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고 채우시는 하나님/조용기목사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 오도 가도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버리고 싶은 한 가지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뿐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나 은퇴 후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안이 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걱정과 불안이 많은데, 전 세계 17개국을 대상하여 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은퇴라는 단어로부터 무엇을 떠올리느냐?”라는 질문에 선진국에서는 자유, 만족, 행복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온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적 어려움, 두려움, 외로움을 떠올린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려야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시고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히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1. 건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 사정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건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히브리어로 사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샤크’인데 이것은 ‘꼭 달라붙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 속에서나, 물속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오려면 큰 시내를 건너야 됩니다. 비가 오는 계절에는 시내에 물이 넘치기 때문에 저는 못 건너옵니다. 그러나 시내 근처에 고모님이 살고 있습니다. 고모 아버지는 키가 크고 몸집이 큼직하고 얼굴이 핏기가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학교 갔다가 고모 집으로 가서 “고모 아버지 나 데려다 주세요” 그러면 “그래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등에 업습니다. 그런데 시내에 오면 고모 아버지 등에 업힐 때 그냥 업히면 안 됩니다. 물이 아주 무섭게 넘치기 때문에 찰싹 붙어야 되요. 하샤크입니다. 찰싹 붙어가지고서 목을 손으로 꽉 끼고 있으면 고모 아버지가 물속에 들어가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가는데 온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나 무사히 도랑을 건너갑니다. 항상 비만 오면 우리 고모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냥 가지 말고 바싹 붙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 하샤크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달라붙은 여러분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정말 유능한 젊은이로서 느부갓네살에 의해 선택되어서 일을 하는데 신앙이 얼마나 좋았던지 절대로 우상숭배를 안 합니다.

 한번은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큰 금신상을 만들고, 바벨론 제국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상에 예배를 드리고 절을 하게 명령을 내립니다. 만일 절을 하지 않으면 활활타는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엄명을 내립니다. 드디어 큰 나팔소리를 울리고 모든 사람들은 금신상에 절을 합니다. 그런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에서 고합니다. 왕이 그들을 체포케 해서 심문을 합니다.

 “ 왜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신상에 절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다른 것은 다 순종해도 하나님 배반하는 일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지 다른 신에게는 에배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왕이 대노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일곱배나 더 뜨거운 풀무에 던지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의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우리를 불에서 건질 것이요. 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다.

 그래 왕이 분노해서 풀무에 장작을 더 뜨겁게 하고 이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불에 던져진 세 사람이 타죽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한 사람이 더 나타나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3장 17절에는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청년 다니엘도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사자굴 속에 던졌는데 사자가 그들을 물고 찢지 못했습니다. 시편116편 8절에 “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편34편 4절에 “내가 야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며 그럴 뿐 아니라 우리를 또 채우십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뜻하는 그릇은 소망과 꿈입니다. 그릇을 준비해야 채웁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서는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릇이 바로 꿈과 소원인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이유가 백성이 꿈이 없으면 그릇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담을 수가 없으므로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는데 꿈과 소원이라는 그릇을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8절로 19절에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가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나가서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가 조지 뮬러 목사님은 2천 명의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먹고, 입히고, 잠재우고, 교육시키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으나, 한번도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려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 고아들을 길러낸 것입니다.

 그의 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나는 작은 정원을 거닐면서 히브리서 13장 8절을 묵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예수님은 사랑과 능력으로 지금껏 고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 그러니 그분은 변함없는 사랑과 능력으로 장차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다. 변함없는 사랑의 주님을 떠올리자 내 영혼에 기쁨이 흘러넘쳤다. 이 생각을 하고 나서 약 1분 뒤에 편지 한 통이 당도했는데, 봉투에는 20파운드 지폐가 들어 있었다. 그 돈은 당시 필요로 하던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32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선지자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빚쟁이가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엘리사는 “집에 뭐가 있느냐?” “기름병이 있는데 기름 조금 담겨있는 병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네 두 아들에게 명령해서 온 동네에 그릇이란 그릇은 다 빌려오너라. 빌려오되 적게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라. 집에 그릇을 전부 줄을 세워놓고 기름병에 있는 기름을 그릇에 부어라.” 그러고 보냈습니다. 온 동리에 “혹시 그릇이 있습니까? 좀 빌려주십시오. 그릇 좀 빌려주십시오.” 온 마당과 부엌과 방에 그릇이 아주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그릇에 기름병의 기름을 붓는데 이 조그마한 기름 남은 기름이 한이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이고 열 두 바구니 남은 것과 같이 자꾸 부어도 나오고 기름을 자꾸 부어도 나오고 기름 장사처럼 됐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가 마지막 그릇에 기름을 붓고 난 다음 “얘들아, 또 기름 담을 그릇 가져오너라.” “어머니 그릇이 없습니다.”라고 할 때 기름이 그쳐버리고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면 문제가 없습니다. 메추라기가 광야에서 어디 그렇게 많이 모여올 수 있습니까? 만나가 매일마나 40년 동안 삼시 삼 때 배부르게 먹도록 내려왔는데 희한하지 않습니까? 광야 바위에서 시냇물이 흘러나오고, 하나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우리 정말 참 놀라운 영의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우리가 너무 무식해서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망과 꿈이 그릇인데, 소망과 꿈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68편 9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에 ‘흡족한 비’의 히브리어는 ‘값없이 주는 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필요를 풍성히 채워 주실 뿐 아니라 값없이 은혜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던 구약시대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돈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도 돈이 없다고 하고 부자도 돈이 없다고 말합니다. 건강이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고 학벌이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고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는데 광야는 불뱀과 전갈이 있어 위험한 곳일 뿐만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광야의 생활을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명기 2장 7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면 우리도 광야와 같은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부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어려운 환경을 마음에 그려보고 부정적인 말을 자꾸 하면 어려움을 당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믿습니다. 풍성합니다.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꿈은 하나님 말씀을 읽음으로써 마음속에 얼마든지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욕심과 탐욕을 가지고 오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꿈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고 입술로 긍정적인 시인을 하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워지면 염려근심을 하는데 염려근심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조사해 보았더니, 40%는 과거에 대한 것이고, 50%는 미래에 대한 것이고, 10%만이 현재에 관련된 두려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현재는 미래와 함께 우리가 염려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6장2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8장 9절에는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야훼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응답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 나가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생각을 종종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신앙생활에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정적인 되면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퍼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마음에 꿈을 ‘하샤크’하고  확 끌어안아야 됩니다. 하나님 등을 확 끌어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꿈을 꾸면 하나님이 믿어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라.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을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잘한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세상은 늘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늘 우리를 건지시고, 채우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철저하게 주님과 하나되어서 늘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희망과 용기/조용기목사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야훼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장 1∼9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앞이 캄캄해지고 삶의 빛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희망을 잃어버리면 내일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가 있으면 어떤 대적이나 방해가 다가와도 깜짝 놀라게 도전해 나가며 승리를 외칠 수가 있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용기가 생겨나고, 희망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손으로 맞잡으면 새로운 변화나 창조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10명 중 9명이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표를 내고 싶은 상황 1위가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느낄 때 사표가 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낮은 연봉이나 잦은 야근이 아니라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없다,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사표를 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은 내일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희망으로 오신 예수님

 희망이 없는 삶은 만사를 다 빼앗긴 삶인 것입니다. 희망의 나무를 우리가 한번 바라봅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는 희망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는 저주에서 희망을 주는 나무로 변화되고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나무 앞에 나가면 참 놀라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나무를 통하여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희망이 넘쳐 나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희망이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보혈의 용서와 의의 희망이 있습니다. 죄가 있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죽어야 마땅한 죄인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에서 용서와 의의 희망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십자가 밑에 나가면 희망이 있습니다. 용서받고 의로움 받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우편 강도, 좌편 강도가 같이 못 박혔는데 그 강도 중 한 사람은 예수님께 향해서 불평을 말했습니다. “너 하나님 아들이면 우리 다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 그러니까 다른 강도가 그 강도의 말을 듣자, “야 이놈아 너와 나는 평생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놈이고 우리는 이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한적이 없는 분이다.” 그리고 주님보고 “주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시거든 나를 기억해주시옵소서.” 주님이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희망이 순식간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 많은 죄와 불의와 추악을 순식간에 십자가의 피로써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와 의의 희망을 십자가 밑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보혈의 성결과 성령 충만의 희망인 것입니다. 보혈이 우리의 행위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그 결과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주셔서 성령 받고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실제로 다 씻어버린다. 성령이 새롭게 만들어 주셔서 성령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 보혈 밑에 나가면 보혈의 대속으로 치료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괴롭고 좌절되고 절망적인 말을 의사가 한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밑에 나가면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수술하는 위기에 처한 환자들이 우리교회에 와서 기도를 받고 병이 사라진 사건이 여러 번 있어서 그것이 알려져 가지고서 요새는 희망을 가지고 안수받겠다고 한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 다음 나무에 매달려 흘린 피가 우리에게 내린 저주를 다 대신 청산했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그 자손들 전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으라고 했는데 신약시대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나무에 매달렸으므로 나무에 매달린 예수님이 저주 대신에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게 된 것입니다. 저주를 청산 받고 잘 살아볼 수 있는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십자가 밑에서 죽고 장사된 후 되살아난 희망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나무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함이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온통 희망의 세계를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이 모든 복이 은혜와 사랑의 선물로 주어지고 오직 믿음으로 소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을 주시며, 우리는 믿기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시대가 왔다고 하더라도 예수 십자가의 위대성은 십자가를 붙들고 가면 희망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받는 희망이 나오고 씻어 거룩함을 얻고 성령 받을 희망이 나오고 채찍에 맞았으니 저주에서 해방될 희망이 오고 병에서 고침 받을 희망이 오고 부활 영생할 희망이 있다. 우리 기독교는 온통 희망으로 둘러싸인 신앙인 것입니다.

2. 함께하시는 성령님

 그러고 난 다음, 희망을 가졌으니깐, 용기를 갖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보면 제자들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다 뿔뿔이 헤어졌는데, 그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그들은 굉장히 담대해졌습니다. 그렇게 희망이 없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희망을 얻고, 희망을 얻고 난 다음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니깐 용기가 생겨나서 성령을 모시고 굉장히 담대해져서 밖에 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로 5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고 난 다음에는 그 대가로써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서로 함께 있으면 강한 법인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을 정복하겠다고 여호수아에 허락을 구합니다. 헤브론에는 체격이 크고 전쟁에 능한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담대하게 갈렙이 말했습니다. 갈렙의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호수아 14장 12절 “그 날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아낙자손을 절대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3. 4차원의 영성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져라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에서 희망을 얻고 4차원의 영성이 주는 용기를 얻어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십자가의 희망을 통해서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이 되고, 소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돌보아야 됩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런 여유만 있으면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생기고, 희망이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희망이 생각 속에 있으면 용기가 생기고, 용기가 있으면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일을 계획하고 행할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는데, 누구든지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면 꿈을 담대하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이 있으면 하나님이 응답할 그릇이 있는 거예요. 그릇이 없으면 아무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는 것은 “네 소원대로, 네 꿈 꾼 대로 될지어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을 꾸어야 하나님이 그것을 그릇으로 삼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4절에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라는 것은 마음의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세계를 또 우리가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다스리고, 꿈을 다스리고, 그 다음엔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창조적인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말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오면 주님은 꼭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믿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것을 기도하면 마음에 확신이 생기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말이 입에서 나오면 그 말이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1절로 9절에 보면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야훼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할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야 돼요. 강하고 담대하게 생각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꿈꾸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면 강하고 담대하게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욥기 14장 1절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떨 때는 문제가 너무 커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골리앗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 앞에 골리앗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옆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만 바라보고 가면 골리앗같은 원수가 많이 있습니다. 땅만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고, 옆을 바라보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 내 손 잡고 계신 성령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은 다윗과 같이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앞세우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내려오니 사울 왕과 동시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 것은 다윗입니다. 초립동 다윗입니다. 16 내지 17살 먹은 다윗은 사울 왕이 말하기를 “야, 너보다 더 훌륭한 장군들이 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도망을 치는데, 어린 아기같은 네가 어떻게 싸운단 말이냐?” 그럴 때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고 가면 따라가서 사자와 곰을 쳐 죽이고 그 양들을 구출해 내었는데, 사자와 곰하고도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는데 저 골리앗 저것도 사자와 곰 중에 한 놈처럼 될 것입니다. 내가 나가 싸워 나가겠으니 나를 보내달라”고. 다윗은 하나님을 믿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곰과 싸워도 쳐 주시는데, 골리앗은 문제없다고 그래서 골리앗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가 나와서 골리앗을 보고 말하기를 “너는 창과 긴 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야훼, 이스라엘 하나님을 대표해서 나온다.”라며 물맷돌에 물매를 매겨가지고서 흔들어 들면서 “내 하나님 이름을 받아라.”하고 던지니깐 그 돌멩이가 날아가서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습니다. 골리앗은 미사일과 같은 창과 칼과 단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거 쓸 데 없어요. 아주 정통으로 이마를 때리니깐 미사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북쪽에서 아무리 미사일을 가지고 협박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맷돌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임종 직전에 남아 있던 온 힘을 다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웨슬리 목사님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고, 환경과 우리를 비교해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됩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매우 불행할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불쌍한 우주의 고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장 18절)며 성령님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8절)
 여러분, 바람을 한번 숨 쉬어 볼까요? 하나, 둘, 셋. 후~코로 숨 쉬어서 입으로 내뿜습니다. 후~분명히 바람이 있지요? 없습니까? 분명히 있지요? 그 바람이 예수님의 성령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님~저와 함께 하시옵소서.” 그러면 숨을 들이켜 쉬었다가 뿜어내는 거와 같이 이 자리에 같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환경만 바라보지 말고 “나와 같이 계신 성령님 권능으로 저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 이상의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내일도 없습니다.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을 보면 먹고 사는 것이 풍족한데도 가난한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도 자살률이 매우 높은데,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도 “히틀러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영국의 최고의 무기는 무엇이냐?”라고 물으니깐, “영국 국민이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희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국민도 지금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인 것입니다. 독일의 몰트만 박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가 되어 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는데, 600만 유대인들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으려고 하는데, 영국 목사가 성경책 한 권을 갖다 주어서, 그 몰트만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을 읽고 난 다음 희망이 생겨서, 희망이 마음에 살아갈 용기를 주고, 희망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강하고 담대하게 기도하고 인생을 살아서 2차 대전이 끝나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역사적인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기만 하면 용기가 생기고, 희망과 용기가 생기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꾸고,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며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이 내 옆에 계신 것을 늘 생각해야 돼요. 꿈꾸어야 돼요. 믿어야 돼요. 말해야 돼요. 우리 사람이 입의 말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르고,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믿어야 뭘 하는 것입니까? 믿고 말을 하기 때문에 믿은 대로 된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생각 속에 꽉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그 말씀을 시인하고, 그 다음 꿈을 꾸어야 돼요. 내가 소원하는 꿈을 꾸어야 되고, 그 다음에 믿음은 입술로 기도해야 돼요. 그러고는 입술로 창조적인 선언을 하면 변화가 다가오고, 창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 환경을 변화시키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모시고 살아야만 변화가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세상을 바라보면 낙심되고 절망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그리고 4차원의 영성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임을 고백합니다. 성령안에서 늘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조용기목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성경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 삶의 배후에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국가 모두 다 눈에 안 보이는 손길이 그들이 마음으로 작정한 일에 따라 간섭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옮기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지만 저 뒤에 감화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E.M. 바운즈 목사님은 “오직 주님만이 산을 옮기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산을 움직이시지만 우리 기도는 주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을 할 때입니다. 여호수아가 군대를 조직해서 전쟁에 났지만, 모세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고, 팔이 아파서 팔을 내려놓으니깐 이스라엘 백성이 졌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한 팔씩 들고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할 때 완전히 전쟁에서 이겼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응답하시는 하나님

 어떤 도시에 불쌍한 과부가 자기 원통하고 애달픈 사연을 갚아달라고 재판자에게 탄원을 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누가복음 18장 3절~5절)
 기도의 비결 중에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고통을 당하니깐 거기에 원한을 갚아달라는 것은 배후의 의미도 있겠지만 괴롭힐 정도로 꾸준히 가고 또 가고, 가고 또 가고 나중에 견딜 수 없어서 응답을 해준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친구가 밤에 여행을 하다가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이웃집은 다 잠을 자고 있는데, 그러나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리면서 “누구냐?” “내 친구가 밤에 여행을 하다가 우리 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을 안 주면 배가 고파서 이 밤을 못 새울 것인데, 떡을 좀 빌려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 때 “아이 여보시오, 지금 밤중에 다 자녀들하고 들어와서 잠을 자는데 떡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합니까? 내일 아침에 오십시오.”, “내일 아침은 너무 늦습니다. 좀 수고해주십시오.” 못 들은 체 합니다.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아주 친애하는 이웃이여, 자비를 베푸사 나의 애처로운 처지를 도와주소서.” 그렇게 해야 들어주는 것 아닙니다. 아주 귀찮게 만들어야 돼요.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떡. “아이고 이놈이 떡을 안 얻고는 밤새도록 저렇게 해서 잠을 못 자겠으니 귀찮지만 떡을 주어야 되겠다.”고 그래서 일어나서 부엌에 가서 필요한 떡을 갖다 주면서 “네가 친구이고 이웃이기 때문에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떡을 준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의 비결을 말할 때 이 과부와 함께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도 시끄럽게 해야 된다. 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면 시끄러워서 하나님이 귀가 먹었냐? 그렇게 고함을 치게?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귀는 안 먹으셨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목숨을 다 바쳐서 애를 쓸 때 그 진정한 마음을 보고 하나님이 갚아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8장 6절~8절)

 점점 세상이 각박하게 되어서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장 11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장 32절)
 속히 응답되는 기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낙심했다가 도로 일어나서 기도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기다림이 필요한 겁니다.

 기도는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를 만나는 기쁨을 얻으려면, 열 달 동안 뱃속에 발길로 차고 뒹굴고 하는 장난을 하는 태에서 노는 애를 쓰다듬어주고 참으면서 기다립니다. 빨리 나오라고 고함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 받는 것도 우리 마음에 잉태하는 것입니다. 제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지는 모습을 마음에 꿈꾸어서 기도로써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기다린다는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응답의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40년 동안 양을 쳤고,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십 년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들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면서 견뎌냈을 때, 마침내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족함이 없도록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2. 여러 가지 삶의 시련들

 여러 가지 종류의 시련이 다가오는데,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그 시련을 우리가 알고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욥기 5장 7절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생 없는 사람 없습니다. 지위, 명예, 권세, 돈 이런 것이 있다고 해서 고생이 안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사는 동안에 고생이 다 따르는 것입니다.
 제가 전 세계를 걸쳐서 목회에 크게 성공한 목사님들, 자기 당대에 1만 명 이상의 교인을 모아서 목회한 주의 종들을 보니깐 편안하게 죽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꼭 고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바울은 주의 사업을 하다가 풍랑을 당하기도 하고, 강도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불에서 독사가 나와서 물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사업한다고 해서 편안한 사업을 한 목사는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도 어려움을 만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한복음 6장 5절~9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시험해 봅니다. 들판에 군중이 모여 있는데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 합치면 수만명이 모여 있는데, 어디에서 떡을 사서 그들을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빌립은 그럴 돈도 없고, 떡 살 곳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둘은 주님을 시험할 때 모두 다 땅의 것을 바라보고 시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땅을 보고 사는 사람과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인데, 땅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시험에 넘어집니다. 어떠한 삶의 환경이 있어도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 섭리를 따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땅만 쳐다보면 마음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3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볼 뿐만 아니라 마귀가 주의 종들을 꼭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꾐에 빠져서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명령을 거역해서 타락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40주 40야 금식하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마귀에게 시험 당하셨습니다.

 마귀가 “배가 고프니깐 돌덩어리라도 기도의 힘으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고 유혹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물리치십니다. 이후 마귀는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뛰어 내려라. 천사들이 와서 발을 받아줘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마귀는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하만국을 보이고 자기에게 절하면 부귀, 영화, 공명을 천하에 있는 것을 다 주겠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사탄에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겨야 할 것이라”라며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도 시험해보고, 마귀도 와서 시험해보는데,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면 어떠한 시험이 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련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있는데, 모든 인생에는 시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만, 시련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고난은 포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되지만,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이라는 길에서 돌을 만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런 걸림돌을 이 길에다 누가 가져다 놨냐?’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거기 디딤돌이 있어서 좋으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똑같은 걸림돌에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길에 걸림돌을 갖다 놓았냐?’고 불평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디딤돌을 디디고 가니까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 이 어려운 환경은 우리에게 디딤돌이다.’ 기도하면 디딤돌로 환경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디딤돌이 안 되는데, 기도를 하면 걸림돌이 디딤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스트레스가 무조건 건강에 나쁘다고만 알고 있는데 캘리 맥고니걸이라는 심리학자는 8년 동안에 3만명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경험한 사람의 사망 위험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43%나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스트레스가 나쁩니다. 스트레스를 당했어도 해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오래 삽니다.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참 희한합니다. 스트레스가 완전히 우리 병을 가져오는 인자가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스트레스 때문에 병들어서 죽지, 스트레스가 다가와도 이건 우리에게 훈련하여 힘 있게 만들어 준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이익이 되고 손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 몸에 미치는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보십시다. “스트레스가 와도 하나님이 계시면 문제없다.” 

3.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살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편 4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9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간의 문명은 편안함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기후가 따뜻하고 전쟁도 없고 평온한 지역에 사는 민족들이 아니라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사는 민족이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국가나 민족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한 환경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발전하고 향상하는 삶을 이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기도의 손을 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에 즐거움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을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17장 22절)라고 말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병들게 합니다.

 한겨울의 추위와 한여름의 더위를 견디며 벼락을 맞아도 죽지 않고 수백 년을 버틴 나무라 할지라도 작은 해충이 갉아 먹으면 낙락장송이 죽어서 쓰러집니다. 우리의 삶도 이런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가 뭐냐? 염려와 근심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염려와 근심이 우리 심령을 갉아 먹으면 우리는 거꾸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와 근심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맡기는가?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로써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가 참 희한합니다. 마귀가 지옥의 부정적인 생각을 연기처럼 채우면 마음이 죽을 것 같고 불행하고 불안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나와서 보혈을 바라보고 믿으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씻어주고 마귀를 쫓아내주고 우리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큰 시련을 당해도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직 기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망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붙잡고 용감하게 일어나서 기도하고 나가야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밀물처럼 밀려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땅을 바라보며 낙심하는 자 되지 않게 하시고, 하늘을 바라보며 늘 기도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돋립니다. 아멘


성령의 열매(III) - 충성, 온유, 절제/이영훈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는데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사랑과 희락, 기쁨, 화평, 평안이고, 두 번째 그룹은 나와 이웃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특징으로 오래 참음, 자비, 친절함을 베푸는 것, 양선,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1. 충성(Faithfulness)

 일곱 번째 충성의 항목에 대해서 우리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이 충성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인데 이는 ‘믿음, 신실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충성이라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으로 최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하나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진실하지 않게, 그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저 그 사람이 지금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잘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선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은 설명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분을 주시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음의 자세로 충성하도록 사명을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은 계급장이 아닙니다. 섬김의 직분이요,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평신도로 있을 때는 불평도 하고 부정적인 얘기도 때때로 할 수 있고, 또 감정을 다 표현해서 소리치고 다투고 싸울 수 있어도, 일단 제직이 되면 그때로부터는 그것을 하면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세우신 직분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직분자의 첫 출발점, 첫 걸음이 집사 직분인데,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 해서 ‘섬기는 자, 하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집사님이 되면 교회의 머슴이 되고 하인이 되는 것입니다. 궂은 일은 다 앞장서서 하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예배가 은혜롭게 하는 데 충성을 다하는 직분이 바로 집사 직분입니다. 집사님 직분으로 섬기다가 “이제는 종신토록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일꾼이 되라”고 해서 세우는 직분자가 장입니다.

 장로 직분은 아주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이제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 세운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고,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너무나 훌륭하신 장로님들을 많이 세워져 각 부서에서 충성, 헌신, 봉사하여 교회 모든 행정적인 것이 아름답게 잘되고 있고, 부서 부서에서 잘 섬겨주셔서 교회가 화목하고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이는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충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로 그 맡은 자에게 충성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한 사람에게 한 주인이 먼 곳을 가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고, 또 한 사람도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일을 하지 아니하고 땅에 파묻어놓고 놀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제 그 하인들이 일한 것의 보고를 받고 그들을 평가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칭찬이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을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그저 놀고먹었던 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자녀였고,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노예로서 팔려갔지만 노예로서 그 자리에서 열심히 충성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고, 또 모함을 받고 죄수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곳에서도 맡겨진 모든 것에 충성하여서 간수장이 그를 높여 감옥 전체를 돌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높이셔서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헌신하여서 온 애굽 사람과 이방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고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인정받고 칭찬받고 장차 주님 앞에서 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로서 자녀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고, 부모는 부모의 자리에서, 주부는 주부의 자리에서, 직장인은 직장인의 자리에서, 경영인은 경영인의 자리에서, 전문인은 전문인의 자리에서, 예술인은 예술인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게으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성공은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요, 복 받는 길인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충성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2절에 우리에게 주님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는 복음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는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당신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지난 8월 17일 날 제5회 성천상, 아주 귀감이 되는 의료인들에게 주는 상을 받은 91세 국내 최고령 의사 한원주 권사님이 계십니다. 소망교회 권사님이신데요, 평생 2/3, 60년의 그 긴 시간을 의사로, 그 중에서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며 살아오신 귀한 권사님이십니다. 3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독립운동가요, 의사였습니다. 경성여자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미국 원호병원 등에서 10년간 근무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1968년 병원을 열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한 사람이라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1979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기도를 해도 ‘이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하소연부터 터져 나왔어요.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왜 나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셨을까’부터 되짚어보게 만드시더군요.”

 문득 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버님은 독립운동가면서 의사였는데 일제 치하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서서 결핵 퇴치 운동, 또 콜레라 예방 운동, 한센병 환자 돌보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환자들 돌보기, 또 두메산골에 의료시설 없는 곳에 무료 진료를 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을 기억하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내 주변에 돈이 없어 병원에 못 오는 사람, 여러 가지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28년 동안 도시 영세민, 노숙자등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생활비도 지원해주고 장학금까지 지원해주었습니다.

 82세가 되던 해 또 다른 사명을 맡습니다. 자신처럼 황혼 앞에 선 노인 환자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재활 요양 병원과 종신 계약을 했습니다. ‘내가 병원을 여기 서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여기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나겠다.’ 그의 그 귀한 삶이 알려져서 8월 17일 날 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의사로서 소임을 다 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됐습니다. 제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하되, 치매 등 질병, 사고 때문에 일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이 병원에 입원하고 여기서 임종할 수 있도록 계약했어요. 아픈 사람 고치는 게 제가 할 일이거든요. 그걸 지금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실 때까지 사명을 이어가고 싶어요.“

 얼마나 귀한 권사님인지 모릅니다. 나이가 91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지금 환자를 돌보고 있어요. 여러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온유

 그 다음 여덟 번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요즘 너무나 사람들이 사나워졌어요. 사람을 사귀는 것도 잘 사귀어야지 사귀다가 헤어지면 요즘 헤어졌다고 와서 칼로 찔러 죽이고, 가서 폭력을 행사하고, 차로 들이박고. 전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섬뜩 섬뜩 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사람을 잘 사귀어야겠구나, 이거. 이런 폭력성 있는 사람을 사귀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달라져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충만 받고 난 후에는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지지 않으면 아직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부드러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핍박받고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셔도 늘 그것을 온유함으로 참고 견디고 이기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사야 42장 1절로 3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고함치고 소리 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면 자기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그것이 통과된다고, 그 떼거지처럼 모여서 소리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반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리쳐야 될 때 소리치지 아니하고, 온유함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정 다 표현하고 살지 말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를 지르고 살지 말고, 그럴수록 감정을 잘 조절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품고, 대화 나누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130주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천만 권이 넘게 팔린 책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4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는데요, 게리 채프먼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온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말로 전달하고 싶으면 온유한 말을 써야 한다. 온유한 말투로 해야 한다. 우리의 배우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보다는 그 어투로 내용을 이해한다. 같은 말이라도 크고 거칠게 표현하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비난하고 정죄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솔로몬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잠 15:1)라고 했다. 배우자가 몹시 화가 나서 말을 함부로 할 때라도 당신이 그를 계속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더 열을 내며 화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표현이 거친 말을 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도 여러분은 목소리를 낮춰야 되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웃으면서 “아, 그래요.” 소리가 크면 소리를 더 작게 해야 됩니다. 저 사람이 잘 안 들리게. “그러셨어요.” 그 사람이 갑자기 소리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소리를 왜 같이 안 지르나.’ 여러분 그렇게 감정을 다 표현해갖고 싸워보고 난 후에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밥 먹어도 제대로 소화도 안 되고 감정만 나빠지는 것입니다.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온유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온유하면 여유가 생기고, 온유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런데 이 온유한 자에게 이 땅의 복도 주신다고 시편 37편 1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누가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 온유한 사람이에요. 이삭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얻으니까, 그 집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공격해 왔습니다. 애써 땅을 파 우물을 만들었더니, 와서 우물을 뺏었습니다. 당시 물이 귀했습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 땅을 많이 파야 하는데 한 번 파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파서 물이 어디서 한 곳 나오는 곳을 찾는 그런 시절인데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요. 이삭이 다투지 않았어요.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달려와서 그 우물을 뺏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그 우물을 양보해줬습니다. 하인들이 말합니다. “아이,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데 주인님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원하면 주고 우리가 또 가서 파면되지.” 가서 또 땅을 팠더니 또 물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가는 데마다 물줄기가 따라다니는구나. 이제 그만 괴롭히자.’ 할렐루야!

 여러분 이 같은 넉넉한 마음, 온유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해야 됩니다. 여유 있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멋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22절에 설명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3. 절제(Self-control)

 마지막 아홉 번째가 절제입니다. 절제는 ‘셀프 콘트롤(Self-control)’ 즉 자신을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25장 28절은 설명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절제해야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스피드를 내고 싶다고 그래서 막 밟으면, 절제하지 못하면 속도위반으로 티켓도 띠고, 또 사고도 나고,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절제해야 됩니다.

 특별히 운동선수들은 얼마나 절제하는지 모릅니다. 먹고 싶은 것도 몸 관리를 위해서 먹지 않고, 쉬고 싶어도 몸을 위해서 체력을 위해서 계속 훈련을 하고, 잠자는 것 먹는 것 모든 것 다 절제합니다. 또 정신도 늘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합니다. 골프하는 사람은 정신이 무너지면, 멘탈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그래서 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공을 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보다 우리는 더 절제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 받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 표현하고 싶다고 다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 지르고, 싸우고 싶다고 다 싸우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돼지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인간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돼지처럼 먹는다’고 그러는데 절대로 돼지는 위의 7, 80퍼센트가 차면 아무리 좋은 것, 맛있는 것 갖다놔도 먹지를 않는대요. 과식하는 법이 없답니다. 여러분, 돼지가 많이 먹어서 배탈 났다는 얘기를 들어봤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은 절제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보고 ‘돼지같이 먹는다’고 우리를 갖다가 오히려 모독했기 때문에 고발했다! 그 예화를 보면서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절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절제하는 동물을 들어가지고 ‘돼지처럼 먹는다’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참 부끄럽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가 절제의 은혜입니다. 늘 우리는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삶의 모습도 절제해야 됩니다. 너무나 한국은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남아서 그 음식물을 처치하지 못합니다. 대천덕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음식을 옆에 있는 분이 많이 남기니까, 다른 때는 그런 말씀 안 하시는데 음식 남기는 것 보고 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음식물 남기지 마세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 딱 걸립니다. “음식물 많이 남기는 것도 죄에요.” 여러분, 지금부터는 남기지 말고 싹싹 비워가지고 절대로 남기면 안 됩니다. 특별히 뷔페 음식점 가가지고 이만큼 쌓아다가 반 씩 남기면 절대 안 돼요. 먹을 만큼만 조금 가져다 먹고 파해서 딱 음식을 조절을 해야지, 절제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범사에 절제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정받고 사람 앞에서 칭찬받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흠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농부로서 늘 넓은 땅을 갖기를 소원했습니다. ‘내 원이 없이 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고장에 가면 원하는 대로 땅을 준다고 그래서, 그곳에 가봤더니 그 성주가 말하기를 하루 동안에 다녀올 수 있는 만큼 다녀오면 그 온 땅을 천 루블에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동이 트자마자 그곳에 가서 “제가 이제 원하는 땅을 갖기 위해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출발점에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대신 조건은 해지기 전에 그 자리로 돌아와야 돼요. 그러니까 해지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서 반환점을 돌아오기 위해서 또 가고 또 가고 또 갑니다. 해를 바라보면서 해가 중천에서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가야 되니까 달려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갔을 때, 다시 돌아와서 해지기 전에 열심히 열심히 다시 돌아와 가지고 출발점에 와서 탁 치고 쓰러졌는데, 가보니 피토하고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그의 하인이 그곳에 땅을 파고 묻어주었는데 그가 얻은 땅은 여섯 자였습니다. 일 미터 팔십, 관 들어가는 그 땅밖에 못 얻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철저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 앞에 존귀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주님의 일꾼 되기 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변화되어서 우리 가정이 변화되고, 이웃이 변화되고, 이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영광이 온 천하에 나타날 수 있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성령의 열매(Ⅱ)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한 열매 속의 아홉 가지 내용인데, 첫 번째 세 가지 내용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맺혀지는 열매로 사랑과 희락, 기쁨과 화평이고, 두 번째는 나와 이웃 간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열매 모습으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모습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범주의 ‘오래 참음’, ‘자비’, ‘양선’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오래 참음(Patience)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막 화가 나는데 막 눌러서 억지로 참는 그런 참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내게 당한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흥분하고 요동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게 만들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의 정의를 열다섯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가지 내용 가운데, 네 가지가 오래 참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첫 출발이 ‘사랑은 오래 참고’, 그 다음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어떤 시련도 잘 참고 견딜 수가 있고 사소한 일에 성내지 아니할 수가 있고 환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서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도 내가 흔들리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지 않게 하여주시고, 오래 참고 견뎌서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야고보서 1장 19절부터 20절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듣는 것은 빨리 듣지만 말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하여 ‘이 말이 혹시 상대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상대편을 분노하게 하지는 않는지’ 늘 염두에 두고 말은 천천히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함이 승한자라 그랬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함이 승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온유하고 마음이 부드럽고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말 많고 불평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어서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온유함이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하는 모세가 그 가나안 입구,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 백성들이 또 불평하니까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렇게 잘 참고 인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그가 그 순간에는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위를 명하여서 물이 나오게 하라’ 말씀하셨는데 그가 화난 것을 참지 못하고 “내가 너희에게 물을 내랴” 지팡이를 들어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화를 내고 화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이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꿈에도 그리고 소원하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까지만 가고 거기서 그의 삶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분노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물론 화날 일이 있죠. 속상할 일이 있고, 소리 지를 일이 있죠. 그러나 소리 지르고 싶다고 해서 다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욕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오래 참는 덕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교회 안에서 소리 지르고 다투면 안 됩니다. 소리 지르고 다투는 것은 마귀의 역사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자꾸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싸워라, 싸워라!’, ‘소리 질러라, 소리 질러라!’, ‘화내라, 화내라!’, 거기에 그냥 유혹을 받아서 감정을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이제 이만한 은혜 가운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배려하고, 품는 그와 같은 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사울 왕도 그랬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는데, 이제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불안해서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 선지자가 올 것을 기다리느냐. 내가 제사를 드리겠다.”고 제사를 드려버렸어요. 그때로부터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받지 못하는 그러한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주님의 일을 할 때, 끝까지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특별히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겨야지, 주님 몸 된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내 맘에 맞지 않는다고 소리 지르고 다투면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는 사실을 믿고, 참고 견디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을 당해도, 핍박을 당해도, 억울한 일 당해도, 속상한 일 많아도, 잘 참고 견디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결국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시편 37편 7절은 말씀합니다.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은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내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꾹 참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그냥 잡초처럼 싹 한순간에 몰아내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당장 응답이 없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좋은 일이 다가올 것을 믿고 참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0절 11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면 은혜가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보통 사람은 1년, 2년, 참 어떤 약속을 받고도 못 기다립니다. 아브라함 25년, 요셉이 13년이라는 그 긴긴 연단의 과정을 통한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큰 은혜를 주실 때 그냥 갑자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에 연단을 거쳐서 때가 되어 받을 만한 그릇이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하고 또 훈련하고 훈련해서 강한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훌륭한 스포츠 선수들이 그냥 탄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또 훈련하고 또 훈련하고 또 훈련해서 그렇게 정상의 위치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견디며, 맡은 일에 묵묵히 순종하며, 헌신할 때,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자비(친절, Kindness)

 이 자비는 친절한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의 자세가 바로 친절입니다. 친절은 사람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들고 폭넓은 대인 관계를 이루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친절한 것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요.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친절하게 하면 손님들이 더 많이 옵니다. 똑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친절한 데로 가지, 불친절한 데를 왜 갑니까?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 입으로 늘 친절하게 말하고 손님을 기쁘게 하는 곳으로 우리가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한 친절입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친절해야 합니다.

 일본이 저렇게 성공한 비결 중의 하나가 그 민족정신 가운데 있는 친절입니다. 얼마나 친절한지 모릅니다. 제가 1978년에 처음 일본에 갔는데 깜짝 놀랐어요. 백화점에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90도 절을 하는데 일본 사람은 헤어질 때 한번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안녕히 가시라고. 또 돌아보면 안녕히 가시라고. 한 세 번은 인사해야 갑니다. 아! 저 몸에 깊숙이 배인 친절이 일본을 오늘날의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우리 한국도 많이 친절해졌습니다. 관공서가 친절해졌고 또 어디를 가든지 기업체의 일하는 분들이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 많은 우리 교회는 처음 온 분들이 자꾸 부딪히고 그래서 친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친절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배려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친절은 몸에 배어서 베풀 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덕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평생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며 사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친절을 베풀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친절은 조건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우리 이웃이냐”고 율법 교사가 물었을 때 선한 사마라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온 몸을 두들겨 맞고 길거리에 버려졌을 때, 늘 제사를 드리고 거룩한 말을 하는 제사장은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레위인들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나귀에서 내려서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에 데려가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돌봐주도록 하고 돈을 맡기고 가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37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유명한 성공 철학의 대가이자 루즈벨트 대통령 고문관을 지낸 나폴레온 힐의 ‘성공의 열쇠’라는 책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어느 비가 많이 오던 오후 필라델피아 한 백화점 앞에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다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직원들이 할머니가 들어온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검소한 옷차림의 나이 많은 할머니가 들어와서 문 앞에 서 있을 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 한 젊은 직원이 달려가서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뭐가 필요하세요?”, “아니야, 아니야. 난 지금 비가 와서 잠깐 비를 피해 들어왔는데 차가 오면 갈 거야.”, “할머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하고 의자를 내다놓고 의자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게 합니다. 한참 기다린 후에 차가 왔습니다. “고마워, 젊은 양반. 명함이나 하나 줘.” 그래서 명함을 줬어요. 그 할머니는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직원은 다 잊어버리고 열심히 그곳에서 또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백화점 사장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이 백화점 사장에게 편지가 왔는데, 아무 아무개 직원을 나의 고향 스코틀랜드에 보내서, 큰 성의 가구 전체를 그 청년이 주문해서 다 채우게 하라고. 알고 보니 그 편지를 쓴 사람은 그 직원이 의자를 가져다 드린 할머니였고, 그 할머니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재벌인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의 어머니, 마가렛 모리슨 카네기였습니다.
 늘 검소한 옷차림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 어머니가 이 한 젊은 직원의 친절에 감동되어서 본인 고향에 있는 큰 성에 있는 모든 가구를 이 백화점에서 납품하도록 해가지고, 이 젊은 청년이 고속 승진해서 그 회사의 중역으로 파견되어서 모든 물건을 납품하게 했습니다. 그 한번의 친절이 이 청년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그냥 할머니 한 분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이런 큰 축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풀어야 될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늘나라의 큰 상급으로 우리 모두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친절을 행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양선(착함, Goodness)

 여섯 번째가 양선입니다. 이 양선이라는 말은 착함입니다. 착한 성품, 착한 행동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착한 마음을 넣어주십니다. 예수 믿는 순간 우리가 그동안 악한 마음을 먹고 살았던 어둠의 자녀였는데, 성령이 오셔서 착한 마음을 심어주시고 빛의 자녀로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님의 은혜로 그 운명이 바꿔집니다.
 당시, 예수님 당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 그의 운명이 바꿔졌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로마정부의 앞잡이가 되어서 많은 세금을 거둬가지고 일부는 로마정부에 바치고 일부는 아마 본인이 축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거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만난 다음, 그 악한 마음이 바뀌어서 착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하고 불쌍한 자에게 다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착취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그는 그 후에 가이사랴의 첫 주교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겨져있습니다.

 우린 빛의 자녀로서 의로움과 착함과 진실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9절에 설명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이 어두움이 아니라 빛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사랑의 빛을 비춰야 됩니다. 용서의 빛을 비춰야 됩니다. 착한 빛을 비춰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기도하는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무조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며 용서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게도, 마음이 착하지 못하면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아픔과 원한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미움과 아픔과 상처가 있는 한 그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늘 그 상처에 눌린 바 되고, 그 상처 때문에 분노하고, 더 미워하고, 더 사람과 갈등이 생기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원인이 나한테 있습니다.

 주여, 오늘부터 내 마음이 착한 마음으로 바꿔지게 하여주옵소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다투고 미워하고 분노하며 살지 않게 하여주시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우리가 빛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빛의 자녀답게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마태복음 5장 15절, 16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어두움을 밝혀야 됩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행함이 뒤따르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 사랑인 것입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얼 쏟아 붙고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에서 17절에는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지금 옆집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몇 달이 되어서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음식점에서 사 잡수세요.”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닌데 그때는 아무 말 하지 아니하고 집에 있는 쌀독에 쌀을 한 포대 담고, 집에 냉장고에서 밑반찬 가져다가, “아이고, 이거 우리 함께 나눠먹어요. 우리 집에 좀 넉넉하게 있어요.” 나눠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정이 많은 나랍니다. 시골 어느 데도 가다가 들어가서 인사를 하면 먹을 것을 주는 그러한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한 일본 사람이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 전체를 순례해서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시골 어디를 가도 반갑게 맞아주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먹을 것을 내오고, 어떤 때는 잠도 재워주고. 그래서 일본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정을 한국 시골 곳곳에서 체험했다고 하는 그런 책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일진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이보다 더 열배, 백배, 천배로 사랑을 실천하며 어려운 사람을 돌보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안산 전체가 경제적으로 침체되고 가라앉았습니다. 모든 가계들은 개점휴업입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희들이 안산희망나눔 프로젝트로 한 번에 천 명씩 12번을 갔습니다. 처음 갈 때는 ‘한 번 이벤트성으로 왔다가나’ 했는데, 세월호가 올라올 때까지 간다고 약속하고 3년 동안 12번을 갔더니 완전히 안산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교회에 대해서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서 단 한 번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한 적이 없고 우리가 그냥 가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만 전했는데, 저들이 크게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을 받아서, 저들이 열두 번째 가니까 “아이고, 이번이 마지막이냐”고 저들이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올해 추수감사절 때 한 번 더 갈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고린도 후서 9장 8절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먹을 휘두르는 삶에서 이제는 주걱 푸는 삶으로 바뀐, 그 무료 급식 담당을 하고 계신 <바나바하밥집>의 김현일 대표님. 바나바하우스 밥집을 <바나바하밥집>이라고 하는데, 매주 700명이 넘는 그 노숙인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원래 운동선수 출신의 좋은 체격 조건으로 한때 주먹 휘두르는 삶을 살다가 그가 마음을 잡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IMF로 완전히 망합니다. 아내와 딸을 친정에 보내고 노숙 생활을 하는데 말로 없이 그 삶이 비참했다고 합니다. 무료 급식 받으려고 줄을 설 때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그 줄은 마치 절망의 줄 같아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온갖 생각이 들어요. 배식이 제 앞에서 끊긴 적도 있어요. 그럴 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죽고 싶기도 하고…. 너무 끔찍해요!”

 5개월 후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 가족과 다시 만납니다. 그때 나들목교회의 김형국 목사님을 만나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새 출발 했습니다. 2008년, 한 노숙자가 버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교회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고. 그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누구냐? 교회가 무엇이냐? 우리 교회도 교회지만, 네 자신도 교회인데,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있냐? 하나님이 네게 보여주시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마라.”
 아! 그 말을 듣고 감동받아서 2009년, 컵라면 다섯 개와 빵 다섯 개를 들고 신설동에 있는 노숙인을 찾아간 것이 그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노숙인들은 처음 그를 경계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숙들에게 와서 그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대포통장도 만들고, 대포폰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가?’ 했는데, 끊임없이 와서 저들을 섬기며 자기도 노숙 생활을 했다고 하면서 가진 것을 나누어줄 때,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하우스 프로젝트를 열어서 매주 7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고, 무료 급식뿐 아니라 노숙인 자활, 거기서 그냥 가라앉아 있지 않고 이제 일어나서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저들을 상담도 하고 주거, 의료, 법률, 다양한 방면으로 저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사회 적응 훈련,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이제 저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데, 봉사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지금 40여 가구를 이루어서 저들의 자활을 돕고 있습니다. 그 절반 이상이 미혼모 노숙인 장애인들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그들이 그곳에 와서 하나, 둘씩 변화됩니다. 완전히 인생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새 삶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건 공동체였어요. 밥도 먹고, 예배도 드리고, 함께 울고 웃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한 거죠. 지역생활공동체로 함께 먹고, 마시고, 예배하고, 사역하는 사도행전의 교회 모습이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모습이에요. 공동체 안에서 네 번의 결혼식과 돌잔치를 치르는 등 그야말로 삶의 대소사를 함께 나누고 있어요. 주님의 말씀은 아주 선명해요.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핍박받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계셨어요. 저희 역시 삶에서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예수님을 배우고 발현하는 공동체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선을 행하며 착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성령의 은혜를 물 붓 듯이 부어주셔서, 모든 일에 참고 견디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다음 이기주의로 살았습니다. 베풀지 아니하고 늘 움켜지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오래 참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착한 행실로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희


성령의 열매(Ⅰ)-사랑, 희락, 화평/이영훈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우리 순복음 신앙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을 말씀합니다. 처음에 ‘순복음’이라고 그러니까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러면 당신들만 순복음이고 우리는 가짜 복음이냐?”라며 비판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그대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주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이 바로 순복음 신앙이고, 이 순복음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엉망이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여,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되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주옵소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나타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3등분해서 세 열매씩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세 번째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모습인데,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과 희락, 화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1. 사랑(Love) 

 먼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어야 될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을 잘 대해주고 사랑하는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잘해주다가도 피해를 입히고,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됩니다. 친구가 변하여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있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에 머물러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밤이 지나기 전에 본인을 배반하고 다 도망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설명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람들은 좀 사랑하다가 싫증이 나면 돌아서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면 다투고 멀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못 보면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 났어도, 때때로 주님을 섭섭하게 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 위대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에 대하여 감사, 감격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다음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남을 사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은 설명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또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나누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조금 다투어도 그것 금방 잊어버리고,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 도와줍니다. 왜?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는 잠시 잠깐 섭섭한 것 있고 오해가 있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금방 풀어집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은 주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기준이 내 몸처럼 사랑하라, 내가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장애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섬기며 살아가는 귀한 분이 계십니다. 김경식 목사님입니다. 임마누엘집 원장 목사님이신데, 3살 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아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신발을 신고 기어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보면서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들도 “차라리 죽어버려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니까 그렇게 동생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예수를 믿던 유일한 그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이 아들을 품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란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될 거야. 장애는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뿐이지, 네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넌 축복받은 사람이야, 멸시와 천대를 받을 지라도 조금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여러분, 장애를 있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저들을 멸시하고 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한쪽 다리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어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기술을 배워 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려줘서 받으러 갔다가 그만 도박하는 자리에서 도박에 빠지게 되었어요. 전 재산 다 날리고 교도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는 그는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그런 신세가 되니까 저 같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걸인들, 장애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저들을 모시고 살겠다’고요. 그래서 1983년에 도봉산 안골부락 천막집에서 장애인 10여 명과 임마누엘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껌팔이 행상으로 간신히 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도봉산 산자락에 오갈 데 없는 장애인 10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저들을 먹이기 위해서 길에서 볼펜, 양말, 껌을 팔고, 기독교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들을 섬깁니다. 별별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이것저것 팔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모금을 해서 저들을 보살피고,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섬긴다는 소식이 계속 퍼져나가자, KBS 방송에서 이것을 특별히 취재해서 보도하고 난 후에 전국에서 그를 불러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가서 강의도 하고 예배도 드려주고, 책도 써서 그가 인세를 많이 받게 되니까 그 돈을 다 모아서 송파에 땅을 삽니다. 1990년에 이곳에 땅을 사고, 임마누엘집을 짓습니다. 1993년, 자신도 소아마비 장애인이면서도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최연소로 국민훈장 동백상도 받게 되었고요, 현재 임마누엘집은 2개의 법인과 산하 11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약 1000명의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집의 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말씀대로 주변의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는 귀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역하면서 가장 기쁜 일은 중증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용기를 얻고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두 목발로 걸을 수 있도록 건강한 두 팔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제가 받은 은혜, 그 체험을 장애인은 물론 지역사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애인 대교구가 있어서 많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더 사랑으로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몸이 건강하고 멀쩡하면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아니하고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하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고개를 이웃으로 돌려서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이 절망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러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여서 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2. 희락(Joy)

 그 다음에 성령 충만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희락,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기쁨은 긍정적인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쁨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힘들어도, 어려워도, 오해를 받고 속상해도, 상처를 입어도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네 권의 편지, 책을 썼는데 이 편지가 책이 되는데, 그것이 우리 성경에 신약성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이 네 편의 서신이 책이 되어서 성경에 들어가 있는데, 빌립보 교회에 보낸 빌립보서 끝에 가서 4장 4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옥중에 있는 그가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밖에 있는 사람이 옥에 갇힌 그에게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위로함을 받고 기뻐하세요.”라고 해야 되는데 뭔가 바뀐 것 같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여,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당해도, 문제를 만나도,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해서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성에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장 8절).
 주여,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을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기뻐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핍박을 하고, 믿지 않는 동료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미국 뉴욕 브룩클린 테브너클교회 짐 심발라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기루이지만, 기쁨은 다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의하면, 기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행복의 덧없음을 아시고 성령을 통해 상황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말한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의 특징이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을 함께 고백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여,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주의 사랑이 넘쳐나고 이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치 샘이 펑펑 솟아오르듯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하여주옵소서. 

3. 화평(Peace)

 그 다음 세 번째가 화평, 평화입니다. 히브리말로 ‘샬롬’이라고 말하는데,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이 영어로는 ‘peace’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평안, 평화, 평강, 화평’, 이 네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하나님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그 누구가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샬롬, 이 평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 잡은 평안함입니다. 환란의 풍파가 몰아닥치고, 문제가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 요동하지 않는 평안함입니다. 깊은 바다는 동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해변가가 촐랑 거리지, 깊은 바다는 늘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깊은 바다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바다의 신앙으로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두려워 떨며 숨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날,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여, 이 평강이 우리 마음 가운데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짜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극한 절망에서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그것을 이겨내는 평안함입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호레이시오 스패포드씨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요, 운영 위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무디 부흥사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교회가 다 불타게 되고 그의 큰 저택도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봅니다. 오히려 자기 집이 불탄 것보다 교회가 불탄 것을 걱정해서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안나 스패포드 여사는 몸이 약해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네 딸과 함께 영국에 잠깐 가서 좀 쉬고 오도록 했습니다. 원래 같이 가려고 했는데, 본인은 일 처리할 것이 많아서 먼저 떠나보내고 다음에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1873년 11월 15일 새벽 2시, 영국 범선과 충돌해서 가라앉습니다. 이 사고로 22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원에 의해서 구조되었지만 네 딸은 이미 모두 목숨을 잃고 다시는 그 딸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 도착한 부인이 남편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혼자 살아남았음’ 전보를 받고 너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보를 듣고 달려온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내게 어떤 희생이 닥쳐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데리러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데, 선장이 어느 지점을 지날 때 와서 말합니다. ‘이곳이 배가 충돌해서 가라앉은 곳입니다.’ 그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선실로 돌아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밤새 눈물로 기도할 때, 새벽 동이 터오는데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지금 이 여인은 자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안하냐고 물었을 때 “평안합니다.”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찬송가 가사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파도가 치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2절을 지었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주님 앞에 죄짓고 부끄러운 모습이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
 하늘을 바라보니 뭉게구름이 피어있는데 천국 가있는 딸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4절은 그가 이렇게 작사했습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그 이후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에 건너가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돌보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어떤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주시는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고,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성령 충만함 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시고, 늘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주시고, 주님 주신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구역예배/가정의 위기와 소통

◎ 찬송가(다같이) : 314장(통일 511장), 569장(통일 442장)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에베소서 4장 2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 오늘의 만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가정은 점점 많은 문제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세대 간의 갈등, 바쁜 일과 속에서 사라지는 대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어려움 등 가정을 무너뜨리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정의 문제와 해결 방법
 현대 사회의 불안한 환경은 가정의 결속력을 점점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혼을 점점 가볍게 생각하는 사회적인 풍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가정의 붕괴, 사라지지 않는 가정 폭력의 문제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갖고 서로를 지키고 도와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점점 벌어지고 있는 세대 간의 격차는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아직 정신적으로 다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우 관계, 입시 등의 문제로 인해 큰 중압감을 받고 있습니다. 대화가 사라지면 처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자녀의 감정이 불안해지고 결국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개인의 목표를 위해 달려 가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하면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하는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가정의 위기는 대부분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와 효과적인 소통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부부간의 소통
 부부는 서로 다른 인격과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원활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기준을 자기 자신에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둘때 충돌 없이 부부가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의사소통을 할 때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냄과 동시에 배우자의 감정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먼저 부부간에 는 이해와 배려, 협력과 일치가 존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배우자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를 갖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지적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시와 지적은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갈등 상황에 부딪히면 화를 내고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고칠 것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굳이 상대방의 태도를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가르치거나 화내지 말고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잠언 15장 1절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여 타인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말을 끊거나,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부부간에도 상대방에게 자신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말하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고 대화 중간에 “알아요”, “이해해요”, “네”와 같은 동의의 표현을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배우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상대방을 대할 때 자기를 ‘도와줄 배필’로 보면 가정의 불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부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상대방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결합된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3. 부모 자녀간의 소통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때 알아두어야 할 대화의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언어이기 전에 관심입니다. 서로의 표정과 언어, 행동, 취미, 사회적인 관계 등에 관심을 가질 때 대화가 풍성해지고 서로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마주치고, 몸짓으로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닫힌 마음을 열게 됩니다. 부모 자녀 간에는 세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회나 문화를 보는 사고방식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들은 뒤 자신이 잘 이해한 것인지 “지금 말한 것이…라는 의미가 맞니?”라고 확인하면 좋습니다. 단번에 세대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꾸준한 노력으로 조금씩 좁혀가야 합니다.
 대화 중에 의견의 차이가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견 대립을 감정 대립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의견의 차이가 생기더라도 따뜻한 표정과 언어로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은 자녀의 생각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부모의 말이 맞을 때라도 명령과 훈계로 자녀의 생각을 깔아뭉개서는 안 됩니다. 대신 부모가 자신의 삶과 사랑의 말로 권면하여 자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또 부모가 자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자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줍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을 때 그 형제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형제간의 우애가 깨어진 것을 기억합시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줍시다. 


◎ 간추린 만나
 <가정의 문제와 해결 방법>

1. 오늘날 불안한 환경과 개인주의 등의 문제로 가정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2.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소통입니다.


<부부간의 소통>
1. 부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2. 자신이 배우자의 ‘돕는 배필’임을 깨닫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합시다.


<부모 자녀간의 소통>
1. 부모 자녀 사이의 단절을 끊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 자신의 생각으로 자녀를(부모님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 생각을 존중해줍시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가정은 살아납니다.
2. 예수 이름으로 남편을(아내를) 사랑합시다.
3. 예수 이름으로 자녀를 이해합시다.


<기 도>
1. 모든 것의 기준을 말씀에 두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부부간의 관계에 깨어진 부분이 있다면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합시다.
3. 자녀와(부모님과) 대화가 단절되었다면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성령의 열매(Ⅰ)-사랑, 희락, 화평/이영훈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우리 순복음 신앙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을 말씀합니다. 처음에 ‘순복음’이라고 그러니까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러면 당신들만 순복음이고 우리는 가짜 복음이냐?”라며 비판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그대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주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이 바로 순복음 신앙이고, 이 순복음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엉망이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여,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되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주옵소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나타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3등분해서 세 열매씩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세 번째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모습인데,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과 희락, 화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1. 사랑(Love) 

 먼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어야 될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을 잘 대해주고 사랑하는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잘해주다가도 피해를 입히고,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됩니다. 친구가 변하여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있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에 머물러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밤이 지나기 전에 본인을 배반하고 다 도망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설명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람들은 좀 사랑하다가 싫증이 나면 돌아서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면 다투고 멀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못 보면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 났어도, 때때로 주님을 섭섭하게 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 위대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에 대하여 감사, 감격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다음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남을 사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은 설명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또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나누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조금 다투어도 그것 금방 잊어버리고,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 도와줍니다. 왜?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는 잠시 잠깐 섭섭한 것 있고 오해가 있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금방 풀어집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은 주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기준이 내 몸처럼 사랑하라, 내가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장애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섬기며 살아가는 귀한 분이 계십니다. 김경식 목사님입니다. 임마누엘집 원장 목사님이신데, 3살 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아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신발을 신고 기어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보면서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들도 “차라리 죽어버려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니까 그렇게 동생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예수를 믿던 유일한 그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이 아들을 품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란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될 거야. 장애는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뿐이지, 네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넌 축복받은 사람이야, 멸시와 천대를 받을 지라도 조금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여러분, 장애를 있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저들을 멸시하고 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한쪽 다리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어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기술을 배워 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려줘서 받으러 갔다가 그만 도박하는 자리에서 도박에 빠지게 되었어요. 전 재산 다 날리고 교도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는 그는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그런 신세가 되니까 저 같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걸인들, 장애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저들을 모시고 살겠다’고요. 그래서 1983년에 도봉산 안골부락 천막집에서 장애인 10여 명과 임마누엘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껌팔이 행상으로 간신히 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도봉산 산자락에 오갈 데 없는 장애인 10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저들을 먹이기 위해서 길에서 볼펜, 양말, 껌을 팔고, 기독교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들을 섬깁니다. 별별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이것저것 팔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모금을 해서 저들을 보살피고,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섬긴다는 소식이 계속 퍼져나가자, KBS 방송에서 이것을 특별히 취재해서 보도하고 난 후에 전국에서 그를 불러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가서 강의도 하고 예배도 드려주고, 책도 써서 그가 인세를 많이 받게 되니까 그 돈을 다 모아서 송파에 땅을 삽니다. 1990년에 이곳에 땅을 사고, 임마누엘집을 짓습니다. 1993년, 자신도 소아마비 장애인이면서도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최연소로 국민훈장 동백상도 받게 되었고요, 현재 임마누엘집은 2개의 법인과 산하 11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약 1000명의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집의 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말씀대로 주변의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는 귀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역하면서 가장 기쁜 일은 중증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용기를 얻고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두 목발로 걸을 수 있도록 건강한 두 팔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제가 받은 은혜, 그 체험을 장애인은 물론 지역사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애인 대교구가 있어서 많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더 사랑으로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몸이 건강하고 멀쩡하면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아니하고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하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고개를 이웃으로 돌려서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이 절망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러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여서 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2. 희락(Joy)

 그 다음에 성령 충만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희락,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기쁨은 긍정적인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쁨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힘들어도, 어려워도, 오해를 받고 속상해도, 상처를 입어도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네 권의 편지, 책을 썼는데 이 편지가 책이 되는데, 그것이 우리 성경에 신약성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이 네 편의 서신이 책이 되어서 성경에 들어가 있는데, 빌립보 교회에 보낸 빌립보서 끝에 가서 4장 4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옥중에 있는 그가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밖에 있는 사람이 옥에 갇힌 그에게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위로함을 받고 기뻐하세요.”라고 해야 되는데 뭔가 바뀐 것 같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여,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당해도, 문제를 만나도,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해서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성에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장 8절).
 주여,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을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기뻐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핍박을 하고, 믿지 않는 동료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미국 뉴욕 브룩클린 테브너클교회 짐 심발라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기루이지만, 기쁨은 다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의하면, 기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행복의 덧없음을 아시고 성령을 통해 상황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말한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의 특징이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을 함께 고백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여,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주의 사랑이 넘쳐나고 이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치 샘이 펑펑 솟아오르듯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하여주옵소서. 

3. 화평(Peace)

 그 다음 세 번째가 화평, 평화입니다. 히브리말로 ‘샬롬’이라고 말하는데,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이 영어로는 ‘peace’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평안, 평화, 평강, 화평’, 이 네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하나님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그 누구가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샬롬, 이 평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 잡은 평안함입니다. 환란의 풍파가 몰아닥치고, 문제가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 요동하지 않는 평안함입니다. 깊은 바다는 동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해변가가 촐랑 거리지, 깊은 바다는 늘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깊은 바다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바다의 신앙으로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두려워 떨며 숨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날,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여, 이 평강이 우리 마음 가운데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짜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극한 절망에서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그것을 이겨내는 평안함입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호레이시오 스패포드씨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요, 운영 위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무디 부흥사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교회가 다 불타게 되고 그의 큰 저택도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봅니다. 오히려 자기 집이 불탄 것보다 교회가 불탄 것을 걱정해서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안나 스패포드 여사는 몸이 약해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네 딸과 함께 영국에 잠깐 가서 좀 쉬고 오도록 했습니다. 원래 같이 가려고 했는데, 본인은 일 처리할 것이 많아서 먼저 떠나보내고 다음에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1873년 11월 15일 새벽 2시, 영국 범선과 충돌해서 가라앉습니다. 이 사고로 22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원에 의해서 구조되었지만 네 딸은 이미 모두 목숨을 잃고 다시는 그 딸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 도착한 부인이 남편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혼자 살아남았음’ 전보를 받고 너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보를 듣고 달려온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내게 어떤 희생이 닥쳐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데리러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데, 선장이 어느 지점을 지날 때 와서 말합니다. ‘이곳이 배가 충돌해서 가라앉은 곳입니다.’ 그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선실로 돌아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밤새 눈물로 기도할 때, 새벽 동이 터오는데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지금 이 여인은 자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안하냐고 물었을 때 “평안합니다.”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찬송가 가사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파도가 치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2절을 지었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주님 앞에 죄짓고 부끄러운 모습이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
 하늘을 바라보니 뭉게구름이 피어있는데 천국 가있는 딸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4절은 그가 이렇게 작사했습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그 이후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에 건너가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돌보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어떤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주시는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고,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성령 충만함 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시고, 늘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주시고, 주님 주신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4차원 영성 - 말 /

김민철 목사

 

운명을 변화시키는 감사와 찬양

 세상의 교환은 대부분 비슷한 재화나 서비스를 화폐로 주고받는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르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해 주신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즐거워하신다. 우리의 고통과 절망,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과 행복, 희망과 사랑으로 바꿔주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운 ‘즐거운 교환의 장터’이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십자가를 설명할 때 적용했던 방식이다. 그의 저서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즐거운 교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는 말씀을 강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위대하고도 즐거운 교환이 이뤄졌다고 역설했다. ‘즐거운 교환’은 영어로 ‘거룩한 교환’(Divine Exchange)으로 번역된다. 십자가 위에서의 교환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교환이다. 죽음을 주고 생명을 얻는 이 특별한 교환은 생명을 얻는 우리 입장에서는 즐거운 교환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뤄 주신 것이기에 이 교환은 거룩하고도 숭고한 교환이다.

 그 거룩한 교환의 장터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이 씻음을 받았다. 예수께서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용서를 받았다. 예수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치유를 받았다(사 53:5).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고후 5:21), 예수께서 가난하게 됨으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다.(고후 8:9, 9:8) 예수께서 저주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복을 받게 되었고(갈 3:13∼14), 예수께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는 영광을 얻었다(히 2:10).

 그렇다면 이러한 거룩한 교환을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어렵고 값비싼 대가가 아니며,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채무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는 감사와 찬양의 말이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황소를 잡아서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도 감사와 찬양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다.

 결과적으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은 저주받은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가장 귀하고도 거룩한 교환의 수단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즐거운 교환의 장터인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황소도 필요 없고, 값비싼 선물도 필요 없다. 그저 우리의 입술 가득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담아 오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행복한 교환인가? 그러므로 거룩한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감사와 찬양으로 날마다 이 행복한 교환에 참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김민철 목사


체험하는 복음/조용기목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
 
 
 

신앙이란 이론적, 형식적, 이성적 3차원의 세계를 의지하여 말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그 어떤 이론을 개발해도 살아서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고로 신앙이 체험에 뿌리를 두고 가슴에 뿌리를 내려야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앙인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그 맛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이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와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론적인 설명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막힌 신앙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체험해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신앙은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보증자로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불빛 중에 임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가?’ ‘뉘십니이까?’ ‘내가 너를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의 환상을 직접 보고 거꾸러져서 기독교 역사상에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일심하여 새사람이 되려면 체험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1.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져라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면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까? 예수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또 우리 삶 속에 있는 정신적인 불안, 공포, 절망, 미움, 파탄, 답답한 마음입니다. 폐병, 심장병, 신장병, 암 등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우리 인생에 헐벗고 굶주리고 괴로운 삶을 사는 고통스러운 삶 등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을 멸망시킬 죄가 횡행하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건지러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부정적인 것하고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대적해서 싸워야 우리를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알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깨닫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같이 걸머지면 예수 살린 것이 내 몸에 역사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못되는 것을 예수님이 짊어지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끌어안으면 영혼이 잘못되게 하는 것을 끓어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일체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다 짊어짐은 예수와 똑같이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예수 동참하게 된 그 속에서 똑같이 예수 부활하는데 같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와 싸워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골리앗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4절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자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 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장37절)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해 올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기절초풍을 했는데도 다윗은 “무슨 소리 하는거냐? 곰과 사자도 내가 잡았는데 그 곰 같은 다윗, 사자 같은 다윗을 무얼 두려워하겠어?”라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야훼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개 힘이 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로마제국이 거꾸러졌습니다.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의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장20절)라고 전합니다. 사도들이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보고 들었기 때문에, 즉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하더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믿었다가 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 흔적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 믿는데 대해서 조롱을 하더라도 그 조롱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 모자이크교회를 담임하는 어윈 맥매너스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관한 책을 썼는데 제목이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 주듯이 초대교회는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물고기 잡는 사람, 세금 징수원 등 사회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거의 전부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체험했느냐? 예수님 세상 뜨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 할 때 오순절 날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모두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서 온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뿐 아니라 성령이 오신 증거로써 자기가 배우지 않은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하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상 생각 속에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말로 목욕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 입으로 그들은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일천만 성도들이 모두다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한국이 바짝 뒤집혀질 것입니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니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같이 하심을 전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한국사회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질 때 고난과 괴로움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잡혀가는 중에 이스라엘 청년들 중에 지혜롭고 총명하고 대단히 아름다운 청년들도 잡혀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포로 중 지혜로운 자를 관리로 등용했는데, 그들 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높은 자리에 임명을 받아서 관리로 활동을 했습니다.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우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왕에게 고발을 합니다.
 ‘왕이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습니다.’
 왕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너희들이 이 신상에 절을 하면 살려주겠으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절재절명의 위기입니다. 말 한마디에 죽음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다니엘 3장16절~17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얼마나 담대한 신앙입니까?

 이스라엘 청년 중에 다니엘이라는 똑똑한 청년이 바벨론의 국무총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왕을 속여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그 어떤 신에게도 숭배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반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반포된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집니다. 밤이 새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왕이 아침일찍 사자굴로 달려가 ‘다니엘아 너 하나님이 너를 불러 살려주었더냐?’라고 부를 대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 신앙을 견제했을 뿐이지 왕의 나라에 아무 해도 끼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천사가 내려와서 밤새도록 저를 지켜서 저는 살아있습니다.’
이에 왕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고 그 참소한 다른 사람들을 사자굴에 대신 던질 때 그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도 사자들이 그들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2.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라 (타협하지 않는 신앙)

 구약성경에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고난을 당할 때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로 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압박과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으로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부패와 횡포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은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4절)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갖고서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불평이 나왔는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17절~18절)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서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음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정돈하고 하박국이 신앙한 것과 같은 절실한 신앙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3. 오중복음을 적용하라 (오중복음의 실천)

 우리는 예수님이 걸머진 우리의 짐을 보고 예수님을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장21절)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걸머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부정적인 세력은 예수님이 다 짊어졌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끌어안으면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짐을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은 전부 우리 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짐을 지셨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끝까지 잘 달려서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선교 사역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모든 상황이 내게는 불리하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투정했던 생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버려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그러다 결국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자기 스스로를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저는 자기가 자기를 보고 격려하는 말을 대단히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몸이 건강이 좋지 못하면 늘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용기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는 건강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았다. 두려워말라.’라며 날 보고서 하나님 말씀으로 격려를 하고나면 온 몸이 후끈해지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힘을 얻어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낙심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면 기도조차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장 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시련을 당해서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들어와서 응접실에 들어오니까 7살 먹은 딸아이가 “아빠, 이제 왔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손에 짐을 들고 있으니까 “아빠, 내가 짐을 들어줄게.” 7살 먹은 딸이지만 소아마비 병을 앓아서 걷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얘, 네가 소아마비가 걸려서 걷지를 못하는데 내 짐을 어떻게 네가 들고 간단 말이야?” “왜 못 들고가? 내가 짐을 들고 아빠는 나를 안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 딸이 그 말 한 것이 번갯불같이 자기 마음을 때리더랍니다. “네가 왜 걱정하고 있느냐? 네 딸이 짐을 들면 네가 안고 올라가면 되는 것처럼 네 짐을 네 손에 들면 내가 너를 안고 갈 것이 아니냐? 뭐 두려워할 것이 있느냐?”그래서 그 번개 같은 암시를 받고 믿음을 회복해서 굉장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 글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증명 및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이론과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120 성도는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짊어졌습니다. 하나도 없이 다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고, 영원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끊임없이 마귀하고 싸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서 빼앗긴 세상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럴 동안에는 33년 동안 예수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세상 우주를 돈 주고 산다고 비유한다면 아직 사기를 다 해도 소유등기를 넘기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주가 주님이 가져갈 것인데 아직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소유등기를 다 예수님께로 넘겨갔습니다. 피를 흘려서 대가를 지불하고 마귀는 영원히 쫓겨나가고 하늘과 땅과 세계의 그 안에 모든 것은 예수님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구하면 예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여러분을 직접 도적직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거짓이나 하고 협박이나 하고 다니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보혈로 이 우주를 마귀가 아담을 통해서 점령한 것을 도로 다 빼앗았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과 같이 계시면 여러분을 해할 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과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인류에게 지어져있던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을 청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세상과 짝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붙잡고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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