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종교도 있나요?/조용기목사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중략)…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장 25∼37절)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잠시 후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해서 지나갔고, 그도 역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내려가 치료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예식을 집행하는 중심부였습니다. 그래서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아서, 사람들은 여리고로 내려다녔습니다. 여리고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여리고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서 예루살렘에서 팔아 돈을 벌어 지갑을 잔뜩 채워 여리고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강도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덮쳐서 때리고 돈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간 사람은 장사꾼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제사장이 종교적인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리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강도에게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율법의 준행자인 제사장은 상당히 고약한 얼굴로 교훈을 전하고 그대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다음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그는 꾸짖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주고 꾸짖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리저리 여행을 하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개라고 부르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외국에 정복당해서 포로로 잡혀갈 때, 포로 잡혀간 그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순수한 유대인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위해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해준 것입니다. 당시 광야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기름이나 포도주를 상비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피부에 기름을 칠하고, 포도주는 상처난 곳에 병균이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의 옷을 찢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감아 묶어 주고,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집은 오늘날 호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가서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내가 돌아올 때 돈이 더 들었으면 그 길에 돈을 더 갚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 없이 선을 행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2. 누가 선한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을 한다’ ‘레위인 같은 의식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도 의식주의자도 아닌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강도 만난 이웃을 꾸짖으며 심판하고 지나갔습니다. 율법은 법이니깐 법을 어기는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법의 안경을 쓰고 사람을 쳐다보기 때문에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꾸짖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3절로 5절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꾸짖는 이유는 율법을 자신이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론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잘났고, 상대방은 잘못됐고 나쁜 사람이라며 결점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이웃만을 살펴서 꾸짖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미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의식주의자는 성전의 의식과 예식을 잘 지키고 행하는데 주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요사이에도 형식주의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교회에서 모든 행위는 다 따라서 행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이 형식주의자인 것입니다. 내용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레위인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강도떼를 만나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비난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 의식주의자들은 내용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내용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레위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인정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내용으로 보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과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형식과 의식 속에 있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함은 율법과 의식을 다 이룬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율법을 가지고서 평론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타락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보시는 선한 일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훌륭한 설교, 천사 같은 웅변, 탁월한 지식,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위선자이며, 그 말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엄격한 판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설교를 하고, 천사 같은 웅변을 하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며 존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내용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을 소개받을 때 보면 어느 대학을 나와 어디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서 대단한 경력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력에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제로이며, 아무 가치도 없고, 무용지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크게 하고 전력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사이 중동에서 일어난 종교가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4. 참 사랑의 모범


 참 사랑의 모범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에 쓰러져 버림받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린 이 사랑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한 종교가 아닌 용서와 회개를 하게 도와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자꾸 남을 흉보고, 남을 얕잡아 보고, 남의 잘못을 욕하고, 자기가 대단한 신앙인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만 있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제2의 기회를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한 번 시작해보는 거다”라며 재생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성전으로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녀를 잡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결점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고, 결국에는 버림받게 만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무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깨너머로 글을 본 사람들이 돌을 놓고 그대로 다 도망을 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저들의 감춰진 죄를 손가락으로 적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 돌로써 때린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돌에 얻어맞아야 될 것이라고 알고, 모두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그 여자를 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어 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 짓는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개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 터이니 그렇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조금만 잘못하면 교회법을 동원하든지 국가법을 동원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위대한 일을 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계신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줘야 된다. 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회개를 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변화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지고,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지고, 내년에는 금년보다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이웃의 잘못을 비평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도움을 베푸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덮어서 그 사람이 재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까? 시퍼렇게 율법의 칼날을 세워서 심판을 내린다면, 그곳은 도살장이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자기도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심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제2의 기회를 가지도록 용서를 해주고 힘을 돋우어 주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써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독생자가 인생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자기의 고통을 끝까지 당하고 청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회개하고 재기하기 위해서 주께 나오면 주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으로써 주님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아무리 죄악이 가득찬 곳에 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자는 주님이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재기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그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고 눈에 티가 있는 이웃을 정죄하느냐?” 과장하게 말씀한 것이지만 내 눈에 들보 같은 잘못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심판을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언제나 희망을 주는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교회로 잘 이끌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사람을 새 사람 만들 수 있는 처소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여 성령님을 경배하고, 믿고, 따라 나가면 성령님은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님은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모여서 주께 감사하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여서 훌륭한 변화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충실한 성도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죄악이 만연한 이 땅에 예수님 보혈의 사랑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상처받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위로자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무엇보다 이 땅에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 이기록 목사  추평교회 


아사야 43:1~3


납달리 지파 사람인 토빗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송아지

를 만들어 제물을 바칠 때도 토빗은 첫 열매와 십일조를 정성껏 하나님께 바쳤습

니다.또한 율법에 따라 고아와 과부들, 이방인들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삶이 위기를 맞은 것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해 포로로 살게 된 후부터

였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동포들이 소망 없는 삶을 살 때에도,토빗은 하나님께 회복

시키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이때 토빗은 이렇게 기도했

습니다."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때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

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나라를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아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삶이 험악하고 괴로워, 차라리 흙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깨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스스로 죽지 못해 날마다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다정스런 말투로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그리고 속삭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우리는 몸과 영혼이 내 것이라고 쉽게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견딜만한 고난만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라는 시실

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정검다리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될 것이고, 마침내 새벽부터 밤까지 마음에 조금의

두려움과 공허함도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토빗의 말년이 그

것을 증명합니다. 그의 말년은 은총으로 가득 찼습니다.천사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

었고 수명을 다 채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 어렵고 힘들다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도

하나님, 내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것임을 이억하게 하소서. 우리에

게 오는 그 어떤 시련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시련을 통하여 거룩한 존

재로 거듭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록 목사  추평교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이영훈목사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한복음 21장 1~6절)

우리 인생은 꿈과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절망 가운데 방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삶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우주 만물은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고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꿈과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죄와 절망, 가난, 저주, 질병이 온 인류를 뒤덮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절망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이 같은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저주, 가난과 질병, 모든 절망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는 가운데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죄와 저주와 질병을 이기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라 하는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 절망에 처해 있을 때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신 귀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실패한 인생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열심히 주님을 섬겼던 제자입니다. 제자 가운데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대표 되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 열두 명 중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셋을 데리고 올라가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에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가장 가까운 곳까지 데리고 가셔서 함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사역 초기에 그 장모가 늘 열병으로 몸이 아팠는데 예수님께서 장모를 고쳐주셔서 주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했던 주님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이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 붙잡혔을 때,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특히 세 번째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3절로 74절을 보면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장 16절)라고 고백했던 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말씀하실 때도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나도 절대로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 베드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자신에게 약간의 불이익이 임하면 금새 거짓말하고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또 누가 나에게 큰 도움을 줄 때에는 그 사람에게 그냥 간을 빼어 주듯이 온갖 입에 발린 칭찬을 하다가도, 나하고 관계 속에서 나에게 조금 불이익을 주고 손해를 주면 갑자기 돌아서서 원수가 되고 마음에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배신은 가장 가까운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재정을 맡았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은 30에 팔았구요,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다 예수님 붙잡히실 때에 뿔뿔이 흩어지고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도망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8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직장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자기 직장 상사가 예수님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부터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습니다. 거래처 사장하고 여러 가지 거래를 하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안 하기도 하고, 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을까봐 전혀 안 믿는 척하기도 하고, 또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핍박을 받을까봐 교회 나오는 것을 숨기고 조용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워서는 안 됩니다.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되심을 만방에 자랑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나에게 불이익이 다가온다고 죄와 타협하면서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찬양대원 가운데 국립합창단 단원이었던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국립합창단이 불교 행사에 가서 찬불가를 부르게 되었는데 ‘나는 신앙의 양심 상 못 부릅니다.’라고 말해서 결국 합창단에서 해고됐습니다.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국립합창단 단원의 70%가 각 교회들의 찬양대 솔리스트들입니다. 본인의 직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하지만 그래도 찬양대원이 찬양을 부르던 그 입술로 찬불가를 부르면 되겠습니까? ‘내게 손해가 오더라도, 불이익이 다가오더라도 나는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게 부끄러워 고개만 잠깐 숙였다가 드는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 왜 머리를 숙였다고 드나?’하고 봤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 믿는 것에 대해 떳떳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그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세 번 부인하고 난 다음에 닭이 우니까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자기의 장모의 병도 고쳐주시고, 늘 가장 가까운 곁에 자기를 두고 사랑하시고, 자기를 세워주시고, 지금까지 함께하신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하는 그 죄책감에 그는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후에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바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절대로 예수 잘 믿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딛고, 더 높여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탈북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김길남 성도님이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간부로 있다가 양강도 오지로 쫓겨났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수님을 모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당시 지하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귀해서 한 권을 뜯어 나눠서 읽곤 했는데, 김길남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레위기와 사무엘상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을 진멸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복수하시고 진멸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잘못 알고 노동당 타도를 외치며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도둑질과 강도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말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니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 원수들을 박멸하려고 했는데 왜 나에게 이렇게 어려움이 다가옵니까?’

숨어 지낼 때 누가 성경을 가져다줍니다. ‘성령을 제대로 읽어봐. 당신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성경을 보냐!’고 집어 던졌다가 다시 성경을 펼쳐 보는데 성령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눈물, 콧물이 쏟아지면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실패한 인생에 다가온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999년 초겨울이었다. 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이끌려 탈북을 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내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절망과 좌절에서 허우적거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예전에 내 맘대로 해석하고 왜곡시킨 일그러진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하고 무결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찾아오셔서 내 손을 붙드셨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날, 내 인생의 어둠이 걷혔다! 내 인생에 빛이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13년 넘게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역에서 탈북자를 도우며 섬기다가 2012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메일 내용의 일부입니다.

“내 평생의 소원대로 북녘 땅이 주의 나라가 된다면, 그리하여 우리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또한 먼저 돌아간 형제자매들의 한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위험도, 아니 죽음도 불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실패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버림받은 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패한 인생, 저주받은 인생, 버림받은 인생을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2. 실패한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배반하고 깊은 절망에 빠졌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며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 잡는 어부의 모습으로, 옛 모습으로 그가 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실패하고 무엇을 해도 이룰 수 없는 빈 배와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감격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후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그의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가 없었고 돌아온 것은 빈 배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예수님을 붙잡으면 우린 다 가진 것이고, 이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꼭 붙드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떠난 인생은 결국 빈 배 인생이 됩니다. “나를 떠나서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결국 밤새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고, 또 던지고, 또 던졌지만 그물에 걸려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밤을 꼬박 새워서 허기지고 그렇게 “이제, 어떻게 하지?”하고 낙심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빈 배 인생이 되어서 손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 5절은 설명합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아주 사랑스런 음성으로 부르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고기 좀 잡았느냐?” “아니오, 우리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 실패하고 좌절하고 마음에 상처입고 낙심해 빈 배 인생이 되어있는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네가 그렇게 나가서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뭐 얻어진 것이 있느냐?” “네가 네 자신의 노력을 가지고 그렇게 사업을 경영한다고 했는데 사업의 성과가 있느냐?” “지금 너의 인생에 무언가 만족할 무언가를 다 얻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 떠난 인생은 빈 배 인생입니다. 무엇을 해도 그 빈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은 늘 불완전하고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입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공허하고 허무하고 피곤하고 지쳐 빈 배된 인생에게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라!” “믿음으로 그물을 내려라!” 그날 밤에 사실 오른쪽, 왼쪽, 뒤쪽, 앞쪽 다 던져봤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는데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너무 많아서 들어올리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 말씀입니다. “‘신발 끈이 엉켰는데 풀 줄 아세요?’ 예수님은 그런 부탁을 아주 좋아하신다. 삶은 엉킨다. 사람들은 일을 망친다. 위를 올려다보며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떠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으레 그런 순간에 나타나신다! 베드로의 빈 배에 누가 나타나시는지 보라.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구주다. 당신도 닳고 젖은 빈 그물이 있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빈 그물을 아신다. 지친 마음을 아신다. 그리고 빈 그물의 주인에게 이렇게 속삭이신다.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해보자. 이번에는 내가 함께 타겠다!’”

이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의 맘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시록 3장 20절)

우리가 깊은 절망에 처해 문을 꽁꽁 닫고 외롭게 홀로 있을 때 주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너, 왜 이렇게 낙심하고 있느냐? 왜 절망하고 있느냐? 왜 상처를 끌어안고 있느냐? 문을 열고 나를 맞아라!”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

고기가 많이 잡힌 그 순간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아, 예수님이시구나!’ 그때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예수님이시다! 주님이시다!”

요하복음 21장 7절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힌 순간, 그 순간 다 알았어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먼저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 말에 너무나 감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이곳까지 도망 왔는데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너무나 감격해서 웃통을 벗고 있다가 옷을 입고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나갑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니까 헤엄은 잘 쳤겠죠. 그러나 그가 그 헤엄쳐가는, 그 물길을 헤쳐 가는 그의 모습은 주님을 향한 너무나, 너무나 감사하는 감격과 함께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며 헤쳐 간 물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울며, 울며 그는 헤엄쳐나갔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는데,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주님이 날 찾아오셨어. 내가 버림받은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날 버리지 않으셨어. 주님 날 사랑하시는 거야, 날 용서하시는 거야.’

너무 감격해서 울며, 울며 헤엄쳐 나가보니 예수님께서 환한 미소로 기다리고 계신데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따뜻하게 맞이하십니다. “밤새 너무 힘들었지? 추웠지? 배고팠지? 이리와 불 쬐고 아침 먹자.”

베드로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을 덜덜 떨면서 숯불 앞에 나가면서 한없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배반하고 먼 길을 왔는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에 이 숯불이라고 하는 원어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때에 그 숯불 앞에서 배반 했거든요, 모닥불 앞에서. 자기가 숯불 앞에서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예수님은 그 모닥불 앞에서 그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상을 차려주십니다.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너, 베드로 그럴 수 있니. 네가 내 뒤통수를 때렸지.” 그러지 않으셨어요. 말 한마디 안 하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내가 너 마음의 고통스러운 것을 알아, 스승을 배반하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을 내가 알아. 내가 널 용서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자, 배고프지 밥 먹자.” 어디 이 세상에 배신 때리고 간 사람을 찾아가서 이런 진수성찬을 차려주면서 오라고 부를, 용서해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사랑의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이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마 그날 아침은 눈물바다를 이룬 아침 식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눈물 속에 그냥 목이 잠겨서 눈물 반, 음식 반을 먹는 그런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13절은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렇게 우리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주고 배신한 사람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한번 뿐입니다. 안개처럼 쉬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내가 조금 손해 봤다고 해서 불편하다고 해서 사람들과 원수 짓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나가 살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적당히 죄와 타협하며 사는 모습은 베드로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다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이제 남은 여생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시기와 분노와 미움과 질투와 상처로 얼룩졌던 내 마음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자기를 배반했던 그 모닥불 앞에서 다시 용서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처럼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알콜 중독자였다가 지금 알콜 중독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 임효주 목사님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외롭게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가셔야 됐고, 그러다 보니까 늘 마음에 불안과 마음에 여러 가지 외로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포도주 찌꺼기를 먹고 술에 취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고3 때 교회에 갔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앉아 앞쪽 강단의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내 볼에 뜨거운 눈물이 타고 내리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고 바닥을 보니 눈물과 콧물과 침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이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책상 앞에 책을 펴는데, 마음이 너무나 평온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다음 다시 술꾼이 되었습니다. 매일 술과 함께 살았습니다. 해외 지사장으로 나가서 알콜 중독자가 되어가지고 결국 회사에서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다, 입원했다, 퇴원했다 하지만 입원했을 때는 끊는 것 같은데 나오자마자 또 술을 찾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심신이 황폐하게 되었고 그는 절망의 밑자락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서 자기 몸을 줄로 묶어보기도 하고 저녁 때 술집에 안 갈려고 문을 못질을 해보기도 하고. 그래도 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칼로 동맥을, 손을 그어보기도 하고, 또 소주를 한 박스 싣고 만취 운전을 하다가 크게 교통사고가 나서 크게 위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알콜 중독의 심각성을 표현합니다.

“알코올 중독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병이다. 처음에는 중독자 자신의 모든 사회적인 능력을 앗아가 버리며 이어 점차 중독자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 그 과정에서 재산은 다 소진되고 다음엔 서서히 영적으로 파괴되어 인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급기야 오로지 술만 탐닉하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이렇게 폐인이 되었을 때, 아내 손에 이끌려 기도원에 갑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하늘에 담배 연기를 내쉴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난 힘이 몰려오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음성이 벼락같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냐?’” 깜짝 놀라 담배를 던지고 예배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해가지고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고 그날로 술을 끊어버렸습니다. 신앙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선양원을 설립하고 알콜 중독자 및 가족의 치유, 회복, 자활 사역을 지금 전개하고 있습니다. 알콜 중독 치료 전문가로서 각종 세미나와 방송에 나와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방탕한 삶을 살아온 나를 하나님은 항상 인내해주셨고 회복되기를 기다려주셨다. 교회를 등진 지 수십 년 만에 돌아온 탕자를 하나님은 당신의 포근한 품으로 꼭 안아주시고 위로해주셨다. 이제야 비로소 사랑을 알고, 내가 얼마나 사랑을 받았고, 또 하나님과 사람들과 세상은 나를 얼마나 기다려주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을 주고 내가 기다려줄 시간이다. 그것이 내가 잃었던 그 사랑을 회복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우리 주님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 좌절과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끝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다시 회복되어지시기 바랍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해서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너무나 그 삶 가운데 주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삶을 살았는지 주님, 이 시간 회개하고 주님 앞에 새롭게 우리 마음을 다짐합니다. 주님, 이제부터는 우리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리고 돌아가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나의 잘못된 옛사람 모든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주 인/조용기목사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0~18)

우주 만물과 시간의 주인은 우리가 섬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일의 선악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시며, 모든 존재의 선악에 대한 판단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악이라고 하니까 모를 사람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모든 일의 좋고 나쁜 것은 하나님이 결정 하시고, 모든 존재에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판단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로서, 우주 내의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선악의 의견을 내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그게 좋다고 하시지만 우리 보기에는 나빠요. 하나님 나쁘다고 해도 우리 보기에는 좋아요.’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악은 하나님만 결정하는데 사람이 선악을 결정 내리려고 하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어디서 생겨났는가? 그걸 묻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마귀가 어쩌다가 마귀가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마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에 분명히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예배에서 마귀에 존재에 대한 일을 추상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마귀

마귀는 본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천한 천사장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동기로 탐욕이 들어와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도전하여 자기가 ‘좋다, 나쁘다’를 선택하고 결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선악 결정에 도전한고로 하나님 앞에서 반역자가 되고 쫓겨나 마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반역에 가담한 천사들도 악한 영이나 귀신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보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 세계 중간에 공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하고 우리 인생이 사는 이 세상하고 중간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가 존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공중에서 막아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내려오는 것도 공중에서 막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하는데 20일 동안 그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도록 공중에서 막았어요. 그래서 다니엘이 응답을 가지고 오는 천사가 20일 동안 마귀의 세력에게 공중에서 대결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더 강한 천사를 보내어서 도와주어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하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 응답이 힘이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보기에 참 좋았더라’고 했는데 유독 공중을 지으시고는 좋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나중에 사탄과 귀신들의 유배지로 당분간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다고 말 안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빛을 짓고 동식물을 다 짓고 사람을 만들고 그런데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했는데, 궁창을 지었을 때 공중을 지으시고는 좋다는 말 안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사탄이 어느 정도 정한 날짜까지 유배되어서 사탄들이 떼를 지어서 공중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6절로 8절로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좋더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장대한 우주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궁창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정해서 성경을 해석하면 인간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사이에 있는 공중이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처소인 것입니다.

우주에 물이 60% 이상 물로 되어 있는데 물도 아랫물,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물하고 궁창 위에 있는 물하고 갈라져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에 물로써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알고 나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훼방 놓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아 세상을 다스리도록 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드는 그것이 마귀가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슴이 어디에서 제일 아프냐?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하나님이 그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자식하고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원수가 되면 부모의 가슴이 제일 아픕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가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세상에 있는 불의와 추악 등 모든 죄의 배후에 반드시 사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 배후에 사탄이 있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언제든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여러분 우리를 유혹해서 하나님과 대결 시키려고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세계를 알아야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와서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속에 군대 마귀가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 군대 마귀를 사람에게서 쫓아내니, 이 마귀가 사람에게서 나가서 2천마리 돼지떼를 점령해서 모두 다 갈릴리 호수에 들어가 빠져 죽도록 한 기사가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무리를 이뤄 들어와 한 사람이 그런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보더라도 어떤 사람 속에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들어와서 인격을 형태를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야, 너는 네 이외에 두 사람이나 되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돼서 그러느냐?”, “마귀가 들어와서 그렇다.”

여러분, 가룟 유다가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 것 아닙니다. 성경에 가룟 유다가 마귀에게 자기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기로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자기가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마귀가 들어와서 예수님을 팔도록 한 것입니다.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음에 들어가서 탐심을 일으켜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속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 재산을 팔아서 그 재산의 일부는 숨겨놓고, 일부만 가지고 나와서 베드로에게 내놓았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너희 전 재산 손에 쥐고 있어도 다 네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네 것인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내 있는 재산 중에 얼마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해도 장한 일인데, 재산을 좀 감추어놓고 얼마를 가지고 나와서 “이것이 우리 재산의 전부 다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 자리에서 벌해서 죽게 한 것입니다. 이것 자기 재산을 내놓은 다음에하나님을 속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성령님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가지고 왔을 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도행전 5장 3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마귀가 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마음에 아주 들락날락하는 귀신이 재산을 숨겨서 하나님께 드리고 칭찬받으려고 하다가 벌을 받아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에덴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이 즉시 죽고, 영적인 존재가 육의 존재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속사람은 영이 살아서 육체 속에서 있었는데, 육체 속에 있는 영이 죄를 지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사탄이 그 육체 속에 들어와서 살게 됐습니다. 온 세상이 사탄의 천지가 되고, 사람들은 자유와 독립성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와서 직접 사람을 운전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비극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타락의 결과 다가온 심판

타락을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명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19절)

오늘날 우리 살아가는 환경에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괴로운 것은 땅이 저주 받아 사람이 피땀을 흘리고 살도록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여성은 어린 아기를 임신하고 해산하는 큰 고통을 더하도록 주님께서 명령한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애기 낳을 필요가 어디 있냐? 결혼을 안 하든지, 하더라도 애기는 없이 살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 바 있습니다. 아담은 먹고 살기에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한 땅에서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지으심을 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인간의 실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로마서 7장 14~15절)

이중인격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기도 살고 있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이중인격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속량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을 때, 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의 종으로 있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 때문에 그 죄를 짊어 졌거든요. ‘예수 죽음 내 죽음, 나의 죄를 예수님이 짊어져서 죽었다.’ 그 말을 속량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속량의 죽음을 당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중인격 속에서 안 살아도 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점령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마귀에 속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의 종 된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이 바뀐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는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는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인격, 사탄의 인격,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사람들이 모두 다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게 만들었으니깐, 이제 사탄은 우리에게 들어올 처소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죽음으로 죄의 세계를 청산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 받는 이 자리에는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어 같이 있지,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사탄이 주인이 아니므로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단호하게 예수님 이름으로 대적해야 될 것입니다.

4. 세상의 임금 된 마귀

세상의 임금 노릇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마귀가 한 것입니다. 악한 원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 마귀가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로 11절에 보면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완전무장을 하고 이제 사탄에 대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지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리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경쟁을 하고 살아가는데 사람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탄이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서 우리가 싸워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이라는 것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 된 사람. 영은 죽었고 혈과 육으로 사는데, 이제 혈과 육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혈과 육을 통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마귀와 대적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 마귀들이 통치를 하고, 권세를 행하고, 어두운 세상에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영이기 때문에, 그 사탄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무장을 하셔야 되는데, 에베소서 6장 14절로 18절에 보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허리를 굽혀서 많은 위증을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당당하게 진리로 허리띠를 띄어야 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했는데 의의 호심경을 가슴에 달아 방탄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히 무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대결하고, 말씀으로써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진 사람은 날마다 우리를 공격하는 걱정, 염려되는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장 24~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 되면, 먹고 사는데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탄의 종으로 있을 때는, 의식주 생활에 걱정을 하고 염려를 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 문제는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장 31~32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섬기고 살아가면, 우리 손과 발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탄의 계획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주님께서 우리 주인이 되시는데 자기를 섬기는 종들을 돌보지 못한 주인은 주인의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유는, 우리를 마귀에서 건지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몸 찢고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먹고, 입고, 사는 근본적인 생활도 책임지지 못 한다면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암송하면, 마귀가 유혹해올 때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협박공갈을 하고, 두려움을 가져올지라도,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대적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는 버림받았다. 너는 크게 낭패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사탄아! 너희가 거짓말 못 한다. 하나님 말씀에 써있다. 물러가라!”고 선포하면 마귀는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칼보다도 날카로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지고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주 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대적하고, 기도로써 대결하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반면에 아말렉은 호전적이고 전쟁 경험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하고 아말렉하고 광야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터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 고개에 모세가 가서 여호수아가 산 아래 싸우고 있는데, 두 손을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겨요. 그러나 팔이 아파서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져요. 그래서 모세가 팔을 늘 들고 있을 수 있도록 하려고 그에게 돌을 가지고 와서 앉게 하고, 그 양 팔을 한쪽에는 이쪽 팔, 모세의 팔을 들어주었어요. 그러니깐 앉아서 보조를 받고 손을 들고 있으니깐 이스라엘 백성이 싸워서 완전히 아말렉을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모범으로 보여준 것인데, 우리가 혼자 기도를 하면 지쳐서 기도를 그치기 때문에 마귀에게 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과로를 해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서 “주여,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그 능력이 전쟁터에 나타나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다리가 저리고 아파서 기도를 그치면 도로 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도는 대단히 효과가 큽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언제 전쟁의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처지에 있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온 국민이 긴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이럴 때 모세처럼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해요.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공산주의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열심히 기도해서 아말렉과 같은 원수를 정복하고 나가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안 있으면 잡혀서 심판을 받고 죽게 됐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시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은 기도함으로 밖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동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마귀의 혼돈의 영에 빠져서 다 잠을 자고, 예수님 혼자 기도하시는데 얼마나 집중적인 기도를 했던지 땀투성이가 되고, 나중에는 땀구멍으로 피가 솟아났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제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다 자고 있었는데, 그걸 보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가복음 14장 37~38절)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는 기도라는 무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이것은 우리가 승리하고 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로써,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대단한 권세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안에 있으면서 크게 발전한 것은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외국 교회들은 모이기는 모이는데,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부르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삶과 동등하게 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든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 이유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만든 사람이 주인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물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 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 값을 주시고 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산 사람이 주인이지, 구경꾼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만들어 주셨으니 하나님 것이요, 보혈로 값 주고 사셨으니 하나님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마음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로 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속에 일곱 마리 귀신이 들어가 있으니, 한 사람 속에 일곱 귀신 인격자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이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우리는 죄의 주인이 죄가 우리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므로, 하나님께 꽉 붙잡혀 있어야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주인이 되어 있으면 그 삶은 결국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성령으로 무장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항상 원수를 쫓아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주님이 우리의 주인인 것입니다. 주인이면 그 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적은 원수마귀입니다. 원수마귀를 끝까지 쫓아내고 주님의 은총으로 매일매일 충만한 생활을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늘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되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마귀의 유혹을 늘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고 인도함을 받아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부활의 은혜와 축복/이영훈목사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19~23절

0.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지금 우리는 죄와 절망 가운데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고, 죽음 이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 이유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면서 한평생 하나님 영광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1. 평안의 축복

  주님께서 주신 축복은 평안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20장 21절에는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문을 꼭꼭 닫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두 차례나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말로 ‘샬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샬롬!’하고 인사합니다. 만날 때도 ‘샬롬’하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도 ‘샬롬’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평안이 임하도록 ‘샬롬’하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샬롬’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이 아닙니다. 영원한 평안입니다. 영혼육의 전인적인 평안입니다. 이 평안이 넘쳐날 때 어둠이 사라지고, 근심이 사라지고, 걱정이 사라지고 주님의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영원한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 평안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가 임할 때 근심, 걱정이 다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12장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2.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3.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어떤 문제를 갖고 나오셨습니까? 어떠한 염려, 근심, 걱정을 갖고 나오셨습니까? 어떠한 상처로 인해 고통하고 계십니까? 십자가 밑에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이 주신 참 평안함으로 모든 결박에서 자유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때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여. 이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대한민국에 임하게 하여주옵소서. 저 북녘 땅에도 임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대한민국에 평화통일의 날이 속히 다가오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임하면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4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주님의 평안함이 임하고 난 다음 회복되어서 일어나서 활동하게 된 마틴 피스토리우스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평범하게 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년이었습니다. 12살이 되던 해에 목에 통증이 오더니 갑자기 먹지도 못하게 되고, 말도 못하게 되고,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의사들은 이 아이가 곧 죽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어서 누워있었는데 4년이 지나고 난 다음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신마비 상태였기에 의식이 돌아온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평생을 이렇게 내가 의식은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몸에 갇혀 죽어가겠구나.’ 절망했습니다.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저는 화분에 담긴 식물과 같았습니다. 물을 주어야 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모두들 익숙해진 탓에 제가 다시 의식이 깨어나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생을 혼자서 내면에 갇힌 채 살게 될 거라는 잔인한 현실이 덮쳐왔습니다. ‘나는 영원히 구조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저는 꿈도 희망도 기대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느 날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버지랑 다투고 난 다음 옆에서 이렇게 푸념하신 것입니다. 울면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네가 죽어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큰 충격이 다가왔습니다. ‘엄마마저 나를 버렸구나.’ 그 절망하던 때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마음에 평안함을 주셨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순간 마음에 평안함이 임했습니다.

  그때를 고백합니다. “완전하게 의식을 찾았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모르고 죄, 성경, 회개 등의 의미는 몰랐지만 그냥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몰랐지만, 하나님만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육신에 갇힌 상태에서 해방하셔서 구출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재활 치료사가 어느 날 의식이 돌아온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래서 재활 훈련을 하고, 조금씩, 조금씩 몸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컴퓨터 음성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고 공부까지 하게 돼서 대학을 졸업하고 웹 개발자로 사업도 하게 되고 믿음 좋은 자매(조안나)를 만나서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그리고 가장 작은 기도까지도 응답하신 은혜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에 한결같은 나의 친구로 함께하셨습니다.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만나던 그곳에 계심을 항상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고 나서 그 다음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그 사명이 무슨 사명이냐?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2. 전도의 축복

  전도의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는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 많고 어려움 많은 사람 가운데로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은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삽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영생의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예수 믿고 주님 앞에 나오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한 사람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회사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사업장에 있는 사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학교에서,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딜 가든지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니까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한평생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처해있습니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 소녀 가장들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전기담요 하나로 지내는 독거노인들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장애를 겪는 장애우들이 있습니다. 또 버려진 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미혼모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하며 인권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는 다문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사랑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품고 그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고 슬피 울며 외롭게 홀로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주의 사랑 들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케리 슉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에 품고 다니는 복음 자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신다. 메시지를 행동으로 옮기라! 세상 속에서 실제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라!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에게 복음이 되어 주길 원하신다!”
  ‘주여, 우리를 사용하여주소서.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하여주시옵소서. 죄와 절망 가운데 죽어가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예수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예수의 사랑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나아가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3. 성령 충만의 축복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오셔서 예수님의 일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성령 충만 받기 원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 받을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은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간절히 기도할 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반드시 받아야 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늘 시험에 잘 들고, 상처 잘 받고,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 이러한 분들은 자기 감정에 충만해서 쉽게 화내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받으면 달라집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개의치 아니하고, 환난과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싸워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오니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를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살리는 영입니다. 치료의 영입니다. 회복의 영입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영인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연히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권능이 임해야 합니다. 왜 권능이 임합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권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우리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 삶 가운데 넘쳐나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참지 못합니다. 쉽게 분노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미워하고, 다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기쁨이, 주님의 평화가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 충만 받고 복음을 증거 하기위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 가운데 상처를 주고, 내 마음에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4. 용서의 축복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부활의 메시지의 완성이요,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값없이 용서해 준 것처럼, 그것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희생의 값을 치루시면서 우리를 용서해주셨는데 우리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값없이 용서를 받고나서도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싸움은 상대편을 때려눕혀야 이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싸움은 용서해야 이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최선의 복수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용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때 응답이 다가옵니다. 기적이 임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 마음에 치료가 강물처럼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천국 열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천국 열쇠를 소유하는 능력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해야만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있고 상처받은 것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면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 열쇠를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은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자기 뺨을 때리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까? 요즘 사람들 중에 누가  한 빰을 치는데 아주 두 뺨을 때려라고 내 주겠습니까?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합니다. 누가 나를 모욕하면 견디지 못하고 분노합니다. 이미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실 여부도 확인해보지도 않고 분노에 치를 떨면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까지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저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이 좁은 땅에 살면서 우리가 너무나 그동안 많이 다투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했습니다. 나와 다 다르면 적이라고 생각해서 심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문제가 그로 인해서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책임이 큽니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가 남북이 나눠져 있는데 또 동서로 나눠 서로 다투게 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는 결박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었던 모든 기록이 나를 칭칭 감고 있어요. 그래서 보통 때는 잘 모르는데 내가 좀 약해지면 내가 기도하지 아니하고, 내가 예배드리는 데 소홀이 하고, 내가 주님 말씀 묵상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삭 솟아올라 와서 우리를 다시 얽어맵니다. 우리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미워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화내게 하고 다투게 만듭니다.
  주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용서하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사로잡혀있는 나를 주님 불쌍히 여겨주셔서, 예수의 사랑으로 예수의 용서로 모든 미움과 아픔의 결박을 풀어버리고 참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전신 마비 사고를 당한 후 30년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며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 경찰을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뉴욕경찰이었던 스티븐 맥도널드는 1986년 맨하탄 센트럴 파크를 순찰하던 중에 15살 소년이 쏜 세 발의 총을 맞고 심지어 총알 하나가 척추를 관통해서 목 아래쪽을 영원히 쓸 수 없는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습니다. 경찰이 된 지 2년 밖에 안 됐는데 그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때 아내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웃고 나갔던 자기 남편이 총에 맞아갖고 온몸이 불구가 되어서 병원에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그 가정에 고통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 경찰은 주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아들을 보면서 용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한순간에 저는 활동적인 경찰관에서 몸도 못 가누는 범죄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고 6개월 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은 저에게 살아야 한다고,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지 같았습니다! 저는 그 메시지에 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저를 쏜 젊은 친구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건 발생 후 9개월이 지난 1987년 3월 1일, 휠체어를 타고 아들의 유아세례 참여 후에 자신에게 총을 쏜 그 소년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있는 소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 소년이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 자기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소년을 용서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고 믿으니까요.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분노는 감정 낭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용서한다는 것이,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어요.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저 자신도 악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어요. 그 사고는 내게 호된 신앙의 시험이자 나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주고, 내면과 영원에 집중하도록 해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여러분, 화난다고 다 화내지 마세요. 그건 다 감정 낭비라고 그랬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고 웃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루가 멀다고 부부싸움을 하는 집 봤어요. 그냥 부부싸움을 안하고 그날 하루를 안 지나가면 섭섭하대요. 또 싸우고 잠자리에서 또 싸워요. 그렇게 살아서 서로 그렇게 상처에 상처를 입히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용서를 실천하고 용서 캠페인을 벌입니다. 폭력 끊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학생들을 계몽합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미국의 학교 588곳을 방문해서 말씀을 전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감동을 끼쳤습니다. 살아있는 성자, 진짜 영웅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시장, 시경국장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나와 애도했습니다.
  그가 활동한 폭력 끊기 프로그램의 주체자인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 목사님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관계 속에서 깨어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열쇠다. 증오를 증오로 갚으면 증오만 더 증식시킬 뿐이며,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짙은 어둠만을 더할 뿐이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이 미움을 몰아낼 수는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은 미움을, 폭력은 폭력을, 그리고 가혹함은 가혹함을 낳는다. 사랑만이 오직 적을 친구로 변화시킬 힘이 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기도 너무 짧은 인생길을 살아가는데 미워하고 다투고 욕하고 성질내고 살다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서서 뭐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서 이와 같이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주여, 이 땅에 평화를 주옵소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주옵소서! 성령 충만을 받고 용서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연약해서 용서하지 못합니다. 쉽게 분노합니다. 쉽게 상처받습니다. 그런 나 자신에 갇혀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오늘 이후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나/조용기목사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장 1~8절)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확실히 죽으시고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처형은 로마 시대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고문을 당하는데 이때 받는 태형은 매우 끔찍했습니다. 채찍에 뼛조각을 박아 넣어서 한번 때렸다가 채찍을 당기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왔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이 채찍으로 맞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형벌도 받기 전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그 제자들이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려고 할 때, 로마 군인이 와서 창을 가지고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성경에 보면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이미 세상을 뜨신 예수님의 시체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폐와 심장에서 물이 고였다가 흘러나온 것으로 주님이 죽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확실함 (확실히 죽으시고 확실히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의 손에 잡혀 처참히 고통을 당하시고 만인이 보는 가운데 갈보리 산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가 죽으면 들어려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또 제자들 중에 도마라는 제자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기가 막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온갖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고 원수들에게 잡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떠도는 소문으로만 들었다면 순교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가짜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미국의 리 스트로벨이라는 사람이 실화를 담은 영화를 제작해서 내놓았습니다. 리 스트로벨은 미국의 예일대학 법대 출신으로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 담당 기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요 베스트셀러 작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생활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증인들이 참 많습니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증인들이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로 14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20장 15절로 1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제일 처음 만난 분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모이는 곳에 뛰어가서 알리는데 제자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곁에 와서 그들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로 16절에 보면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두 제자가 걸어가는데 곁에 와서 함께 걸어가는데 예수님인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복음 24장 29절~31절)

  주님이 그들과 헤어지려 하자, 제자들은 예수님 함께 이야기를 좀 더 하기 위해서 여관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쉬고 같이 가자고 권유하고 예수님을 인도해서 여관에 들어가서 식탁에서 밥 먹으려고 할 때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를 하고 나누어 주니 떡을 받자 예수님인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두려워해서 또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여있던 곳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 20장19절~20절)

  그러나 그곳에 없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를 않습니다. 며칠 수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로 28절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동분서주 하시면서 제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있은 이후에도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한복음 21장 1절~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새 그물질을 하던 제자들이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해변가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에 뭐 고기가 있느냐?’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때 물고기가 심히 많이 잡힙니다.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다. 저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 아니냐?’라고 외칩니다.

  제자들이 빨리 배를 저어서 해변에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장작불을 펴 놓으시고 고기와 떡을 구워놓고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바다에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감격하는 모습을 봅니다.

  갈릴리의 산 위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날 처소를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태복음 28장16절~17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일시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로 8절에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팔삭둥이 같은 자기에게도 주님이 나타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을 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5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9절로 11절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본 것이 아니라 수 백 명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부인하려고 달려들면 부인할 수 없고, 긍정적으로 살아난 사실은 너무 증인이 많아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2. 죄책감에 짓눌린 베드로를 용서하심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신 큰 일이 있습니다. 제자 중에 수제자라고 자랑하던 베드로가 이제 주님을 따라다니던 삶을 중지하고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디베랴 바다에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알고 그를 만나 주시고, 치료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을 때 두 번은 모른다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결단코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생애에서 제자들의 격려를 가장 필요로 할 때가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그 곳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다 떠나고, 심지어 두 번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도무지 그를 모르노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선생님을 심적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때 격려하는 말 한마디 안 해주었으니 그 죄책이 베드로를 짓눌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떡을 주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은 이미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꿇어 앉혀서 ‘야 이 비린내 나는 고기잡이야, 나를 그들 앞에서 저주 하고 맹세해서 가로되 네가 나를 모른다고 그랬지? 내 얼굴을 쳐다봐. 알겠나? 모르겠나?’라고 말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떡 다 먹이고 생선 구은 것 먹이고 난 다음에 “베드로야, 너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사람의 사랑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때 주님이 “내 양을 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 세상에 자기처럼 못 믿을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주님이 양을 치라는 것은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예수님이 두 번째 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하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다시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주님이 또 한 번 “내 양을 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한참 있다가 예수님이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할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세 번이나 부인한 저를 보고 지금은 인간적인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두 번 말을 했는데 이제는 진짜 인간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나도 몰라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또 다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아주 고약한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제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넘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5절~1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줄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자격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로서는 그날이 재생하는 날보다 더 중요한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인 이상 삶의 형편에 따라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앙에 잘못된 행동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도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죄책에 눌린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 신앙을 회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해 버렸어요.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이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의 값이 1천원이라면, 예수님은 1천원짜리 죄를 청산할 때 주님의 피 값은 1조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평생 지은 죄를 다 값으로 치면 천 원입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은 1조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여러분 죄는 예수님 은혜 속에서 흔적도 없어집니다. 엄청난 은혜로서 우리를 씻어주고 용서해주고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갚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가치 있는 예수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귀가 우리를 참소할 수 있을 정도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를 지적당해서 심판 받는 일이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렇게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내 팔자 좋게 죄 짓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속에 들어와 거하심으로 성령의 꾸짖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여러분에게 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팔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줄곧 서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를 찾아서 나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목자보다 더 먼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분에서 인간의 신분이 되기까지 죄인들을 찾아 무한히 먼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 인간의 신분이 필요함으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일생을 뒤를 쫒아서 따라오며 여러분을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여러분과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대신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여러분 대신에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닙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끌어 모아서 그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이 부활절 날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생명 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받은 의인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전신이 살이 떨어져 나가고 가죽이 벗겨지고 했는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병을 앓고 있으면 주님에게 미안해서 못 견딥니다. 사실 주님은 여러분 병 때문에 자기가 얻어맞은 것입니다. 대신 채찍에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대신 병의 채찍에 맞았는데 이제 왜 또 우리가 병들어야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대속해주신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건강하기 위해서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대신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죄를 대신 갚아주셨고, 여러분의 병을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셨고, 여러분의 저주를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피를 흘리셨는데 구약에는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은 나무에 매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비극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가시와 엉겅퀴를 당신 몸에 받아서 대신 찔리고 이 고달픈 인생살이를 대신 살아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병을 감당하셨으니, 주님이 갚아주신 것만 해도 한없이 감사한데 내가 무슨 자랑한다고 병을 짊어지고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님이 내가 너희 병을 대신 짊어졌다고 말씀하시니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믿고 나가야 돼요. 건강의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4로 7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리는 현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살아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미래에 있을 우리의 부활이 확실히 증거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 우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 그 능력으로 부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지나간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사건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해서 지금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영으로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주님 만나달라고 기도하면 여러분이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어려운 환경이 닥쳐올 때마다 이렇게 소리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다.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다!”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앎으로 굉장한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계심으로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 질병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대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이 원수들과 싸울 때, 용기와 힘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함으로 종교개혁이라는 과업을 완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20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사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매순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바라보고 박수를 쳐야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찬양을 불러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가 같이 계시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장 30절~31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일치가 되고, 예수님이 여러분과 일치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안에 들어와서 우리 죄와 용서가 되시고, 우리 치료가 되시고, 우리 아브라함의 축복이 되시고, 우리의 부활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원수들을 다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날 대신해서 나의 인생의 부정적인 세력을 멸하시고 예수님 당신의 부활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 받은 의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치료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승천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믿지 않는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완전히 거듭나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건강한 사람,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 부활을 얻은 사람, 성결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 그것을 우리가 알고 믿고 입술로 시인해야 예수님을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정체성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질병을 담당하셨고, 몸이 찢어졌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매달려 저주를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 대신해서 죽어 사망과 음부를 쳐서 멸하고 부활과 영생을 가지고 나와서 여러분에게 한없는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 것이 된 것을 스스로 알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꿈꾸어 보고, 힘껏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체험을 해야 되고, 새사람이 된 것을 끝까지 믿고 여러분 생활에 그런 열매가 맺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죄와 저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흑암에서 건지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늘 이 사랑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제 더이상 죄와 저주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으로, 성령충만하며, 복된 삶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제사장의 기도/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야훼는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면”
제사장 선포통해 이스라엘에 복 주신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의 수여자이심 인정해야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대제사장의 삼중 축복 기도가 민수기 6장 22∼27절에 언급되어 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광야로서 뱀과 전갈이 돌아다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없는 공포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의 여행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아론의 삼중 축복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담대함의 기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사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예수 안에서 아론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서로에게 선포하며 힘과 용기와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삼중축복은 첫째로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녀와 재산, 땅, 건강, 그의 임재라는 복을 주신다(창 17:16; 22:17∼18; 레 26:3∼13; 신 28:2∼14). 나아가 이러한 좋은 선물뿐 아니라 모든 위험에서 그를 보호하게 하시고(욥 1:10), 각종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지켜주신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신다는 비유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과 부합된다(시 31:16; 67:1). 그는 곤경에 빠진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사 대적과 질병과 죄에서 건져 주신다(시 4:1; 6:2; 51:1). 어려운 사람을 보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그에게 실망과 낙심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인생을 감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한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이다(창 43:29; 시 4:6).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평강이다. 그것은 전쟁과 소요가 없는 평화의 상태뿐 아니라 풍요와 건강, 번영, 구원 등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모두 세 구절, 15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구절은 각각 3단어, 5단어, 7단어로 점층적으로 많아져서 축복이 강조되고 깊어지고 있다. 또한 구절마다 야훼 이름이 한 번씩 들어 있어서 모두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야훼 이름이 주어로서 한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지만 굳이 세 번을 반복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훼 이름을 빼면 12단어가 남는다. 이는 복을 받는 사람이 12지파임을 상징한다. 복은 결코 사람인 제사장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매달려도 안 되고, 복 자체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야훼의 복주심이 아론과 그 아들들로 대표되는 제사장들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적시는 것과 같다(시 133:2).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생각과 꿈과 믿음, 특히 축복의 말의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나아가서 아론의 삼중적 축복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축복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축도와 연관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종의 축도가 선포될 때 온전히 예배가 마무리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과 마음의 복과 물질적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열두 해를 혈루증 앓은 여인/조용기목사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 5장 25~34절)

  혈루증은 나병처럼 불결한 병으로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데, 가족들과도 격리되어 살아야 하니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마귀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공격을 밝히 이 부인의 병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은 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도리어 병이 중해지고, 가진 재산마저 치료비로 모두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은 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병에 걸리면 가정 전체가 흔들립니다. 병에 걸리면 치료비 때문에 가계 경제가 위태롭게 되고, 그러다보면 가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이혼이나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는 것이 현재 많은 사건입니다.

 최근에는 노년에 병이 들어 의료비를 인하여 파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5세부터 사망 시까지 예상되는 의료비가 8,100만 원이 듭니다. 한국 사람의 사망 원인 제 1위가 암인데, 암은 1인당 치료비용이 간암의 경우는 6,600만 원이고, 폐암의 경우에는 4,600만 원입니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으면 대부분 일을 그만 두게 되는데, 소득은 줄고 의료비 지출이 많아져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 중 누가 큰 병에 걸리면, 환자의 인생뿐 아니라 가정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1. 병의 배후 세력인 마귀(이와 같은 병에는 뒤에서 영적인 억압을 하는 마귀가 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람들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 배후에는 원수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의 뒤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병이 걸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5절로 27절에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 가시든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짓밟는 것이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가 나가야 기쁨도, 평안도 회복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망과 꿈을 빼앗는 것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등대를 꺼지게 하는 것도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 수 없다, 못 한다,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넣는 것도 원수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그러니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혈루증과 싸운 여인

  혈루증에 걸려 12년 동안 고통받았던 여인의 이야기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온갖 좋다는 약과 치료를 다 받아도 아무 효과가 없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마가복음 5장 25절로 26절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료를 하였으나,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고통만 다가옵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를 이 혈루병과 싸우다가 지치고 피곤해져서 삶의 희망이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어둠의 세계가 꿈과 희망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절대 절망이 억압함으로 살아갈 길을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늘을 쳐다봐도 갈 길이 없고, 땅을 봐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병으로 인하여서 정신적인 고통이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입니다.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사람은 보통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공중 모임에 가지도 못하고, 성전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시체에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기 몸에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된다니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 예수님에 대한 소문 (누가 이 여인을 살려낼 것인가?)

  누가 이 여인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보다도 소문이 많습니다. 거짓말도 많고, 참말도 많습니다.

  이 여인이 살던 시대에는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이 삶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기쁨의 소문에 들려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없는 이 여인은 시장터에나 군중들 모인 곳에 숨어서 다니다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손만 대면 낫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좌절되고, 절망이 가슴을 짓누르고, 희망이 없는 이 여인에게 이 소문은 햇빛과 같이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을 넣어주고, 죽음에서 생명을 넣어주고, 생기를 넣어주는 중요한 소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소문을 듣고 마음에 기쁨이 넘쳐오고, 살 희망이 다가왔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의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 죄를 사하여 주는 것뿐 아니라, 병 고치는 것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3분의 2는 병을 고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병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병자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 고쳐주셨으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만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혈루병 앓은 여인도 좌절하고 절망하고 올 데 갈 데 없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마음에 소망이 생깁니다. 희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 여인이 병을 치료받게 된 것은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 지어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고 소문이 나서 그렇게 믿고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사람은 다 나음을 입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이 여자는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면 낫는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예수님께 가면 나도 살 수 있겠구나!’하는 꿈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는 꿈을 꿀 수 있으면 내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세계적인 강연가로서, 한번 강연에 최고 8억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강연할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목표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그는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위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됩니다(If you don’t set goals for yourself, you are doomed to work to achieve the goals of someone else.).”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되고, 목적을 따라서 내가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우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목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따라서 꿈을 꾸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 꿈을 이루도록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꿈을 주고, 목표를 주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건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과 꿈을 버리고 믿음을 포기하며, 부정적인 말을 하면 마귀의 노예가 되고, 도적질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을 품고, 꿈을 바라고, 믿음을 선포하면 마귀의 일을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가지고, 소망 찬 꿈을 꾸고, 꿈을 가슴속에 품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가면 한 길로 왔다가도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음의 사람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장애물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은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다닌다. 이런 사람은 가장 편한 길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가장 험한 길도 뚫고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말했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반드시 낫겠다”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장애물을 다 이기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가족들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이웃도 못 만나고, 공중에 나가서 혈루병을 앓은 여인이 사람들에게 섞였다고 알면 사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사형에 처하는 그러한 위험한 행동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나 깨나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서 낫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이 하루 자기가 있는 곳을 지나갈 때, 그는 결심하고 군중 속에 헤치고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마자 나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목적과 꿈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기적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망과 내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꿈인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소망이 있고,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마귀에 대적하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앞뒤에 따라오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와 싸움을 등한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모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옷자락에 손을 대어 병이 낫는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행하면, 성령께서 같이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항상 긍정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못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긍정적이고, 항상 꿈을 가슴에 품고, 꿈을 바라보고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꿈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이루어진 모습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상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과 긍정적인 꿈을 안고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사망의 세력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움직여서 임하는 것입니다. 

  일단 믿음이 생기면 늘 이 여인처럼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혼자 걸어가면서도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낫는다.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낫는다. 나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나으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한 것입니다. 입술로 신앙을 적극적으로 고백하면 그것이 굉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속에 꿈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항상 시인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늘 자신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병든 사람은 “그자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장 5절)는 말씀을 끊임없이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 말이 태산을 넘고, 바다를 가르며, 기적을 행해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인생이 새로워져서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소문을 통해서 생각이 긍정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말한 것도 여러분 생각의 영향력을 미쳐서 여러분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말을 하는 친구를 사귀고,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서 마음이 기쁘고 감사한 생각이 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꿈은 항상 이루어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응답의 주머니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꿈을 가지고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에 해당하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꿈이 있으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믿음도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애썼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꿈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쳐다보게 하고, 별들을 헤아리게 하십니다. 마음에 꿈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꿈의 사람이 되자 비로소 응답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무엇을 바라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꿈으로 꿈꿀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꿀 수 없으면 종이를 끄집어내어서 적어야 돼요. 기록하면서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모습을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마음판에 새기고, 벽에다 붙여놓고, 들어오며 나오며 그것을 읽고 꿈을 꾸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긍정의 영이십니다. 꿈으로 마음이 준비되고, 늘 긍정적인 생각과 고백을 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성령은 긍정적인 생각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같이 역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꿈을 꾸는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꿈을 심어주고, 꿈은 여러분 인생을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은 다 도망을 치고 흩어집니다. 베드로는 도로 물고기 잡으러 가고, 아무도 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두려워 떨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시면서 그들에게 꿈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는 꿈을 꾸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고 난 다음, 제자들의 마음속에 꿈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이르러 말씀을 증거하는 꿈을 받은 사람은 그 꿈 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오늘날 복음이 온 천지에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들어오면 여러분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와서 단순히 방언이나 하고, 진동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꿈을 놓치지 아니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상당히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한국에 교회가 있고,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질문을 종종 해 옵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 한국에 훌륭한 정치인이었던 한 분이, “목사님, 어떻게 할까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이 살아나가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꿈을 꿉니까?”, “꿈을 안 꿉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지요.”

  비록 현실에 참으로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꿈을 꾸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입을 넓게 열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꿈이 임하여 옵니다. 꿈이 오면 그 꿈을 따라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폭풍우가 불어와도 그 바람을 이용해서 풍차를 돌릴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이 내일을 향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이상 한국은 끄떡없습니다.

  내가 그 정치인에게 “희망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한국에는 나같이 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꿈을 꾸고 있으니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깐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꿈이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꿈도 없는 사람이 믿는다고 해가지고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못 믿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마음에 생겨서 일단 마음에 평안이 오면 그 믿음을 계속해서 반복 말을 해야 됩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믿음의 사역을 입술로 고백을 하고 시인을 하면, 그것이 굉장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혈루병 앓은 여인은 그대로 놔뒀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었을 것인데, 떠돌아다니는 소문만 들어도 그 소문을 깊이 생각해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그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그 꿈속에 살 때, 그 기회가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꿈 꾼대로 군중 속에 헤치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니깐 깜짝할 사이에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담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기적이 일어나지, 만나보지 못 한다면 헛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큰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 앞에 나가서 예수님을 만나서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기적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지금까지 너희는 내게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가고 난 다음 이제부터 내게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구하고, 믿고, 감사하고, 따라가면 기적이 일어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수마귀는 어둠에서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원수마귀에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갖지 않고, 그냥 빈 손들고 왔다갔다합니다. 어떠한 기적도 기대하지도 않으면 마귀가 성공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지면, 기쁨과 감사는 마귀하고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가지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믿음을 가지고, 계속 입으로 시인하면, 기적이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곱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를 하십시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한 번 제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십시오. “아빠! 아버지! 나는 아버지께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도 “오냐,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뭘 원하니?”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굉장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할 때,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같이 계시므로, 성령은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주십니다. 어제 어떠한 외국인이 제게 “한국은 상당히 위기에 처해있고, 한국이 이렇게 살아나갈지 모르겠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한국을 모릅니다. 한국은 이보다 더 어려울 때도 살아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국는 6만여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속에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함께 계신 이상, 우리는 살 것을 생각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생각합니다. 새벽기도에, 철야기도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우너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이 모여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께서 우리 국가에 임하여 계시고, 우리 성도들 가슴속에 임하여 있으므로, 우리가 성령과 더불어서 생각을 같이 하고, 꿈을 같이 하고, 그리고 믿음을 같이 믿고, 입술로 창조적인 고백을 같이 하면,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고, 죽음은 변하여 생명이 되고, 실패는 변하여 성공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장 38절)고 하신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뒤로 물러가지 말고, 두려워하고 놀라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 앞서 나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이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마귀는 부정적인 생각,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심어주시만, 악한 마귀가 주는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성령 안에서 늘 긍적적인 꿈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 안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기사입력 : 2017.04.09. am 12:44 (편집)
 


고난의 유익/이영훈목사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명기 8장 2~6절)

0.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인생을 고난의 바다라고 말합니다. 바다에 끊임없이 물결이 치고 풍랑이 이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이라고 하는 풍랑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예기치 않던 문제와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늘 좋은 일만 있고 상처 받을 일 한 번도 없다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와 어려움 때문에 많은 상처 자국을 남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고난의 풍랑이 커지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를 훈련시키고, 더 좋게 만들어주시기 위한 삶의 과정, 훈련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믿음을 견고히 해서 십자가 붙잡고 말씀 의지하여 전진하여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잘 받고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 꿈과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축복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큰 환란은 더 빨리 우리를 축복으로 이끌어가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훈련시키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1. 광야 학교의 연단

  신명기 8장 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애굽을 벗어나서 만난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모세가 그들보다 먼저 40년 광야 학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입양이 되었어요. 그리고 궁중엣 왕자의 신분으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모세는 유모로 왕궁에 들어왔던 자신의 친 어머니로부터 본래 히브리 민족이요,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고 부족함이 없는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늘 잘되다보니까 마음에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낼 수 있겠다.’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애굽 관리를 쳐 죽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따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소문이 바로의 귀에 들리게 되고, 왕이 진노하여 그를 잡으려 합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을 빠져나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광야에 머무르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양치는 목자 생활을 합니다. 당시 가장 천한 일을 하면서 40년 세월을 보냅니다.
  바로의 궁궐에서 40년간의 황금기를 지냈던 모세는 그 다음 40년동안 먼지가 나고,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그리고 독사와 전갈이 있는 광야에서 양들을 치며 40년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제가 우리 임연심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던 투르카나에 가 보았는데 그곳에서 ‘이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불평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균 기온이 무려 50도입니다. 무덥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 비가 내려 온도가 3~4도 정도 내려가니 사람들의 입에서 ‘시원하다’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그래도 46~7도인요. 때약볕 밑에는 가시덤불밖에 없어요. 먼지 나는 모래, 광야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란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에서 모세가 40년을 양들과 씨름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더구나 풀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참 고달프고 힘든 삶이었을 것입니다. 광야 훈련을 받으면서 모든 것을 잃었던 모세는 오직 주님밖에 바라볼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고, 40년 되어서 백발이 성성한 80세이 되었을 때 모세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제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하던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가 가장 힘들어 하던 것은 바로 외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외로움. 궁궐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고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물론 미디안 광야에서 만난 십보라와 결혼을 하여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지만, 진짜 자기의 가족은 다 애굽에 두고 나왔잖아요. 밤마다 잠을 잘 못 이루고 애굽 땅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님, 형님, 누님, 친구들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외로움의 광야는 참 길고 먼 길입니다. 우리나라 노래도 있어요.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왜 이렇게 노래를 구슬프게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훈련을 통해서 그가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깨어져서 낮아지고 변화되었습니다. 거칠고 교만하고 자기 밖에 모르던 그가 얼마나 깨어졌는지 민수기 12장 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모세가 막 비판을 받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여러분이 광야 학교의 훈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고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병실에 누워서 몇 달 동안 병실 광야에서 고통을 당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이 파산이 되어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어 여기저기 돈 빌려 다니며 그 말 할 수 없는 고통에 살았던 그러한 사업 실패의 광야를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모든 것이 여러분 훈련시키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연단시키는 과정인 것입니다.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또 깨어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에 얼마나 불평을 많이 했던지 주님이 저들을 징계하시고 또 징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5절에 보면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깨뜨리고 또 깨뜨리셔서 철저히 준비시키신 후 하나님의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잘나가던 청년으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점점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서 감옥에 집어넣는 것을 하나님 뜻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더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다메섹에 있던 예수 믿는 사람 잡으러 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꼬꾸라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한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광야에서 3년 동안 기도하고 준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님 제일주의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더라도 여러분이 삶의 중심이 되면 삶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지 어려운지 모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위대한 고백을 하는 것을 봅니다.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내가 죽으면 되요. 내가 살아있으니까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그렇죠, 내가 죽었으면 죽은 사람이 무슨 미워할 일이 있고 분노할 일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고집, 교만, 불순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늘 본인이 잘난 부분이 있었거든요. 공부도 제일 많이 한 그 최고 학벌에서 좋은 학교 나와서 공부를 했지요. 좋은 가문에서 자라났죠. 나면서부터 시민권자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죠. 너무 자랑거리가 많았어요. 내가 살아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던 바울은 철저하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은 강아지는 꼬리를 밟아도 걷어차도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살아있는 강아지는 꼬리만 밟아도 ‘으르릉’거리며 덤벼듭니다.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들이 죽으면 누가 와서 시비를 걸어도, 걷어차고, 헐뜯고, 비판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으니까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변화되고 치료받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숙자로 살다가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택시 기사가 된 백중선 집사님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가 쓴 책 『사랑의 택시 인생극장』,『달리는 복음 택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지금 오륜교회 집사님이신데요. 택시를 타는 승객들에게 말합니다. “이 택시는 묻지 말고 타세요. 승차거부 없는 사랑의 택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래 백중선 집사님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사장이었습니다. 30대에 잘나가는 사장이었습니다. 직원도 200명을 넘었으며, 수익도 좋았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버니까 쾌락에 빠져 살던 그가 IMF를 당하면서 보증선 것이 잘못 돼서 빚을 떠안게 됨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집에 들어갈 명목이 없어서 10년 동안 나와서 떠돌아다닙니다. 자살하려고 약을 한 움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어쩌다가 집을 잠깐 들르면 늘 눈물로 기도하던 아내 김점순 집사가 그의 손을 붙잡고 돈을 쥐어주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죽지만 말고 살아 있어줘요!”
  하루는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죽으려고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환상에 보이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너를 위해 준비된 것이 많이 있다. 나를 믿고 살아라!”
  그러다가 목포에서 한 나이 많은 부부를 만나 권면을 받고 노숙자 생활을 끝냅니다. 남편 되신 분이 말합니다.
  “나도 부산에서 신발공장 하다가 부도가 나서 혼자 야반도주하려다가 자고 있는 마누라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떨어진 내 눈물에 잠이 깬 마누라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해서 이렇게 목포에 와서 재기하고 살고 있소. 당신한테도 재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 살 길을 찾으시오!”
  그래서 서울에 와서 택시 운전면허를 받고 택시 기사가 됩니다. 10년 동안 광야 생활에 다듬어지고 다듬어져서 거칠고 난폭했던 그가 온유와 사랑의 모습으로 만나는 모든 승객을 잘 모시니까, 그리고 자기의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간증하고 전도지를 전해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신문기자가 택시를 탔다가 그 얘기를 듣고 “선생님 그것 좀 책으로 내보세요.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해서 책 두 권이 나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방송국 여러 곳에서 출연 초청을 받고 나가서 이제 간증을 하고 또 본인이 살아온 인생을 얘기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 노숙자였던 그를 이렇게 변화시켜주셔서 사랑의 택시 운전사로 사람들을 감동 시키는 일꾼으로 변화 시킨 것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저는 하루에 약 30-40명의 손님을 태우고 다닙니다. 저도 죽을 만큼 힘든 시절을 겪어봤기에 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상담해드리지요. 그런 분들이 제 애기를 듣고 힘을 낼 때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삶을 포기한 채로 긴 방황을 한 것도 이렇게 택시 기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주님 믿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회에 작은 빛이 되어 소금의 본분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광야 학교 훈련에서 우리에게 고통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말씀의 은혜입니다. 

2. 말씀의 은혜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학교 훈련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쉽게 부정적인 말, 없는 말, 남을 상처 입히는 말을 하고 또 옮깁니다. 얼마나 요즘 가짜 뉴스가 많은지 대통령 선거 끝날 때까지는 온 국민들이 그 가짜 뉴스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말고 바른 뉴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 음성 앞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치료가 있습니다. 용서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삶에 기쁨과 용기와 희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축복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면 복이 임합니다. 신명기 8장 6절에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 학교 훈련을 통해서 내가 깨어지고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시편 18편 1절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축복의 환경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신명기 8장 7절로 8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가나안 땅은 곡창지대는 아닙니다. 골짜기가 있고 산이 높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땅을 옥토와 같이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11장 12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야훼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잘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6.25 직후에 1인당 국민 소득이 67달러였는데 지금 2만 8천불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천 2백만 기도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있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에 이렇게 큰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어떻습니까? 공산당이 들어와서 모든 교회를 다 문 닫아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목사들은 총살했습니다. 해방 전에 교회가 삼천오백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봉수교회, 칠골교회 등 상징적으로 두 개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 북한이 될 일이 없는 거예요. 남한은 농사만 지으면 풍년이 돼서 쌀이 너무 많아가지고 오히려 너무 많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북한은 또 너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쪽은 농사를 지으면 또 풍년이지만, 북쪽은 농사를 짓지만 흉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다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너무나 다른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때문에 북한이 살 길은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11장 13절로 14절을 보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야훼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신명기 8장 9절로 10절은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을 주셨어요. 땅속엔 지하자원이 많고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들고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다 광야 고난을 잘 통과하고 깨어지고 낮아진 다음 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6절에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로 3절은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학교 훈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광야 같은 힘들고 어려운 시험들이 다가올 때 엎드려 기도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광야 학교 인생에서 예수님 만나서 훌륭한 주의 종이 된 조병호 목사님 말씀에 대해서 제가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이분은 젊었을 때 케로부대 출신, 유격부대 출신으로 북한에 일곱 번 들어갔다 살아 나온 분입니다. 그래서 황해도 일대에는 포스터가 붙고 이 사람을 잡으면 현상금을 준다고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난폭하고 거칠고 고집불통이었습니다. 헌병대 책임자가 됐는데 인천에 밀수하는 사람들이 늘 돈을 많이 갔다 줘서, 서랍을 열면 돈이 가득가득 차 있었답니다. 매일 저녁 세상 쾌락에 빠져서 술을 먹으면서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누가 밀고해가지고 그만 그 자리에서 직위 해제되었어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국가 유공자를 나라에서 잘라 버렸다’
  그래서 나올 때 권총 한 자루를 숨겨가지고 가슴에 품에 넣고 나를 해고시킨 이승만 대통령을 쏴 죽이겠다고 이러고 다녔습니다. 밤마다 술 먹고 쓰러져 자면서 점점 자리를 옮기고, 옮기고 해서 간 곳이 서울 끝자락 대조동 어느 한 집에 방 한 칸을 얻어가지고 거기서 살게 되었는데, 밤마다 술을 먹고 들어와서 울었어요. 그런데 그 집에 또 다른 방 한 칸에 웬 아주머니가 밤마다 우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그분이 최자실 전도사님입니다.
  어느 날 그날도 밤에 술 먹고 들어와서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젊은 양반, 왜 밤낮 그렇게 울어?’ ‘네, 제가 너무 원통해서 웁니다. 내가 이렇게 나라의 큰 공로를 세웠는데 인정하지 않고 나를 이렇게 쫓아버렸으니, 내가 원통해서 못살겠습니다. 내가 꼭 이 원한을 풀고야 말 것입니다.’ ‘젊은 양반,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교회가.’ ‘아, 교회가 밥 먹여줍니까.’ ‘아, 따라와 보라고.’
 그래서 최자실 전도사님의 인도함을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조용기 목사님 말씀 듣고 변화받았으며, 성령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교회학교 교사로 충성을 다합니다. 교회에서는 산소통으로 만든 종을 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매일 새벽에 산소통으로 만든 종을 쳤습니다. 또 예배시간에는 북을 치면서 찬양을 인도하였는데, 성도들이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중에는 강원도 예수원에 가서 산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예수원 분원의 원장이 됩니다. 그렇게 거칠고 난폭했던 분이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 되었어요.
  조병호 목사님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저녁에 예배를 마쳤는데, 그 교회를 나오는 열심히 믿는 집사님 남편이 알콜 중독자입니다. 아내가 교회 간다고 늘 핍박하고 때리던 분인데, 그날도 집에 들어가니 부인이 없어요. 그래서 교회에 달려와서 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 목사 새끼 나와!’
  조병호 목사님이 나가니까 술에 취했던 그 남편이 다짜고짜 주먹으로 목사님을 쳤습니다. 코피가 탁 터졌습니다. 교회 청년들이 왜 이러시냐고 그분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도록 했는데, 목사님이 피하지 않고 그냥 맞으신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서 기억해 보니까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목사님을 팼거든요. 누가 와서 얘기합니다.
 ‘당신, 최소한도 두 주 간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나와야 돼. 당신 폭행죄로 들어갈거야.’ 겁이 나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까지 배회하다 늦게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부인한테 “여보, 누구 안 왔었어?” “아무도 안 왔는데요.”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가지고 뱅뱅 돌다가 밤늦게 들어와요. “여보, 오늘 아무도 안 왔었어?” “안 왔는데요.” 그렇게 일 주일이 지납니다. 그런데 부인이 말합니다. “여보, 목사님이 당신 경찰서에 고발하지 않아. 그러니까 오늘 교회 가서 목사님께 잘못했다고 빌자. 목사님이 다 용서해주실 거라고.”  그래서 이분이 일 주일 후에 교회에 나옵니다. 목사님 만나자 무릎 꿇고 저를 용서해달라고, 제가 술김에 내가 실수했다고. 목사님이 꼭 안아주시면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거기서 그 분이 깨어지고 녹아져서 통곡하고 회개하고 예수 믿고 그 교회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 안수 집사님이 되어가지고 그 교회 일을 도맡아 하는 그런 일꾼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목사님은 코피가 터지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니까 아프지 않고 오히려 감사했다.”
목사님 아들이 성준이라고 그때 초등학교 다녔는데, 아 자기 아버지가 옛날에 특수부대 출신으로 운동 잘한다고 얘기 들었는데 술 취한 사람한테 맞아가지고 피를 흘리는 것을 봤거든요. 그 큰아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막 따졌습니다. 화가 나가지고, “아빠, 왜 맞고 있어! 옛날에 유격부대로 운동 잘했다고 하던데 한 대 때리지!” 막고 한 대 탁 치면, 그 사람 끝날 거 아니야. 너무나 아들은 분했던가 봐요.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맞으니까. 그때 목사님이 아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성준아, 목사는 깡패가 아니야.”
  목사는 깡패가 아니야.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깡패가 아닙니다. 화난다고 소리 지르고 주먹 들고 싸우는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내 성질대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성질 죽여야지요. 예수 믿고 달라져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달라져야 돼요. 내가 내 성질 다 표현하고 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잘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베풀고 나누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화낼 때 화내고 소리 지를 때 소리 지르고 멱살 잡고 싸우고,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절대로 여러분이 예수 믿고 나서 그런 모습으로 살면 안 됩니다. 참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아들 성준이가요, 목사가 되었어요. 아버님의 인격에 감화되어가지고 아들도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조용기 목사님 목회 첫 열매입니다. 그 두 번째 목사 된 분이 의정부 박종섭 목사님입니다. 하나님이 주먹으로 살던 분들을 변화시켜서 다 큰 목사님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잠깐 지나가는 인생길에서 여러분 예수 잘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답게 살게 하여주시고


대제사장의 기도/광주순복음교회,한상인목사

“야훼는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면”
제사장 선포통해 이스라엘에 복 주신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의 수여자이심 인정해야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대제사장의 삼중 축복 기도가 민수기 6장 22∼27절에 언급되어 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광야로서 뱀과 전갈이 돌아다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없는 공포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의 여행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아론의 삼중 축복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담대함의 기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사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예수 안에서 아론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서로에게 선포하며 힘과 용기와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삼중축복은 첫째로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녀와 재산, 땅, 건강, 그의 임재라는 복을 주신다(창 17:16; 22:17∼18; 레 26:3∼13; 신 28:2∼14). 나아가 이러한 좋은 선물뿐 아니라 모든 위험에서 그를 보호하게 하시고(욥 1:10), 각종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지켜주신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신다는 비유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과 부합된다(시 31:16; 67:1). 그는 곤경에 빠진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사 대적과 질병과 죄에서 건져 주신다(시 4:1; 6:2; 51:1). 어려운 사람을 보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그에게 실망과 낙심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인생을 감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한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이다(창 43:29; 시 4:6).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평강이다. 그것은 전쟁과 소요가 없는 평화의 상태뿐 아니라 풍요와 건강, 번영, 구원 등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모두 세 구절, 15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구절은 각각 3단어, 5단어, 7단어로 점층적으로 많아져서 축복이 강조되고 깊어지고 있다. 또한 구절마다 야훼 이름이 한 번씩 들어 있어서 모두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야훼 이름이 주어로서 한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지만 굳이 세 번을 반복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훼 이름을 빼면 12단어가 남는다. 이는 복을 받는 사람이 12지파임을 상징한다. 복은 결코 사람인 제사장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매달려도 안 되고, 복 자체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야훼의 복주심이 아론과 그 아들들로 대표되는 제사장들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적시는 것과 같다(시 133:2).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생각과 꿈과 믿음, 특히 축복의 말의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나아가서 아론의 삼중적 축복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축복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축도와 연관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종의 축도가 선포될 때 온전히 예배가 마무리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과 마음의 복과 물질적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