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의 기도/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야훼는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면”
제사장 선포통해 이스라엘에 복 주신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의 수여자이심 인정해야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대제사장의 삼중 축복 기도가 민수기 6장 22∼27절에 언급되어 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광야로서 뱀과 전갈이 돌아다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없는 공포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의 여행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아론의 삼중 축복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담대함의 기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사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예수 안에서 아론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서로에게 선포하며 힘과 용기와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삼중축복은 첫째로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녀와 재산, 땅, 건강, 그의 임재라는 복을 주신다(창 17:16; 22:17∼18; 레 26:3∼13; 신 28:2∼14). 나아가 이러한 좋은 선물뿐 아니라 모든 위험에서 그를 보호하게 하시고(욥 1:10), 각종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지켜주신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신다는 비유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과 부합된다(시 31:16; 67:1). 그는 곤경에 빠진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사 대적과 질병과 죄에서 건져 주신다(시 4:1; 6:2; 51:1). 어려운 사람을 보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그에게 실망과 낙심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인생을 감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한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이다(창 43:29; 시 4:6).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평강이다. 그것은 전쟁과 소요가 없는 평화의 상태뿐 아니라 풍요와 건강, 번영, 구원 등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모두 세 구절, 15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구절은 각각 3단어, 5단어, 7단어로 점층적으로 많아져서 축복이 강조되고 깊어지고 있다. 또한 구절마다 야훼 이름이 한 번씩 들어 있어서 모두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야훼 이름이 주어로서 한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지만 굳이 세 번을 반복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훼 이름을 빼면 12단어가 남는다. 이는 복을 받는 사람이 12지파임을 상징한다. 복은 결코 사람인 제사장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매달려도 안 되고, 복 자체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야훼의 복주심이 아론과 그 아들들로 대표되는 제사장들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적시는 것과 같다(시 133:2).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생각과 꿈과 믿음, 특히 축복의 말의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나아가서 아론의 삼중적 축복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축복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축도와 연관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종의 축도가 선포될 때 온전히 예배가 마무리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과 마음의 복과 물질적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생명의 성령의 법/이영훈목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7장 24절 - 8장 2절

 사람이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많은 경험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놀라운 경험, 놀라운 기적, 놀라운 은혜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고,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고,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축복이고 기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믿고 난 다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내가 새사람이 되었는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내 모습 속에는 옛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워하고 분노하고 다투고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았는데,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모습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쪽에서는 여전히 옛전처럼 살아가게 만드는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갈등에 대해서 탄식합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옛 사람과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옛 사람의 모습

 먼저, 옛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로마서 7장 5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죄의 정욕이 나를 이끌어서 사망으로 나를 인도한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죄에 익숙합니다. 늘 자기의 만족을 위해 사는 살았기 때문에 내가 좋으면 남이 피해를 입든지 안 입든지 그거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기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이 갖고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와 날마다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 죄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8장 7절, 8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 덩어리로 살던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보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마귀의 노예에서 벗어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옛 사람의 모습의 모습이 너무나 강하게 나를 주장하고 이끌어갑니다.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7장 18절 19절은 설명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죄는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와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서 하루에 열 번 화를 내던 사람이 자기 성격과 싸워서 열 번이 아홉 번이 되고, 아홉 번이 여덟 번이 되고, 여덟 번이 일곱 번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옛 모습 그대로 살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장 17절)라고 분명히 주님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 대학생선교회를 창설한 김준곤 목사님의 책을 보면, 어느 한 남자 대학생의 고민을 설명한 부분이 나옵니다. 자꾸 음란한 생각이 들어서 그 음란한 생각을 이겨보려고 머리를 삭발했답니다.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그래도 음란한 생각이 지워지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무려 머리를 네 번이나 머리를 깎았답니다. 그런데 머리를 백 번을 밀어도 이 마음속의 음란한 생각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역사가 내게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이 더러운 생각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워런 위어스비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에게 ‘나는 이러한 옛 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거야!’,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을 거야!’ 말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하다가 다시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그의 옛 본성을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율법은 옛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수 없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는 신자가 피곤하고 실의에 빠져 결국 포기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하고, 잘못된 모습에서 벗어나보려고 하지만 율법적인 그런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이 죄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만 더 지적할 뿐인 것입니다. ‘너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 잘못 말하고 있어.’ 자꾸 죄를 지적할 뿐, 내 의지로 죄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등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보더라도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여서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많은 기적을 행하고, 그가 지나간 자리엔 교회가 세워지고, 그가 쓴 책이 성경책이 되고,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룬 위대한 종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들여다보니까, 그 마음에 여전히 교만, 분노, 미움 등 인간적인 모습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면서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1절로 23절에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자신의 모습 속에 죄를 따라가는 옛 사람의 모습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새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이 늘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이 다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초기에는 자꾸 옛 사람한테 져서 또 화내고, 또 싸우고, 또 미워하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새사람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겨서 나중에는 주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훌륭하고 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우리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죄와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자리를 피하고 여러분들을 죄로 이끌어가는 모든 환경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늘 입만 열면 나쁜 얘기를 하고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과 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환경에 여러분들이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주변을 바꿔주시고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2. 생명의 성령의 법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둘째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 우리 삶이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늘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가지고 옛 사람의 모습에 붙잡혀서 미워하고 분노하며 살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붙잡혀서 살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안에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에서, 문제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여러분을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죄와 싸워 이기려고 하지 마시고 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질병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삶 속의 모든 절망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주시고, 우리 삶 가운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은 설명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모든 죄를 물리쳐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우리를 채워주시고,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삽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너무나 쉽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상처 입히고 무너뜨리는 어떠한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다. 너는 하나님의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앞에서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위대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이상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실패자가 아닙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에 위대한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 보니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정죄함이란 ‘너는 죄인이야. 너는 실패자야. 너는 버림받은 자야. 너는 쓸모없는 자야.’라며 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젊은 청년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자라나면서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고통을 계속 겪고 있는 그러한 청년들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자기를 돌보지 아니하고, 어렸을 때 자기에게 큰 상처를 남긴 부모에 대한 그 기억을 가지고, 가장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젊음의 나이에 그 상처의 둥지에 그냥 주저앉아가지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를 절망시키는 과거에 머물러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과거에 어떤 상처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문제 속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버림받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믿은 그 순간부터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과거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믿음의 전진 해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는 분이며(롬 8:2), 종말에 있을 부활과 영원한 영광을 보증해주시는 분이다(롬 8:11).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성령 안에서의 삶, 즉 성령님에 의해 활기를 띠고, 유지되며, 지시받고, 풍성하게 되는 삶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낙인찍고, 그 누구도 우리를 실패자라고, 쓸모없는 자라고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절망시키는 옛 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낙심시키고 끊임없이 상처를 가져다주고 옛 기억으로 돌아가게 하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싸워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더 이상 내 마음 속에 미움도 분노도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과거의 상처도 없습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갑니다.  

3. 승리하는 신앙생활

 셋째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달라져야 합니다. 언제까지 과거에 매여서 그렇게 탄식을 하고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이미 새롭게 변화되었음에도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믿음은 미래전진형이지 과거회기형이 아닙니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역사가 아닙니다. 과거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된 것을 다시 반복하지 말라고 보여주는 거울이지, 과거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비된 것은 미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비 된 찬란한 축복의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피곤하고 연약하여 지쳐 쓰러졌다고 할지라도,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간구하지 못하는 것까지 주의 앞에 간구하여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전폭적으로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날마다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이뤄나가시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에게 권능도 함께 부여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니까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우리가 성령충만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우리에게도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질병을 쫓아내는 위대한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권능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권능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죄와 싸워 승리하고, 세상과 싸워 승리하고, 연약한 내 자신과 싸워 승리하고, 나의 과거 상처와 싸워 승리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나는 연약해도 내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은 강하시고, 우리 주님이 감당하지 못할 문제도 없고, 해결하지 못할 어려움이 없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로마서 8장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주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 해도 어깨를 피고 누가 나랑 가깝다고 자랑을 하는데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대통령이라 해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의 편이십니다.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간절히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간절히 구하여 성령충만 받으면 우리는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로마서 8장 35절은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장 37절은 이어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간신히, 겨우,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위대한 능력을 여러분에게 이미 부어주셨습니다. 능력을 갖고도 사용하지 못한 우리들이 문제가 있지,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 위대한 능력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한 분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현재 싱가포르의 뉴크리에이션교회는 청년들만 약 3만 명 이상이 모이는 큰 교회입니다. 조셉 프린스 목사님의 책 ‘이기는 삶’에 빅터 킹이라고 하는 청년의 간증이 나옵니다. 그는 모태 신앙이었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그만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주먹을 쓰는 친구들을 만나서 자연히 술과 담배에 빠지고, 도둑질을 하고,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패싸움을 하고 온갖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후로 삶은 더 악화되어서 매일 술에 취해서 줄담배를 피면서 주먹을 휘두르며 살았습니다. 가끔 옛날에 교회에 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잘못하고 있다’ 그러한 죄의식이 들어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배웠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교사인 아버지와 상담가인 어머니가 저를 잡아주려 애셨지만, 부모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인생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나쁜 데서 더 나쁜 데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육신에 이끌려 사는 삶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늘 죄에 익숙합니다. 점점 더욱 더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 들어가는 그 모습을 발견하면서도 그냥 끌려들어가고 있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이 청년의 모습이 예수님이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었고, 신앙이 연약해질 때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페이스라고 하는 예수 잘 믿는 자매랑 사귀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믿음이 시원치 않아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사귀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고로 우리 교회 청년들은 절대 예수 안 믿는 사람 사귀면 안 되고,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자매를 따라서 뉴크리에이션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은혜가 임했어요. 그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의 간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집례하기 시작하자, 무엇인지 모를 따스함이 온통 압도하는 게 느껴지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시점부터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의 흡연중독을 제하여주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여전히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계속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보름이 지나자 9년에 걸친 흡연중독과 6년에 걸친 알코올중독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담배 중독은 쉽게 못 끊어요. 성령이 임하시면 그 자리에서 뚝 끊어지는데, 인간의 힘으로 끊기가 힘듭니다. 알콜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9년 동안 줄담배를 피우고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던 이 청년이 보름 만에 성령의 힘으로 싹 끊은 것입니다.
 그래서 깡패 집단에서 나와서 그가 주님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소변이 조절되지 않는 병이 있어서 밤마다 서너 번씩 깨어났어야 했는데, 10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나서 병도 싹 고침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저를 위해 해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서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더 이상 패배자로, 실패자로 살지 마시고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승리자로 죄와 싸워 승리하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옛 사람에 이끌려서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성령충만 받고 새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죄와 싸워 승리하고, 연약함과 싸워 승리하고, 하나님의 귀한 역사 이루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더 나아지는 인생/이영훈목사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한복음 2장 1~5절)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와 절망 가운데서 살던 우리 인류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고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가난과 저주가 변하여 풍요와 축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은혜와 치료와 축복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그것을 우리가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절망 가운데 살다가, 절망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절망에 처했던 한 가정이 예수님의 은혜로 문제의 해결함을 받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말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절망에 처한 가족

 절망에 처한 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로 3절은 설명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되어있는데, ‘가나’라고 하는 지역에서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가나는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정도 떨어진 지역에 있는 곳인데, 걸어서 한 한 시간 반 거리에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결혼식은 교회나 예식장에서 간단하게 예식을 하고 함께 식사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보통 1주일에서 2주일 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면, 그때로부터 잔치가 시작되어서 춤추고 노래하고, 가까운 사람들, 동네 사람들 불러 모아서 먹고 마시고 그래서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 잔치를 할 때 음식이 충분히 준비되어있어야 했고, 또 그 당시 음료인 포도주가 충분히 준비되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잔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잔치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니, 새롭게 결혼하고 출발하는 가정에 큰 절망이 다가온 것입니다.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미리 와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절로 2절 보니까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거기 계셨는데, 그 예수님과 제자들도 함께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얼마 안 있어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3절에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앞으로 잔치를 할 날이 훨씬 더 많고 또 올 손님도 많은데, 그 집이 워낙 집이 어려워서 준비를 적게 했든지 아니면 예상보다 사람이 많이 왔든지, 왜 포도주가 떨어졌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저들이 문제를 만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프기도 하고, 잘되던 사업이 갑자기 곤두박질해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착했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반항적이 되고 사고를 치고 부모님을 속을 썩이는 일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는데 이러한 일들이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크게 절망합니다.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겼나?” “왜, 건강하던 우리 남편이 이렇게 아프게 되었는가?” “왜, 아이가 속을 썩이게 됐는가?” “왜, 사업이 이렇게 어렵게 됐는가?” 그래서 문제가 생겨날 때, 저들이 부정적인 얘기를 쏟아놓습니다. 남 탓을 합니다. “내가 부모님을 잘못 만나서 이런 일이 생겼지.” “내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이런 일이 생겼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남 탓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 탓을 하고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절망의 때에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께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그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이 단번에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어제도 기적을 행하셨고, 오늘도 기적을 행하시고, 내일도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울지 마시고, 탄식하지 마시고, 원망과 불평하지 마시고 남의 탓하지 마시고 주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2. 희망이 되신 예수님
 
 희망이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2장 3절을 보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 해결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고, 우리 사업장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고, 우리 직장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고, 우리 대한민국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 가정에 복을 받고, 이 사회가 복을 받고, 이 나라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북한이 저렇게 못살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약 40배 잘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잘살게 된 이유는 이 땅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일천만 크리스천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고, 복주시고, 함께하시고, 우리 모두가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절망에 처한 그 가정에 예수님이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주님이 문제의 해결자가 되셔서 저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넉넉히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4절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얼마나 이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내게 용기를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을 당했을 때 주님께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를 꼭 붙들어주시고,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우리 마음 가운데 위로와 평안을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 왕이 그의 말년에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 왕이 어릴 때에 그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느라 양들을 돌봤습니다. 그래서 양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동으로서 양을 치다가 사무엘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택함을 받았는데 양들은 고도근시입니다. 50센티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앞 양의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갑니다. 그래서 목자는 맨 앞에 가장 경험 많은 양을 앞세워놓고 양들을 따라오게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스스로 먹을 것도 찾지 못하고 길도 제대로 가지 못해서, 그냥 내버려두면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짐승에 잡혀 먹게 되는데, 양이 목자를 잘 만나면 목자가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 풍성한 풀밭으로 인도해서 배불리 먹게 해주시고, 목이 마를 때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게 해주시고, 그리고 밤에는 밤잠을 자지 않고 그들을 지켜서 이리나 늑대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양떼들은 목자만 따라가면 일생을 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목자 되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일생을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났든지, 어려움을 당하든지 간에 목자 되신 예수님께 나와,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마라. 염려할 시간에 기도와 간구를 드리고 주의 도우심을 힘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원망, 불평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화내고 소리 지른다고 해결이 됩니까? 누구 탓이라고 남 탓을 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아닙니다. 문제만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절망적인 상황은 더욱더 내게 심각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성경 말씀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인생에 고비 고비마다 어려움 당할 때, 문제를 만났을 때, 깊은 절망에 처했을 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 뿌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시고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안에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응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십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요, 저술가인 리 스트로벨 목사님 말씀입니다. “세상이 매일같이 내뿜는 절망의 메시지에 넘어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당신에게, 과거사에 대한 죄책감에 눌려있는 당신에게, 미래가 불투명하게만 느껴지는 당신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을 읽어보면 그분이 소망을 퍼뜨리는 바이러스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육체적 삶을 위해 직접 소망의 삶을 사셨고, 나아가 영원한 천국에서의 소망 가득한 삶까지도 약속해주셨다! 이보다 더 큰 소망의 이유는 단연코 없다!”

 우리의 인생의 중심에,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와서 얘기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아직 내가 이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시작할 때가 안 되었는데, 아직 내가 메시야 인 것을 알리고 일을 시작할 때가 안 되었는데 왜 이러한 부탁을 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응답받는 비결은 무조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했으므로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므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생각과 의견을 내서 자꾸 토를 달면 안 돼요. “글쎄요. 그렇게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따지고 이유를 대면 기적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7절에서 8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어느 집이나 그 집 입구에 큰 항아리가 있었는데, 이 항아리는 밖에 나갔다들어왔을 때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을 하는 그러한 물이 담겨있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꼭 손을 씻어야 됐고, 여러 가지 예식을 할 때 꼭 손을 씻어야 됐습니다. 그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는데 거기다 물을 가득 채워서 그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한 것입니다. 하인들은 왜 이런 쓰잘 데 없는 일을 시키나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물을 떠서 갖다 줬다가 야단맞으면 어떻게 합니까?”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그저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을 채우라” 하시니 물을 채웠고, “갖다 주라” 하시니 떠서 갖다 주매, 갖다 주러 가는 동안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적이고, 이것이 은혜고, 이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기적은 일어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순종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갖다 주었는데 그 물이 아주 좋은 포도주가 된 것이에요. 그래서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이 그 물을 맛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보통 처음에는 좋은 것을 내놨다가 술 취한 다음에 질이 떨어지는 것을 내놓는데, 너희는 지금 더 좋은 것을 가져왔구나.”

 요한복음 2장 9절, 10절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삶의 축복입니다. 더 나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달 보다 이번 달이 더 낫고, 이번 달 보다 다음 달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는 더 나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그저 물은 필요한 것이지만 어떠한 맛도 없고 물 그 자체인데, 포도주는 값도 비싸고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의미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인생이 되고, 무가치했던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인생으로 바뀌는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주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로 우리가 바뀌어져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주여, 우리 인생이 변화되어서 가치 있고 귀하고 우리의 삶이 보람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받는 그러한 모습으로 한평생 쓰임받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를 믿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2010년도에 야식 배달을 하던 한 청년이 방송 ‘스타킹’이라는데 나와서 일약 스타가 된 그러한 일이 있습니다. 그 청년 이름이 김승일입니다. 평택 합정감리교회 집사님이신데, 지금 전 세계를 다니며 찬양과 간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습니다. 원래 노래에 재능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고3 때 레슨을 3개월만 받고 한양대 성악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합니다. 그런데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께서 택시 회사에서 세차, 차 닦는 일을 했는데 쓰러져 뇌출혈이 되셨어요. 그래서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니까, 그 병원 입원비를 대느라 본인은 공부를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택배기사, 휴대폰 판매원, 노점상, 선원, 대리운전, 야식 배달을 비롯해 열다섯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하루 스무 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뭔가 자꾸 뒤틀려지고 사기까지 당해서 빚이 1억이 넘게 되고 또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 무엇 하나. 죽어야겠다.’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려고 하는 그때에, 그가 4대째 기독교인인데 교회를 그냥 건성건성 체험 없이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보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자살하려고 하는 그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붙잡고 그는 죽음 직전에 낭떠러지에서 마지막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내려놓던 그 순간에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때로부터 믿음을 가지고 마음에 넘치는 감사함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야식 배달을 하러 갔던 집에서 나온 그 음악에 감동을 받아서 핸드폰에 넣고 밤낮 불렀습니다. 그게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곡인데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 영혼 지치고 피곤할 때에/
근심 걱정 내 맘 짓누를 때/
난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내 곁에 오실 때까지/
주님 날 일으켜 산 위에 세우네/
거친 바다 위 걷게 하시네/
주님만 의지할 때 강함 주네/
크신 능력 내게 부어주시네

 밤마다 노래 부르는 것을 들은 사장님이 본인도 몰래 방송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집에 음식 배달하는 청년이 노래를 잘 부르는데 한번 방송에 나오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청년이 자기 집 사장님이 보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닌다.

 2010년 12월 4일,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 ‘네순 도르마’, 우리말로는 ‘공주는 잠 못 들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노래를 부릅니다. 너무나 어려운 노래인데, 멋지게 부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나오고, 그때로부터 그가 스타가 돼서 전국을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한양대학교에 다시 복학해가지고 지난 해 입학한 지 20년 만에 졸업을 했어요. 미국 애틀란타 조지아 정부 청사의 초청을 받아 가서 찬송과 간증을 하고 명예 시민증도 받았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현재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특임 교수로 내정이 되어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오랜 시련을 경험케 하신 후에, 하나님의 준비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고난도 복도 그분의 뜻 안에서 감당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살겠습니다!”

 그의 인생이 물 같은 인생이었으나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포도주같이 귀하고 존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야식 배달부였지만 주님이 함께하셔서 그를 높여주시매, 온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함께하시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이전에 상처입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 남이 볼 때는 아무런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그러한 구겨진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를 믿고 주님의 은혜를 입기만 하면 인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귀한 인생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날마다 나아지는 인생, 변화되는 인생, 축복받은 인생, 기적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물 같은 인생을 포도주처럼 귀한 인생으로 바꿔주시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게 만들어주시고, 절망에서 건져주시고, 꿈과 희망을 더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끌어주심을 감사합니다. 한평생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고, 변화된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인본주의적 모형/조용기목사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장 9-10절

 우리의 삶의 주변에는 많은 나무와 풀들이 있습니다. 그런 화초를 본떠서 인간이 만든 인조 화초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면 다 똑같이 보여요. 그러나 실제로 자연적인 나무와 풀을 손으로 만져보면 생명을 느낍니다. 사람이 만든 화초는 굉장히 아름답고 실물과 같아 보이지만 직접 만져보면 생명이 없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우리들은 사람의 생명이 달라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분위기가 다르고, 생명의 질이 달라요. 예수님의 생명과는 이 세상 사람의 생명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비오스’나 ‘프쉬케’는 육신의 생명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프쉬케’는 죽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기록할 때는 ‘조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보통 죽을 때 죽는 육신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프쉬케’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은 ‘조에’ 생명이라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말한 영생의 생명은 ‘조에’ 생명인 것입니다. 

1.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예수님은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 속에 성령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0절~22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 5장 12절)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닌 다른 어떠한 종교나 의식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계를 영원히 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시는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이 바로 영생을 갖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목마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목마르고, 어떤 사람은 명예에 목마르고, 어떤 사람은 부에 목이 마르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목이 마르고, 타인의 인정에 목이 마르고,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너희들이 세상에서 보는 물은 마셔도 곧 목마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목마르지 않고 그 뱃속에서 영원히 솟아오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은 다 다르지만 그것을 목말라하는 이유는 행복을 가져오기 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시고 난 다음에 행복이 가슴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아무리 마셔도 계속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목말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는 영이 거하는 자리가 있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기에 영적인 생명은 죽었고 육체의 생명 프쉬케의 생명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거기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의 본래는 영입니다. 육체가 아니고 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영이 죽어서 영이신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며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이 죽은 사람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세상의 칭찬 등으로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그런 것을 가져도 참 자기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제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자아는 죽었습니다. 참된 당신은 죽었어요. 당신의 겉사람이 살아 있지만 속사람은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허무한 감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여러분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슴 속에는 만족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세계를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3절~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고 영혼이 살아난 사람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 안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탄광촌을 방문을 했습니다. 석탄 캐는 탄광촌에 가서 예배를 인도 했는데, 예배를 인도하고 나니까 탄광 광부 한 사람이 ‘목사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 하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공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그 탄광부를 보고 ‘내가 하나 묻겠습니다. 오늘 갱도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까?’ ‘예,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데 돈을 얼마나 줍니까?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데 탄광 갱도에서 지하에 내려갔다가 땅 위에 올라왔다 엘리베이터에 얼마를 냅니까?’, ‘아니 우리 돈 안 내요. 회사에서 다 설비를 해서 엘리베이터를 운영을 하기 때문에 돈 안 내고 탑니다.’, ‘아 이렇게 거대한 시설을 하는데 돈을 안 내고 공짜로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내가 참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요, 여기는 돈 안 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돈을 쓰신 비용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그 엘리베이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엘리베이터요,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서 인간이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비용을 많이 들였습니까? 사람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돈 안내고 엘리베이터 타는 것처럼 아무 비용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단추만 누르십시오.’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것은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비용이 하나도 들지 않는 공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예수님을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한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사랑,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받는데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을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종교들은 다 대가를 지불해야 구원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행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신앙은 행위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지만, 그 죄를 대신 탕감해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과거의 죄도 용서 받고, 지금의 죄도 용서 받고, 장차의 죄도 용서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가 용서 받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생명인 성령이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해서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변화 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변화와 새로운 창조적인 생명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변화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한복음 15장 5절)고 그랬어요. 포도나무가 열매를 가지를 통해서 맺습니다. 땅의 영양분을 다 빨아올려서 가지를 통해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주는 분은 성령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여러분은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써 하나님의 성령이 그 가지를 가진 우리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이런 열매를 우리 힘으로 맺어집니까? 아무리 결심을 해도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시면 예수님의 성품이 자연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같은 성격이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열매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조화를 만드는 것처럼 가짜를 만들어서 밀어 넣으면 들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7장 15절~18절)

 나무가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못 맺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자연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나야 예수님의 성품이 속에 들어와서 좋은 열매인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이 그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인간적인 노력을 아무리해도 인간적인 노력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장 21절)

 예수님은 율법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여 정해진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그러지 않고 예수 믿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안에서 죄 지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청산하여 죽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보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 헛되이 죽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라디아서 6장 15절) 유대인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또 할례를 받으면 어느 것이 더 효과가 있느냐? 예수 믿는 것은 헛된 수고인 것입니다. 폐이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우리 구원에 관계가 없습니다. 정말로 신앙생활에 너무나 놀라운 것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이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지을 잘못된 죄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다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숨이 넘어가기 전에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평생의 죄악을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또 그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해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셨고, 그 십자가에 보혈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육체의 질병을 다 청산해 버렸어요. 억센 믿음으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 여러분이 더 이룰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가를 지불해 놓은 것 여러분은 수용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간의 저주를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다음에 이 땅은 저주를 받아서 인간의 삶이 가시와 엉겅퀴 속에 고생을 하고 살아갔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나무에 매달려서 저주를 청산한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다.’함과 같이 예수님이 저주 받을 이유가 없는데 인류를 대신해서 주님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저주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복 주고 복 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아브라함처럼 축복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사망과 음부를 멸하시고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은 절망을 청산해버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희망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죄와 더러움과 질병과 저주와 음부를 청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생각을 하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많이 받고 있는 이유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마음속에 품고 다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오중복음을 통해서 절망을 청산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믿음으로 삶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기뻐함과 동시에 오중복음을 통하여서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한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나는 한번 어느 나라인지 그것은 세월이 오래 돼서 잊어버렸는데, 부흥회를 갔는데 이 교회와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하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막 교회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생각에 ‘이 교회는 희한한 의식이 있구나. 예배 보다가 뛰고 싶으면 마음대로 뛰는구나’ 그래서 내가 설교하다가 말고 본 교회 목사를 보고 뒤에 앉아있는데 “목사님, 저 사람 왜 저리 뛰어 다닙니까?” 목사님이 “나도 몰라요. 저 사람 20년 동안 우리 교회 나온 사람인데 왜 저리 뛰어 다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고 “예배 중에 좀 중지 하십시오. 왜 그렇게 뛰어 다닙니까?”, “몰라요. 나 왜 뛰어 다니는지.” 알고 보니까 20년 동안 휠체어에 타고 있던 앉은뱅이에요. 갑자기 하나님 성령께서 가슴을 뜨겁게 어루만져주시더니 귀에 대고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러니 그도 20년 만에 처음으로 뛰었는데, 왜 뛰었냐고 하니 ‘내가 다 이루었다. 의자에서 나와서 뛰어라.’ 그러니 자기도 왜 뛰었는지 모르게 뛰었고, 목사님은 20년 동안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예배를 보던 사람이 뛰니깐 왜 뛰는지도 모르고, 저는 처음 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증거 했으니깐 왜 뛰는지 모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다 청산 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됩니다. 오중복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얼마나 신앙을 분명하게 하는지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 받았다, 성령 받았다, 긍휼 얻었다, 물질적인 축복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그런 희망을 주님께서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못 믿는 존재가 되지 말고 이 십자가에 여러분을 비교해서 희망을 꼭 잡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놓치지 말고 여러분이 희망에 붙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희망찬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언제나 분명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이 있으니 꿈이 있는 것입니다. 희망찬 꿈을 꾸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으니깐 사람들이 보기에 놀라운 삶을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 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10절)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러분이 걸머지고 있으면, 여러분의 생애 속에 오중복음의 희망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 희망의 결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충만하게 얻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종교적이고 형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희망찬 인생을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 긍정적인 말을 자기 자신보고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낙심되면 내가 낙심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다 이루어 주시므로 희망차다고, 소망차다고, 슬프면 주님이 계시므로 기쁘다고, 자기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므로 여러분 믿음 이외에는 더 할 일이 없습니다. 생명을 믿음으로 얻은 우리는ㄹ한없이 감사해야 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희망을 갖고 기도를 계속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는 하나님이 생명을 예수님을 통하여 주신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살아나서 영 속에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여 계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가 있고 하나님과 은혜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실 수가 있어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영혼이 살았으니 충만한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기뻐하시고,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살려 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교제하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열매를 풍성이 맺는 성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제사장의 기도/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야훼는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면”
제사장 선포통해 이스라엘에 복 주신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의 수여자이심 인정해야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대제사장의 삼중 축복 기도가 민수기 6장 22∼27절에 언급되어 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광야로서 뱀과 전갈이 돌아다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없는 공포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의 여행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아론의 삼중 축복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담대함의 기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사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예수 안에서 아론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서로에게 선포하며 힘과 용기와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삼중축복은 첫째로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녀와 재산, 땅, 건강, 그의 임재라는 복을 주신다(창 17:16; 22:17∼18; 레 26:3∼13; 신 28:2∼14). 나아가 이러한 좋은 선물뿐 아니라 모든 위험에서 그를 보호하게 하시고(욥 1:10), 각종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지켜주신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신다는 비유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과 부합된다(시 31:16; 67:1). 그는 곤경에 빠진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사 대적과 질병과 죄에서 건져 주신다(시 4:1; 6:2; 51:1). 어려운 사람을 보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그에게 실망과 낙심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인생을 감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한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이다(창 43:29; 시 4:6).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평강이다. 그것은 전쟁과 소요가 없는 평화의 상태뿐 아니라 풍요와 건강, 번영, 구원 등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모두 세 구절, 15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구절은 각각 3단어, 5단어, 7단어로 점층적으로 많아져서 축복이 강조되고 깊어지고 있다. 또한 구절마다 야훼 이름이 한 번씩 들어 있어서 모두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야훼 이름이 주어로서 한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지만 굳이 세 번을 반복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훼 이름을 빼면 12단어가 남는다. 이는 복을 받는 사람이 12지파임을 상징한다. 복은 결코 사람인 제사장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매달려도 안 되고, 복 자체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야훼의 복주심이 아론과 그 아들들로 대표되는 제사장들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적시는 것과 같다(시 133:2).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생각과 꿈과 믿음, 특히 축복의 말의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나아가서 아론의 삼중적 축복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축복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축도와 연관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종의 축도가 선포될 때 온전히 예배가 마무리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과 마음의 복과 물질적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하나님, 나의 하나님/조용기목사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28~31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 교파의 하나님, 우리 목사의 하나님, 위대한 신앙인의 하나님이 되시지, 나같이 개인적인 하나님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나와 일대일로 만나서 정말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밤에 질문을 해보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사람은 영혼은 죽고 육체만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 아닌 사람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당신같이 육신으로 태어나서 육의 세계에 대화가 되도 영의 세계는 대화가 안 되는 사람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났을 때 사람은 영적인 세계에 살고 육적인 세계에도 살게 되었습니다. 영을 가진 우리들은 육체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이 있기 때문에 영인 하나님과 대화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영이 죽어 버렸습니다. 육체만 살았으니깐 육체와 대화는 되어도 영과 대화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거듭나서 영이 살아나야지,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니고데모가 “어떻게 사람이 거듭나느냐?”고,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계속적으로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과 같이 눈엔 안 보이지만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자체는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영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내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들리어 죽어야 그 피를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이 거듭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육이 영을 대하여 대화를 하려고해도 대화를 할 수 없으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적인 이 세상 만물 속에서만 살지 세상 저 건너편에 신령한 영적인 세계에는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되는데, 육인 우리가 영인 하나님을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영은 영이 대화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되면은 그때부터 하나님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서 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영인 하나님과 더 깊이 체험하면 굉장히 즐거운 신앙생활 속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령님과 대화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권사님 한 분이 성대에 암이 생겨서 말을 잘 못하고, 목이 굉장히 부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내게 안수기도 받으러 오기 때문에 “좀 본인이 기도하지 내게 자꾸 안수만을 받지 말라”고, 본인이 기도해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의 기도를 들어줄 수가 있느냐? 목사님의 기도가 빨리도 들어줄텐데 목사님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신은 “매일 기도해도 하나님은 나를 개인적으로 취급해주지 않는다.”소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이랑 친하고 나는 그만큼 친하지 못 하니깐 하나님과 친한 목사님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권사님, 하나님과 친하게 된 걸 비결을 가르쳐드릴 테니까 그것을 하고 난 다음 오면 내가 안수기도를 간절히 해드리겠습니다. 집에 가서 공책을 준비하십시오. 공책을 준비하여 공책을 여러 권하고, 연필을 몇 자루 준비해서 기도원에 들어가십시오. 가서 ‘하나님은 김금순 권사를 사랑하신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았다.’ 이 말을 만 번을 적으십시오. 만 번을 ‘하나님은 김금순 권사를 사랑하신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받았다.’ 만 번을 적어오면 내가 기도를 해드리겠습니다.”

 내 생각은 ‘만 번 적기 전에 저 세상에 가버리고 말 것이다. 더 찾아 안 올 것이야. 어떻게 만 번을 적겠느냐?’ 그러니깐 “만 번을 적어 올 테니깐 나를 기도해주십시오.”, “그럼요. 만 번 적어 오십시오.” 그러고 그가 내 사무실을 나갔을 때 나는 잊어버렸었습니다.

 만 번을 적기 전에 천당 갈 것 같으니까 기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몇 개월의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하루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이 권사님이 들어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는데 얼굴에 웃음이 만발하는데 “목사님이 김 권사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는 걸 만 번 적으라고 해서 만 번을 적었습니다. 내 입술로 ‘김금순아,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그렇게 말하고 적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전엔 목이 쉬었는데, 지금은 목도 안 쉬고 칼랑칼랑한데 암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슨 암 말입니까?”, “아니 목에 암이 걸려서 산에 올라가서 이것을 만 번이나 적었지 않습니까?”하니 “이거 적는다고 바빠 가지고 목이 어떻게 됐는지 몰랐는데요.” 빨리 병원에 가서 목이 어떻게 된 것을 알아보라고 했더니, 아이고 그것도 다 잊어버리고 숙제한다고 너무 정신이 팔려서 애를 먹었는데 병원으로 쏜살같이 뛰어가서 보니깐 암이 다 물러가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 권사님이 “하나님은 조용기 목사의 하나님만 아니요, 나도 개인적인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절실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라”고 굉장히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다 천국에 갔습니다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체험을 해야 우리 생활에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1. 함께하시는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실 수 있느냐? 하나님은 생각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이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기적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8절로 31절 오늘 본문에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인데,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생각하고 접촉을 시켜서 깊이 사귀고 가까운 하나님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이 성경을 이사야 40장 28절로 31절을 읽었을 때, 그냥 읽지 말고 ‘용기야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읽으면 더 은혜가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우리의 생각으로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이름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이것을 자기에게 준 하나님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보다도 ‘용기야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일대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실히 우리를 개인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그냥 그러지 말고 ‘용기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그것을 여러분 생각 속에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생각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시면 성령이 역사하여 주셔서 변화를 가져오고 창조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하나님과 지극히 같이 있는 상황 속에서 위기를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새 중에 ‘뱀잡이수리’가 있습니다. 이 독수리는 하늘에서 날면서 토끼도 잡고 나보다는 더 잘 달리는 것 같아요. 저기 공중을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토끼나 노루새끼나 이런 것을 잡아서 놓고 있다가 사자나 곰이나 이런 것이 오면 그냥 두 발로 뛰어 달아가는 것입니다. 날지를 않습니다. 날개가 있는 줄 모르고 뛰어서 도망을 칩니다. 백발백중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야 너 날개가 있는데 날아라! 짐승을 잡아먹을 때는 날면서 도망칠 때는 못 나느냐?” 겁을 집어먹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날개가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 때에는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하는데, 어려움을 당하면 그냥 놀라고 탄식만하지 기도를 할 줄을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날개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기도의 날개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기도를 하지 않고 그냥 도망치다가 고약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날개를 펴면 여러분은 날 수 있습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날지 못하는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2. 만나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우리가 담대하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같이 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물 위로 걸을 수 없지만 베드로는 물 위로 걸었습니다.
 군중들을 먹이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독촉해서 빨리 강을 건너가라고, 예수님은 홀로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밤중에 나와서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애를 먹고 있는데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유령이 오는 줄 알고 유령이라고 고함을 치니깐 예수님께서 “나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두려워하고 엎드려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이면 나를 오라고 하셔서 내가 예수님께 가겠나이다.”, “그래 오너라.” 그러니 변화무쌍한 제자지만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대상으로 믿을 뿐 아니라 저와 같은 삶을 가지고 있는 영적인 존재인 것을 깨달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도 물 위로 걸어갈 수 있다. 예수님만 걸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담대한 믿음으로 나가면 걸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기적을 제일 많이 행했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중병에 걸린 환자들을 고치는 것은 베드로가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하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굉장히 가까워진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장 18절)고 말씀하시면서,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이것을 하도록 내가 권세를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여러분 이런 것을 행해서 체험을 하면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험을 하는 것을 등한히 해서 체험을 없는 신앙을 함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언제나 기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을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시편91편 1절~8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받아서 시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이런 것은 문제없이 행할 수 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가오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영과 대화해서 내 영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세계 어느 신앙보다 활발하게 불붙어 나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은 성령 충만을 주는 종교적 체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 꿈도 환상도 오고, 병을 고치는 기적도 나타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하나님의 사는 세계 속에 들어가서 체험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은 하나님 성령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렇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편 9절~12절)
 우리가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주님이 피난처다. 나는 지존자를 거처로 삼았다.’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내가 말을 그렇게 함으로 그 말이 나가서 그런 주변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셔서 빛이 있으라, 동물들이나 식물들이 있으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말이 나가서 천지를 지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말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제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입술로 고백을 하면 그 입술 고백이 밖에 나가서 그런 형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입술로 부정적인 말을 하고 뒤로 물러가는 말을 하면은 패배하고 맙니다. ‘나는 못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 말은 엄청난 파괴를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한다, 나는 된다, 나는 승리한다’ 긍정적인 말은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줄 터이니깐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사라는 사래라는 이름을 하지 말고 많은 자식의 어미라는 사라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자식을 가진 아비가 되고, 사라를 하면 자식을 가진 어미가 되고, 그만하면 됐는데, 확실하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그 긍정적인 말을 많이 반복하기 위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요, 사라, 많은 자식의 어미요, 자꾸 같은 말을 긍정적인 방법으로 시인을 하기 때문에,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 외국 사람이 와서 “당신 아내가 설교할 때 이런 설교를 한 걸 들었다”고, “어째 당신은 당신 남편이 세계적인 교회 목사고 부흥사인데 따로 나가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이러냐?”고 하니, 당신 부인이 말하기를 “당신 이름이 용기인데, 용기란 것은 조금 발음을 길게 하면 ‘용기가 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의 아내’라고 하니깐 ‘용기가 있는 목사의 아내’라 그 용기가 내게 전달되어서 나가서 부흥회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라고. 자꾸 반복을 한다 말입니다. 잘하면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승리한다, 승리한다, 승리한다. 병이 나았다, 나았다, 나았다.” 그렇게 입술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그것 고백한 결과가 자기 생애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의 고백 속에 나타나셔서 성령으로 같이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과 같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도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편 91편 13절~1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계시의 말씀인데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생각 속에 받아들여오면 우리 생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속에 받아들이면 우리 생각이 그렇게 변화되고 우리 말이 그렇게 하면 여러분 환경이 그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이 들어와서 여러분 생각과 대화가 되면은 성령이 역사하여서 그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끊임없이 자꾸 읽음으로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닮아가고 그 다음 그 말씀을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행하신 기적이 우리 주위에서 나타나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3.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장 2절~3절)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예비해놓고 큰 기적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준비해놓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사랑을 준비해놓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는 말씀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해서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준비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물질적으로 있어야 되는데, 영적으로 있어야 될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하나님처럼 변화되는 가운데 믿음을 통해서 나가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인간의 행위로 살기 때문에 많은 패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북방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합이었고, 그 아내가 이사벨이었는데, 그들은 바알 신을 섬기고, 야훼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만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기뻐하지 아니하셔서 가뭄을 주어서 가뭄으로 사람들이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선포를 했습니다.
 ‘너희 바알의 제사장들은 450명이 되는데 모여오고, 야훼의 선지자는 나 혼자 남았으니 우리 나와서 누가 참신인지 경쟁하자.’

 갈멜산에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양쪽에다 제단을 세우고, 450명 되는 바알 제사장들이 먼저 송아지를 잡아 제물을 얹어놓고 기도해서 불이 떨어지면 자기들이 섬기는 바알이 참신인 줄 인정하고, 불이 떨어지지 아니하면 그날 심판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제사 제단을 만들어놓고 송아지를 잡아서 뿔을 뽑고 뼈를 골라내어서 얹어 놓고 난 다음, 그 주위에 돌아다니며 춤추면서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을 주소서, 불을 주소서’ 하루종일해도 불이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해가 질 녘에 제단에 양을, 송아지를 잡아서 얹어 놓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인데, “야훼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야훼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야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야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야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열왕기상 18장 37절~39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참 하나님 백성들인 것입니까? 기적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해서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태우는 것을 국민들이 보았기 때문에 야훼 섬기는 신앙이 다시 복구되고, 450명 바알의 제사장은 엘리야가 모조리 잡아서 시냇가에 내려가서 목을 쳐서 죽인 것입니다.

 기적이 없으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반 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성령을 모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 속에 받아들여서 깨닫는대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이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지극히 가깝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긍정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 소원의 꿈을 마음에 품고, 믿음을 갖게 해주며 창조적 고백을 선언하면, 성령께서 함께 운행하사 변화와 창조의 세계를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한 신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낙망할 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낙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 삶에서 적용했는데,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날마다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폭풍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그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멀리 떠나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새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는 임기 동안 대공황을 극복했고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물러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어두움의 터널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기도의 결과로 회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알고 기도한다면 어려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이 북한과 중국과 그 사이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어려움을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곁에 있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내어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주시고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은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지만은, 너무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 계시고, 말씀은 우리 속에 말씀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본 따서 하나님처럼 말하며, 생활하며,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멀리 계시지 아니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는대로 읽으면 여러분의 생각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이 시대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하나님의 축복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 속에 다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엄청나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위대한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하나님의 생각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생각을 여러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행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의 기적의 역사를 놀랍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역사함을 따라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참으로 능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에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늘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늘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옥자-구해줘서 고마워 - 이장균 목사(광명교회 담임)

 

“옥자”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70회 칸 영화제에서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영화제목 이름이다.

영화에서 옥자는 인간이 만든 유전자 변형 돼지 이름으로 등장한다.

한 글로벌 대기업에서 마케팅 일환으로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그들은 유전자 개량 품종인 ‘슈퍼 돼지’를 26개국 농가에 보내 10년간 키우게

한 뒤, 가장 아름답고 맛있게 자란 돼지를 선정하는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우리나라 강원도 산골의 한 농가에 보내진 새끼 돼지 이름이 ‘옥자’였다. 옥자는 한 농부와 농부의 손녀에 의해 반려 동물로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10년이 흘러 글로벌 기업은 옥자를 회수해 도살하려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농부의 손녀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하여 나선다. 옥자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상경한 미자가 입고 있는 옷색깔은 붉은 색이다. 미자가 입은 붉은 색 옷색깔은 구원을 상징하는 옷색깔로 다가온다. 영화 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결국은 생명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어린 소녀 미자가 다국적 기업에 홀로 맞서 옥자를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일까?

 다문화부 예배에 참석하는 한 집사님은 라오스에서 왔다. 불교국가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손에 끌려 절에 다니는 것이 일상의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한국의 시어머니는 예수를 믿었다. 시어머니는 라오스에서 시집온 며느리 손을 잡고 교회로 갔다. 전도한 것이다. 처음 교회에 나와 2년 동안은 적응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매주 예배에 나와 찬양을 하다가 은혜를 받았고 이제는 집사가 되어 다문화부 예배에서 찬양담당 봉사자로 주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그 집사님의 고백이다. “시어머님이 나를 교회로 데리고 나가줘서 지금은 너무 고마워요. 나에게 꿈이 있어요. 라오스 고향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에요. 고향에 교회를 세워 나같이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거에요” 라오스에서 오신 그 집사님은 자신을 전도해 준 시어머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예수님을 모르는 고향의 사람들에게 교회를 세워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꿈을 이야기 한다.

 요즘 전도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그 일이 쉽겠는가? 당연히 어렵다. 어느 시대나 전도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멈춘 적이 없다.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은 그 어려운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다.

 


구역예배/부모의 역할과 책임

◎ 찬송가(다같이) : 199장(통일 234장), 570장(통일 453장)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편 3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 오늘의 만나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자녀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부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저절로 혼자 크지 않습니다. 자녀가 건강한 신앙과 윤리적, 경제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그 역할과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1. 아버지의 역할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머리’로서의 권위를 주시는 것은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정의 총책임자입니다. 아버지에게 부여된 가정에 대한 책임은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것도 있겠지만 가정의 영적인 건강에 대한 부분이 가장 큽니다. 영적 제사장의 역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가정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이 먼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명기 4장 10절은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야훼 앞에 섰던 날에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보고 배울만한 신앙의 모델,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를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올바른 훈계는 하나님의 지혜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녀의 수준과 성장 단계에 맞는 훈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녀를 훈계하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엡 6:4). 비록 엄한 훈계라 할지라도 그 속에 진심 어린 사랑이 담겨있다면 자녀는 상처받지 않고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자녀의 의식주와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나 독립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어머니의 역할
 어머니는 가정에서 생명을 전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는 뱃속에 태아가 생기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이자 선물이라는 마음을 품고 태교와 출산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시편 127편 3절은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그 아이가 올바르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입니다. 자녀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아이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가장 많이 대화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이에게 시시때때로 말씀을 가르쳐줄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를 올바로 이끌기 위해서는 잘못했을 때 훈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훈계와 균형을 맞추어 위로도 함께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주로 훈계의 역할을 맡는다면 어머니는 위로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 훈육을 받으면서도 위로해주는 부모님의 품 안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의 앞날을 위해 어머니는 끊임없는 격려로 다가가야 합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칭찬과 격려를 통해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끌어내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통으로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은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땅에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해주십니다.

3. 조부모의 역할
 시대가 변해가면서 부모의 역할 못지않게 조부모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조부모는 살아온 삶의 경험이 부모보다 깊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가정의 내력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용납해줄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나갈 때는 야단을 치거나 훈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부모는 양육에 대한 일차적 책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부모보다 더 관대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조부모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줄 수있습니다.
 신앙의 조부모는 영적인 면에서도 남다른 연륜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7절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조부모님들은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끊
어지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잘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 간추린 만나
 <아버지의 역할>

1. 아버지는 가정의 영적 제사장입니다.
2. 아버지는 신앙과 생활에서 있어서 자녀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3. 아버지는 자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훈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
1. 어머니는 생명을 잉태하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2. 어머니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3. 어머니는 위로와 칭찬 그리고 격려를 통해 자녀의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조부모의 역할>
1. 조부모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돌봐줄 수 있습니다.
2. 조부모는 가정의 신앙의 역사를 자녀 대대로 물려주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버지로(어머니로) 부르셨습니다.
2.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합시다.
3.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합시다.

<기 도>
1.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믿음 안에서 좋은 가장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사랑의 통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조부모로서(조부모님들이) 신앙의 전통을 잘 전수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구역예배/행복한 부부

◎ 찬송가(다같이) : 299장(통일 418장), 555장(통일 없음)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3∼24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 오늘의 만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 아담과 하와를 통해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부부는 ‘부모를 떠난다’는 독립적인 성격과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연합의 성격이 있습니다(창 2:24). 이를 위해서 부부는 서로를 도우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부의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과에서는 믿음 안에서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1.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노력

 부부는 매우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러한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첫 걸음입니다. 또한 부부는 결혼하기 전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보다 고치려고 하면 상대방은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서로 불화하게 됩니다. 신앙적, 윤리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서로에게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방법입니다. 잠언 15장 23절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부부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들추어 흠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상대방을 낮추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은 덮어주고 잘하는 것은 칭찬함으로써 서로가 건강한 자아상을 만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걸어가는 관계가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통의 목표나 취미를 함께할 때 유대감이 깊어지고 가정의 행복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함께하는 만큼 서로의 독립적인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배우자에게만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하고 상대방의 이해와 지지를 받으며 자기 개발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는 정신적으로만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기에 적절한 스킨십을 통해 신체적인 교감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담긴 스킨십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고, 외로움을 없애주며,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긴장감을 해소시켜줍니다.
 무엇보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지속적인 애정 표현이 필요합니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랑의 충전이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사랑을 필요로 하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결국 점점 희미해지고 맙니다.

 2. 남편으로서의 역할

 부부간에 특별히 남편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성경은 남편에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남편은 자신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내를 지켜주고 보호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으로나 감성적으로 확실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특히 여성은 감성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훨씬 섬세하고 민감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대할 때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어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한 것으로 왜 상처를 받냐!”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자기의 방법대로 아내를 쉽게 대하지 말고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내로서의 역할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들도 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아내들은 머리와도 같은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엡 5:23).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남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서로의 신뢰 가운데 나오는 기쁨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어줄 때 그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해 가장의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내는 스스로를 단장해야 합니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여서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속사람을 단장해야 합니다. 잠언 12장 4절은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질고 현명한 아내는 가정을 일으키고, 가정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전인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냅니다.

 ◎ 간추린 만나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노력>
1.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첫 걸음입니다.
2.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표현을 해주어야 합니다.
3. 공통의 관심사와 취미를 갖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남편으로서의 역할>
1.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생명을 다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2. 아내의 섬세한 감정을 이해하여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아내로서의 역할>
1. 아내는 남편을 신뢰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2.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정을 일으키는 어진 여성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부부가 됩시다.
2. 예수님 안에서 좋은 남편이(아내가) 됩시다.

<기 도>
1. 서로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를 주심을(주실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2. 배우자의 실수와 연약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3. 배우자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이영훈목사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야훼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18:30-36

 우리가 예수 믿고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그 은혜, 그 감격, 첫사랑을 잃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였고 많은 일을 한 교회였지만, 계시록 2장 4절을 보면 그들이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의 그 은혜, 그 기쁨, 그 감사, 그 감격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부흥하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칭찬하니까 그 칭찬에 묻혀서 풍성함에 묻혀서, 주님을 향한 열정이, 감사 감격이 사라진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그 어느 날 내가 성령 체험을 했었을 때 눈물이 나고 내 마음이 뜨거워서 “나 주 위해 살리라.”고 결심했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에 알게 모르게 사라져버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감격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 나와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다시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애굽에서 해방 받아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이 풍요로움 속에 갇혀서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고 온 땅이 기근이 들어서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영적 대결을 하는 그러한 놀라운 장면이 전개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모여서 자기들의 신에게 “신이여, 신이여, 불을 내려주옵소서! 불을 내려주옵소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다가오지 않았고, 그들의 신은 침묵했고, 엘리야가 엎드려 기도할 때 불이 떨어졌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라

 첫째로,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의 신앙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히 임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0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더 가까이 와라!” 이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부르짖고 부르짖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 바알과 아세라가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까이 오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무너진 신앙의 제단을 다시 쌓아야 됩니다. 감사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금 감사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 기도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 찬양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본인이 알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무너진 제단을 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느라 예배의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삶 가운데는 죄와 절망만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제단을 쌓고 그다음 그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3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저들의 죄 때문에 송아지가 피 흘려 죽었습니다. 나무에 올려진 송아지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기 때문인데,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의 제사는 하나님이 제정해놓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을 때 너희 죄를 사하기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느니라.’ 구약 시대에는 짐승들이 죽었고, 신약 시대가 열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성경은 설명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할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나게 됩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처음 성령 체험했을 때,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때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이 그와 같은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정결신앙을 회복하라

 둘째로, 우리는 정결신앙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죄로 인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씻어내야 됩니다. 열왕기상 18장 33절에서 35절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통 넷에 물을 가득 채워 물을 부었습니다. 위에부터 제단 아래까지 물이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또 다시 물을 채워서 부어라!” 또 다시 네 통에 물을 채워서 부었습니다. “또 다시 물을 채워서 부어라!” 또 다시 물을 부었더니 물이 차고 넘쳐서 옆에 파놓은 도랑에까지 물이 흥건히 가득하게 고였습니다. 열두 통의 물을 부은 것입니다.
 이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열두 지파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그 물을 붓는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아야 될 것을 저들에게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죄악 속에 살다보면 죄의 때가 묻게 되어있습니다. 아침에 열심히 세수를 하고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다 돌아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얼굴에 먼지가 묻어있기 때문에 밤에 자기 전에 또 세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죄의 때가 묻습니다. 어떤 때에는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죄를 가져다 줄 때가 있습니다.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도 죄의 모습들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듣지 않아야 될 얘기를 듣다보면 내 마음에 죄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죄로 얼룩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알게 모르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죄 짓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씻어서 정결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씻고 날마다 세수는 하면서 정작 정결함을 받아야 될 우리의 영혼이 죄로 얼룩져있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 영혼이 날마다 정결하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의 보혈로써 정결하게 되게 하여주옵시고, 말씀의 물로써도 정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에스겔 36장 25절은 설명합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예수의 보혈이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마음을 적시고 우리의 영혼을 덮어서,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의 삶에 회복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줄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 이유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계시록 22장 끝 절까지 성경 구절마다 예수님의 피가 방울방울 적셔져있어서, 말씀을 읽을 때 그 피가 우리 마음 가운데 뿌린 바 되므로 우리가 정결함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설명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또 히브리서 10장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주여, 우리가 날마다 정결함을 받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이 인정하시는 모습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사람들이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는 정말, 요즘 말로 꽃단장을 하고, 잘 단장하고 옷도 좋은 옷을 입고,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서 기다리는데, 우리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정말 그러한 준비와 정결한 모습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의 보혈로 씻고, 말씀의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의 무릎을 꿇고,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서 정결함을 받고 변화 받을 때, 우리는 풍성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여,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을 인도하여주옵소서. 우리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늘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쳐보아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바로잡게 하여주옵소서.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지는 나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금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3. 성령 충만의 신앙을 회복하라

 우리는 성령 충만의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 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한 주님의 일꾼으로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시험에 들고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그냥 무너지는 것입니다. 왜? 충만 받지 못해서입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그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심장에 불이 떨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는 모든 죄의 흔적들이 다 태워져 사라져버리고, 절망도, 근심도, 걱정도, 마음의 상처도, 염려도 다 사라져버리고, 주님의 은혜가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열왕기상 18장 37절, 38절입니다. “야훼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야훼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야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주여,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할 때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 불은 성령의 불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리 삶이 그 순간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는 거예요. 죄 가운데 살던 내가 변화 받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의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 받으면 하나님께서 그 일생을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간증하시기를 “우리 아들이 교회 학교 다닐 때 성령 충만 받고 나서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 번도 저를 속 썩인 일이 없고 잘 자라서 미국에 유학 갔다 와가지고 지금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회사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 체험이 그 아들의 일생을 이렇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속 썩이고, 반항하고, 괴롭힙니까?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성령 충만 받아서 삶이 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일꾼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도 성령 체험하기 전까지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다보니까 매일같이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어요. 가정 예배를 드릴 때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하는데, 어머니의 기도 시간만 오면 대표 기도가 한 15분이예요. 자다 깨도 하고 계세요. 저희 형제 다섯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다보니까 15분씩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같이 가정 예배드리고, 토요일이 되면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형제들 앉혀놓고 성경 퀴즈하시고, 그래서 성경 테스트를 매주 토요일마다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면 상금을 줬거든요. 돈에 눈이 멀어가지고 열심히 성경 공부 했어요. 그런데 순복음교회에 와서 성령 받고 나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1966년 2월, 조용기 목사님께서 닷새 동안 성회를 인도하시는 넷째 날 목요일 날 불이 떨어졌어요. 방언이 임했습니다. 맘이 뜨거워지고 단 한 번도 그 전까지는 예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졌습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생각나서 얼마나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기도만 하면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땐데요, 그 눈물의 기도가 한 5년은 갔어요. 그냥 엎드려 기도만 하면 한 시간 넘게 그냥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쏟아지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감사한지, 기도만 하면 예수님 십자가 밖에 생각이 안나요.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길 따라 쭉 오다보니까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이 은혜를 다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때의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주여, 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 머물러있게 하여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하지 않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여 좌절하여 주저앉지 않게 하시고,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여주셔서, 하나님 영광 위해 살게 하여주옵소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후에도 다시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갔던 베드로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불 받고나서 달라졌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서 복음을 선포할 때, 말씀을 전할 때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불이 떨어지는 장면이 사도행전 2장 1절로 4절은 설명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지금 아르헨티나의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클라우디오 프레이존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원래 클럽에 가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청년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엄마, 나 클럽 갈 테니까 돈 좀 줘요. 용돈 좀 줘요.” 그때 기도하는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교회, 나 따라서 교회 나오면 용돈 주겠다.”고, “교회 왔다 클럽가라”고. 그래서 클럽 갈 용돈 얻으려고 교회 따라 나왔다가 은혜를 받아버렸어요.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받았나 봐요.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됐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열심히 전도하고 목회를 하는데 성도는 할머니 다섯명 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설교해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교회 가면 사람들이 모여오고, 교회가 막 북적북적하고, 애들이 울고 그래야 좀 부흥하는 교회 같은데, 할머니 다섯 분이 가만히 앉아계시니까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거예요. 그래서 하다하다 지쳐서, 성령 받은 사람도 때때로 충만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총회장 목사님을 찾아가가지고 “저, 이제 포기해야 되겠습니다. 목회 접겠습니다. 목사증 반납하겠습니다.” 그러자 총회장님이 권면합니다. 다시 충만 받고 열심히 해야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권면해서 다시 돌아옵니다.

 어느 날 그 처삼촌 되는 분이 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장차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자네는 큰 부흥사가 돼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될 거야.”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멘! 교회가 부흥합니다. 나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됩니다.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 열심히 해서 성령 충만 받아가지고, 교회 가서 할머니들 앞에서, “제가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아이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까 조금 이상해졌나보다.” 그런데 그가 믿음으로 선포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5만 명이 될 것입니다!”
불이 떨어지니까 이 교회가 200명, 300명, 400명, 2,000명까지 부흥했어요. 그래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천명쯤 되고 나니까 굉장히 목회가 바빠요. 여기저기 오라는 데도 많고 또 할 일도 많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학교 은사 선생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이룬 많은 성공적인 사역을 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네. 그런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자네도 성장했고, 교회도 훌륭하다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네. 성령님께서 자네에게 말씀하시길 바라고 계시지만, 자네는 너무 바빠서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는 듯하네.”
 본인이 교회가 크고 나니까 자신도 모르게 “내가...”하는 교만이 들어와서 자기 힘으로 교회를 부흥 시키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루 종일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지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주여, 다시 나를 성령으로 재충만 받게 하여주옵소서. 주여, 나에게 성령이, 나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불이 떨어져서 내가 다시금 새 힘을 얻어서 주의 사역 감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제 2의 부흥을 주셔서 2천 명이, 3천 명이, 4천 명이, 5천 명이, 6천 명이, 만2천 명 성도로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고 지난 십여 년 동안 50여 개 국에서 300만 명이 넘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당신 속에서 ‘성령님 갈급합니다’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절규하기까지 기도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진정한 갈급함이 당신 속에 간절함으로 주어질 때, 성령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당신에게 알리기 시작하신다. 그때 이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 아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지난 59년의 역사도 이와 같았습니다. 불광동 천막 교회에서 다섯 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천막을 점점 더 확장하게 되었고, 3년이 지난 후에 5백 명이 되어서 서대문으로 이사를 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지 예배 후에 그냥 사람들로 인해서 온 도로가 마비가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백 명이 천명이 되고, 이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되었을 때 여의도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여의도로 이사 와서 교회가 부흥하는데 만 명이 오만 명이 되고, 십만 명이 되고, 이십만 명이 되고 그래서 교회를 다시 확장해서 크게 짓고, 또 그래도 부족해서 서울시 전역에 20개의 지성전을 세우고 교회가 우리 원로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78만 명 성도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2년 후에 20개 지성전을 독립시켜서 33만 명이 떨어져나가므로 45만으로 성도가 줄게 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게 해주셔서 지난 7년 동안 무려 성도가 10만 명이 늘어서 지금 55만 명이 되었습니다. 독립한 제자교회 33만 명과 우리 교회 55만 명을 합치면 88만 명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역사는 한계가 없습니다. 부흥에 한계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하고 또 부흥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교회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첫째도 성령 충만이요, 둘째도 성령 충만이요, 마지막도 성령 충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 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일군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고 무너진 단을 다시 쌓고, 주님 앞에 죄 사함 받고 정결케 되어 성령의 불 받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길 원하오니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