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2,000 여년으로 추정하는 감람나무     


 

이스라엘 겟세마네동산 정원의 감람나무, 2000년 된 것으로 추정

 

올리브나무는 기름을 짜거나 성전건축 재료로 사용된 성스러운 나무이다.  학명은 “ Olea europaea L.. (물푸레나뭇과 : Oleaceae)”이며, Olive(영명), זית(자이트, 히브리명) 헬라명은 ελαια(엘라이아)이다.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이다. 성경에는 창 8:11, 출 27:20, 레 24:2, 신 6:11, 8:8, 24:20, 삿 9:8~9, 15:5, 삼상 8:14, 왕상 6:23, 6:31~33, 왕하 5:26, 18:32, 대상 27:28, 느 8:15, 9:25, 욥 15:33, 시 52:8, 128:3, 사 17:6, 24:13, 41:19, 렘 11:16, 호 14:6, 암 4:9, 합 3:17, 학 2:19, 슥 4:3, 4:11, 4:12, 롬 11:17, 11:24, 약 3:12, 계 11:4에 나온다.        

 

이스라엘 겟세마네동산 정원의 감람나무 

 

성경에 나오는 감람(橄欖)나무라는 이름은 오역(誤譯)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나무는 히브리어로 ‘자이트’이고, 영어 이름은 ‘올리브’이다. 중국 남부에서 자라는 감람과 매우 비슷하여 중국어 성경은 ‘감람’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비록 상록 교목에다 열매의 모양이나 색깔, 심지어 맛과 용도까지 비슷하여 차이니즈 올리브(Chinese Olive)라 불릴지라도 그것은 감람나무과의 Canarium album Raeusch이며, 성지에서 자라는 물푸레나뭇과의 올리브와는 다른 종류이다. 공동번역등 일부 번역판에서는 올리브나무, 올리브유(油), 올리브산(山)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지에는 올리브나무가 많이 자라며, 특히 예루살렘 동쪽에는 올리브산(Mount of Olives)으로 불리는 곳도 있다. 예수께서는 골짜기에 있는 겟세마네(기름 짜는 틀) 동산에서 붙잡혀 수난을 당하였으며, 그곳에는 지금도 수령이 약2000년이나 되는 고목들이 있다. 올리브 수확 때는 온 가족이 모이며, 나무 밑에 거적을 깔고 장대를 이용하여 털거나 훑기도 한다. 수확된 올리브는 그대로 마대에 넣어 마을의 공동 기름집으로 가져가 기름을 짜는데, 성서시대에는 연자 맷돌을 이용하였다. 올리브는 생장이 느려 심은 지 7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 상록교목이다. 수명은 천년이 넘으며 고목에서도 새로운 줄기가 나온다. 키가 10m나 자라므로 2월에 가지치기를 해 주며, 흙이 얕은 석회암 또는 현무암 토질에서도 잘 자란다. 서리에 민감하고 강한 바람도 싫어한다. 해거리가 심하며, 대체로 비가 적은 해에 열매가 많이 열리지만 크기는 작다. 습기를 싫어하므로 강수량이 200mm 내외인 지중해성 기후가 좋으며, 물이 잘 빠지는 산기슭이나 계단식 농경지에서 잘 재배되고, 수분이 많으면 기름이 적어진다. 올리브는 9~10월에 녹색 열매를 맺으며, 소금에 절여 먹거나 기름을 짤 수 있다. 그리고 열매가 검게 변하는 10~11월에 나머지 열매를 한 번 더 수확하여 같은 방법으로 사용한다. 잘 여문 열매에는 뽀얀 분가루가 묻어 있다. 잎은 장타원형으로 길이 6~8cm, 넓이 1.5cm 정도의 가죽질이며 두텁다. 잎의 색깔은 녹색이며, 뒷면은 은백색으로서 하얗고 비단 같은 솜털들이 덮여 있다. 잎겨드랑이(葉腋)에서 꽃줄기가 나와 작은 흰 꽃을 다발로 피우는데, 이 시기에 늦은 비가 내리거나 뜨거운 동풍(東風)이 불면 꽃이 떨어지기 쉽다(‘밀’편 참조). 올리브의 꽃과 열매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으므로 열매를 절일 때는 일주일 정도 매일 물을 갈아 주어 독성을 풀어낸 후 소금물에 절인다 1~2cm 크기의 과육에는 15~30%의 기름기를 함유되어 있어서 올리브유를 생산할 수 있는데(사 17:6), 한 그루에서 보통 75리터의 기름을 얻는다. 올리브유는 8일 동안 여덟 촛대를 켜는 하누카 축제와 관련이 깊다. BC2세기 헬라로부터 성전을 재탈환한 후부터 생긴 전통이다.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관유는 올리브유에 몰약, 육계, 창포를 더하여 만들었으며 이것으로 성전의 기구들을 닦거나 아론 제사장(레 8:12)에게 기름을 부었다. 성서시대에는 올리브유로 성전에 불을 켰으며(레 24:2), 지금도 성탄기념교회와 오병이어교회에서는 올리브유을 이용하여 등불을 켜 두는 장소가 있다. 식료품으로 사용되는 오일은 녹색 열매로 처음 짠 액스트라 버진 오일(Extra Virgin Oil)이 최상급이며, 열을 가하면 쉽게 타므로 주로 샐러드용으로 사용된다. 불포화지방산이 65~85% 함유되어 있고, 트랜스 지방은 거의 없으므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다. 영하의 온도에서 뿌옇게 얼지만 녹이면 사용이 가능하다. 올리브나무는 단단하여 솔로몬 성전의 문짝과 문설주, 그룹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지금도 성지에서는 올리브나무 조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올리브를 추수하는 농부들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열매를 조금씩 남겨 두었다. 올리브도 포도나 다른 곡물처럼 필수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사 17:6, 24:13).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레 25:1~7).

 

이스라엘 겟세마네동산 정원의 감람나무

 

주요 성경구절 

1)〔창세기 8장 11절〕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זית 자이트)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2)〔출애굽기 30장 24~25절〕감람(זית 자이트)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3)〔신명기 8장 8절〕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זית שמן 자이트 쉐멘, 감람유)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4)〔신명기 24장 20절〕네가 네 감람나무를(זיתֶ 자이트)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5)〔사사기 9장 8~9절〕감람나무(זית 자이트)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הזית 하-자이트)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6)〔열왕기상 6장 23절, 31~33절〕내소 안에 감람목으로(עצי-שמן 아쩨이-쉐멘)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고가 각각 십 규빗이며 ...

7)〔로마서 11장 17~24절〕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 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ελαια 엘라이아) 접붙이심을 얻으랴

 

감람산 (올리브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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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도시 에베소        //        

//

로마도시 에베소: 괴레메 계곡(성경의에베소서)
마치  스머프가 사는 마을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사는 마을 같은 곳.가파도키아의 괴레메계곡은

 화산재로 형성되어 인위적으로 동굴을 파기가 좋아 이런

모습의 마을이 되었다함. 313년 로마교황이 기독교를

공인하자 근처의 지하도시에서 은거하며 살던기독교인들이

와서 바위동굴을 파서 교회를 짓고 집을 지어 살던 마을로
교회가 많아서 매일 새로운 교회를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함. 최근까지 주민이 거주 했으나 너무 많이

바위를 파고 동굴이 오래되어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터키정부에서 퇴거 명령을 내려서대부분 비어 있으나
일부 바위동굴에는 주민이 거주하거나 창고로 사용하고
일부동굴은 호텔과 카페로 개조되어 사용하고 있슴.
이곳에서 영화 스타워즈의 외계인 마을로 촬영했다고 함.

↓1.


↓2.


↓3.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교회 입니다


↓4. 교회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5. 교회 내부 정면의 벽화


↓ 6. 교회내부의 거주공간


↓ 7. 교회내부의 벽


↓ 8. 아무리 보아도 처음보는 신기한 풍경 입니다


↓ 9.이 근처에는 바위동굴 주택이 엄청 많습니다


↓10.


↓11. 동굴 주택과 벽돌 주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 12. 이곳에는 약 2만 여명의 기독교인이 살았다고 합니다


↓13. 신 시가지와 혼재된 모습입니다


파묵깔레와 히에라폴리스 그리고 올림푸스산(터키)
고대시대부터 현재까지 온천물이 엄청나게 많이 솟아 나오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온천은 조그만 구멍에서 나오거나 펌프로 퍼 올리는데,
이곳은 시냇물처럼 엄청많이 나옵니다.
게다가 온천물에 녹아서 함께아온 석회성분이 산을 이루어
마치 목화같이 보인다고해서 목화성(파묵깔레)으로 부르는곳
로마시대에는 로마에 있는 교황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며
그당시 세계 각국에서 병치료를 위해서 부자들이 왔었으며
병이 치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고,
치료를 못하면 이곳에 죽어서 호화로운 무덤을 남겼는데
현재 발굴된 석관만 1,700여가가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동양인의 무덤도 여러개 있는데 중국인으로 추정한다고

 하며 이곳을 죽은자의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합니다.
"나 어제 당신과 같았으나 내일은 당신이 나와 같으리라"

<- 묘비중 하나의 글귀> 
이곳은 온천물에 석회암이 녹아서 나와 흘러내리면서
마치 우리의 천수답 논처럼 기이한 형상을 만들고
그곳에는 온천물이 고여있으며 서양인들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않고 비키니등 수영복 차림으로 이지역을 활보하거나 온천물에

온몸을 담그고동양인들 특히 한국인 여자들은 양말만 벗은채 양산을

 쓰고 다닙니다.이곳 터키의 강한 햇빛을 피하느라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한국인 뿐 이라고 합니다.이곳에는 노천 온천

목욕탕이 별도로 있으며아래의 휴양도시에 있는 모든 숙박업소는

자체 온천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전경의 일부분


↓2. 전경의 일부분(오른쪽에 관광객 무리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3. 위 사진에서 보이는 언덕 넘어쪽 전경의 일부


↓4. 언덕에서 다시 앞쪽 부분을 향해


↓5. 이곳는 로마시대에 커다란 휴양도시로 대형 원형극장도 있습니다


↓ 6. 아래쪽에서 촬영


↓ 7. 도미테우스 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운 도미테우스 기념문,


↓ 8. 2000년 전에 이렇게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 9.대리석을 마치 두부 자르듯 정교한 쐐기 형태로 다듬어 끼워 맞추었답니다


↓10. 로마시대의 온천 목욕탕 건물


↓11. 죽은자의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일부분 (석관의 내부가 보이는 것)


↓ 12. 당시 세계 각국에서 모이다보니 무덤의 형태가 아주 다양 합니다


↓13. 이곳에는 수백년 동안 묘지로 사용하다보니 지진등으로 흙에 묻히고 그위에 또 무덤이 생겨났으며


나중에 발굴해보니 이렇게 이중으로 무덤이 형성된것이 여러곳에 있습니다 / 발굴위치에 복원


↓14. 동양인의 무덤 / 내부는 석실형태임


이곳을 지나서 고대 그리스 시대 올림푸스산의 꺼지지 않는 불을 보러 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이곳이 그리스의 영토이었고 이어서 로마의 영토로 서양인이

살던지역 이었으나 이민족인 터키(돌궐족)인은 1300년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때 이곳에서 성화를 채화 했다고 하고

비가 여러날 오면 불이 꺼졌다가 다시 햇빛이 비추면 자연 발화 한다고 합니다

↓15. 올림푸스산으로 가는길 도중에 차창 밖 풍경
  ↓ 16. 산으로 올라가는 길 / 소나무가 많더군요 

  ↓ 17.  서양인이 꺼지지 않는 불에 불을 붙여 보네요
  ↓ 18.  이곳에는 불이 붙는 장소가 약 10개소 정도가 분포해 있습니다
  ↓19. 고대 그리스 시대 신전을 세웠던 흔적들 

 



화려한 로마도시 에베소(에페소)


2,000년전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도시이며

성경의 에베소서가 쓰여지게된 도시이기에 더욱...

그런데 실제 도시는 상상했던것 보다 화려한 도시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가 대리석으로 깔려있고,

건축물의 화려함과 웅자함은 보는이로 하여금 압도감을 주기에 충분 했습니다.

게다가 대형 목욕탕과 도서관등....

 

↓1. 매표소를 통과하여 첫번째로 보이는 신전터 (기둥이 있는 부분 전체)


↓ 25.000명이 수용 가능한 원형극장 /이곳에서 사도바울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을 전했으며
후일 바울이 에베소인들(성도들)에게 씌여진 편지가 에베소서로 남게됨


↓3. 로마교황이 다녀간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황의 신전


↓4.본래 에페소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겼으며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신전보다 약 100여미터 위에서 발굴되어 발굴된 위치에 전시되어 있음


↓5. 여러 신전을 지나고나서 도서관이 있는 도시의 중앙으로 내려가는길


↓ 6. 로마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해서 세운 분수대


↓ 7. 목욕탕 내부 /고온탕,온탕,냉탕 등으로 지어졌다고 함


↓ 8. 목욕탕의 입구?


↓ 9. 공중화장실 (대리석 구멍에 볼일을 보면 위 목욕탕 폐수가 그 아래로 흘러서
자동적으로 수세식?으로 처리되는 구조)

↓10. 에페소 도서관


↓11. 터키 초등학생들의 수학여행


↓ 12. 에페소의 당시 인구가 5~7만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원형극장은 25,000명 수용이 가능하다고 함


↓13. 에페소에서 항구로 통하는 길(본래 이곳에서 1키로 떨어진 곳이 항구 이었으나


그동안 지진등으로 구조가 변해서 현재는 약6키로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음)

 

<- 지진과 함께항구가 멀어진 것이 도시멸망의 원인 이라고 합니다


↓14. 초기(박해를 받던시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암호표시


↓15. 에페소 발굴 도시에서 약 1카로 떨어진 곳에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는 성채


에페소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도시 전체에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실 에페소는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과 문화가 이곳을 지나갔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유적 도시가 되었다.
에페소는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에서 에페소로 옮긴 덕에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이후 아우구스트스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기원 후에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7세기 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의 에페소는 역사 유적과 건축, 기독교 성지순례를 하는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에게해의 한가로움과 지중해의 여유로움까지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다.이스탄불이나 앙카라등 대도시에서 멀어 여행하기
 쉽지는 않지만 도시 곳곳에 산재한 유적들과 한적함으로 점점 더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다. 에페소는 에게해에 인접한 곳으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여름에는 더운 편이며 겨울에는 온난하다.

  때문에 10월까지도 해수욕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름이라도 밤에는 기온이 많이내려간다.

 

아시아7교회                             

            


7 교회 거리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거리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왕국 데메테르신전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제우스 신전터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버가모왕국 아테네 신전터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버가모 디오니소스 신전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교회(후 세라피스 신전)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세라피스(Serapis)

 

세라피스는 마케도니아 통치시기(BC.305-30)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신이다.

그는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곱슬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멤피스의 아피스 수소에 대한 예배에서 유래한 세라피스 숭배의 주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의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에 있었던 세라페움(Serapeum : 세라피스의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적적인 치료법을 찾아나선 순례자들을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세라피스는 첫째로 질병의 치유자이며, 운명을 초월하는 신이고,

오시리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격을 계승한 신이다

 

 

버가모교회

 


버가모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버가모  심리치료하던 텔레모스 신전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버거모왕국(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
 

버가모 아크로폴리스의 대형극장



[성지자료] 골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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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

 


골로새 전경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에서 찬 약수가 라오디게아로 가는 수로

 

현재명은 Honas이다.  바울 당시보다 수 백년 이전에, 골로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어키)의 주도적인 성읍이었다. 골로새는 루카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게해 해변이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동서의 큰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골로새는 제 2류의 상업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그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3 참조)에게 세력이나 중요성에 있어서 오랫동안 눌려왔었다. 주요 산업은 직물업으로 '골로시누스(colossinus)'라는 직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해안에서 동쪽지방으로 이어주는 무역로는 이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주변에 살고있었다(성전세를 낸 수치를 기준하면 약 7,500명의 유대 자유인이 이 주변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골로새가 중요시된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 에바브라가 회심하여 복음을 골로새에 전달한 사실 때문이었다(1:7,8; 행 19:10 참조). 이때 아직도 연륜이 오래 되지 않은 이 골로새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에바브라나 바울에 의해 개종된 다른 어떤 신자의 노력 결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떤 것들은 가정 교회였다(4:15; 몬 2절 참조). 그런데 그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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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서의 무대였던 ‘가이사랴’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해양 도시 가이사랴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풍광이 어우러져 수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2000년 전 헤롯왕은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이곳을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지었다. 이곳의 항구는 지형물을 이용하지 않고 지은 인류 최초의 인공 항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헤롯왕은 가이사랴 외에도 예루살렘성전, 마사다 요새 등 여러 건축물을 지어 ‘위대한 건축자’라는 별칭이 있다. 과거 가이사랴는 300척의 배를 한 번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항구 도시였다. 이때문에 가이사랴는 유대 지역에서 지중해의 로마 각지로 가는 관문 도시 역할을 했으며 로마가 직접 파견한 유대의 총독이 머무는 국제 행정의 중심지였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 벨릭스, 베스도 총독들의 근무지가 바로 이곳이며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첫 출발지이자 복음 전파의 장소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자 가이사랴로 피신했다(행 9:30). 또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총독 벨릭스가 두려워했던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행 24장).

 신약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는 이 도시의 백부장이자 로마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침례를 베풀었는데 그가 바로 백부장 고넬료였다(행 10장). 지금의 가이사랴에 가면 발굴, 복원된 유적들을 통해 방문객들의 시간을 2000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기둥과 거대한 조각상들의 파편, 모자이크 장식이 된 바닥을 통해 과거 화려했을 궁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펼쳐지듯 전차 경기장과 원형경기장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영화에서처럼 검투 경기가 열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됐다고 한다. 유대 땅에 로마식으로 건설되어 로마의 문화로 가득했던 가이사랴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복음의 중심지가 되어 이스라엘과 로마, 열방의 영적인 전초기지가 됐다. 수많은 역사의 반전 속에 현재 가이사랴에서는 원형 극장에서 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찬양하는 기독교 순례객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이사랴(이스라엘)=글 복순희 / 사진 김용두 기자

 


카파도키아(Cappadocia)신이 내린 절경? (4)










카파도키아(Cappadocia)신이 내린 절경? (3)







카파도키아(Cappadocia)신이 내린 절경? (2)

 


 

 





카파도키아 (옛지명)  [Cappadocia]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

타우루스 산맥 북쪽의 고원에 있었던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자 속국이며

나중에는 로마의 속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카파도키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6세기의 문헌이다.

그당시 카파도키아에서는 봉건세력이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지역은 로마에 점령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성격을 유지했다.

 

 

 

 카파도키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신이 만든 예술의 경지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은 터키 최고의 관광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드넓은 계곡지대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수백만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m)에서 용암이 분출 되면서이곳의 지형이 형성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바위를 깎고 동굴을  만들어 주거공간을 마련하여 생활하였습니다.

 

 

 

이러한 동굴 주거공간은 많은 잇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우선 그리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쉽게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데 첫번째 잇점이 있었고,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충분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적들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고입구가 높은 곳에 있어서 적들이 쉽게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괴레메 (Goreme)

카파도키아 관광의 중심으로이 일대가 전부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카파도키아를 다 본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카파도키아의 인근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 매우 용이하여카파도키아 투어의 시발점이 되는데,

우치사르 정도는 가뿐히 걸어 갈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괴레메의 전경

 

괴레메의 전경

 

 

괴레메의 전경

 

괴레메의 전경

 

 

 

 괴레메 야외 박물관 (Goreme Open-air Museum)

괴레메 벨리중 가장 인기있는 곳으로거주가들이 바위를 깍아 만든 교회에는11~12세기 경 의 프레스코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식당, 무덤 등 볼 것이 많은 곳입니다.

 

박물관을 둘러보거나프레스코화가 아름다운 수도원이나 박물관 주변을 걸으며하루를 보내는 건 환상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수도원들 중에는11세기 초에 지어진 6층 규모의 수도원(Maidens Monastery)을 시작으로성 바실 교회(St. Basil church),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인 사과 교회(Apple church),성 바바라 교회(St. Barbara church),뱀 교회(Snake church),샌들교회(Sandle church) 등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 (1)

 

 신이 내린 절경?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앙의 고원지대를 말한다.

 

기원전 6세기께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때에 생긴 작은 왕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말을 키우던 '말의 땅'이란 뜻을 갖고 있다. 카파도키아의 유명세는 경이로운 자연에서 나온다.

남근 모양의 바위기둥 계곡과 거대한 지하도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에는 자연의 경이와 인간의 종교적 신념이 한데 어우러져 빚은 걸작이 숨겨져 있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한 카파도키아는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고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네브쉐히르 위르굽, 괴뢰메, 우치사르 등 남한의 4분의1 크기(2만5000㎢)의 땅이 우후죽순 격으로 솟은 버섯바위들로 채워져 있다.

 

 

이 기묘한 바위들은 화산과 비바람에 의해 형성됐다.

카파도키아는 300만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화산재가 고원지대에 두툼하게 쌓여 응회암층을 형성했다. 이 응회암층은 단단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지하수와 비바람에 침식되면서 무른 부위는 깎여나가고 단단한 부분만 살아남아 지금같은 버섯이나 죽순모양의 기암군이 형성됐다.

 

 

파샤방[ 세쌍둥이 버섯바위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연출한 신기한 형상에 한 가지 기이를 더 보탰다.

버섯 모양의 바위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았던 것이다. 이곳의 버섯바위들은 마치 골다공증에 걸린 환자의 뼈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 구멍들이 모두 인간이 거주했던 흔적이다. 이런 암굴집은 기원전부터 유래가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도 사람들이 이 버섯 모양의 집에서 살았다. 카파도키아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의 자연과 문화 복합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카파도키아 동굴유적지 벽화

카파도키아 사람들이 암굴을 파고 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자연적인 요건을 따져보면 바위가 무르다는 것이 큰 이유다. 이곳의 바위는 화산재가 쌓여 만든 응회암이라 쉽게 굴을 팔 수 가 있다. 또 황량한 고원지대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를 구할 수 없는 것도 한몫을 했다

 

 

 괴뢰메와 카파도키아는 본래 같은 지역이다.

터키인들은 이 일대를 통틀어 괴뢰메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카파도키아라는 왕국이 있었기 때문에 카파도키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아나톨리아 중부의 황량한 화산 지대로 선사시대 때부터 화산 활동이 활발하여 화산재가 많이 퇴적되었다. 그리고 그 때 형성된 응회암층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침식되면서 버섯이나 죽순 모양의 기암이 되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예전의 소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Kapadokya)에 해당된다.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카파도키아는 실크 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대상 행렬이

 근대까지 이어졌다.

 

 

 

 

 

이 석굴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와 다를 바 없는 십자 형태의 구조를 하고 있거나

 둥근 천장을 가진 곳이 많다. 교회의 프레스코화는 보존 상태가 좋을뿐더러 내부의 장식이 아름답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카파도키아 (옛지명)  [Cappadocia]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

타우루스 산맥 북쪽의 고원에 있었던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자 속국이며

나중에는 로마의 속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카파도키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6세기의 문헌이다.

그당시 카파도키아에서는 봉건세력이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지역은 로마에 점령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성격을 유지했다.

 

 

 



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이스라엘 성지순례 이모저모


주님 발자취 따르는 은혜의 여정
성경 속 ‘그곳’에서 온몸으로 말씀을 체험

 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이스라엘 성지순례단은 4∼10일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한 성지를 방문해 관련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을 했다. 성도들은 성지순례 중 가슴 벅찬 은혜의 감동으로 신앙고백을 하는가 하면 우리와 문화와 지형적 차이로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성경의 말씀들을 새롭게 깨달으며 깊은 신앙으로 한걸음 더 깊숙이 전진했다. 순례단은 이스라엘 도착 첫날 사도 바울이 사로잡혀 로마로 압송된 출발지 가이사랴를 시작으로 갈멜산 므깃도 갈릴리 바다 주변의 가버나움 벳새다 광야 티베리아(디베랴) 및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유대광야 여리고 쿰란 예루살렘 등을 방문했다. 특히 성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랐던 비아돌로로사 길을 직접 십자가를 지고 걸으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도 했다.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는 6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바다와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인 벳새다 들판에서 드려진 선상예배와 성찬예배였다. 6일 아침 화창한 날씨 속에 ‘보케르 토브(좋은 아침입니다) 욤 토브(좋은 하루입니다)’라는 인사로 성도들 앞에 선 이영훈 목사는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영훈 목사는 “이 장소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갈릴리 바다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물을 던지는 사람과 같다”라며 “그물을 던진다는 것은 나의 삶의 목적을 위한 노력이다. 그 노력에 아무 결실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빈 배 인생이 될 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고 역설했다. 성도들이 ‘아멘’으로 크게 화답하자 이영훈 목사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빈 배 인생이 아니라 풍성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갈릴리 바다에서 북서쪽으로 3㎞ 떨어진 벳새다 광야에서 진행된 성찬예배에서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영훈 목사의 주재로 성찬식이 거행됐다. 문화선교위원회 어린이 합창단 드리머콰이어의 아름다운 음성이 벳새다 광야에 울려 퍼져나갔다. 성도들은 이스라엘 국민빵 ‘피타’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곽영애 집사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장소에서 성찬을 하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성지순례에 참석한 성도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정화하신 의미를 되새기며 이스라엘 수도인 예루살렘 거리 청소에 나섰다. 승천교회에서부터 감람산 전망대까지 선두에 선 이영훈 목사는 “오늘 행사는 처음 성전이 있던 거룩한 이곳에서 쓰레기를 주울 때 이 땅이 깨끗해지도록 기도하면서 더불어 우리 마음도 깨끗해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청소에 동참한 안정복 장로는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더욱 성경에 대해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교회 창립 60주년 이스라엘 성지 순례 >
예루살렘(이스라엘)=글·복순희 / 사진·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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