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야훼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습 2:7)
이스라엘에 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지를 방문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는 성경에 나오는 곳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곳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스치듯 보거나 아예 지나쳐버리는 곳도 많다. 아쉬켈론(Ashkelon)은 그런 곳들 중 하나이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멋진 풍경을 가진 도시이자 유적지이지만 성경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나 싶은 낯선 지명과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가자에서 가까운 위치여서 더더욱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아쉬켈론은 한글 성경에서 ‘아스글론’으로 씌어 있다. 성경에는 블레셋으로 불리는 지역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골리앗이 속한 군대가 블레셋 연합군이었다. 블레셋은 지역 이름이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이란 도시가 위치하던 지역을 블레셋이라고 불렀다. 블레셋은 5개 도시국가가 연합한 지역을 통칭하던 말이고 그 지역에 살던 이들을 블레셋 사람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이 다섯 도시는 현대 이스라엘 속에 존재한다. 유적지와 함께 현대적 도시들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스돗은 아쉬돗(Ashdod), 아스글론은 아쉬켈론(Ashkelon), 가드는 갓(Gath), 에글론은 에크론(Ekron)이란 이름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시이자 휴양지였던 가사(현대의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통치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아쉬켈론과 다른 네 성읍이 블레셋이라는 연합민족적 형태를 띨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아쉬켈론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푸른 파도가 몰아치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있던 이 도시는 지중해를 통한 무역으로 말미암아 번성했다. 대국들이 앞다투어 점령하려고 했던 많은 항구도시들 중 하나였지만 위로는 욥바, 아래로는 가사 덕에 커다란 피해 없이 자신들의 도시를 잘 보존할 수 있었다. 다른 유적지와는 다르게 정복자의 층(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제국들이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층이 생겨나게 된다. 므깃도 요새의 경우 27개 층이 존재한다)이 거의 없다. 다만 이제는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흔적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대신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쉬켈론은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호수아의 정복시대부터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아쉬켈론은 번영의 도시였던 만큼 우상화가 크게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무역항이었으므로 부가 넘쳐났다. 그래서 멸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삼손은 자신이 결혼하게 된 블레셋 여인의 친구들과 내기하여 지자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길에서 지나가던 이들을 때려눕히고 뺏은 채색 옷을 주었다고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스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내쫓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 가시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친 후 잠시 주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다윗이 정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 도시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쉬켈론은 가장 오래된 과거로는 가나안 시절 주전 1400년 전부터 시작해서 가장 근대인 오스만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도시이다. 그 사이 무려 8차례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도시 자체의 번영은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아쉬켈론은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잘 정리된 도로와 아름다운 해변은 많은 이들에게 휴양지로서 찾아오게 만든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많은 제국들이 거쳐가며 사람들이 오고갔지만 그 도시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고 모든 문화를 품어 왔다. 지금도 유적지를 가보면 가나안 시대의 성읍을 시작으로 로마 비잔틴 시대, 십자군의 주둔 터와 오스만제국의 성벽 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각자가 아닌 하모니를 이루면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아쉬켈론은 근대사에서도 흥미로운 곳이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난 주후 90년 이후 아쉬켈론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이 살았고 아쉬켈론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전에는 유대 땅이라고 불리던 지역)에서도 거의 몇 안되는 유대인들에게 친절한 곳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이주하던 유대인들은 아쉬켈론과 가자 인근으로 많이 이주해 살았다. 이는 마치 예언서에 등장한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현대의 아쉬켈론은 지금 가장 뜨거운 감자인 가자지구와 가까이 있으면서 이전에는 화목했던 모습을 추억이라도 하는 듯이 번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스라엘에 살면서 자주 캠핑을 다닌다. 이는 현지인들과 쉽게 만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자연과 그 지역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북쪽부터 남쪽까지 자주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캠핑을 하면서 역사 속에 자리잡고 앉아 성경의 이야기와 역사의 언저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멋진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으며 현재의 갈등과 고뇌 속에서도 의연히 피어나는 삶의 모습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다보면 분쟁의 땅 가자지구가 보인다. 하지만 아쉬켈론은 평화로운 파도만이 일렁인다. 과거 유적지를 바라보면서 이루어진 고층 아파트와 아름다운 집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안식처이며 모두의 휴식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진정한 휴식처가 되기 위한 평화와 공존의 길은 언제쯤 이어질까? 저 바닷길로 가자와 아쉬켈론, 아스돗과 욥바까지 이르는 길이 이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에 들어 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 뒤 쪽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분쟁이 심한 땅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국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국가 팔레스타인이 항상 ‘서로의 평화’를 주장하며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해발 800m에 있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하며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남아있다.
지난 5월 14일 미국이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난 6월 7일 이스라엘 정부는 전 세계 600명의 종교 정치지도자들을 초청, ‘예루살렘평화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 뒤 찾은 곳이 ‘통곡의 벽’이었다. 유대인들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봤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빼앗아 왕국의 수도로 삼고,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뒤 유대인들의 영원한 수도로 자리잡았지만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참히 파괴됐다.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2000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예수님이 이미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절)고 예언한 일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점령하여 살았다.
성전이 파괴된 뒤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일이 금지됐다. 그러다가 비잔틴 시대(306∼1453)에 와서야 그들은 한 해에 한 번 아브월 9일(성전파괴일)에 성벽에 올라와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 없이 방랑하는 자신들을 생각하며 통곡했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벽’이다. 예수님의 예언이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수 천 년 역사를 간직한 통곡의 벽은 바닥에서부터 7단까지만 헤롯 시대(주전 20년) 성전의 벽이고, 그 위로 4단은 7세기에, 나머지는 16세기에 쌓았다.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회복한 뒤 전 세계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어 어린아이들과 랍비들이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통곡의 벽에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은 ‘키파’라는 조그만 모자로 머리를 가린다. 여자는 어깨와 무릎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린다. 기자가 간 그날도 유치원 어린이들이 선생님과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사진을 찍었다. 유대인들과 방문객들이 벽 앞에서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통곡의 벽을 뒤로하고 ‘히스기야 터널’로 향했다. 히스기야는 주전 700년경 남유다의 14대 왕이다. 1880년 물에서 놀던 한 소년이 발견한 이 터널은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 밖의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었다. 히스기야는 당시의 기술로 돌산을 뚫어 533m의 터널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이 산헤립에 포위되어 있을 때도 급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500m 이상의 암벽을 파낸 터널공사는 당시로선 대공사였다. 게다가 직선이 아닌 S자 곡선의 터널로, 양쪽에서 출발해 암벽을 파 들어가다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는 공법을 선택했다. 그 기술력이 놀랍다. 히스기야는 이 터널로 말미암아 적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대하 32:30).
‘통곡의 벽’에서 울며 기도한 끝에 2000여 년 만에 독립국가를 세운 유대인들을 생각한다. 수백 미터 지하로 물길을 내어 민족을 구한 그들의 역사를 또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에 물결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한다. 예레쯔(땅)는 사람과 민족과 국가의 터전이다. 예레쯔를 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사진설명=히스기야터널이 뚫린 것을 기념해 일꾼들이 당시의 기쁨을 적어놓은 실로암 비문. “…(터널)이 관통될 때…여전히 3규빗 정도 남았을 때 반대쪽에서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를(들을 수 있었고)…그리고 터널이 맞뚫렸고, 돌 깨는 사람들이 돌을 팠고,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가레는 검다라는 뜻이고 켈리써는 교회라는 뜻인데, 그 교회 내부가 검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예수의 12제자중 하나인 다대오의 묘지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우루미에 공항에서 약 250Km 북쪽에 있는 마쿠라는 도시 남쪽 약 7Km 지점의 산중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마다 7월 25일 ~ 28일 까지 3박4일 동안 전세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곳에 와서 참배를 하는데 산중이라 숙박시설이 없으므로, 약 8,000명에서 10,000명 정도가 텐트를 치고 머문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아르메니아 왕이었던 업커르가 중한 병이 들었는데 예수라는 분이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아르메니아로 초대했는데 예수께서 제자 중 한 사람을 당시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얕씨어로 보내겠다는 답변을 하고 다대오를 보냈다.
다대오는 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왕의 병을 고쳤고, 이로 인해 업커르 왕뿐 아니라 얕씨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업커르 왕이 죽자 그의 누이의 아들인 써너다룩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도 그의 딸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배교를 하고 다대오에게 전도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물론 다애오는 그의 명령에 불복하여 왕명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처형 당시 그 시신을 안장한 자리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의 시신이 강단의 우편에 위치하도록 세웠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의 유대 산악지대에 발달한 도시로 인구 약 40만명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재 수도이자, 고대 이스라엘 및 유다 왕국의 도읍지입니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이곳을 유대인의 도읍으로 정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건설한 이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매료시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회교도에게 있어서도, 기독교도에게 있어서도 성스럽고 그리운 도시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곳을 자기네들만의 것으로 삼고자 다투어 왔습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인데도 인간의 야망과 증오 사이에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과거와 현재가 잘 조화된 불가사의한 도시입니다. 유대산을 향하여 카스데르의 긴 언덕으로 올라가면 눈앞에 도시가 펼쳐집니다. 엷은 베이지색의 예루살렘은 베이지색의 돌 건축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영국의 위임통치시대의 시조례로부터 지금까지에도 이곳 특유의 베이지색 돌만을 사용하여 짓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혼녁이면 온통 이 엷은 베이지색의 도시 건축물들은 황금빛으로 빛납니다. 예루살렘은 구도시(Old City)와 신도시(New City)로 나누어 불려지고 있는데, 구도시는 3000년전 이래의 고대도시 흔적 위에 서기 16년 오토만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에 의해 세워진 성벽 내의 도시로 유태인, 기독교, 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며, 여기엔 성전산, 예수님무덤교회, 통곡의 벽, 바위 사원, 성안나 교회, 다윗 성채, 가야바의 집터, 최후의 만찬기념 교회, 마리아 기념교회, 다윗왕의 무덤, 베드로 통곡기념 교회, 안토니아 성, 아르메니아 교회, 엘 악사 회교사원, 예루살렘 역사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신도시는 구도시 서편에 발달된 신시가지로 이스라엘 국회의사당, 정부 관공서, 히브리 대학교,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등이있는 지역입니다.
예루살렘 북쪽 기드론 골짜기에는 제1신전과 제2신전시대의 무덤들이 많습니다. 그 중 성 밖 남동쪽에 위치한 무덤과 기념비가 있는데, 이곳이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의 무덤과 기념비입니다. 계단을 포함하여 모든것이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그 예술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체 높이가 18.5m입니다.
감람산 정상에 위치한 회교경당으로 예수님 승천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AD 383년 귀족출신 포이메니아가 소성당으로 봉헌하였고, AD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후, AD 676년에 재건되었으며, AD 1009년 하킴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AD 1152년 십자군이 팔각형의 교회를 다시 재건하여 아드스딩 수도회가 사용하고 있던 중, AD 1198년 살라딘이 회교경당으로 개조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회교경당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다윗시대의 예루살렘성을 의미하며 시온성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성으로 모리아산에서 기드론 골짜기 서쪽 언덕을 따라 실로암 연못까지 이르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에비스인의 요새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설한 곳으로 예루살렘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입니다. 이곳은제1신전시대의 성벽 흔적인 느헤미아 성역 등 많은 유적이 발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85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성전이 있던 장소에 세워진 8각형의 황금색의 둥근 지붕의 회교건물로서 서기 691년 압델 말릭에 의해 세워졌으며, 돔 한 가운데의 나무에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쳐 번제제사를 지내려던 장소라 전해지는 곳입니다. 돔의 내부는 대리석 기둥들이 바치고 있는데, 그 기둥의 색깔, 높이, 두께 등 모두 다릅니다. 그 이유는 이 기둥들이 비잔틴이나 로마시대 신전의 것으로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람산에서 게세마네로 내려오는 중간지점에 있는 눈물방울 형태를 지닌 교회로서, 6세기경 비잔틴 양식의 소성당 위에다 1955년에 건축한 프란시스꼬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있는 위치는 교회 안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이 똑바로 눈을 들면 예루살렘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붕괴를 예언하였고,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마치 암탉이 날개 밑에 병아리들을 모으듯이 나는 너희들의 아이들을 몇 번이고 모으려고 할 것이다 라고 한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듯 교회제단에는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지붕의 회교사원입니다.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멀리 떨어진 성지라는 뜻에서 엘 악사(멀다)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엘 악사 사원은 원래 비잔틴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만든 것인데, 그 후 지진 등으로 훼손되어 수차례 수리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06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있고, 스테인 글라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서기 375-395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건축된 교회었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입시 파괴되었으며, 8세기에 지진으로 또다시 파괴되었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1919년에 세워진 것으로, 가능한 한 옛 모습을 재현코자 했기 때문에 4세기 종반의 바실리카 모양이나 비잔틴시대의 모양과 벽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한편 이 교회는 여러나라에서 보내 온 헌금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만국민의 교회'라고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동쪽, 스코푸스산 남쪽에 이어져 있는 해발 825m의 전망 좋은 산으로 이른 아침에는 태양빛을 받은 도시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저녁에는 시온산 맞은 편으로 가라앉은 태양의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올리브산은 구약성서의 사무엘기에 다윗왕이 예배드린 장소로 솔로몬이 자신의 이방인 아내들을 위해 우상을 제사드린곳으로 기록되어있으며, 이곳엔 주가 울었던 교회, 주기도문 교회, 예언자의 무덤 등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말을 따서 지은 교회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이며, 이세상 말기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해서 설파하신 곳이라 전해집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예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감람산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공시 파괴되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교회 또한 회교도에 의해 파괴되고 맙니다. 현재의 교회는 1875년 프랑스에서 카톨릭의 카르멜파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같이 건립한 것으로 수녀원 건물벽에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세계 62개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 놓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의 길까지를 의미합니다.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관저에서 예수는 형선고를 받았으며, 채찍아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14번을 멈추었던 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문(다윗의 문)밖이 시온산입니다. 이곳은 제2성전시대의 예루살렘 윗쪽의 도시남단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구약성서에 이 지명이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예루살렘이나 성지를 일컫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시온산에는 다윗왕의 무덤, 최후의 만찬장소, 마가의 다락방, 성모 운명장소, 베드로 통곡교회 등의 유적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지방과 이집트를 잇는 중간지역으로 예루살렘 남쪽 7Km에 위치한 아랍도시입니다. 예수님이 나신 장소로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 곳이며, 크리스마스철에는 순례객들로 발디딜 틉이 없을 정도입니다. 베들레헴은 AD 330년 콘스탄틴황제에 의해 세워진 후 십자군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에 이르는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곳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는데, 아이가 없는 유대교 여자들이 자기처럼 아이가 없던 라헬이 임신한 것을 본받으러 자주 찾아가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이방의 여인과 로맨스가 기록된 보아즈라는 사람이 살았으며, 바로 이 보아즈의 자손이 다윗왕이 되었으므로 다윗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교회에서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양치기의 들(Shepherds'Field)을 볼 수도 있습니다.
남북의 길이 21km, 평균폭 12km, 수심 210m수면높이 해수면 이하 약200m의 이 호수는, 그 모양이 옛날 현악기 중의 하나인 입금(立琴:키노르kinor)과 같이 생겼다하여 히브리어로 긴네렛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아름다운 경치와 비옥한 토양이어서 여러 도시들과 키부츠들이 들어서 있으며, 호숫물은 이스라엘 땅의 중요한 식수원이며 생명선입니다.
또한, 갈릴리 호수는 예수복음 선교활동의 중심지입니다. 대부분의 예수 제자들이 이 곳에서 부름을 받았고, 베드로가 살았던 곳도 이곳 갈릴리 호수변의 가버나움 마을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던 장소도, 그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바로 이 곳의 연안이요, 언덕이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호수 주변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많은 인구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르몬산 아래 단(Dan)과 인접한 샘이 솟는 장소로 그리스의 한 신인 판(Pan)의 이름을 따서지은 지명이었으나, 훗날 로마인들에 의하여 가이사리아 빌립보라 재명명된 지역입니다.따라서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판(Pan) 신의 사원이 있었으며, 바위를 파서 만든 제단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가이사리아 빌립보는 헤롯 빌립에 상속되었던 지역이었습니다.
무깃도는 애급에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는 바닷길(비아마리스:Via Maris)목으로 이즈르엘 평야 중에서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제국의 군대는 이곳을 통과하여 지날갈 수 밖에 없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솔로몬왕은 무깃도의 중요성을 감안 이곳을 강화시켰고 이지역을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서기913년경 애급의 시삭은 무깃도를 파괴하고, 이후 아합왕때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유대왕 요시아가 북진하는 애급군대를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며 최근인 서기 1917년 영국의 알렌비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무깃도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은 무깃도라는 히브리말은 히랍어로 옮긴 말입니다. 무깃도는 1925-1939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그 실체가 들어났는데, 이 곳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식신전, 솔로몬의 마굿간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무깃도는 이집트의 기원전 15세기 문서에 언급된 도시로 헬라시대에 쇠퇴되었습니다.
갈릴리 북서쪽 호숫가 요르단강 서쪽 4km에 위치한 고대도시로 나훔 예언자의 마을이라고도 알려지고 있으며, 예수님의 갈릴리 복음 전파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곳은 성서에 예수 이전부터 아코에서 다마스커스를 지나 바빌론으로 통하는 중요한 중계지역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수가 이 도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수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는 4세기경 예수님 당시의 검은 현무암 기초 위에 세워진 유대교 회당의 유적이 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발굴한 베드로의 집 유적 위에 세워진 배모양의 아름다운 베드로 교회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대도시와 유대회당의 폐허가 발굴된 곳입니다. 이 곳에서 발굴된 '모세의 의자'는 현무암을 깍아서 만든 돌의자로, 모세가 율법을 낭독할 때 쓰던 의자로서 원본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고대도시의 발굴 유적지로, 5세기 비잔틴 교회의 유적과 선착장 시설이 잘 발굴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비옥한 농경지 이스르엘 평야 가까이에 있는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도시로 처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한 곳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나사렛으로 돌아와 생활을 시작합니다. 예수는 전도활동을 펴기까지 30년동안 이곳에서 목수의 아들로 지냈습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 베들레헴과 더불어 전세계의 순례객들이 주로 찾는 성지입니다. 나사렛에는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부탁으로 마리아의 집터에 교회를 세웠으나 이후 7세기에는 회교도의 점령, 11세기 십자군의 침공, 살라딘의 역습등으로 무수한 붕괴와 재건을 되풀이 했으며, 오스만터어키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17세기부터 비로소 프란체스꼬 수도사들이 나사렛에 사는것을 허락되면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사렛에는 회교도와 크리스챤이 반반씩 사는 인구 4만여명의 이태리풍 도시입니다. 나사렛은 '크리스챤'이라는 말로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사렛의 주요 순례 명소로는 마리아가 예수 수태를 고지받은 동굴위에 세워진 "수태고지교회"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목공일을 했던 곳에 세워진 성요셉교회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유대교의 시나고그에서 구약성서 이사야 서의 메시아 강림에 관한 부분을 낭독하고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말했던 장소인 '시나고그교회'와 마리아가 물을 길었던 마리아 우물 등이 있습니다.
갈리리호수 북쪽 가버나움 부근에 위치한 장소로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행하셨다는 지역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베네딕 또 수도회의 교회와 베드로 수위권을 기념하는 프란치스꼬 수도회교회가 있습니다.
이즈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해말 588m의 종모양을 한 산으로 다볼산 정상에는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에 서기 1921년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변화(Trasfiguration)를 기념하고 있으며, 십자군시대의 성벽과 건물의 유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리이스 정교회의 엘리아 기념교회도 정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남서쪽 연안과 경사진곳에 발달한 인구 약3만의 도시로서 많은 호텔과 온천이 있으며 이곳 갈릴리 호수지역 리조트산업의 중심지입니다. 기원전 20년경 헤롯 안디바드리에 의해 처음 건설된 도시로 당시 로마황제인 아우구스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곳엔 십자군시대의 베드로교회가 해안에 있으며 랍비 아키바와 람밤등 유대교 학자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이 망한뒤 유대문화의 중심지로서 200년 무렵에는 랍비 유프타 하나에 의해 성전 미시나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400년경에는 예루살렘 탈무드도 이곳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3장 1절에는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회개의 멧세지를 외치는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디베료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이며,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마다 언급하게 되는 이름이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들은 누구인지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아구스도(Augustus) 디베료(Tiberius) 가이오(Gaius, Caligula) 클라우디오(Claudius) 그리고 기독교에 큰 핍박을 가한 인물로 유명한 네로(Nero) 등으로 이어집니다. 네로의 핍박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였습니다. 디베료부터 네로에 이르는 이들 황제들을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릅니다. 앞의 네로 이후에도 여러 왕조의 황제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살펴보려는 디베료 가이사는 다른 발음으로는 티베리우스로서 황제가 되기 이전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Tiberius Claudius Nero)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의 그의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Tiberius Caesar Augustus)입니다. 필자가 방문하였던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변에는 티베리우스라는 도시가 남아서 그의 이름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당하실 당시의 황제였습니다.디베료 가이사는 로마 제국의 두 번째 황제였고,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사는 대부분 이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양자로서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당시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눈에 들어 황제의 부인이 된 관계로 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후계자로 지명되기에 이릅니다.그는 당시 세계 최대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중과세를 하지 않고도 많은 세금을 걷을 정도로 경제에 대해서 식견이 있었지만, 성격적으로는 의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이었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A.D. 37년 카프리 섬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정신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근위부대장이 죽였다고도 합니다.
유대의 총독으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인물로 유명한 본디오 빌라도는 라틴식 발음으로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로서, A.D. 26년에 임명받아 10년간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대리자로서 속국의 정치, 사법, 군사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유대의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식민지의 최고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에 겁을 먹고, 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총독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준 7년 후에 그는 로마로 소환 당하여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빌라도는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자살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자살 장소는 여러 곳이 전해집니다. 그 중에 두 가지는 오스트리아의 ‘빈’(Wien)으로 추방되었다가 거기에서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스위스의 루체른(Luzern) 남쪽에 있는 한 산에서 호수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산을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따서 필라투스(Pilatu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에페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도미시안 신전
에베소 유적지 도로
에베소 병원터(아스클레피온 신)
오데온(Odeion) 소극장
오데온(Odeion)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로 소극장이라고 도한다. 에베소의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베소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 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영원히 꺼지면 안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관리가 되었다.
에베소 아데미 신전
에베소 트라얀 황제 신전(우물)
쿠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황제 숭배신전
에베소 티베리우스 황제 신전
에베소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흉상
로마시대, 2세기, 빌라 몬타르도, 이탈리아 , 그리스산 대리석, 높이 61 , 대영박물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의 통치기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공격적인 대외확장정책을 편 직후에 해당되며, 로마제국의 평화적 통합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북방 야만족으로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일명 하드리아누스의 벽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으로서도 중요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방방곳곳을 순례한 여행자로, 또 그리스문화의 애호가로서도 잘 알려져있다. 로마황제로서는 처음으로 턱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철학자적 풍모 또는 그리스식 스타일에 대한 그의 추종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드리아누스의 스타일은 로마제국 전역에 유행했다.
로마에서 발견되었으나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흉상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린 황제의 영웅적인 나신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아한 머리칼과 수염 처리는 주로 조각끌로 처리되었다. 새겨진 홍채와 패인 눈동자 등의 눈 처리형식은, 초상 조각상에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형식이다.
에베소 셀슈스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아고라
아고라는 시장을 뜻한다. 대극장으로 가는 대리석 도로의 서쪽에 위치한 아고라(Lower Agora)는 네로 황제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아직도 발굴중이다. 이곳에서 3개의 문이 있다. 오데온 극장 건너편에 있는 아고라(Upper Agora)는 사방이 가로 세로 110 m로서 기원전 3세기 경에 설치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그 때 당시의 모든 여성들은 이곳에 꼭 한번 오고자 했다고 한다. 다른 시장터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신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Isis Temple)이 있다. 로마시대에 아고라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사람들은 밭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아고라는 기둥과 둥근 지붕형 구조로 만들어진 대단히 인상적인 곳이다. 시장터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2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에페스가 항구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 게이트는 대리석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물을 따서 지었다. 쿠레테스(크레테스)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에베소 음악당(극장)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 되겠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교회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스미르나 라고 하며 현재명은 이즈밀 이다. 터키 남부의 미항으로큰 도시이다. 현재의 교회는 아시아 7교회 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해 순교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잔학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숭배 거부로 서머나 교회는 많은 재정적 궁핍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머나교회는 모든 핍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열렬한 신앙을 지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서머나교회
교회 내부
교회 강단
폴리캅 감독
폴리캅 감독
화형당하는 폴리캅
서머나 교회는 105년경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맡고 있었다.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아우텔리우스 황제) 순교했다. 익나티우스가 순교한 후 약 반세기 후에 폴리갑이 순교했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삶을 증거했던 인물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아첨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었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바닷조개껍질이나 땅위에 박아 놓은 창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자 프리지아(Phrygia)에서 온 퀸투스(Quintus)는 사나운 짐승들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겁에 질려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라는 청년이 순교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영광스런 죽음을 본 군중들은 이 경건한 순교자의 용기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강건한 믿음에 놀랐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악인들을 제거하라. 폴리갑을 데려 오라” 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서도 폴리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그 도시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은밀하게 그 도시를 떠나라고 간청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농장으로 피신했다. 폴리갑은 몇 명의 친구들과 그곳에서 전 세계 모든 교회에 평화를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했다. 이것은 그가 항상 해 온 습관이었다. 폴리갑이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기도 중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불길 속에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적하는 무리들 때문에 폴리갑은 자기를 염려하는 형제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추적하는 무리들은 그곳까지 쫓아왔다. 무리들은 두 명의 소년을 붙잡아서 그중 한 아이에게 매질을 하면서 폴리갑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추적하는 무리들이 폴리갑이 있는 곳으로 왔을 때에, 그는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더 이상 피신하지 않았다. 폴리갑은 쾌활하고 온유한 얼굴로 추적하는 무리들에게 말을 건넸다. 폴리갑을 본 적이 없는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선 사람은 굳건하고 장엄한 얼굴한 노인이었으며, 이처럼 훌륭한 노인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했다. 폴리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마음껏 먹도록 청했다. 그리고는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허락해 주었다. 폴리갑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들,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무리들은 폴리갑을 나귀에 태우고 서머나 시로 데려왔다. 그 날은 큰 안식일이었다. 폴리갑을 맞은 헤롯 왕과 그의 부친 니세테스(Nicetes)는 폴리갑을 자기 마차에 태운 뒤,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가이사를 신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제사를 지내어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해로운 일이냐?”고 말했다. 폴리갑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끈질기게 권면하자 폴리갑은 “나는 당신들의 충고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헤롯왕은 폴리갑을 저주하며 마차에서 밀어버렸다. 폴리갑은 허벅다리를 삐었지만 그는 꽂꽂하게 걸어서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폴리갑이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 하늘로부터 “폴리갑, 강건하라! 대장부답게 싸워라!” 하는 음성이 들렸다. 경기장이 너무 소란했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들은 청중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형제들 중 다수가 그 음성을 들었다. 노령의 지방 총독 게르마니쿠스(Germanicus)가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말한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총독이 말한다.‘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갑이 대답한다.“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 뜻을 굽히지 않는 폴리갑을 향해 총독이 마지막으로 위협을 한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 시키겠소’ 폴리갑이 대답한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렇게 대답하는 폴리갑의 얼굴은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독의 위협에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총독은 전령을 경기장 한복판으로 보내어 ‘폴리갑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다’고 선포하게 했다. 경기장의 청중들은 열광하며, 아시아 의회원(Asiarch) 빌립에게 사자를 풀어놓아 폴리갑을 죽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빌립은 이미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경기를 마쳤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중들은 폴리갑을 산채로 태워 죽이라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상점이나 목욕탕으로부터 장작과 밀짚을 모아다가 단을 만들고 폴리갑을 그 위에 세웠다. 그들은 폴리갑을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그 분은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이요.”그들은 못을 박지 않고 그냥 말뚝에 묶었다.
폴리갑이 마지막 기도를 한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게 하시어 내 놈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은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배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열납될 만한 제물로 당신 앞에 드려지기를 소원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갑이 기도를 마친 후 집행인들은 불을 붙였다. 폴리갑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우리의 형제들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을 때 우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불꽃은 마치 바람을 맞은 돛처럼 아치형태를 이루어 순교자 폴리갑의 육체를 담처럼 에워쌌습니다. 그 한 가운데 선 폴리갑의 몸은 전혀 불타는 육체 같지 않았습니다.
폴리캅이 고문당하던 곳, 파고스 언덕
총독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기만 하면, 파고스의 언덕에 있는 경기장에 몰아넣어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해 버렸다. 서머나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듯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서 주님께 충성을 다했다. 폴리갑은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한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이다.
폴리캅이 고문당하던 장소
서머나 지역에서 발굴된 동전에는 로마 신전과 로마 신전과 티베리우스 신전, 하드리안 신전, 티케 신전, 네메시스 신전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황제들에게 서머나의 충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황제의 모습이 담긴 동전을 포함해서 티투스와 도미티안 황제에게 헌납된 것들이 있다. 그리고 도미티안과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안 황제의 동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트라얀 황제의 아버지는 수도를 건설하였고AD.102 - 112년에 지방 총독 베비우스툴루스가 이 수도를 다시 보수했다는 몇 개의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서머나에 있는 유적으로는 기원전 2세기에 건축된 시장터인 아고라, 폴리갑이 순교한 파고스의 언덕으로 알려진 카디페 칼레가 있다. 성지 순례객들은 폴리갑 기념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주후 1600년경 프랑스 교구에서 폴리갑을 기념하여 기증한 것으로 초대교회의 유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이 교회의 벽화에는 폴리갑이 로마군인들에게 연행되는 장면, 원형 경기장에서 화형 당해 순교하는 장면, 폴리갑이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익나티우스를 만나는 장면 등이 있어서 초대교회의 박해 역사를 회상해 볼 수 있다 BC.195년 서머나 도시는 로마황제의 숭배를 위해서 황제 신전을 세운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 최초의 도시였다. 1세기 후 로마군인들이 미트라다테스4세(Mithradates Ⅳ)와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서머나 공회는 서머나인들의 옷을 벗겨 사기가 떨어져 있던 로마인들에게 주었다. 키케로(Cicero)가, "서머나는 우리의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오랜 원조자다“라고 격찬할 만큼 서머나인들은 로마에 충성하였다고 한다. 서머나인들은 로마 황제의 숭배를 위한 신전을 세웠고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BC. 23년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한 신전 건설의 특권을 따냈고, 이로 인해 서머나는 로마 황제로부터 자치도시이며, 자유도시로 승격될 수 있었다. 그 후 이곳은 순회 재판이 열리는 등 로마의 중요한 정치적 도시로 변모해 갔다. 서머나 도시의 아름다움이 로마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이 계절에 상관없이 서머나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파고스 언덕에는 로마인들을 만족시켜주는 자극적인 경기와 연극들이 공연되었다. 휴양지답게 서머나의 모든 목욕탕과 술집 그리고 유곽들이 휴일도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로마인들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보다 자극적인 장사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 사람들의 주된 고민 거리였다. 서머나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알렉산더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신들의 도시로 만들었다. 서머나 곳곳에는 수많은 제단들이 만들어지고 제우스와 디오니소스, 키벨레(아데미), 게다가 황제의 신전까지 등장하여 서머나는 신들의 공원을 이루었다. 결국 서머나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요 황제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이곳 서머나인들의 로마 황제숭배는 티베리우스(Tiberius)황제를 숭배하기로 결정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티베리우스 다음 황제인 갈리굴라(Galigula AD.37-41)는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AD.81-96년에는 도미티안(Domitian)황제는 자기 스스로 ‘주와 신’이라 칭하면서 자신을 숭배치 않는 자들에게는 큰 핍박을 가했다. 이러한 환란 중에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결박되어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갔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로마제국 내에서 세계적인 상업도시였고, 포도주의 명산지로 유명했다. 영웅들만 마신다는 프람니안 포도주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키벨레 신전 바로 옆에서 만들어진 이 포도주는 호머에 의하면 마시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꿀과 함께 치즈와 빵에 발라먹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는 독특한 향기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서머나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포도주는 만들 때에 포도주 안에 꿀을 넣지 않고, 단지 두 잔의 포도주 원액에 다섯 잔의 물과 바닷물을 조금 가미해서 백묵가루와 대리석 가루를 섞어서 희석시켜서 만든다고 한다. 당시 헬라인들은 무엇이든지 혼합된 것을 좋아한 것 같다. 헬라어로 포도주란 오이노스(Oinos)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섞음”이란 뜻이다. 포도주는 취하기 위해서 마시기도 했지만, 두통이나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도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서머나 시내
서머나 옛 아고라 유적지
이 도시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향료인“몰약”이란 말에서 유례 되었다고 한다. 서머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이 도시가 “몰약” 이란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왜냐하면, 서머나에서는 “몰약”이 난 적이 없고, 지금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아마존족인 한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 언제까지나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인 이곳을 아내의 이름으로 ‘서머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머나(이즈밀)는 지금도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인구가 450만 명에 이른다. 항구 도시로서의 명성을 지금도 잃지 않고 있다. 서머나는 공업이 발전된 도시는 아니지만, 많은 물품들을 수출하고 있다. 서머나를 중심으로 한 에게 지역에서 생산되는 연초와 건포도를 비롯한 농산물, 그리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터키 대리석, 넓은 목초지에서 건강하게 자란 양들을 통해 얻어지는 가죽 등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서머나가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길게 뻗어있는 만과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쌓고 있는 두 개의 형제산인 시필산(Sipil)과 니프산(Nif)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부들은 시필산과 니프산 사이에서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바라보며 그물을 거둔다. 저녁에는 황혼의 아름다움과 함께 태양이 서머나의 바다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간다. 또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만은 항구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제공하여 이곳을 계속 상업도시와 휴양도시로 발전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서머나에 역사에는 아름다움을 격찬하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서머나는 아시아의 자랑,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단장, 그리고 아시아의 면류관이다”라고 했다. 루키안(Lucian)은 ‘서머나야말로 아시아의 영광의 도시요, 화려한 한편의 시와 같다.’고 표현했다. 역사가 스트라보는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하였다. 서머나를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서머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요, 이상적인 도시였다. 그곳에 세워진 많은 신전들은 사람들의 영혼에 안식을 주었고, 목욕탕과 마차 경기장들은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켜 주었다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에 들어 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 뒤 쪽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께서는 죽기 전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그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3차 종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이가 없었다.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 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사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 하였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 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 했다.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소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아데미 여신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신성시 하였던 신으로 처음에는 킬벨레 (Kylbele)라 불리웠다. 이 여신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쳐 로마와 메소포타미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섬기었다. 아랍인은 '라트'로, 이집트인은 '이시스'로, 그리스인은 아르테미스(사냥의 여신), 로마인은 '디아나'로 불렀으며 이오니아인들이 '아데미'라 불렀다. 처음 킬벨레로 불리울 때는 목신 상이었으며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이오니아 문명과 함께 아데미로 이름이 바뀌었고 땅과 다산을 상징하였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헬레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이었으며 최초로 완전히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었다. 이 신전은 일곱 번이나 파괴되었으나 항상 같은 위치에 재건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해변에 지어졌으나 후에 항구가 매립되어 지금은 바다에서 5km 떨어져 있다. 고대의 신전은 55 x 110 m 크기로 이오니아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에베소에 살던 헤로스트라토스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자 불태웠다고 한다. 후에 신전은 당초의 것과 매우 유사하게 재건되었는데 55 x 105m 크기로 대리석으로 된 토대 석 위에 13층의 계단과 2.7m 높이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인들은 다이아나 신전이라고 부르는 아데미 신전은 1860년대에 영국인들이 이곳에서 신전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 폐허를 발견하기까지 무려 육 년이 걸렸습니다. 소아시아의 모신에게 바치는 이 신전은 주전 천 년경에 세워졌습니다. 이 신전은 주전 350년 알렉산더 대제가 태어나던 바로 그 날 밤에 불에 타 파괴되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이 신전을 재건했는데, 길이가 108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입니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 가운데 이렇게 큰 건물로 처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부서진 조각만 갖고는 이 신전의 모양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다른 두 신전들을 통해서 아데미 신전이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데미 신전이 세워지기 100년 전쯤에 세워졌습니다. 건축학적으로 두 신전은 매우 흡사하게 지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었던 신전은 그 규모가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나 되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46개의 기둥이 있는 반면, 에베소에 있던 아데미 신전에는 파르테논 신전 기둥보다 두 배나 큰 기둥들이 127개가 있었습니다. 36개의 기둥의 기단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었습니다. 대영박물관에 지름이 2미터가 넘는 이 기둥 받침 하나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데미 신전 복원도
아데미 신전 복원도
아데미 신전 터
셀죽 시내의 아데미 여신상
아데미 여신상(풍요의 신)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데미 신전에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의 열광인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약11km 동남쪽에 위치한 항구 이름이다. 당시 고린도에는 2개의 항구가 있었는데 북쪽 항구에서 승선하면 로마로 가게 되었고, 남쪽 항구인 이 겐그레아에서 승선하면 소아시아와 예루살렘 방향인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갈수 있었다. 현재 지명을 케흐리에스(Kehries)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념하여 항구 방파제에 큰 동상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근협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소위 고린도 지협경기가 열렸는데 이를 Isthmian Games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을 비유하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절제할 것을 권면했었는데 바로 고린도 지협경기를 연상하며 기록했을 것이다. 이곳은 고린도에서 나가고,고린도로 들어가는 선적의 화물을 취급하고 승선객의 승강장 역할을 감당한 고린도의 중요한 동해항이었다. 바울도 제2차 전도여행의 귀로인 이곳에서 배를 탔다(행 18:18). 이곳에는 겐그레아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에 ‘맑고 순결함’ 혹은 ‘빛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뵈뵈’라는 여집사가 있었다.
고린도인들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자랑하는 3가지 중의 하나인 비너스 상은 그리스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화에 나타난 아프로디테의 행실은 그리 정숙하지 못한 '사랑의 여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의 말씀과 같이 당시 고린도인들의 문란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음란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린도인'이란 은어가 있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고린도의 높은 도시)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라는 의미로 주전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경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띠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주후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띠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창녀의 업을 했다.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