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조용기목사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누가복음 8장 22~25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유대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남녀노소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들판이 사람들로 빽빽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을 보시고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느냐?” 그러자 빌립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계산을 합니다. “먹일 수가 없습니다. 떡 살 곳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 어림도 없는 일인데 그래도 좌우간 열두 제자 중에 안드레만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2만여 명의 군중에 비교할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받아서 축복하고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 합쳐서 한 2만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다 먹였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믿음이 있으면 믿음을 써먹어야 됩니다. 쓰지 않는 믿음은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빌립과 다른 제자들은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을 하면 먹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하실 때 명령에 순종해야지 그 위에 계산을 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냥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제자들이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게 한 다음에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저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을 보고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때 거기 있었으면 굉장히 감동을 하고 마음에 믿음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밤에 예수님과 똑같이 바다를 건너가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배에 물이 가득차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제자들이 놀라서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보니 예수님이 배 한구석에 팔베개를 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이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부스스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바람이 중지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너희들 믿음이 다 어디 갔느냐? 유다광야에서 가르쳐줬던 그 큰 믿음이 어디가고 여기에서는 절절 매느냐?” 제자들은 “예수가 어떤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도 명령을 하는고?”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고 . 큰 믿음을 간직했으면 그것을 써먹어야지 바다에서 써먹지 못하고 허둥지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사용을 해서 발전을 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1. 삶에 부는 바람과 파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 삶에 부는 바람이 파도를 몰아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인 것입니다. 욥기 5장 7절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살이가 불티가 하늘로 날아가듯이 고생이 늘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그치지 않고 늘 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풍랑이 이는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에 풍랑이 일지, 바람이 불지 않으면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바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같다”고. 바람이 불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남의 밭의 콩이 굵어 보인다.”고 남은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우리는 고난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개를 베고 함께 주무시는데도 풍랑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한 배에 탔는데 그 배가 풍랑을 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풍랑이 안 다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4부 예배에 나온다고 해서 “저 집은 왜 풍랑이 다가오느냐? 왜 사고가 일어나느냐?”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셔도 풍랑은 일어납니다. 그럼 믿는 사람하고 믿지 않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냐? 예수님과 같이 있는 사람은 풍랑이 일어나면 풍랑을 쫓아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경제적인 풍랑을 만날 때도 있고, 질병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고, 정치적인 풍랑을 만날 때도 있고, 염려, 근심, 불안, 절망 등이 풍랑을 몰아쳐 따라오는 것입니다.

 왜 풍랑이 그치지 않을까요? 마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귀가 아니고는 풍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풍랑이 이는 것처럼, 마귀가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삶에 끊임없이 문제의 파도가 몰아치는 것입니다. 문제의 파도가 몰아치면 인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후의 세력인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풍랑이 다가오면 풍랑의 배후는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귀신이 꼭 있습니다. 악한 귀신이 악한 풍랑을 가져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있으면 더러운 풍랑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서 잠잠케 하셨는데, 꾸짖었다는 것은 풍랑을 일으킨 배후 세력이 마귀라는 흉악한 귀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악한 일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김정은이 뒤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풍랑이 조종을 하고 있어요.

  기독교 작가인 C.S. 루이스라는 유명한 작가는 “마귀가 가장 조종하기 쉬운 존재는 마귀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배후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귀가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배후에 있어서 자기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놈의 마귀야 물러가라! 하나님, 마귀를 물리쳐주시옵소서. 아이고 내 팔자야.”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가족 간에 불화를 조장하고 가정을 파탄에 몰아넣고, 사업을 망하게 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파탄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배후에 이렇게 조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배후의 세력임을 알고 마귀에게 대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미줄을 치워도 또 거미줄이 생기고, 또 거미줄이 생기는 것은, 거미를 잡지 않으면 거미줄은 항상 생기는 것입니다. 마귀 배후의 세력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자꾸 파동이 일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을 불러야 돼요. “예수님 이 풍랑을 쫓아주십시오.” 빨리 예수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86편 7절에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항상 우리 믿음을 보시고, 믿음이 있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을 보고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외에는 “믿음을 어디다 두어서 그렇게 허둥지둥하느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누가복음 8장 25절)’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믿음을 알았으면 배후의 세력인 마귀를 대적하고 풍랑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바다에 거센 바람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나면서 배가 흔들리자, 제자들은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지진이 빈번히 일어나 땅이 흔들리는데, 땅이 흔들리면 굉장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전 제 평생에 지금까지 주의 사업을 하고 다니면서 미국에서 지진이 당하게 하고, 일본 동경에서 지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시애틀에서 집회를 마치고 저녁에 와서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몸이 술 취한 사람처럼 흔들흔들해요. ‘내가 한잔 안 했는데? 자동으로 술이 취해지나?’하고. 아 마이크를 통해서 “지진이다 지진. 전부 대피소로 대피하라” 급하니깐 옷 갈아입을 여유가 없었어요. 잠옷이라도 입었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발가벗었습니다. 그냥 복도로 튀어 나가니깐 남녀 전부 반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는 탈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가 전도를 해야 되겠다 싶어서 “여보시오, 여러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으니깐 하나님이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따라갑시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그러니깐 다 나를 따라옵니다. 전문가가 없으니까. 그래서 “JESUS, JESUS”하면서 나가니깐 내가 “지저스”하니깐 전부 다 “지저스, 지저스, 지저스, 지저스” 고함을 쳐서 예수님 이름을 부르면서 복도를 나와가지고서 계단을 다 응접실까지, 로비까지 왔는데요. 그날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 동경에서는 2011년 밤 10시쯤 되었는데 아 거기서도 역시 몸이 흔들립니다. ‘이게 왜 그러나?’하니까는 지진이라고, “전부 대피소로 대피하라”고. 그런데 그러한 시련을 겪어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살려주었으니 살아서 지금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살펴보아야 될 것은 반드시 배후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풍랑의 배후에 세력이 있습니다. 내 개인, 가정, 생활, 사회, 국가, 어느 곳이든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마귀는 불행의 배후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배후 세력은 우리가 성령이 와서 성령으로 충만하고, 감동하고, 예배하고 그러면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배후의 세력이 성령이 되어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일하게 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배후의 세력이 마귀가 되어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이 생기면 아주 고통스러운 배후 세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음에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가운데 풍랑을 만나자 기적을 목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왜 믿음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말인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 믿음을 사용했더라면 두려움과 겁에 질려 허둥대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께 나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계신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믿음이 있다가도 위기를 만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지레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났을 때야말고 믿음을 사용할 때인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사용하라. 예수님은 작은 믿음이라도,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하셨을 때, 안드레는 소년의 점심박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벤또밥을 먹으려고 가지고 있는 것을 빌려서 예수님께 가지고 간 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는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제자들처럼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배후의 세력은 눈에 안 보이는 마귀의 존재이고,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를 잘 의지하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가지고 기도하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태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28절로 30절에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야훼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야훼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풍랑을 만나도 침몰하지 않습니다. 100개의 교회를 개척한 대의그룹 회장 채의승 장로님은 그 인생에서 기막힌 풍랑을 겪은 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투자해서 세운 공장이 홍수로 순식간에 다 떠내려갔어요. 또 아픔을 딛고 일어나 전 재산을 정리해서 투자한 공장이 불이 나가지고서 또 다 타버렸습니다. 물도 통하고 불도 통하고 빈 손 되었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가 흔들리는 풍랑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같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불을 통해서 다 놓친 것도 예수님이 곁에 계셔서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2절)’ 


3.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

 항상 하나님이 같이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8장 25절에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정신없는 소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인 것입니다. 시편 89편 11절에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편 89편 9절에는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여러분 꼭 알아야 될 것은, 여러분이 물불을 통해서 다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곁에 계시면 다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야훼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야훼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편 121편 5장~7절)’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20절)

 인생에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났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 배후의 세력으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면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하리라’ 다시 여러분은 일어설 수 있고, 복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영을 배울 때 온 몸에 힘을 바짝 주고서 물 속에서 버둥거리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사지에 힘을 빼고 물에 의지하면 물에 둥둥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막 떼를 쓰고 발버둥을 치면 하나님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여!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니 그 다음은 주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주님이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내 힘으로 나오겠다고 허우적거리지 않는 것처럼,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나가야겠다고 발버둥 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맡겨야 돼요. 하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우리를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듯이, 우리의 인생도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짖으면 즉시 바람이 그치고, 어떠한 문제의 파도라도 잠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간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배후의 세력에 악한 마귀의 허리춤이 붙잡혀 있느냐? 우리가 단단히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바람 없는 풍랑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 개인생활도 마귀가 와서 훼방하지 않고는 시련의 풍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련을 갖고 우리에게 따라오는 마귀를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주십시오. “원수마귀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쉬지 말고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굉장히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독하게 혼자 내버려놓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천금같이 여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많이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셔서 마귀를 쫓아내고, 성령의 생명의 역사를 일어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우시는 예수님/조용기목사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중략)...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중략)...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1장 17~44절)

 ‘우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와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사는 집에 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친형제처럼 사랑했고, 그 두 자매와 나사로는 예수님을 오빠와 같이 아버지와 같이 형과 같이 사랑하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베다니로부터 먼 거리에 계실때였습니다. 걸어서 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있었는데,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으니 빨리 와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들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는 죽을병이 아니다. 우리 더 있다가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있다가 가자고 하니 제자들이 ‘아니, 이틀이나 더 있다 가면 나사로가 살아있겠습니까?’하고 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죽은지 나흘에 베다니로 갑니다.


1.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베다니 근처에 도달하자 마르다가 뛰어나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주님이 나흘 전에 이곳에 있었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하자 “예, 오라버니가 부활의 날에는 살 줄 믿습니다.”라고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묻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예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이신데, 마르다는 그렇치 않았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다 마르다와 같습니다. “나흘 전에 오라버니가 살아있을 동안에 왔으면 병이 나았을 것인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여동생 마리아도 요한복음 11장 32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라고 말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현재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가 기대하던 대로 오라버니를 지금 살릴 수 있는데 왜 예수님이 우십니까? 예수님은 절대적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님이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적인 제한으로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오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과거에는 하나님이고, 미래에는 하나님이겠지만, 지금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도울 수가 없다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지금의 예수님을 인정 안 하는 그 마당에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우리가 늘 말하는데, 그런데 좀처럼 이대로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예수님이 계실 때 생겼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혹은 ‘미래에는 예수님 오셔서 도와주실 것인데 지금은 어떻게 된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의 예수님을 인정해주지 아니하심으로 그것이 충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하시는데, 지금의 예수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데 그 속에서 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장 33절~35절)’ 대단한 충격을 예수님이 받은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할 일 이니까요. 그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미래의 부활은 믿었지만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마르다 뿐 아니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지금 그 앞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오셔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하여 울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매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환경에 조건을 들어 놓아도 불가능을 그 조건으로 선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불가능한 조건이 붙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통곡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조건 있는 전능한 하나님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나흘 전에 오셨으면 안 죽었을 것이다. 부활의 날이었다면 안 죽었을 것이다. 온갖 이런 조건을 붙이는데 조건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신 그 능력은 무슨 조건이 붙어서 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2.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되어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장 38절~39절)’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왔는데 중동에는 무덤을 동굴로 만들어서 거기에 관을 갖다 넣는 것, 돌로써 그 무덤을 막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그 무덤 곁에 왔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 “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니까 기겁을 합니다. 두 처녀가. “주님, 나흘 전에 무덤에 장사 지내서 지금 썩은 냄새가 나는데 돌문을 밀어서 어떻게 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두 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삼차원의 세계는 보는 것만 보고 사는데 예수님은 사차원의 하나님이시라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벌떡 일어납니다. 수의를 입은 채 무덤에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수족이 묶여있는 것 다 풀어주고 옷을 바꾸어 입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장 38절~39절)’ 이것은 절대절망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셨더라면 병을 고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죽었는데, 너무 늦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의심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시신에게 썩는 냄새가 난다는 것은 절대절망의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절대절망의 상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네 믿음대로 될지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면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삼키지만, 그 삼킨 자를 토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를 되찾아오기 위해 나사로를 삼킨 무덤으로 쳐들어가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신 것은 “나사로야 이리로 나오라.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나사로를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풀어 놓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동물을 매인 것으로부터 풀어주어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15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매여 종 노릇 하는 이들을 풀어 주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남편 없이 과부가 자기 아들 하나 데리고 살다가 아들이 병들어서 죽어버렸습니다. 비통하기 말로 다할 수 없어 울고 통곡하면서 그 청년을 관 속에 담아 짊어지고 과부가 뒤에 따라가면서 울면서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마침 그 길로 오다가 그 과부의 비통한 마음을 보고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는 장례행렬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그 관 속에서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부 엄마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장례식의 행렬을 중지시키고 살린 적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의 행렬을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로 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11장 40절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베다니로 출발하신 것도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를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1장 15절)’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축복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닥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의 믿음이 바닥났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안수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면들이 있습니다. 병들어서 온 사람이 “나는 더 이상 이 병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의 결심과 믿음의 결단을 보여주는 사람이 대개 병이 낫습니다.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크든 작든 ‘믿겠다.’라고 결단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4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생각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았다고 믿으면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감각이나 이성을 의지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떡값을 먼저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각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면 그 말을 절대로 믿고 시행해야지 계산하면 안 됩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먹이라면 그냥 믿음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칼빈은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수도관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음의 행렬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붙잡고 있던 사망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나사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죽음이라는 무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캄캄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 이 시간에도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누구든지 주님의 이 음성을 들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러면 무덤에서 걸어 나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인정되고,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적다고 통곡할 필요가 없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것은 돌을 옮겨놓는 행동으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덤 문의 돌을 옮겨 놓을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무덤 문의 돌을 못옮길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그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역사해주기를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우리가 행하는지, 행치 않는 불신앙을 가졌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도 주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행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일을 해주시고 문제가 해결되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금요일에 병든 자는 기도를 항상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학생이 있었는데 위가 굉장히 나빠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매 금요일마다 와서 안수를 받고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니까 그가 고함을 쳤습니다. “내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믿음 좀 찾아서 주십시오. 목사님 내 믿음 좀 찾아주십시오.” 그래서 “네 믿음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은 네가 가지고 있다. 너의 위장병이 나은 줄 믿어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그럼 여기 계신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위장병이 나았다고 믿었는데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좀 봐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이내에 그 청년의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을 굉장히 믿음을 굳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것은 할 수 있고, 어느 것은 못 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은 오늘에도 그 믿음의 역사를 베푸는 것인데,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주님의 시키는 일을 믿으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믿음은 우리가 믿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셔서 나에게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질 때, 예수님이 기뻐 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뻐 즐거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절망과 희망/조용기목사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태복음 9장 20~22절)

 

성경에 보면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나옵니다. 절망에 처해 있었습니다. 혈루병이라는 병은 법적으로 부정한 병입니다. 혈루병에 걸리면 가정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자녀들로부터 쫓겨나야 됩니다. 형제들과 같이 만날 수도 없고, 친구들과 같이 친밀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게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열 두 해를 그렇게 사니 그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약방에도 다 가보고, 의원들도 다 만나보고, 어디가도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속의 여자가 열 두 해를 혈루병을 앓으면서도 자살을 하지 않은 것은 희망을 주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치료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희망의 소식입니다.

1. 희망을 전하는 소식

 예수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기쁜 소식이라고 칭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 타락 이후로 슬픈 소식밖에 들을 것이 없습니다. 어디가도 슬픈 소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소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는데 교회가 기쁜 소식을 주지 않고 율법을 줍니다. 저는 저의 목회생활 동안 가장 좋은 목회방침은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끌어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임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절망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장사지내고 나흘 만에 부활한 결과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써 죄를 짓고 죄를 범하고 했으매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는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이라고 합니다. 속량이란 돈을 주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속량, 예수님은 그 존재 전체가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주신 하나님의 속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했는데 하나님의 값은 계산이 안 됩니다. 우리 세상에서는 값이 계산이 되지만 하나님의 값은 계산이 안돼요. 황금 같은 것은 계산이 되지만 하나님은 계산이 안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끝이 없는 값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오면 예수님은 속량입니다. 그 자체가 속량이에요. 옛날에는 이씨 조선시대에 사람이 사형언도를 받아 감옥에 들어갔는데 한 달 이후에 길거리에 걸어 다니면 “아, 죄 값을 다 지불하고 사형을 면했구나.” 그러나 한 달 후에도 길거리에 걸어 나오지 못했으면 “죄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죽었구나.” 그렇게 사람들이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룰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없는 속량이 그 몸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값은 비교할 수 없는 값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는, 예수님의 값으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요한 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 값도 예수님이 다 지불하고 예수님이 우리가 살아 나가는데 필요한 값도 다 청산했으며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필요한 값도 다 지불했습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누구든지 만나 준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유명한 사람은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요즘 시대에 계셨으면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만나 주실 수 있는 때였으므로 열 두해 혈루병을 앓은 이 부인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도 만나 주시고 당시 유대인들이 상대도 하지 않던 이방인도 만나 주시고 삭개오나 간음한 여인이나 강도와 같은 죄인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28절)’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으니 아무런 차별이 없이 초청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시편 68편 1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원어로 ‘우리 짐을 지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등에 업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업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업고 가신다고 다윗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 업혀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님이 마루 밑에 앉아서 마루 위에 있는 우리보고 “어부바, 이리와 어부바.” 그러면 “엄마.” 하면서 우리가 업히는 어린 시절이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업혀, 자 업혀, 빨리 업히라니까.”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업히면 예수님은 우리와 짐을 한꺼번에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은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입니다.

2. 차별이 없는 소식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소식은 차별이 없습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악을 다 사하시고 병을 다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마음속에 좋은 꿈이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꿈이 없으면 마음대로 행하기 때문에 소식에 젊은 사람은 더구나 더 좋은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이 있으면 마음에 희망을 품은 꿈을 안고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태복음 9장 20절~21절)’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면 예수님 몸 안에 있는 치료가 자기에게 넘쳐올 것이라고 그는 꿈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마음에 심으면 마음에 꿈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좋은 것은 다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시킬 때라도 소원을 마음에 두고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소원을 꿈입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이고 꿈이 있는 사람은 꿈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되는데 하버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목표설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3%의 학생들만이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에 보니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3% 학생들의 수입이 목표가 없던 학생들보다도 10배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공학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씨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성공의 핵심 기술”이다.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는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3. 겨자씨만한 믿음

 어느 누구든지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성공할 수 있는 큰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우리가 할 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을 품고 마음에 기도하면 그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가 꿈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 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라는 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열 두 해 혈루병 앓은 여인은 뒤로 끼어 와서 예수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장애를 당해도 그것을 뚫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둘러 진치고 있는데 거기에 나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그러니 베드로가 “선생님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밀고 당기는데 한 두 사람만 손댔을까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니야, 손 댄 사람이 있다.” 이 여자는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 나가서 “제게 예수님의 능력이 들어왔습니다.”라고 고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두려워말라. 네 믿음이 네 병을 고쳤으니 평안히 가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은 무엇이라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꿈을 가졌다는 것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라는 그릇에 기도하면 믿음이란 자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장애물도 만나도 포기하지 않고 뚫고 나가서 행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 그 옷을 붙잡은 혈루병 여인도 똑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치료를 받은 것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접촉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 안 대어도 나을 것이지만, 믿었던 사람은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제 사차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장21절~22절)’ 정말 하나님께서 믿음에 대한 신뢰를 설명할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말씀을 예수님과 함께 역사해주시면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다른 사람에게 동냥하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내가 믿어야 됩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병 낫는 것도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장 38절~39절)’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정치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석공이 일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석공이 똑같은 돌맹이 자리에 백 번 정도 정으로 때립니다. 그러다 백 한 번째 때리니까 쫙 돌이 쪼개집니다. 그런데 돌을 두 조각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두들김 때문이 아니라, 한 번이 백번까지 되어서 백번의 망치질로 돌이 쪼개진 것입니다. 당장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포기해선 안 됩니다. 바로 응답되지 않아도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가 금이 가고 금이 가고 금이 가서 나중에는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고 계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꿈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꿈을 품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추위와 식량 부족, 질병과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등 많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꿈과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추수감사절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이라는 강대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역사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갑니다. 여러분도 꿈을 품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언제나 마음이 밝아야 되는 것입니다. 맑고 환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못 한다. 할 수 없다. 절망’이란 말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믿음으로써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꿈과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그 세계에 밝고 맑고 환한 미래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완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바라고 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항상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꿈꾸고 하나님과 함께 믿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나님과 함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았다고 하나님과 함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모른 척 하면 하나님이 떠나갑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와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거룩함과 성령 충만을 얻었고 예수님 상처받은 그 은덕으로 질병을 고침 받았고 건강을 얻었으며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저주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을 체험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얻은 사람이 됐습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심판나무인데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언제든지 따라오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상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조용기목사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8:25~27)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밤 호수를 건너는것은 굉장히 위험스럽고 답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 호수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뱃머리에 누우셔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강풍이 불어서 바다에 배가 침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니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살려주십시오.” 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니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향해 “고요하라.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람과 파도인데, 사람이 아닌데 인격을 가진 존재로 예수님이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시니 바람과 바다가 즉시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1. 바람과 바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바다와 풍랑이 크게 인 바다에 배를 타고 건너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타고 가시는 배는 바다를 건너가는데 훼방을 받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아도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밤바다에 배를 타고 건너가는 스트레스입니다. 며칠 전,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6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1명이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게다가 청소년의 스트레스가 해마다 급증하고 있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어른이든 젊은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날마다 불어 닥치는 스트레스의 풍랑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밤바다에 배를 타고 감으로 스트레스를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에서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파도에 몸부림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 그 배후에는 파도를 좌우시키는 사탄과 귀신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하고 놀라도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

 성경에 바람은 영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 중생한 사람, 또 보혜사 성령은 다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를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바다에 거대한 바람이 불어서 잠잠한 물이 파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마귀가 엄청난 일을 이루어놓으려고 작심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북한 김정은이 마귀에게 충동과 다스림을 받아 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3시에 교회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회를 여는데, 우리 당회장도, 우리 교회 예배를 이미 마친 성도들 다 그 곳에 가서 함께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파도가 이는 것은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서도 가슴속에 파도가 치는 것은 바람이 가슴에 불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의 악한 마귀, 더러운 마귀, 추악한 마귀, 연일 마귀들이 가슴에 불어 닥치면 가슴에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회도 조용한 곳에 마귀가 와서 파도를 치면 사회에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치고,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쟁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치가들이 마음에 바람을 받으면 가슴에 파도가 되어서 칩니다. 파도가 사회를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동남아로 비행기를 타고 가니까 굉장한 바람이 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는 곳마다 파도가 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파도가 그냥 치는 것 아닙니다.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인생에도 삶에 파도가 쳐야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파도가 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은 그 근원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마귀가 일으키는 바람이 파도치게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이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기를 원하는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이 공산주의, 독재주의에 바람을 받아서 파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절대로 마귀의 파도가 쳤는데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의 소문은 전쟁이라는 바람이 불어서 그런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 자체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꾸짖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어주시기 위해서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효과가 있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 일어나사 바람과 파도를 꾸짖었습니다. 바람은 마귀 바람인데, 마귀 바람이 예수님의 꾸중을 듣고 그치니까 파도가 그쳐버렸습니다. 마귀 바람을 우리가 항상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소리 없이 불어오는 안 보이는 바람을 항상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로 12절에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가라앉으면 바닷물은 잠잠해집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생 풍랑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 인생 풍랑은 크고 작은, 눈에 안 보이는 사탄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환경을 원망하지 말고, 사탄을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이 원수 귀신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대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항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4.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심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 대적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꾸짖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고, 마음이 왔다갔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마귀의 바람을 만나 풍랑이 일어난 개인과 가정과 생활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서 믿음의 행사를 해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인간적으로 발버둥치지 말고 믿음을 행사해서 믿음으로써 그 바람을 쳐라. 잠잠케 하라. 그러면 파도는 잠잠해진다.” 잠잠해지지 않는 파도를 사람의 힘으로써 잠잠케 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렵게 하는 시련과 환난을 꾸짖으시며, 제자들은 그 꾸짖음을 시행해주시는 하나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 한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바람만 부는 것이 아니라, 파도만 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같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파도와 대결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고 1장 6절로 7절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 말씀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은 믿음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그치는 신앙생활을, 주님께서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기를 대단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배에 들어오자 제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출신도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인간적인 방법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풍랑을 대결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결코 풍랑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깨워서 주님이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즉 즉시 잠잠케 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 집에 가보면 천장에 거미집이 많이 쳐저 있습니다. 거미가 줄을 많이 쳐 놓은 것인데, 빗자루로 쓸어도 얼마 안 있으면 또 거미줄이 쳐집니다. 청소를 하는데도 왜 거미줄이 다시 생기느냐? 이유를 물으면, 거미줄을 만들어 내는 거미를 잡지 않기 때문에 거미줄이 자꾸 쳐 진다는 것입니다. 왜 자꾸 문제가 생기느냐? 문제를 만드는 사탄을 쫓아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문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귀가 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 칠십 인의 제자, 주님의 제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을 하신 것은,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원이 되는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첨단 과학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미신 같은 소리를 한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귀신을 쫓으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사람을 그대로 가만히 두어 보내신 것이 없습니다. “너희도 귀신을 쫓아내라”고 주님께서 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만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에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또 칠십 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이 사회에 각각 흩어져 살면서도 바람을 잠재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람이 파도를 가져오는 거지요. 그 파도가 병도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는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가는 곳마다 쫓아내라. 여러분이 아멘을 안 하시는 걸 보니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에게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람을 제거하면 파도는 잠잠해진다. 병의 파도, 질병의 파도, 환난의 파도가 잠잠해진다. 그러므로 바람부터 잡아라.” 열두 제자에게도 말하고, 칠십 인의 제자에게도 “너희 두 사람씩, 두 사람씩 보내는 것은 서로 격려해가면서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어느 곳에 가든지 바람을 잠잠케 하라” 나중에 주님이 천국 가실 때는 믿는 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뭐라고 그랬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며’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주님은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잡이 귀신을 먼저 쫓아내고, 그 다음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장 18절)’ 바람이 잠잠해지면 전쟁의 위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고 바람잡이 일꾼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바람을 잠재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파도는 내버려놓으면 자기 스스로 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치지, 바람이 안 부는데 어떻게 파도가 치는 것입니까? 여러분께서도 예수님께서 바람을 잠재우고 파도를 조용하게 만드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여 부르시고 성령으로 마음에 예수님의 구원을 깨달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나고, 훌륭하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해주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을 따라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때, 마귀를 대적해야 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속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고, 성령 속에 권능이 있으므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왜 이렇게 파도가 많이 있느냐? 바람이 불지 않도록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분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붙잡아주고, 바람을 물리치면 파도가 잠잠해지고, 조용하고 고요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익하므로/이영훈목사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몬 1:10~12)

 오늘은 빌레몬서 1장 10절로 12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이제는 유익하므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그 삶이 변화되어서 축복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다음 주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그 삶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받는 사람으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그와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의 것을 훔쳐서 도망간 도둑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아주 훌륭한 주님의 일꾼이 된 이야기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1. 변화된 인생

먼저, 변화된 인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빌레몬서 1장 8절로 10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훌륭한 교회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간곡히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이 편지 내용에는 빌레몬의 종이였던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과, 또한 오네시모가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는 그러한 내용을 편지에 담아 보낸 것입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하고 주의 종으로 만든 제자와도 다름없는 훌륭한 동역자였는데, 사도 바울 위치에서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라.” 그런데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만은 간곡히 요청을 합니다. “내가 사랑으로서 간곡히 요청한다. 나도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들었고 지금 이 감옥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가 간청하니 잘 들어달라!” 이러한 내용을 담아 보냅니다.

 도대체 오네시모가 누구인가? 오네시모가 누구길래 사도 바울이 제자에게 간곡히 요청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집에서 일하던 노예입니다, 노예. 우리나라 옛날의 하인들이죠. 종이고 노비였습니다. 그런데 아마 빌레몬이 굉장히 부자였던가 봐요. 어느 날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살펴보았다가 주인의 물건을 도둑질해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어요.

 당시 노예가 주인의 것을 훔쳐 달아나다가 잡히면 큰 형벌을 당했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아주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고, 얼굴에 낙인을 찍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놓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했어요. 매를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안 붙잡히려고 도망을 가고, 멀리 멀리 멀리 로마까지 갔다가 거기서 사도 바울을 만나가지고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가 변화되었는지 사도 바울을 열심히 섬기는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가택 연금 상태의 그러한 그 제한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형이 확정되기 전에도 막 집어넣는데, 로마법이 우리나라 법보다 훨씬 더 앞서있는 것 같아요. 형이 확정될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로 거기서 있으면서 마음껏 사람도 만나고 거기서 복음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부분에 이러한 설명이 나옵니다. 30절, 31절에,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 표현은 그가 죄수로 끌려가서 형 확정되기 전까지 한곳에 머물러있으면서 마음껏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마는 밖으로 나가서 활동할 수는 없는 그런 연금 상태에 있었던 것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오네시모를 만납니다. 오네시모를 만나서 복음을 전할 때 오네시모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사도 바울을 옆에서 열심히 잘 섬기는지,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장 11절에 설명하기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렇게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오네시모란 이름이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종들에게 이름을 붙일 때, “너는 유익한 종이다” “쓸모 있는 종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네시모란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너는 오늘부터 이름이 ‘유익’이다”, “너는 내게 유익을 끼쳐야 된다”, “유익아. 유익아!” 이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은 오네시모인데, 유익한 자인데, 무익한 자가 되어서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가서 이렇게 멀리 멀리까지 간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이름 그대로 다시 유익한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네시모가 우리들의 옛 모습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 무익한 자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귀한 하나님의 존재로, 유익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해서 무익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입히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갈등하고 다투며 살아왔던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예수님 믿고 나서 삶이 변화되어서 다시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원래 지음받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유익한 존재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무익한 종이 유익한 종이 된 것을 갖다가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은 설명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예수님 믿고 나서 ‘내가,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폴 워셔 목사님께서 ‘복음(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우리와 그때에 우리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형벌을 생각하면, 복음의 위대함을 더욱 크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본성으로나 행위로나 영락없는 죄인이었다. 영원한 정죄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무기력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할렐루야!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7절, 18절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할렐루야!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 ‘나의 남은 여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이다’ 믿음의 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용서의 은혜

 둘째로, 용서의 은혜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1장 13절 14절은 설명합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오네시모를 다시 그 주인에게 보냅니다. ‘내가 당신의 물건을 훔쳐가지고 도망쳐왔던 당신의 노예인 종을 다시 돌려보내는데, 억지로 용서하지 말고 진정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네시모 같은, 도둑 같은 우리들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는 구원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을 믿고 반드시 오네시모와 같이 주님 앞에서 유익한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 무조건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돌을 들고 그 여인을 치려던 저들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 둘,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것이 주님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떡해서든지 뭔가 이렇게 파헤쳐서 죄가 나오면 그를 정죄하려고 합니다. 온 사방에 알려서 그를 심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의 법정에서는 사랑과 용서뿐인 것 입니다. 로마서 2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세상에 재판장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우리가 누가 거짓말한다고 그를 데려다가 재판장에 세워서 심판하고 벌을 준다면 우리도 언젠가 거짓말을 원치 않게 할 수 있고, 또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도 그 재판장에 설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까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용서하십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것이 예수님의 용서의 기준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주님이 용서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절대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고 말합니다. "절대 용서 못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용서 못해" 그래서 부모 자식 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고, 부부 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원수가 되어서 다투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온 세상이 싸움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정치하는 분들이 다 예수를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좀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싸우는 것 때문에 국민들이 마음이 아픕니다. 북한은 자꾸 쏘아올리고, 뭐 터뜨리고. 중국은 중국대로 막 밀고 들어오고, 일본은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완전히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정치인들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 같아요. 주여, 저들이 예수 잘 믿게 하여주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골로새서 3장 13절, 14절은 말씀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가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 찬송을 드립니다. 그 찬송의 그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 찬송 내용 속에 용서에 대한 부분이 이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 15절을 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용서를 하면 좋고, 안 하면 할 수 없고 그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기준을 만들지 말고, 예수님을 본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까지 용서하는 그 사랑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던 사람들을 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평안과 자유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상처가 왜 옵니까?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왜 자꾸 미움과 분노가 생각납니까?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함을 본받아서 무조건 용서해버리면 그 용서로 말미암아 내가 자유함을 받게 되고 기쁘고 즐겁고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모든 미움의 사슬을 다 풀어버리고 진정한 용서로 거듭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3. 사랑받는 형제의 삶

 세 번째로 사랑받는 형제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1장 16절,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오네시모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얼마나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가 변화된 모습에 감동되었던지, ‘전에는 네가 그 노예의 주인이었고 상관이었지만, 나 사도 바울이 너에게 간청하니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 옛날처럼 종으로 부리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동역자로 오네시모를 받아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4장 9절에 보니까,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얼마나 오네시모가 변화되었으면 이렇게 사도 바울을 감동시켰고 그리고, 이렇게 간곡하게 그의 제자와 다름없는 빌레몬에게 구구절절이 간청하고 또 간청하고 간청합니다. “전에는 너에게 노예였고 너의 하인이었고 너의 물건을 도둑질한 도망자였고 도둑놈이었지만, 다 용서하고 나를 대하는 것 같이 그를 동역자로 대해 달라.” 할렐루야!

 예수 믿고 이렇게 달라져야 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 오네시모가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어요. 우리의 삶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정말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빌레몬 재산을 훔쳐 도망갔잖아요. 그래서 또 갚아주겠다고까지 말합니다. 빌레몬 1장 18절에,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다 갚아 줄게.” 1장 20절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이렇게 간곡하게 “오네시모를 받아주면 내가 참 기쁘겠다. 간곡히 간곡히 부탁한다.” 사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서 아주 분노가 가득해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아껴줬더니 내 물건을 훔쳐 도망을 가? 그래? 어디 두고 보자.’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글쎄 이런 편지가 온 거예요. 오네시모가 그 멀리 로마까지 가서 예수 믿게 되고 자기 스승이신 사도 바울의 오른팔과 같이 일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어서 편지를 들려 보내면서, 이 편지를 갖고 가니까 나를 만난 것처럼 맞아주고 용서하고 형제처럼 대하라. 그래서 이 오네시모는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서 귀하게 쓰임받고 역사에 기록 가운데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결과요, 용서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네시모처럼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자식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9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모든 어둠이었을 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네시모처럼 새사람의 옷을 입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이웃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러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나서 날마다 날마다 달라져서 가족에게 사랑받고, 이웃에게 존경받고, 친구들에게 칭찬받는 그와 같은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만난 다음 달라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그의 주인 빌레몬도 예수 믿는 사람이고 주의 종이니까, 그 집에 찾아오는 크리스천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레몬 안에 있을 때는 그가 변화되지 못했어요.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도 한동안은 변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데도 집에 가면 옛 모습 그대로 소리 지르고 싸우고 미워하고 주일날 교회 와서는 “주여!” 한 번 하고 또 돌아가고, 이랬던 모습으로 살았던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 만나서 완전히 변화된 것 같이, 그러한 강력한 은혜의 체험을 우리가 반드시 해서 달라져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모습으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늘 원점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옛 사람의 모습은 이제는 다 내던져버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도 변화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을 오네시모를 변화시킨 사도 바울처럼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것도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변화시킨 것처럼 이제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까지도 변화시켜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서 남이 안 달라졌다고 남을 손가락질하는 일이 한사람도 없게 되길 바랍니다. 남을 얘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되어서 나를 만난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 못 하는 게 굉장히 스트레스가 될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요, 저희 반에 수학 선생님 아들이 있었는데 반에서도 늘 맨 아래 꼴지 근처에 왔다 갔다 해요. 선생님 아들인데 그 선생님이 늘 아들 때문에 막 속상해하고 하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성적이 안 나와요. 그래서 나중에 아이큐를 조사해 보니까 아이큐가 80인가밖에 안 나왔어요. 100은 넘어야 되는데, 그래가지고 남이 10분 공부할 것 3시간씩 하는데도 시험을 보면 성적이 별로 점수가 안 나와요. 그와 같았던 한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변화된 간증으로 오늘 말씀 마무리합니다.

 아시아 지역의 최고의 에이즈 전문가로 알려진 건국대 생명과학특성학과 조명환 교수님. 금호성결교회 장로님이신데요. 전 세계의 에이즈 예방과 퇴치에 앞장서는 세계적인 학자요, 사회운동가였지만, 늘 학창시절에는 반에서 꼴찌를 할 만큼 열등생입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늘 바닥이고 아무리 가르쳐줘도 늘 이해력이 늦어서 별명이 형광등입니다, 형광등. 깜빡 깜빡 깜박하는 형광등. 그런데 그 주위에 기도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모태신앙으로 자란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외할머니, 부모님, 또 한 분의 어머니가 계셨는데,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국제구호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세이브 더 칠드런’이라고 하는 단체를 통해서 자매결연을 맺어갖고 미국의 한 어머니가, 에드나 넬슨이라는 분이 매달 15달러, 15불을 보내면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God loves you, Trust his love. I pray for you.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 그의 사랑을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
그런데 그 미국 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지 104세 천국 갈 때까지 45년 동안 계속 매달 15불씩 보내준 거예요. 참 미국 사람들의 이 선교, 또 자선하는 모습은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격려가 그 어려울 때마다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갈 대학이 없어요. 그 성적을 가지고 어디도 갈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 지인인 건국대학교 교수님이 한 분 집에 오셔서 물었습니다. “너 대학 갈 때 되지 않았니?” “근데요, 갈 때가 됐는데 갈 데가 없어요.” “너 꿈이 뭐니?”  엉겁결에 그분이 교수니까, “교수요.” “아! 그러면, 우리학교 미생물공학과에 와라. 생물공학과가 미달됐다.”

 아! 그래가지고, 미달은 원서만 넣으면 붙어요. 그래서 여러분 자녀 때매 자녀들 중에 혹시 이렇게 성적 때매 스트레스 받는 학생 있으면 미달을 찾아서 보내시면 됩니다.
대학을 갔는데 어머니가 한 봉투를 주셔서 ‘야! 금일봉인가’하고 열어보았더니 편지가 들어있었어요. 성경 말씀이 들어있었어요. “야훼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그러면서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너에게 좋은 머리를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너의 머리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 주님이 네 안에 들어오게 하셔서 주님이 능력을 베푸시도록 해라. 주님을 네 인생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라!”

 열심히 열심히 공부를 해서 미국 유학을 갔는데, 처음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갔는데 일 년 만에 성적이 나빠서 쫓겨났어요. 그래가지고 다른 대학을 갈라고 다 원서를 내도 다 입학을 거절당합니다. 일 년 동안 공원 벤치에 앉아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미국 어머니 그 에드나 어머니가 매일같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God loves you. God loves you.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라’ 편지가 옵니다. 애리조나주립대학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다 그 거절하는데 한 명의 교수가 그를 받아줍니다. 에이즈를 연구했던 찰스 스털링 교순데, 당시는 에이즈라는 것을 잘 모를 땝니다. 사람들이 에이즈가 에이즈란 말이 처음 나왔을 그때에 이 스털링 교수 밑에 들어가서 참, 훌륭한 교수님을 만났어요. 이분이 잘 지도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건국대학교 교수가 됩니다.

 에이즈를 연구하지 않았을 때 제일 먼저 연구해서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이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이 되고 그리고, 개인과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가난한 나라의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돼서, 현재 8개국에서 2조원을 거둬들여 가지고 에이즈 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일 년에 에이즈 치료비가 2천에서 4천만원 정도의 약값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일 년에 2조씩을 모금해가지고 에이즈 환자를 도와주는데, 글쎄, 매달 15불씩 미국에서 지원받던 이 꼴찌였던 학생이 35세에 교수가 되고 지금은 매년 2조원을 거둬들여서 수많은 에이즈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많은 상도 받았어요.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내 인생 경로를 결정해본 적이 없어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머리가 나쁘니 하나님이 일일이 다 해주셨어요. 꼴찌에서 대학을 입학한 것부터 국제무대에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하게 되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하고 간 길이 아니었어요. 단 한 가지라도 당당히 내 힘으로 계획하고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 자랑할 게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하나님뿐입니다. 남은 인생 저의 기도는 ‘아버지, 감사합니다!’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무익하고 쓸모없었던 그러한 존재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복을 받아서 유익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이 머리 나쁘다고 구박하지 마세요. 다 부모가 물려준 거지, 왜 구박합니까? 그러니까 오늘 설교를 가서 전해주세요. 꼴찌한 애도 미달된 곳에 들어가서 교수가 되었다더라. 열심히 미달 학과 찾아보자. 기도 같이하고 격려하고 수능시험 좀 안 나와도 “그래, 괜찮아. 너 갈 데 많다.” 그래가지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한때 오네시모처럼 무익한 종이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남은 여생이 유익한 존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무익한 종과 같았던 오네시모가 변화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이영훈목사

온 땅이여 야훼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1~5)


 오늘은 시편 100편 1절로 5절 말씀 가지고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일생은 감사의 일생이 되어야만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니 예수 믿는 그날부터 하늘나라 갈 때까지 우리의 입에서는 넘치는 감사가 주님께 올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감사와 찬양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교회 직분을 받으면 더 받을수록 더 넘치는 감사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는데 그 삶에 감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 당해도, 환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 기뻐하시고 그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심해야 됩니다. “주님, 한평생 감사하며 살기 원합니다.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당해도 넘치는 감사로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1. 찬양과 감사

 첫째로, 우리의 일생 동안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될 것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시편 100편 1절과 2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온 땅이여 야훼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은혜의 찬송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아갈 때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이여 즐겁게 주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즐거운 소리로 찬양하라’는 이 표현의 원어 내용을 보면 환호를 지르며 기뻐 뛰고 즐거워하며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어저께 뉴스를 보니까 페루가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시합에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골이 들어갈 때마다 페루에서 지진이 측정되었대요. 그런데 그 시간을 보니까 골이 들어갈 때 “와!” 소리를 지르면서 막 온 국민이 난리를 하니까 그것이 진동이 와가지고 지진계에 잡혔다는 거예요.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아니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렇게 막 온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골 하나만 넣어도 그냥 지진계가 움직일 정도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우리가 한참 감사가 부족하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찬양과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 기뻐 받으시고 하늘의 문을 활짝 여시사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책인 시편 맨 마지막의 결론입니다. 시편 150편 6절에 말씀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호흡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망에 처했을 때 감사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문제가 변하여 응답과 축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에 넘치는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그 행위를 옳다 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감사하지 아니하면 그 행위가 옳은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모습을 가졌다고 하면 이 순간부터 바꾸어야 됩니다. 입만 열면 늘 남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부정적인 얘기만 쏟아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뭐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입술이 바뀌어 감사하는 입술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도 잘 풀리고, 건강도 좋아지고, 내가 하는 일에 정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고, 범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라고 하는 배를 타고 65일 간을 항해해서 미국 북동부 지역에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라는 지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 102명이 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이 102명을 기념해서 지은 빌딩이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입니다. 102층으로 되어있는데. 그해 겨울을 지나면서 마흔네 명이 추위로, 굶주림으로,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플리머스 지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를 지은 일이고 그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 일입니다.

 그리고 봄이 되어서 저들이 나가서 농사를 짓는데 대부분이 농사를 지어본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지어서 가을 첫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었는데, 그 수확이 그렇게 풍성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넘치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영국에 모든 자신들의 삶의 기본 재산을 다 내려놓고 왔는데, 전 재산을 다 영국에 내려놓고 온 것에 대해서 그들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또 65일 동안 배를 타고 오면서 고생했던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이 지나면서 마흔네 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해 동안 크게 고생해서 수확이 별로 많지 않은 것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서 넘치는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또 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날짐승이었던 칠면조를 잡아서 음식을 해서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3일 동안이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건립 정신입니다. 기독교 정신, 감사 정신. 할렐루야!

 이것이 북동부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지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1월 말쯤 되면 너도나도 모여서 감사하게 되었는데,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1843년,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전쟁 중에, 또 북군이 남군에게 막 밀려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을 때, 그런 고난 중에 감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감사하자. 진정한 감사는 고난 중에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 절기를 지켜오다가 1941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11월 넷째 목요일로 고정을 해서, 넷째 목요일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은 11월 넷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인데, 수, 목, 금, 토, 주일, 닷새를 추수감사절 절기로 지킵니다. 그때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 모여서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예배드리고 주 앞에 감사를 드리는 그러한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뼈아픈 남북 갈등에서 비롯된 미망인, 고아, 가까운 이를 잃어 슬퍼하는 자, 전쟁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과 상처 난 미국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추수감사절에 대한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에서의 감사절은 어두운 조선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세워진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비록 나라는 외세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지만, 기독교의 전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수확한 곡식과 열매로 인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하는 날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감사절은 어두운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복음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여러분, 진정한 감사는 고난 중에 드려진 감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어려움을 당하든지, 문제를 만나든지, 가족 중에 누가 아프든지,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많은 고난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둘째로,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시편 100편 3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우리의 한평생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신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 할렐루야! 시편 62편 7절입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나의 구원이 나의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반석이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 모든 만물과 구별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눈, 코, 입, 우리와 같은 그러한 형상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2장 7절에도 말씀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다음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 생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언어로 ‘루아흐’라고 하는데 이 루아흐라는 말은 영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숨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바람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생기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헬라말로 바뀔 때 ‘프뉴마’라고 합니다. 프뉴마. 우리 청년국에 프뉴마라고 하는 부서가 있는데요, 이 프뉴마라는 뜻이 이 루아흐라는 말이고 그 말이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생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지은 다음 ‘후’하고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고 계신 이용규 선교사님이 최근에 가정에 대한 책을 하나 쓰셨습니다. 제가 엊그제 그 책을 받아서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좀 펼쳐보았습니다. 보면서 그 선교사님의 진솔한 간증을 통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중에 그 학생 한사람과 상담을 하는데, 신앙이 들어갔는데 많은 고난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동생이 자살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열심히 주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데도 되는 일이 없이 다 집안일에 어려움만 다가오고 또 동생은 자살을 하고...’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려고 할 때, 그때에 선교사님이 질문을 한 가지 합니다. “너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냐?”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자기가 잘 살아보려고 했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많았던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내게 절망이고 아픔이고 상처고 슬픔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다 맡겼더라면 내가 이런 상처가 없었을 터인데... 다 하나님께 맡겼더라면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겼을 터인데... 그래서 그 자매가 말씀 듣고 다시 자신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냐?,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냐?’ 우리가 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멘은 잘하는데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게 많아요. 왜 상처를 받습니까?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상처를 받는 거예요. 내가 하려고 하니까 상처가 되는 거죠. 하나님께 다 맡겼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어요. 왜 분노합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뜻대로 안 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왜 다툽니까? 하나님이 문제를 다 해결해주실 것인데 내 뜻대로 하려고 그렇게 주장을 하다보니까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존귀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이후로 우리의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모습이 되어서 “다 맡깁니다. 내 문제도 맡기고, 내 가정도 맡기고, 내 자녀도 맡기고, 다 맡깁니다. 다 맡깁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늘 물어보세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충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 외에 돈도 필요하고, 높은 자리도 필요하고, 내가 나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자꾸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진다고 하면, 아직 나는 주님 보시기에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인데 순서가 바뀐 거예요. 내가 다 모든 것을 챙기고 나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 되기를 바랍니다.

 3.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하여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100편 4절 5절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흠이 많고 하나님은 흠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어냐?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본분인 것입니다. 시편 29편 1절로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야훼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야훼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야훼께 예배할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인하여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얼마나 문제가 많았던 사람인지 모릅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때로 남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던 적도 있습니다. 나의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적도 있고 남을 속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우린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어디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죄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택하고 구원하여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 받았는데도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40년 동안 먹이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까지 저들을 이끄셔서 여호수아와 그의 자손들이 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또 불평하고 또 원망하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해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다가 삼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 사 대째 가서 나눠집니다. 그래서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 때 북 왕국 이스라엘, 남 왕국 유다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또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니까 북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남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주전 586년에 망합니다. 망했는데도 하나님이 또 사랑하셔서 70년 만에 포로 생활 끝에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저들이 절망 가운데 살고 있을 때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저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주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첫째로는 유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로는 온 우주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그저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시편 106편 1절은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소아조로증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소아조로증. 남들보다 여덟 배가 빨리 자란답니다, 여덟 배. 여덟 배. 그러니까 한 살이 되면 여덟 살이 된 거에요. 그런데 홍원기라고 하는 이 학생은 지금 열두 살인데요, 107센티 14킬로그램, 그런데 신체 나이는 팔십 세. 이 소아조로증 때문에 그렇답니다. 평균수명이 십대 중반. 그래서 보통 십오 세에서 십칠 세 사이에 세상을 떠난답니다.
다섯 살 때 발달 속도가 더뎌 검사를 받았더니, “소아조로증입니다.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이면 사망합니다.”라고 하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신데도 너무 기가 막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아조로증이 대한민국에 한 명 있다는데, 어떻게 그 한 명이 하필이면 원기인지…. 아버지께 제 삶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많은 것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보통 아이처럼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불쌍한 우리 원기 도와주세요!”

 수없이 이유를 물었지만 답이 없으신 하나님. 사 년 뒤 미국 조로증연구센터에서  새로운 약이 나와서 임상 실험을 하는데 이 아이에게 실험해 보겠냐고 그래서 그 약을 받아왔는데, 너무 독해가지고 먹는 족족이 토하다가 결국 위벽이 헐어가지고 피를 쏟아내는 바람에 투약을 중단합니다. 병을 알게 된 원기는 이렇게 기도해서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엄마, 나 엄마보다 하늘나라 먼저 가는 거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 빨리 데려가지 마세요. 엄마랑 동생이랑 오래오래 살래요!’”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죽음 또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받아들이면서 온 가족이 ‘지금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자. 어차피 우리에게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오는데 이렇게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말고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자.’ 할렐루야! 아버님의 고백입니다.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원기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아내와 저는 원기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걱정만 했다는 것을, 원기의 그 예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 번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저한테 원기를 주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매일 슬퍼했을 텐데, 전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그래서 저한테 원기를 주셨다는 것을요.” 열두 살 생일 때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원기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준 아버지의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족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원기도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만나러 가요. 그건 하나님만 아세요. 그러니까 매일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면 되요.”
목사님이 쓴 책, 내 ‘새끼손가락 아들’이라는 책의 고백입니다. “한때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아들과 함께하는 그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원망과 분노는 사라져버렸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즐겁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니까. 온 힘을 다해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삶이 내게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자체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 있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절망을 바라보지 말고, 상처를 바라보지 말고, 아픔을 바라보지 말고 내가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남은 여생을 매일매일같이 감사하며 살리라.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리라.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다 죄덩어리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우린 늘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인 말을 쏟아놓으며 살았습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주옵소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부터 먼저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해서 감사의 언어를 쏟아놓을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이 달라져서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너무나 부정적인 이야기가 꽉 들어찬 우리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긍정의 고백이 바꾸게 하여주시옵소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아들을 두고도 매일매일 감사할 수 있는 그 큰 믿음의 모습을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게 하여주시고,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영훈목사 주일설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디도서 3장 4절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을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우리 기독교 신앙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데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 절망적인 존재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1.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이 같은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디도서는 먼저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3장 4절, 5절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어떤 노력과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보심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불쌍히 보심으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 원하고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봤으면’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에는 그 뭐든지 다 해줄 것처럼 그렇게 가까이 지내다가도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면 금방 등을 돌리고 원수처럼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늘 긍휼히 보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고 늘 상처받고 쓰러지는 우리를 불쌍하게 보시고 우리를 그 절망의 자리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주기를 원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은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할렐루야!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의 귀한 사역을 행하실 때에 주님께 나아오는 모든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다 불쌍히 여기셨어요. 하루는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게 된 맹인 바디매오를 만나게 됐습니다. 이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크게 외쳤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르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앞을 못보고 구걸하던 거지가 소리치니깐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꾸짖었어요. 마가복음 10장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더 크게 외쳤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가시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내게로 오게 하라.” 그리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 52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할렐루야! 저는 어릴 때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야, 만약 예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물으시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무조건 들어주셨으니까. 할렐루야!

 제가 미국에서 베데스다 대학교의 총장으로 학교를 섬기면서 이제 미국 정부로부터 학력 인가를 다 받아 정식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 목사님께서 “이제 거기서 일이 끝났으니 동경으로 가라.” 그래서 제가 이제 이삿짐을 싸고 한국에 와서 목사님께 “목사님! 명령 받들어서 제가 내일 동경으로 들어갑니다.” 목사님이 나를 가만 보시더니 “가서 교회 지어라.” 그래서 동경에 가보니 교회를 지을 상황이 아닌 것이, 그 이전에 있던 목사님이 교회 건축 헌금 다 모아놓던 것을 가지고 우리 조 목사님을 등지고 떠났어요. 그 당시 교회 재산이 30억 엔. 그러니까 300억이 넘는 재산을 갖고 떠났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지니까 공원에서 예배드리고 여기 옮겨 다니고 저기 옮겨 다니고 그렇게 8년을 옮겨 다녔어요.

 그런데 가서 교회를 지으려하니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 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도할 때 지금부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해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서 1년 내내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사마, 와타시오 아와렌데 쿠다사이” 계속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시간마다 얼마나 큰 은혜가 임하는지 성도들이 예배 때마다 그냥 설교 들으면서 그렇게 울어요. 그래서 지금도 동경교회에 가보면 이 장의자 위에 큰 크리넥스 티슈 박스가 두세 개 있는데 성도들이 그냥 와서 한참 말씀 듣고 울고 어떤 분은 크리넥스 박스 거의 반 이상 뽑아가서 다 쓰고, 그렇게 눈물의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매시간 시간 그렇게 막 은혜를 부어주어서 눈물이 쏟아내게 만들어주셨어요. 그 결과, 1년 반 후에 하나님께서 동경 한복판에 8층 건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은혜가 얼마가 감사한지. 한 2백억 되는 저 건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새 성전에 들어가서 우리가 기뻐 뛰고 즐거워하며 주님을 찬양했던 날이 기억이 됩니다. 여러분, 불쌍히 여김을 받으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업하러 오신 사장님 한 분이 계신데 일본에서 동경에서 크게 사업을 하시는데 전도를 해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어요. 평생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예수를 안 믿었었고 일본에 와서 그 지사에서 이제 사장으로 사업을 하시는데, 교회에 딱 이제 인도함을 받고 앉았는데 찬송도 모르겠고 말씀을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또 통성기도를 하는데 다들 기도하는데 무얼 기도해야 될지 모르겠더래요. 가만히 있어보니까 ‘목사님 기도나 따라 해야 되겠다.’ 그렇게 눈치를 보다가 제가 기도할 때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래서 자기도 그냥 따라했대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아, 그런데 어느 순간 성령이 임해가지고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와서 심방 와서 예배 봐달라고 해서 그 집에 갔더니 그 간증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도 받고 교회 나오게 되었는데 찬송도 모르고 말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는데,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 기도 따라하다가 은혜 받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그들이 ‘예수기도’라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드리고 있는데 그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 앞에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은혜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몸이 아플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 가정에 여러 가지 풍랑이 일어날 때, 사람 찾아다니지 마시고 속상해하지 마시고 분노하지 마시고 주님께 조용히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은혜

 이 같은 은혜를 늘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둘째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야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됩니다. 디도서 3장 6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예수님 믿고 난 다음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얼마나 예수님 믿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지 몰라요.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너무나 많은 상처가 내게 임합니다. 내 감정도 다 쏟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꾸 어그러지고, 하는 일도 잘 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문제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 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마는 그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지마는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모두가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도 저들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서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이와 같이 분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로 5절, 8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리라 아멘! 이 말씀을 붙잡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저들이 열흘 동안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때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저들이 성령 충만함 받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 수만 명이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다시 불붙듯이 일어나는 것이 그로부터 약 1700년이 지나서 영국의 성공회 신부였던 존 웨슬리로부터 성령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미국 조지아 주의 선교사로 갔었는데, 선교 사역을 실패하고 쫓겨났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어요. ‘내가 선교 사역을 실패하고 풍랑을 만나니 여기서 죽는가보다’ 했는데 어디서 찬송 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도대체 이런 풍랑 속에서 찬송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 가봤더니 그 당시에 성령파인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여서 찬송 부르고 통성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크게 감동을 받고, 영국에 돌아와서 그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 나도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야 되겠다.

 그래서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예배에 참석해가지고, 밤 8시 45분 불을 받았어요. 그가 성령의 불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53년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그의 제자인 플렛처가 그 웨슬리를 따라 같이 성령 운동 한 사람들을 모아 만든 교단이 감리교단입니다. 그래서 감리교단의 그 깃발은 십자가에 성령의 불이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감리교가 성령 운동 하는 교단인데 시간이 차차 지나가면서 냉랭해졌어요. 그래서 다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자 해서 시작한 운동이 성결 운동이고요. 성결운동이 점점 식어져갈 때 다시 우리가 성령으로 우리 심령을 부흥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자 해서 일어난 것이 20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 운동입니다.
 1901년 1월 1일 찰스 팔함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그곳에서 성령의 불이 떨어지고 방언하는 역사가 나타났고, 그의 제자인 윌리암 시무어 목사를 통해서 1902년 아주사 LA에서 큰 부흥의 역사가 3년 반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은혜받은 사람이 한국에 와서 순복음 성령의 복음 역사를 전하고 그래서 우리 순복음교회가 1958년 탄생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하버드대학교의 하비 콕스 교수는 1995년 『FIRE FROM HAEVEN』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불’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전 세계 성령 운동 역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11장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2009년에 『THE FUTURE OF FAITH』라고 하는 ‘우리 신앙의 미래’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니까 기독교 신앙의 미래는 오순절 성령 운동에 달려있다. 우리에게 21세기 기독교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복음의 증인되어 온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상속자의 삶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속자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린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디도서 3장 7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는 상속자가 되었어요.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자가 되어서 이젠 가슴을 당당히 펴고 이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때때로 고난이 다가옵니다.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은 설명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8장 3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늘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핍박하고,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121편 7절과 8절에는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야훼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야훼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렐루야!

 최근에 저희 교회에 북한에서 탈출해서 오신 분, 한 분이 계신데, 북한에 계실 때에 김일성 주석의 주치의를 하셨던 분이에요. 별로 안 놀라시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신처럼 섬깁니다. 그러니까 그 김일성의 주치의였다고 하면 다들 그냥 북한 사람이 까무러칠 정도로 그런 영광스러운 자립니다. 그런데 원래 외할아버님이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장로님으로서 저희 할아버님도 다니셨던 그 서문밖교회, 또 장대현교회, 신창리교회를 세울 때 크게 공헌한 분이신데 공산 정권이 들어가자 이 외할아버님을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을 해서 온몸이 그냥 성한 곳이, 한 곳도 성한 곳이 없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와서 얼마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공부를 많이 했던 인텔리였던 어머님은 탄광에 보냈어요.
글쎄 어머니가 비밀리 이 딸을, 어린 딸을 혁명가의 집안에 입양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 혁명가의 집안에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평양의과대학을 나오고. 그래서 김일성만수무강장수연구소에 책임 연구원이 되고 김일성 주치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북한 국경 지역에서 탈북 지도자를 감시하는 검역관 업무도 감당했는데 어느 날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 집을, 건물을 들어갔다가 빨간 책을 발견했는데 펼쳐보니까 성경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펼친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 6:5). 북한에서는 도망병을 노루라고 부르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성경에 노루 표현이 나온 것을 보고 놀랐는데 얼마 후에 남한에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수차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노루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붙잡고 외할아버지가 했던 기도, 엎드려 기도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해주세요!”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해주세요.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해주세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는 간증합니다.
“압록강 둑에서 9일간 노숙을 했을 때 제가 숨어 있던 바로 위쪽에서 경비견이 있었는데 발각되지 않게 하셨고, 중국에서 6개월간 살아남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하던 때도 위기의 순간에 피하게 하셨고,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 위기 직전에 기적처럼 한중 수교가 이뤄져 기사회생하여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1992년 8월, 마흔세 살의 나이로 남한으로 와서 친아버님을 만나고 그리고 2000년 현재 남편인 이원구 장로님을 만나 결혼하고 2002년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현재 한국행복미생물 공동대표로 일하고 계신데, 미국에 있을 때 순복음 교회에 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서 7월 달에 우리 교회에 와서 등록하고 예배 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합니다.

 “대성전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이었어요. 마치 내 몸이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내 입술에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제 삶의 목적이 180도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첫 느낌은 감사와 행복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안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쁨이 일어나고, 그 전만 해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 힘든 시간이 많았는데 이 문제도 해결을 받게 됐습니다. 요즘 매일 직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 모든 일과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김소연 박사에게 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당당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늘 성령이 충만하여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귀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고 행복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이었는데 웬 일인지, 웬 은혜인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렇게 복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남은 여생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복 있는 사람/이영훈목사

그러나 무릇 야훼를 의지하며 야훼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7~8)

 오늘은 예레미야서 17장 7절, 8절 말씀을 가지고 ‘복 있는 사람’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제목을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뿐인 인생을 삽니다. 두 번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가자’ 그래서 쾌락주의, 물질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한없이 비참하고 슬픈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언제 마지막이 다가와도 우리는 당당히 그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우리에게는 천국이 예비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하고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된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세 가지 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라

 첫째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7장 7절에 ‘그러나 무릇 야훼를 의지하며 야훼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훼를 의지하며 야훼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은 복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 어떤 높은 자리, 뭐 세상에서의 인기나 명예를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어느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지음받은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다 맡겨야 되요. 그게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고 의심하지 않고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비행기를 많이 타는데 한 번도 이 비행기가 떨어질까 하고 염려해보고 탄 적은 없습니다. 왜? 믿으니까. ‘조종사가 나를 원하는 목적지까지 잘 데려다 줄 것이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책도 읽고 또 뉴스도 보면서 그러고 갑니다.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렇게 믿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꾸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 그랬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염려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라” 그랬는데 걱정을 쌓아놓고 살고 있어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다 맡기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구원받아서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을 더 잘 섬겨야 되는 것이 당연한 그 신앙의 자세이고 그것이 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조금 편해지니까 그 지역에 가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7장 4절에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24시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둔 어머님은 밤에 잠을 못자요.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얼른 깨서 ‘우리 애기가 뭐 필요한가?’ ‘애가 배고프지 않은가?’ ‘또 기저귀에 응가하지 않았나?’ 모든 관심이 ‘어디 아프지 않나?’ 이 아이한테 있습니다. 그러나 24시간 깨어있을 수 없지요. 깜빡깜빡 잠을 자죠. 그런데 하나님은 24시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시편 121편 3, 4절에 “야훼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설명합니다.

 할렐루야! 너무나 피곤하면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일날도 잡니다. 주님이 ‘아이고, 얼마나 피곤하면 내 품에서 자냐. 나는 네가 졸고 자도 난 자지 않는다. 늘 깨어있다. 내가 너를 돌보고 너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할렐루야! 시편 37편 5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37편 3절에 “너의 가는 길을, 너의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라 그러면 내가 책임을 져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면 주님이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 길을 갈 때 매일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금요일 날만 이틀 치를 내려주셨어요. 왜? 다음 날이 안식일이니까. 40년 동안 만나가 그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그들을 책임지고 돌보시는 것같이 우리도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25편 1절에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시온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입니다. 그 산이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 왜?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 딱 우리를 붙들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의 그 사랑의 고백같이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됩니다.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하나님, 나의 생명보다 귀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전부가 되신 하나님, 나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 사랑의 팔에 품어주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사람을 찾아다니지 마세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요, 자기한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만 의지해야 됩니다.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시편 124편 8절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온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2. 물가에 심어진 나무의 복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축복이 무엇이냐? 물가에 심겨진 나무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8절에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편 3절에도 같은 내용으로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요, 뿌리를 깊이 내려서 물줄기에 닿아있기 때문에 가뭄이 와도 잎이 푸르청청하고 또 여름에 아주 태양 볕이 뜨거워가지고 다 시들어도 그 잎사귀만은 푸르청청하다는 것입니다. 이 잎사귀가 마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우리 신앙생활의 절개. 어떤 환란과 비난이 다가와도 늘 잎이 푸르청청하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문제와 어려움이 있으면 뒤로 뒷걸음질 치고, 어느 날 예배에 빠져서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면 시험에 들었다고 하고. 여러분, 시험 들었다고 교회를 빠지면 안 되고 그때 더 열심히 나와야 되요. 그것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아니에요.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환란이 다가와도 핍박이 다가와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가 물고 뜯어도,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나아가는 그러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은혜가 그 삶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푸르청청한 것과 같이 여러분의 믿음의 모습이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내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뿌리를 어디다가 내려야 되느냐? 나무가 물줄기에 내린 것처럼 우리 신앙의 뿌리를 이 말씀의 물줄기에 뿌리를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습니다. 얼마나 그 말씀이 은혜가 되는 지. 같은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어도 또 은혜가 되고 또 은혜가 되고 또 은혜가 되고. 할렐루야!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시편 1편 2절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는 사람이 복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요한복은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음으로 신성의 본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즉시 살아있는 능력과 접촉하는 자가 된다. 그 능력은 모든 것을 은혜로 변화시키며, 죽은 것들을 살리는 능력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이 역동적인 말씀을 믿을 때, 우리를 은혜에서 은혜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말씀으로 충만해서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늘 살아 움직이고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데,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뿌리를 말씀에 강가에, 성령의 생수의 강가에 깊이 내릴 때 날마다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설명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39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할렐루야! 주여, 내 배에서 생수의 성령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넘쳐나고 주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모든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물가에 심겨진 나무의 복을 받게 하여주옵소서. 사람에게 뿌리를 내리지 말고 인기 병에 뿌리를 내리지 말고 이 땅에 없어질 물질에 뿌리를 내리지 말고,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령에 뿌리를 내리면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할 것이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3. 열매 맺는 삶

 주님께서 주신 세 번째 축복은 열매 맺는 삶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물가에 심긴 나무에 복을 주시고 그 다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만들어주십니다. 예레미야 17장 8절에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열매 때문에 그 나무의 가치가 인정되고 그 존재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제가 어릴 때 저희 집 마당에 큰 포도나무가 있었는데요. 겨울철에 보면 포도나무처럼 볼품없는 나무가 없습니다. 이리저리 삐틀어져가지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불쏘시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의 위력이 언제 나타나느냐? 봄이 되서 싹이 돋고 잎이 푸릇푸릇 나고, 여름이 되어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면, 야! 참 먹음직한 포도구나. 그래서 그 포도나무가 열매 때문에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답게 많은 열매를 맺을 때 우리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열매를 맺지 않으니까 오히려 인간의 모습이 자꾸 나타나니까,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교회가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주여, 물가에 심긴 나무가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옵소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딱! 주님께 달라붙어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면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가 뿌리를 깊이 물줄기에 닿아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뿌리를 깊이 말씀에 담가놓고 있으면 주님의 은혜가 임해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는 신앙이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방송사에서 연말에 시상을 합니다. 연기대상, 신인상. 이런 시상을 하는데 생중계로 하기 때문에 꼭 그 나오는 탤런트나 배우들에게 얘기를 한답니다. “절대로 종교 얘기하지 마라. 절대로 종교 얘기하지 마라.” 그런데 보면 “하지 말라” 그래도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로 그날 상을 타게 되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래서 ‘야, 저 믿음 대단하다.’ 저렇게 발표하고 나면 또 핍박이 다가올 텐데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그 또 축구 골 넣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 “기도하지 마라!”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주여.” 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하는 거지요. 골을 넣었으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걸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서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 모습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는데,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그 열매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설명합니다.

 할렐루야! 많은 열매를 맺을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세상이 어둡고 들리는 소식이 늘 우리를 염려, 근심, 걱정하게 하는데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명령하십니다.

 할렐루야! 주여,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오고 문제가 다가와도 기뻐하게 하여주옵소서. 감사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여주옵소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예수 믿지 않게 하여주시고 주님 보시기에 주님 인정할 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모습으로 예수 믿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요한복음 15장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고 사람들이 그제야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저렇게 늘 웃고 열심히 일 잘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데 알고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네.” 이렇게 되어야 되요. “아,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신경질 내는데? 문제가 좀 있는데?” 열매를 안맺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면 성질도 못 부려요. 왜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걸핏하면 신경질이나 내시더라.’ 그런 말씀 성경책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까지 용서하는 사랑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예수님 닮은꼴이 되어야 됩니다. 말을 하더라도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 모습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 믿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져서 어릴 때 장애를 가진 것이 늘 마음에 절망이 되었다가 예수 믿고 달라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시는 장동호 교수님의 얘기를 소개합니다. 최근 2017년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셨는데요. 전주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이십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한쪽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서 늘 마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열등감과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자기 다리만 보는 것 같아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절망의 모습으로 살았는데,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왜 날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는가! 그런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절에 가서 백팔 배를 했는데, 아! 절의 보살이 자기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네 다리는 조상들의 업보의 결과이다. 너는 그 저주를 받아서 다리가 불편한 것이다.” 더 큰 상처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불구가 된 것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철학에 빠져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봤지만 마음에 상처와 절망만 깊어졌습니다. 폐렴까지 다가와서 ‘이젠 죽어야 되겠다.’ 자살하려고 생각했을 그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 덜 똑똑해서 자기 힘, 능력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슈바이처나 링컨같이 크리스천 중에 훌륭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믿을까?” 그래서 ‘죽기 전에 한 번 성경을 봐야 되겠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교회 나와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눈물 콧물 쏟으며 예수를 믿고 온 가족을 다 주님께로 인도하고. 할렐루야! 성경을 묵상하다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자기의 트라우마를, 자기의 열등의식을 치유해 치료함을 받았어요. 2절과 3절에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보고 열등감이 눈물로 녹아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로 자유를 누렸고, 이때에 비로소 제 인생의 슬픔, 흑암, 어두움이던 이 소아마비 다리가 영광의 다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장교수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통곡하고 울고 나서 “나 이제 주님의 영광 위해 살리라.”는 결심으로 일본에 유학을 갑니다. 1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전주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가 되었고 전주 지역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을 말씀을 통해서 교육하고 제자훈련하고 또 전도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2017년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하늘에서 내려와’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 소감입니다. “3개월 동안 대여섯 시간을 내리 서서 나무를 파내며 작업하다보니 손목 발목은 물론 몸 전체가 더 망가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멈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 모습으로, 또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같은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서 물가에 심긴 나무의 복을 받기만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이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축복받은 일생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죄덩어리였는데, 늘 열등의식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왔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존귀한 자라고 여기시고 택하시고 부르셔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내가 과거의 나의 절망적인 모습, 상처의 모습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내 앞에 펼쳐진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물가에 심긴 나무의 복을 받아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직 믿음으로/이영훈목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장 17절)

오늘 저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오직 믿음으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0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당시 가톨릭의 타락과 부패한 모습을 95개조의 항목에 적어서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붙였습니다. 그는 힘없고 보잘것없는 한 신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 종교개혁이 온 유럽을 휩쓸고 교회를 변화시켜서 기독교가 탄생되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 우리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의 모토가 된 말씀이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그는 복음과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의 의

 먼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에 처한 자를 건져내고, 그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평생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의 삶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순교하는 그날까지 이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의 삶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전해지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의 의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은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와 완전히 대조가 됩니다. 인간의 의는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의는 늘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그 의가 늘 바뀝니다. 내가 옳고 저 사람이 틀리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의를 휘두르면 많은 피해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공평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우리에게 펼치는 하나님의 의가 이 말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에 굳건히 서야 되는 것입니다.

시대를 따라 변하는 사람의 의에 서면 우리는 늘 그 변하는 시대 속에서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를 따라갔던 사람들은 결국 실패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조심해야 될 것은 어떠한 힘을 가진 자리에 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을 때,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옳고 나와 맞지 않으면 다 틀리다고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혼란과 어려움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펼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순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함으로썬 절대 의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것이 잘못되고 이것이 잘못됐다는 그 문제를 지적할 뿐이고 우리의 죄를 들춰낼 뿐이지, 율법을 우리가 행함으로 지켜서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 죄인이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의는 우리 모든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은 말씀합니다.“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의 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문제 있다고 지적하던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내려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끊임없는 다툼과 갈등을 일으킬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임할 때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 모든 갈등과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고백하고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믿음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의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 믿음의 손을 내밀어 그 의를 받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모두에게 값없이 주신 것인데 믿음의 손을 내밀지 않으면 그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밥상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있어도 내가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는 모두에게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그 구원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모두가 다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는 카톨릭의 신부입니다. 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민감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한 일도 많이 하고, 또 선임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신부에게 가서 자기의 죄를 고해성사하면 죄 사함 받는다고 하는 그러한 교리가 있어서 늘 신부를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했는데, 죄 같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와서 자꾸 와서 선임 신부한테 고해성사를 하니까 선임 신부가, “제발 죄 같은 죄 좀 가지고 와서 고해성사를 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늘 자기의 죄를 회개했는데, 양심이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늘 자기의 죄를 지적했어요. 그래서 그가 늘 마음의 양심과 싸우며 고통 가운데 지내다가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때 나는 수도사로서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로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할렐루야!

그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힘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된다는 그 놀라운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로마 교황이 거하는 성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기 위해서 저들이 모금을 하는데, 테첼이라고 하는 이 수도승이 다니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여러분이 헌금을 하면 여러분이 지은 죄, 여러분의 부모가 지은 죄까지 다 용서해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해서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종교개혁 5대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첫째가 ‘오직 믿음으로’, 둘째로 ‘오직 성경으로’, 셋째가 ‘오직 은혜로’, 넷째가 ‘오직 그리스도로’, 다섯 번째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립니다. 이 다섯 가지 주제의 기본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이 오직 성경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가 있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초점을 딱 예수님께 맞추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은 방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염려, 근심, 걱정이 들어오고 문제와 어려움을 바라보면 문제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만, 예수님을 바라볼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늘 흔들리는 내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 입니다. 로마서 9장 30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우리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닌 우리 이방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고, 우리 믿음이 진실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하면서도 내 삶이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된 믿음으로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하여 주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 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가 무엇을 확신하느냐? 주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주님의 때에 주님이 놀라운 일을 다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조급해요. 어떤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빨리 이루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참고 견디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이루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삶

 셋째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니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 하반절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완성이 아닙니다. 출발입니다. 그다음 믿음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선한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느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이름은 크리스천인데 그 삶이 크리스천답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할 때 하는 말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은 물에 빠지면 입만 뜬다’고 그래요. 늘 말만 앞서고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나서 우리가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우리가 믿고 난 다음 우리 믿음이 날마다 성장해야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믿음이 자라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믿음이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변화가 다가와서, 내 성격이 급하고 하루에도 열 번씩 화내던 모습이면 믿음의 사람은 열 번 화냈다가 아홉 번 내고, 여덟 번 내고, 일곱 번 내고, 여섯 번 내고, 나중엔 화를 내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셨을 때 그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역자가 저에게 축복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할렐루야! 60년대 70년대 가난하고 못살 땐 우리가 “복 주시옵소서!”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면서 우리가 보니까 그것이 다가 아니에요. 가지고 나니까 그다음 문제가 생겨나고, 너무 많이 가져가지고 그 집안에 불화가 생겨서 최근에 살인 사건도 나고. 이런 것을 보면서 아낌없이 나누고 또 나눈다면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믿음이 더 나아져야 합니다. 열매 맺는 믿음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절대로 과거 회귀형, 뒤로 돌아가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린 미래 지향형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구약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고 있을 때에 남 왕국 유다는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타락해서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저들이 우상숭배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그 어딜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죄와 불의가 가득했던 그때에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주신 말씀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세상 사람들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불의 속에 살지만 너희,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죄와 절망이 우리를 엄습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그 귀한 역사를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할렐루야! 성경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주여, 우리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떻게 우리가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기도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거 그거 가지고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한 주일의 시작이고 그때로부터 일주일 내내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일꾼들이 될 때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고 그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승려였다가 변화받아서 지금은 한국 교회를 보호하고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이정훈 교수를 소개 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불교에 빠져가지고 반야심경 해설서를 읽고 종교철학에 관심이 깊었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승려가 됩니다. 타락한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으로 개혁하고자 법철학을 연구하면서 좌파 법철학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는 없어져야 될, 말살되어야 될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에 들어가서 그다음, 군종 장교 군 법사로 임관하고 군대 내 포교를 위해 군 법당도 건축하고, 전역 후에는 학생이 되어 사회를 개혁하고자 환속한 후에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을 만듭니다.

2005년 종자연 출범 때부터 산파 역할을 감당하면서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사소송, 입법청원, 헌법소원심판청구, 진정, 신고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종교 편향 집단으로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고려은단이 그 큰 길에 세운 ‘Jesus loves you’라고 하는 그 간판도 내리게 하고, 대광고등학교에서 그 예배드리는 거 반대했던 학생을 뒤에서 지원하고 도와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하라고 하고 하는 이러한 일들에 앞장섰습니다.

더욱 여세를 몰아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기독교를 책을 보고 연구하면서 어떡하든지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그가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성경책도 많이 읽고 신학 서적도 많이 사서 읽고, 그런데 2007년 어느 날 너무 머리가 아파가지고 절에서 나와서 집에 와서 기독교 TV를 틀었는데,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설교하시던 중에,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그 말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죄인? 웃기고 있네. 너나 잘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혀가 꼬부라지면서 불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고꾸라졌습니다. 늘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앞장서고 기독교의 약점, 문제점만 들춰내서 폭로하던 그인데 기독교 TV 보다가 불을 받았어요. 여러분, 그래서 집에서 기독교 TV를 많이 봐야 됩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한국 사회를 위해 굉장히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의 의죠, 자기 의. 하나님 의가 아니라, 왜냐하면 한국 사회를 망치는 악의 근원이 교회라고 판단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대로 죽어도 항변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그냥 알아버렸어요.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몸의 구석구석, 세포까지 느껴졌습니다. 의롭다고 자만했던 저의 죄성이 낱낱이 보였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죄인을 살리신 창조주, 구세주가 확실히 믿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드라마틱한 변화인지 모릅니다. 승려로써 기독교 박멸 운동에 앞장섰던 그가 마치 사도 바울이 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 잡아넣는데 앞장서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 만나서 변화된 것처럼 그가 변화가 되었어요.

그래서 2008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울산대 교수로 그가 이제 교편을 잡으면서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살았던 그가 기독교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반미, 이슬람 미화, 동성애 옹호 세력이 연대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이때에 교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부합니다.

“지금은 순교신앙으로 무장해야 하며, 한 발짝도 물러서면 안 될 때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면 영국처럼 영적으로 황폐화되는 수준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부활 파워로 반전을 일으킬 때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면 믿음이 생겨나게 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삶의 운명이 이렇게 바꿔지는 것입니다. 가장 기독교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지금 가장 기독교를 보호하고 기독교를 지키는데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무장해서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한평생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까지 나의 의로 내 스스로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내 의가 살아서 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임해서 나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게 하여주시고, 전적으로 예수를 믿고 의지함으로 우리 주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가나안의 전쟁/조요기목사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상 17장 32∼37절)

 가나안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전쟁이 승패를 결정짓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살펴보면 블레셋 군대는 사기가 충천하여 이미 전쟁에 이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마치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의기양양함과 같은 그런 태도였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골리앗 장군을 앞세우고 나오는 블레셋 군대 앞에 모두 공포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어느 곳에 가서 몸을 숨겨야 할지 감당을 못하고 남녀노유 할 것 없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싸우겠다고 용감하게 나오는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 앞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을 할 때, 다윗이 담대하게 나왔습니다. 그는 나이가 겨우 17세, 18세 쯤 되는 목동인데 누가 봐도 골리앗 대장에게 상대가 되지 않은 목동이었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제일 처음 보고 저주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때 부엌에서 어머니가 밥을 짓는데 자꾸 개가 들락날락하고 귀찮으니까 지팡이를 가지고서 개를 때리고 나오면 개가 부엌에서 뛰어 나오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아마 이 블레셋 골리앗도 그런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나오니까 “내가 개인 줄 알고 지팡이 들고 나오느냐? 단칼에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2절로 44절에 보면 ‘그 블레셋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이 블레셋 군대 장군의 저주를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꾸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삼차원적인 저주를 한 골리앗에게 사차원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삼차원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에서 대답하고 행동하는 것인데 사차원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에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서 47절까지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1. 꿈의 싸움

 싸움은 꿈의 싸움인 것입니다. 적과 적이 서로 대립해서 마음에 꿈꿔보는 것입니다. 적이 어떤 상대인지 계산해보는 것인데, 골리앗은 쉬운 전장으로 생각했습니다. 부엌 지팡이에 얻어맞고 깽깽 소리하고 뛰어나오는 개 정도로 비해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부가 부엌 지팡이로 개를 때리듯이 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마음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꿈을 달리했습니다.

 골리앗을 보고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떼나 염소 떼의 새끼를 물고 가면 달려가서 빼앗는데 입에서 물고 흔들고 놓지 않으면 사자와 곰의 새끼와 손으로 잡고서 쳐서 죽이고 그 입에 물려고 한 양 새끼를 잡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곰과 사자도 내가 수염을 잡고 쳐서 죽였는데 이 곰과 사자보다 더하겠느냐? 이놈도 곰과 사자 중 하나처럼 되겠다고. 그는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꿈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과 소원에 넘치게 응답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땅의 물맷돌을 하나님은 미사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적을 대적해서 싸우기 위하여 건너가 적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면서 땅에서 돌멩이 다섯 개를 잡아넣었습니다. 그 돌멩이 한 사람은 돌멩이 하나면 될 것인데 다섯 개를 왜 집어넣었을까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다윗이 골리앗을 치러 갈 때 그 온 가족이 동원해서 나오면 모조리 다 때려잡으려고 다섯 개의 돌멩이를 포켓에 넣고 가는 것입니다. 돌멩이를 물맷돌에 넣어가지고서 돌리는 것입니다. 힘차게 돌려서 “휭~”하고 나가면 이게 어디 가서 맞을지 몰라요. 그러나 미사일처럼 정통으로 맞으면 감당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목동으로 일하면서 늘 연습 했기 때문에 그가 때리면 정통으로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가 골리앗 잡기 힘든 것은 골리앗이 철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수 있습니다. 머리에는 철갑모를 썼으니까 어디에 돌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팔다리에 돌이 맞는다고 효과가 있겠습니까? 오직 눈과 눈 사이에만 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까지 막아버리면 눈이 안 보이니까. 골리앗이 싸우러 나올 때 쓴 철모에 눈과 눈 사이 거기에 돌멩이 하나 들어갈 만한 여유가 있는데 다윗이 흔들어서 놓아버린 것은 그 눈과 눈 사이에 들어가서 때렸다 말이에요. 사람이 마음으로 일을 계획해도 일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돌멩이가 날아가더니 그 큰 짐승같은 골리앗이 벌떡 자빠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게 들어갔던지 그것이 뚫고 뼈를 부수고 뇌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못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것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8절에서 50절까지에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삼차원의 철, 쇠를 가지고한 무기를 손에 들고 싸우지 아니하고 그는 생각 속에서 가지고 있는 계획을 가지고서 친 것입니다. 

 2. 믿음의 승리

 대승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만저만한 승리가 아닙니다. 다윗이 가져온 대승리는 달아나고 숨던 이스라엘 군대들을 사기 백배하게 만든 것입니다.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 칼을 옆구리에서 빼내는 데만 진땀이 났습니다. 그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자,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드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습니다. 보통 전쟁에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대승리인 것입니다.

 승기 충천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사무엘상 17장 53잘과 54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고 말씀합니다. 군인들은 블레셋 군인들의 재산 소유물을 탈취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베가지고서 그를 끈으로 묶어서 어깨에 걸머지고 질질질질 끌면서 예루살렘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가서 예루살렘에 갖다놓고 다른 소유물들은 자기 목동의 소유 속 투구를 갖다놓는 곳에 함께 갖다놓은 것입니다. 과거에 경험한 꿈, 믿음의 경험은 현재 자기의 황금 같은 믿음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이 사자와 곰과 싸운 경험이 그 마음에 높고 깊은 담력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경험한 그 경험은 실제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문제에 부딪힐 때 굉장한 희망을 주고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7절에 ’또 다윗이 이르되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고 말씀합니다. 과거에 경험이 현재의 굉장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은 경험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굉장히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경험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이번 주에 한 성도님으로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분은 정밀검진 결과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지난 8월 22일에 제게 와서 안수기도를 받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달 후 수술을 할 때 검사를 해 보니 놀랍게도 암세포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이런 경우는 백 명 중 한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다.”고 말하면서 의아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들으면 참 기가 막히게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고.” 우리가 병을 이길 것을 꿈과 믿음을 가지면 이런 기적도 오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이렇게 믿으라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승리의 기록을 잘 읽고 마음에 깨달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옛날 기록으로 두지 말고 내 것으로 이것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담력을 가지고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세서 2장 13절로 15절에 보면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백전백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우리의 소유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달려서 예수님이 그 피를 흘려서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죄의 더러움을 다 청산하시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만들어 주시고 병을 다 멸하시고 채찍에 맞음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주시고 저주를 제하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고 죽은 자가 부활하고 영생을 얻게 해주시는 이 주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이루려 하심으로 우리가 이것을 가슴속에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죽음 내 죽음, 예수부활 내 부활, 예수승천 내 승천, 예수천국 내 천국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거두어야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이 이룩한 승리를 우리가 다 소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과 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에게 상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그가 돌로써 쳤지만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바라봄의 법칙을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꿈과 믿음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그것을 입으로 선언하면 성령은 그것을 이루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꿈과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꿈과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같이 계심으로 다윗과 같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명주시고 승리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서 전쟁가운데 승리할수 있는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기는 신앙 갖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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