소서가 쓰여지게된 도시이기에 더욱...

그런데 실제 도시는 상상했던것 보다 화려한 도시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가 대리석으로 깔려있고,

건축물의 화려함과 웅자함은 보는이로 하여금 압도감을 주기에 충분 했습니다.

게다가 대형 목욕탕과 도서관등....

 

↓1. 매표소를 통과하여 첫번째로 보이는 신전터 (기둥이 있는 부분 전체)


↓ 25.000명이 수용 가능한 원형극장 /이곳에서 사도바울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을 전했으며
후일 바울이 에베소인들(성도들)에게 씌여진 편지가 에베소서로 남게됨


↓3. 로마교황이 다녀간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황의 신전


↓4.본래 에페소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겼으며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신전보다 약 100여미터 위에서 발굴되어 발굴된 위치에 전시되어 있음


↓5. 여러 신전을 지나고나서 도서관이 있는 도시의 중앙으로 내려가는길


↓ 6. 로마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해서 세운 분수대


↓ 7. 목욕탕 내부 /고온탕,온탕,냉탕 등으로 지어졌다고 함


↓ 8. 목욕탕의 입구?


↓ 9. 공중화장실 (대리석 구멍에 볼일을 보면 위 목욕탕 폐수가 그 아래로 흘러서
자동적으로 수세식?으로 처리되는 구조)

↓10. 에페소 도서관


↓11. 터키 초등학생들의 수학여행


↓ 12. 에페소의 당시 인구가 5~7만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원형극장은 25,000명 수용이 가능하다고 함


↓13. 에페소에서 항구로 통하는 길(본래 이곳에서 1키로 떨어진 곳이 항구 이었으나


그동안 지진등으로 구조가 변해서 현재는 약6키로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음)

 

<- 지진과 함께항구가 멀어진 것이 도시멸망의 원인 이라고 합니다


↓14. 초기(박해를 받던시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암호표시


↓15. 에페소 발굴 도시에서 약 1카로 떨어진 곳에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는 성채


에페소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도시 전체에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실 에페소는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과 문화가 이곳을 지나갔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유적 도시가 되었다.
에페소는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에서 에페소로 옮긴 덕에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이후 아우구스트스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기원 후에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7세기 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의 에페소는 역사 유적과 건축, 기독교 성지순례를 하는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에게해의 한가로움과 지중해의 여유로움까지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다.이스탄불이나 앙카라등 대도시에서 멀어 여행하기
 쉽지는 않지만 도시 곳곳에 산재한 유적들과 한적함으로 점점 더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다. 에페소는 에게해에 인접한 곳으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여름에는 더운 편이며 겨울에는 온난하다.

  때문에 10월까지도 해수욕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름이라도 밤에는 기온이 많이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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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7교회(1)      

   

 


7 교회 거리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거리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왕국 데메테르신전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제우스 신전터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버가모왕국 아테네 신전터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버가모 디오니소스 신전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교회(후 세라피스 신전)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세라피스(Serapis)

 

세라피스는 마케도니아 통치시기(BC.305-30)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신이다. 그는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곱슬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멤피스의 아피스 수소에 대한 예배에서 유래한 세라피스 숭배의 주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의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에 있었던 세라페움(Serapeum : 세라피스의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적적인 치료법을 찾아나선 순례자들을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세라피스는 첫째로 질병의 치유자이며, 운명을 초월하는 신이고, 오시리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격을 계승한 신이다

 

 

버가모교회

 


버가모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버가모  심리치료하던 텔레모스 신전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버거모왕국(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
 

버가모 아크로폴리스의 대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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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의 위치가 화제입니다

지금 기독교계에서는 모세가 출애굽하면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내산의 위치가 화제입니다.

지금까지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며, 실제로는 사우디 아라비아 북쪽에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김승학씨가 '떨기나무'(두란노)란

책에서 이처럼 놀라운 사실을 수많은 증거 자료와 함께 제시했습니다.

저도 그 책을 사서 정독을 했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교계에서 받아들여지던 시내산의 위치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경로를 수정하지 않을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해도,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책을 사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위험을 무릅쓴 저자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 기사는 기독교 전문지에 게재된 저자 김승학씨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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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내산은 사우디에 있다"

<과연 이 주장이 맞을까?>

 

 

김승학 박애병원 행정원장 주장…"시나이반도 시내산은 가짜"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 김승학 원장이 주장하는, 모세가 친 호렙산 반석이다. 왼쪽 옆으로 김 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 반석은 뒷 쪽에서 찍은 것으로 그 크기가 예상보다 훨씬 크다.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내산이라고 믿고 순례하는 시나이반도에 있는 무사산은 시내산이 아닙니다. 진짜 시내산은 사우디 아리비아에 있는 라오즈 산입니다.”

 

김승학 원장(박애병원 행정원장)의 주장은 그동안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무사산을 시내산이라고 믿고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충격적이고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로마 가톨릭이 정한 시내산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일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것은 시내산 지경에는 애굽을 탈출한 25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승학 원장이 주장하는 라오즈산은 그런 고민을 사라지게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한 사우디에 있는 라오즈산이 시내산이라고 할 만한 증거가 있을까? 이런 의문은 김승학 원장을 세 번 만나면서 사라졌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김승학 원장이 라오즈산을 탐험하면서 기록한 탐사 이야기를 담은 <떨기나무>(두란노)라는 책 때문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탐정 소설 갈은 이야기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책을 탐독하고 다시 김 원장을 만나야 했다. 그의 책 속에 담긴 것들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궁금했던 것을 인터뷰했다.

- 한국 사람으로서 사우디에 20년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인가?

  
▲ 김승학 원장이 시내산의 탐사를 기록한 <떨기나무> 책.
“1987년 해외개발공사가 사우디 진출을 희망하는 의료요원들을 선발해 영어 통역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해 사우디 지잔 파드립 병원에서 최초로 침구과를 운영했다. 당시 나는 침술 전문가였다. 사우디에서는 침 하나로 사람이 병을 고치는 것을 신기해했다. 1988년 제다지역에 있는 제다종합병원에서 침구과를 개설했다. 이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병이 나았다. 사우디 일간지에서 내가 하는 침술의 우수성을 보도했다. 이 보도를 보고 이슬람 메카 주지사(이슬람 총재)였던 마지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목 디스크로 고생을 하고 있어 곧 수술을 할 예정이었는데 내 침술 기사를 보고 혹시 하는 마음에서 나를 찾은 것이다. 침 하나로 하나님은 그의 목 디스크를 낫게 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돼 왕자 주치의로 2003년까지 지냈다. 그리고 왕자가 간경화로 사망하자 압달라 국왕으로부터 국왕 주치의 제안을 했지만 시간을 끌면서 2006년 8월 3일 출국까지 9차례 더 성지탐사를 하고 모든 자료를 가지고 한국에 귀국했다.”

 

- 사우디의 라오즈산이 시내산이라는 생각은 언제 했는가? 라오즈산을 탐험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그 산이 정말 시내산이라고 하면 왜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사우디 왕실의 왕자 주치의가 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하나님께서 왕자를 전도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2000년에 왕자의 약제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길에 한국을 잠깐 들렀다. 대구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시나이반도에 있는 시내산을 가보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과 너무 달라 당혹스러웠다면서 어떤 분으로부터 입수한 테이프를 보여주셨다. 그 비디오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땅에 있는 라오즈산이 진짜 시내산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론 와트와 그의 아들이 찍은 <디스커버리>라는 제목의 비디오였다."

-그 비디오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는가? 조작된 비디오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디오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반도 방향에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아라비아 북서부의 홍해 횡단 기념기둥과 진짜 시내산이라는 라오즈산이 금송아지 제단도 촬영되어 있었다. 탐험가인 론 와트는 금송아지 제단에서 없앤 금을 땅에 묻었다는 전설을 믿고 그 보물을 캐기 위해 요르단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에 밀입국했다. 그는 라오즈산을 탐사하다가 출애굽에서 말하는 지형과 너무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경찰에 적발당해 모든 자료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1989년의 일이다. 그 이후에 아들과 함께 다시 잠입하여 남긴 것이 비디오테이프였다.”

- 그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된 적이 있는가?
“론 와트는 촬영한 비디오를 영국 BBC 방송국을 통해 방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테이프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이유와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그 비디오를 본 뒤로 하나님이 왜 나를 16억 이슬람 지도자인 왕자의 주치의라는 사회적 직분을 주셨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시골에서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늘 출애굽 기사에서 고민했던 것이 모세는 분명히 미디안 땅으로 도망갔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오라고 했지만 정작 시내산은 미디안 땅에 있지 않고 시나이반도에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그리고 실제로 시나이반도 시내산에 올랐을 때, 그 시내산은 온통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어 25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앉아 있었을까라는 난감한 기억이 있다.”

- 비디오를 본 뒤에 어떤 일을 시작했는가?

  
   ▲ 성경을 들어 시내산을 설명하는 김승학 원장
“하나님이 분명히 내게 시내산의 비밀을 알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었다. 시내산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정밀하고 자세하게 반복해서 보았다. 그리고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사우디는 이슬람국가의 종주국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서적도 접할 수 없다. 인터넷 웹 사이트로 함부로 검색할 수 없다. 정부는 대형 안테나가 있는 전파 감시국을 통해 전화, 팩스, 무선 교신들을 도청하고, 인터넷 대형 단말기에 감시용 서버를 부착해 섹스, 인권, 타종교와 관련한 사이트 접근을 막아버린다. 그래서 출애굽과 관련한 기독교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왕자의 건강이 악화되어 나는 사우디를 벗어나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 미국 등지를 다닐 수 있었다. 해외에서 왕자를 돌보며 시간이 나는 대로 성경을 정독하고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다는 관련 자료를 모았다. 또한 론 와트 외에 미 특수부대 요원이었던 로버트 코루눅 박사와 아폴로 15호에 동승했던 짐 래리라는 사람이 라오즈산(시내산)을 정탐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사우디에서 강제추방당하고 그 후에 라오즈산이 시내산이라는 주장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라오즈 산은 언제 가보았는가? 왜 그 산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인가?
“1987년이다. 왕자가 휴가를 가던 때에 나도 휴가를 얻어 첫 탐사를 시작해서 2006년 8월까지 모두 12차례 탐사를 했다. 7년 동안 하나님은 라오즈산을 탐사하도록 하셨다. 그 지역은 군사경계지역으로 왕실의 허가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다. 미사일 기지가 있고 그 정상에서는 이스라엘도 보인다.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고고학 지역을 묶어 놓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돼있다. 첫 탐사는 아내와 두 아이들이 함께했다. 그곳은 낮의 온도가 40도에서 50도가 넘는다. 오랜 동안 준비했지만 첫 탐사부터 우리는 벽에 부딪쳐야 했다. 생전 가보지 못한 지역에 3천키로가 넘는 곳을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곳에는 특수부대, 비밀경찰, 그리고 훈련된 유목민들이 세 겹으로 감시했다. 사막지역이라 차로 움직이면 금방 포착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감기기도 하고 또 왕자 주치의라는 신분을 요긴하게 쓰이도록 하셨다.”

-시나이반도의 시내산이 가짜이고 사우디에 있는 라오즈산이 진짜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사에서 한번도 현재의 시내산을 의심하지 않았지 않는가?
“지금의 시내산은 기원 후 527년 순례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급조된 성지일 뿐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성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시고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신 성스러운 시내산은 찾을 수 없었다. 요세푸스는 성경을 근거로 아라비안의 미디안 땅에 시내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로마교황청은 시내산을 순례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기원 후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무사산의 북서쪽 언덕배기에 캐더린 성당을 세운다. 거기를 성지로 정하고 아무 근거도 없이 시내산으로 명명하여 공포해 버린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역사가 왜곡되어 온 것이다. 주후 5세기 이전에는 거기를 시내산이라 부르거나 기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라오즈 산을 배경으로 바위에 새겨진 많은 암각화 중에 하나다. 김 원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일곱촛대의 그림이다. 밑으로는 고대 히브리문자가 새겨져 있다.
- 그렇지만 기독교도 현재의 산을 시내산이라고 믿고 성지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왜 기독교의 고고학자들은 가톨릭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 점에서 기독교는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내산이라고 부를 만한 산을 찾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시나이반도는 1967년 이스라엘에 의해 침공 당하기 전까지는 외부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점령을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애굽 땅이다.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통해 점령하여 1982년 4월까지 15년 동안 했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시나이반도를 고고학자와 지질학자들이 바둑판 쪼개듯 면밀히 뒤졌으나 광야생활 40년의 흔적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은 지금의 시내산(무사산)을 시내산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조상의 흔적을 찾아내고 시나이반도에 시내산이 있었다면 절대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다면 그들은 어느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 만나를 갈아먹은 맷돌로 보이는 것. 이런 맷돌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면 지금 시내산은 예전에 애굽 땅이었다. 하나님은 미디안 땅에 있는 호렙산에서 다시 모세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엘림과 신 광야를 지나 시내광야에 가서 십계명을 받고 떠날 때까지 기간은 정확히 11개월 5일이다. 애굽 군사들이 뒤쫓아 오는 상황에서 11개월 동안 애굽 땅인 시나이반도를 떠돌아 다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명히 애굽을 떠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곳은 지금의 시내산이 아닌 다른 곳에 시내산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 홍해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홍해를 건넌 것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존이 출애굽 경로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다. 고센에서 시내산까지의 여정에는 결코 홍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거짓말이 된다. 여기서부터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홍해는 수심이 1천2백미터나 된다. 대륙이 이동하면서 생긴 깊숙한 절벽의 바다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설령 하나님이 그곳을 갈랐다고 해도 건널 수 없다. 1천2백미터나 되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다시 그 건너편 절벽을 기어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처음 홍해 기사를 읽고 그 현장을 갔을 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남께서는 홍해의 한 곳에 바닷길을 내셨다. 그 바닷길은 솔로몬이 자신의 조상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을 기념해서 양편에 기념기둥을 세웠다. 그 곳에는 유일하게 삼각주처럼 모래해변이 12킬로미터로 펼쳐져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사흘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하도록 했다. 이곳의 바다 수심은 120미터로 경사 6도의 완만한 유일한 바닷길이다. 하나님은 이곳의 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가게 하셨다.”

  
▲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다는 홍해, 양 편으로 솔로론 기둥이 서 있고 이곳이 유일하게 수면의 깊이가 120m다. 하나님은 이곳을 가르시고 그의 백성을 건너게 하셨다. 론 와트 탐험가는 이 곳을 뒤져 애굽의 말굽과 병거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솔로몬 기둥이 증거의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시나이 편에는 기둥이 서 있지만 사우디 쪽에는 깃발만 꽂혀 있다. 사우디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기둥을 잘라 바다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론 와트는 만약 그 지역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곳이라면 바다 속에 그 증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바다 속을 탐사했다. 그리고 그 바다 속에서 애굽의 말굽과 애굽의 병거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지금 애굽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살았다. 왕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던 그는 애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도 구리와 터키석을 비롯한 광산이 있는 시나이의 시내산(무사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왜냐면 예로부터 광산이 있는 곳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사흘 길을 걸어 누웨이바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홍해를 건넜던 것이다.”

 

- 라오즈 산을 탐사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자료들은 무엇인가?

  
▲ 성경에는 만나를 맺돌이나 절구에 찧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라오즈 산 아래서 발견한 돌절구 중 하나다.
“만약 라오즈산이 진짜 시내산이라면 성경에 기록한 대로 있어야 할 것을 적어보았다. 엘리야 동굴(열왕기 상 19: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쌓은 지경(출 19:12), 성막을 친 장소(출애굽기 26장), 아론의 금송아지 단(출 32장), 광야 산에 흐르는 물(신 9:21), 모세가 친 므리바 반석 등이었다. 이런 내 생각은 라오즈 산을 오르면서 너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누가 꾸며놓았다고 할 만큼 라오즈 주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 라오즈라는 뜻은 아몬드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시내산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더구나 마실 물이 없어 호렙산 반석을 치게 하셨다고 했는데 현재 시내산인 호렙산과 르비딤은 거리가 매우 멀다.
“라오즈란 뜻은 바로 아몬드란 뜻이다. 실제로 그 산은 아몬드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한글개역성경에 번역된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는 살구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아몬드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다. 너무 신기한 일이 아닌가? 라오즈 산을 탐사했을 때 우리는 그 곳에서 호렙산의 반석을 목격했다. 목말라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게 하셨다(출 17:6). 그 반석은 구릉이 있는 가운데 높게 쏟아 있었다. 높이는 8층 높이 정도로 약 22미터 정도였다. 그 반석은 둘로 갈라져 있었고 그 틈은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다. 물론 물이 반석에서 솟구쳤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 만큼 바위는 구릉에서 우뚝 서 있었다. 현재 시내산은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가 4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성경과 다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이 반석 밑으로 산 단을 발견했다. 그곳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 한 뒤에 세운 단(출 17:15)이었다. 바로 반석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 다른 흔적에 대해 알고 싶다. 가령 지경이나 이스라엘의 주거 흔적 같은 것이 있었는가?
“물론이다. 그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이곳을 잘 보존하게 하셨다. 이곳은 바로 7년에서 10년에 한 번 정도 내릴 정도로 메말라 있다. 이곳에 사는 유목민들 스스로가 이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나간 곳이라고 말한다. 라오즈산을 배경으로 수많은 암각화들이 그려져 있다. 고대 히브리문자는 물론 이집트의 각종 신들의 형상도 있다. 또한 만나를 갈아먹거나 찧어 먹기 위해 사용된 수많은 맷돌과 돌절구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나도 그곳에서 맷돌과 절구를 가져왔다. 홍해를 바라보는 쪽으로 지경이 넓게 쌓여 있다. 또한 천막을 친 주거 형태의 돌이 당시 그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천막을 친 주거흔적으로 보이는 것. 김 원장이 천막 입구에 출입문을 표시한 곳에 서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곳에서 천막을 세우고 돌들을 천막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그대로 천막만 거두었다. 이런 주거 흔적이 너무 많다고 한다.
- 이번 자료들과 라오즈산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가 놀랄 만하다.
“라오즈에 대한 자료들은 한국교회는 물론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될 것이다.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이 자료를 처음 한국에 공개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한 교수를 만났을 때 내게 ‘아직도 출애굽을 믿고 있느냐’는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 일부 자료를 미국과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들의 반응은 정말 놀라웠다. 기존의 성지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보지 못한 많은 학자들이 그 이론들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라오즈 산에서 아론의 금송아지 재단도 보았다. 또 그곳의 지명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지명이었으며 성경과 일치했다. 미디안 땅, 그리고 모세의 장인의 집인 이드로의 집도 가 보았다.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경이롭게 보고 경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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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3(고센땅)                             

              
검은빛을 띠고 있는 비옥한 흙이 고센을 풍요의 땅으로 만들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이름은 ‘케메트’이다. 현재도 아랍어로는 자기 나라를 ‘미스르’라고 부르고 있다. ‘케메트’ 혹은 ‘미스르’라고 하는 이름은 ‘검다’는 뜻이다. 이집트인에게 진정한 국토의 의미는 95%의 모래가 아니라 5%의 검은 땅, 곧 고센이다. 풍요의 땅 고센은 가뭄과 홍수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적의 땅이다. 고센은 지하 170m 이상을 파도 암반이 전혀 없는 천혜의 비옥한 땅이다. 6∼7월 아프리카의 우기를 맞이하면 상류에 엄청난 양의 물이 나일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온다. 9월께 불어난 물은 나일강을 범람하게 한다. 범람한 물은 나일 주변을 비옥하고 푸르게 만든다. 평소에는 60∼70m의 나일강 폭은 홍수 때는 20㎞로 늘어나게 된다. 물과 함께 떠내려 온 나뭇잎과 짐승의 똥들은 천연의 비료로 땅을 검고 비옥하게 만들어갔다고 한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에서 양과 염소를 키우며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을 재배하여 먹었다(민 1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도 풍요한 고센의 채소를 잊지 못했다.
 

고세 지역에 라암셋과 비돔이 있다 ; 라암셋(Rameses)은 애굽의 나일강 하류 델타 동북부에 있던 삼각주의 중앙 부분에 있는 성읍으로 나일강의 타니데익 지류 동쪽에 있는 국고성이며 요새 성읍이다. 이름은 ‘레’(Re·태양신)는 ‘그를 낳았다’란 뜻이다. 바로는 요셉과 그 친족(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애굽에서 가장 비옥하고 살기 좋은 땅인 고센 지역을 정주지로 허락하였는데 라암셋은 고센 지역 중 고정된 한 구역이다(창 47:6,11). 라암셋이 성경에서 유명한 것은 야곱 이후 400년 동안 그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룬 후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할 때 출발지였기 때문이다. 라암셋은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국고성을 
짖기 위하여 노역에 일을 하면서 고통을 당하였다
 

고센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소식을 듣고 아버지 야곱과 그의 식구들 70명이 이주해 터를 닦은 곳이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창 47:4) 야곱의 아들들은 바로 앞에서 그들이 살 땅을 구하였고 바로는 나라를 구한 일등공신 요셉의 식구들에게 고센에 살 것을 허락했다. 이전에 그들은 바로가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나이다”(창 47:3)고 했다. 고대에 목축은 농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한 직업이었는데 그들은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땅에서 이참에 직업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대 동북의 한 지역이다. 이 고센은 요셉이야기 (창37:39,50:)의 무대로서 유명하다. 여기서 야곱은 20여년만에 사랑하는 그의 아들 요셉과 다시 만났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요셉의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후에 바로의 총애를 얻게 되어 출세한다. 요셉은 긴 여행으로 지치고 연로한 아버지의 목을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그 장소가 바로 고센이다.
 

 바로는 목축에 알맞은 이 고센땅에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서 거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짐승을 키우면서 창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살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이적의 현장이 되었고, 하나님이 특별히 축복하였고, 이스라엘이 창대하여 국가가 되어 출애굽역사가 일어난 곳이므로 유명해 진 것입니다.  
 


고센은 풍요의 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별한 땅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 이집트인들에게 혹독한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인들에게 파리 떼를 보내셨지만 고센 땅을 구별하여 파리가 없게 하셨다(출 8:22). 이집트인의 가축을 죽게 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죽지 않게 하셨다(출 9:6). 이집트인들에게는 우박을 내렸지만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다(출 9:26). 이집트인들이 사는 곳은 캄캄한 흑암이 덮였지만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다(출 10:23). 이런 고센의 풍요가 요즘 메말라 가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난개발로 나일강의 수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 학자들은 100년 후에는 고센의 2분의 1 이상이 해수에 잠길 것이라고 예측한다.


 


 고센 땅은 나일강 삼각주의 북동지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살은 특별히 축복 받은 곳입니다.(창45:1, 10) 고센(  꼬쉔)이란 뜻은 '땅 중에 좋은 곳'(창47:6) '하나님이 축복한곳' 이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후에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 고생 땅이 되었고,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복을 가지신 하나님이 역사 할 때에는 '땅 중에 좋은 땅' 고센 이었으나, 축복의 하나님이 떠난 곳에는 고생땅 저주땅이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좋은 땅 라암세스'(창47:11)라고도 하였던 고센땅은 하부 이집트의 델타지역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고센땅은 비교적 많은 강우량과 나일강의 손쉬운 관개시설 때문에 실제로 애굽에서 '가
장 좋은 땅'(창47:6,11)이었다.
 

라암셋의 유적들이 있는 곳
 

고센 땅에 있는 라암셋으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고성 라암셋을 쌓았다
또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출발하여 숙곳으로 향하였다(출12:37)



라암셋에 도착하여 언덕에 오르자 발굴된 많은 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암셋은 현재 산 엘 하가르(San El Hagar)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타니스로,신왕국 때에는 피 라암세스(‘라암세의 집’이란 뜻)라 불린 곳으로 고왕국시대부터 번영하여 제2중간기에는 셈족 중 하나인 힉소스에게 100년 동안 점령돼 수도가 되었다. 그후 타니스 말기 왕조 시대에도 200여년간 수도가 되었고,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처럼 중요한 피라암셋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람세스(라암셋)와 동일시된다고 보고 있다. 라암셋은 150년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지하수 분출로 일부분만 발굴돼 있었다. 그래서 관람이 가능한 곳은 아몬 대신전과 말기 왕조시대 왕가의 네크로폴리스(낮은 지역의 도시)뿐이다.
약간 싸늘한 날씨 속에 라암셋 유적을 살펴보기 위해 언덕을 내려가자 수많은 돌로된 유적들이 널려 있었다. 그중에는 애굽의 바로였던 시삭과 오솔콘의 무덤이 있었으며 대부분 라암셋의 석상과 우물터가 발굴되어 있었다.

오벨리스크로서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애굽 사람들이 기념탑을 세운 것이다. 특히 거대한 크기의 오벨리스크가 7개나 된다는 사실에 당시 라암셋의 규모를 실감케 했다.


라암셋의 규모가 굉장하였을 것이다


바로의 모습일 것이다. 머리에 뱀이 있을 것으로 보아도 뱀을 신으로 섬긴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렸던 바로였을 것이다




고센의 흙 벽돌로 쌓은 것이 보인다
 

국고성 라암셋에 있는 흙벽돌로된 성이 보인다.  당시 흙으로 만든 벽돌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특이한 사실은 벽돌 일부에는 짚이 있었으나 또 다른 벽돌에서는 짚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기록에 나타나 있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짚을 공급 받아 벽돌을 만들었으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요구한 이후 바로는 그들에게 짚을 주지 않고 이전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도록 한 사실을 상기시켜줬다(출 5:6∼14).  한 마디로 라암셋은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로 얼룩져 있는 곳이다. 라암셋에서 울려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로 하여금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다(출 3:7∼10).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여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음을 라암셋의 흙벽돌 속에서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이 라암셋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런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손 번성에 대한 축복을 이루어가셨던 것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흙벽돌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의 역사에 대한 숨결이 느껴지는 라암셋. 그러나 그런 고난도 역사의 흐름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을 향한 고난도 역시 잠시 뿐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롬 8장 18절 말씀을 되새겨본다. 아직도 이곳에는 당시 흙으로 만든 벽돌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특이한 사실은 벽돌 일부에는 짚이 있었으나 또 다른 벽돌에서는 짚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기록에 나타나 있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짚을 공급 받아 벽돌을 만들었으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요구한 이후 바로는 그들에게 짚을 주지 않고 이전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도록 한 사실을 상기시켜줬다(출 5:6∼14).
한 마디로 라암셋은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로 얼룩져 있는 곳이다. 라암셋에서 울려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로 하여금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다(출 3:7∼10).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여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음을 라암셋의 흙벽돌 속에서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이 라암셋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런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손 번성에 대한 축복을 이루어가셨던 것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흙벽돌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의 역사에 대한 숨결이 느껴지는 라암셋. 그러나 그런 고난도 역사의 흐름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을 향한 고난도 역시 잠시 뿐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롬 8장 18절 말씀을 되새겨본다.
 
 바로의 명령으로 고센의 비옥한 땅을 지키기 위하여 라암셋에 국고선을 건축하였을 때에 벽돌로 지은 국고성의 흔적이 있다 지금은 무너졌으나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하면서 쌓은 곳일 것이다.  그들이 고통과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게 된다


라암셋에 있는 흙벽돌로 된 성;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헤브론 남서쪽 약 19.2km 지점으로 애굽의 동북부 카이로 동북 50키로 지점 벨레스 부근으로 추측 이 지역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살아온 지역이며, 그들이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미 35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라암셋 2세의 문장이 새겨진 돌들과 볏짚을 섞어 만든 벽돌의 흔적을 완연히 볼 수 있다.


비돔에 곡식 창고가 있었을 곳으로 추정이 되는 것. 지금은 아이들이 놀이터이지만 벽돌들이
국고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암셋  숙곳으로 향하여 홍해로 진행을 하였다. (출12:37)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에 들어간 세겜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인구가 많아져서
바로의 정책에 따라서 비돔과 라암셋에 국고성을 쌓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애굽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라암셋과 비돔에서 그들은 유월절을 지켰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430년에 성취하셔서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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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황금사원( Golden Tempie)    

           

황금사원(Golden Temple) / 인도 북부 푼잡 주 암릿사르

400kg에 달하는 순금으로 덮여있는 황금사원!
암릿사르 골든템플 Amritsar Golden Temple

암릿사르는 시크교의 총 본산이다


 

인도 북부 푼잡 주 최대의 도시로 파키스탄 국경에서 50㎞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암릿사르는 1577년 시크교의 제4대 구루였던

람 다스가 암릿타사라스(AmritaSaras)라는 신성한 저수지 주변에

건설한 도시로, 암릿사르라는 지명은 이 저수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황금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우선 해야 할것이 있다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두건을 쓰야하며, 맨발로 들어가는 것,

남.여.노소 인종차별없이 모두에게 적용된다


만약 두건이나 모자가 없다면, 입구에서 두건을 나눠준다
신발은 무료로 보관해주는 곳이 입구 옆에 있고,

4개의 입구에는 발을 씻는 곳이 있다


 

이런 암릿사르 황금사원도 한편으론 피의 역사다

푼잡 주의 힘든 역사는 1919년경, 영국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위해 고심하던 인도 정치가들의

집회장에 영국인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400여 명이

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인도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지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피의 역사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곳에
비극을

거쳐 오면서도 아름다움을 굿꿋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황금사원이다



종교적 문제로 나라는 푼잡 지역을 경계로 하여 힌두국가 인도와

회교국가 파키스탄으로 나누어지며, 라호르(Lahore)는 파키스탄의

중심지가 되고 암릿사르는 푼잡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민족 대이동이 발생했다
파키스탄의 힌두교도들은 인도로 이동하고, 인도의 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느라 대혼란이 일어나는데,


이 대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략 100만여 명에 달한다니

그 혼란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종교와 문화의 차이로 나라까지 갈리는 상황에 상호 충돌이

없었을 리 없다 이 민족 대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이동자의 4분의 1이 넘는 25만 명 이상이다



그러나 이 대이동으로도 피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에는 시크교 강경파들이 주의 독립을 주장하며

황금사원을 장악하고 강경투쟁에 나섰다


당시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Indira Ghandhi)는 탱크까지 동원하는

초강력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 1984년 그녀의 시크교 보디가드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암릿사르의 시크교(Sikh)도 모습은 짙은 수염에 커다란 터번을

두른 큰 남자들의 모습이 맨먼저 들어온다


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결합한 시크교는 푼잡을 본거지로 한,

암릿사르가 파키스탄과 매우 가깝다는 이유로,


주도는 이 곳이 아닌 찬디가르(Chandigarh)로 정해졌지만,

사실 실질적인 푼잡의 중심은 암릿사르이다


 

시크교의 네 번째 구루(Guru, 영적스승) 람 다스(Ram Das)에 의해 조성된
도시 암릿사르의 중심은 역시 황금사원(Golden Temple)이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사원도 아름다운데, 그를 능가하는
400kg에 달하는

순금 지붕 덕에 더욱 유명한 곳이다.



시크교는 나눔의 종교이다


사원 안에서는 예배 때 올렸던 단 과자를 비롯해

간식이며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마하라자 란지트 싱의 치세(1801~39) 때 대리석과 구리에 금박을 입혀

재건축되었다 암릿사르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는 인도 파키스탄

국경지방에서 매일 해지기 바로전에 열리는 그곳의

closing ceremony 이다



장엄하면서 웅장하기까지한 이 장면은 이곳에 온다면

놓치기 아까운 명장면 이다


 

낮에는 골든템플을 보고 해지기 바로전에 버스나 릭샤로 이동 후
closing ceremony의 멋진 장면을 감상하는 것도

암리차르에서 빼놓을수 없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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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교회                                 


   

 

 

 성묘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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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서쪽의 벽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며,파괴된 그들 성전의 마지막 흔적이다.
이 서쪽 벽은 B.C. 20년에 솔로몬의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을 세울 때 건축된 것이다.
A.D.70년에 티투스 황제는 성전을 모두 파괴하면서 이 벽만 남겨 놓았다.
그는 후대에 이 웅장한 건물을 파괴할 수 있었던 로마 병사들의 막강한 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에 들어오면서 일 년에 한 번씩 사원이 파괴된 날이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 날 그들은 이 벽으로 몰려가 흩어져 버린
그들 민족과 부서진 성전을 보면서 슬피 울곤 했다고 한다.
이 이후로 이 벽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어져 왔으며
이 벽 앞에서 기도하는 관습이 수 세기동안 지켜져 왔다.
1948년에서 1967년까지는 요르단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었다.
6일 전쟁 후 이곳을 다시 회복한 유대인들에게
이곳은 기쁨과 참배의 장소가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수 천 명의 참배객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공간이 마련되었다.

통곡의 벽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진의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 이렇게 나눠져 있다.

 

 

 

 Via Dolorosa·슬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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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 광장을 지나 현재 아랍 상인들의 상점이 즐비한 좁은 골목길 끝에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슬픔의 길)’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고난의 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진 곳,

힘에겨워 넘어진 곳,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등 14곳에 번호가 붙어 있었다.

‘성묘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유해가 내려지고, 묻혔다가 부활한 무덤이 있는 곳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서기 335년 처음 세웠다.

1960년 본격 복원공사를 시작해 1997년 현재 모습을 갖췄다.

성묘교회는 순례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무덤에는 한번에 3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1시간 이상 줄을 서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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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얄론골짜기(Ajalon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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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펠라(평지)와 아얄론골짜기(벧호론길)    (글, 사진- http://www.21cifm.org/chnet2/board/)

 

예루살렘은 700-800m에 이르는 산악지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그 곳에서 산봉우리 사이로 비탈길을 따라 서쪽 지중해 해변에 세워진 텔아비브로 가다보면 마지막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게 된다. 이 가파른 내리막 골짜기 길을 통과하자마자 나지막한 산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지점이 산악지역 끝이요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평지는 평야와 같은 평평한 지형을 일컫는 말이지만 성경의 평지는 산들이다.(대상27:28, 대하1:15) 곧 평지에 들어서는 순간 산들이 낮아졌을 뿐 아직도 산들이 멀쩡하게 눈앞에 보인다. 한글 성경에는 평지를 '쉐펠라' 라고 불렀다. 쉐펠라는 '겸손' 또는 '낮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그래서 '쉐펠라'가 어느 장소나 지역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될 때 이는 낮은 지역(Lower Land) 또는 장소(Place)를 의미하게 된다. 성경에서 쉐펠라로 불려진 지역은 대략 동서 15km, 남북으로 60km에 이르며 100-500m에 이르는 산들과 골짜기들로 구성된 아주 특정지역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지역을 한번도 평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600-1000m 산악지역에 주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지역은 쉐펠라 즉 낮은 지역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 땅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으리라. 평지에서 서쪽 지중해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양 옆의 산들은 점점 낮아지며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평야와 같이 넓은 계곡을 지나게 된다. 평야와 같이 드넓은 이곳을 성경은 골짜기라고 부른다. 성경은 평야와 같이 넓은 산과 산 사이를 골짜기라고 부른다.  

 

기브온의 산당에서 내려다 본 아얄론 골짜기       (출처- http://blog.daum.net/icebluett/44)       

 

아얄론 골짜기는 첫 번째로 만나는 곳이다. 평지에 있는 다섯 개의 골짜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넓은 골짜기이다. 평지의 골짜기들은 지중해 해안에서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는 도로 역할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아얄론 골짜기는 벧호른 능선 길로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북쪽 기브온과 사무엘 선지자의 고향 라마와 연결되는데 고대로부터 이 골짜기와 비탈길은 산지로 올라가는 고속도로의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아얄론 골짜기는 평지에 있는 골짜기 가운데 가장 넓은 골짜기인 동시에 이 골짜기와 연결되는 벧호론 비탈길은 산악지역에 펼쳐진 해발 650m의 고원지대와 연결되는 가장 짧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성을 지혜의 왕 솔로몬은 간과하지 않고 이 골짜기와 비탈길에 요새를 구축하였다.(왕상9:17, 대하8:5) 결과 이 골짜기와 비탈길은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서 산지로 올라가는 군인들도, 전쟁에서 패하여 도주하는 군인들도 이 골짜기와 비탈길을 이용했다. 이집트 파라오의 군인, 아시리아 군인, 바빌론 군인, 페르시아 군인, 알렉산더 군인도, 로마의 군인도 이 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에게 쫓기는 불레셋 군인들도 이 비탈길과 골짜기로 도주했다.(삼상7:5-12; 13:15-18; 14:31, 대상14:8-17)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 그 땅의 가나안 거민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전쟁 사건이 여호수아 9-10장에 기록되었다. 야간 행군까지 강행하면서 길갈에서 900m 고지의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올라와야만 했던 여호수아, 그리고 기브온 거민과 여호수아의 화친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 왕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브온을 공격해야만 했던 이 전쟁은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묻어있는 전쟁이었다. 여호수아 10장에 요약된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벧호론 비탈길 저 꼭대기 기브온 고원에서 벌어진 그날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치열한 전쟁이었다. 여호수아나 아모리 사람들에게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끝을 보아야만 했던 전쟁이었다. 여호수아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수10:12) 명령했다. 이스라엘군은 승리를 거둔다.    (글- http://www.21cifm.org/chnet2/board/)

 

아얄론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cuca1486/30091240903)

 

아얄론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cuca1486/30091240903)

 

아얄론골짜기             (출처- http://blog.daum.net/wonderfulgood/20 )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6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9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륙하고 벧 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 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여호수아 10:6-15)

 

'태양이 멈춘 이야기'       (글 출처- http://weddingbhc.blog.me/30054069438)

 

수년 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발행하는 "이브닝 월드" 에 '태양이 멈춘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성경에서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기사가 실렸다. 성경의 기록이 전자 계산기에 의해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시에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헤롤드힐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메릴랜드 주의 그린벧트에서 연구하고 있는 우리회사 우주 관계과학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하여 주셨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 및 달과 그 주변의 혹성들의 궤도 조사가 끝나야만 우리가 발사할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계가 정지해 버렸다. 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다. 모든 기사들은 긴장되었다. 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든지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과학자들은 곧 기계 기사를 불러서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 결과 기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우주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금 면밀히 조사했다. 결국 그 궤도 진행상에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하루가 없어진 채 궤도가 진행되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며칠 후 교회에 다닌 일이 있는 청년이 일어나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모두 웃어넘겼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 노련한 과학자가 "자 우리가 이대로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성경책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해봅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여호수아 10장 12절-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찾아내었다.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 족속들과의 싸움은 치열했다. 날이 어두위지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사에게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 기도하면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라고 외쳤다. 정말 여호수아의 기도대로 해와 달이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거의 하룻동안 진행하지 않았다. 우주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다는 답을 얻게 되었다. 성경에 '거의 종일토록'이라고 했으니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경 어딘가에 태양이 뒤로 물러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과학자들은 곧 성경에서 열왕기하 20장 3-10절의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냈다. 거기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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