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조용기목사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중략)…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장 1~18절)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외적인 자화상과 내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인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고, 내적인 자화상은 자기 속사람을 상상 속에서 살펴본 형상입니다.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데, 특히 내적인 자화상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무총리였던 윈스턴 처칠 경은“태도는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만드는 차이는 엄청나다. 즉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태도가 매우 중요한데, 이러한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자화상인 것입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밝고 적극적이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자화상과 삶의 자세

삶의 자화상과 자세를 우리가 살펴보면, 삶의 행동과 자화상은 외적인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기가 덮어쓰고 사는 물질적 자화상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깊은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잠언서 23장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내적인 자화상은, 외적인 자화상은 감각적인 존재를 지배하지만, 내적인 자화상은 삶을 지배합니다. 눈에 안 보이며, 생각에 떠오르는 자기의 내적인 모습이 자기의 삶의 배후의 조종자인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장 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3장 11절에‘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쫓겨나 양을 치며 살아가는 자기 모습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위축되어 소극적인 자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아무리 멋진 계획을 갖고 계셔도, “나는 못 해요, 나는 안 돼요, 나는 할 수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4차원의 영적 세계

4차원, 즉 안 보이는 세계는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시는 내적 세계입니다. 요한복음3장6절에‘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를 다스리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4차원적인 영입니다. 성령 4차원이 행동하는 것을 3차원적 물질세계는 알 수도 없고, 다스리지도 못 합니다. 요한복음3장3절과 4절에‘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14절에도‘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자세히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을 때, 그는 자기에게 대해서 사사기6장15절에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야훼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사사기6장12절에 말씀합니다. 기드온은 자기 자신을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큰 용사로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누구든지 큰 용사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보잘것없는 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맹인이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앞을 보지 못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대답과 전혀 달랐습니다. 요한복음9장3절에‘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셨던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앞을 보게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의 미래를 보셨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바꿔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바꾸어주실 것을 꿈 꿔야 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셀프토크(Self-Talk)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데, ‘셀프토크’란 것은 자기가 자기를 보고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신건강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온갖 부정적인 말을 자기 자신에게는 쉽게 내뱉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부정적인 말들은 마음과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셀프토크(Self-Talk)는 성경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으니, 우리는 새로운 자화상을 입술로 고백하고 살아야 됩니다.

3.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은 모두다 십자가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심으로 옛 사람은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과 사랑을 한 노래를 적은 것입니다. 교회를 여인으로 생각하고 솔로몬 남자는 예수님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외모가 그리 아름답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모습이 ‘게달의 장막같이 검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피부색이 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녀를 향해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이쁜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가 말합니다.‘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베드로전서 2장 9절)’ 시편 100편 3절에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마태복음 6장 25절로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바라봄의 법칙을 따라서 내가 존경하고 그대로 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항상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분의 인격을 본받으면 그 분의 자화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2장 26절에‘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 이영신 목사(광명성전 담임)

 종교개혁은 그 전후로 여러 징후가 있었지만,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의견서’를 내건 것을 시점으로 본다. 사실 ‘95개조 의견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일종의 항의문인 대자보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큰 이슈를 만들었고 독일을 넘어 전 유럽에 개혁을 일으킨 큰 사건이 되었다. 올해는 그로부터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로써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시행하며 ‘개혁’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맞춰 ‘개혁’이란 무엇인가 다신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개혁’의 사전적 의미는 제도나 기구, 조직 등을 새롭게 고치는 것을 말한다. ‘새롭게’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있다 보니 ‘개혁’하면 뭔가 급진적이고 변화적인 것이어만 하고, 기존의 것들은 다 문제가 있고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이 있는 곳에는 기존의 것을 계속 유지하려는 보수파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진보파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세계 종교 인구 분포인데, 기독교 인구 중 가톨릭 신자가 12억, 정교회가 약 5억, 개신교 인구는 4억에 불과하다. 가톨릭의 부패를 척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찾았다는 개신교가 주류가 되고 있지 못하며,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가톨릭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온고지신’이다.
 올바른 개혁은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 중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은 지키고 물려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 개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이것이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에도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며 잡아 죽이는 행위가 있었다. 종교전쟁이 가장 무섭다고, 영생에 대한 진리를 소유한 자가 승리하여야 하기에 매우 끔찍한 행위들을 망설이지 않고 행한 것이다. 이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나를 위해 싸우고 있구나 하면서 기뻐하셨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혁파들이 주장하듯 가톨릭이 마땅히 진멸당해야 했다면 지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새 창조는 ‘온고지신’의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없어질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꿔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옳기에 상대방은 무조건 틀리다는 극단적인 양분이 남북관계와 정치상황, 종교 및 사회에 만연한 것을 보면서, 진리를 회복하며 함께 공존하는 ‘온고지신’의 개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이영훈목사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야훼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사 48:12~15)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사야서 48장 12절로 15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을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받을 수 있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 체험할 수 있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고,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고,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신분이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늘 깨달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누가 부른다고 하는 것은 관심입니다, 관심. 대통령이 우리를 보자고 부른다면 우리는 굉장히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잘 단장하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오늘 본문 이사야48장 12절에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도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지명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나오게 된 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고 부르셔서 이곳에 나와 주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주님,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하나님 자녀 삼아 준 것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하면 할수록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불평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가라앉고 더 문제 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나의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사기꾼이었고 문제 많았던 그 옛 모습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변화받고 축복받은 모습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았습니다. 야곱의 뜻이 사기꾼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그래서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 동안 외삼촌 밑에서 일을 하면서 외삼촌이 그를 또 속이고 또 속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고난과 거짓과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얍복 강 나루터에서 깨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붙잡고 매달렸는데 날이 샐 즈음에 거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제대로 걷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내가 놓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천사를 붙잡고 놓지 않아서 “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하는 그러한 축복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 주님께 매달려서 절대로 그 손을 놓으면 안 됩니다. “주님, 응답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이 손을 놓지 않겠나이다.” “주님, 나를 복 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절대로 이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주님 앞에 매달리겠습니다.”

 우리는 늘 야곱과 이스라엘의 두 가지 모습에서 갈등합니다. 알게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탐욕이 올라옵니다.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올라옵니다. 섭섭함이 올라옵니다. 분명히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어서 자꾸 나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나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내가 옛 사람을 이기고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깨어지고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기주의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또 채찍질하시고 또 채찍질하셔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다음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1장 8절과 9절에는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서도 또 돌아서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탐욕을 가지고 우상숭배 하며 살았으니 얼마나 그들의 마음이 강퍅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붙드셔서 주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만세 전에 우리를 사랑으로 택하여서 부르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는데 예수 믿고 나서도 우리 삶을 뒤돌아보면 부끄러움 투성이입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탐욕이 있고 교만이 있고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불평이 가득 차서, 내 뜻대로 안 되면 이 사람과 부딪치고 저 사람과 부딪치며 살았던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흠 없고 부족함이 없고 거룩하게 우리를 만들어주시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도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날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그런데도 우린 또 뒷걸음쳐서 옛 모습으로 또 돌아가고 또 있다가 주님이 만들어놓으면 또 돌아가고. 주여! 다시는 이와 같은 반복적인 모습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성장하고 성장해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쓰임 받게 해주시옵소서!”  

2.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하나님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이 되어주셔서 우리 일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48장 12절은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처음이 되시고 마지막이 되십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다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이 태어나지만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라!” 부르시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워싱턴에서 목회할 때 보면 나이 많은 권사님들, 또 할아버님들, 안수집사님들이 많으셨습니다. ‘아, 저분들은 나이가 지금 70대 후반, 80대가 되시니 얼마 있지 않아 천국 가시겠구나.’ 했는데, 처음 장례식을 치른 분은 30대였고 그 다음에 20대 자매가 세상을 떠났고, 그분들은 제가 그 교회 사역을 마치고 한국 들어올 때까지 살아계셨습니다. 제가 20여 년 만에 워싱턴에 방문해보니까 아직도 살아계신 분이 계세요.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주님께서 주신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교만하고 불순종하고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습니다. 앗수르를 통하여서 그들을 때리시고 바벨론을 통하여서 그들을 때리셨습니다. 결국 주전 586년에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모든 지도자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 43장은 그때를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저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들을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이라” 그들은 바벨론을 대항할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8장 13절에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세계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처음이 되고 마지막이 되십니다. 이사야 41장 4절은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야훼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그니라.” 내가 그라고 하는 말씀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구원해낸 그 하나님이 바로 나니라. 너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너희를 구원해준 그 하나님이 바로 나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지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일생을 이끌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상처받고 분노하지만 주님은 그때도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우리를 또 새 사람으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셔서 또 세워주시고, 또 세워주시고, 또 세워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복음주의 목회자인 미국의 제라드 윌슨 목사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전 영역 중 그분의 것이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단 1제곱인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목적만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매일 아침 희망차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분명히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겐 염려가 다가오고 근심이 다가오고 걱정이 다가옵니다. 때때로 몸이 아프기도 합니다. 가까웠던 친척이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문제를 바라보고 질병을 바라보고 염려, 근심, 걱정하면 안 됩니다. 염려는 염려를 낳고 근심은 근심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나의 힘이 되신 우리 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우리 다 같이 함께합니다. 시편 18편 1절과 2절에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야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말씀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66권중에 가장 긴 책은 시편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150편으로 되어있는데, 시편 마지막 결론이 150편 6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고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그 동안에, 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입만 열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 갈 때에, 천국 갈 때 다 놓고 갑니다. 내가 입던 옷도 놓고 가고, 돈도 놓고 가고, 가족도 놓고 가고, 다 놓고 가는데, 이 세상 지위, 명예, 권세, 다 놓고 가는데 무엇을 가져가느냐? 찬양만은 갖고 갑니다. 우리가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찬양하다가 천국 가는 그 순간부터 영원토록 우리 주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지상에서는 음악에 재능을 부여받은 우리 찬양대,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찬양을 전담하지만 천국 가면 우리 모두가 찬양대가 되어서 다 같이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우리의 일생을 인도하시는, 처음이 되고 마지막 되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조용기목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략)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장 14~21절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망의 음부를 이기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한량없는 사랑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됩니다. 

1. 인류의 첫 조상, 아담

 우리는 아담의 탯줄로 연결되어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탯줄에 우리 탯줄이 연결되어서 생명의 피를 받아 인류의 하나하나가 태어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아담과 하와의 탯줄을 달고 태어난 우리들은 다 죄인인 것입니다.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탯줄, 더러움의 탯줄, 병의 탯줄, 저주의 탯줄, 사망의 탯줄입니다. 요사이 의사들은 이 탯줄을 이용해서 병도 고치고 생명도 오래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많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은 애초에 탯줄에 연결된 존재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로 19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2. 인류의 새 조상, 예수님

 인류의 조상을 아담이라고 말하는데 아담이 전체 인류조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새로운 조상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핏줄 속에서는 아담의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의사들의 설명에 의하면, 탯줄에 어린 아기와 어머니의 태 사이에는 특별한 구조가 되어 있어서 피가 안 통한답니다. 서로 대치되어서 어머니의 몸에 양분이 삼투되어서 들어오는 것이지 피를 통해서는 안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가치는 말로 할 수 없을만큼 그 효과가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한 사람 피가 십자가에서 온 지구의 끝에 사는 사람들까지라도 그 피의 대가로써 죄를 다 청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새로운 조상인 예수님의 탯줄이 우리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다 붙어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6절에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다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하나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빚은 갚아야 됩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천 4백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가계부채가 상승속도가 세계 2위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감당해야 할 빚 부담이 역대 최고인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가 없어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빚이라는 것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금전적인 빚보다 무서운 빚은 없습니다. 죄의 빚은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빚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지상에서 사역하셨는데 당신이 죽을 것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너무 고통스러우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순수한 죄인으로 취급으로 받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에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며 그 완성을 감격을 간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의 빚을 완전히 청산해주셨습니다. 죄를 우리 인간의 힘으로 갚으라고 말하면 어림도 없습니다. 의의 거룩함의 탯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의의 탯줄과 거룩하신 탯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 신앙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십에 하나 매를 제하고 때립니다. 장정이 회초리 끝에 쇠고랑이 달려있는 그 회초리를 휘둘러 때립니다. 사십대를 다 때리면 목숨을 잃습니다. 주님이 매를 맞을 때마다 세상 인류는병의 태를 꺾어 버리고 예수님의 생명의 태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망의 세력은 탯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태에 붙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탯줄도 우리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의 탯줄을 연결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복의 탯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탯줄에 연결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리 그런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항상 가난의식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탯줄에 연결된 우리가 가난한 거지가 될 수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나는 아브라함의 탯줄에 연결된 사람이니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그것을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주장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저주의 탯줄은 끊기고 축복의 탯줄에 연결되었는데 거기에는 축복이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는 고의적으로라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로 8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영원히 사는 탯줄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3. 두 인류의 자화상

 두 인류의 자화상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자화상은 영이 죽은 자화상인 것입니다. 무신론자요 인본주의자, 유물론자. 이것이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야훼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고 말씀하며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이 자연의 일들은 우리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를 믿어 영이 살아난 사람은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 신본주의자, 거듭난 자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이 살아난 사람과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확실히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우리가 생명이 일치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로 57절에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일치 했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원어 그대로 해석을 하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죽음의 고비를 많이 겪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경험하는 그 죽음은 실상은 그 죽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우리의 생명을 대신으로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은 체험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경험해봐야 하는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요, 예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예수 천당은 내 천당, 예수 영광은 내 영광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분리할래야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생명의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렸는데 그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욕하면서 죽었고 다른 사람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누가복음 23장42절에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전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성령이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좌편 강도, 우편 강도인데 왜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을 하고 협박을 하고 죽는데, 똑같은 다른 강도는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때가 오매 성령으로 우리 마음문을 열어서 구원을 받게 해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은 형언할 수 없이 귀한 복인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붙들어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시고 의로운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용서와 의로움을 받았고, 지금 거룩함을 받았고, 지금 치료함을 받았고, 지금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고, 지금 영생의 복을 받았습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서 이정훈(울산대 법학과)교수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좌파 법철학에 빠져 교회를 사회악으로 여기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분입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공립학교 내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고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을 강화시키며 교회 내의 투표소 설치를 반대하는 등 교회를 핍박하는 수많은 법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를 핍박하려는 목적으로 기독교 방송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혀가 굳어졌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흐르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그 순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바쳐서 모든 힘을 다해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십자가만 바라봐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한국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영이 살아나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자화상을 굳세게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폐병 3기에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 후 일생 동안 몸이 허약했는데 어지럽고 다리가 아프고 기침이 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온갖 병이라는 병은 다 갖고 있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서대문교회 시절에 설교하다가 쓰러졌는데 그때 이후로는 늘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떨리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제가 확실히 배운 것은 나의 새로운 정체성인 것입니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당했는데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어지럽고, 일어날 기운이 없을 때마다 나의 정체성을 생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고 참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사람이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요 영생 복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생명이 일치가 되었으니까 거기에서 탯줄이 붙어있습니다. 죄인은 죄의 탯줄에 붙어 있는데, 의인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의 탯줄에 4차원의 영성으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눈에는 안보여도 우리는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몸에 붙어 있다. 나는 병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사업과 생활을 하시는 분은 자꾸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주장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은혜의 탯줄에서 양분을 끌어들여야 됩니다. 그럼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구나 생각하고 실제적으로 내게 유익이 있다는 것은 잘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더불어 부활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음으로 예수 생명이 곧 내 생명이 됩니다. 예수의 의로움이 내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내 거룩함이 되고, 예수의 치료가 내 치료가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고,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내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주 안에 서라/이영훈목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1~4)

 오늘은 빌립보서 4장 1절로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주 안에 서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후 기독교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까지 내려가서 그곳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으러 내려갔던 사람입니다. 가는 도중에 강한 빛 가운데 오신 우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에서 고꾸라져 쓰러지면서, 얼마나 빛이 강했던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그는 그 놀라운 경험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는 예수님이 참 구세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인생에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의 종으로, 선교사로, 온 아시아와 로마제국을 세 번이나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신약 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 열세 권을 기록했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쓴 열세 권의 책을 가만히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 중의 하나가 ‘주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160회 이상 정도로 ‘주 안에서’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살아도 주님 안에 거할 때 모든 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감옥 밖에 있는 교회에,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신약 성경에 네 권 나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인데 이것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가보면, 4장 1절로 4절까지 네 구절 가운데 ‘주 안에서’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주 안에 굳건히 서라’라는 것입니다.

 1. 주 안에 굳건히 서라

 그 첫 번째가 ‘주 안에 굳건히 서라’라는 것입니다. 4장 1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영어성경 NIV에 보면, ‘주 안에 굳건히 서라’, ‘Stand firm in the Lord’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 굳건히 서라.’ 주님 안에 굳건히 서서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죄성을 입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주님 안에 서있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사람의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상처를 받고 무너지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내 힘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몸부림쳐보지마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죄에 끌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니다. 하루에도 열 번씩 화를 내는 사람이 절대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를 내고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고, 인간의 노력으로는 나의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의 은혜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싸워 승리하고 문제와 싸워 승리하고 나의 문제 있는 성격과 싸워 승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주님 안에 머물러있어서 나를 옭아매는 모든 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이 탐욕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도 같이 큰 어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내 몸 속에 있는 모든 이 죄성을 이겨야 되는데, 특별히 탐욕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진 연약하고 낮은 모습이지만 장차 주님 은혜 가운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은 설명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낮은 몸을 연약한 몸을 주님 은혜 가운데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 시민이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은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천국시민권자로 삽니다. 천국시민권자답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비록 내 육신은 죄가 많은 이 세상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 등록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 훗날 그곳에 갈 때까지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무너지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장인 고린도전서 15장 맨 마지막 절인 58절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믿음으로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말라! 자꾸 흔들리고 또 흔들려서 믿음이 엎치락뒤치락 제자리걸음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이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또 성장해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 안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만 믿고 바라보고 나아가는 강한 영적 군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안에 머물러있을 때에 주님을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함 받아서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이웃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 힘으로 할 때는 실패요, 좌절이요, 상처요, 절망이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것을 넉넉히 감당하고 주님 안에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안에 굳건히 서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주 안에서 하나 되라

 둘째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될 때, 하나님의 큰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은 권면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에 이 두 여성 지도자가 있는데, 여 집사님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충성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완전히 상극이에요. 맞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 분이 이런 주장을 하면 저 분은 반대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자꾸 갈등이 생기고 성도들이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편할 날이 없어요. 열심은 좋은데 그 열심을 갖고 서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또 그쪽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쪽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자꾸 부딪히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쉽게 오늘날로 비교해서 예를 들면, 교구에서 야외 예배 가자고 그러는데 "야외 갈 때 우리 도시락을 김밥으로 해 갑시다." 그러면 이쪽 편에서 "아이, 깁밥 차서 먹으면 언치니까 샌드위치 가져갑시다." 이런 식입니다. 뭐, 샌드위치 먹으나 김밥 먹으나 그것이 그것인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퍼지고 퍼져 저 멀리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좋은 소식이 들렸다면 참 좋은데, 좋지 않은 소식이 거기까지 가가지고 사도 바울의 마음에 그분들을 위해서 권면하고 기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유 집사, 순 집사! 좀 화해하고 지내라. 왜 자꾸 교회에서 다투고 그러느냐?” 성경에 칭찬받는 이름으로 나왔으면 좋을 텐데, 다투는 사람의 이름으로 나왔으니 아마 그 편지를 받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가 됐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왜 다투느냐?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기 때문에 다투는 것입니다. 그냥 서로 다르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성격이라는 것은 전 세계 70억 인구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인간을 기가 막히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손 지문이 같은 사람이 70억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없고, 성격이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비슷할 수는 있죠. 그러나 100퍼센트 하나가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강한 사람끼리 결혼해서 살면 평생 싸우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싸워요. 왜? 지지 않으니까. 어느 한쪽이 져야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져주세요. 져주세요. 그럼, 그날로부터 가정이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져야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느 쪽이 되었든지 간에 한 쪽이 져주면 가정은 화목하게 되는데, “내가 왜 져?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근데 교회는 더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서로 은혜 받으러 나와서 주님을 섬기는 곳인데, “내가 내 시간 드려, 내 물질 드려, 내 노력을 바쳐 열심히 충성하는데, 왜 내 뜻은 알아주지 않느냐?”고 “자꾸 이런 일 저런 일을 나에게 강요하느냐?”라고 주장하게 되면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됨을 이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먼저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 간에, 부모 자녀 간에 하나 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역이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구가 하나 되길 바랍니다. 온 성도가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가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내 마음으로는 절대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내가 가진 생각이 항상 옳으니까. 내가 경험한 것, 내가 생각한 것이 항상 옳으니까. 그러니까 늘 내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결정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내가 낮아져서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맞추라고 하면 늘 그것은 갈등이고, 충돌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제부터는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겸손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얘기할 때 구조나 체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바울은 도덕적 자질을 먼저 얘기한다. 그러면 어떤 도덕적 자질이 필요할까? 첫 번째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필요하다. 모든 불화 뒤에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심이나 존경받고 싶어 하는 허영심 때문에 공동체 안에 다툼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섬김, 예수님의 낮아짐은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과 6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용서하여주옵소서!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셨는데, 우리가 그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직도 내 주장만 하고 나만 옳다 그러고 늘 판단하고 정죄하고 교회 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로 3절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천국에는 분열과 갈등과 다툼이 없습니다. 하늘 교회에는 사랑의 하나 됨 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신학 학자 알렉 모티어 교수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교회에는 하늘과 같은 모습이 있으며, 하늘에는 분열이 없다. 지상의 교회는 이상적인 하늘의 교회 그대로 닮은 것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는 하나 됨을 고백하고, 땅에서는 하나 되지 못하는 가운데 사는 것은 구속받은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반대되는 것이다. 또한 내적 부조화가 있는 곳에서는 외적 패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전신갑주에 큰 약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교제권 안에 분열이라는 암이 있는지 항상 깨어 분별하며, 고쳐야 한다.

 할렐루야! 주여, 오늘 우리가 하나 되게 하여주옵소서. 가정이 하나 되고, 구역이 하나 되고, 교구가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서 하나 됨을 이루고 나아가서 주님 안에서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3. 주 안에서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4장 4절에 보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항상 기뻐하되 내가 다시 강조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과 결단을 의미합니다. 기뻐할 수 없어도, 지금 속상하고 다투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싶어도, 다 내려놓고 기뻐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명령형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 아주 기뻐하려고 몸부림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대로 살면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소리 지르고 싶다고 소리 지르고, 주먹질 하고 싶다고 주먹질을 하고, 그렇게 살다가는 인생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나의 옛 사람과 싸워야 합니다. 화를 내려고 하는 옛 사람과 싸워서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지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늘 자기감정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왕 예수를 믿을 바에야 인정받고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마음에 평안함을 유지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대인관계도 좋아지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잘되는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세상의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귀한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으며 살아가십시오. 세상이 주는 만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생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영원하고 주님이 주시는 만족함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신앙의 연조가 길게 쌓이면 쌓일수록 이와 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야 합니다. 날마다 더 기쁨이 많아지고, 감사가 많아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심과 헌신의 모습이 더 많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기쁘고 감사하고, 전도할 때 기쁘고 감사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릴 때 기쁘고 감사하고, 그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때 주님이 우리의 소원을 응답해주십니다. 시편 37절 4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넘치는 기쁨과 감사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놓습니다. 축복받은 삶으로 우리의 운명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를 드리면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고,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놀라운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주시는 그러한 축복을 참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늘 많은 문제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왜 난 이렇게 문제가 많고, 왜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늘 사람하고 부딪히고 갈등하는가?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 앞에서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게 샘솟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면 어떠한 문제도 절망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기쁨이 넘쳤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4절에,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여러분, 진짜 신앙의, 그분의 참 모습은 고난의 때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당할 때. 잘될 때는 다 누구나 그저 웃고 즐겁게 지내는데 어려움 겪을 때,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분이 참 믿음이 훌륭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지선 교수가 온몸이 불살라져가지고 불편한 몸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믿음으로 일어나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미국 가서 이제 박사 받고 와서 교수가 됐는데, 그와 똑같이 화상에서 일어나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최려나 자매가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 출신의 조선족 4세입니다.
2003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형 가스폭발 사고가 나면서 엄마를 잃고 본인은 95% 전신 3도 화상을 입습니다. 생존할 확률 3%라고 하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2년 동안은 걷지도 못하고 그리고 그 후에야 걷게 되었는데, 얼굴이 너무나 괴물처럼 변해가지고 온몸이 탔기 때문에 어디를 나가질 않았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이 거울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한 성형외과 원장님이 “내가 당신을 치료해주겠소.” 그래서 한국에 초청을 했습니다. 중국과 한국을 사십여 차례를 오가면서 이 피부이식수술을 계속하는데, 이때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서 사업하시는 장로님이 한국분인데, 성경책을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려나 자매를 사랑하시니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요.” 그러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저한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나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예전 모습으로 되게 해주신다면 그때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렇게 반항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성경을 읽다가 감동이 왔어요.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 이런 일을 주신 게 아닐까?”

 그때부터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변화된 나를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치웠던 거울도 다 다시 놓으라고 그러고, 거울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예전과 다른 내 모습에 속상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지금 이 모습의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예뻐 보였어요. 지금도 피부이식수술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쁜 모습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쁘다면 그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 생각해요.”

 한국에 와서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가 믿음의 전진을 해나갑니다. 포기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해서 중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또 대입검정고시를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다음, 이지선씨의 도움을 받아서 이화대학교에 지원을 하는데, 사고 10년만인 2013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합니다. 할렐루야! 현재 4학년 재학 중인데 화상 입은 사람들의 멘토로 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놀랍게도 지옥 같았던 마음은 천국이 되었고 입술에 감사의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희망과 긍정의 마음이 지금의 저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이제 받은 사랑만큼 베풀며 살아갈 거예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처럼 당당하고 밝게 잘 이겨낼 거예요. 저의 미래는 더 아름답고 활기찰 거예요. 저는 이 모습 그대로 행복해요. 그리고 오늘도 고백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그를 믿음으로 이끌어준 훌륭한 이지선 교수가 있었고, 또 그에게 성경책을 전해 준 장로님이 계셨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서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 귀한 일꾼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서 한마음이 되어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믿음으로 나갈 때 주님의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넘쳐날 때, 하나님의 큰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권면하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하나 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넘치는 기쁨으로 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고 받은 복이 너무나 많고 은혜가 너무나 많은데,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늘 남과 비교하고 남을 판단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흔들리고 분노하며 살았던 저희들의 모습을 용서하여주시고, 오늘 말씀 그대로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서 하나 됨을 이루고 항상 기뻐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주를 사모하나이다/이영훈목사

야훼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사 26:8-9]

오늘은 이사야 26장 8절과 9절 말씀을 가지고 “주를 사모하나이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를 사모하나이다” “주를 사모하나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로부터 출발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아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로,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되어있었는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해서 죄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서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지은 인간을 우리 하나님이 다시 용서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달려 우리 모든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시키심으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우리는 주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1.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26장 8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훼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기를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렸다고 말씀합니다. 또 다른 성경의 번역을 보니까 주님의 말씀의 길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깨어있어서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언제나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그러한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절대로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의 복을 더하여주시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허물을 보고 늘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 순수한 그 사랑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8절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가 우리의 행함을 통하여서 우리의 선한 일, 우리가 남을 돕고 구제하고 하는 이 일을 통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짓고 불의하고 허물 많음에도 불구하고 늘 회개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을 향한 순수한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나왔더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죄짓고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야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야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죄지은 것을 알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에 아담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 제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회개했더라면 성경책을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내가 너한테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제 배필로 주신 저 하와가 먹어라 해서 먹었습니다.” 이 남자가 이때 큰 잘못을 한 거예요. 우리 최자실 목사님 말씀대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등을 쳐서 토해내게 하고서는 “먹었으나 제가 토하게 했습니다.” 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터인데, 죄짓고 나서 남에게 핑계를 댑니다. “저 사람 때문에.” 하와는 또 “뱀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빨리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늘 우리는 주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생각으로 죄를 짓고 말로도 죄를 짓고 행동으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내 삶의 모습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하게 쓰임 받은 큰 믿음의 사람이요,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잘될 때 왕이 되어서 전쟁에 나가 백전백승할 때 나태해졌습니다. 사람이 잘될 때 조심해야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 앞에서 나와서 부르짖고 매달리는데, 잘될 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너무 잘되고 계속 출세 길을 달려와서 그냥 어느 정점에 이르게 되면 교만해지고 나태해지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그가 전쟁에 나가지도 않고 왕궁에서 늦잠 자다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죄를 지적했습니다. “당신이 그 죄인이오.” 그때 다윗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을 했습니다. 왕이 “당신 죄지었다!”고 할 때 “건방지게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냐?”고 “감옥에 잡아넣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그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2장 13절을 보니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야훼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야훼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그가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 그가 많은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다윗의 일생 동안 그 한 번의 실수 외에는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심판하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시고, 빨리 회개하고 돌아 나와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요한1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신속히 회개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큰 은혜를 누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 보스턴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회개를 일으키시는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이다. 주님은 영혼에 말씀을 깨우쳐주시어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말씀의 계명은 매우 방대하고 신령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거울이다. 죄인은 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더러운 얼굴과 죄와 부패한 본성과 회개해야 할 행위를 깨닫는다. 말씀의 경고는 죄에 안주한 영혼을 붙잡고 흔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죄악의 잠에서 놀라 깨어나게 만든다!
 아멘! 죄를 지었을 때 신속히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 나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둘째로, 우리는 한평생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내 삶에 첫째도 하나님, 둘째도 하나님, 마지막도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이사야 26장 8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형제들끼리도요. 부모가 유산을 많이 물려주면 싸우고 원수가 되더라고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같이 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물질 때문에 원수가 되요. 왜? 내 것을 더 가지려고 하다보니까.

 늘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내 것, 내 명예, 내 인기, 내 위치. 늘 이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서 많은 마음의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입고 가족 간에도 문제가 생겨나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나를 지으시고 나를 택하여 구원하시고 나의 일생을 인도하실 우리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장 7절, 8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할렐루야!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모습을 통하여, 내 삶을 통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완성해야 됩니다. 십자가 사랑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율법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십자가의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십자가의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는 마태복음 22장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삽자가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늘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수평적인 관계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루어야 될 십자가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될 때는, 자녀들이 잘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승진되고 할 때는 별 문제가 없는데, 때때로 고난이 다가옵니다. 문제가 다가옵니다. 이때에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6장 9절에,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밤에 내 영혼이 더욱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일 당할 때, 내가 상처입고 짓밟히고 문제를 당했을 때, 내가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만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의 밤을 지날 때 그때도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 길을 갈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19절, 20절은 설명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또 바위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게 하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함께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에 ‘주님이 나를 멀리 떠나셨는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멀리 떠난 것입니다. 주님은 늘 곁에 계십니다. 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고난의 때에 여러분을 붙들어주시고, 안아주시고, 업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67절의 고백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로마서 5장 3절, 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렐루야!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님. 북한에서 31개월 동안 붙잡혀서 중노동을 한 목사님입니다. 토론토 큰빛교회가 북한 선교를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희생을 했어요. 목사님이 북한에 150번 이상을 갔고 교회에서 지원한 금액만 해도 천팔백만 불이 넘는다고 그럽니다. 엄청나게 많이 북한을 도우시고 그 식량 지원, 농업 개발, 의료, 수산업 지원, 육아원, 애육원을 통해서 고아 일만 명을 돌보고, 양로원 세 곳을 지원하고, 교육 사업으로는 북한 최고 영어 교육기관인 평양교원학습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2015년 1월,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국가 전복 음모 혐의로 붙잡혀서 무기노동교화형, 종신,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죽는 그런 최고형에 그가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그가 한 말이 북한 당국에 전해져서 최고 존엄을 모독한 국가의 반역자다 그래가지고 이 감옥에 들어가서 24시간 365일 감시 카메라와 감시하는 인원만 4~50명이 있는 곳에서 하루 여덟 시간씩 중노동을 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150번 넘게 이렇게 북한에 와서 이렇게 돕고 저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했는데 나를 이렇게 할 수가 있나.’ 너무나 처음엔 억울하고 원통하고 섭섭해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이들을 도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저에게 다가왔습니까. 저를 언제까지 여기에 두실 것입니까.’ 눈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

 하박국 2장 3절 말씀 붙잡고 하나님께 맡기며 매일같이 독방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늘 주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주일날에는 혼자서 일곱 여덟 시간씩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마음을 바꿔가지고 2017년 8월 9일 석방이 되었습니다. 미국하고 북한이 가장 갈등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이렇게 목사님을 풀어줬는데,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작사한 ‘꽃이 피는 봄날에만’(541장)을 늘 찬양했는데,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라는 구절이 큰 힘이 되었고, 고난은 변장된 축복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정말 하나님을 위한 극상품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괴롭혔던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용서하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연단시키기 위해 사용하신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6개월 9일 동안 받았던 고난의 삶은 제가 캐나다에 가서 30년 동안 목회했던 생활보다 더 값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북한에서 이분이 올 때마다 대환영을 하고, 목사님께서 갈 때마다 엄청난 지원을 하고. 천팔백만 불이면 약 이백억 넘는 지원을 갖다 한 거예요. 그 교회에서 정말 북한을 많이 도왔는데 북한의 지도자를 욕보였다고, 그것도 목사로서 바른말을 한 것인데 북한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감옥에 집어넣고 중노동을 시키고 결국 풀어주었지만은, 그 목사님이 당한 고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 이 고난이 끝나는지...’ 육체적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늘 기도하고 찬송했더니, ‘그 감옥에서 있었던 31개월 기간이 삼십 년 목회했을 때 보다 더 영적으로 큰 축복이었다.’ 참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목사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문제를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이 목사님같이 믿음을 더 굳건히 해서 주님을 더 믿고 의지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더 깊은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셋째로,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사기 26장 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어떻게 보면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세상 같아요. 저 사람은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하는데도 전혀 어려운 일 없이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 같고, 순수하게 예수 잘 믿는 우리들은 사기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고. “하나님, 뭔가 잘못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26장 16절을 보니까,
야훼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6절에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야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상급 심판이고, 예수님 믿지 않고 죄짓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형벌 심판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한 모든 일들이 쫙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상급 심판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잘못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주님을 위해서 노력한 그 아름다운 행위들을 다 기억하셔서 상급을 주시고, 악인은 섰을 때 평생 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잘못했던 모든 일을 쫙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신 후에 그를 심판해서 영원한 불 못, 지옥에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운 일 당한다고, 문제를 만났다고 상처받고 낙심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뭐냐?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내 생각을 바꿔놓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훨씬 더 위대하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뭐 잠깐 누가 잘되는 것 같아도요, 악인들이 잘되는 것은 제가 설명했잖아요. 잡초가 자라는 것 같아요. 잡초는요, 뭐 거름을 안 주고 그래도 잘 자라요. 그러나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베어서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여러분, 속상해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결국 잡초처럼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 일생을 인도해주십니다. 이사야 27장 3절 4절입니다.
나 야훼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우리를 포도원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노하지 않으신답니다. 노하지 않으신대요.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밟아버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괜히 앞장서서 심판자가 된다고 악을 멸한다고 해서 상처받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찬양과 감사로 나아가는 주님의 일꾼들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염려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나를 도우시고 함께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22절로 24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야훼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야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야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우리가 때때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쓰러져있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일으켜 세워주시고 우리를 부축해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갈 힘이 없으면 우리를 안고 가시던지 업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낙심하지 마시고, 슬퍼하지 마시고, 환란과 고난을 당할 때 마음에 상처받고 괴로워하지 마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내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나이다.” 한평생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해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늘 연약합니다. 늘 부서지고 넘어지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 그럴 때마다 우리를 쓰다듬어주시고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붙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 한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조용기목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략)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장 14~21절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망의 음부를 이기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한량없는 사랑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됩니다. 

1. 인류의 첫 조상, 아담

 우리는 아담의 탯줄로 연결되어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탯줄에 우리 탯줄이 연결되어서 생명의 피를 받아 인류의 하나하나가 태어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아담과 하와의 탯줄을 달고 태어난 우리들은 다 죄인인 것입니다.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탯줄, 더러움의 탯줄, 병의 탯줄, 저주의 탯줄, 사망의 탯줄입니다. 요사이 의사들은 이 탯줄을 이용해서 병도 고치고 생명도 오래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많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은 애초에 탯줄에 연결된 존재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로 19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2. 인류의 새 조상, 예수님

 인류의 조상을 아담이라고 말하는데 아담이 전체 인류조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새로운 조상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핏줄 속에서는 아담의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의사들의 설명에 의하면, 탯줄에 어린 아기와 어머니의 태 사이에는 특별한 구조가 되어 있어서 피가 안 통한답니다. 서로 대치되어서 어머니의 몸에 양분이 삼투되어서 들어오는 것이지 피를 통해서는 안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가치는 말로 할 수 없을만큼 그 효과가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한 사람 피가 십자가에서 온 지구의 끝에 사는 사람들까지라도 그 피의 대가로써 죄를 다 청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새로운 조상인 예수님의 탯줄이 우리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다 붙어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6절에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다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하나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빚은 갚아야 됩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천 4백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가계부채가 상승속도가 세계 2위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감당해야 할 빚 부담이 역대 최고인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가 없어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빚이라는 것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금전적인 빚보다 무서운 빚은 없습니다. 죄의 빚은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빚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지상에서 사역하셨는데 당신이 죽을 것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너무 고통스러우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순수한 죄인으로 취급으로 받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에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며 그 완성을 감격을 간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의 빚을 완전히 청산해주셨습니다. 죄를 우리 인간의 힘으로 갚으라고 말하면 어림도 없습니다. 의의 거룩함의 탯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의의 탯줄과 거룩하신 탯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 신앙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십에 하나 매를 제하고 때립니다. 장정이 회초리 끝에 쇠고랑이 달려있는 그 회초리를 휘둘러 때립니다. 사십대를 다 때리면 목숨을 잃습니다. 주님이 매를 맞을 때마다 세상 인류는병의 태를 꺾어 버리고 예수님의 생명의 태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망의 세력은 탯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태에 붙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탯줄도 우리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의 탯줄을 연결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복의 탯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탯줄에 연결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리 그런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항상 가난의식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탯줄에 연결된 우리가 가난한 거지가 될 수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나는 아브라함의 탯줄에 연결된 사람이니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그것을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주장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저주의 탯줄은 끊기고 축복의 탯줄에 연결되었는데 거기에는 축복이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는 고의적으로라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로 8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영원히 사는 탯줄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3. 두 인류의 자화상

 두 인류의 자화상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자화상은 영이 죽은 자화상인 것입니다. 무신론자요 인본주의자, 유물론자. 이것이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야훼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고 말씀하며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이 자연의 일들은 우리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를 믿어 영이 살아난 사람은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 신본주의자, 거듭난 자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이 살아난 사람과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확실히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우리가 생명이 일치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로 57절에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일치 했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원어 그대로 해석을 하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죽음의 고비를 많이 겪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경험하는 그 죽음은 실상은 그 죽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우리의 생명을 대신으로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은 체험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경험해봐야 하는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요, 예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예수 천당은 내 천당, 예수 영광은 내 영광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분리할래야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생명의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렸는데 그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욕하면서 죽었고 다른 사람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누가복음 23장42절에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전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성령이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좌편 강도, 우편 강도인데 왜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을 하고 협박을 하고 죽는데, 똑같은 다른 강도는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때가 오매 성령으로 우리 마음문을 열어서 구원을 받게 해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은 형언할 수 없이 귀한 복인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붙들어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시고 의로운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용서와 의로움을 받았고, 지금 거룩함을 받았고, 지금 치료함을 받았고, 지금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고, 지금 영생의 복을 받았습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서 이정훈(울산대 법학과)교수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좌파 법철학에 빠져 교회를 사회악으로 여기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분입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공립학교 내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고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을 강화시키며 교회 내의 투표소 설치를 반대하는 등 교회를 핍박하는 수많은 법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를 핍박하려는 목적으로 기독교 방송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혀가 굳어졌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흐르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그 순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바쳐서 모든 힘을 다해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십자가만 바라봐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한국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영이 살아나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자화상을 굳세게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폐병 3기에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 후 일생 동안 몸이 허약했는데 어지럽고 다리가 아프고 기침이 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온갖 병이라는 병은 다 갖고 있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서대문교회 시절에 설교하다가 쓰러졌는데 그때 이후로는 늘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떨리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제가 확실히 배운 것은 나의 새로운 정체성인 것입니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당했는데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어지럽고, 일어날 기운이 없을 때마다 나의 정체성을 생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고 참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사람이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요 영생 복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생명이 일치가 되었으니까 거기에서 탯줄이 붙어있습니다. 죄인은 죄의 탯줄에 붙어 있는데, 의인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의 탯줄에 4차원의 영성으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눈에는 안보여도 우리는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몸에 붙어 있다. 나는 병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사업과 생활을 하시는 분은 자꾸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주장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은혜의 탯줄에서 양분을 끌어들여야 됩니다. 그럼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구나 생각하고 실제적으로 내게 유익이 있다는 것은 잘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더불어 부활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음으로 예수 생명이 곧 내 생명이 됩니다. 예수의 의로움이 내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내 거룩함이 되고, 예수의 치료가 내 치료가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고,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내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배후의 힘/조용기목사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출애굽기 17장 8~13절)

 시골의 담벼락도 장구하려면 배후에 버팀목을 세워야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우리가 든든하게 서서 살기 위해서는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행하던 중 아말렉이라는 가나안 족속에게 공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에 여호수아라는 군대가 군대장이 군인을 끌고 가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는 그 전쟁터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여호수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나가서 접전이 벌어졌는데, 모세가 그 장면을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손을 들어 기도 하면 아말렉이 수적으로도 월등하고 잘 부양된 군인들인데도 패배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계속 팔을 들고 있으니깐 다리가 아파서, 팔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여서 그만 팔을 내립니다. 그러면 갑자기 여호수아 군대들이 힘이 덜해지고, 아말렉이 전쟁을 이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말렉과 원수들을 이기기 위해서 같이 산위에 올라갔는데, 아론과 훌이 모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종종 모세를 돕기 위해서 모세의 형인 아론과 훌이 힘을 썼는데, 그 자리에서는 굵은 바위 돌을 하나 굴려 와서 그 위에 모세를 앉게 하고, 그 옆에 팔 하나는 훌이 들고 다른 하나는 아론이 들고, 손팔을 해가지도록 그렇게 들고 있으니깐 깨달을 수 없는 바람 같은 능력이 임하여서 아말렉이 전쟁에 질 이유가 없는데 전쟁에 패하고, 이스라엘이 전쟁에 이겼습니다. 인생 살면서 뒤에서 도와주는 올바른 힘이 있으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취월장 성공을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전쟁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 시스템이 없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방어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방어 시스템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사탄을 이겨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방어 시스템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 속에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이긴 예수님이 지키고 있으니 방어 시스템치고는 최고의 방어 시스템입니다. “예수 없이 나는 스스로 승리하고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라고 표현합니다. 훌륭한 군사는 평상시에 전쟁을 잘 준비하는 군사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훈련도 잘 감당하고, 적이 공격해올 때에 대비하여 어떻게 해야 될 것도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날마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여 마음에 말씀이 가득하고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 삶을 조종하는 배후의 힘

 우리의 삶을 뒤에서 조종하는 영적인 성령이 계시고, 또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배후의 힘이고, 안 보이는 악한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파괴적인 배후의 힘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전쟁과 배후의 힘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말렉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눈에 보이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 블레셋과 골리앗, 다윗과 야훼 하나님을 보면 사무엘상 17장 46절로 47절에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고 간 배가 큰 파도를 만나서 빠지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앞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때문에 예수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파도가 너무 거세지니깐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하기를 ‘이제 빠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를 골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님 우리 죽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도록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바람아 그쳐라. 파도야 그만 쳐라.”라고 명령합니다. 제자들에게는 파도라는 영적인 배후의 힘이 작용했지만 예수님은 명령하고 선포함으로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서서히 파도가 잠잠해진 것이 아닙니다. 물도 서서히 잠잠해진 게 아닙니다. 파도를 마귀가 흔들고 있다가 마귀가 손을 놔버리니깐 물은 그대로 잠잠해졌습니다. 바람도 그대로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제자들을 보시고 “그렇게 겁이 나느냐?” 그러니 제자들이 ‘희한하다. 어디 물과 파도도 예수님을 존경한다. 이렇게 주무시다가 순식간에 깨어나서는 파도물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것은 여러분 산 사람보고 꾸짖지, 죽은 사람보고 “이 나쁜 자식아 잘 되어졌다.” 그래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가만히 안 있지요.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그냥 그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 하나님이 그 바람 배후에 있는 빽이 마귀인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적군과 싸울 때 두려움이 가득하면 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전쟁을 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신명기 20장 1절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무리 적이 많아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된다. 전쟁에 나가서 적군이 아무리 많고 무장을 잘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안 보여도 너희들을 뒤에서 밀어주어서 가나안까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이 교훈을 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 구체적인 지침도 일러주었는데, 싸움터에 가까이 갔을 때, 제사장은 ‘이스라엘에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덜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야훼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신명기 20장 3절~4절)’ 참으로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 않고, 놀라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할렐루야 감사하며.

 또 책임자들은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신명기 20장 8절)’ 같이 직면해서 전쟁하러 나왔는데 두려워 벌벌 떨며 “아휴 저거 어찌할꼬. 죽겠는데 우리 군대수가 적은데.”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군대는 집에 돌아가라. 그 두려움이 같이 싸우는 동료들의 마음에 용기를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다른 사람도 두려움 때문에 전쟁에 싸울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적군과 싸울 때 한 사람이 천을 돕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 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없이 나갈 때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그런 큰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마 전쟁에 나갔는데 저를 데리고 나가면 참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용기 이쪽으로 오너라. 조용기 이리 가라. 조용기 저리 가라.” 전부 이름이 조용기이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싸우러 전쟁하러 갈 때 부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사이 북한 김정은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원자탄을 만들고 수소탄을 만들고, 어깨에 힘을 주어서 돌아다니는데, 우리가 그걸 텔레비전에서 보고, 신문에서 보고 두려우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내게 신앙상담 오는 신앙상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사님 어제 미국에 있는 우리 아들, 딸들이 빨리 미국으로 들어오라고 그럽니다. 당장 전쟁이 터지면 죽을 것인데 한국에 붙어 있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깐 빨리 오시라고. ‘아버지, 어머니 미국에 와서 우리에게 붙어산다고 우리가 더 괴로울 일 없으니 아버지, 어머니 빨리 미국으로 오세요.’ 자꾸 이렇게 말을 함으로 우리 부부간에도 두려움이 생겨서 급한 짐 보따리를 싸서 있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내가 그래서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은 전쟁에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뒈질 사람입니다.” 죽으면 자기들끼리만 죽지 왜 내 곁에 와서 내게까지 그런 소리를 합니까? 남의 말이란 듣고 나면 끼꼼합니다. 말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무기는 무쇠무기를 못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면, 무시무시한 말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이 되는 것이 왜냐하면 그 말 뒤에 누가 있지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김정일이 보고 “정일아 까불지 마라. 한 대 맞고 싶냐?” 꼼짝도 못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승리

 예수님께서 우리 주님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계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배후의 세력인 악의 사탄과 싸워서 완전히 이겨주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예수 안 믿는 사람 말합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골로새서 2장 13절 15절에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기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우리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우리를 고발하는 모든 증서를 제하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고 삼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잡지 못한 것이지만은, 우리를 고소하는 고소장,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 환경, 이것을 다 접수해가지고서 멸해버리고, 우리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구원을 해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 배후의 세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십자가 갈보리에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십자가가 안 보이는 죄를 없애버렸습니다. 우리가 일생에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습니까? 어린아이에서 죽을 때까지 죄를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혈로 정리해서 씻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으나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등 뒤에서 우리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우리가 보지 않는 배후에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씻으시고, 거룩하게 해주시고, 우리 안 보이는 데서 예수님이 당신이 채찍에 맞도록 등을 내놓고 갈빗대가 나오도록 얻어맞아 우리 죄를, 병을 다 청산하시고, 그가 채찍에 맞아서 우리가 나았다는 것은 우리는 안 보아도 우리의 기적이 되시고, 나무에 달려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신 모습은 저주를 제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종종 너무 “나는 못 산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생길 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생각하기 전에 예수님이 저주를 제하시고, 실패를 제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축복이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십자가를 보고 “주님 믿습니다. 성공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축복을 주신 것을 믿사오니 감사합니다.” 여러분 보지 않았지만 배후로써, 압도적인 성공을 가져오는 배후로써 십자가가 뒤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빽이 되어서 여러분은 부활의 생명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용서해주는 빽이 있고, 거룩해지게 해주는 빽이 있고, 병을 낫게 하는 빽이 있고, 생활을 부요케 하는 빽이 있고, 죽어도 부활하는 빽이 있어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굉장한 빽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죽으면서 빽 하면서 죽는다는데, 그 빽은 헛빽이에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진짜 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빽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알고 빽에 의지해서 기도하고, 우리가 살 때도 마음에 든든하게 살아야 될 것은 다 무너져가는 담벼락을 뒤에 받쳐놓고 그대로 내어두더라도 집 담이 되는 것입니다. 다 무너져가는 집 담을 나무들로 모아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겠지만 모아놓기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안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빽이 여러분을 뒤에 밀고 있는지 제가 내려다보고 생각해보면, 여러분 뒤에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훌륭한 빽을 세워놓았다는 것을 언제나 머릿속에 생각 하십시오. 그래서 패배의식을 가지지 말라고요. 여러분은 눈에 안 보이는 모세와 아론같은 사람, 예수님 보혜사 성령께서 뒤를 받치고 있으니 이깁니다. 승리하게 돼 있어요.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기도응답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공중의 권세 잡은 원수마귀가 스무 하루 동안 다니엘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스무 하루 만에 하나님의 더 힘 있는 천사인 미카엘이 내려와서 원수마귀를 물리치고 다니엘의 기도를 응답 받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10장 12절에서 14절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 바사 왕국의 군주는 눈에 안 보이는 바사 왕국을 뒤에서 다스리는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사 왕국의 빽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싶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불러가지고서 “이 응답을 갖다 주라”고, 응답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마귀가 스무 하루를 막았다.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그러나 최고 권세에 있는 미카엘 천사가 와서 “치워. 길 트여라. 비켜.” 그래 길을 트여서 응답이 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영의 세계도.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이 빨리 안 온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기도응답을 마귀가 막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은 응답 받을 자격이 없는데 왜 응답을 줍니까? 이 사람은 거짓말도 많이 하고, 도둑질도 많이 하고, 죄만 많이 짓고 사는데 기도응답 받을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편에서 아무래도 저항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었어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었다.” 우리가 마귀에게 대결해서 이길 힘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되어 오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이기게 할 조건을 다 허락해 놓았으니 춤추고도 놀랄 선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배후의 세력이 역사한 것을 여러분 상상할 수 있지요? 예수님이 얻어맞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간 그 장면이 뭣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배후에 와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 13장 2절)’ 예수님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마귀의 대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팔 생각을 가룟 유다에게 집어넣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장 23절)’고 우리 마음의 생각 속에 마귀가 생각을 집어넣어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싸움 할 때 마귀가 남편의 마음속에 분노한 생각을 집어넣었더라. 남편은 그 아내가 이유 없이 싸운다고 화를 내지만은 성격을 아는 사람은 한 발짝 물러서서 들어보면 그 속에 마귀가 들어 앉아있습니다. 마귀가 들어 앉아있어요. 마귀가 들어 왔습니다. 평범한 생활에 마귀가 들어왔다 나왔다 출입이 너무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지켜주시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라, 좋은 일 감사하라. 아주 단순한 주문의 그 말씀이 보배인 것입니다. 저는 주차할 때나 시간이 있으면 ‘항상 기뻐합니다.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마귀가 들어왔다 나왔다 하지만은 하나님 지켜주시니 고맙습니다. 마귀가 나가면 기쁘고, 들어오면 불평이 따라 들어옵니다. 마귀는 아예 근처 오지 말아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니깐 참 즐겁습니다.’ 그렇게 하고 다니면 참 좋습니다. 내가 집회를 했는데, 마사지를 받아서,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몸이 찌뿌둥하고 해서 마사지를 받았는데, 마사지를 하는 사람이 무슨 중얼중얼 소리를 자꾸 내면서 마사지를 하길래 ‘미친놈이 왔구나..건강한 사람이 무슨 자꾸 말을 하는가.’ 그래서 들으니깐 성경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편 23편 1절~3절)’ 그걸 그래서 내가 따라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다음에 뭐였죠? 그래 내가 같이 외우니깐 깜짝 놀라가지고서 “아휴 선생님, 어떻게 성경을 다 압니까?”, “내가 성경을 다 아는 게 아니라 성경을 설교하는 목사요.” 그러니 그 사람 아주 기분 좋게 일하고 서비스료도 조금 더 받고,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나요.

 우리 일상생활에도 언제나 마귀가 들어왔다가 쫓겨나고, 예수님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는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화나는 일이 생기는데, 화를 계속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로 2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는 우리가 분을 내고 분을 품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그 틈을 마귀가 타고 들어와서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것을 알고 우리는 언제나 눈에 안 보이는 제 3자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기도의 힘

 배후에서 기도를 하면 마귀를 억압하고 쫓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지요? 그게 빽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절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 등 뒤에 빽이, 기도의 빽이 저장이 되어 있어요. 그 기도의 빽이 제가 일하는데 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리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바빠서 기도를 못 할 때라도 그 기도가 빽이 되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배후에서 기도를 하면 마귀를 억압하고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보낼 때, “너희 각자를 위해서 내가 기도의 저축을 해 놓을 테니깐 가서 성공적인 전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기도 많이 해주십시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서로 형제간이든지, 부모자식간이든지, 친구든지, 멀리 갔다고 해도 몸으론 따라가지 못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기도는 따라가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장은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에베소서 6장 11절로 13절에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평소에 내가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그 기도가 내 주위에 담벼락을 이루어요. 군복을 입혀주는 거지요. 그가 내가 마귀와 싸우는데 이기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나를 도와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 후원의 배후 세력이 되면은, 똑같은 사람이라도 무엇이든지 하면 잘하고 이기는 사람이 되는데, 이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야고보서 5장 15절~16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8장 18절)’ 기도가 하늘에 저축이 돼있고, 일할 때 필요하면 저축을 풀어주시고, 기도를 하지 않고 마귀의 나라에서 여러분 묶여있으면, 일할 때 마귀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정 19절~20절)’ 여러분은 기도를 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파탄을 당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배후의 힘이 되어 놀라운 역사를 하는 것도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배후입니다.

 성령이 굉장한 빽입니다. 오늘 여러분 성령이 있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여러분, 성령은 여러분의 배후로써 뒤에 있으면서 여러분 일할 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 우리 함께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의 빽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너무 시간을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 성찬을 안 하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로 그치겠습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씨맨즈는,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치명적인 방법은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나는 무능하다’라는 생각을,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게 만듭니다. 둘째는 ‘나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생각, 즉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듭니다. 셋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생각으로 대인관계에 대하여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주는데, 한번 대답해 보세요. ‘나는 무능하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있지요? ‘나는 무능합니다.’ 이것 마귀가 주는 생각인 것입니다. 둘째, ‘난 미래가 없다. 나는 끝장났다.’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마귀가 하는 소립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인간을 한 사람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들을 심어 줌으로 우리의 삶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통하여 마귀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생각(마음)을 지키라’고 했으니 생각에 마귀가 도둑질로 죽이고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아멘.


-기 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절대긍정 절대희망으로 무장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소서. 감사하는 생활을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사입력 : 2017.10.08. am 11:22 (입력)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이영훈목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 3:11~13

오늘은 전도서 3장 11절로 13절 말씀을 가지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뭐가 잘 되면 ‘아! 참 내게 운이 따랐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 참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재수가 좋은 사람이다.’ 또 뭐가 안 되면 ‘참 운이 나빴다.’ ‘재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을까!’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된 것임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 어떤 하나의 일어난 일들도 결국은 그 퍼즐이 다 맞춰져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 가운데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역사 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던 솔로몬이 말년에 쓴 전도서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과 2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무엇을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고, 또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8절을 보니까,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그 ‘때’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때’를 이루어가시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사 3장 9절에서 10절입니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나의 시간표로 내 원하는 것을 이뤄가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주관하고 계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할렐루야! 그러니까 우리에게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가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이 가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의 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듬어지게 만들어주시고, 우리를 잘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통하여서 연단시키고 훈련시키셔서 하나님 때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한평생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살아야지, 어려운 일 당한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꾸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의 상처를 또 되새겨 보고, 되새겨 보는 그런 모습으로 살면 안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탁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때에 성공이란 선물을 주십니다. 성공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자기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을 열심히 단련시키고 훈련해서 최선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공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해주실 것을 믿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지어진 찬송가가 있습니다.

 1975년, 북 캘리포니아 기독교총회센터의 총무로 있던 다이앤 볼이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는 중간에 한 마을에 들러서 여성 오찬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아침 10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남편이 급한 일이 생겨서 일을 처리하고 오다가 늦게 왔습니다. 그래서 이 다이앤 볼이 남편에게 화를 냈습니다.

  “여보, 내가 오늘 12시에 말씀 전하기로 약속 했는데 늦게 오면 어떻게 해요!” 화를 내고 이제 차를 출발해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자기가 화낸 것 하나님 앞에 너무 미안하고,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화를 낼 때는 속 시원한 것 같지만 돌아서면 마음 아픈 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데,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성경을 읽게 하시고 전도서 3장을 읽다가 11절 말씀이 탁 마음에 뛰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큰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 순간 하늘의 찬양대가 부르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내게 들려왔어요. 가사는 내 초조한 마음을 쓸어내렸고, 주님은 내게 평안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작사, 작곡을 한 것이 찬송가 623장인데, 놀랍게도 그 약속 장소에 가보니깐 주최 측의 사정으로 시간이 연기가 되어서 딱 도착한 시간에 바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날 그분들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내 시간과 계획은 언제나 불완전해요. 주님은 주님의 시간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시죠!”

 623장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주님 나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니/ 주의 뜻을 따라서 살리라(1절)/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나의 정성 다하여 주를 찬송하오니/ 주의 뜻을 이루어주소서(2절)’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주님 나의 갈 길을 인도하여주시니
주의 뜻을 따라서 살리라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나의 정성 다하여 주를 찬송하오니
주의 뜻을 이루어주소서

 할렐루야!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뤄지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사랑하는 인물, 요셉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열일곱 살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온갖 고생을 해서 자리를 잡을만하니까 또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죄수로 감옥에 들어갑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그에게 지나갔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자기를 노예로 판 형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모함해서 감옥에 집어넣은 보디발의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는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이 서른 살에 그를 탁 높여서 당시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자기에게 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복수의 기록은 없고 오히려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만 나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둘째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3장11절에,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실 때 말씀 한 마디로 지으셨으나,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은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설명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이 생기가 히브리 원어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영,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숨’ 그것을 하나님이 영을 우리 인간에 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땅을 밟고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죄짓고 타락해서 영의 눈이 흐려져서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사람 외에 이러한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동물이 없습니다.

 집에서 반려견들을 잘 기르지만, 반려견들이 음식 줄 때 하나님께 감사 기도 하고 먹는 반려견은 없어요. 주자마자 확 확 확 먹느라고 바쁘지요. 왜? 그에게는 혼만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이 있어서 늘 영혼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중세 성자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주님, 한줌 흙에 지나지 않는 피조물이오나 감히 입술을 열어 당신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절대로 평화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근심이 쌓이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이 자리에서 내려갈까 불안하게 떨며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마음의 안식은 예수를 믿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르고 섬길 때에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참된 평안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 믿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만족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또 찾아다니는 것이 그 영혼의 갈급함을 어떻게든지 달래보려고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쳐보기도 하고, 무당한테 굿을 해보기도 하고, 또 우상에게 빌어보기도 하지만 절대로 그것이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줄 수가 없습니다. 뭐 타로점이라고 해가지고, 카드 펴놓고 뭐 뽑아가지고 뭐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백번 뽑아봐야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이 점쟁이나 무당들은 악한 영이 있어서 과거들 좀 볼 수 있는 능력은 있어요, 과거. 그러나 그 어떤 용한 점쟁이라고 할지라도 미래는 못 봅니다. 왜?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의 미래가 밝은 미래, 찬란한 미래, 영광스러운 미래, 아름다운 미래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렐루야! 요한복음 14장 6절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함께하시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갔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 여인은 남자를 잘 만나면 마음에 평안함이 올 줄 알고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어요. 이천 년 전에 다섯  번이나 했어요. 대단한 여인이에요, 그죠? 다섯 번을 갈아치워도 마음에 안 들어서 여섯 번째 사람하고 사는데 마음에 평안함이 없었어요.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 누구에게서도 얻지 못했던 삶의 기쁨과 평안함을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는 얻게 되었고, 그는 물 뜨러 왔다가 물통을 내려놓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생 살아가는 동안 늘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절대 주권

셋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장 11절에,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무엇을 해서 이름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정상에 올라갔을 때,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거기에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감사하며 살아야 됩니다. 시편 23편 1절의 고백을 해야 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번에 독일에 메르켈 총리가 4선을 했어요. 4선.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여성 지도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 딸이에요. 목사님 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번 네 번째 된 게 본인 능력으로 잘해서 된 부분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해주셔서 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잘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된 것이고, 안될 때 문제 있을 때에는 대부분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내가 실수하고 내가 내 성격을 잘못 다스려서 남하고 부딪쳐서 상처를 입힌 거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되게 만들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자리에 자꾸 내가 대신 앉아가지고 뭐든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 죄라고 합니다, 죄.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죄고, 그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따먹은 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유혹했습니다. “너, 저 선악과 먹으면 하나님처럼 돼.” 인간이 넘어야 되지 않을 선을 넘어버렸어요. 그래서 죄가 들어오고 온 인류가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까지 교만해서 내가 하나님 자리에 대신 앉던 것을 회개하고 철저히 주님 앞에 깨어지고 낮아져서 주님, 주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겸손으로 허리띠를 두르고 주님 앞에 기쁘고 감사함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선물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도서 3장 13절에는 설명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곳에 와서 예배드리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일생 고백은 “주님,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할렐루야!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렐루야! 순서를 바꿔 말하면 안 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훈련시키셔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큰 복을 주신 갈릴리 농원의 류광열 장로님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파주의 유명한 장어 음식점인데요. 일찍이 청년 농업가로 28세에 벌써 크게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아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앓아요. 3년 동안 이 병원 저 병원 다녔는데 병을 고치지 못했는데, 누가 전도해서 교회 나오고 나서 예수 믿던 그날 편안하게 잠이 들게 되고, 몸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이제 이분이 사업 수단이 있는 모양이에요. 장어 양식장을 하는데 얼마나 잘되는지, 막 대 성공을 해서 해외에서까지 그 성공 사례를 연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해지는 거예요. 잘될 땐 하나님 은혜라 그랬죠? 보세요. “감사보다는 교만이 가득했던 삶이었습니다. 아내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피지도 못하고 오로지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 고민했지 거룩한 삶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 손보시기 시작하셨어요. 1996년 8월 달에 장마와 태풍이 겹치면서 파주와 문산 일대가 다 물바다가 되고, 그의 전 재산인 양식장은 파괴되어버리고 장어들은 다 떠내려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복원하는데 그 다음 해, 그 다음 해, 3년 동안 집중 폭우가 와서 장어 양식이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IMF시절의 부채가 60억이 넘습니다. 1년 이자가 25%니까 이자만 1년에 15억이에요, 15억. 별로 놀래지도 않으시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성공했던 내가 맨 밑바닥에 내가 나앉게 되었으니 이렇게 살아 뭣하나’ 할 때, 하나님이 다시 그를 붙들어서 그를 세우십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 장로 직분을 주신 거예요. ‘나 같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주님 다시 세우셔서 일 시킨다.’는 사실에 너무너무 감사해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 다시 그가 일을 시작합니다. 몇 마리 남지 않은 장어를 가지고 잘 그것을 양념을 해서 좌판에 놓고 팔았는데, 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맛있다고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니까 천막을 치고 이 장어집을 했는데, 사람들이 소문이 나서 막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데 2002년도에 본격적으로 갈릴리 농원을 시작해서 그 장어 음식점을 하는데,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하고 온답니다. 번호표를 받고 3시간을 기다려야 된데요. 1년에 연간 60만 명 손님이 찾아온대요. 이제 아마 이 설교가 나간 다음에 70만 명 찾아올 거예요. 상복도 많이 받아서 은탑산업훈장과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와 같이 그것을 자기의 그 은혜 받은 것을 설명합니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했던 그 시절, 나를 건져준 것은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삼성교회 장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헤매던 시절 장로 직분을 받은 나는 인생 중 어떤 부귀영화와도 견줄 수 없는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데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많이 보내주는데도 왜 전도하지 못하느냐?” 그래서 식당을 찾는 수십만 사람, 손님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원을 홀리랜드로 확장하여 그 안에 교회까지 세웠습니다. 올해 8월에 입당 예배를 드렸는데요, 그는 간증합니다.      “일생의 꿈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갈릴리농원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아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마저도 지금 생각하면 모두 주님이 예비하신 순간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축복 속에 저와 우리 가정의 지경은 크게 넓어졌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주님, 제 삶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게 인도해주옵소서. 갈릴리농원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심길 수 있게 해주옵소서. 더욱 겸손하고 순종하는 종이 되게 해주옵소서!”

 할렐루야! 모든 것에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렇게 귀하게 쓰시려고 연단의 연단을 거쳐서 그를 낮추시고 직분을 주셔서 다시 믿음으로 바로 서게 하신 후에, 큰 복을 주셔서 지금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생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생각의 중요성/조용기목사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사야 43장 19절)
 
 ‘생각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생각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최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심리학과 연구팀의 발표에 의하면 ‘나는 늙었어.’라는 생각만으로도 뇌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나쁘다’라는 생각이 실제로 기억력을 나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나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기억력의 점수가 월등하게 높았습니다. 생각은 이처럼 우리의 신체 기능에 영향을 미칩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은 우리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당신을 만들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당신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내일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닫힌 문만 바라보면 인생은 실패합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평생 시각 장애인으로 청각의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헬렌 켈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 쪽 문이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다가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을 보지 못하곤 한다.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지나간 실패의 기억은 떨쳐 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으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엄청나게 행복하고 위대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1.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매여 현재를 비관하거나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그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이 가득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은 현재라는 시간인 것입니다. 돈에 비유하면 과거는 이미 써버린 돈이요, 미래는 불확실한 어음이며, 현재는 쓸 수 있는 현금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실패에 묶여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근심과 걱정에 묶여있다면 희망 찬 오늘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삶의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내야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25절로 26절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을 믿고 주님이 같이 계시니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에게 안수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면 그 환자를 데리고 온 들것에 그대로 싣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갈 수 없어도 그들은 길은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본 즉 집 지붕에 구멍을 뚫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집 천장 구멍을 뚫고 중풍병 환자를 달아 내려서 예수님께 안수를 받고 나았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면 평생에 중풍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집 구멍 뚫을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패배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파도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두려워했으나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로 물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오라.” 그러니 예수님이 오라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배 밖에 나갔으니까 그도 예수님처럼 물 위에 서서 걸어가는데 광풍이 불어와서 얼굴을 때리니 그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파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잘못한 결과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니 예수님이 팔을 잡고 끌어 일으켜 살려주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있을 때는 물 위로 걸었는데 파도를 바라봤을 때는 바람을 볼 때 그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차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인생에는 늘 풍랑이 일어납니다. 적은 풍랑, 큰 풍랑, 풍랑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에게 삶의 길이 열립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43장 19절에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면 길이 없는 광야에 길을 내시고, 물이 없는 사막에 강을 내어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라
 생각을 바꾸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죄인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죄의 용서와 의의 선물을 기대하면 죄사함과 의로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더러움을 씻고 거룩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 그러한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바라보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병명이 있는데 ‘가시철망 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에 걸린 포로가 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수용소의 가시 철망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 삶의 의욕을 잃고 자리에 누운 채 아무것도 하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시철망 병에 걸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다 같이 포로수용소에서 가시철망을 바라봤는데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사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까 그들은 포로가 되어서 가시철망 뒤에 있었지만 가시철망을 바라보지 않고 철망 저 너머 푸른 하늘을 늘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전쟁가운데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가시철망 병에 걸려서 들어 누워서 늘 두려워했는데, 이 사람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포로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주 즐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십자가 밑에 나가면 십자가를 통해서 희망을 하나님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중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다 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어떠한 죄인도 구원받고 용서받을 수 있고, 어떠한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 더러운 사람도 청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도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연약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헐벗고 굶주림을 벗어나서 잘 먹고 살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천국갈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이런 언약과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가지고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삶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으로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부딪히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릴 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행동이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약하지만 계속되면 밧줄처럼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동뿐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도 습관이 생깁니다. 물이 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흐르면 물길이 생기듯이 생각도 계속하면 습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 사람은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것만 생각하고, 못 되는 것만 생각하고 긍정적인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잘 다스리고 훈련해야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 속에 만나기 원하면 항상 십자가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3. 믿음의 발걸음을 옮겨라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 뒤로 가서 옷자락에 손만 대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안했으면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 계신대로 나가서 그 옷자락에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그 여인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그 여인이 사는 집 앞을 지나갈 때, 이 여인은 생각을 따라서 뛰어나가 그 옷자락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라는 생각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게 되고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진퇴양난의 위기를 만날 때, 세상 사람들은 ‘이제는 길이 없다. 막다른 골목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사통팔방 어느 곳에도 길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은 길이 있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에 길이 열려 있습니다. 동서사방으로 다 길이 막혀도 아직 위에는 뚫려 있는 하늘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길이 있는데 하늘길이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하늘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온 천지가 다 막혀도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열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1장9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길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기도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만년필은 루이스 에드슨 위트맨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것입니다. 원래 이 사람은 보험설계사였는데, 하루는 보험계약을 하러온 사람하고 앉아서 계약서를 쓰다가 잉크병이 기울어져서 잉크가 계약서에 번져 들어가서 못쓰게 되었습니다. 이 위트맨이 새로운 계약서를 끄집어내어서 쓰자고 했을 때, “계약에 잉크가 쏟아진 것을 보니까 재수가 없다.” “계약 안하겠다” “당신은 보험에 실패할 것.”이라고 화를 내고 나가버렸습니다. 이때 위트맨은 다른 생각을 갖습니다. ‘한쪽의 길이 막히면 다른 쪽에 길이 열린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잉크가 안 쏟아지는 만년필을 만들어보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만년필을 만들었습니다. 보험회사보다도 돈을 더 잘 벌었습니다. 잉크가 쏟아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활 속에서 잘못 되는 것도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면 잘된 것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일이 안 되면 비난하고 공격하고 탄식하고 팔자 신세 한탄을 하는데 그러지 말고 일이 안 되면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길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제가 믿는 그 길을 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다 끝장났다’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인생이 끝장나고 맙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할 수 있다, 해 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나오는데 참 과감한 말씀 아닙니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그것이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없고 빈 손 들었지만 그 모든 것 보다도 자본이 많이 가지고 있는데 믿음이 자본인 것입니다. ‘믿습니다’가 자본인 것입니다. 그 자본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불린 E.M. 바운즈는 기도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도의 손에 쥐어주신 기이한 능력이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강한 끈이며 연약한 인간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할 수가 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다.” 성도의 기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4. 뒤로 물러서지 말라
 문제를 만났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편 146편 3절로 5절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기도로써 비를 내리게 했던 사람인데 가뭄이 와서 사람들이 굶어죽은 처지에 있게되자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비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한 번 기도하고, 두 번 기도하고 또 산꼭대기에 올라가보니 아직 응답이 없습니다. 세 번 기도하고, 네 번 기도하고, 다섯 번 해도 효과가 없어요. 여섯 번 해도 효과가 없어요. 일곱 번 기도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보니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라요. 그가 아합왕에게 말합니다. “큰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니 마차를 정비해서 타고 빨리 시내로 들어갑시다!” 그래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순식간에 온 하늘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낙심하고 한두 번 기도해서 안 된다고 뒤로 물러갔으면 그런 기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한 과부가 재판관 앞에 나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주소서.” 아무리 해도 이 재판관이 말을 들어주지 않다가 나중에는 하도 끈질기게 구하니까 “내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정한 사람이지만 이 여자가 하도 출근할 때 마다 문 앞에 엎드려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면 내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기도를 응답해주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기적은 고집스러운 면도 필요합니다.

 한 도시에 우물 파는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우물을 파야 마실 물도 얻을 수 있고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용수도 얻을 수 있는데 그 분야의 전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우물을 파면 물이 늘 나오고 다른 사람이 파면 우물에 물을 얻지 못하는데 어떤 특별한 기술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전문가는 웃음지으며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좀 파다가 물이 안 나오면 또 다른 우물을 파러 가지만 나는 물이 나올 때까지 팝니다. 그것이 비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줄곧 해도 응답을 못 받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습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응답이 올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떼를 쓰고 물러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친구가 왔는데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합니다. 주인으로서는 귀찮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친구가 돼서 주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게 함으로 주는 겁니다”고. 예수님이 그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아주 우스운 비유같지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서 십년동안 기도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끈질기게 기도했더니 고침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때 제목을 정해놓고 아침에 기도도 하고, 점심때 기도하고, 저녁때 기도하고 똑같은 기도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도를 하려면 제목이 자꾸 변화되고 내용이 복잡해집니다. 예레미아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마귀가 막고 있지만 끝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