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자취를 따라 (벧전 2:18-21)
고난의 자취를 따라
베드로전서 2:18-21
서구의 오래된 풍습 가운데 엄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이 진주를 ‘얼어붙은 눈물’(Frozen Tears)이라고 부릅니다. 그 진주가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많은 눈물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낯선 환경으로 시집을 간 딸이 속상할 때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텐데, 그 때 이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진주는 땅에서 캐나는 것이 아니라 바닷속의 조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어쩌다가 모래 하나가 조개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까끌까끌한 모래가 보드라운 조갯살 속에 박히게 됩니다. 그러면 조개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몸에 박힌 모래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개는 자신의 몸에 박힌 모래알 때문에 병들어 살이 썩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 모래알 때문에 조개는 죽고 맙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조개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주층(nacre)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 자기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계속해서 덮어 싸고 또 덮어 쌉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감내하면서 생명의 즙으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다 보면 그것이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엄마가 결혼하는 딸에게 진주를 선물한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언제나 행복하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시련과 고통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한 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병들고 썩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찾아온 그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여 의미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진주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엄마는 선물하는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진주는 사랑하는 딸에게 인생에 찾아온 쓰라린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진주와 같은 사람이 되어가라는 삶의 교훈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 앞에 큰 시련이 닥치길 원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바람과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 부딪치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진주조개의 이야기에서 교훈해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닥친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크고 값진 진주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통 속에서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우리의 인격과 신앙은 더욱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 당한 시련이나 고통을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 숙제일 뿐입니다. 여러분, 문제와 숙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 원인을 밝히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숙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해결하고 그 책임을 감당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한 시련이나 고통을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숙제로 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한 시련이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때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당하는 시련이나 고난은 대부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이 시련과 고난이 내게 닥쳤는지를 알려 하는데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소비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 가야합니다. 그것이 고난이 우리에게 준 숙제입니다.
시련이나 고난을 문제로 해결하려 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그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찾는다면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우리에게 시련이나 고난이 오는 이유는 우리의 실수나 잘못, 또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것을 흔히 ‘신명기적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징벌이라는 고통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도 그런 연유로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불순종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나 고난, 시련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2. 우리에게 시련이나 고난이 오는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려 하다가 받는 사명적 고난입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평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증언한 것처럼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고비도 넘겼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아야 했고, 일주일 동안 깊은 바다의 위험 속에서 지내는 등 수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굳이 그런 시련이나 고난을 겪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사도행전 20:24)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다가 그런 시련과 고난을 겪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길을 가려할 때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견디어내며 갈 때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낼 수 있습니다. 꼭 사명의 길을 가는 데에만 그런 시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할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세상의 가치나 삶의 방법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삶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30)
3. 우리가 시련이나 고난을 받는 세 번째 이유는 훈련을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과 시련입니다. 그 고난이 시작될 때에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지만, 고난을 인내로 이겨나가면서 깨닫는 것은 그 고난이 나를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연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강한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통해 연단되지 않으면 좋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절에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에게 때로 이유 없이 고난이 찾아오거든 ‘나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그 연단을 통해 성숙해지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도 없고, 그 이유를 알 수도 없는 고난이 때로 우리의 삶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기에서는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이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욥을 고난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 표현입니다만, 실제로 우리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셨는지, 왜 욥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죽임을 당하고, 평생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그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을 되돌아봐도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으리라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재해석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왜 내가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느냐?’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를 시련의 풀무불에 밀어 넣으신 이유가 분명 있긴 있을텐데 우리의 머리와 지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시련과 고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머리와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신 하나님만의 계획과 섭리가 분명 있을 거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위탁하는 믿음이라면 말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고난과 시련의 이유가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가 당하는 것과 다른 의미의 고난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시대의 눈으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주신 대상이 오늘 본문 18절 첫 단어에 나온 것처럼 ‘사환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환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종’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종은 말 그대로 노예입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이고, 그들에게는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자유가 없습니다. 종은 그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환은 종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수하에서 일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종과 같이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권위 아래서 주인의 집안일을 돌보아주는 ‘하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장 아래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나 가게 주인 아래서 일하는 점원이나 아르바이트생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환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자신에게 자비롭고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씨 좋은 주인에게만 순종하고 주인대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주인대우를 하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자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인들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말을 성경 다른 곳에서는 ‘패역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사도행전 2:40, 빌립보서 2:15) 그들은 하인들을 불공정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감정에 따라서 하인들을 대합니다. 패역한 세상을 닮아 자기들의 이익 앞에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면 가차 없이 불법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그런 주인을 만나면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려고 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악한 사람’입니다. 저주하고 욕하고 싶을 정도로 패역한 마음에 사로잡혀 하인들을 배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일이나 불법적인 일을 하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직하게 살려하는 하인들의 입장에서는 처세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주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말은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베드로전서 2:17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라는 말씀에 쓰인 그 단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패역하고 불공정한 주인, 그래서 주인으로서 도저히 공경하거나 순종하고 싶지 않은 주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 주인에게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듯이 주인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사고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 말은 참 부당한 요구입니다. 어떻게 그런 주인을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워하여 순종할 수 있습니까? 나에게만 좀 까탈스럽게 대하는 주인이라면 그냥 참고 견딜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을 행합니다. 마음 자체가 패역한 주인입니다. 무엇 하나 존경할만한 것이 없는 주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인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런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항거하거나 그 집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20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뭔가 잘못을 해서 주인에게 미움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주인에게 유익이 되도록 일을 했습니다. 누가 봐도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미워하고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19절과 20절 마지막에 표현된 ‘아름답다.’는 말은 신약성경 언어로 카리스(χαρις)입니다. 카리스라는 말을 우리가 잘 아는 표현으로 한다면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19절과 20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은혜로운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 선물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의 계획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가롯 유다를 은 30에 매수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늦은 밤에 불법 재판을 해서 사형을 언도합니다. 당시에 밤에 열리는 재판은 불법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권한으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에 군중들을 선동해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을, 로마 총독도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누가복음 23:4)라고 말했는데도 그들이 억지를 써서 십자가에 못 박에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로 찌든 인간의 권력자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손과 발에 못을 박히셨습니다. 가장 영광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의 길을 따라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받는 고난의 다섯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지으신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그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고난을 당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사환들아!’ 그러면서 이유 없이 주인에게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것이 은혜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당한 그 고난을 통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미워하는 주인까지도 구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힘듭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합니다. 참고 참으려 하지만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왜 이런 불이익을 당해야 하느냐고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억울한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관이 그의 머리에 씌워질 때에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실 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항변 한 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참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때로 참아 보십시다. 억울해도 참아 보십시다. 불이익을 당해도 손해를 감수하고 참아 보십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묵상하며 참아 보십시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닭과 독수리는 위험한 순간을 당할 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폭풍우가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서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 안전한 곳을 향해 갑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만날 때 우리 인간도 두 가지 유형으로 대처합니다. 너무너무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일이 몰아칠 때, 닭과 같은 사람은 일단 몸을 숨기고 봅니다. 그 때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독수리 같은 사람은 고난 앞에 당당히 서서 그 고난을 통해서 더욱 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갑니다.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때론 힘든 문제 앞에서 자신을 숨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당장 눈을 감는다고 내 앞에 불어닥친 폭풍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선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낮에도 하늘에 별은 떠 있습니다. 단지 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주변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푸른 창공에 떠있는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안할 때에는 볼 수 없는 것을 고난의 때에 볼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고난과 시련의 때에는 들을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고통의 때에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우리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 가십시다. 힘들더라도 기쁨으로 가십시다. 분명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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