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받고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조용기목사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6∼19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구원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세상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유독 우월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영국의 옥스퍼드대 교수들이 토론을 할 때, 기독교 저술가인 C.S. 루이스 박사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기독교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은혜란 무엇이냐? 값없이 도움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절대로 값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빈손 들고 받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은혜는 막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도저히 그 정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죄인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과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이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로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사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값으로 죽는데, 예수님은 죄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어요. 죄를 안지었는데 대가로서 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삶을 대신하셨을 때 인간의 사망을 청산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 대신 빚을 끌어안아서 당신의 생명으로 빚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내 죄가 아니고, 인간의 죄를 다 내 죄로 끌어안아서 죄인이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영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고난을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를 주님께서 속량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속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빚을 탕감하여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빚을 지면 빚의 노예가 됩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이미 1천 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빚의 노예가 됩니다. 만약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죽으면 자식이 그 빚을 떠안고 계속해서 갚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 빚은 돈으로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빚은 죽음을 통해서만 갚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 빚은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어야 그 빚이 갚아져요.

 그런데 이처럼 무서운 죄의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의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온 세계 만민들의 죄를 예수님이 다 당신의 죄로 인수인계하고 이 우주의 유일한 죄인이 되셔서 그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물이 되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는 영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됐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갚는 재물이 됐는데, 10년 동안 재물이 되나, 100년 동안 재물이 되나, 아니면 영원한 재물이냐?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니까 재물도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지은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청산했어요.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예수님이 청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장차 죽은 때까지 미래에 지을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조차도 예수님이 이미 다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우리 일생이 그 예수님 안에서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장차 지을 죄조차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을 헬라어로 두 가지 단어를 쓰는데 하나는 ‘필레오’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입니다. 필레오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취득한 사랑은 필레오 사랑과 아가페 사랑 둘 모두 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난 다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따라 부인을 하고 이제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버리고 또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갈릴리로 내려가서 그물을 던졌으나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변가에서 “얘들아, 거기 물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오른 편에 던져보라.” 배의 오른 편에 던져보니 굉장히 많이 잡혔습니다. 다른 제자가 “예수님 오셨다.” 베드로는 놀라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해변을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오니까 예수님이 이미 아침밥상을 차려놓고 물고기를 구워놓고, “오너라. 배고프지? 빨리 먹자.” 먹으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뼈아픈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 하느냐? 너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데 아가페로 하느냐?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합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배반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주님을 친구로써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쳐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 사랑하느냐?’ 거기에 베드로가 박살이 났습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을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세 번 말해놓고 세 번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서 먹이게 해주시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그때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하니까 ‘아닙니다. 필레오 사랑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두 번째도, ‘네가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요. 필레오 사랑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이제는 바꾸어서 ‘친구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내내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배반한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이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내리 두 번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지 물을 때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세 번째 또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언제는 희생적으로 사랑한다 해놓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는 친구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또 배반할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주님이 무언가 낌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줄 알고 ‘주님, 주님은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않아요? 나를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알았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와서 죄를 용서하시고 제자를 더 확실하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인정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용기와 힘이 다시 생겨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17절)

 우리는 이웃을 심판합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오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은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죄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날까지 네가 지은 죄악을 내가 다 갚아주었다. 용서해준다.” “지금 짓고 있는 죄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짓고 있는 죄도 네가 나를 믿고 나옴으로 내가 용서했다.” “그러면 내가 죽기 전에 짓는 죄 말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큰 죄를 지으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다 청산되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영원히 죄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과거의 죄도, 지금의 죄도, 미래의 죄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위대한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어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과거의 예수님도 되고, 지금의 예수님도 되고, 딱 죽기 전에 숨 떨어지기 전에 예수님도 되고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과거, 현재, 미래 다 책임을 져주시기 때문에 위대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 신앙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렵게 기도해서 얻은 외아들인데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려라.’ 참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여도 잿더미 속에서 살려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까지 그 아들과 같이 갔습니다. 이삭에게 짐을 지우고 칼과 불을 가지고 모리아산 밑에까지 왔는데 그가 ‘아버지,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제물을 예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난 다음에 ‘이삭아, 네가 제물이다. 네가 죽어줘야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칼로 내려 칠려는 순간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내놓을 것 보니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데 아들을 내놓을 정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그런 명령을 받았으면 아들을 갖다 놓을 용기도 없을 거니와 아들에게 도로 얻어맞아서 형편없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선물로 내놓은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남의 사랑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으면 모를거니와 그럴 가치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책임지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아예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다 버린 놈이라고 해도 하나님 보기에는 버린 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였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처럼 큰 죄를 지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부로 돌아와 다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주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멋진 풍경이라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해보지 아니하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하나님에 대해 날마다 들었지만 체험적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노년에 가서야 하나님을 체험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 역시 믿음이 좋은 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악한 일을 끊고 남은 생애를 주님에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경험할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해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그 은혜를 느끼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진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체험해서 산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은혜와 사랑으로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리듯이 은혜는 값없이 주는 축복이요, 사랑도 값없이 인정해주는 사랑인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우리 과거의 삶을 청산해주시고 현재의 삶을 은혜와 사랑은 책임져 주시고 죽기 전에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 때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은혜가 책임을 져주시고 사랑이 보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로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믿고 체험하면 그만큼 위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3. 우리의 믿음

 은혜도 사랑도 믿음으로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세계는 오직 믿음만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을 수 있는 가능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다 주었습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 선택만 우리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2절)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은 다메섹의 체험 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큰 변화를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실 때, 여러분 그것을 선택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작정인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믿음은 그 선물을 받는 손과 같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줄 때, 손을 내밀어 받아야만 내 것이 되듯이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믿음의 손을 내밀어 받아들여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4. 신앙의 후퇴와 방지

 신앙의 후퇴와 방지를 우리가 잘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고 역시 사랑도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변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사랑도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자기의 신앙은 영원한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신앙이 없어질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퇴보하고 뒤로 물러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음으로 이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절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장 38절)

 여러분은 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믿을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은혜와 사랑에 잡혀 있는 죄인의 보혜사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믿는 자와 은혜와 사랑을 강하게 도우며, 변화와 성장을 가져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성령은 그 안에 들어와서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절)

 죄책감에는 사탄이 주는 죄책감도 있습니다. 사탄이 잘못된 죄책감으로 우리를 흔들 때,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자라는 말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변호사라는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변호사 역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 죄책감에 눌려 있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닷가에 가면 조개들이 바위에 딱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개는 약하고 아무 힘이 없지만 바위에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아무도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도  끄떡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구원의 바위이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풍파가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5절)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오직 예수님이 붙들어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결론
 우리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유한한 죄를 다 갚아도 예수님의 생명의 엄청난 무한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인간의 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큰 죄인이냐?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다. 어떠한 죄도 다 청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데 여러분은 끝까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해서 잡아 있으면 내가 죽을 때 숨이 넘어갈 때 살인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살인죄를 책임졌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살인죄를 책임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영원한 선언을 받아들여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상관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하고 일시적인 죄와 잘못이 영원한 은혜와 영원한 사랑에 붙잡혀 있는 이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넘어지고 흔들이는 우리들을 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철저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붙어있는 성도들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립니다. 아멘.


행복은 나눌 때 온다/조용기목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장 38절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탐욕의 시대>라는 책에서,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는 이유를 가난으로 인한 영양 결핍과 질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이 지구상에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이 지상에 음식은 넘쳐나는데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에 나누지 않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골목골목 다니며 폐휴지를 모아서 기부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구두를 닦아주고 받은 돈 중 동전을 따로 모았다가 기부하는 구두미화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매달 얼마씩 내어 꾸준히 모아 그 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설치해 많은 사람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이처럼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따뜻해지고 살 맛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우습고 재미가 있어서 제가 인용을 하려고 합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100대는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이렇게 없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담대하게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게 된다


 생각한대로 인생은 이루어집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패배의식에 잡히며, 모든 것이 없는 방향으로 이끌려 갑니다.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을 택하여 가나안땅을 정탐하라고 보냈을 때, 열 명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안경을 끼고 출발했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40주 40야를 정탐한 곳에서 할 수 없는 것들만 바라본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부정적인 관찰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조금만 잘못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5절로 6절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용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주님께서 책임지고 같이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열 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라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정탐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안경을 끼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보았던 것입니다. 정탐한 땅마다 “이거 이미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라며, 이미 받은 마음을 가지고 바라봤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13장 30절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했으나 백성들이 돌을 들어서 갈렙을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 명의 정탐꾼처럼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느끼고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니 감사합니다”라고 느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으리라’는 이 말씀을 의지하고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뜨겁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이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좋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는 좋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을 따라 가니까 모든 일이 좋게 되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는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말미암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즐거이 부르짖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몸을 찢기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살려고 해야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꿈을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안고 미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2. 꿈을 가지고 미래를 품에 안아라


 우리가 꿈을 품고 믿음을 안고 미래를 바라보면, 찬란한 미래가 영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꿈으로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끌어안고, 입으로 시인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7절로 9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봤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보는 것 마다 “아,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 우리 밥이 이렇게 준비되어 있구나. 이것도 우리 땅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고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하게 되고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민족은 망하고, 마음에 꿈을 가지고 믿음을 품고 나가는 민족은 흥합니다. 성경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꿈이 없는 개인도 망합니다. 우리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속에 꿈을 품고 믿음으로 끌어안고 입술로 고백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성령께서 들어와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이미 본 것처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유대 광야에 나가셨을 때,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합치면 수만 명이 따라 나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빌립에게 “어디에서 떡을 구하여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니 빌립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떡을 살 곳은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돈도 없었습니다. 먹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것인데, 이것밖에 드릴게 없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주님께 내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립에게 실망했습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면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집행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 꿈이 아닙니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바라보는 것이 꿈입니다. 직장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직장에 들어간 것처럼 꿈꾸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지 않은 집을 이미 사서 들어가 있는 것처럼 꿈꾸어 보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꿈이 있느냐? 믿음이 있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에게 시험하신 이유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으면 못 먹일 환경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먹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먹일 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계획과 꿈을 꾸고, 계산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고, 분명히 마음속에 품은 꿈을 믿고, 주님이 일해주실 것을 알고, 주님께 계산을 맡기면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오니 주님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 먹이고 열 두 바구니가 남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것을 맡긴다면, 주님이 계산해 주십니다. 주님의 계산은 우리와 다릅니다. 주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3차원의 감각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4차원적 성령의 세계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도 꿈과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해결되는 좋은 것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를 흘려 죄를 대신 해주셨고, 우리의 허물을 대신 사해 주었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저주를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폐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긍정적인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종교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승리와 성공을 가져오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우리가 잘 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는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릇을 비워서 나누어주고, 빈 그릇을 주님께 가져오면, 주님은 계속해서 그 그릇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힘이 듭니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해야 되고,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해야 되니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더 맡겨주십니다. 하나님은 탐욕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나누어 주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외롭게 살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놓지 않았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려와서 우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구약 4000년 동안은 아버지의 시대였기에 아버지 뒤에서 예수님과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사역하신 33년 동안 아들의 시대였기에 아버지와 성령이 아들 뒤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성령의 시대로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뒤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보혜사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합니다”라고 말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기쁘고 즐겁게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지 않습니다. 공포를 주지 않습니다. 불신앙을 주지 않습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하는 것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심이 붙잡히게 하고 불신앙하게 만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힘입어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 이 원수 귀신아, 이 불만의 귀신아 떠나가라! 불안의 귀신아 물러가라! 공포의 마귀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불신앙의 귀신아 나가라! 내게서 물러가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생활에서 불안과 공포와 불신앙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평안, 확신,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면 성령이 같이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평안이 확 들어차고 확신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마음속에 불안하고 공포하고 불신앙이 계속 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기에 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뜻을 아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때 성령이 허가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나누는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서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보혜사 성령은 당신이 거할 처소를 우리 속에 만들어서 우리와 함께 평안을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믿고, 긍정적인 선언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늘나라를 왕성하게 하시고, 나누어 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계산은 주님이 하신 줄 믿고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크신 기적과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5000명이나 되는 군중이 빌립이나 안드레에게는 많은 숫자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우리를 위해서 큰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오늘날도 안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고 평안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신 복을 마음껏 나누게 하옵소서. 빈 그릇에 채워주시는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이영훈목사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1∼5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에 저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락방에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다락방 강화라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이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주옥과 같은 은혜로운 말씀이 가득 담겨있는데 가장 중심 되는 15장 처음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여,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1.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첫째로,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포도나무의 가치는 그 열매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그 어디에 쓸데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상도동에 살았는데 집 마당에 큰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늘 할아버님이 포도나무를 잘 가꾸셔가지고 매년 여름이 되면 많은 포도가 열렸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 마당 한 복판에 그 큰 포도나무가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가 되어주셔서 예수님께서 온 인류 구원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달린 예수를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다른 어떤 조건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또 많은 물질을 드려서, 내가 많이 공부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 우리가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선한 일도 하고, 주신 물질로 어렵고 힘든 사람 도와주기도 하고,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됩니다. 첫째도 감사, 둘째도 감사, 마지막도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겨울철에 보면 그처럼 볼품없는 나무가 없습니다. 말라비틀어졌고, 그 어디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고난을 겪으셔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고 나중에 고난 받을 때 너무나 모습이 비참하여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그 모습을 예언의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사야서 52장 14절, 53장 2절과 3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
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 달리실 때는 온몸을 벌거벗기시고, 벗김을 당하시고, 로마 병정의 채찍에 의해서 온 등이 찢겨지고 피로 범벅이 되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셔서 피가 흘러내리고, 두 손과 두 발이 대못에 박혀서 피를 흘리시는 가운데, 십자가 달리셔서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비참했는지 사람들이 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당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데 이 말라비틀어졌던 포도나무가 잎이 돋고, 여름철이 되면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온 인류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구원의 신비인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많은 노력을 하고 참선을 하고 고행을 하고 그래서 인간의 그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 어느 종교도 참된 구원의 은혜를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행전 16:31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예수를 믿으면 나 자신이 구원받고 변화될 뿐 아니라, 하나님 은혜 가운데 나로 인하여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족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으므로 오늘이 지나기 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일가친척을 다 주님께로 인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완전한 충만함과 풍성함은 실로 너희의 것이다. 지금 너희는 내 안에 있으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전적으로 너희의 것임을 믿으라. 너희를 열매 맺는 가지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요, 나의 영광이노라. 너희는 연약하나 나는 강하다. 너희는 가난하나 나는 부유하다. 나의 사랑과 은혜와 약속을 믿어라. 다시 한 번 말하노니 나는 온전히 너희의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러므로 오직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가 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어주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가지가 된 우리

 둘째로, 가지가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께 딱 붙여져서 예수님의 가지로 존재하게 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이 나무로부터 모든 영양소를 공급받게 됩니다. 떨어지는 순간 그 가지는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6절에 말씀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님께 붙어있지 않고 떨어지면 그때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절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되는데, 그것이 단절된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절망 그 자체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지고, 은혜도 사라지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철저히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붙어있어야 됩니다.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 우리 주님과 나와 하나된 것을 늘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여, 내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 되어주셔서 내 삶을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여러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셔드릴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절대로 주님과 멀어지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외면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연다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주시고,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는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딱 붙어있어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제 철저하게 주님과 나와 하나가 되어서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예수님께 딱 붙는 순간 나의 과거는, 절망적인 나의 과거는 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주님과 하나가 된 모습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믿는 순간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것입니다. 상처투성이요, 과거에 절망, 실패, 아픈 흔적들을 갖고 있던 이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평생 그 마음 가운데 고통을 주는 상처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죄송하게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부모로부터 온 것이 많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 사랑을 받지 못했다든지, 부모님이 어릴 때 버렸다든지, 늘 가정에 문제가 있었다든지, 아버지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어머니를 때렸다든지. 하여간 이런 과거의 상처, 기억들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어서 늘 나를 절망케 하고, 또 절망케 하고, 또 절망케 하는데, 예수 믿는 그 순간 이 옛사람의 시절이 못 박고 죽은 것입니다. 지나간 것입니다. 사라진 것입니다. 마귀는 자꾸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나사렛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과거의 절망은 떠나가라! 상처는 물러가라!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이제 내가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는 주님 안에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붙어있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가 우리 한평생 우리에게 흘러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붙어있어야 됩니다. 감사함으로 붙어있어야 됩니다. 기도로 붙어있어야 됩니다. 말씀으로 붙어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3. 열매 맺는 삶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가 열매를 안 맺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그 열매를 맺는 것이 포도나무의 가치를 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2절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나무에 붙어있는데 이 가지가 벌레가 먹었다든지 또 상해있으면 농부가 와서 다 가지치기를 해줍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고 나서도 자꾸 내가 과거에 매여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면, 주님의 은혜가 임해서 그것을 주님이 제거해주시는 것입니다. 내 죄의 흔적들이 있으면 죄의 흔적을 잘라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우리가 건강한 가지가 되어야지 병든 가지, 다시 말하면 죄로 찌들어서 어디 하나 멀쩡한 것이 없는 그런 가지가 되면 안 됩니다. 더 열매 맺게 하여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늘 말씀으로 새롭게 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철저하게 예수님 제일주의로 우리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때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예레미야 17장 8절, 물가에 심겨진 나무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늘 주님이 함께하시니까 어려움이 다가오고 문제가 다가와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가뭄 때문에 우리가 많은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가뭄이 해소되었는데, 때때로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 가뭄이 다가오는 것처럼 어려움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환란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딱 붙어있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셔서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내면적으로 맺어야 될 열매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로 30절에 성경은 설명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열매 맺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날마다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도 고집불통이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오만불손하면 그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속사람이 날마다 달라져야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격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급한 성격이 느려지지 않고 느린 성격이 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품은 변합니다. 하루에 열 번 화를 내던 사람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예수 믿고 나서 아홉 번 내고, 여덟 번 내고, 일곱 번 내고, 여섯 번 내고, 다섯 번 내고, 나중에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화내는 것이 사라져 버리고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섬김의 본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느냐? 달라지지 않고 옛사람의 모습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사람 예수 믿는다면서 똑같네,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저렇게 거칠고, 저렇게 자기의 감정 다스리지 못하면서 뭐 예수 믿는다고 그러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속사람이 변화되어서 예수님 닮은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하여주옵소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많은 열매를 맺으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다시 말하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 때 협력하고 좋은 일 많이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고 “야,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 우리가 존경할 만 하다. 칭찬할 만 하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고, 교회가 소란하고 이러면, “아니, 저 사람들 예수 믿는다면서, 기독교는 사랑이라고 하면서,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뭘 예수 믿는다고 그러나?” 비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됩니다.  주여, 우리가 사랑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화목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내적으로 맺어야 되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맺어야 되는 열매는,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우리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함께 먼 훗날 천국에 같이 가십시다!”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늘 성령으로 충만하고 주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충만함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은혜를 더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말씀을 지켜 행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절대로 말씀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매일같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주여, 내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제 삶을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은 내 삶의 거울입니다. 말씀을 보고 나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말씀을 보고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말씀을 통하여 내가 늘 새로워지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인데, ‘중국 사람들에게 중국인처럼, 중국인을 위해 선교하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평생 중국 사람과 함께 살면서, 51년 동안 복음을 전하다가 천국 간 아주 귀한 선교사님 이십니다. 원래 영국에서, 선교 본부에서 파송을 할 때, 대도시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 지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시골로 들어가서 진짜로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래서 선교회에서 제명을 당하고 후원이 끊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시골에 들어가니까 제대로 병원도 없고 약도 없어서 복음을 전하다가 병에 걸려서, 5년 동안 큰 고통을 당하기도 했고. 가장 우리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에게 큰 아픔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큰 딸이 1867년도에 폐렴으로 죽고, 3년 후에는 2월 달에 아들 사무엘이 결핵성 장염으로 죽고, 그해 9월에는 태어난 지 20일 되는 아들 노엘이 죽고, 그 후로 13일 후에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부인의 나이가 서른두 살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중국에 들어갔다가 큰딸, 아들 둘을 그리고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저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르지만 아무 가치 없는 제게 이 위대한 사역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여기저기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로 “하나님, 이 선교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옵소서.” 기도로 무릎 꿇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허락하여주셔서,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헌신으로, 그의 노력으로 많은 열매가 맺혀져서 중국 내지 선교회를 통하여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다 파송하게 되었는데, 1914년에는 이 중국 내지 선교회가 세계 최대 선교 단체가 되었고요, 1926년 통계에는 1134명의 선교사와 6171명의 중국인 사역자. 그래서 3944 전도지구마다 교회가 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1000개의 목숨이 있다면 중국 선교를 위해 바치겠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시켜 역사하신 열매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붙은 가지가 되어서 오직 주님께 맡기고 믿고 의지하며 나아갔더니,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셔가지고 중국 그 전역에 교회가 서고, 사역자들이 파송되고, 복음이 증거 되어져서,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에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교회 문을 닫았을 때, 그때 통계가 백만에서 이백오십만 정도 크리스천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70년이 되기 전에 지금 중국에 일억 명이 넘는 크리스천이 생겨났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삼천오백만이라고 얘기하는 숫자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 숫자만을 헤아린 것이고, 지하 교회, 가정 교회 숫자를 포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억에서 일억삼천만 정도 크리스천이 중국에 있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중화권, 이 중국말을 하는 아시아 전역에 있는 그 중화권 교회들이 크게 부흥해서 온 아시아가 복음으로 뒤덮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헌신되어져서 인정받는 가지가 되었을 때, 포도나무인 예수님께서 풍성한 열매 맺게 해주신 결과인줄로 믿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그분을 더욱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예하는 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들려 열매 맺는 가지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가 열매 맺는 가지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짧은 인생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게 하시고 열매 맺는 가지가 되게 하여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생에 넘쳐나게 하여주옵소서. 이와 같은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열매 맺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아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는데 열매 없는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게 하여주시고,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이 되도록 우리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너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조용기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8장 9절)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저들의 삶을 에덴동산에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은 상함도 해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꾐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그 연고로 아담과 하와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은 죽고 땅은 저들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픈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저들이 에덴동산에서 부유와 풍부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

 하나님이 당신의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람을 택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3절에 보면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을 부르셔서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복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는 갔지만 그의 순종은 철저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본토, 진척, 아비의 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에서 기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아내 사래에게 자신을 ‘오빠’로 부르라고 한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가자 사래는 아브람을 오빠로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바로에게 들리니까 곧바로 바로가 사래를 자신의 후궁으로 데려갑니다. 그 대신 아브람에게는 사래를 데려가는 대가로 짐승들은 많이 주고, 금은을 많이 주었습니다. 부인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어요.

 사래를 후궁으로 들인 일로 인해 바로와 애굽에 큰 재앙이 임합니다. 연유를 조사하니 아브람과 사래가 부부간이었던 것입니다. 대노한 바로는 아브람 가정을 애굽에서 추방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도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돌보시며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시고 큰 짐승의 떼와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아브람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람의 하인들과 롯의 하인들 간에 다툼이 생깁니다. 서로 좋은 풀밭은 점령하려고 싸우기 때문에 아브람과 롯이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카를 떠나 보냅니다. 갈대아우르에서부터 함께 했던 조카를 떠나보내고 의기소침 해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너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의 자녀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며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도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라고 합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마음에 이끄는 데로 갈 곳을 결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민족인 유대인은 믿고 순종할 때 가난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세계를 뒤흔드는 민족은 유대민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1절로 14절에 보면 “야훼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부요케 했습니다. 다 잘살게 만들어 주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 믿으면 축복받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그러는데 뭣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축복을 받습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모두다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무엘상 2장 7절에 보면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2.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모든 시련도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9절로 10절에 보면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 생애를 볼지라도, 예수님이 얻어먹고 다니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들이 굶주렸을 때 주님은 먹여서 보내신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명, 부녀자와 노인과 아이들을 합치면 수만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또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로기 두 마리로 남자만 4천명, 부녀자와 노인과 아이 등 수만명을 또 먹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가지고 살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던 주님께서 오늘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이 땅에서 살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축복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오히려 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신명기 8장 15절로 16절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잇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최종적으로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이 없고 척박한 광야와 같을 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제하시고 축복이 임하도록 우리 주위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못 박혀 달린 것은 우리 저주를 청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아서 하는 일 마다 안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나무에 달려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려 저주를 청산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 복 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여러분 스스로 복 받은 자인 것을 입으로 늘 시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선민들만 하나님이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다 구원하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을 잘 알아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근본바탕을 잘 모르면 신앙이 발전하지 못 합니다. 근본바탕이 뭐냐? 십자가의 구원인 것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근본바탕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사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가장 근본을 붙잡고 있으면 우리가 언제나 거기에서부터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시키심을 통해서 근원적으로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은 그믐날보다, 내년엔 금년보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서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야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고 해외에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우리 손에 쥔 것이 있어야지 아무것도 없이 빈 손 쥐고는 이웃을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을 같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환상과 꿈을 가슴에 품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살면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늘 부요하신 아버지이시며, 자녀인 우리들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그리고 사차원 영성을 신앙을 굳건히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십자가의 능력/이영훈목사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장 23-24절


 전 세계 어느 교회를 가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 되고,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신앙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만난 이후에 한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 삶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구원의 능력

 예수님의 십자가는 첫째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노력으로, 또 많은 수행을 해서, 업적을 남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하고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 전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라고 하는 큰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수치를 가려주시느라고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린 그 피의 제사가 시초가 되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기만 하면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짐승을 가지고 나와 피를 흘려 죽게 하고 일시적인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죄를 짓기만 하면 그 주인의 죄 때문에 주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 집의 짐승들이 피를 흘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요즘 많은 가정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우는데 주인을 대신하여 강아지, 고양이가 대신 죽는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강아지, 고양이, 아마 씨가 말라버릴 것입니다. 또 실제로 주인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할 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무너지겠습니까? “아! 내 죄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동물들이 죽는구나.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고개를 저으면서 되돌아섰다가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 모든 구약의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죄 사함을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침례 요한이 말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원해서 구약에는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게 하셨고, 그다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여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 앞에 피를 흘려 드린 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 사함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피 흘리며 돌아가실 때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다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을 때 죄 사함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이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후에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주 앞에 귀한 예물을 드리며 섬기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데는 우리의 믿음만 필요한 것입니다.
 “날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믿습니다!” 그 구원의 사건이 우리의 일생을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인도의 부유한 시크족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엇 하나 부러움이 없이 자랐던 선다 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집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온 그는 16살 때부터 맨발로 온 인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를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됐는데, 불교 국가인 티벳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 후로 그가 어찌 되었는지, 히말라야를 넘은 후에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어느 날 티벳에서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저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해마다 티벳으로 들어갑니다. 제 생명이 그곳에서 끝났다는 소식을 어느 해에 들으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선다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선다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 다 포기하고 한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다가, 그는 어느 날 어디서인지 모르게 복음 전하다가 마지막 그의 삶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해서 우리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엔 두 가지 길만이 열립니다. 한 길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는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연장시켜 주실 때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

 둘째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약의 율법에서 저주를 받은 자가 나무에 달린다고 했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그 마음에 불편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헬라인들에게는 사형 틀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수치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게 이뤄지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날마다 주님 은혜 가운데 십자가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또 감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원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매일같이 가정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밤낮 들었습니다. 그저 듣고 아는 지식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복음교회에 와서 1966년 2월 달에 성령 체험하고 나니까 그 순간 십자가가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고 주님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그 전엔 십자가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성령을 받고나니까 진짜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내 마음에 걸어 들어오셨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구나. 얼마나 울었는지. 그 당시 서대문 시절의 우리 순복음교회는 통성기도 하면 그 통성기도가 통곡으로 이어지고, 주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이어져서 종을 쳐도 기도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성령 받고 나니까 평생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쌓였다 나오는지, 기도만 하면 통곡과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감사해서, 너무 기뻐서, 너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고마워서. 그저 그저 눈물만 흘렀습니다.

 요즘 우리가 생활이 풍족해지고 큰 어려움이 없으니까 옛날 같은 그 간절함이 사라졌습니다. 부르짖는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한번 눈물을 흘리려면 온몸을 비틀고 침을 발라도 잘 눈물이 나지 않아요. 옛날에 그냥 기도만 하면 통곡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그때가 있었는데. 아마 서대문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은 ‘나도 옛날에 한때 저랬지’ 생각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눈물의 기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 부르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골로새서 2장 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설교자인 싱클레어 퍼거슨의 말씀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전부 담당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 처음에는 비극 같았던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열쇠요, 그분의 부활을 위한 전주곡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되었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를 믿고 그분과 교제하며 살 수 있으며, 예수님이 그분의 영을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 안에서 성장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마음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경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대부분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태복음 1장에서 걸립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복음 1장 1절)는 괜찮은데, 그 다음 2절부터 걸립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무슨 성경이 이렇게 어렵냐? 1장을 못 넘어가고 ‘낳고, 낳고...’에서 그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주셔서 말씀 읽을 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또 은혜가 되고, 또 은혜가 되고, 또 은혜가 되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고, 한없는 영광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자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령으로 충만 받아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의 자랑

 셋째로, 우리의 자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한평생 우리의 자랑은 첫째도 예수님, 둘째도 예수님, 마지막도 예수님의 되어야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혈통을 자랑할 수 있었고, 또 그의 학벌을 자랑할 수 있었고,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난 다음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 8절에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았는지. 주님,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가진 것들을 너무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은 그의 공부한 그 학문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 가진 돈을 자랑하고,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권력을 자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 자랑하는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 그런 것들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자랑을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았는지 우리 자신을 보면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르신은 저를 만날 때마다 옛 이야기를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하는데 들었던 얘기를 또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세요. 그런데 그게 제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건 자랑거리가 아닌데 본인은 자랑으로 생각하세요. 조선 총독부 시절에 그 국장급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때 자기 밑에 사람들이 다 줄서서 인사했다고... 그 이야기를 한 두 시간씩 하세요.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게 지금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내용인데, 본인은 “내가 이런 권력의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때 내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독립되고, 해방되고 난 다음에 뭐 어디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자기 얘기를 자꾸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님을 자랑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옛날 자랑만 하다가 그냥 세상을 떠나셨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예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여, 나의 고집과 교만과 나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여주옵소서! 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상처, 미움, 원망, 불평들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 위해 살다가, 주님께서 “오라!” 부르실 때 기쁨으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김정화 권사님. 『내가 급하다』라고 하는 책을 내셨어요. 본인은 교사, 남편은 의사로서 평안할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주님, 십자가 은혜에 너무너무 감사해서 한평생 복음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하고 지금도 시간과 물질을 주님 앞에 드려 헌신하고 계신 주님의 귀한 일꾼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 했지만 그냥 본인 말 그대로 맹숭맹숭한 신앙이었습니다.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성경도 알고 찬송도 알고 다 아는데 은혜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학교 교사로 나가서 가르치는데 한 선생님이 열심히 학생들에게 전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 그러니까 본인에게 그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김 선생님, 혹시 성령 세례 받았습니까? 아, 이 말 듣고 본인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성령 세례를 못 받아서 그렇구나.’ 매일같이 성경 보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또 사모하고, 사모했습니다. 8일째 되던 날 교사 기도회 때,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에 3년 동안 무릎이 아팠는데 무릎 통증까지 나았어요.

 2002년 의사 남편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 병원을 개원하게 되어서 의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가서 ‘내가 이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겠다.’며 겨자씨 선교회를 만들어서 전도지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2011년 건강이 악화돼서 대상포진으로 3년 동안 고생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픈 가운데 본인이 자신의 그 인간적인 열심만을 갖고 주님을 섬겼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와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실체, 즉 철저히 내가 주인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열심 있는 한 율법주의자를 보았다! 유일한 처방은 그 죄인이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복음 중의 복음이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자,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복음을 만나고 나니 가정이 회복되는 것이 당연했다!”

 겨자씨 선교회를 통해서 100명이 넘는 전도인을 훈련시키고, 매달 학생들에게 250만원씩 장학금을 내놓고, 또 불우이웃을 돕는데 병원 수익의 절반을 불우 이웃을 돕는데 헌신하고. 온 지역사회에 존경받고 사랑받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 책 끝에 이와 같이 말씀이 소개되어있습니다.
 “내 나이 또래 할머니들의 특징은 휴대폰에 꼭 손주 사진을 넣고 다닌다는 것이다. 손주가 너무 예뻐서 자랑하고 싶어서 야단이다. 전도는 왜 손주 자랑하듯 하지 못하는 걸까? 손주처럼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해서다.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교리로만 알지 말고, 진짜 알아야 한다. 체험해야 한다. 같이 살아야 한다. 아니 그분만이 사셔야 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어서 입만 뻥긋해도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오늘부터 핸드폰 갖고 “우리 애 예쁘죠, 예쁘죠?”만 하지 말고 여러분 마음속의 예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 여러분에게 은혜 주신 예수님, 여러분의 병을 고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가정 위에 평안함과 축복을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평생 자랑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내 개인을 자랑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거 자랑하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주인 되시고 나의 일생을 인도해 주실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생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 뜻을 이 땅에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생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조용기목사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5∼30절)

사람들은 모두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삽니다. 돈이 많으면 돈 때문에 수고하고 허덕이고 권력이 있으면 권력 때문에 수고합니다. 우리는 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벽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진하여 우리의 의지할 수 있는 벽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국 위스콘신 의과대학의 리처드 스웬슨 박사의 <여유>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여유가 없는 삶은 마치 여백도 없고 띄어쓰기도 안 된 채 글자만 빼곡히 채워진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다’

여백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이 글자만 가득한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여유가 없는 삶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바쁘고 피곤하고 지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되어 이전에는 며칠씩 걸리던 일을 몇 초 만에 해치우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바쁩니다. “바쁘다”는 말이 입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쁘게 살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피로를 호소합니다. 예전에는 휴가철이면 예전에는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났는데 요즘은 ‘무위 휴가’가 인기입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가가 좋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휴가를 떠나면 그 휴가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피로보다 더 무서운 게 근심이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고 그 마음이 피곤해 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최고급 호텔에서 쉰다고 하더라도 참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고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참 휴식은 마음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1.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질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늘과 땅과 우주가 제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것이지요. 삶이 제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오늘밤 안심하고 평안히 자도 괜찮지요?”

우주가 내 것이고 삶이 내 것이라면 내가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모두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는 안심하고 편안하게 쉬면 됩니다.

‘우주가 누구 것인가?’를 우리가 은밀하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역대상 29장 11절에 “야훼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야훼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 땅, 밤, 낮, 나의 생명이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 그렇다면 여러분도 편히 주무십시오. 만일 이것들이 다 내 것이면 평안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것이 여러분이 대신하여 편안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 121편 4절로 6절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야훼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들을 일컬을 때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표현합니다. 보배는 예수님, 질그릇은 여러분과 접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이 보잘 것없는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왔는데, 그 외국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화장실 사용이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편하게 용변을 보라고 집집마다 요강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집에 심방을 갔더니 그 선교사들이 전부 요강을 들고 나옵니다. 왜 요강을 들고 나오는가 보니까 요강 안에 과자들을 잔뜩 넣어가지고서 찾아오는 한국 사람들에게 대접한다고 내놓으니 요강통이 아니라 과자통입니다. 졸지에 더러운 오물을 담는 요강이 맛있는 사탕 그릇이 된 것입니다. 가장 천한 그릇이 가장 귀한 그릇이 된 것입니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도자기라도 그 안에 쓰레기가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입니다. “아 그렇게 귀한 통을 왜 쓰레기통이라고 하느냐?” 내용이 쓰레기 있으니까 쓰레기통이라고 그러지요. 아무리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라도 그 안에 보물이 담겨 있으면 보물단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도 판정을 받을 때, 보배단지가 될 수 있습니다.

2.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로운 예수님을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한없이 값이 나가는 보화에 비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보화를 우리에게 담고 있으면 우리는 보배를 담은 함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 속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속에 모시고 있으니까 보배함이 되어서 사람들이 짓밟을 수 없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서 부서질 것 같은데 그 보배함 속에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배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보배함은 질그릇이라도 질그릇 안에 보배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 잘못 건드리면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그 안에 담아놓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어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복하시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겨쌈을 당하는 자는 보배인즉, 누구든지 우리를 공격하면 보배이신 예수님의 반격에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2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만 따로 계산하지 말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를 계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 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님을 담고 있는 그릇인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9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원수들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몸담고 계시는 보배함이 우리 몸이기에 예수님이 완벽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원수마귀가 여러분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을 해나가면 마귀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쳐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는 우리를 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신 이 진흙그릇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고 난 다음에는 간혹 마귀가 흉악한 모습을 가지고 잠을 자는 저를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마음에 염려 근심을 퍼부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마귀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엄청난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늘 기억해야 될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나는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예수이름으로 대적하여 싸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고 찬송을 부르고 그렇게 하면 원수 마귀가 떠나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우리는 항상 우리 속에 예수님을 힘차게 모시고 예수님 십자가 밑에 항복해 놓은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야, 나는 예수님의 보혈을 밑에 있다. 보혈이 나를 덮고 있으니 나를 훼방하지 못한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성령을 모실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는데 우리는 건강을 얻을 수가 있다. 예수님이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으니까. 우리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축복해줄 수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청산해 주셨으니까 우리는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축복받은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셨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죽었다가 부활한 존재가 되었음으로 네가 나를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내려갈 수가 없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무장을 하고서 마귀에 일일이 변호사가 변호인을 위해서 변호해주는 것처럼 저희들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마귀에게 대놓고 이야기를 해주고 고함을 치면 마귀가 떠나가요.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 한 주부가 우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정신적인 혼란을 많이 겪고 있을 뿐 아니라 몸이 자유롭지 못하고 중풍기가 좀 있어요. 그런데 그 남편이 적십자 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의사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자기 부인을 온갖 정성을 다해서 돌보았으나 건강하지 못합니다. 자꾸 헛소리를 하고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제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그 자매님에게 안수기도를 했는데 그 자매님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떨치면서 ‘네가 무엇인데 남의 부인의 머리에 손을 얹느냐? 내가 네게 쫓겨나갈 줄 아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 왜이러십니까?’ ‘왜 이러긴 뭘 왜이래? 네가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 내가 이 여자 속에 들어 있은지 오랜 세월이 됐는데 쉽게 나갈 줄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누구요?’라고 질문하자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너는 나를 쫓아내려고 그러느냐? 나는 이 여자 몸속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입입니다. 제가 ‘귀신들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을 모아가지고서 그 마귀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나가라” “안 나간다” “나가라” “안 나간다” “나가라” “안 나간다” 그 이야기 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예수님 보혈의 능력으로 명한다. 나가라” “나는 안 나간다. 나갈 곳이 없다” 저녁에 날이 어두워져 가는데 그때야 그 자매님 속에 있던 귀신이 “우리 좋은 말하고 헤어지지, 서로 미워하면서 헤어지지 말자.”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네가 사람을 점령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다.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외치니까 그 자매님 속에 있던 귀신이 큰 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왔어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이 아니라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우리가 사람 괴롭히는 이단들인가 오해를 사겠다고.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집에 안돌아가니 어떻게 하냐고. 빨리 나가라고.” 그래 집으로 보냈는데 얼마 안 있다가 또 고함을 치고 들어와요. “아이고, 하나님 못해먹겠습니다. 실컷 하루 종일 싸워서 이겨놨는데 이제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난 뒤에 도로 돌아오니 어떻게 합니까? 돌아가시지 왜 또 돌아옵니까?” “아이고, 목사님 나 좀 보십시오. 날 좀 보소.” “왜요?” “내가 절름발이였는데 온전한 몸이 되었습니다. 걸어가다가 보니까 내가 몸을 온전히 사용해서 걷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마귀가 정신적으로 여자를 속박하고 육체적인 질병을 가져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그릇이 좋은 그릇인지 나쁜 그릇인지 그 자체는 평가할 수가 없고 그 그릇 속에 계신 예수님을 평가하면 높임을 받는데,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것은 우겨쌈을 당한 보배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있음으로 예수님과 같이 사방으로 우겨싸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장 31절~32절)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과 더불어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9절)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원수 마귀가 여러분을 쉽게 짓밟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그 사실을 알고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게 원수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기 아니합니다. 우리 질그릇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질그릇 안에 보배인 예수님이 와계심으로 예수님께 의지하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44편 7절에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를 나쁘게 고통을 주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장 9절)

우리가 이 세상에 너무나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직접 당해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이 갚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하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갚아주시는 것은 감사한데 제가 경험을 해보니까 하나님 시간이 너무 멀게 계산을 했어요. “하나님 지금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좀 더 기다려라.” 하나님 기다리라니까 나중에는 원수가 누군지 모르게 되고,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베드로전서 2장 9절)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고귀한 사람으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 버리면 예수님 그 진토 속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버림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손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해서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그 박해를 받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기지 못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장 38절~39절)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부둥켜안고 있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시에 뜨겁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망하게 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예수님 정복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고 있으면 죽음도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편 27편 1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고 있으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가 않습니다.

“야훼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야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편 37편 23~24절) 우리가 예수님을 품에 품고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습니다.

 결론

질그릇인 우리에게 보배를 담아 놓고 그 질그릇을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길거리에 내동댕이쳐 놓아도 진흙그릇이 속에 있는 보배를 끌어안고 있으면 아무도 그 질그릇을 훔쳐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 알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질그릇으로 잘나지도 못했고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질그릇을 축복한 것은 예수님을 담아놓은 질그릇이기 때문에 질그릇이 아니고 보배함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질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여러분 그릇에 그리스도가 들어 있음으로 질그릇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보배함인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질그릇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심으로 보배함이 되었다.” 하늘의 천사들도 다 우리를 존경하고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을 이유가 바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으로 여러분은 존귀한 자가 되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일하게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자기를 무시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 가슴 속에 예수님이 와계시고 저의 가슴에도 예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장 8절)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고 주님 원하시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의 우물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면서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과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로 세우시는 교회를 꿈꾸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로운 꿈과 목표를 갖게 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보고 “너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러면 네 눈으로 보는 그 이상 하나님의 눈으로 보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고 새로운 꿈과 목표를 갖게 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 바라보는 그 눈으로 중국을 바라보게 되고, 스터드는 하나님 바라보는 눈으로 아프리카를 바라보게 되고, 윌리엄 캐리는 인도를 바라보는 하나님 눈을 바라보게 되어 인도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우리는 어찌하든지 믿음의 눈을 열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배기 때문에 여러분 보배함이 되고, 하나님이 천국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여러분 함께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승리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함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예수님을 모셨음으로 모든 일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계획하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살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데리고 같이 바라보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혼육의 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늘 우리를 보호하사 은혜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가 나를 사랑한 즉/이영훈목사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시편 91편 14~16절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의 성격, 습관은 변하지 않고 평생 갑니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간다는 한국 속담이 있기도 합니다. 이 변화시키기 힘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자녀의 삶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아내의 사랑이 남편을 바꿉니다.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근원이 바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1서 4장 7절과 8절은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은혜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91편 14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예수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절망과 고통과 괴로움에서 건져주시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문제가 많고 어려움 많고 절망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한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이기게 만들어주시고 우리를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2절, 3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세 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설명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온 우주 만물이 지어지기 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로 예정하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가 우리 발로 걸어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곳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죄와 상관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아침에 세수하고 나와서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세수를 해야 되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세상에 나가서 내 얼굴에 먼지가 묻듯이 죄의 때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주의 보혈로 씻어서 우리 죄를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왔사오니 저를 용서하여주옵소서. 내 마음에 미움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주의 보혈로서 우리를 정결케 하여주시고,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고,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마음에 감사를 주시고, 마음에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613계명을 저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또 세분화해서 613계명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에 365계명은 하지 말라는 것이고 248계명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많은 계명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이 마태복음 22장 37절,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시편 18편 1절에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나의 능력이 되시고 나의 생명이 되시고 나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때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등지고, 분열하여 산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분열과 다툼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화목과 하나 됨은 승리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20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형제는 우리, 예수 믿는 형제자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같이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등을 돌리고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중인격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지 못하느냐?’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내 마음 가운데 누군가에게 마음에 불편함이 있고 섭섭함이 있고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으면 다 내려놓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인정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것이 입술에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 속에서도 그렇게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91편 14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름을 갖고 있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김 아무개야!” 하면  그 사람이 김 아무개라는 사람으로서 존재가 인정되는 것이고, 박 아무개라고 하면 박 아무개라는 사람으로서 그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함께해주십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하든지 잘 보이려고 하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 줄을 서서 뭔가 유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노력은 참 소홀히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시편 37편 5절입니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재미있는 예화가 기억이 납니다. 어느 여름철에 아버지와 아들이 그 시골 논밭을 지나고 있었는데 보니 참외가 아주 잘 익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한테 “잠깐 여기서 망보고 있어라”하고 그 참외를 따러 들어가는데, 따려고 하는 직전 아들이 소리를 칩니다. “아버지, 아버지!” 그래서 급히 뛰어 나와 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야, 왜 그러냐! 누가 왔냐? 가만히 있어.” 다시 또 따러 들어가는데 또 “아버지, 아버지!” 부릅니다. 그래서 달려 나와서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교회 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대요.” 그래가지고 그 아버지가 아들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고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옛날에 시골에서 참외 따본 기억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을 테니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앞에서’의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 보고 계신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때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모습으로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사업을 할 때도 정말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상품을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해요. 눈가림만 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수출하면 나라에서 상을 줬는데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적당히 잘못된 것을 끼워서 보낸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 그것이 드러나서 신용도가 떨어졌다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런 일이 참 많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줘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 받아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더해주세요.

 마태복음 6장 33절에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일생 다가도록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고 축복받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 요셉은 예수님을 가장 닮은 그러한 모습으로 한평생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조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사에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얘기함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려갔어도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까.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서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노예로 팔려간 집에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입니다. “그의 주인이 야훼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야훼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에도 얼마나 감옥에서 그의 모습이 모든 면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모습이었던지 간수장, 교도소장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간수장, 요즘말로 하면 교도소장이 열쇠 꾸러미를 맡겼어요. 감옥에 있는 죄수에게 교도소장이 열쇠꾸러미를 맡기고 감옥을 돌보게 한 일은 이 성경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9장 23절입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야훼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이 인정받는 이 모습이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고 13년 동안 그가 연단 받고, 연단 받고, 연단 받은 후에 서른이 되었을 때에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하루아침에 승격당한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여셨을 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교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명성과 권력을 잘 감당했으며, 어렵고 압박받는 상황에서도 인내함으로 견뎠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요셉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지목되었고, 선택받았으며, 준비되었고, 정금으로 정련되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이 어떻게 왕의 인장 반지를 끼고, 왕궁의 의복을 입고, 금목걸이를 걸고 왕궁의 수레를 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 세 개를 봉헌한 유경화 장로님을 소개합니다.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사시다가 6.25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합니다. 그가 신앙 하나 가지고 월남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 이렇게 서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하여주시면 제 집보다 먼저 하나님의 집부터 장만하여 드리겠나이다.”

 서울에 와서 연탄 장사를 하는데 너무나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마련했는데 문득 주님께서 주님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학개서 1장 4절)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때 본인이 서원하였으나 잊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고, 바로 대지 102평을 헌납하여서 교회당을 짓고, 1964년에 그 첫 번째 교회를 헌당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자기 전 재산을 바쳐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그 건축의 가장 큰 공로자가 됐고, 또 그 교회의 1대 장로가 됐지만, ‘내가 이곳에 있으면 내가 교회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내가 대신 받게 되니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길 일이지, 건축한 주역이 거기 남아 있으면 텃세하기 쉽고 목회자나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게 되므로 저는 깨끗이 떠나는 것입니다.”

 동숭교회로 옮기면서, 장로로 시무하시면서 공릉동에 130평 땅을 사서 개척 교회를 또 건축합니다. 1997년에 록원교회를 완성합니다. 헌당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이 교회를 드리고 그다음 그 교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록원교회 2대 목사님인 장창만 목사님 말씀입니다. “장로님은 그렇게 시작한 교회에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으셨습니다. 그 까닭은 만약 그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받게 될까봐 곁을 지나면서도 오시기를 거부한 거죠.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요사이 교회들의 분쟁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 대부분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데서 생깁니다. 유 장로님 같은 분이 참 아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뭔가 교회에 큰 공을 세우고 많은 물질을 드리고 어떤 일에 주역으로 헌신한 후에는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내가 이렇게 오늘에 있기까지 많은 수고를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많은 물질을 드렸는데” 하고 자신을 알아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될까봐 첫 번째 교회도, 두 번째 교회도 본인이 하나님께 지어 드리고 그리고 목사님께 맡겨 드리고 본인은 묵묵히 교회에 헌신하셨습니다.

 1987년 동숭교회 장로님으로 은퇴하신 후에 동화학원 이사장으로 있을 때, 학교 입구에 길가에교회를 건축해서 2005년에 세 번째 교회를 봉헌합니다. 교회 봉헌 후에 하나님께 받은 비전이 교육 사업입니다. 평양 오산학교처럼 많은 민족의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민족 사관학교를 만들고 싶어서 남양주의 도농학원을 인수해서 지금의 동화학원을 지어서 이곳에서 매일 아침 학생들이 예배를 드리고, 교직원들도 예배를 드리는 신앙의 명문 학교를 세웠습니다. 95세까지 청교도적인 삶을 사신 장로님의 신앙 고백입니다.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이 모두 알고 계시잖아요.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어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땅의 많은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사랑과 헌신의 크기로 결정됩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장로님이십니다. 교회 셋을 지어 바치면서도 절대 본인의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마지막 교육 사업에 전념하시다가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우리 교회 모든 장로님이 그와 같은 장로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이 그와 같은 성도님의 모습으로 쓰임받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 간구하라.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간구하지 않고는 어떠한 역사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어떠한 기적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1편 15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기도할 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가고,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할 때 병이 고침 받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 고통 중에 있을 때, 억울한 일 당할 때, 문제를 만났을 때, 사업에 어려움 있을 때,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문제가 생겨났을 때, 이리저리 사람을 찾아 뛰어다니지 말고 먼저 엎드려 눈물 뿌려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많은 고난의 시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시편 10편 1절에 “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고 했으며, 시편 22편 1절과 2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겸손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어떤 기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먼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함을 넘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000년도에 제가 LA에 있는 베데스다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미국 대학교 인가를 다 받았을 때, 조용기 목사님께서 저를 동경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제가 내일 일본 들어갑니다.”하니까 저를 가만 보시더니 “가서 교회 지어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일본 동경에 가보니 그 전임 목사님들이 교회 지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 워낙 물가가 비싸서... 땅 한 평에 보통 1억씩 합니다. 그러니 100평만 사도 100억입니다. 교회를 지을 엄두가 나질 않아요. 교회가 오랫동안 건축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모아놨던 건축 헌금이 40억이 있는데, 40억을 가지고는 무엇을 시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미국에서 제가 고생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다른 것 다 뒤로 물리치고 기도만 하기로 결심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은 두 주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를 석 달에 한 번씩 하고 그다음 1년 365일을 계속 새벽 기도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평일 새벽 기도회에는 한 150명 나오고, 열두 광주리 새벽 기도회에는 500명에서 한 600명, 교인의 3분지 1일이 그 특새에 나와서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자세한 설명을 다 드리면 오늘 아침 시간이 다 지나겠고요, 하나님의 은혜로 2년이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동경 한복판에 있는 8층 건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영상 자료는 우리가 성전을 준비하고 입당 예배를 드릴 때의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은혜 가운데 다 이뤄주셔서 150억 규모의 성전을 구입하여 이렇게 입당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도로 지은 집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 다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건물을 우연히 심방 가는 길에 보게 해주셨어요. 대로변에 큰 건물이 하나 서있는데 문이 닫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차를 잠깐 세워놓고서 들어가 보니 건물에 열쇠가 잠겨있고 건물이 쓰지 않는 건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200억 정도 빚이 있는데 빚을 갚지 못해서 건물이 차압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사에서 건물을 차압해가지고 그냥 가지고 있던 건물이에요. 어디 부동산에 나온 것도 아니고 팔 의향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찾아가서, “사장님, 우리가 그 건물을 살 테니, 현금으로 드릴 테니까 우리에게 건물을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을 감동시켜 줘가지고 200억 건물을 150억으로 준다기에 더 깎았지요. “현금으로 다 줄 테니까 더 깎자”고 그래서 120억에 사고. 할렐루야! 30억은 그 건물이 오래 되가지고, 파이프까지 다 새로 교체해가지고, 완전히 건물을 새 건물로 리모델링을 해가지고 2년이 되지 않아서 저 건물을 구입하고 우리 조용기 목사님 모시고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뛰어 다니면 하나님은 이렇게 구경하시는 것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만들려면 여러분이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인정받으며 기도의 일꾼으로서 위대한 축복과 승리를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릎을 꿇는 기도 용사가 되어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네 마음을 지켜라/조용기목사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장 23절)

 

우리의 삶의 주변에는 각 영역마다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들이 있습니다. 날씨는 일기예보를 통해 예측할 수 있고, 경제 동향은 주가 지수나 물가 지수를 통해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 삶의 미래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연구를 해도 인간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우리 삶의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기준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읽으면 그 사람의 미래가 어떨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마음이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상태를 보면 우리 삶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마음이 우울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소에 우울한 것에 마음을 쏟기 때문에 우울한 앞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면, 기쁘고 긍정적인 사람은 늘 좋은 것을 생각하여 즐겁고 행복한 삶의 결과 삶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성경에 보여주신 은혜의 말씀으로 채울 때, 우리의 내일이 밝고 희망찬 꿈과 소망이 가득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 삶의 불안과 두려움

삶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세상에 사는 이상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남편 마음에도, 아내의 마음에도, 서로 다 틀어 보일 수는 없지만은 불안과 공포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적은 걱정과 불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걱정과 불안은 우리 몸을 병들게 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던 알렉시스 카렐은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안과 걱정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불안과 신앙과의 관계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불안과 걱정에 덜 시달린다고 결론을 말해주었습니다.

잠언 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어져서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마음에 항구적인 평안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평안의 근본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연약한 인간, 강하신 하나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십니다. 연약한 인간을 불란서의 유명한 화가인 고흐가 재미있게 표현을 해주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그림 그리는 화가인 고흐가 젊었을 때 광산에서 노동자들 도와주는 전도사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광산에 물건을 담은 포대를 가지고 집에 가서 셔츠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셔츠를 만든 그것을 입고서 나왔는데, 그 물건 담고 올 때 쓰는 글을 그대로 써 넣은 그대로 만들어 입었어요. “이 물건은 부서지기 쉬우니 조심하십시오.” 그 다음에 고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부서지기 쉽다는 표현으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마음에 큰 변화를 고흐가 얻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이 바로 인간이구나”하는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고흐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강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태산을 움직일만한 힘을 지닐 수도 있고, 마음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고 낙망하고 불안하면 인생이 비참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중심이 하나님께서 점령하고 계셔서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면 인간은 강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중심이 허무하고 질서가 없고 방황하면 말할 수 없이 허약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에서 32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기도원에서 설교를 하면서 한참 중심을 잡고 말씀을 뽑아내는데, 바람이 불어가지고서 내 원고가 날아가 버렸어요. 아주 낭패 났어요. 그런데 권사님 권사 회장님이 뛰어가서 원고를 주워가지고서 그것을 어설펐지만 맞춰가지고서 내 책상에 가져왔습니다. 내가 그래서 ‘이때 살아온 동안 어려움을 당할 때 어머니와 같은 권사님이 제일 나를 많이 도와주는데, 이제 늙어가지고서 설교할 때 이럴 때도 역시 어머니와 같이 돌보아주시는구나’라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마음중심을 붙잡을 사람들만 있으면 사람들은 튼튼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있으면, 성령이 이끌어가는 삶을 튼튼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 자체는 가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엄청나게 값나가는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으니 그 질그릇 자체도 잘못 손댔다간 큰일 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보잘 것 없는데 보잘 것 없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버티고 있으면,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받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상항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8절~10절)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예수님을 감당할 아무 힘도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몸 안에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절대로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습니다. 우겨싸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할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죽음도 꿈쩍하지 못 합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그 생명의 역사가 예수님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위해서 못 박혀 죽었으니 그 보혈이 우리들의 죄악을 영원히 용서해 버렸어요. 죄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그가 나무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매에 맞아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를 치료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있으니 우리를 쉽게 질병으로 멸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저는 재미있는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또 우리 교회 나오는 집사님의 남편인데, 별로 예수님을 열심히 안 믿었다가 암이 걸리고 암이 온 몸에 다 퍼져나가고 있어서 살아날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남자를 열심히 꾀어가지고서 교회에 데리고 나왔어요. 그런데 수술을 할 날짜를 정해놓고 열심히 교회 나와서 저에게 데리고 와서 제가 기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날 제 앞에 나왔는데 내 느낌이 ‘나는 힘이 없고 무력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사 나의 손을 통해서 축복해주실 것이라’고. 그래서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고 난 다음에 수술을 받을 날짜를 정해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려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암이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병원에서 하는 말이 “이런 법은 없다. 기계가 고장이 났나 보다.”고. 그래서 기계를 다시 손보고 난 다음 사진을 찍어도 거의 암이 사라질 뻔 되었으니깐 “수술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겠다. 저번엔 너무 퍼져있기 때문에 수술할 재간도 없었거니와 살아날 기력도 없었는데, 이제는 당신 마음대로 해라. 수술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해도 좋고 안 해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 너무 좋아가지고서 또 편지를 했어요. “안수를 한 번 더 받아야 되겠다.”고. 그런 것은 큰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질그릇 속에 들어있으니 암이 들어와서 그를 죽이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보혈을 다 흘리고 우리에게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거룩하게 해주시고, 채찍에 맞음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저주가 되어서 나무에 매달렸음으로 가난과 저주를 철폐해주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삶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니 이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님이 질그릇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여러분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질그릇에 누가 있는지 그분을 알아내서 그분과 함께 일어서면 질그릇이 황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들여다보고 “주님 보혈을 흘렸으니 나는 주님 때문에 용서와 의를 얻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오냐, 두려워하지 말라” 또 질그릇 속에 “주님,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다고 하니 주님 의지합니다.” 주님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병을 대신 짊어졌다.”, “주님 주님이 같이 계시므로 이 어려운 환난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갈릴리 풍파도 잠잠하게 한 사람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어떠한 형편으로 와 계신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가면 그 효과가 발생되어 여러분에게 생명의 은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움을 이기고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독일의 문학가 장 파울이 두려움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합니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 ‘아 그게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을 미리 걱정하며,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우왕좌왕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에 직면하여 공포에 짓눌려 떱니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난 다음에 사태를 깨닫고 위험했던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택하여 부르시고,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2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에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1절)

네 것, 내 것 따지는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내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2절)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으로 환경에 그 무엇으로도 두려워 말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너를 도와주고 하나님의 의로운 손으로 붙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해 주십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을 하나님이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 4절)’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결론

마음에 평안이 없고 염려와 두려움이 가득하면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엄청난 각오로써 사단의 무리들인 귀신을 대결하여 우리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하께 살면 그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나 깨나 마음에 불안, 공포, 좌절, 절망, 고통이 다가올 때 사탄을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사탄에게 잘 대접을 해주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그것을 강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귀신들로써 우리에게 도둑처럼 늘 따라옵니다. 늘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예수님의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저는 종종 자다가 밤에 일어나서 한 10분, 20분 마귀를 쫓아내고 잘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꿈자리가 시끄럽고 가슴이 답답하면 쫓아내고 자야지 그거 내버려놓고 자면 사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독을 먹을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된다.”고. 마귀를 늘 쫓아내고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91편 14절부터 1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 같이 여러분과 우리를 품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암탉이 얼마나 병아리를 다정하게 돌보는가를 잘 압니다. 비가 내리고 벼락이 치고 천둥이 나도, 새끼들을 모두 불러서 자기 날개 아래 품고 보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생 품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46장 3절로 4을 보면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안고 업고 품어주시니 우리가 하나님 바라보고 살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4절로 6절에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이사야 41장 10절)고 말씀함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 같은 인생에 무슨 관심을 가지겠는가?’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이런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아무도 두려워할 이가 없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의 고백은 우리 신앙에 권위가 있습니다. 믿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는데, 믿고 난 다음 이것이 자꾸 사라지고 의심이 들어오는데, 이를 막고 강하게 붙드는 것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마음에 많이 간직했다가 입술로 고백하면 그 말씀이 굉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늘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 이 얼마나 다정한 말입니까?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하고 같이 계시니깐, 다윗이 무엇을 하든지 형통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 개인하고 같이 계시면, 여러분이 점점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습니다. 형통의 기운이 여러분에게 같이 있으니깐 무엇을 해도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그와 같은 번영과 형통의 기운이 같이 있으므로 아주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다윗이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점점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와 역사의 주권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약한 국가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경배하니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면에 같이 하시면 김정은이가 아무리 원자탄을 가지고서 큰 소리를 해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려워할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우리들을 강하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원수 마귀가 끊임없이 공격해 오더라도 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의 마음을 굳게 주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집 이야기” (요 14:1-3, 마 8:19-20)|이사/ 김병화목사          

         

“집 이야기” 

14:1-3, 8:19-20

 

1.

톨스토이 우화(寓話)입니다.

거대한 땅을 가진 주인이 어느 날 말했죠.

“해 뜨기 시작해서부터 해 지기 직전까지 내 땅에 말뚝을 박고 망을 쳐 경계선을 그어라. 네가 경계선을 긋는 대로 그 땅을 네게 주겠다.

한 사람이 정말 열심히,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말뚝을 박았어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쳐갔지만, 한 평이라도 더 넓게 경계선을 긋기 위해 헉헉 거리면서 달리고 달렸어요. 해가 지기 직전, 그는 헐떡거리며 비틀비틀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출발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는 출발점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온 힘을 기울여 쳤던 자신을 위한 땅의 경계선은 그에게 소용이 없었죠. 사람들이 호흡이 멈춘 그를 들고나가 대지에 묻었어요.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1평이면 충분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우화(寓話)를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본질을 보게 합니다.

욕심 부리며 살지 말라고 경고음도 내보냅니다.

인생이란 자기 땅을 마련하려고 애쓰다가, 마련한 땅의 귀퉁이 1평에 묻히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합니다.

 

2.

오늘은 집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728)에 새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전도사 생활비 5만원을 받으며 시작된 혼인생활, 그때 전세금 120만원 중 50만원을 빚을 내어 마련하여 시작된 혼인생활 40여년 만에 “내 집”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초동교회 사임 때 퇴직금과 전별금으로 받은 것으로 4년 동안 전세로 살던 집에서 떠나며, 30년 동안 나라 빚을 얻어 마련한 집입니다.

친구들에게 ‘언덕 위에 전망 좋은 집’이라 했더니, “출세한 것이냐?”합니다.

방학동에 아파트를 가졌던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동안 거주했던 집들은 목회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목사는 늘 보따리를 싸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교회를 떠나야 할 때 훌쩍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마련해준 집에서의 생활은 늘 ‘떠돌이’같은 마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아갈 집이다 보니 “내 집으로서의 첫 집”이라는 뜻입니다.

솔직히 기분 좋아요.

그렇지만 집을 마련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톨스토이 우화에서처럼 1평이면 충분하고, 이제는 자꾸 버리고 포기해야 할 때인데,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난해지라고 설교하며 가르쳐왔던 것에 작은 집이라도 소유하는 것에 혹시 욕심 부리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어요.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8:20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누가복음9:58에서는 ‘집’)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어요.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목사가 ‘제 몸의 거처를 마련해?’송곳으로 찔리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답니다.

 

3.

그러다가 성경을 묵상하던 중, 오히려 용기를 얻게 되었고, 무겁게 느끼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예수님의 말씀 “여우도,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를 잘못 해석했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상황을 살펴보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8:19은 ‘한 서기관이’이고, 누가복음9:57은 ‘어떤 사람이’라 했는데,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집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한 곳에 정착하여 머물 삶을 살려는 것이 아니다. 마치 집 없이 이곳저곳,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나는 순례자이다. 이런 나를 따르겠느냐? 너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집이 없었나요?

우리는 없다고 짐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집이 있습니다.

나사렛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곳이 예수님의 집이죠.

단지 예수님은 출가(出家)했을 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어머니나 동생들의 시각으로는 가출(家出)한 예수의 귀가(歸家), 귀향(歸鄕)은 없었어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래도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오빠 나사로 집 다락방에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세리장삭개오의 집에서도 머무셨죠.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도 머물렀었어요.

노숙자 생활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흔적들이 많아요.

예수님은 집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궤를 맡을 정도로,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며 다니면서도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굶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나의 길은 한 곳에 정착하여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랍비들과는 다르다.

나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닐 텐데, 그래도 날 따르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살 집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 그 동안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4.

다시 성경을 봤더니,

하나님은 끝없이 반복하여 우리들이 살 집에 관심했고, 마련해 주시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하신 일을 보셔요.

창세기 1장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 생물, 식물, 물고기를 만든 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했어요.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1:26)

가축(家畜)이 무엇이죠?

집에서 기르는 짐승입니다.

집이 있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7-28) 했어요.

창세기 2장의 J문서의 창조도 보시죠.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2:8) 집이라고 구체적인 표현은 없어도, 그곳이 아담이 거처할 곳이었다는 것에서 에덴동산이 거처(居處), 곧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담은 죄를 범한 후 거처()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인류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존재로 삽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5-16)

‘더 나은 본향’과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이 예비한 한 성’이 모두 하나인데, 우리의 거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집을 주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예를 보시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내용이 중요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하나님께서 보여 준‘땅’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이스라엘 민족이 온갖 고난과 시련,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었죠.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는 걸음, 순례기가 신앙여정으로 해석되지요.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땅’은 ‘집’입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3:8, 17)

여호수아24:13에서는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서 거주하며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24:13)

세겜의 재계약 때 한 약속입니다.

 

5.

예수님의 요한복음 14:1-3의 내용도 ‘집 이야기’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갔다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집, 천국이라고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라고도 합니다. 회복된 에덴동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성경이 우리의 집을 위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의 결론의 말씀도 집짓기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7:24, 26)

그렇습니다.

‘집짓기’입니다.

여기에서 경계할 집짓기가 있어요.

아모스 예언자가 질타(叱咤)한 “상아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송아지를 잡아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6:4-5),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어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여”(5:11) 사는 집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고단한 하루의 삶에 안식처로 삼아 새 힘을 얻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처로서의 집은, 하나님께서도 주님께서도 늘 신경 써 주신 집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집’에 매이고 집착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물질에 속하는 것이 되죠.

이런 뜻에서 우리는 신앙의 집, 주의 영이 거하실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서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의식주(衣食住)가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입을 것, 마실 것, 거할 곳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한 것입니다.

 

6.

새집이사를 하고 며칠 지내면서 어찌된 집인지 돌아봤어요.

톨스토이 우화처럼 헐떡이며 욕심 부리며 마련한 집은 아니었어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증거겠죠?

떠돌이 심정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에서 마련해 준 집에 머물다가, “이제 안주하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집이 어떤 집이어야 할까요?

다짐하는 마음이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음을 얻는 집이요,

쓰고 싶은 글을 집필하는 집이요,

맡겨주신 생명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이요,

목회의 길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집이 되어야 하리라 다짐합니다. 기도해 주셔요.

 강 석찬 목사



복을 주신대로 맥추감사절을 지키라 (신명기 16:9-12) /김병화

 

‘우리 일생의 최고의 해'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헤롤드 럿셀이라고 하는 공수부대 대원이 전투에서 포탄을 맞아 두 팔을 잃고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감에 빠져서 견딜 수 없는 절망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에 조금씩 빛이 비춰졌습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잃은 것보다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만들어준 의수를 사용하여 글을 쓰기도 하고 타자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불구자인 자신이 직접 주연으로 맡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 해에 그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탔고 그가 받은 상금을 상이용사를 위해 전액을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신문기자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체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한 때는 그러하기도 했지만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10배를 보상받게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더 많은 가능성과 감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한 백성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감사하며 승리 하는 삶과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낸 이후 광야에서 영적인 훈련을 시킬 때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16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세 가지 절기 중에서 한 부분만 읽었습니다. 9절부터 12절까지는 한해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을 기념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감사의 단계에 이르는 신앙에는 3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받는 단계입니다.

받아야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릴 때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며 축복을 받은 사람만이 감사도 할 수 있게 되어 집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어린 단계입니다. 어린 단계일 때는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감사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받은 축복에 감사한 것을 깨닫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를 깨닫는 것이 그저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감사를 깨닫는 것도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 번째 단계에는 드리는 단계입니다.

감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성도는 깨달은 성도입니다. 이 깨달은 마음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믿음은 성숙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50편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 신명기 16:15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은 손을 댄 모든 일에 축복을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맥추 감사절』이란 「보리맥(麥), 때(가을)추(秋)」란 말로 「보리를 거두는 때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는 보리를 수확하여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 때는 우리 나라 전 국민의 절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 농경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맥추감사란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전환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맥추절이란 말을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으며,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이를 설명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맥추절이란 어떤 것인가? 맥추절은 무교절기(유월절)가 끝나는 다음날부터 시작하여 오십 일째 되는 날까지입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개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위기 23:15-16)라고 했습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애굽기 23:16)고 했습니다. 종합해보면 맥추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나는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 부르며 유월절을 지난 후 49일이 지난날이기에 유월절 날을 포함하면 50일이 됨으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맥추절을 지키라는 이 명령을 받을 때에는 애굽에서 나온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때입니다. 저들은 광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사짓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설령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생활을 한다하더라도 저들의 주 산업은 유목생활이었기 때문에 밭을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했기에 단지 보리와 밀을 추수하게 되어 감사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맥추절이었다면 별로 실감나지 않은 절기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시니 그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지키는 절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맥추절은 단순히 밀과 보리를 농사하여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감사절이 아니라 이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절기는 농사를 짓고 안 짓고를 떠나 밀과 보리 곡식을 먹든지 안 먹든지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지켜야할 절기입니다.

 

 

맥추절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가 언제입니까? " 저들은 첫 유월절 제사를 드린 후에 그 다음날인 15일에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수르광야를 지나면서 마라의 쓴 물을 만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고 엘림을 거쳐 신 광야를 통과하여 시내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시내산까지 오는데 한 달 보름이 걸렸습니다. 거기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함을 받고 모세가 시내산에 등정하여 새로운 언약인 돌판 계시 십계명을 받은 때가 출애굽 한지 오십일에 이르는 때였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십계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날이 바로 맥추절이요, 오순절입니다.

모세가 받은 돌판 계시 십계명은 언약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하나님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직접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계명을 전달해 주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과 보리를 갈아 빵을 만들어 먹는 양식보다 더 값지고 귀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첫 열매요 떡을 주신 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고백한 것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당신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주어서 당신과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성경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처음 들려질 그때가 당신에게 영적인 맥추절이요, 당신에게 최대의 감사절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4, 5)고 했습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마가 다락방에서 일백 이십 문도가 간절히 기도하여 오순절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4)고 했습니다. 맥추절기인 오순절에 성령 세례 곧 성령 충만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지상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순절 날은 일곱 번 안식일을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날입니다. 맥추절은 구약시대부터 안식 후 첫날인 지금의 주일날에 지켜졌습니다. 맥추절 그리고, 성령 강림하신 오순절은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 탄생된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이 날에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이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성령 운동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이 절기를 통하여 놀라운 성령 체험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순절을 통과한 제자들은 다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도로서 베드로는 오순절 이전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여 저주하고 등지고 세상으로 갔으나 오순절을 통과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어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외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19-20)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맥추절 날에 구원의 첫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시고 삼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까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 분과 더불어 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사건은 이를 믿으며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실 절이라고도 불리는 맥추절은 바로 우리를 위해 부활의 첫 열매를 맺으신 그 분을 통해 우리 또한 부활의 열매를 된 것은 기뻐하며 이를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우리 육체가 얼마간 살다가 죽어 흙속에 묻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여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의 첫 열매에 우리 역시 부활의 몸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맥추절은 바로 우리 몸이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몸으로 일어날 것은 약속받은 날이기에 이 날은 그 어떤 절기보다 귀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어떻게 맥추감사절을 지킬 것인가?

첫 번째는 복을 주신대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떤 복을 주셨는가? 복 주심에 대한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덴마크라는 나라를 아시지요.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불이 넘는 답니다. 그들은 건국 기념일에는 검은 호밀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건국 조상들이 호밀 농사 밖에 되지 아니하여 그것 먹으며 나라를 세웠던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얼마나 복을 많이 주셨습니까? 사실 몇 십 년 전만해도 보리 수확을 거두기 전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춘궁기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셔서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서 보리를 먹어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사는 마치 수증기와 같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모이고 모여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모이고 모여 비가 되어 논밭의 식물을 잘 자라도록 뿌려줍니다. 우리가 드리는 작은 감사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님께 올라가면 그것은 축복으로 바뀌어서 다시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기도문이 열립니다. 감사하면 마음 문이 열립니다. 감사하면 지혜의 문이 열립니다. 감사하면 대인관계가 좋아져서 돕는 자가 생겨나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달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원하는 마음,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힘을 헤아려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라고 했습니다. 매년 드리는 연례행사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즐거함으로 이 감사절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웃들과 더불어 그리고 특별히 고아와 과부를 잊지 말고 그들과 같이 택하신 곳에서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풍성한 열매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는 삶이 맥추감사의 정신입니다.

 

네 번째는 지난날의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을 읽읍시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참 신앙의 사람의 가장 귀한 모습은 축복 받았을 때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고생하던 지난날을 기억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그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법학자 마이피 코스라는 분이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는 법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께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벌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불평하는 아내가 있는 집이 어떤 집입니까? 그 불평하는 그 자체가 벌이요, 지옥입니다. 맥추 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노랫말 연구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가수 중에 슬픈 노래나, 비관적인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일찍 죽거나, 끝이 안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가수 남인수씨는 1962년에 '눈감아 드리오리'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41세의 한창 나이에 그가 부른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가수 이난영씨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는데 그 가사처럼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가수 차중낙씨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는데 찬바람이 부는 1968년 가을, 29세의 나이에 뇌의 염증이 생겨서 낙엽 따라 가버렸습니다. 가수 김정호씨는 '님'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 가사가 "간다 간다 나는 간다"였는데, 그 가사처럼 33세의 젊은 나이에 정말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가수 중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가수 나훈아씨는 ‘강촌에 살고 싶네’를 불렀는데 지금 강촌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가수 송대관씨는 ‘쨍하고 해뜰 날’을 불렀는데 그는 지금 잘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입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감사를 표현하면 반드시 감사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맥추감사절을 계기로 항상 마음과 입술에 감사를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더 큰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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