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주시는 환상과 꿈/조용기목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장 14~19절)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혼돈하고 불안하여 조직이 무너지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묵시(꿈)가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잠 29장 18절)고 기록되어 있으며, 영어로는 ‘perish’라고 해서 ‘망한다’란 말로 사용됩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살아갈 목표와 꿈을 잃어버리면 그 단체나 개인은 무너지고 맙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먹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됩니다. 하지만 먹을 양식이 있고 건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굶어서 죽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살하는 사람은 배가 고파 굶어죽을 때보다도 수가 많습니다. 이런 사실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의식주뿐 아니라 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힘차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이 오시면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성경을 꾸준히 읽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환상이나 꿈을 주셔서 환경을 정복하고 앞으로 전진할 꿈을 주십니다. 삶의 목적과 꿈을 가슴에 품으면 결코 그 사람은 망하지가 않습니다.

1. 꿈이 있어야 산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난 다음 끊임없이 알아야 될 것은 꿈이 있어야 산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은 “오늘날 누군가 그늘에 앉아 살 수 있는 것은 오래 전에 누군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기나 자동차 등 문명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래 전에 누군가가 전기나 자동차에 대한 꿈을 심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에디슨이 전기의 꿈을 품었기 때문이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은 헨리 포드가 꿈을 그것을 꿈으로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교회를 짓겠다는 소원과 함께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라이트 형제가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누군가가 꿈을 심었기 때문에 계속 발전해온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꿈을 심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더 아름답고 풍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소원이 끓어오르게 만들어서 더 살기 좋고 훌륭한 만물을 갖게 만들어 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2. 성령께서 꿈을 주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반드시 꿈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꿈과 소망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또 다시 어부가 되어서 밤새도록 배를 타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다른 몇몇 제자들도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이 되어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자 제자들은 다시 꿈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여러분 생애 속에 임하였다면 반드시 꿈이나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향수를 몸에 뿌리면 향내가 나는 것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꿈이 이루어 꾸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되어 성령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자 제자들은 다시 가슴속에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주신 꿈을 품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성령으로 충만해야 새로운 꿈이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흑인이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갔는데 백인들이 그를 못 들어오게 해서 문 밖 계단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흑인이 교회 문 밖에서 엉엉 울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 백인들은 예배를 드린다고 야단입니다. 흑인은 울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왜 교회 계단에 앉아서 울고 있느냐?” “주님, 제가 흑인이라고 교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내어서 여기 이렇게 계단에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울지 마라. 너만 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 교회에서 쫓겨나서 교회당 밖에 울고 서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도 아니하고 예수님을 섬기지도 아니한 인간적인 모임이 되면 교회는 있어도 예수님은 없는 단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는 줄 알고 성령을 충만히 모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4.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 죄를 씻어주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쫓아서 회개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생애 속에 들어오면 회개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어기고 사는 것을 회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더럽고 방종한 생활을 살았으면 그 생활을 그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놀라운 것은 모든 우리 생활에 성령이 힘을 주어서 느끼게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서 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거짓말쟁이가 아무리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늘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시고 거짓말을 떼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편 중독자가 아편 중독에서 자유를 얻지 못할지라도 성령께 부탁하면 성령이 아편 중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와 의를 얻는 것처럼 우리 생활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불의, 추악을 씻어내어 주시고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 신앙생활에 발전과 향상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실체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이런 선물로써 변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써 변화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인을 씻으시고 변화시켜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을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보혜사가 오시면 성령이 거룩한 능력을 입혀 주심으로 자연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몸속에 들어오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그런 윤리적인 힘이 몸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변화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변화받게 되고, 성령님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면 그건 예수를 안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그 사람 곁에 와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영향력으로 거룩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보혜사 성령)

 성령은 보혜사라고 말하는데 보혜사는 히브리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합니다.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는 돕기 위해 곁에 항상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대신 도와줄 보혜사가 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와서 같이 있으며 예수 믿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눈에 안 보이지만 여러분에게 보혜사 성령님이 들어와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 도와달라고 우리가 부탁을 하면 예수 이름으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24시간 곁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고 보혜사 성선령 의지하면 성령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보혜사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이 처음 보혜사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헬라어에는 두가지 단어를 사용하는데, 똑같이 다를 때는 ‘알로스’라는 말을 쓰고, 완전히 다를 때는 ‘헤테레스’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지칭하실 때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즉 ‘나와 꼭 같은 다른 돕는 자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변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예수님이 통해서 기도하고, 여러분을 통해서 귀신을 내어 쫓고, 여러분을 통해서 병자를 고치고, 여러분을 통해서 불안과 초조, 절망을 제하고, 여러분을 통해서 부요의식, 성공의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종교라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인격자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와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숨 쉬어지지 않습니까? 숨 쉬는데 오른쪽 바람아, 왼쪽 바람아 몸 가운데로 오너라. 그렇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냥 숨 쉬면 자연적으로 공기가 우리 속에 들어왔다 나왔다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님이 계신 것만 알면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기도하게 하고, 찬송하게 하고, 믿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천상의 일들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에서 26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 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면 너희들이 다 낙심하고 것이라고 절망할 사람들은 생각하나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한 것을 저가 다 하고 내가 가르친 것을 다 기억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다 행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여러분을 씻어주시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부활의 생명이 충만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해 주시고 예수님을 성령께서는 통해서 여러분이 믿음과 담대함을 얻어서 축복을 받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구약 4천 년 동안에 하나님이 정면에 나와서 일하시고,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 하나님 뒤에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신약시대가 오자 예수님 뒤에 예수님 통해서 아버지와 성령이 같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성령의 시대가 와서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아버지, 예수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있는 이유는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성령이 같이 하시는 것을 깨달아 알고 믿고 믿음으로 일해야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귀한 분인지 모릅니다. 성령이 같이 계시면 만사 형통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나라에 천 만 이상의 크리스천이 살고 기도의 입을 넓게 열어 꿈과 환상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이상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없어야 망하지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과거에 묶여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에 잡히는 생활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사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인종 탄압에 맞서 싸우다 27년 동안 감옥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는데 교도관들이 얼마나 무시했는지 배설물을 그 숙소에다가 뿌리고 “이 자식아 너는 여기에서 이렇게 죽지, 살아 나오지 못한다.”고 백인 교도관이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감옥을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젠가 자유인으로서 발밑의 풀의 감촉을 다시 느끼고 햇볕 아래 걷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7년간 남아공의 흑인 인권 주장을 하다가 잡혀서 곤욕을 치렀는데 27년 동안 하나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장차 좋은 일이 있다.”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7년 만에 감방에서 해방되 나오자마자 대통령이 됐습니다. 꿈을 갖고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으며 미래를 바라보고 삽니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되고 자신이 속한 가정이나 사회도 아름답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이 마음속에 있어야 고난을 이깁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에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을 처음으로 만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요셉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했습니다. 창세기 42장 9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모든 고난을 이겨내었고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을 할 때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꿈과 희망이 없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 있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 한 번 보십시오. 어부, 세금 공무원 등 사회 어디에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위 내로라할 만한 스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고 집안이 좋고 만물을 깨달아 안다고 하더라도 꿈이 없으면 그런 게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내로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다음에 온 세계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제자들을 앉혀 놓고 언제나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꿈을 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모든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장 15절)라고 위대한 꿈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지금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꿈을 주심으로 우리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0편 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꿈과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꿈을 갖고 기도해야지, 아브라함처럼 10년을 두고 아들 달라고 기도하는데 꿈은 보지 못했습니다. 10년 헛 기도를 했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반드시 자기가 꿈꾸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줄 때도 산등성으로 불러서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눈에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네게 주리라.” 바라봄의 법칙을 마음에 갖고 있으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꿈과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소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자녀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소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과 소원을 심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꿈을 품게 만드시고 그 꿈을 통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 통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꿈을 주시는 것인데, 역사를 보면 성경의 말씀을 통해 꿈을 품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도 방탕한 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가 살아나갈 모습을 꿈꾸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회사에 위대한 교부가 되었습니다.

  조지 뮬러도 방탕한 삶을 살다가 말씀을 통해 수많은 고아를 돌보는 꿈을 꾸게 되고 그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꿈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난 다음 그 말씀으로 마음이 감동받고 변화 받게 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오늘도 하나님 말씀 통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꿈을 심어 주심으로 아름답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소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것을 꿈으로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내가 네가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에게 “옜다. 이것 받아먹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네가 무엇을 원하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 그래서 그것을 꿈으로 갖고 기도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맹인거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꿈을 먼저 심어놓아야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가 네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꿈과 소원을 지금 이 시간에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생애 속에 뜨거운 소원을 이루어주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은 우리 인생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꿈은 내 마음에 열정을 일으키는 미래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을 할까? 그림이 꿈으로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꿈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꿈이 있으면 그 꿈을 바라보고 열심히 살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사람들에게 배를 만들게 하려면 사람들에게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꿈을 키워줘야 된다. 바다를 보여주면 그 삶 바다를 보여준 사람들 속에 꿈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더 넓은 바다를 보여주면 바다로 가는 꿈을 꾸게 되고 열심히 배를 만들어 바다를 누비게 될 것이다. 바다를 보지 않은 사람이 배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꿈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내 환경이 나빠서 그렇다. 내가 교육을 더 많이 받지 못해서 그렇다. 그럴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무슨 꿈을 갖고 있었는가? 그것이 결정적인 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제자들 12명을 데리고 3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통해서 세계와 역사를 뒤엎었습니다. 온 세계가 변화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꿈은 성령이 오셔서 주신 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여러분 환경이나 조건에 비유하지 마십시오. 마음속에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내일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국 교회 성령 역사를 부어주어서 성령님을 통해서 꿈을 꾸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꿉니다. 현재에 내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이라도 마음속 꿈에 미래를 모시고 품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 길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을 통한 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신 가운데 살게 하사 모든 일에 승리함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소원, 꿈, 그리고 놀라운 기적/조용기목사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태복음 9장 20∼22절)

  인생을 살다보면 갖가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낙심하고 절망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소원과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성경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운명이 달라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병에서 낫고자 하는 뜨거운 꿈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직접 나와서 안수를 받지 못하더라도 몰래 뒤로 가서 옷자락에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과 꿈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 순식간에 열두 해를 앓던 병에서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혈루병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데, 이 혈루병에 걸리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이 이 혈루병에 걸린 사람에게 접촉만 하면 부정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가족들이 모이는데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체적인 고통도 있거니와 심리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었습니다.
  12년 동안 여기 저기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아니하고, 있던 재산 다 허비해버리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 거기에 물질적 가난까지 그야말로 절대 절망에 처해 있었습니다. 

1. 어느 날 다가온 고난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질병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가난에 의해서도 고통이 대단히 큽니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 청년 실업이 역대 최고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요, OECD평균보다 4배나 높고 노인 자살률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먹고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때로는 삶의 어려움 때문에 희망마저 포기하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여인

  이 혈루병 앓은 여인처럼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 견디지 못하고 죽음 일보직전에 있었습니다. 마귀가 무자비한 공격으로 이 여인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희망도 꿈도, 믿음도 다 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병의 뒤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병들면 병들었지, 무슨 마귀가 있느냐?”라고 그러는데 성경은 모든 병은 그 배후에 마귀의 억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과 권능을 기름 붓듯 하였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치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를 쫓아내면 병도 쫓겨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정복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마귀의 역사가 끊임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못살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배후에 도둑놈 같은 마귀가 있어서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 보면 나중에는 낫겠다는 꿈과 희망조차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한 곳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병에 걸린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못 물이 요동할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다 나아요. 그런 특별한 사건이 있기 때문에 병든 사람들은 물이 끓을 때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전부 물가에 가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38년 동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간 병 낫기를 고대했는데, 심신히 너무 약해서 직접 걸어 들어갈 수 없고, 또 주변에 자신을 물어 넣어 줄 가족들도 없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연못에 들어가는 것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러워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이 고통을 당하다가 이제 낫는 것조차도 포기할 정도로 아주 절망에 처했습니다.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들도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고침을 받아 나가는데, 아주 베데스다 연못가에 고참 중에 고참으로 38년 동안 있었는데 이제는 물에 뛰어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루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서 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앞에 서니까 사람들이 모여올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보고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이 누구를 보고 희롱을 하느냐? 낫고자 아니하면 그 연못가에 38년 동안 앉아있겠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너 낫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할 필요 없이 “내 낫고자 하나 물이 동할 때 나를 물속에 집어넣어줄 사람이 없어 38년 동안 이렇게 물가에서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요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순식간에 몸이 날아갈 듯이 상쾌하고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 물었냐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 그 사람이 소원과 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원과 꿈이 있어야 하나님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이 되어 있으니깐 하나님이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낫고자 하느냐?” 그것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꿈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나와서 은혜를 받고자하면 마음에 소원과 꿈이 분명하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원과 꿈이 없이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으니 소망도 꿈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없으면 망합니다. 병이 낫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제일 물은 질문이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낫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근데 예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38년 된 병자의 마음속에 낫겠다는 꿈과 희망을 다시 복구시켜주기 위한 일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살아있는 주변에 희망과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미래의 희망도 놓쳐버리고,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 한번 가자” 남편이 꾀고, 아내가 꾀고, 자식이 꾀고, 부모가 꾀고, 친구가 꾀고. “가서 설교만 들어보자” 그래서 꾐을 받아서 나온 사람이 많아요. 나는 그런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한 번만 따라와 달라고 사정을 해서 한 번 따라 나오니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이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오면 마음에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내가 소원한 꿈을 마음속에 품으면 희한한 일이 일어나거든요.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같은 사람도 아들이 있어야 됐는데 하나님께 꿈을 갖고 나오지 않으니깐 10년을 기도를 했는데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꿈을 품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하고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꿈을 갖지 않고 기도한 것은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자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꿈을 다시 심어주니깐 그 꿈을 받아서 가슴에 품고 기도해서 이삭 아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술가가 아니어서 꿈을 아름답게 그릴 수 없을지는 몰라도 자기가 소원하는 바를 마음속에 꿈 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 꿈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눈 깜빡할 사이에 응답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꿈을 마음속에 품고 하나님께 인내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심령으로 만나보아서 신앙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3.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이 혈루병 앓은 여인도 열두 해 동안 온갖 치료를 다 받아도 병이 안 나았어요. 견딜 수가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는 거지요. 격리된 외로운 곳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울고 있었습니다. 절망입니다. 누가 그에게 도움을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만났던지, 누가 그에게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꿈을 심어준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24절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만 되었다고 생각하면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반수 이상은 병 고치는 데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정신병, 육체의 병, 생활의 병, 병 고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온 천지에 그리스도의 소문이 나고 수많은 병 든 자들이 와서 치료를 받는데, 예수님이 뭐가 달라졌습니까? 요사이는 예수님의 치유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 고장이 나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는 예수님이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병든 자를 고쳤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예수님이 병든 자 고친 일을 그만 둔 교회가 많습니다. 이걸 우리가 고쳐야 돼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기 때문에 여러분 가슴속에 모시고 있는 예수가 죄 사함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서 병든 자도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치료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치료가 없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가 기독교가 될 수 없지 않나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러분을 용서와 의로 돌보아주시고 오늘도 여러분 성령 받게 해주시고, 오늘도 치료해주시고, 오늘도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오늘도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소망을 주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예수님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마음에 생기를 받아서 일어나 마귀를 물리치고,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이 마음에 희망과 꿈을 심어주어서 바라던 목표가 이루어지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들어 믿음이 마음속에 생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27절로 28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옷자락에 손만 대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그 여인의 병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에게 치료가 넘친 것 같이, 여러분도 ‘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예배 보러 가서 예배를 볼 동안에 내가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 있을 때, 병자면 기도하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식한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 성령 충만을 주시는 예수님, 치료해주시는 예수님, 축복 주시는 예수님, 부활영생을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주로 주신 것입니다.

 4.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생애가 넘치도록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생기가 흘러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성경에는 보여주고 있는데, 에스겔서에 보면 백골골짜기에 사람의 뼈다귀로 산더미처럼 뼈다귀가 늘어져있는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저들이 살아 일어나느냐?”, “아이고 저런 백골이 가득 차 있는데 저 뼈들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그 뼈들을 향해서 말을 하라”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에스겔37장 9절~10절)
  백골이 된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생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시냐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생기가 충만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5. 생명의 근원, 십자가

 죽음의 기가 흐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생명의 기가 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산 생활에 생기가 넘쳐흐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의 기가 흘러넘칩니다. 저는 생기가 넘쳐나지 못할 때, 몸이 아프고 괴로울 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 앞에 “주님 성령의 불화로를 내 가슴속에 부어주어서 천국의 성령의 불길이 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가슴속에 하나님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온 몸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나가서 생기를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른 뼈다귀에 명령해서 뼈다귀가 살아나서 대 군대가 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는 어디에 가서 생기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생기의 근원이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밑에 가서 “생기야 십자가를 통해서 내 온 몸속에 불러질 지어다!”하고 기도하면 용서의 생기, 성령 충만의 생기, 치료의 생기, 축복의 생기, 영생복락의 생기, 세상에서는 꿈꿀 수도 없는 그 놀라운 생기가 성령으로 여러분에게 불어오는 것입니다.
  생기가 들어오면 참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볼 수 있고 너무나 좋은 은혜를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은 십자가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면 생기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생기를 채워주시옵소서. 생기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마음으로 믿음에 의지해서 기도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장10절)
  자꾸 하나님의 생기가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의 생애 속에 열매 맺게 되는 것을 말로써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써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 용서의 생기가 넘쳐납니다. 치료의 생기가 넘쳐납니다. 축복의 생기가 넘쳐납니다.” 기도할 뿐 아니라 입으로 자꾸 시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보면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입으로 그렇게 시인한 것이 진짜로 기도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하고, 고달플 때 생기가 넘쳐나야 살아갈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말을 늘 자기에게 했습니다. “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진 것을 늘 입술로 시인해야 되고,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대면 낫는다.’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전부 입으로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나는 낫는다.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 난 그리하여 건강을 얻는다.”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신앙을 복 돋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다 여러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체험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가 시인을 하면 그 입술의 파장이 나가서 변화와 창조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심이 수면에 운행해도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수면에 하나님의 심이 운행하고 있는데 언제 역사가 일어났냐, “빛이 있으라” 입에서 말이 나가니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온 천지가 입술의 말을 통해서 성령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운행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말로써 표현하면 변화와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말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말한 대로 됩니다. 생각한 대로 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말로써 여러분이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혈루병 앓은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 살 수 있다는 희망과 꿈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이 변화와 창조를 가지고 옵니다.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화를 갖다 주실 때 언제나 말로써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운명을 변화시킬 때 아브람을 축복하고 난 다음에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었습니다. 많은 조상의 아버지라고 바꾸었습니다. 그 생애 입술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이름을 바꾸어준 것입니다.
  하루에 이름을 제일 많이 부르지 않습니까? 그만큼 입으로 시인하게 되면 기적이 일어나거든요. 사래(사래)도 사라로 바꾸십니다. 아직 이삭을 낳지 못했을 때 많은 자식의 어머니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자식도 없는데 많은 자식의 어미라니? 한 두 자식의 어미라고 해도 좋을건데, 많은 자식의 어미라니 너무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사람들마다 우습지만 그 입에서 나온 이름이 창조적인 본능을 행사해서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사라는 많은 자식의 어미가 된 사라, 변화가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소원과 꿈이 있으면 그 소원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믿음의 기도를 하고, 그 다음 이루어진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힘이 없다고 하지만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고 난 다음 보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말한 것이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 강수를 언제나 마시기를 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오중복음으로 확실히 우리가 알고 입술로 강하게 시인하면 생기가 우리 삶 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 강이 넘쳐나고, 생명의 바람이 넘쳐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는 삶의 무게로, 질병으로 고통하며 낙심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오니,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입술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주 안에서 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이영훈목사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1∼4절)

  약 2천년 전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서 그 성령이 임한 놀라운 역사로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습니다. 말씀을 외울 정도까지 말씀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그대로 살기를 원했지만 성령 받기 전 그들의 삶은 무기력했습니다.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은 받은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위험이 다가오자 그의 스승인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간 그러한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 받고 나니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됩니다.  ‘주님,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하여주옵소서! 성령충만 받아서 죄와 싸워 승리하고 문제와 근심과 걱정과 어려움을 쫓아내고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

  먼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주님이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 절인 사도행전 1장 5절을 보면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침례를 받으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침례가 무엇입니까?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성령의 침례라는 것은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한 결과, 주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서 주님을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오시는데 ‘너희에게 보혜사로 오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란 무엇입니까? 보혜사를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이는 ‘옆에서 도와주는 분’의 의미입니다. 재판장에 나가서 억울한 사람을 대변해주고 바른 판결을 받게 해주는 변호사처럼 늘 옆에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켜서 기도하게 하시고, 감동시켜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감동시켜서 늘 기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천국은 가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올 때 상처받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고통을 당하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 많은 세상에서, 죄악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은 받기 전에 모릅니다. 받은 사람만이 압니다. 받기 전엔 ‘왜 받아야 되는지’,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받고 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비교한다면 성령 받기 이전의 상태는 기름통에 기름이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라함은 자동차의 기름통에 기름이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때문에 예전에는 기름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라면 이제는 기름이 완전히 가득차서 차가 쌩쌩 잘 달릴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겨우겨우 살지 아니하고 기쁘고 감사함으로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기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것입니다. 

 2. 기도하며 기다리는 제자들

  그런데, 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제자들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 붙잡고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더니 열흘째 되는 날,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권능이 임했습니다. 그 교결과 마음에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염려, 근심, 걱정도 떠나 가버립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됩니다. 시편 40편 1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훈련 과정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급합니다. 식당에 가서도 앉기만 하면, “빨리 빨리 갖고 오세요. 빨리 빨리.” ‘빨리 빨리’를 전 세계에 수출했어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빨리 빨리’를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빨리 빨리’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100미터 달리기할 때는 ‘빨리 빨리’가 좋지요. 그러나 모든 것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먼저 땅을 많이 파고, 기초를 든든하게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충만 받기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성령충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옆에 루이스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 놀라운 부흥이 1949년에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주역이 몸이 불편한 80대 할머니 두 분의 기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부흥의 주인공은 언니 패기 스미스(당시 84세)와 동생 크리스틴 스미스(당시 82세)였습니다.
  언니는 시각장애로, 동생은 관절염 장애로 거동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이 루이스 섬에 부흥을 허락하여주시옵소서. 부흥을 허락하여주시옵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이사야 44장 3절)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당시 유명한 설교자며, 부흥사인 던컨 켐벨 목사님을 그 마을에 초청할 것에 대한 마음의 감동이 왔습니다. 담임목사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모셔다가 우리가 이 섬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가 말씀 듣는 시간을 갖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이 던컨 캠벨 목사님께 연락을 하니까, 마침 그때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부흥에 대한 사모함을 주셔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94편 14절)라는 말씀을 주셔가지고, 스코틀랜드 북쪽을 위해서 간절히 소원을 갖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요청이 오니까 그곳에 가서 5주 동안 부흥회를 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가 임했는지, 밤이 새도록 저들이 기도하고 예배가 끝나고 축도가 끝났는데도 가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서 이 놀라운 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젊은이들도 교회로 몰려와 울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여러 지역에서 기도회가 마을 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회마다 성도들로 차고 넘쳤으며, 교회가 다시 살아났다! 술주정뱅이들이 회개하였고, 술집들이 영업이 안 돼서 문을 닫았다. 당시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수 있었다!”
  이 놀라운 부흥이 3년 간 계속되어서 섬 전체가 복음화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주여! 이와 같은 부흥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기도의 용사가 되어서, 주여, 이 대한민국에 놀라운 부흥이 다가오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하여주옵소서! 일천만이 이천만이 되고, 이천만이 삼천만이 되어 남북통일 되었을 때 최소한도 남북한 절반은 예수 믿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의 역사가 임해야 됩니다.  

 3. 성령충만의 역사

  성령충만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장에 4절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히는 체험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의 은혜가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충만 받고 변화 받아서 주님의 영광위해 쓰임 받는 일군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믿고 나서도 늘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쉽게 상처를 주고받고, 다투고, 분노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낙심하고 살았던 우리 모습이 성령충만 받아서 완전히 변화되게 하여주시고 날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하게 하여주시옵소서!’
  2천년 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바람 같은 성령, 불 같은 성령, 방언이 동반하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먼저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풍이 한 번 불고 나면 모든 미세먼지고 더러운 먼지가 다 사라져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내 마음속의 모든 더러웠던 생각들이 다 떠나버리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이 바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불어오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죄와 절망의 세상이 변화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생명이 넘치는 세상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이 바람같이 임하고, 나가서 불의 모습으로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절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불은 어둠을 밝힙니다. 세상이 거짓 뉴스로 캄캄해져버렸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불을 밝혀서 모든 거짓을 몰아내야 됩니다. 불을 밝혀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야 됩니다. 흑암의 권세를 몰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불은 모든 것을 태웁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더러운 죄악을 태우십니다. 누가복음 3장 16절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불이 타오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이 성령의 불길에 싸여 한평생 복음을 전하며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평생에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은 항상 내 마음속에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70년대 우리 교회가 서대문에 있었을 때에 얼마나 부흥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지 예배 후에 쏟아져 나오는 성도들로 인해서 서대문 로터리가 다 마비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요청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사고가 날까봐, 와서 대여섯 명이 늘 교통을 정리해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놀랍게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잠만 자고 깨고 나면 교회가 부흥하고, 또 부흥하고, 또 부흥하고, 또 부흥했습니다. 2천명이, 3천명이, 4천명이, 5천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어릴 때 ‘아, 교회는 잠만 자고 깨면 부흥하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목회해보니까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성령의 불이 붙어야 됩니다. 그래야 부흥의 역사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 받고 방언을 말해야 됩니다. 방언이 무언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그 말의 내용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말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평안함을 주시고, 내가 영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김동길 박사님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릴 때 늘 어머니 방언기도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그랬어요. 옛날에 은혜 받은 분들은 다 방언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성령 받고 방언을 말하면 그때부터 기도가 깊어집니다. 옛날에는 5분을 하지 못했던 기도를 한 시간 하고 두 시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성령 받고 방언으로 기도할 때 내가 영으로 기도하게 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이중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주님이 주신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 받고 방언을 말하며 능력 받고 권능 받아서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성령 받고 나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모습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저들이 방언으로 말할 때 그 말이 각 나라 언어로 바뀌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입니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오순절 절기에 각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저들이 성령을 받고 나가서 방언을 말하는데 각자 자기 나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듣게 되었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영국 사람은 영어로 듣게 되고, 프랑스 사람은 불란서 말로 듣게 되고, 남미에서 온 사람은 스페인 말로 듣게 되고 중국에서 온 사람은 중국말로 듣게 되었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빙크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큰일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모든 사역’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이 와서 방언으로 말하는 얘기를 들을 때 보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간증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니, 저 사람들이 언제 우리나라 말을 배워가지고 저렇게 우리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는가?” 모두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언어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 한 입에서 욕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고 남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입에서 같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늘 칭찬하고 격려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 돌리고 기쁘시게 하는 그러한 고백을 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요. 성령 충만하여야 우리가 그와 같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을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국 야구의 전설이라고 하는 이만수 안수집사님. 한양대학교 1학년 때 소개팅으로 만난 이신화 자매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랑 사귀려면 같이 교회 다녀야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자매랑 사귀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매를 따라 나온 곳이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화 씨가 또 말합니다. “만수씨, 우리 오산리금식기도원 가요. 이제 만수씨도 성령님을 직접 체험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산리금식기도원에 따라 올라가서 금식하라 그러니까, ‘내가 대식가인데 굶으면 내가 어떻게 사나!’ 그런데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결신기도 시간에 신화 씨가 옆에서 쿡 찌르면서 빨리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기도를 따라 하는 중에 성령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를 고백합니다. “그렇게 일어섰는데, 평생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습니다. ‘아, 이 느낌은 도대체 뭐꼬?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화 씨 말이 진짠가 보네, 오, 주님!‘ 그 체험 후에 제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야구 연습을 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감사가 넘쳤습니다! 스윙 연습을 하다가 배가 아파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신기하게 말끔히 나았습니다!”
  늘 기도하며 야구를 하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처음 출범할 때 삼성 라이온스 소속으로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홈런을 치는 등 한국 야구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골든글러브 5회, 최고 타격왕 3회, 최고 타점 3회를 수상하고, ‘이만수 선수’하면 항상 열심히 뛰고 파이팅이 넘치는 그의 모습, 홈런을 치고 나면 두 손을 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경기장 한 바퀴를 도는 것이 그의 모습이었는데 투수들이 그게 미워가지고 자꾸 몸에 던져가지고 많이 맞았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나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지방에 내려가면 꼭 목사님들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고, 후배 선수들을 다 모아서 같이 예배드리게 하고. 한국 사람으로는 첫 메이저리그 코치로 활약을 하고 한국 프로야구팀 감독을 거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라오스로 건너갑니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라.” 그래서 그곳에 라오스 역사상 처음으로 야구팀을 만들어서 야구를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변화가 되고 아이들이 몰려오게 되었어요. 아이들과 훈련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수야, 내가 너를 최고의 자리까지 인도하고 많은 인기를 누리게 한 것이 이때를 위함이었다.”
  아이들이 변화되니까 라오스 정부가 감동해가지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고 야구장을 지으라고 야구장 네 개와 숙소 및 훈련장을 짓는 그러한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전해 준 것이 미국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라오스라고 하는 나라에 우리나라랑 국교 수교도 되지 않고 공산주의 국가에 최초로 야구를 전한 것이 이 이만수 안수집사님. 평신도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 가서 야구를 보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 것입니다.
  야구는 한 바퀴 찍고 돌아오면 1점 받는 것인데, 홈으로 돌아오는 것이거든요. 그 아이디어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이디어 갖고 만든 이 야구 시합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웠다는 것을 모르고 열심히 야구를 하는데, 앞으로 그걸 좀 알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저의 꿈은 야구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쉼 없이 달려갈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철칙을 붙들고 말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공산국가에 가서도 복음을 전할 수가 있고, 성령충만 받으면 내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넉넉히 기도하며 이길 수가 있고, 성령충만 받으면 기쁨이 넘쳐나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늘 시험에 들고 상처입고 염려, 근심, 걱정하며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이제 성령충만 받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그와 같은 축복받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모두가 성령충만 받아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 받아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기 원하오니 주님 함께하여주옵소서. 우리 일생을 인도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어머니의 기도/이영훈목사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사무엘상 1장 9-11, 17-18절)

세계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사람들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신학자 어거스틴 뒤에는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존 웨슬리 뒤에는 기도하는 어머니 수산나가 있었고, 미국 16대 대통령으로서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뒤에는 낸시 행크스 링컨이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가 위대한 자녀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사사이며 선지자, 제사장으로 큰 업적을 남긴 사무엘의 뒤에는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성경의 위대한 어머니 중에 한 사람입니다. 오늘 한나의 신앙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성전 중심/예배 중심의 신앙

한나는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매년 한나가 야훼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매년 한나는 남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복 받는 비결은 기본이 잘되어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기본은 바로 예배입니다.

‘미국의 소리’ 황재경 목사님. 일찍이 미국으로 가셔서 방송을 통하여 많은 한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황재경 목사님께서 살아계실 때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에 와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가 평생 신앙생활 하면서, 북한에서, 남한에서, 미국에 와서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누군가 살펴보았더니, 첫째로는 주일날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요, 둘째로는 십일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게 신앙의 기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서 언제나 좌정하고 계셔서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불러서 식사하자고 하면 우리는 입는 옷도 단정히 입고 자기 모습을 잘 살펴보고 그 자리에 나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신 이곳에 나오는데 우리가 절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또 예배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됐습니다. 또 하나님이 정해준 법을 따라서 성별된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거룩하지 못한, 성별되지 않은 불을 가지고 제사하기 위해 나갔다가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장면이 레위기 10장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훼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야훼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훼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훼 앞에서 죽은지라”

이만큼 예배는 절대로 소홀하게 하거나 거룩하지 못한 모습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을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엄히 벌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간절히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활짝 여시사 넘치는 은혜를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편 50편 23절은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해서 늘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제 할아버님(이원근 장로)은 얼마나 성수주일하는 것을 강조하셨던지 절대 주일날에는 예배드리는 것 외에 다른 거 하지 말라고 엄히 저희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님은 ‘성수주일이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주일날은 만화책도 보지 말고, 세상 음악도 듣지 말고, 예배드리는 일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어디 가서 뭐 사 먹지도 못했고, 물건을 사지도 못했고, 예배드리는 일만 그리고 그날 하루는 성경 보고 기도하고 주님 생각하는 날로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제가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화폐 개혁하기 전이라 우리가 사용하던 돈이 ‘환’이었는데, 용돈을 50환 주면 그것을 갖고 일주일 내내 잘 썼습니다. 50환이 그때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만 제가 100환짜리를 할아버님께 받았어요. 두 손을 내어서 100환짜리를 받으면, ‘이건 하나님께 갖다드려라. 가장 귀한 것,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라고 말씀하셨쓰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 갈 때 두 손 내밀어서 100환 받는 그런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할아버지께 받은 100환을 교회에다 드리고 오면 그렇게 마음이 좋았습니다. 뭔지 몰랐지만 하여간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그 마음에 좋았던 것 같아요. 철저하게 이렇게 신앙적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에, 저희 가정이 이렇게 복을 많이 받게 되고, 또 제가 오늘 여기서 여러분을 섬기게 된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도 그러하였습니다. 자녀를 무려 19명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또 신앙적으로 상담도 하고 교육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주기도문을 가르쳐서 배우게 했는데, 항상 잠자리에 들 때와 일어날 때 주기도문을 하도록 하였다. 아주 어려서부터 말을 하거나 걷는 것을 하기 전에 이미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가정예배를 드릴 때는 조용히 하도록 가르쳤고, 그다음에는 무릎을 꿇거나 말을 하지 못해도 몸짓으로 표현해서라도 축복을 원하는 기도를 하도록 가르쳤다. 다섯 살이 되면 글을 읽는 법을 가르쳤는데, 글자를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창세기 1장을 읽기 시작하였다.’

철저하게 성수주일하는 것을 가르쳤고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함부로 욕하지 않는 것, 약속을 잘 지키는 것, 매일매일 가정 예배드리는 것, 음식 버리지 않는 것, 또 이부자리 잘 개는 것, 이런 것들을 교육을 했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날을 엄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주간 중에도 틈틈이 경건과 기도의 행위로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되며, 이렇게 해야만 주의 날을 만들어 놓은 목적을 충실히 이루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얼마큼씩 시간을 내어 가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했다.’

이러한 신앙교육의 결과, 그의 자녀들이 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어머니가 위대한 자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예수 잘 믿는 일에 먼저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좋은 직장도 얻고, 사업도 잘되고, 좋은 학교에도 가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은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철저한 신앙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자손대대에 이어져 내려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간절한 기도를 드린 한나

간절히 기도를 한 한나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약 시대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그러한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저 사람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봐? 그래서 하나님이 태의 문을 안 여셨나봐?’ 그러니 한나가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남편 엘가나에게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브닌나고 하나는 한나입니다. 한나는 남편에게 사랑을 더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고, 브닌나는 자녀를 낳아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구박했습니다. 애도 못 낳는 것이 왜 그러냐고 구박했습니다. 얼마나 그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나가 그렇게 구박받고 자기를 멸시해도 싸우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무시를 당할 때 성질을 내고 싸웁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괴롭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슬플 때 하나님께로 나와 기도했습니다.

‘주님 아시죠? 주님 보시죠? 제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주님, 내 소원을 들어 응답하여주시옵소서.’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나는 무엇보다 먼저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애통하는 마음의 기도, 눈물의 기도가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삶이 풍요로워지고 난 후에 눈물의 기도가 메말랐습니다. 감사의 기도가, 감격의 기도가 사라지고, 눈물이 사라진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옛날에는 엎드리기만 하면 그저 눈물, 콧물 쏟고 주님 은혜 감사해서 통곡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기도했던 것 우리들의 모습인데, 요즘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눈물이 나지를 않아요. 침을 찍어 발라서 몸부림 쳐도 눈물이 메마른 인생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일본에 가서 성회를 인도해보니까 성령이 역사해서 그 감정 표현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울더라고요. 일본 사람들은 얼마나 감정을 잘 자제하는지 장례식 때도 눈물 한 방을 안 흘리는데, 은혜 받으니까 눈물, 콧물 쏟으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가 임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 은혜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눈물의 기도를 우리 주님이 보시고,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눈물과 통곡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나아가서 한나는 헌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감사하여 받은 은혜를 주님 앞에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입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자녀가 없는 그가, 자녀를 주시면 먼저 하나님의 일꾼으로 드린다고 그가 서원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만일 그 자녀를 주시고 또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주님이 주시면 내 자녀를 주님 앞에 바쳐서 평생토록 주님 일 하게 하겠습니다. 주의 종으로 섬기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헌신의 기도, 섬김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와 같은 큰 축복을 주시면 그 축복으로 주님을 섬기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나의 기도는 인내의 기도였습니다. 끈질기게 주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1장 12절에 “그가 야훼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다가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다가올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시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을 이루고 구름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면 비가 내려 쏟아지듯이,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우리 기도의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을 이루고 마침내 응답의 단비로, 은혜의 단비로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 절대로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자녀를 위한 기도는 평생 기도입니다. 자녀가 지금 달라지지 않아도, 자금 속을 썩여도, 문제를 일으켜도, 사고를 쳐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그 자녀가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를 주님이 보십니다. 주님이 들으십니다. 주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기도의 용사가 되어서, 특별히 자녀를 위해서 평생 동안 기도를 쉬지 않는 그와 같은 부모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긍정적 믿음의 신앙

한나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 17절과 18절은 설명합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처음에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 취한 줄 알았습니다. 얼굴이 뻘개가지고 입술을 덜덜 떨고 있으니까 ‘아니, 왜 대낮부터 술에 취해있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제사장님. 제가 너무나 내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어 제가 하루 종일 기도하다보니까 이렇게 이젠 힘이 다 빠져서 입술을 떨고 있는 것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이 말합니다. ‘가라! 평안히 가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그 말을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아멘! 내가 응답받은 줄 믿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서 다시는 근심하지 않고 얼굴이 환하게 펴서 그동안 염려 근심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제대로 무엇 하나 하지 못했는데 마음이 평안해서 음식도 잘 먹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이미 응답받은 것을 믿고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요한일서 5장 15절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절대 긍정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둘러싸인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이 부정적인 사람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으면서도 부정적으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애굽에서 해방 받았는데도 그들이 늘 불평을 쏟아 놓아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원망과 불평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버림을 받았던 사건을 우린 기억합니다. 20세 넘은 장정 가운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긍정적 고백을 한 사람이 두 사람 밖에 없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망 불평하면서 왜 우리를 죽을 곳이 없어서 이곳까지 끌고 나왔냐고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32장 11절, 12절은 설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야훼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긍정적인 믿음이 기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돌아가서 “가서 먹고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사무엘상 1장 18절)고 했습니다. 이미 응답받은 줄 믿고,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나아가면 기적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축복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병이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도 그 병과 싸워 이깁니다. 물리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병을 안고 또 병을 키웁니다.

‘아이고, 나 죽었네. 나 죽었네.’라면서 입만 열면 죽는다고 하니까 이 몸의 병들이 더 활개를 얻고 날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병을 물리쳐야 합니다. 감기 기운 있을 때 감기를 물리쳐버리고 어떠한 질병이 내게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은혜로 우리가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자녀를 다 성공시킨 이원숙 여사님. 살아계실 때 참 가깝게 지내고 또 저희 교회에도 자주 나오시고 그렇게 자녀들을 키우신 귀한 어머님이신데, 해방 이후에 생계가 막막해서 음식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곰탕집을 하면서 세계적인 음악가 가족을 만들어냈습니다.

큰딸 정명소 선생님은 세계적인 플롯티스트이자 찬양 사역자인데 줄리어드 음대를 나온 후에 예일 대학과 워싱턴 주립대학을 거쳐서 합창과 교육학 박사를 받고 한국에 와서, 5년 동안 우리 교회 호산나 성가대를 지휘한 바가 있습니다.

그 아들 중에 정명철이라고 하는 분도 굉장히 탁월한 음악성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본인이 무대 앞에 서는 것을 원치 않아서 공부하여 경영학 교수가 되어서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천국 가셨구요.

정경화 선생님은 바이올린에 재능을 주셔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전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게 되었는데, 늘 어머니가 가서 기도하고 격려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서 어머니의 기도를 받고 자신감을 가지고 나가서 연주를 했습니다.

정명훈씨가 피아노에 재질을 보여서 14살 때 시애틀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는데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실수하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야, 걱정하지 말어. 너 앞으로 큰 무대에 서고 유명한 사람이 될 텐데 그때 틀린 것 보다 지금 틀린 게 백배 낫지. 좋은 경험을 한 거야. 잘했어. 정말 잘했어. 엄마 볼 때 네가 자랑스럽다.’라며 아들을 칭찬했습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격려가 오늘날의 세계적인 정트리오를 만들었습니다.

정명화 선생님이 말합니다. ‘저희 7남매를 향한 어머니의 절대적인 믿음과 칭찬은 그 어떤 백 마디의 교훈보다 큰 채찍질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희들이 있었을까요?’

본인은 1980년 남편이 천국가고 난후 1984년에 자녀들이 다 결혼하자 66세에 신학공부를 하고 1986년에 미국에서 신학교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다가 그곳에서 은퇴하시고 그 후 천국에 가셨습니다. 생전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내게 남은 소원이 있다면 살아서 주님을 만나 뵙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순간순간 내 소망을 이루어주실 그날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희망에 찬 설렘으로 부풀어있다. 삶은 아름답고, 귀중하고, 믿음과 함께 영원한 것! 나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What a precious life!”

“얼마나 여기 귀한 믿음인가!”

그는 절대 긍정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믿음이 이와 같은 세계적인 음악 가족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어머니의 긍정적인 고백과 칭찬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어머니로부터 못한다고 야단맞아본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늘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실수를 해도 “더 잘할 거야. 그거 걱정하지 말어.” 늘 격려하고, 칭찬하고, 칭찬을 통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고 세계적인 인물로 자녀들을 양육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우리 자녀들이 변화되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한나는 이러한 긍정적인 믿음을 통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1장 27절, 28절입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야훼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야훼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야훼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야훼께 경배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그대로 첫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사무엘상 2장 21절입니다. “야훼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야훼 앞에서 자라니라”

여러분, 모두 이같이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예배 중심의 신앙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긍정적인 믿음의 자세로 기도 응답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자녀들의 일생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 찬송, 존귀,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무장하여 예배 중심, 기도 중심의 신앙으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자/이영훈목사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장 13~16절)

  어린아이들은 가정의 꽃이고 희망이고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미래입니다. 장차 교회의 큰 일꾼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어리고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많이 무시당해왔습니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 날이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 운동가들과 함께 외친 구호는 우리 어린아이들을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였습니다. 얼마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쉽게 욕을 하고 잘 때리고 아이들을 막 함부로 다루고 부렸던지 그때 캠페인이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였던 것입니다.  94년이 지난 오늘날 얼마큼 아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모습이 달라졌습니까?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오늘날도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 맞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기까지 하고,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종종 뉴스를 통해 대하게 됩니다. 지금도 무시당하고 매 맞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저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으로 섬기는 그런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이 기도받기 위해서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막고 꾸짖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자들의 태도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들에 대한 부모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 당시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훌륭하신 선생님이나 또 존경하는 분들에게 기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 받으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니까 제자들이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으면서 특별히 기도 받기 위해서 온 아이들을 막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왜 선생님 피곤하게 이렇게 와서 괴롭히느냐고.
  마태복음 19장 13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 당시는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때에도 여자와 아이의 수는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마태복음 14장 21절을 보니까,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어린아이들의 인권은 전혀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이후 아이들을 존중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관습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재산분할을 원치 않아서, 여자 아이라서, 사생아라서, 쓰레기 더미나 배설물 구덩이에 아이들을 던져버렸습니다. 거의 다 죽게 되는데 어쩌다 구조된 아이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덕분에 교회가 세워지고 난 이후, 아이를 버리는 악습은 폐지가 됩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한 운동이 퍼져 나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초창기 교훈서에 보면, 당시 널리 성행하던 낙태와 유기와 영아 살해 같은 관습들이 금지되어 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황제가 전 제국에 걸쳐 유기라는 관습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세월이 가면서 서서히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아기를 똥구덩이에 던지지 않고, 수도원이나 교회 앞에 데려다 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고아원이다!”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곳곳에 고아원들이 세워져서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아이 사랑으로부터 출발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기도받는다고 그것을 꾸짖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사람을 판단하고 당시 관습에 따라 아이를 멸시한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믿고 우리가 달라져야 되는데 예수님 믿고 난 후에도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이, 힘이 없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해야 될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고 버림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으스대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권세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오래 다닐수록 우리가 더 온유와 겸손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처음 나와서 잘 뭘 모르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잘 돌봐야 됩니다. 무엇을 잘 모른다고 꾸짖고 야단치면 새로 나온 성도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섬김의 본을 보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빌립보서 2장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예수님의 제자들 같은 그러한 태도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좀 더 배웠다고 가진 것이 많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없는 사람을 소홀히 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마가복음 10장 14절은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꾸짖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다.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데 왜 너희들이 내게 오는 것을 가로 막느냐?’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 6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주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은 온유와 겸손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우월의식에 빠져있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인 것입니다. 교회의 미래인 것입니다.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아이들에게 욕하고 아이들을 때리고 이렇게 상처를 주는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흔히 발견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부터 먼저 그 풍토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잘 사랑으로 돌볼 때 이 나라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남자만 5천명이고 여자와 아이를 합해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다 먹게 되었는데 정작 이 일의 큰 기적을 행하도록 그 헌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찾는다고 하시니까 자기가 먹을 것을 주님께 내놓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9절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어린아이의 헌신이 굶주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는 큰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아이들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존중받아야 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이 화났을 때 아이들에게 막 함부로 말을 하고 욕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집에서나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 가면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그러한 교육을 해야 되는데 권위적이고 야단치고 꾸짖는 그러한 모습의 교육풍토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어린아이였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다윗이 소년이었을 때 그를 불러 기름 부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도 작은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 그 나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이 주 앞에,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에게 기도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몬테소리 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교육학자 마리아 몬테소리가 제창한 교육으로서 전 세계에 이 몬테소리 교육이 파급되어 있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원래 의사입니다.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의사였는데 어느 날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합숙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을 우연히 방문을 하였다가 아이들이 마치 짐승처럼 대우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지적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저렇게 아이들이 소홀히 여김을 당하나!’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 가둬놓고 먹을 거만 세끼 주는 것이, 그것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인가!’
  그래서 그가 그때부터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최초로 공립재활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특수 기구도 만들고 그래서 아이들이 거기서 행복을 느끼면서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의사 직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의 거지로 살고 있는 엄마와 아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눈이 반짝반짝하면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아이들의 마음에 갖고 있는 저 내일을 향한 꿈을, 저 빛을 비취게 하자. 어린이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빛을 비취게 하자.’
  그래서 가난한 동네에 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집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어린이 집입니다. 지적장애 아이들에게 하던 모든 노력의 몇 배로 다시 또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버려져서 자라는 아이들이 그것을 교육을 받으면서 아주 뛰어난 인재들로 성장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보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어린아이를 팔에 안으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중 한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그 어린아이를 만났는가? 나는 이렇게 그들을 만났다! 어린이집에 온 아이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하고 방치된 어린이로 자란 아이들이었다. 말을 건네지 못할 만큼 위축되고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아이들이 변화해서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랐지만 그때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돌본 것 밖에 없습니다.” 상 받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 이와 같은 글이 적혀져있습니다.
  “나는 나의 친애하는 모든 어린이가 인류와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 의사의 헌신이 전 세계 어린아이의 교육의 풍토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어서 주님께 쓰임받기만하면 이와 같은 위대한 일이, 놀라운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변화되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의 가장 큰 위기는 북한이 핵무기 가지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요,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동서로 나뉘어서 지역 간에 다툼을 하는 것도 아니요, 진보와 보수가 다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출산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두 사람이 둘을 낳아야 현상 유지인데 두 사람이 한 사람 밖에 낳지 않습니다. 1년에 40만 명이 태어납니다. 80만 명이 태어나야 되는데 40만 명이 태어납니다. 앞으로 2, 30년 후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노동시장이 완전히 붕괴되고 큰 위기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중앙일보에서 1년 넘게 특집 기사로 내보내는데도, 102조를 쏟아 부었는데도 아직 저출산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 존중 캠페인을 벌여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셋에서 다섯은 낳자. 다섯! 기본적으로 다섯씩만 낳으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이 문제는 국가가 아무리 캠페인을 벌여도 안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이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게 하기를 바랍니다. 

3. 천국을 소유할 자

  천국을 소유할 자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순수함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7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는 백지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이 그 마음에 심어준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을 심어주면 사랑을 그리고 미움을 심어주면 미움을 그립니다. 기쁨을 심어주면 기쁨을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면 분노를 그립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순수합니다. 어린아이에게 흰색이라고 하면 흰색이라고 믿어요.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먹으면 몸에 안 좋다. 그러면 순수하기 때문에 안 좋은 건 먹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순수함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뒤에 가서 다른 말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사업 파트너에게 피해도 주곤 합니다.
  대한민국에 없어져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어음 제도입니다. 지금 공사를 했는데 공사가 끝나서 돈을 줘야하는데 3개월 후에 받으라는 3개월 후의 수표를 주는 거예요. 6개월 후, 1년 후. 현금으로 주고 계산을 해야 경제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나중에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6개월 후에 돈을 못 갚게 되면 부도를 내요. 연쇄 부도가 일어나서 많은 사업이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남에게 사기를 칠 줄 모릅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힐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늘 순수한 믿음을 갖고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었을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을 보면 이와 같은 제자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 천국 가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아있습니까?” 항상 이 사람들은 높은 자리, 위로 올라가는 것만 관심을 갖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절과 3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들은 늘 부모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꼭 부모에게 와서 “이것 좀 해줘.” “이것 좀 열어줘.” “나, 무엇 좀 사줘.” 늘 부모에게 부탁해요. 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 더 배우면 교만해지고, 조금 더 가지면 교만해지고, 조금 더 높아지면 교만해지고. 교만이 독선이 되고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겸손해야 되고 배우면 배울수록 겸손해야 되고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겸손해서 섬기는 자가 될 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35절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20장 26절, 27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섬김을 체질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섬길 것이 무엇인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이 여러 사람이 차를 타고 내려가다가 휴게소에 들어가면 앉아서 음식을 시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섬김이 체질화 된 사람은 앉자마자 휴지를 가져다가 놓고 수저통을 열어서 수저를 차립니다. 물컵도 가져다가 물도 따릅니다. 거기에 비해 어떤 사람은 손도 까딱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앉아서 차려주는 밥만 먹곤 합니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도 그냥 밥 먹고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있고 다 정리해서 다시 식기 반납 통에 갖다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체질화 되어있는 사람은 아예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체질화 되지 않은 사람은 어디 가서 먹고 놓고 그냥 나와요. 분명히 반납하라고 되어있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본을 보이지 않으면 이 세상이 굉장히 불편한 세상이 되고 문제 많은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본을 보여야 되고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 네 것, 다투고 싸우지 말고 베풀고 양보하고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움켜쥐고 사는 인생은 평생 불행한 인생입니다. 움켜쥐고 살다가 그렇게 쓰지도 못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풀고 또 베푸는 인생은 더 주시고 더 주셔서 풍성함을 누리고 살다가 장차 주님이 오라 부르실 때 영광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과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한평생 섬김의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마음이 굳어진 제자들처럼 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교만의식에 살 것이냐. 그것이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한평생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겸손히 섬기며 살게 하여주시고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하여주시고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조용기목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한복음 3장 14∼21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주셨으니 하나님에게는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꿈을 가지게 되고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가 건강이요, 둘째가 가족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강도 좋고, 가족도 중요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1. 삶의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예수 믿는 자는 이러한 긍정적인 믿음의 자세를 항상 그 생활태도에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 삶의 요점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염려, 근심을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간구를 하고 맡기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개인문제, 가정 문제, 생활 문제, 자녀 문제, 사회 문제, 국가 문제. 문제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엎드려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바다 파도가 잠잠해지고 고요해 지는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가 평안을 주시면 굉장히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어려운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우리가 살아나가면 하나님께서 굉장히 영화롭게 여기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느냐 하면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아가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런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몸 찢고 피 흘려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주시는 긍정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는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 엎드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가 내는 고통의 소리를 마음에 들으면 마음에 어떠한 평안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면 염려 걱정할 일이 많고 변명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흐르는 핏방울을 받아가면서 예수님 고난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 자신은 예수님 보혈로 말미암아 목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던 우리가 예수님 보혈을 덮어썼으니 그 대가로서 용서와 의롭게 된 저 자신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해도 예수님이 나 때문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가 “너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고 고함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우리가 지금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한 번 바라보십시다.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피가 나의 생애 위에 떨어져서 씻어주신 그 대가로 용서와 의로움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 굉장히 의로운 분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가 의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용서받은 의인 앞에 마귀가 참소할 수가 없습니다. 참소할 거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슴 뿌듯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예수님 온 몸이 찢어져서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을 통해서 보혈이 우리에게 덮어졌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찢어진 몸에서 고함을 칩니다.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내가 너 위해서 채찍에 맞아버렸기 때문에 대가는 지불해버렸다. 이제 문제는 너희들이 이를 인정하고 믿고 효과를 발생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우리 질병을 다 짊어졌을지라도 믿고 맡기지 아니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를 발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헛맞은 것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 그 수많은 질병과 고통을 예수님이 맞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 알고 그 보혈의 능력을 통해서 건강한 생명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자유, 해방을 얻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가 난다. 가정에 결혼을 하고 나니까 부부간 결혼생활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장사를 하니 장사 터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일어나도 가시와 엉겅퀴가 앉아도 가시와 엉겅퀴가 생겨난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모든 가시와 엉겅퀴는 내가 영원히 갚았다. 다 이루었다.” 우리가 저주를 받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청산되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의 가시와 엉겅퀴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저주받은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크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때문에 저주 받았는데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절대 저주받은 사람이 복을 받았다고 믿지 아니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두 복받은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너무 기뻐하시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볼 때도 복 받은 사람입니다. 무수한 죄인이 들끓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복이고,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써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또한 우리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복된 여러분은 부요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부활에 동참한 바가 되었음으로 여러분 속에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11:26)라고 말씀하셨는데, 참 엄청난 선언 아닙니까?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80먹은 할머니가 죽어서 시체실로 옮겨 놓았는데, 다시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어 응급실로 옮기고, 의사 선생님들은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 모르겠다”고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가 죽음을 보고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비웃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분들입니다. 참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그는 예수님은 우리를 외롭게 내버려 놓지 아니하고 자기와 꼭 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늘 기다려주시는 분이 보혜사인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라고. 그러므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바람과 같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모략과 재능을 주십니다.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 보혜사 성령께서 같이 계시고 도움을 베풀므로 항상 보혜사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성령이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으로써 저와 같이 계심을 감사합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로 인정합니다. 저는 환영합니다. 모셔 들입니다.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면 성령 보혜사께서 그 반응을 주십니다. 마음에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기쁨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 밑에 들어가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깨달아 보면 참 놀라운 은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소망과 꿈을 품어야한다

  우리의 삶에는 성령께 의지하고 소망과 꿈을 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과 꿈이 있어야 돼요. 마음에 소망이 없으면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꽃피어 나면 꿈이 만발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면 여의도 윤중제의 꽃들이 만발한 것처럼 우리들의 소망도 만개하게 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좌절하고 절망하나 소망이 꽃피어나면 꿈이 만발합니다. 꿈을 품에 품고 기도하면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9절에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원과 소망을 갖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원도 소망도 없는 자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위해서 고쳐주실 때 그가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꼭 물어보았습니다.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리고성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장님 거지였는데 성 밖에 앉아서 구걸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병 고침을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떠들면서 떼를 지어 지나가는 것을 느껴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으니까 예수님이 지나갔다고 하니까 일어나서 동냥하던 밥그릇을 던져버리고 겉옷을 벗어서 던져버리고 벌거벗은 몸이 되어서 나가면서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는 예수님이란 소식을 듣고 마음에 뜨거운 소원과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만 만나면 구걸하지 않고 살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돈 담은 그릇을 던져버리고 겉옷을 벗어버렸어요.
  그 당시에는 거지 노릇하는 데로 등수가 있어서 일등 장소에 있는 사람은 국가가 주는 제복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복을 벗어가지고서 예수님 향해서 제복을 던져 버렸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거지의 제복을 다시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제복은 바디메오의 살림 밑천인 것입니다. 비올 때 우비도 되고, 추울 때는 외투도 되고, 잘 때는 이불이 되고, 손님을 만났을 때는 예복이 되고, 그에게는 바꿀 수 없는 예복인데 예수님 지나간다니까 예복도 던졌습니다. 왜 그러냐면 사람들이 “야, 이 장님 거지야. 너 같은 사람은 부르짖어도 안 돌아봐주신다. 돌아가라!” 그리 고함을 치니까 뛰고 구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보시면서 “내가 네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간절한 소원이 있는 것을 주님이 보셨거든요. 그러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장님은 떠나가고 보게 되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병 앓던 여인도 군중 사이로 뛰어 들어가서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나을 것이라고. 그는 목숨을 걸고 뛰어 나갔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에는 혈루병은 나병과 같습니다. 군중 속에 들어갔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느냐 사느냐의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헤치고 들어가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어서 혈루병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발걸음을 멈추시고 돌이켜 보시면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둘러싸고 밀고 댕기는데 누가 손을 댔다고 말합니까?” 하고 베드로가 물으니까 “아니야 손 댄 사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그 여인이 더 감추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내가 손을 대어서 나았다”라고.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고쳤으니 평안히 가라.” 마음속에 뜨거운 믿음과 소원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뜨거운 믿음과 소원이 있으면 예수님이 그를 통해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하나님께 나가면 반드시 우리에게 크고 작은 꿈을 주시고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꿈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외국에 잡혀가서 종노릇 하더라도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꿈과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고 하심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꿈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과 꿈을 주시고 그 소망과 꿈을 통해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꿈을 꼭 가지십시오. 여러분 꿈을 꼭 가지십시오. 마음에 안 떠오르면 글로써 쓰십시오. 꿈은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께 가져올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굉장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었습니다만 꿈 때문에 강철왕이 되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볼품 없는 그림 한 폭이 벽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룻배 그림인데 그는 이 그림을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사람이 다 지나가고 배들이 다 떠나가 버리고 없는 휑한 해변 모랫가에 덩그러니 오랜 배가 한 척 버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 ‘반드시 밀물이 밀려오리니, 그날에 나는 바다로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지금은 썰물이 되어서 모래에 파묻히다시피 되어서 버림받고 있으나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밀물이 다가온다. 그땐 덩실 뜨면 나도 바다로 나간다. 이 카네기는 패가망신해서 빈손 들고 있었으나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 강철왕이 되었습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낡은 배 같다고 생각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밀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기도 올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밀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썰물에 고배를 먹었지만 밀물이 다가오면 바다를 향해서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가 오지요. 때를 기다린 사람은 때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래사장에 덩그러니 남은 나룻배와 같아도 바다로 가겠다는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밀물을 보내어 드넓은 바다로 출항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꿈은 삶의 척도인 것입니다. 얼마나 꿈을 꾸었느냐? 얼마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느냐? 성공적인 인생을 산 척도가 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나님이 얼마나 채워주셨는가 그것을 보고 인생을 성공하고 살았는가, 안 살았는가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여러분은 희망과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입을 넓게 벌리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입을 벌리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소원대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0편 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했는데 또한 믿음을 통해서는 꿈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각도, 꿈도, 소망도 믿음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3. 믿음에는 놀라운 창조력이 있다
 
  꿈이 믿음을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 것 때문에 꿈이 마음에 있으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믿음이 생기게 되고 믿음은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능치 못한 일이 없다니까 그 믿음이 얼마나 창조적인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말씀을 통하여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면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갖고 기도를 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생겨나면 창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맙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마음속에 생기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단 믿었으면 믿음이 늦게 이루어진다고 탄식하고 소망을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철옹성 여리고를 만나게 됩니다.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에는 성을 일곱바퀴 돌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순종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도는데, 아무리 돌아도 한 번 돌아도 까딱없고 두 번 돌아도 성이 까딱없고 세 번 돌아도 까딱없습니다. 백성들이 “이거 우리가 속은 것 아니냐? 성이 무너질 것 같으면 지금 돌 한 덩어리라도 떨어져야 될 것이 아니냐?”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 7일째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일제히 고함을 칠 때, 성이 와르르르 무너졌습니다. 


이에 앞서 여호수아의 명을 받아 여리고를 정탐하였던 군사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갑니다. 라합은 비록 그의 신분이 천한 기생이었으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피신시키면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내가 너를 고발하지 아니하고 감추어 놓을 테니까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우리를 살려다오. 우리 아버지, 내 형제들을 살려다오.’
  이 때 정탐꾼들이 라합과 약속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성을 점령할 때 네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살려 주겠다.’
  정탐꾼을 떠나 보낸 후 라합은 자신의 집에 가족들을 불러 모읍니다. 부모도 형제 자매도 다 불러 모으고, 한 사람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믿음없는 가족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라합을 꾸짖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출입문을 봉쇄하고 끝까지 이스라엘 정탐꾼과 한 약속을 믿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대로 정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게 되는데, 라합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라합의 믿음대로 다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 인내가 마지막까지 믿음을 견제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도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인내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될 것이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 같이 마음에 담아서 감사하면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아서 감사하면서 기다려야 돼요.
  히브리서 11장 1절로 2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실상이고 그것이 증거인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게 하면 결정적인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없는데 있다고 합니다. 안되는데 된다고 합니다. 지는데 이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확실하게 마음속에 부둥켜안고 인내하면 “너희 가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믿음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4. 창조적 선언을 하라

  그러고는 우리가 기도하고 믿음이 생겼으면 입술의 말로 선포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 하지 말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업이 잘된다. 내 육신의 병은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가 다가온다.” 입술의 말을 믿음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일이 다 실패가 되었다. 끝났다.” 그렇게 되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일이 되어간다. 성공이 다가온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믿은 줄로 마음에 믿으라 하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입으로 시인해야 믿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장 28절)
  이제 말도 안하면 하나님 귀에 들리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믿음의 고백을 해야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꿈을 품고 믿음을 나아가면 우리 삶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늘 십자가를 의지하며, 소망과 꿈을 품고, 믿음으로 전진하며, 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고백을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역사와 기드온의 삼백 용사/조용기목사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야훼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사사기 7장 1~7절)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은 미디안 족속으로 인해서 해를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족속들은 가나안 땅에 원 주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미디안 족속은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하고 나면 미디안과 아말렉 사람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씨를 뿌려 놓은 곳에 짐승을 데려와서 모두 다 갈아 엎어버린 것입니다. 추수할 때 즈음에는 짐승들을 데리고 와서 추수한 밀, 보리를 짓밟아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늘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구원을 베풀고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선지자나 택한 사람을 세우는데 여기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하니까 그는 기겁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안 됩니다. 나 같은 삼류인생을 택해서 하나님이 무얼 하신다는 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하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주인이냐? 다른 사람 하라, 하지 말라. 너는 나의 종이요 내가 불러서 너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니 잔소리 말고 하라.”
  그러니 정말 큰일 아닙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주권자도 없고 군인도 없으며 무장도 되어 있지 않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비해 미디안이나 가나안 족속들은 나라가 튼튼히 서있고 주권자가 있고 군대가 양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요, 나라가 멸절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호히 하나님 명령에 따르라고 했으니까 기드온은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1. 하나님의 표징을 간구함 (하나님의 약속을 간구함)

  기드온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택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면 하나님 뜻을 확실히 알아봐야 되겠다’고 말하며 ‘하나님 저를 선택한 뜻을 나에게 확실히 보여주시옵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에 들판에 내던져놓고 하루저녁 자는데 이슬이 양털뭉치에는 전부 내리되 그 주변에는 이슬이라고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 내게 정말 말씀하셨다고 제가 확증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들에 내놓고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양털 근처에 가니까 양털에는 이슬이 내려서 물이 절퍽절퍽 한데 그 주변에는 바짝 말랐습니다. 그가 양털을 양푼에 담아 짜보니까 물이 양푼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럼 됐을 것인데 기드온은 ‘하나님 한 번 더 용서를 해주시고 요번에는 양털을 들에 내놓을 테니까 양털만 바싹 마르고 주변에는 이슬이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번 더 확증시켜 주시옵소서.’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양털을 들판에 던져놓고 자고 난 다음 아침에 나가니까 양털은 보송보송하고 물 한 방울, 이슬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데 주변에는 이슬이 비와같이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선택함을 입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드온이 하나님께로부터 물으며 얻은 것은 하나님의 표징을 보고 난 다음에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표징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가 확실히 내게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얻으면 용기가 생기고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다는 것, 굉장한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슨 중대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용기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음성을 들으면 하나님 말씀을 들은 즉시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 없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조상이라 했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온 것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출발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행한 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뭄이 다가왔을 때 아내와 함께 애굽으로 살러 가는데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 왕 바로에게 아내도 빼앗기고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아주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로를 가졌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믿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지 않고 인간적 생각으로 도피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으면 그 분위기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분위기가 마음속에 만들어져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하나님 생각과 만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각을 가져야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실패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약속 없이 자기 마음대로 방황하다가는 큰 실패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징을 기드온처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촌놈이지만 하나님께 증명을 얻어서 증명이 있어 믿음을 가지고 일에 대처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을 위해 싸울 자를 모집함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울 군사를 모집)  

  이제 자기가 별도리 없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미디안과 싸워야 될 것을 결정 했을 때, 군대는 모집해야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이 기드온을 평소에 알지 못하는 촌놈인데 그가 오라고 한다고 해서 오나요? 그러나 이번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열두 지파로 보내면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군대를 일으켜 가나안, 미디안과 싸워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무려 3만 2천명이나 모여듭니다. 국가가 명령을 해서 모여온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자원해서 나온 군인들이 3만 2천명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적들은 13만명이나 모여 있습니다.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수가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3만 2천명이 하나님 앞에 신고식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 너희 3만 2천 명 군대를 안 쓰겠다.”, “아이고 하나님. 적군은 13만 명입니다.”, “숫자를 말하지 말고 충성심을 보아야 된다. 3만 2천 명이 너무 수가 많은데, 3만 2천명을 어떻게 다 쓴단 말이냐?”, “그럼 어떻게 할까요?”, “무서워 떠는 사람들은 도로 돌아가라고 그래라.” 하나님은 무서워 떠는 사람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사업을 할 때 마음에 무서워 떠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와서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을 때 다가옵니다. 평안은 두려움이 물러가면 그 자리에 평안이 점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면 평안이 오고, 마귀가 오면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니깐, 2만 2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사사기 7장 2절로 3절에 보면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들어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은 자보다 돌아가는 자가 더 많았으니 큰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믿는 자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종이 되어서 고생을 한 민족입니다. 바벨론 왕에게 이스라엘이 잡혀갔을 때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바벨론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 세 청년이 굉장히 총명해서 임금에게 사랑을 받고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참소를 당해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왕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모함을 받아서 왕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한 날에 왕이 만든 우상에 절을 하지 아니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 화로 속에 집어넣겠다.” 그러니까 온 사람들을 다 불러서 나팔을 불 때 모두 다 불구덩이 앞에서 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에 엉덩이를 들고 절을 했습니다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뻣뻣이 서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왕을 무시한다는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서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왕이 한 번 더 기회를 줘서 “나팔을 불고 징을 치고 장구를 두드리고 이 소리가 나면 저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기 싫거들랑 우상에 절을 하라”
  그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우상에 우리는 절을 안 할 겁니다. 우상에 절을 안 하면 불구덩이 속에 우리를 던져 넣는다고 하는데, 우리도 하나님이 계시니깐 우리 불구덩이에 타지 않게 해주실 것입니다. 타게 안 해줄지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을 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야훼 하나님을 믿는 세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왕의 신변이 어떻게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까? 분노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나팔을 불 때는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다 긴장을 하고 있는데 나팔을 불 때 세 사람을 묶어가지고서 하나, 둘, 셋 휙 던져서 불구덩이에 넣었습니다. 무엇을 던져도 바싹 태울 불구덩이인데, 전부 다 놀라서 눈을 휘두르고 고함을 쳤습니다. 세 사람을 던졌는데 그 불구덩이에서 받아들이는 네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이 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묶은 것을 다 풀어버리고 그 세 사람은 천사가 와서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불구덩이 속에서 손과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고 좋아합니다. 임금이 놀라서 왕위에서 내려와서 “얘들아. 우리가 세 사람을 던졌는데 지금 저기에 춤을 추고 있는 놈들은 네 놈이 아니냐? 그 네 번째는 사람같이 안 보이고 하나님의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여,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이리 밖으로 나오너라.” 춤추다가 말고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왕이 옷에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해도 불 냄새도 나지 않고 불 탄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이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야훼에게 건방진 말을 하면 벌을 내리고 거처하는 거처를 불사르고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이 돌보아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믿지 못하므로 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마귀가 와서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별 도리 없이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3만 2천 명의 지원병이 들어왔는데, 두려운 사람은 돌아가라고 하니까 2만 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1만명도 많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추리시기로 하셨습니다. 1만명을 시냇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모두 다 목이 마르니깐 물가로 뛰어가서 물을 마시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물가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전투 태세를 갖춘 채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두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태도를 봅니다. 여러분 잘 아는 태도지요. 그 나라와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구하는 사람은 물을 핥아먹는 사람입니다. 물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물을 손으로 핥아먹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 능력을 구하는 자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이들로써 하나님이 신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로 33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일의 질서를 올바르게 하면 도움이 올바르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갈증을 먼저 채운 후에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겠다고 하면 이것은 일이 잘 안 되갑니다. 신명기 20장 1절에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두려움 속 살아갑니다. 실직을 당할지, 직장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직을 당하지 않을까?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늘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지날 때 두려움이 극복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군사를 모집하실 때, 두 번째 기준은 목이 매우 마른 상황에서 물을 마시는 자세였습니다. 개가 핥는 것 같이 손으로 물을 움켜 핥는 자들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항상 깨어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맡은 사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명을 감당한 뒤에 늘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군사로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두려움에 떠는 자들은 전쟁터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옆 사람에게까지 물들어서 전체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두 대표 중 열 명도 그 마음이 두려움으로 꽉 들어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이 그들의 말에 노예가 되어서 두려움 때문에 전부 가나안에서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포로가 되고 만 것입니다. 두려워 떠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따라서 승리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열 사람의 정탐꾼이 무서운 이야기만 잔뜩 하고 “우리 자식들은 다 포로로 잡힐 것이고 우리는 새와 같이 정처 없는 사람들인데 어림도 없다.”고 말을 하니까 그들이 전부다 그 두려움의 이야기를 듣고 고함을 치고 통곡하고 울고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스스로 떠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빼놓고 열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계시니 두려움이 꽉 들어차서 그들은 가나안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40년 방황하다가 다 죽고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것이 대중적인 두려움을 가져오고 두려움을 품은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패배하고 절망합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을 선정해야 될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데 주 앞에 다 기도해서 하나님이 평안을 주는 분에게 찍어야 될 것입니다. 두려움을 주어서 부정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데 따라가면 같이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환경을 보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금세와 내세를 맡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는 분이 우리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에 두려워 떠는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누가복음 8장 50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날마다 승리하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 6절에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것입니다.
  신학자인 뱅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어떤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으로 열 두명이 갔는데 열 명은 두려움으로 탈락했지만, 민수기 14장 6절로 9절에 보면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말했지만 수가 10대 2로 온통 작으니까 사람들이 돌을 들고 그들을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굳세게 섰으므로 열 두 정탐꾼 중에 그들 두 사람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40년 후에 그 후손들을 데리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철야하고 새벽기도 하고 집에서도 시간만 있으면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를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길이 되시고, 참이 되시고 평안이 되시고, 무서운 일을 당할 때 두려움이 아니고 평안이 되게 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 항상 같이 살아야 돼요.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가면 틀림없는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역사로 승리를 거둠 (가나안 전쟁)

  가나안 전쟁이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싸울 준비를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이제 군인들도 준비되었으니 이제 접전 붙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모든 준비가 다 된 것을 시인해 주시고 저녁에 해질 쯤 저녁에 기드온과 그 보좌관이 적군 진지에 들어가서 한 번 정탐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고 기드온은 그 보좌관과 함께 적군들이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13만 명이 포진하고 있는 진영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도 수가 많으니까 자기들도 누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기드온과 그 비서가 한 장막 근처에 가니까 거기에 장막에 있던 군인 둘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 나 참 꿈 이상한 것 꾸었다.” “무슨 꿈을 꾸었게?” “아, 꿈에 저 기드온, 이스라엘 진에서 보리떡 하나가 굴러오잖아. 보리떡, 찰떡도 아닌 보리떡이 굴러오기에 그게 무엇인가 보고 있으니까 아니 이게 우리 군인 천막을 탁 겹치더라. 그러니까 천막이 무너지면서 온 사람들이 돌연 고함을 치고 이리치고 저리치고 큰 전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다.” “아 그거? 그거 우리에게 미리 경보해주는 말인데 그 보리떡이 기드온. 잘나지도 못한 어느 보리떡 같은 놈이 하나 들어와가지고서 우리하고 싸우자고 하는데 보리떡은 기드온을 의미하는데 보리떡이 굴러 들어와서 천막 하늘을 쳤다는 것은 큰 전쟁도 못하고 우리 변두리에 있는 보초병 천막을 칠 것을 보여주신다. 그러면 그 천막이 무너짐과 동시에 아비규환이 벌어져서 전부 두려움이 퍼져 나가지고서 서로 원수가 되어서 침으로 우리들은 절단이 날 것이다.” 그래 기드온이 더 들을 이야기가 필요 없거든요. 우리 결론 다 들었다. 돌아가자. 그런데 그들이 본진으로 돌아와서 “자, 보리떡 나갈 시간 내가 정할 테니까 보리떡 다 따르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창도 칼도 화살도 활도 없습니다. 전부다 항아리에 기름, 기름불 붙여가지고서 안고서 가다가 기드온의 불이여! 하나님의 불이여! 외치라 할 때 외치고 그것을 때리면 불이 갑자기 환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그 다음에는 저들이 서로 싸워 죽일 테니까 너희는 구경만 할 것이라. 가자. 그래서 300명이 따라오니까 별 소리도 안 납니다. 가까이 와가지고서 기드온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항아리를 탁 깨치니까 불이 확 붙는 것이 보이거든요. 그러면서 너희들 모두다 항아리를 깨고 외쳐라. 그러니 항아리를 깨고 어떻게 외치느냐? “하나님의 불이여! 기드온의 불이여!” 그렇게 고함을 치니까 적군의 진속에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이스라엘 군인이고 누가 연합군의 군인인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서로 치고 받는 바람에 이스라엘 군인들은 미리 알고서 변두리에서 “기드온의 칼이여! 이스라엘의 군인들이여!” 고함을 칩니다. 막 고함을 치는 그 고함에 더 흥분되어서 이 사람들이 서로 찔러 죽이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밤새도록 고함치고 그들은 목이 쉰 채 새벽을 맞이했는데 얼마나 13만 명이 누리던 것을 다 버리고 도망을 쳤으니 거기에 부귀, 영화, 공명을 택하던 사람들도 금은보화를 얻을 수가 있었고 짐승들도, 뭐 귀한 것들 모두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보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들은 싸우는 이방인들을 보기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이스라엘은 마침내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전리품도 얻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두려워하여, 두려움이 가득하여 일을 하고자 하면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전진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마음을 열어놓고 읽고 말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에 지혜가 되고, 총명이 되고, 모략이 되고, 재능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길이 되고, 깨달음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귀중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러분이 성경을 늘 읽고 그러고 하나님 말씀을 교회에서 귀로 듣고 깨달아 알고 그럼 여러분은 일반 사람들이 도저히 모르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다른 선진국보다 돈도 없고 모략과 재능도 모자라지 않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지만 모르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모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자체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의지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보화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으로 그 크신 일을 하기를 원하시고 오늘도 이 자리에 주님은 말씀으로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에게 기적과 이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오늘날 미디안과 같은 원수마귀로 인해 염려, 근심, 불안, 초조가 강뭉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능력과 권능의 주님이 계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늘 믿음으로 두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이영훈목사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말라기 4장 2∼3절)

죄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인간
하나님께로 돌아와 경외하는 삶 살 때
주님 우리의 치료자 되시고 은혜 주셔


 많은 사람들이 죄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의 모습은 죄의 상처로 인해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죄와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쳐도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께로 돌아 나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죄와 절망의 사슬을 풀어버리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 자유를 누리며 살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우리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 말합니다. 말라기 4장 2절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이라고 말합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사야 6장 5절은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야훼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이자 왕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죄를 짓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세상에는 죄가 넘쳐납니다. 때때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련하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도 그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말라기 3장 15절은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하나님의 때에 악을 멸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강물처럼 흘러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악인들로 인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악인들의 잘됨은 금방 자라고 무성해지는 잡초처럼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시편 37편 1절부터 2절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기억하십니다. 말라기 3장 16절은 “그 때에 야훼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야훼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야훼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야훼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충성, 헌신하고 바르게 산 것을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해두셨다가 상급으로 갚아주실 겁니다. 말라기 3장 17절은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한국을 유리 수입국에서 유리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킨 한국유리(현 한글라스)의 설립자 고 최태섭 장로님을 소개합니다. 기업 이윤의 20%를 사회에 환원하셨고 정직 경영과 검소한 삶으로 많은 존경을 받은 기업가이셨습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졌는데,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식 교육으로 유명한 오산학교로 진학하면서 투철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배웁니다. 이후 만주, 중국, 일본을 중개하는 무역업을 하셨는데, 매사에 반영된 그의 기독교 정신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한때 장로님은 일본에서 콩을 싸게 사들여 중국 상인에게 파는 일을 하셨는데, 어느 날 콩 값이 급등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중개인은 위약금을 물고 싼 값으로 계약한 기존 거래를 취소하고, 비싼 값으로 콩을 팔아서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눈앞의 이득보다는 신용을 택하여서 계약할 때 정한 가격대로 콩을 팔았습니다. 당시 돈 20만원, 즉 당시 쌀 4만 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수익을 포기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에 중국 상인들이 크게 감동하였고, 그의 신용이 입소문을 타면서 나중에 더 큰 돈을 벌게 됩니다. 최 장로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보다 정직하게 살아야 될 것 아니냐? 남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느냐. 양심적인 기업인이 되어야 한다. 그 사건 이후 나의 경영신조는 신용과 인화단결이 되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만주에 중국 공산군이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인민재판에서 전 재산을 빼앗기고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에 직원들을 선대했던 그는 함께 근무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나서서 그를 지킨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무사히 남하할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4후퇴로 피난가기 바쁜 중에도 장로님은 은행에 돈을 갚으러 갔습니다. 은행직원이 깜짝 놀라며 “지금은 피난중이니 다음에 갚으라”라고 했지만, 이렇게 말하며 돈을 갚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약속은 지켜야지요!” 제주도로 피난 가서 사업을 위해 원양어선을 구입하려고 은행에 갔더니, 전쟁 중에도 대출을 갚은 그의 이야기가 은행가의 전설이 되어, 무담보로 거금 2억 원을 융자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새 사업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한국유리를 창설했습니다. 신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서 유리 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한국을 40여 년 만에 유리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대기업 총수임에도 불구하고, 외제차를 몰지 않고 10년째 같은 양복을 입는 등 검소한 삶을 사셨는데, 군사정권이 그룹 총수들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가택조사를 할 때도 그의 집에선 금붙이 한 조각 나오지 않아서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한편으로 기독교 교육과 기도 모임, 구제 사업 등에도 앞장서셨습니다. 많은 기독교 학교들에 후원을 하셨고 국제조찬기도회, 민족화합기도운동 등 각종 기도 모임을 주도하셨습니다. 또,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대한적십자, 실로암맹인안과병원,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 등 각종 구제사업에도 앞장서셨습니다.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산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청와대에 불려가서도 ‘수요 예배 때문에 일찍 가야 한다’라고 말하고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의 최종적 기준은 기독교 정신이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큰 돈과 많은 배움은 아무 소용이 없다!”
 
 2. 의의 태양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됩니다. 말라기 4장 2절은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 악인들의 형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악인의 형통이 계속되고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와서 그들의 형통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말라기 4장 1절은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불붙은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서 싹 태워버리듯이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에 떠오르는 공의의 태양은 악인에게는 뜨거운 용광로 불같이 임해서 그들을 모두 살라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이기고 의를 비추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4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실 때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빛을 모시는 우리들은 어두움과 가까이 지낼 수 없습니다. 죄와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남침례교 순회설교자인 폴 워셔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고, 악을 벌하시며, 옳은 것을 입증하는 직책을 수행하신다. 세상의 재판관이 법정에선 범죄자를 무작정 용서할 수 없듯, 하늘의 재판관이신 하나님도 악인을 무작정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사법 체계가 부패했다고 불평한다. 그러니 세상의 재판관보다 하나님께 더 큰 공의를 기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그분의 의를 무시하고 악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이 경이로운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용서를 베푸시면서도, 여전히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에 있다!” 어두움에서 나와 은혜의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부터 6절은 “야훼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야훼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가 혼란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세상의 불의를 없앨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예수님이 이 나라의 왕이 되시면, 진정한 평강이 우리나라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부터 79절은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늘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 앞에 의롭게 살 때 주님의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3. 치료자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말라기 4장 2절은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태양은 악인에게는 심판의 불로 임해 그들을 멸하지만, 의인에게는 치료의 광선을 비추어 상처와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 말씀을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3분의 2가 병 고치는 사역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을 다 치료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부터 24절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고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우리 가정의 병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병, 대한민국의 병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병과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믿고 나아갑시다.

 인도의 무슬림 의사가 암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을 한 후 기독교로 개종해 50개의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산제이(가명)’라는 이름의 의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인 서벵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산제이는 의사이며, 복음전도자, 교회 개척자로서 사역하며 영국침례선교사협회 세계선교부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인도 콜카타의 한 병원에서 항암 화학요법 치료를 받는 중에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울부짖었다. 내가 믿기를 원치 않았던 그 이름이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왔다. 예수의 이름이었다. 나는 너무 약해져있었고,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나는 주 예수께 기도했다. ‘저를 치유해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놀랍게도 나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느꼈고, 무엇인가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암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암을 치료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렸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고, 가족들은 “너는 예수를 영접했으니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밖에 나가서 알아서 살아라”라고 말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진료실을 부수려 했고, 그를 음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수년 동안,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많은 지역 사회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용서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 그를 공격했던 이들과 가족들이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치료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면 생명이 없다. 나는 오직 예수께서 나를 치료하시고, 삶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주님을 위해 살며, 치료자인 예수님을 증거할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29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모든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과 새 힘을 얻으십시오. 어떤 문제를 가져왔든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모든 문제를 해결함받고, 모든 병을 치유함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적당히 죄와 타협하며 살았던 모습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철저히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하여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게 하여주시고, 늘 치료자 예수님을 우리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변화되고 치료받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영훈목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며 삽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일이 없고, 단 한 번도 좌절하고 절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랄 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시험 있었죠, 고등학교 시험 있었죠, 대학교 1차 시험 있었죠, 2차 시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시험에 떨어진 실패의 경험을 한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더욱이 대학 1차, 2차에 떨어지고 나면 재수를 합니다. 재수해서 떨어지면 또 삼수를 합니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은 다 대학을 다니는데 본인은 학원에 다녀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법시험은 더합니다. 1차를 패스하고 나서 2차 패스하려고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어떤 분은 아홉 번을 봤는데도 못 된 분을 봤어요. 그만큼 시험이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패배의식을 가져다줍니다. 열등감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내가 약해지면 내 마음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패배자야, 너는 뭘 해도 되는 일이 없어, 너는 그렇게 살다갈 거야.’ 

  이 같은 실패와 좌절감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어디서부터 올 수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이 마음의 좌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주고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주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여! 그 사랑을 우리가 오늘 체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가운데 강물처럼 넘쳐나서 모든 실패와 상처의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여주옵소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니까 마음에 절망감, 좌절감, 배신자라고 하는 그 마음의 낙인이 찍혀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그를 다 용서해주시고 치료해주시니까, 너무나 베드로는 기쁘고 감사해서 성령 충만 받고 나아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는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때에도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가 있느냐. 십자가를 거꾸로 돌려 세워서 내가 거기서 죽겠다’며 거꾸로 매달려서 세상을 떠난 그러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 배반자 베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큰소리쳤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내가 고난당할 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도 저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
아니, 아니, 아니야.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거야.’
  그때 베드로가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항상 말이 앞서다보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다른 제자들도 ‘네, 우리가 절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기 않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날 밤이 지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다 도망쳐버리고 베드로도 도망갔다가 예수님 붙잡혀 가신 것을 보고 멀찍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갔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에 성경은 설명합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단 한 번도 베드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간 적이 없습니다. 늘 가장 가까운 곳에, 곁에 있어서 예수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에 동참했던 수제자입니다.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이 위태해지니까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모든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배가 멀어지고, 감사가 멀어지고, 찬양이 멀어지면 그때로부터 내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멀어지면 안 됩니다. 바짝 주님 곁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멀어지면 그 때로부터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주님을 멀리 떠난 적이 없던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가야바의 뜰에서,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성기후라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몹시 춥습니다. 그래서 모닥불을 펴놓고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한 여종이 지나가다가 말합니다.
  ‘당신,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봤어요.’
  ‘아닙니다.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그 사람이 말합니다. ‘분명히 봤는데요.’
  베드로는 또 ‘모른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옆에 있는 사람이 또 말합니다. ‘당신, 그 말투가 갈릴리 사투리인데 예수님 따라다니던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인데 당신 분명히 그 사람 제자야.’
  그러니까 마태복음 26절 74절에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이 항상 앞섭니다. 그런데 실제로 문제를 당하면, 어려움 당하면 말을 바꾸고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배신을 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져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과 멀어지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구역예배 참석하고, 기도원에도 열심히 가고, 찬양도 열심히 부르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면 늘 주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멀어지고, 찬양이 멀어지고, 감사가 멀어지고 그러면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쌓이기 시작하고, 섭섭함이 쌓이기 시작하고, 미움이 쌓이기 시작하고, 분노가 쌓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주님을 배반하게 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주님께 바짝 붙어서 주님 옷자락 붙잡고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용서하시는 예수님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 갈릴리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질 때 밤새 그물을 던지고 몇 마리를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빈 배 인생이요, 빈 그물만 올리는 인생이요, 빈 손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해도 얻는 것이 없어요.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면 남는 것이 없어요. 땀을 뻘뻘 흘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했는데 주님 없이 내가 혼자 일하니까 얻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주님께서 넘치는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자, 돈이 많은 사람, 세상에서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찾아갑니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고(화무십일호), 십년 가는 권세가 없다(권불십년)고 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절대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지만 세상 권력 주변에서 예수님 모르고 권력만 따라가다가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가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따라다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버림받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그런 절망에 처한 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새 힘과 능력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꾸짖지 아니하시고는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피곤했던 그에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아침을 함께 드시고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처럼 그 용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 이 두 가지는 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의견의 차이, 하찮은 오해나 시비, 혹은 불친절하고 사려 깊지 못한 말, 분함과 경멸 혹은 소외의 감정 때문에 용서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여러분은 세상에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첫 번째로 행하신 일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용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의 일을 맡기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베드로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신 예수님. 연약하고 불의하고 추하고 못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시는 예수님. 그 은혜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이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전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네가 네 주변의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우리들은 쉽게 “아멘!” 할 수 있지만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자식을 너무 사랑해가지고 예수님은 두 번째이고, 자식이 첫 번째인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고3이 되었는데 “야, 너 1년만 교회를 쉬어라. 내가 기도 대신해줄게. 대학이나 붙어야지.” 그런데 대학을 붙은 것까지 좋았는데 주님을 멀리 떠나버렸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예수 잘 믿게 해야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야단을 칠 줄 알아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인데 잘못해도 오냐오냐, 그냥 사고치고 다녀도 씩씩하게만 자라다오. 오냐오냐 이러니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가진 그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은 사업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자꾸 빠져요. 사업이 첫 번째이고 예수님은 두 번째인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예수님도 잘 믿고 사업도 잘될 텐데, 그것이 바뀌어버리니까 사업도 안 되고 예수님도 잘 못 믿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삶의 첫 번째가 예수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사업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가진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네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많은 경우에 자신을 더 사랑해요. 내가 첫 번째, 예수님이 두 번째.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님이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그랬어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다 희생하며 헌신하며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누가 월급을 준다고 주일날 새벽부터 밤늦게 나와서 이렇게 봉사를 합니까?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기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찬양대원도 마찬가지고, 오케스트라 대원도 마찬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아이들을 돌보고 밤늦게까지 교회에 남아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할렐루야! 이와 같은 사랑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또 물으십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21장 16절)
  주님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다윗처럼 고백해야합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편 1절)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 내 삶 전체를 바쳐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이 같은 사랑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일생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신 예수님.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몇 번 모른다고 부인했죠?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 번 용서하심으로, “네가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상처를 다 치료해주셨어요. 예수님의 치료방법은 야단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야단치고 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주먹을 휘두르고 하는데 그게 예수님 방법이 아니에요. 그저 용서하는 거예요. 그냥 품고 용서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어린양은 교회 처음 나온 초신자들, 교회를 좀 다녔지만 믿음이 자라지 못한 사람들, 또 돌봐야 될 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어린양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천국 보내드리고 외롭게 홀로 있는 사람들, 믿음이 자라지 못해서 자꾸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서 스스로 설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요, 부모님이 관심을 갖고 잘 먹을 걸 줘서 잘 먹여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자라지 못하는 애들의 특징은 잘 안 먹는 것입니다. 뭘 줘도 잘 안 먹어요. 애를 키워본 어머님들은 알 것입니다. 잘 먹어야 되는데 애들이 입이 짧아갖고 안 먹는 애들이 있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애먹이다’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애먹인다. 애가 하도 안 먹으니까 ‘애 먹인다’는 것 같아요. 우리 교회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말씀으로 먹여서 잘 자라가게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주신 사명은 “내 양을 치라!” 16절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것은 나의 양들을 보호하라. 보살피라. 이단들이 들어와서 양들을 도둑질해가지 않도록 잘 지켜라. 요즘 신천지라는 이단이 막 들어와 가지고 난리입니다. 교회 내에 문제가 된 교회는 다 들어와서 막 소동을 일으키고 싸움을 붙입니다. 저쪽 강북에 있는 큰 교회는 칠천 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이 세 사람 이단들이 들어와서 그 교회 싸움을 선동해가지고 몇 년 동안 싸우는 동안에 교인이 오천 명이 나갔어요. 지금은 정리가 되어서 다시 부흥하고 있지마는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을 잘 살펴야 합니다. 갑자기 교회에 새로 와가지고 막 열심을 내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데리고 들어와서 이 그룹을 만들어갖고 교회 내에 여기저기 흔드는 사람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라고 모인 곳, 기도하러 나오고 예배드리러 모이는 곳입니다. 선동하고 이간질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를 지키게 하여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양 무리들을 잘 돌보아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7절)
  세 번째 양, 이 양 큰 양 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일 년 지난 분, 우리들은 다 큰 양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양육하라.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예배만 빠지지 않고 잘 나와도 믿음이 자랍니다. 그다음에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구역예배 참석해서 말씀을 나누며 같이 기도해야 됩니다. 그때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으면 얼마나 집안의 근심거리가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의 사랑을 온 천하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헬렌켈러로 불리우는 구경선 캐릭터 작가님. 요즘 젊은 사람에게 인기 있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베니, 귀가 큰 토끼 캐릭터를 그린 자매입니다. 두 살 때 열병을 앓으면서 청력을 잃었습니다. 듣지 못하니까 말하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말이라는 것은 듣고 따라하는 것이 말인데 듣지 못하니까 어릴 때부터 말이 어눌했습니다.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듣지 못하니까 수업 진도를 따르지 못하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 늘 외톨이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전도해서 교회 수련회 갔다가 은혜를 체험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어떡하면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기 동료들을 보니까 회사에 취직해서 십일조를 내더라구요.
  “나는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안 돼. 십일조를 내고 싶은데.”
  기도하는 가운데 ‘내 재능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돈 말고 나만의 십일조가 뭐가 있을까? ‘아! 그림으로 십일조를 하자!’
  일 년 내내 교회의 주보를 직접 그리고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그려서 섬겼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미니홈피 싸이월드에 일러스트작가가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듣지 못하는 자가 더 많은 것을 들으라고, 큰 귀가 있는 그런 토끼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자기가 듣지 못하니까 귀를 크게 해놔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대신 듣고자하는 자기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이건 희귀병인데 앞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듣지도 못하고 이제 보지도 못하게 되어서 찬송가 자막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절망해서, “주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납니까?” 하는데 주님이 음성을 주셨습니다.
  “나만 불행하게 느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찬양이 너무 어려워요. 못하겠어요.’ 그런데 차가웠던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분명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 안다. 너의 고통과 슬픔을 다 안다.’”
  주님이 사명을 주셨어요. 이제는 자기보다 더 불행한 아이들, 버림받은 아이들, 고통 중에 문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자. 사명감을 가지고 단기 선교에, 필리핀에 갔다가 오갈 데 없이 길에서 떠도는 불쌍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말합니다. “언니 난 꿈이 있어요. 앞으로 커서 전 세계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가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의 말을 듣고 그림을 그려줬습니다. 사진작가가 되어서 사진을 토끼가, 사진작가가 된 토끼 그림을 그려주니까 너무나 이 아이가 좋아해서 그 그림을 껴안고 기뻐 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지 내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야.”
  그래서 자기는 비록, 듣지 못하고 앞을 거의 못 보게 되었지마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버림받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볼 수 있는 날도 얼마가 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직 볼 수 있을 때 아이들을 위해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어요.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의 신체적 약함과 관계없이 나를 사용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믿어요. 저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본인의 꿈은 어려운 나라를 순회하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어도 이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예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그저 나만을 위해서 나! 나! 나!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주님,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베드로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시고 이제 우리 모두가 사명을 가지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이여! 우리의 일생을 인도하여주셔서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 앞에 귀하게,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

  아담 이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나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만 모두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한 어른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주변에 있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여러 명이 잔뜩 탔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치원 어린이가 좌우의 친구를 보고 “야, 인생살이 참 피곤하다.” 그러니 그 어른이 그 말을 듣고 하도 신기해서 어린애가 인생사가 피곤하다니 어떻게 피곤한가? 그래서 “야 너 유치원 학생인데 너 인생이 그렇게 피곤하면 어떻게 되나?” 어린아이가 “부모는 몰라요. 유치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피아노 연습하라고 독려를 합니다. 피아노 치고 난 다음에는 좀 놀려고 하면 미술학원에 가라고 밀어 내칩니다. 미술학원에서 겨우 좀 시간을 내어서 집에 돌아오면 영어학원에 가라고 또 밀쳐 냅니다. 인생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른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육체의 피곤함 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가 대단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에 하난데 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 질병에 우리가 걸리게도 되는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신경성  병이라든지 시민성 질환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모두다 마음에 뿌리를 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피곤할 뿐 아니라 만물이 피곤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근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짐인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탐심을 아담과 하와가 가졌다가 심판을 받아서 그 속사람이 죽고 육체의 사람만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주받은 땅에 피곤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고통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고 했습니다.
  아담은 그 아내의 꾐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는 준엄한 심판이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도록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안력과 갈등을 가져와서 심지어 죽이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격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행실들을 하고 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잘못된 인생사를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 오면 주님이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주의 길인데 우리 인생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더 많은 공부를 해도, 수련을 해도 더 많이 종교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 떠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살아야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평안도 기쁨도 행복도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중심에 서서 살려면 길 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공부를 많이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을 많이 닦아야 잘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의 중심에 선 곳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인데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길을 모시고 있고 그럼 내가 이 세상에 바라는 크고 작은 길은 큰 길 되신 예수님 안에서 다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을 쫓아서 살기 때문에 낭패와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올바르게 들어서서 가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지요. 사람이 길을 선택하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좌우에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같이 있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한사람이 다른 강도보고 말하기를 ‘예수님보고 욕하지 마라. 너와 나는 젊을 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그 길에 대응하는 보복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길을 잘못 든 적이 없고 길을 잘못 들 때도 없다. 주님이시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길을 잘못 들었으나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하니까 다른 때 실수로 선택하지 못한 것은 다 용서되고 사라져 버리고 그는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일에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이 간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 18장 12절~1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길 잃은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길에 들어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대가로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미주에 이민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남미를 택해서 갔습니다. 남미에는 금은보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서 남미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북미를 택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예수 잘 믿으려고 북미를 택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누가 길을 올바르게 택했느냐?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북미에 간 사람들은 예수도 잘 믿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성공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미로 간 사람들은 길을 잘못 택해서 예수도 못 믿고 생활도 길을 잘못 들어서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 들어가서 길을 올바르게 택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험 속에 들어가면 이 땅에 사는 삶 자체를 주님께서 천국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실 때가 비일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주님께로 오면 길을 찾게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습니다.
  또 예수님은 진리 자체입니다. 다른 데는 거짓말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 종들이 나를 따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거짓의 구렁텅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제일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정치인들인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 약속을 산더미처럼 해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당선되고 난 다음 “몰라요, 나 잊어버렸는데. 그런 말 내가 했던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대화를 하고 지내면 우리가 진리에 서서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귀는 통째로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인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올바른 길이니까 당신에게 오라고 하고, 예수님은 진리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속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에 범죄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백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장 1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5장 21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생명인 예수님이 지옥 건너편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가 절망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어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생명을 모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양과 도덕을 닦고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냥 모셔드리면 생명을 모시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심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축복인 것입니다. 

3. 행위냐 믿음이냐

  우리가 행위로써 사느냐,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에덴에서 쫓겨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쫓겨 나오면서 패션 스토어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 죄를 지은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나올 때 무화가 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서 입고 나왔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앞치마를 만들어 놓으면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그냥 말라버립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을 막을 수 없이 풀잎사귀에 옷이 되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낼 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쫓겨나올 지라도 하나님이 나중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며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쏟고 그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이 세상에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벗은 몸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원한 추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단으로써는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내보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생들이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인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1절~22절)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하나님 희한하십니다. 우리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계산에 다 넣어가지고서 인류의 지은 죄악을 예수님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우리들이 한평생 지은 죄의 대가가 열(10)이라고 가정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피의 대가는 영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서 영원한 의로움을 가지고 나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그런 자격을 가지고 가슴 펼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이처럼 공짜로 주는 것인데, 그 공짜로 주는 은혜에 의지해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죄가 청산되고, 성령꼐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죄의 생활은 점점 사라지고, 의와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소에 멍에를 걸쳐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데, 어미 한 마리만 있을 때는 모르는데 새끼가 있으면 목에 건 멍에가 보통보다 큽니다. 그 멍에를 어미 목에 걸어 놓고 새끼를 그 멍에 밑에 같이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멍에는 엄마 목에 걸려있는데 밖에서 보면 새끼가 멍에를 같이 걸머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어미 소가 걸어갑니다. 그럼 그 밑에 새끼 소는 어미 따라서 걸어가면 아무 짐도 목에는 얹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미 소가 잔뜩 몸에 힘을 넣어서 땀을 흘리고 헉헉 거리면서 가는데, 새끼는 엄마 밑에서 멍에를 맨 척만 합니다. 밭을 가는 흉내만 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엄마는 자기가 수고하고 무거울 지라도 새끼를 자기 멍에 밑에 불러서 같이 밭을 갊으로 새끼에게 밭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끼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새끼 멍에 위에 얹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가 다 새끼의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엄마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데 새끼는 재미있게 평안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나면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멍에에 우리 짐을 다 받아서 짊어지고 “나와 같이 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와~짐을 다 짊어지고 가네?” 실상 그 짐은 자기 멍에에 얹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멍에에 얹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멍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나란히 같이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새끼를 옆에다 세워서 같이 가면 큰 짐을 옮기는 것같이 보이지만 새끼는 수고롭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 밑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행해야 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짐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만, 인생에 그 짐을 다 걸머지고 갈 사람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짐을 예수님의 멍에에다 얹어놓고 자기는 예수님 멍에 밑에 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다 맡아서 짊어지고, 우리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끼에게는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새끼의 그 무거운 짐을 엄마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머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걸머지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살아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로 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과 나의 짐을 짊어져주시고, 그 예수님 멍에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중복음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 질병의 멍에, 가난과 헐벗음의 멍에, 죽음의 부활의 멍에, 성령과 동행하는 멍에, 예수님은 그 모든 멍에를 걸머지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짐을 예수님이 다 걸머지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여러분인데, 주님에게로 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여러분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여러분의 십자가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러분 그냥 건성 얹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보이는데, 예수님이 여러분을 업고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하지만 업혀있지 여러분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를 전달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의로움 우리의 의로움, 예수님의 치료 우리의 치료, 예수님의 부귀 우리의 부귀,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외롭게 지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당신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내게로 오라. 너희가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너라. 네 짐은 전부 다 내 멍에에 던져버려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멍에의 지게에 내 짐 다 맡겨 버리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기도로써 맡기고 나가면, 주는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짐을 대신 걸머지고 일생을 평안하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범죄한 인간들에게 지워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청산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피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주님이 베푸시는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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