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는 자가 들어야 할 음성①-②*김학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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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심정이 필요합니다(고전11:28)-오정현 목사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원고           

                                     

 

 

 

신앙의 대선배이시며 우리의 신앙의 노선을 일깨워주신 그분의 마지막 설교..

묵상에 올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분의 삶과 고귀한 희생이기에

감동의 글에 올려봅니다.

 

- "나의 5종목의 기원"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자(君子), 위인(偉人), 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 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 년 살고 만 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자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몸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진해 웅천교회(예전에 주목사 시무)
 

                                               

                                                            내주는강한성이요 (M. McDonald



사람이 되신 하나님/조용기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장 18~25절)

하나님의 본체시나 인간구원 위한 속죄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어야


 ‘사람이 되신 하나님’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요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 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한국 사람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스웨덴의 신학자 뉘그렌은 세상에 있는 종교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 또 다른 하나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노력이나 어떤 고행을 통해서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성탄절은 2천 년 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그런 날을 우리는 기뻐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1.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성경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700년 가까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서는 700여년 후에 일어날 일을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적은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놀랍게도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메시아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600년 내지 700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요, 모사로 지어주셨습니다. 기묘자란 말은 영어로는 ‘wonderful-놀라운, 최고의’ 이런 뜻이고, 모사는 ‘counselor-상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은 기묘자, 모사를 ‘wonderful counselor’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더풀 카운슬러’ 즉 ‘최고의 상담자’이심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께 나와서 상담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시고 남아 있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로 16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문제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친 자식들로 생각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특별히 아버지란 이름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도 아버지에게 일을 부탁하면 그 결과가 다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모시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이사야 9장 6절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사랑으로 돌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사야 49장 15절로 16절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를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뜨거운 마음에 정감을 가지고 안 나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 자리에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해야 하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평안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이것은 영·혼·육 모든 부분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인한 모든 억압과 저주가 사라지고,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회복한 상태를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오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평강의 복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은 원수 된 자들을 용서하고, 화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된 벽이 막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막아놓는 벽을 허물어뜨려버리시고 화평을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아버지로 모시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창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안 보여도 “주님, 주님 평안을 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평안이요, 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평안을 감사하면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주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영화가 방송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 마음에 감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얻어맞고,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시는 주님이 결국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깐, 내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가 상함은 우리 허물 때문에 상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죽지 않게 돼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깐 죽음이 있지, 죄가 없는 사람은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어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철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어서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정사를 어깨에 메고 태어났는데,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세계를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9장7절에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세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인류들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셔서 평강을 가지고 나라를 멋있게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주인이 없는 국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멋지게 자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희한합니다. 전쟁 후 폐허였던 가난한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순식간에 축복을 해주어서 세계 10대국 안에 들어가는 부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와 같은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는 것은 교회 때문입니다.

 국가의 통계를 봐도 기독교의 성장이 제일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성령이 비상한 일을 하셔서 기독교가 제일 크고 강한 종교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있는 이상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부정적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긍정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치료를 받은 것을 생각하고, 부조리에서 조리를 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우리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세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 6절에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사는 모습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철저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대속해주신 것입니다.


 3.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9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8장 31절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우리를 화목 시키기 위하여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와서 사람이 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서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고, 낙원의 백성이 되고, 죽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이것이 실제로 다가오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오면 “야 이 죽음이 다가오는데 혹시 죽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몸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의 천사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서 얼굴에 활짝 웃음을 웃으면서 손을 내밀고, “이리 오너라”라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는 반신반의해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따라 살 아야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가져 온 선물은 황금과 유항과 몰약이었습니다. 이 중에 몰약은 장례식에 쓰이는 물품입니다. 어린 아기를 축하하러 오는데 몰약을 가지고 온 것은 앞으로 장례를 지낼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성화 중에 아기 예수님을 싼 포대기가 수의로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 화목 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속 받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구속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리고 꿈과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성탄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초조를 믿음으로 이기고, 건강하고, 승리하고, 축복해 주는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형통한 사람이다”라는 좋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면 이 성탄절이 우리에게 끝없는 의미를 갖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님과 더불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기묘자와 모사되시고, 평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복된 소식을 이웃과 세상에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행동하는 신앙인 - 이영신 목사(광명성전 담임)

 잘못된 정치인들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러한 시기에 생각해 볼만한 정치인이 있다.
 바로 21세에 정치에 입문하여 74세에 이르기까지 의원선거에서 한 번도 낙선되지 않은 유명한 정치인으로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46년 동안 인내하며 노예제도의 폐지 법안을 진행한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신앙인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다.

 윌버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다. 탁월한 말솜씨와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도 승승장구하는 전도유망한 정치인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즐기고 자기밖에 모르던 젊은 정치인이 25세에 회심하고 나서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한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난한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정치를 시작하자,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당시에 영국은 해상을 통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이었으며,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이 큰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윌버포스가 보기에 노예무역은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노예무역과 노예제의 폐지를 외쳤지만, 당시의 귀족들과 상류사회에서 노예무역이 주는 이익과 노예제를 통한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윌버포스는 수많은 협박과 회유를 당했고 건강도 안 좋아졌지만,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여 마침내 1807년 ‘노예무역 폐지법’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최종 목표인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가 죽은 해인 1833년 ‘노예 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 영국전역에 노예제도 폐지라는 값진 결실을 거두게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영국은 기독교 국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삶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형식적인 믿음이었고 그런 신앙과 삶의 이분적인 모습에 윌버포스도 실망하고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로 인해 윌버포스는 회심하게 되어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윌버포스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어준 큰 아버지와 그가 회심하는데 영향을 준 그의 스승 아이작 밀러 그리고 노예선의 선장이었다. 회심한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 존 뉴턴 목사의 조언, 그가 정적들로 인해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려 할 때 그를 격려한 존 웨슬리 목사 등 소수이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로 인해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라는 말이 있다. 사회 고위층 일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가진 매우 높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특권을 가진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믿음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필요한 때이다.

 


예수님만 자랑하라 - 김춘기 목사(구로대교구장)

 고대 루디아(룻) 나라에 천하장사 헤라클레스가 초대 왕이고 이후 7대 왕이 칸타울레스이다. 그는 자신의 왕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기게스라는 심복에게 왕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자 심복은 극구 사양한다. 그러나 왕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기게스는 왕의 침소에 숨어서 왕비가 예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왕비는 여자 특유의 육감으로 누군가 훔쳐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왕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남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것은 대단한 수치였기 때문에 왕비는 왕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하고 이튿날 군사들을 무장 시킨 후 기게스를 불러서 “너는 나의 벗은 몸을 보아 나에게 수치를 주었다. 너에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왕을 죽이고 나와 왕국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자리에서 네가 죽는 것이다. 선택해라” 결과는 기게스가 왕을 죽이고 왕국과 왕비를 차지하게 되었다. 칸타울레스 왕은 자기의 권력과 자기가 누리는 소유를 자랑하다가 자기의 왕국과 생명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 에스더 1장에도 나온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B.C 485∼464)은 21년간을 제위 하는데 그는 변덕이 심하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그는 그리스 정벌에 실패하고 후궁들과 환락에 빠져 수산궁에서 7일 동안 잔치를 하던 중에 주흥으로 들뜬 나머지 마지막 날 왕비 와스디의 미모를 자랑코자 하여 즉흥적으로 어리석은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에 나오게 하여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왕비의 미모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이는 자신의 힘과 권력을 자랑코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왕비 와스디는 거절했고 대노한 왕은 와스디를 폐위 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소유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과 행복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지만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고백하며 외적인 모든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만 자랑했다.

 성탄절을 맞아 자랑하고 싶은 나의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고통과 은혜/조용기목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중략)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장 32∼39절)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고난과 시련의 삶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왜 끊임없이 고난이 다가오는가를 마음으로 이유를 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고난의 유익을 알게 된다면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불순종과 고난


 불순종이 고난을 가지고 오는 동기가 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로 15절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이 들어오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쟁하는 것은 괜찮지만, ‘저 사람이 망해야 내가 우뚝 서겠다. 저 사람은 망하고 나만 성공해야 된다’ 등의 잘못된 경쟁 심리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늘 받아 왔습니다. 요나 시대에는 앗수르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도 앗수르가 망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내렸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만에 수도는 무너지리라!’ 그 말을 들은 요나는 니느웨 정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요나 1장 3절에는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의 정 반대인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탔을 때, 요나는 순조롭게 하나님을 피해서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결국 파선 직전에 이르게 되자 선장과 선원들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이 배에 타서 풍랑이 있는 것 같다면서 제비를 뽑았고, 요나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배를 탄 것이라고 말하자 선장과 선원들은 요나에게 하나님께 운명을 맡긴다며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라고 사명을 다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요나가 천지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을 치고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이 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 1장 11절로 12절에 보면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가 불순종을 회개할 때까지 바다가 흉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볼 것은 ‘내가 무슨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는가? 무슨 명령에 불순종했는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면서 고통에서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고통은 회개케 하는 도구이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는 자에게 고통을 주어서 회개케 합니다. 시편 89편 30절로 32절에는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고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불순종도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는 이유가 되지만,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고통을 보내서 회개하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만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를 할 때 사탄이 “너는 하나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채찍을 때릴 뿐 아니라 너 같은 사람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꾸 괴로움을 주는 것은 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못 한다. 하나님이 그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속삭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변화된 우리들은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아버지”하고 달려가면 오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도 보면 탕자가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니깐 아버지가 뛰어가서 탕자를 끌어안고 목을 맞추어서 “내 아들아 잘 돌아왔다”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 왔으니 말씀을 듣고 우리가 회개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온 우리를 위해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반지를 끼워줘라, 신발을 신겨줘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사랑을 생각하고 감격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될 것입니다.


 3. 고통은 축복을 받는 그릇이다


 고통은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로 2절을 보면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린 사람을 기가 막힐 수렁에서 웅덩이에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되기 위해서 고통을 주셨으나,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품어주는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시편 118편 5절에는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가면 고통과 축복이 앞뒤를 따라오면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믿음의 그릇을 크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또 축복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서서 파괴된 심장, 파괴된 심정이 아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300명 중 60%가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이 다 고아였고, 루소는 태어나자마자, 파스칼은 3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골다 메이어도 고아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잃는 것만큼 큰 시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을 오히려 삶의 에너지로 바꾸었기 때문에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욱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절망하지 말고 고난을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꿈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꿈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큰 꿈을 이루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올바르게 이기면 큰 성공을 하고, 잘못하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에 사는 분들 중에서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에 이처럼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나섰으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이 농락당했다고 밖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국민 전체가 큰 고통 속에 빠져 있는데 이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옛날에는 데모를 하면 서울시가 온통 거름더미가 되고 파괴적인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집회를 보면 50만 명이 모였는지 100만 명이 모였던 지간에 상관없이 조용하게, 질서 정연하게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 이제 그릇이 되었구나. 우리 한국이 세계 국민들 앞에서 고난을 받되, 고난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국민이 되었구나”라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데모가 우리 국민의 소양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만한 깊이가 있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고통은 하나님을 찾게 한다


 교만하고 자만하면 하나님이 채찍으로 때려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나가야 힘을 얻을 수 있지 교만하고 오만해서 자기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을 보면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8장 17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그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가시가 있어 교만하지 않아야 은혜를 보관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 썼을 때 ‘내가 복음을 전도해서 너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해서 할 수 있으면 너희 눈이라도 뽑아서 내게 주려고 했다느냐? 그런데 이 짧은 세월에 벌써 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리느냐?’라는 탄식스러운 편지를 썼는데, 바울 선생은 아마도 안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이 아주 나빴는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의 눈을 뽑아서라도 바울에게 주고 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자기가 직접 편지를 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전부 다른 사람이 받아쓰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교만과 오만한 마음을 빼앗아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는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죄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아모스 선지자도 “야훼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고 외친 것입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인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때 들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안 될 일도 다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온통 혼란스럽지만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하게 발전하고 향상하는 것입니다.


 5. 고통은 영적인 힘을 기르게 한다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함으로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극복한 사람이 기도도 잘하고 영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참으면 그것이 인격적인 영적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 괴로움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이 같이 계시는 분에게는 어떠한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강하고 곧게 위로 뻗어 자랄 수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폭풍우가 와서 다른 나무들은 막 쓰러져도 대나무는 안 쓰러집니다. 갈수록 푸르청청하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나무에는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나무는 환경이 나빠서 잘 자라지 못할 때, 고통스러울 때마다 마디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라고 또 마디를 만듭니다. 그 마디가 대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마르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기도하고 있는 마디를 만들어줍니다. 그 마디를 많이 가진 사람이 여간 어려움을 당해도 파멸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낙심이나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멈춤의 시간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면 영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의 크고 적음은 작은 마디일 뿐, 모두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통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주저앉고 어떤 사람은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합니다. 회복탄력성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속에 꿈을 품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 찬송과 행복의 열매/조용기목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편 50편 14절)

받은 은혜 잃어버리고 감사 불감증에 빠진 우리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먼저 감사할 때 행복해지고 하늘의 복 누리게 돼


 우리 주변에는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감사를 하면 자신의 지위에 손상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감사에 매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이에게 선한 일을 한 후에 마음으로 감사를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면 실망하여 불평하며 미움을 마음의 창고에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게 와서 안수기도를 받은 한 자매님이 감사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자매님은 사법고시 2차 시험에 5번 낙방을 하고, 올해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예배를 드리면서 4차원의 영성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안수 기도를 요청했는데, 기도 받는 날짜가 시험 1주일 전이었습니다. 시험 직전이라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기도를 받으러 와서 제가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달에 “사법고시 최종 합격을 했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자매님의 편지를 받고 저도 하나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받지만 모두가 다 감사를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는 감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감사 불감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결과로 감사를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될까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사와 영화로움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 하나님까지도 영화롭게 여기시는 감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화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시편 136편 24절로 26절에 보면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기도드릴 때 하나님이 영화롭게 여기시고 응답하시고 환난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로마 관원에게 넘겨져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하자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여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을 풀고 자유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옥문을 지키던 간수는 이들의 기도와 그로 인해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그 가족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이 다가올 때 감사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개인, 감사하는 가정, 감사하는 국민, 감사하는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3절로 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감사할 때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2.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감사


 감사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고 삶의 분위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고 우리는 감사드려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할 때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약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민 21:6).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야훼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야훼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모세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놓으라고 하시면서,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놓았습니다. 그러자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민 21:8∼9). 여기서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누구든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쳐다보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감사를 넘치게 하면 응답의 축복을 받습니다. 요나 2장 9절로 10절을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훼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야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사라지고 평안이 다가올 때까지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충만하면 그것이 응답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매우 상투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스코틀랜드 스털링대 연구팀에 의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병 발병 확률이 3분의 1 정도 낮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감사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절반가량 낮으며, 면역력은 1.4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우리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주고 삶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3.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불평


 불평은 삶을 파탄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평으로 인해 인류의 삶이 파탄으로 이르게 된 선례가 그것입니다. 창세기 3장 12절로 13절에 보면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아담은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근본은 하나님이 제일 책임이 있고 그리고 여자가 책임이 있다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준 이 여자가 나를 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만들어 주었으면 내가 안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여자가 나에게 주었으므로 먹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왜 먹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뱀이 와서 꾐으로 먹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막아줬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안막아주셨으니깐, 뱀이 와서 꾐으로 자신이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우리가 잘못한 것은 스스로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될 것인데 전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김으로 사회가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요사이 신문에 나오는 정치적인 사건을 보면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전부 다 “네가 나빠서 그렇다”라며 삶의 파탄을 남의 책임으로 덮어씌우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로 17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의 결과가 자기들의 생애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고통을 상속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여자들은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데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지배를 당하며, 남편에게 고생을 당하겠다고 말하는데, 예수님 이후로는 이것이 서서히 변화되어서 요사이에는 남편에게 끌려 다니는 여자가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라는 문과 불평이라는 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하면 감사합니다. 감사한 일이 많으면 행복합니다. 감사한 개인과 감사한 가정에는 행복이 다가옵니다. 따라서 감사는 행복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러나 불평을 말하면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던 행복은 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버드대에서 행복학을 가르치는 탈 벤 샤하르 교수는 『하버드대 52주 행복 연구』라는 책을 썼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사하는 법을 배웠을 때, 기회가 오고, 인간관계가 개선되고, 심지어 부까지 내게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일어난 파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4절로 5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야훼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백성들이 모세를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걸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는 것이 불평입니다. 민수기 14장 27절로 29절에 보면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을 매우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극히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것 같이 불평을 아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을 많이 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민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영화롭게 여기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7절로 8절에 보면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와 찬송만 하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것인데, 물고 찢고 싸우고 서로 방해거리가 되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상수도 시설이 열악했습니다. 펌프가 있었는데 펌프로 물을 쓰려면 펌프를 차지하려고 그룹을 지어서 밤잠을 안자고 기다렸다가 점령해 사용했었습니다. 펌프를 점령만 했다고 물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점령을 해놓고 난 다음에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붓습니다. 그러면 “퍽퍽” 소리가 나다가 나중에 “콸콸콸”하면서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단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땅속 깊은 지하수를 끌어올려 펑펑펑 쏟아지게 하는 고맙고 귀한 물입니다.

 이와 같이 감사도 ‘마중감사’가 필요합니다. ‘마중감사’는 넘치는 감사를 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감사하다고 자꾸 마중감사를 하면 감사를 퍼 올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보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많이 할 때 우리도 행복해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한지 60년이 가까워오는데, 많은 가족들을 보면 감사를 많이 하는 가정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감사를 안하고 불평과 원망을 하는 집안은 갈등이 많고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태어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는 공짜로 주신 것이며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짜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받아서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열매를 먹으면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많아서 마귀가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역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통해서 어두움을 쫓아내고 절망을 쫓아내고 아버지의 임재하심을 햇빛같이 우리 가운데 가져오게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와 찬양을 통해 슬픔이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영훈목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장 1∼5절)

날마다 성경 묵상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 만나고
죄의 습관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미래지향
예수님 주신 생명과 사랑의 빛을 세상에 전해야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 육신의 옷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공휴일, 선물을 주고받는 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성탄절의 본래 의미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소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는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태초는’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태초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시며 영원불변하시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 의지,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선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셨으며, 우리를 모든 죄와 질병, 삶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누구나 변화된 인생, 축복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구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태초부터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준비하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한 신약은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과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상처와 문제를 치료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말을 더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과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음성을 듣지 말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 참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제와 함께 18세기 부흥운동을 주도한 조지 휫필드 목사님도 말씀을 체험하고 변화되신 분입니다. 옥스퍼드대학을 다니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계속적인 금욕과 내적 투쟁을 하던 1735년, 요한복음 7장 37절의 말씀인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를 묵상합니다. 그래서 그도 “목마릅니다! 목마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휫필드, 네가 구하던 것을 이미 가졌다! 믿기만 해라. 그러면 다시 거듭날 것이다!” 이때 목사님은 자신을 억누르던 모든 억압과 속박들에서 해방됨을 느꼈고, 이후 다음 말씀으로 한 번 더 확증을 얻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휫필드의 중생 체험은 존 웨슬리의 중생 체험보다 무려 3년 앞선 일입니다. 그때부터 자신이 은혜받은 말씀을 따라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를 선포했습니다. 18000회의 공중집회를 인도하였고, 대서양을 7회나 오가며 뉴욕과 보스톤, 필라델피아에서 무수한 집회를 가지며 복음을 선포하다가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말씀의 능력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 이 어떠한 기쁨인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로다! 죄의 짐이 벗겨지고, 풍성하고도 충만한 영광의 기쁨이 내 영에 차고 넘치도다!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의식과 확신에 찬 믿음이 내 영혼에 밀려 들어왔도다!” 우리도 나날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동행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길 사모합시다.
 
 2. 창조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창조주로 오셔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은 창조의 사역에도 성부 하나님과 동역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연히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과 함께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진화론자들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만물이 우연히 아메바에서 진화했다고 믿습니다. 우주의 기원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면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종이는 글을 쓰도록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마이크도 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는 말엔 단순히 예수님이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은 예수님에 의해 말미암았고 또한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부인의 삶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14장 8절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의 인생이 B.C.와 A.D.로 나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 붙잡히지 말고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미국 라이프교회 담임인 크레이그 그로쉘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수용하기 위해 ‘핍박자’라는 과거의 정체성을 내려놓았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온 뒤에도 애벌레처럼 기어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날기를 바라신다. 당신은 겨우겨우 살아가는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성령님으로 충만하다. 당신에게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권세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나비가 고치에서 껍질을 벗고 나왔으면 날아야지 기어 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 은혜 가운데 성령의 날개를 타고 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경험한 모든 아픔까지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훈련의 도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기 23장 10절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포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다가올 미래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과거에 가졌던 죄의 습관도 버리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부터 2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아무리 정죄하여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정죄함에서 자유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으로 믿음의 전진을 해나가야 됩니다. 모든 문제는 주 안에서 다 해결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아갑시다.


 3.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영생이 선물로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부터 26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순간, 영원한 세계 속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들은 먼저 천국에 올라가셔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천국에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방법은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방법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명을 공급받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어둠에 처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부터 10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빛 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빛을 볼 능력이 없는 세상을 치료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가리어진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마귀의 노예에서 복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이 세상에 작은 빛이 되어서 살아갑시다.

 최근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를 개발한 김주윤 벤처기업 ‘닷(dot)’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대학 재학 중에 3번의 창업과 3번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학비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친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 성찬식을 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 저를 다 맡깁니다. 하나님 뜻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던 중 한 시각장애인 친구를 만났는데, ‘성경을 점자책으로 바꾸려면 22권이나 돼서 너무 불편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시각장애인들은 일반 책보다 5배 이상 비싸고 무거운 점자책이나 비싼 점자기기를 사용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 2억 8500만 시각장애인 중 95%가 점자 읽는 것을 포기한다는 사실과, 국내 30만 명의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해독할 수 있는 비율은 5.1%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렴하고 휴대성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성경을 쉽게 읽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친구들과 함께 시각장애인용 점자 스마트워치를 개발하였습니다. 사업하면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는 말씀을 주셔서, 이 일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사업임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창업 오디션 프로그램인 ‘황금의 펜타곤’에서 1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전 세계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고, BBC, Times 등 전 세계 유력 뉴스에 소개되었습니다. 한국 신생 벤처기업 최초로 ‘칸 국제광고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벤처기업 올림픽인 ‘Get in the ring 2016 스타트업 세계대회’에서는 최종 우승을 차지합니다. 제품 출시 전이지만 이미 해외 14개국에서 선주문만 13만 대에 달했으며, 미국 가수 스티비 원더, 이탈리아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 등 유명 시각장애인들도 주문했다고 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의 빛이 되고자 시작한 사업이 국내 벤처기업의 성공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을 못 본다는 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의 사명은 세계의 소외, 가난, 장애로 인한 불편한 문제를 스마트한 기술로 푸는 것입니다. 전 세계 2억 8500만의 시각장애인, 4000만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우리와 똑같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돈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기업,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많은 곳들을 채우는 그런 기업가가 되고 싶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김주윤 대표의 마음 가운데 오셔서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하는 귀한 일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도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빛 되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빛을, 생명의 빛을 온 세상에 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지만, 아직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등불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주님의 일꾼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내 영혼의 내진 설계/조용기목사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편 91편 14∼16절)

 올해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한반도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어 지진을 대비한 내진 설계가 필요합니다. 내진설계를 따라 짓지 않은 건물들은 지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지진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영적 지진이 왔을 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에도 내진 설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1. 마음속에 일어나는 영적 지진


 세상은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탐욕으로 파탄을 일으키고 노사분쟁, 전쟁의 공포, 정치의 혼란 등으로 평안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혼을 흔들어놓는 영적 지진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하지만 시편 55편 22절에는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요동함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음에 지진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살지, 그렇지 아니하면 영적 지진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을 온통 흔들어놓아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내진설계를 해놓아야 합니다. 인생에 지진이 다가와서 우리를 흔들어놓아도 끄떡없고 당황하지 않는 것입니다. 

 15년 전부터 저는 무엇을 하든 집중해서 일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동맥이 거의 다 막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위험하니 약물로만 치료하지 말고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 에도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최근 운동을 해도 심장에 많이 무리가 와서, 용기를 내어 수술을 결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고 지난주에 입원을 했습니다. 수술 전 다시 진찰을 해보니 확실히 제 심장동맥이 막혔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다음날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희한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가슴에 기계를 집어넣어서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막힌 동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로는 막히지 않고 아주 깨끗해서 한 2년 동안 끄떡없겠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내진설계를 해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손녀가 제게 와서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중간에 갑자기 중지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문이 안 열리자 겁이 나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회개합니다.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버튼을 누르니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이 애가 나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면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지진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극복하셨습니다. 죄로써 일어나는 지진, 질병으로 일어나는 지진, 저주로 인해서 일어나는 지진, 죽음으로 일어나는 지진, 온갖 지진을 예수님은 몸으로 정복해서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며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다른데로 눈을 뜨면 안 됩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써 교회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와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안됩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교회 와서 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서 섬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 내진설계를 따라 자기 자신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5절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려고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통해서 돈벌이하려는 상업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려고 하면 개인도 교회도 지진이 일어날 터전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편 가르기, 회개 없는 분쟁 등 이런 것은 모두 다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1∼12) 교회에서 편 가름 하는 것은 지진이 다가올 징조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우리가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흔들리고 부서지는 기반들


 흔들리고 부서지는 기반에 인생을 건설하면 반드시 지진의 참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서로 정죄하고, 반대하고, 생활을 파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성전 근처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서기관들이 한 여자를 잡아서 끌고 옵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예수님 발밑에 내동댕이치면서 “주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성경에 간음하는 자는 돌로써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있다가 허리를 펴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춰보고 난 다음에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이 다시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씁니다. 무얼 썼겠습니까? 감추었던 죄를 주님이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쓰는가 싶어서 어깨 너머로 보니깐 자기가 돌로써 이 여자를 쳤다가는 예수님이 그 돌 가지고 자기가 맞게 된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탕을 먹이려고 왔다가 혼비백산하고 돌을 다 그 자리에 내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돌로써 쳐야 율법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우리에게 오신 것은 죄인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내가 온 것은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온 것이다. 집에 돌아가서 죄를 다시는 짓지 말라”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용서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평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지진이 일어나고, 사회에도 지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평론하면 그 평론으로 자기가 정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의식주의를 주님께서는 파멸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목사와 예배가 있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지, 사람을 죽이려고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장 9절로 12절에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위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율법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도 예수님이 치료하면 하나님 법을 어긴 것으로 정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 마른 사람이 팔을 못 쓰고 있으니깐 예수님은 손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사람들이 비난을 할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 안식일날 건져내지 않겠느냐? 양보다 사람이 얼마나 귀하냐? 사람에게 치료를 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라며 가는 곳마다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진설계를 따라 인생이 지진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형식, 이것에 정반대되는 일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을 하시는 분이지, 율법을 진전시키려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부서지는 기반들, 율법주의적 신앙, 제사 중심의 종교,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만세 반석으로 삼고 기대지 아니하면,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절로 3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의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인생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영원무궁하신 반석


 우리 삶의 영원무궁한 반석은 예수님 십자가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허물을 대신 씻어 주시고, 보혈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하고 허물을 씻으시고, 용서와 의를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우리에게 병 고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편 91:14∼16)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건져주시고, 높여주시고, 응답해주시고, 건지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장수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4차원의 영성 속에 하나님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자는 다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같은 성령을 우리가 모시려면 우리도 바람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바람과 같이 보지도, 만질 수도,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는 분을 어떻게 모실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하고 대화를 할 수 있지 동물하고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람 같이 되어야 성령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바람 같은 옛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만리장천 멀리 계신 줄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3차원으로 계산을 하면 하나님은 아주 멀리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4차원의 세계에 살고 때문에 계산이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이 되어야 하나님이 우리와 같게 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그 생각을 통해서 같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소원은 꿈입니다. 뜨거운 마음의 소원이 우리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꿈을 통해서 일 하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믿음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믿음, 우리 믿음이 함께 믿음을 통해서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그 믿음의 말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하고, 꿈을 꾸고, 믿고, 창조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건강하고 튼튼하다. 나는 좋다, 행복하다” 이 말은 손으로 붙잡아볼 수는 없지만은 그것이 바로 차원이 다른 영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세계에 필요한 존재로써 목적을 두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6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가 지어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은 장차 다가올 세월이 지금보다 끝없이 좋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데리고 영원무궁토록 살게 하고자 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행복한 세계 속에 살려고 뜻하신 것입니다. 

 내진설계를 따라 짓지 않은 건물들은 지진을 감당 못 합니다. 우리 인생도 내적 깨달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삶의 주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삶의 목적이 되지 못하면, 수없이 무너지고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만세 반석을 세워놓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을 세워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기초석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만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녀들이 되어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을 세워놓아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는 승리의 삶, 행복한 삶을 살게 인도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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