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고난

 

 

 

 

 

   

   

                           

주님의 수난은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온몸에 채찍질을 당하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눌려 씌여져 이미 기력이 쇠진해진 상태에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느라고 연거푸 쓰러지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고통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의 고통,
이러한 고통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채찍에 맞아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의 고통?
십자가에 매달려 숨통을 조여오는 죽음의 고통?

주님의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이런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배신당하는
소외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돈 때문에 배반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저 살기 바쁘게 도망쳐 버렸습니다.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
3년 동안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잔,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잘 따랐으며
가장 잘 믿었던 제자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받은 재판은 불의와 거짓투성이였습니다.
재판은 너무나 일방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변론조차 하지 못하고 심문은 끝나버렸고
형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다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임금님, 높은 곳에 호산나!”
하고 열렬히 환호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렇듯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고통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고통이요,
진리를 저버리고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에 대한 한탄이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사순절에 대하여

  
1)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은 교회력에 있어서 성탄절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이다. 사순절은 앵그로 색슨의 [봄]이란

의미의 Lenen에서 왔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촛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특별한 회개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성 금요일(Good Friday)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이 기간에는 금식하며

자기회개의 기회로 삼아지기도 한다.

사순절은 부활주일로 부터 주일을 뺀 40일 전부터 시작되므로

이 기간동안 자신을 돌아 보며 지내는 좋은 교육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정하는 시기 기준 - 부활절은 매년 봄 춘분이 지난 후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고서 그 후에 오는 첫 주일로 정합니다. 춘분이란 아시다시피

겨울에는 짧던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져서 밤의 길이와 똑같아지는

날이지요. 이 날을 봄의 첫날로 꼽는 것입니다.

40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광야의 40일 간의 예수의 금식,

시내산에서의 40일 간의 모세의 사건, 무덤 속에 40시간 동안 계신 예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을 의미한다.

사순절의 근원은 초대교인들이 성찬식을 지켰던 일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준비를 위해서 금식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도 성찬식 전에 금식했었다.

"사순절"의 역사적 출현을 살펴보면, A.D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정한 교회의 규칙에 40일 간의 사순절이 언급되어 있고, 중세기에는

주로 사순절을 회개의 시기로 지켰는데 종교개혁자들도 이 사상을

받아 들여서 공동기도문 중의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았다.

사순절 기간에 주일들은 포함하지 않는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사순절이 부활절 이전 사십일째 되는 날부터 시작되지 않고 그보다

이전에 시작되기 때문에 사순절이 사십일이라는 것에 대해

종종 혼란을 느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순절에는

주일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일은 축제의 날이지

금식의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일날 예배 드리는 이유부터

상기해야 한다. 유대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원래 예배 드리는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이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체칠일에 안식하신 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안식 후 첫날

즉 일주일의 첫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초대교회는 이 가장

중요한 사건을 예배시에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하고 관례화 하였다.

일요일 즉, 매 주일의 첫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된

것이고 그래서 즐거운 날이고 경축일이며 축제일이고 "작은 부활절"인

셈이다. 즉 주일은 사순절보다 우월한 날이기 때문에

사순절의 사십일에 포함되지 않는다.

 

(1) 속죄일(Ash Wednesday)

올해(2012년)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22일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에 시작되는데 [재의 수요일 성회]라고도 한다. 성서에서

재는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의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재는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 되었던 종려 가지의 숯을 사용해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상징을 그리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2) 고난주간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 또는 수난주간이라 하며, 이 주간은

수난절의 절정기로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임을 뜻한다.

종려주일로 부터 시작되며 고난주간에 일어난 일들은

"예수님의 발자취"에서 다룬다.

 

●종려주일(Palm Sunday)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 21:1-11, 막11:1-10, 눅 19:28-40, 요12:12-19)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주간에는 그동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시행해온 모든 프로그램을 더욱 뜻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한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여섯번째 주일이 됩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종려주일이란

이름은 1928년 이후에야 영국국교 의식에서 나왔다. 팔마룸(Palmarum)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뜻은 '종려의'라는 뜻이며 종려가지에 대한

축도가 있은 후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분배해준 다음에 성직자와

성도들이 두줄로 행진을 하였다. 이 행진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공적으로 알려 주는 절기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

Maundy는 라티어의 율법이란 의미를 나타는 mandatum으로 부터

나온말로 이날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목요일날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13:34)라는 가르침을

주심을 기념한다. 이날은 또한 성 목요일이라 불리우며 보통 교회에서

이날 성찬에 참여하거나 세족식을 통해 기념하기도 한다.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날로 성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도 한다.

부활전 금요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슬픈 날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을 위한 그의 사역을

성취하셨기에, 바로 이 부활 사건의 전체를 good으로 받으셨기에,

Good Friday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God's Friday에서

Good Friday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보기도 한다.
 


2) 사순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1) 예전

구약때 부터 교회의 의식에는 언제나 특유한 빛깔을 사용하여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별히 레위기에 제시된 하나님을 위한

제단 앞에서 여러 빛깔이 명령대로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빛깔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우리의 마음가짐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설교대(pulpit), 교독대(lectern), 제단(altar),

목사의 가운 드림천(stole)을 드리우며 그 의미를 지키는 것이 좋다.

사순절에는 인내, 겸손, 고난을 나타내는 보라색을 예전 색깔로 쓰나

좀더 구분하여 속죄일에는 자신이 먼저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검정색, 세족 목요일에는 성결을 뜻하는 흰색, 성금요일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희생과 수난의 표이며 승리의 색인 빨간색을 사용한다.


(2) 참 회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와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로 이것에는

자기 부인이 포함된다. 사순절에는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

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

②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③ 특별기간 금식을 할 수도 있고, 기호식품을 절제해 봄으로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할 수도 있다. 예)커피, 쵸콜렛, etc.
 


(3) 교 육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받을 자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다.

고난주간 중에 성례를 행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저녁 기도회는

교육의 기회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세례준비반, 그룹 성경 공부
 


(4) 전 도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으므로 사순절 동안에 우리는

십자가와 그 구속적 의미를 증거하는 지역사회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사순절은 전통적으로

복음전도의 시간으로 전도 프로그램을 통해 새 신자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5) 가 정

사순절 기간동안 의미있는 교육을 위하여는 가정과 연관하여 온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와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더욱 구체화하여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성숙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① 가정예배를 통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

② 사순절 달력을 만들고 그것에 기초하여 의미있는
    활동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

③ 가족 단위 세족식을 할 수 있다.

④ 유월절 식사를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다.

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나 외로운 이웃을 찾아
    함께 식사에 초청하여 음식을 나눈다.


3) 부활절의 의미

부활절(Easter)은 기독교 축일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이며 교회력에서

다른 축일의 근원이 된다. 이 주간의 첫날에 예수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 나셨기 때문에 이 절기는 기독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 교회력의 시작이 된다.

부활절의 옛이름은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컬(Paschal)이라는 히브리말이었다.

즉 부활절은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월절,

즉 죽음의 노예상태로 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 받은 것이다.

또한 부활절이란 명칭(Easter)은 앵글로색슨 사람의 봄의 여신

이오스터(Eoster)에서 온 것이다. 이오스터 축제는 해마다 춘분에 왔다.

부활절의 기쁨과 승리는 현대 크리스챤들이 알거나 되찾기 어려우리

만큼 초대 교회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부활은 초기 설교자들의 전도활동의

원동력이었으며 설교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승리와 기쁨,

그리고 소망과 새로운 생명으로의 소생, 바로 이

부활절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교육하여야 한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세례를 베푸는 일을 비롯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서의 자아를 깨닫도록 유도하며, 죽음의 어두운 그늘에서

부활의 경험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의 개발을 요청받게 된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비교될 수 없는 측면은 예수의 부활과 그로 인해

생겨난 믿는자의 부활에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믿고 소유할 수

있도록 교회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부활절 달걀의 유래...

고대문명에서 달걀을 새로운 생명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인도나 이집트에서는 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달걀이 갈라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데, 그 달걀의 반쪽이 하늘이 되었고

나머지 반쪽이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달걀에 대한 이교도적인 생각을 기독교적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달걀은 아직도 새 생명의 비밀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새 생명을 의미한다.
 


부활절에 새 옷 또는 흰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 유래..

교회가 성장하여 전통과 관습을 발전시켜 가게 됨에 따라,

사순절은 새 신자들을 신앙 안에서 훈련시키고 세례를 주는 절기로 되었다.

새 흰 무명옷은 죄사함과 믿음으로 인한

새 생명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입게 되었다.

 


수난절 성 금요일 예배 

금요일 오후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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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의 부름 .............. 이사야 53:4-6 ....................................................        집  례  자
* 수난의 찬송.............. 147 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다  같  이
* 공동고백의 기도 ......................................................................................        다  같  이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지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 위선과 교만에 얼룩진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주소서.
        고난에 대하여 말은 많이 하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주저하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기에는 게으른 우리들이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믿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였습니다. 
        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나약한 모습입니다.
          주님!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오니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만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회개의 찬송 ............ 144 장  예수 나를 위하여 ....................................        다  같  이


*************** 십자가의 일곱 말씀을 따라 드리는 기도 **********************

** 주님은 이 시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제 우리 이 시간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참회하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 중에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첫째 말씀 -- 용서의 말씀(누가복음23:33-34)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최초에 하신 말씀은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군중과 병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을 뿐만 아니라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기도하셨던 것을 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고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기도하시는 이 위대한 기도의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위해 주님이 기도하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내 생명 다 하기까지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라도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동기도>
  거룩하신 주님,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통의 시간에도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을 뵈오니 저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저도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 갖기 원합니다.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둘째 말씀 -- 영생의 말씀(누가복음23:39-43)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에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행한 대로 죄를 받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옵소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자기의 미래를 의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에게도 이같은 영생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원망과 불신의 삶을 살다간 죄인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라도 자신을 돌이키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따르며 전도에 힘쓰는 종들이 돼야만 하겠습니다.
    <공동 기도>
  거룩하신 주님,
주님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늘 게으름과 핑계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영혼구원의 사명을 외면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후, 저도 주님처럼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지옥의 고통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세상의 한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저에게 믿음을 더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셋째말씀 -- 사랑의 말씀(요한복음19:25-27)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눈물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 중에서도 그 모친을 발견하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신 후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그 어머니를 위한 사랑의 관심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삶은 세상과 동떨어진 어떤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만 참 거룩한 삶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의 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그 막중하고도 위대한 순간에도 인간으로서의 따스함과 사랑을 잃지 않으셨던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공동기도>
  거룩하신 주님,
어떻게 주님은 그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의 마음을 저도 갖게 하옵소서.
조금만 마음에 거슬려도 짜증을 부리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화를 내는 이기적인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주님의 그 따스한 가슴을 저도 갖게 하옵소서.
냉정한 얼굴 앞에서도 사랑으로 미소지을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멘


  <넷째말씀 -- 고난의 말씀(요한복음19:28) >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목이 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영적인 존재만은 아니셨습니다. 육신도 가지신 참인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이 마르셨습니다. 주님이 목이 마르신 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음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목이 마르십니다. 사랑에 목이 마르시고, 진리에 목이 마르시고, 참 사람에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하여 영혼의 목마름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 고난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는 주님을 위해 헌신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목마른 이웃에게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공동기도>
  거룩하신 주님,
주님도 목이 마르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목이 마르셨습니까! 
진정 사랑에 목이 마르시고, 진리에 목이 타시고,
참 사람을 찾지 못하셔서 목이 마르셨습니까?
오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마르신 목을 시원케 해 드릴 사람,
주님의 답답하신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그 사람이 바로 저이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 힘을 더 하시어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저에게 은혜를 더 하시어 그런 생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다섯째 말씀 -- 고통의 말씀(마태복음27:46) >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키 위하여 아들을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 고통과 고난과 고독과 절망 가운데 내버려두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인간 최고의 절망의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조차 버림받은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절망한 사람만이 참 소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과 세상의 헛된 것에 찌들은 나의 영혼을 보며 깊은 절망을 느낄 때, 참 진리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값으로 사망 가운데 버림받는 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 자신조차 견디기 어려우셨던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히 죽음이나 육신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징벌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공동기도>
  거룩하신 주님,
저의 죄 때문에 그렇게 버림받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그 처절한 외치심이 곧 저의 외침이요,
주님의 그 고통은 제가 받아야할 고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버림받으심으로 제가 구원을 받았고,
주님께서 저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제 영혼이 씻음 받았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이제 굳은 마음, 의심의 마음, 교만의 마음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저의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을 제하시고 깨끗하고 정결한 영혼되게 하옵소서.
저의 부족한 믿음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여섯째 말씀 -- 의탁의 말씀(누가복음23:46)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 왔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시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같이 하심으로 인간은 최종적으로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삶과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왔거니와 이제부터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맡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공동기도>
  오 거룩하신 주님,
마치 제것인 것처럼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이 육신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임을 믿습니다.
저의 삶과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이 엄연한 사실을 늘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거짓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는 참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의 삶과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늘 겸손하게 살게 하옵소서.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나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온전히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 일곱째 말씀 -- 완성의 말씀(요한복음19:30) >
    "다 이루었다."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만물의 창조도 주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영원한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류를 위하여 당신이 몸소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서 그 구원을 다 이루시었습니다. 죄의 사슬에 매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 그러나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를 이루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신 일들을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우리도 나의 삶을 믿음으로 다 이루기 위하여, 나의 삶을 사명으로 다 이루는 삶이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기도>
  다 이루신 주님,
저도 다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제게 주신 이 삶을 기쁘게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생명을 주실 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게 하옵소서.
맡겨주신 가정도, 자녀도, 교회에서의 직분도, 사회에서의 책임도
다 이루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맡겨주신 사명 다 이루게 하시옵소서.
피곤하다고 회피하지 않게 하시고, 어렵다고 외면하지 않게 하시며,
힘들다고 돌아서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이 곁에 계심을 믿고 용기 내어 다 이루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다 이루신 주님, 저도 다 이루며 살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십자가 지신 나의 주이신 예수님 바라보오니
오 주여! 저도 다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나의 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주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단의 찬송 ............. 135 장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        다  같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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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만  찬  예  식  ********


  고백과 용서 ............................................................................................        목사와 회중
    목사 :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며 이웃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실을 고치며
          주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여러분을 청합니다.
          믿는 마음으로 나아와 이 성례에 참예하기 위해 정성된 마음으로
          엎드려 전능하신 하나님께 겸손히 죄를 고백합시다.
    회중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민을 심판하시는 주님,
          우리가 지은 모든 죄악을 인정하고 슬피 자복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언행심사에 있어서
          주님의 위엄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지은 죄로 인하여 슬피 통회합니다.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우리의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주를 섬겨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려 보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사 : 복음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회중 : 거룩, 거룩, 거룩, 진실과 권능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우리 주 예수님께 돌립니다.  아멘.

  성별의 기도 .............................................................................................        집  례  자
 
  성찬분급 ...................... 보좌 /000장로......................        집  례  자
                      모두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나와서 성만찬을 받습니다.


                *****************************************
 
  기    도 ..................................................................................................        다  같  이
          영원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이런 거룩하고, 신비로운 은혜를 받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세상에 나가게 하시며
        감사함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기쁨으로 이웃을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결  단  의  자  리  **********************************


* 은혜의 찬송.............. 405 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다  같  이

* 믿음의 다짐 ....................< 모두 일어서서 > ...........................................        다  같  이
    목사 :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따라
    회중 :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겠습니다.
    목사 : 우리는 욕심과 교만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회중 : 사랑과 감사의 삶을 살겠습니다.
    목사 : 우리는 섬김을 받으며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회중 : 주님을 닮아 섬기며 헌신하는 삶을 기쁘게 살겠습니다.
    다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이제부터 주님과 몸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신실한 일군이 되겠습니다.  아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마태복음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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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육체로 이 땅에 계실 시간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인생의 마지막 행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일요일)에는

절친하게 지낸 나사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명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는데, 식사 도중에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12). 유월절 닷새 전(토요일)에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 나흘 전(월요일)에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서 환전하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유월절 사흘 전(화요일)에는 성전에 가셔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있은 것을 보셨고,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권위 논쟁을 벌이고, 천국비유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유월절 이틀 전(수요일)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며 가룟유다를 포섭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배반을 당할 것을 예언 하십니다. 유월절 하루 전(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이 때 가룟유다가 배신자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식사 후 감람산으로 가셔서 마지막 고뇌의 기도를 드립니다. 유월절 당일(금요일) 새벽에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 당하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 받는 장면입니다. 시간상으로는 오전 6시를 전후한 시간 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한 번 당하고 빌라도 법정 앞으로 끌려 오셨습니다. 새벽녘에 감람산에 잡히셨을 때부터 군병들이 거칠게 다루었고, 가야바가 심문하는 과정 중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마구 쳤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참혹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 사형권한이 빌라도 총독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세 부류의 사람()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빌라도 총독이고, 다음은 빌라도 총독의 아내이고, 마지막으로는 유대인 군중들입니다. 이 세 사람()이 법정에 끌려온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일 먼저 빌라도 총독의 태도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라는 유대인청년의 목숨 따위는 하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왕을 자처해서 군중들을 소란 시켰다면, 그를 정치범으로 다스릴 생각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신성모독자거나, 세상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이든, 메시아가 아니든, 그런 종교적인 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당신이 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의 의미는, 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해놓고 유도 심문 할 거면 알아서 하라는 답변입니다.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절묘한 대답입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크게 놀랐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기이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란 이유는, 정치범 죄목을 씌워 간단하게 처리 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에게는 정치색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빌라도의 생각을 몇 수 앞서는 대단한 고단수였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 판단하면 자신이 이 상황을 온통 책임져야 하는 나쁜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직감 했습니다. 빌라도는 상황을 반전 시키려, 죄수와 예수님 중에 한 사람을 풀어 주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하고, 군중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라는 열심당원을 풀어 줍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주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드디어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판결을 선고하기 전에 행동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군중들을 향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아무 죄가 없다. 이 일은 너희가 책임을 져야 한다.”(24, 우리말성경)고 말합니다. 총독으로서 권한 행사를 하여 사형 집행 결정을 해 주긴 하는데, 자신은 이 판결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빌라도의 이 선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정치력을 발휘하여 곤란함을 잘 벗어나는 처세술의 달인처럼 보입니다. 군중들은 빌라도에게, “그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25, 우리말 성경)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즉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판결합니다.

 

,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게 한 과정에 하나의 책임도 질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돌아가셨다고 했을까요? 잘못 된 것이 아닌가요? 신천지를 포함한 이단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님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성경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의 내용은, 빌라도 의하여’(~by), 죽임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여러 문서에는, ‘빌라도의 면전에서’, ‘빌라도 앞에서’, ‘빌라도에 근거하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틴어, Passus sub Pontio Pilato-‘sub’()지배하에, 아래에’)(영어,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전치사 ‘sub’()‘under’로 번역)(헬라어, παθοντα επι Ποντιου Πιλατου-‘에피(επι ~위에)+소유격(폰티우 필라투 Ποντιου Πιλατου)’‘~면전에, ~에 기초하여, ~에 근거하여등의 의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십자가 사건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작위적이고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확실한 근거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거짓 이단들 때문에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인데, 현재의 많은 이단들도, 빌라도 이름이 들어간 것을 트집 잡는 것을 보면, 역사가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보신을 위해서,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청년 예수를 죽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면, 예수님 당시의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나 심문 하게 된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불행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을 살려 주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제 자신을 빌라도에게 대입시켜 보아도, 저도 청년 예수를 죽이라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빌라도의 결정을 두둔하거나, 혹은 공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 있을 뿐이고, 하나님만이 그의 결정에 대해 심판 하실 것입니다.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 결정은 우리에게 기회주의적이고, 책임 회피적인 신앙 태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여야 하는 순간에는, 빌라도와 같이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자리를 내거는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빌라도의 선택은 당연합니다. 열 번이라도 똑 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빌라도의 결정은 가장 좋은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또한 사건의 주범이면서도, 입 싹 닦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뒷짐 지고 모른 체하는 회색분자와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는 결정은 항상 어렵고 고민되는 과정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결정을, 단지 자기 자리보전을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살면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결정할 순간에 내일, 내 시간, 내 가족, 내 성공, 내 돈이 장애가 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막상, 예수님을 결정하려고 하면서도, 내가 받아서 누려야 하는 어떤 실질적인 이익이 보장 되지 않으면 거래를 중단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제가 너무 큰 범위로 말씀드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쉬운 예를 드리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휴대폰 평균사용시간이 2시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제가 지하철 타고 다닐 때 휴대폰 성경 앱을 통해 말씀 읽으면 30분 내에 10장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0분만 성경 읽으려고 휴대폰을 사용한다면 하루에 3장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 자연적으로 일 년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나라 신자의 90% 이상이 혼자 있는 시간에 일 년이 가도 성경 1장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휴대폰 속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조차 내 시간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신자의 80% 이상이 주일 오후 예배를 드리지 않고, 신자의 95% 이상이 새벽예배를 포기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주일에 약속이나 예배가 충돌한다면, 우선 내 시간을 먼저 갖겠다는 응답도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총독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포기하고,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러워 졌습니다. 예수님만 골고다 언덕으로 보내고, 나는 총독 관저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빌라도와 같은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해 놓고도 나는 몰라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 그런 거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라고, 빌라도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주어지고 있는 수많은 기회들, 나에게 평안을 누려가라고 주어진 풍성한 신앙의 책임은, 내 앞에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끌려 나오신 주님을 선택할 때 강력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혹시 권세와, 재물과, 지식과, 시간과, 좋은 것을 다 주신 것은, 우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지만, 그 보다 몇 백배 더 중요한 이유는, 만약에 예수님과 그 모든 것을 놓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을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제가 히브리서 6장을 설교 하면서, 우리가 성령 받고 거듭 났음에도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십자가에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나아온 것 같이 매일 같이 우리 앞에 나아오고 계십니다. 쇠사슬에 묶여서, 찢겨진 옷을 입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구타당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아오신 주님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계속 채찍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십시오. 거기서 예정 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십시오.” “나는요?, 나는 뭐 하냐구요? 그냥 쉬렵니다. 피곤하고요, 바쁩니다. 여기 총독 자리에 앉아 있으렵니다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개 싹 돌리고, 모른 체하며, 등 돌리고 살아가는 선택을 한다면, 주님은 묵묵히 채찍을 맞으러, 십자가에 달리시려 희롱하는 군인들에게 끌려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단 한 주간만이라도 제대로 주님을 선택하는 기회를 만드십시오. 또 다시 주님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총독의 자리, 그까짓 거 가볍게 다~~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만을 선택하셔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주님과 만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빌라도의 아내의 태도입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 빌라도 아내의 말은, 단 한 절만 나옵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빌라도의 아내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환상을 꿈을 통해 계시 하였나 봅니다. 빌라도의 아내의 역할은,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하려는 사람 앞에서, 그것을 막아서고, 하지 못하도록 하는 성령의 인도함을 의미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마치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과속에 주의하라는 음성을 들려주고, 차선이탈 경보를 울려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잘못된 선택을 할 여지가 많습니다. 나쁜 쪽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실, 좋은 것을 분별해서 선택할 능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심성은 나약하고, 음흉하고, 간교합니다. 좋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성령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말을 듣고 멈칫 했을 겁니다. 자기 앞에 있는 범상치 않은 청년의 기운에도 놀라고, 자신의 아내의 말에 더욱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그가 결국 아내의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양심에는 매우 거리낌이 있었을 겁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다른 길로 가려고 하면, 제동을 걸고, 방향을 다시 맞추어 줍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높은 레벨의 권면입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신앙의 선배들, 혹은 멘토들이 말하는 것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특별히 아내의 말은, 곧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시고 100% 따르십시오. 말 들으면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아내를 통해 빌라도에게 말하게 하신 것은, 아내의 말이 남편에게는 가장 강력한 조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 들어도 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은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가장 자주하는 말이 남편을 가장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번 주 한 주 내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한 마디의 말도 허투루 듣지 마시고, 다 내 것으로 받으시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한 마디 드립니다. 이 번 주에는 금식도 겸해서 기도에 열심을 내 보십시오. 저는 일단 말했습니다. 알아서 소화 하십시오.



세 번째는 법정에 모인 군중들의 태도입니다.

 

군중들의 대다수의 목적은 오직 총독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내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 주면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랴?라고 말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이리 악하냐, 꼭 이 청년을 죽여야 하겠느냐?라고 묻자, 군중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곧 민란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의 악함은 피를 보아야 끝납니다. 반드시 그 악을 행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목이 터져라 외쳐 대던 수많은 군중들 중에 나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범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이 고난 주간이어야 합니다.

 

악에 가득 차서 광기를 내뿜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고, 빌라도조차, “너희가 어찌 이리 악을 행하느냐라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지난 수요 예배 시간에, 우리 인생이 마치 미친 것처럼 쉬지 않고 악과 죄를 행한다는 전도서 9장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남의 눈을 속이고, 나 혼자만의 사생활을 꼭꼭 숨겨 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았을 때는, 우리의 일상들이 꼭 미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광기어린 빌라도 법정의 군중들의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법정에 끌려 나오신 참혹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도 모자랄 판인데, 언제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실 겁니까? 그만 멈추십시오. “예수를 어떻게 하랴?우리에게 물으신다면, “, 저도 주님처럼 맞고, 치욕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해 주십시오. 준비 되었습니다. 저를 끌어가십시오목이 터져라 이렇게 외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한주 단단히 준비 하시고, 부르짖고, 참회하는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빌라도와 같이 내 욕심만 챙기는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신앙을 회개하시고, 아내를 통해 말씀하셨던 성령의 강력한 권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멈출 것은 멈추고, 끊어 낼 것은 끊어 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던 발걸음을 오직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바꾸십시오. 이제 내 평생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말했던 나의 광기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 이름을 내 이름으로 치환 하여 고백하십시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이 크게 감동 하실 정도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고난 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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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빌라도와 같이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 하시는 성령님의 권면을 무시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죄와 악을 끊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살아가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불을 내려 주셔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진실하게 참회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심자가를 참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개최

조용기·이영훈 목사 ‘십자가 고난 의미’ 설교

 고난 주간을 맞아 우리 교회는 10일부터 15일까지 오전 5시(토요일은 오전 6시) 대성전 그리고 지·직할성전(위성중계)에서 ‘특별새벽기도회’를 갖는다.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주제로 열리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는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가 말씀을 전한다.
 특별기도회가 시작되는 월요일은 이영훈 목사가 설교한다. 화요일 새벽에는 조용기 목사가 ‘다 이루었다’(요 19:28∼30)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며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 의미를 전한다. 이튿날인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다시 이영훈 목사가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구원의 길 되심을 강조한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며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사는 성도들의 제자된 삶을 당부한다.
 이영훈 목사는 올해 고난 주간을 맞아 성도들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했던 것처럼 금식기도를 권면했다. 이영훈 목사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신앙 자세임을 강조했다.
 특히 이영훈 목사는 국가적 위기에 처한 작금에 현실 앞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4.9.종려주일밤설교> 고난주간의 묵상(2)               



(우)32429    충남 예산군 예산읍 역전로 150-13(서오Apt 201동 504호)
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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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4.9.주일밤예배 설교문
   【사순절 여섯째주일, 종려주일】
본  문 : 마가복음 15 : 25 - 41
제  목 : 고난주간의 묵상(2)
찬  송 : 151, 290, 305, 439.
복음송 : 십자가의 길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 저녁에는 오늘 낮 시간에 이어서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낮 시간에는 고난주간에 있었던 사건으로
        ① 예수님께 나귀를 제공해 드린 사람과
        ②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려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과
        ③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수 있도록 다락방을 예비하고 만찬을 준비한 여인과
        ④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5.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1)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실 때 제자 여덟 명은 산 아래에 두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의 제자만을 대동하시고 올라가 돌 하나 던질 만큼 떨어져 기도하셨습니다. 
        (눅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가룟유다는 떠나가고 여덟 명의 제자는 동산 아래에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겟세마네 동산까지 데려 갔지만 주님과 거리를 띄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분과 위치와 사명(使命)을 각기 깨달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 책임에 대한 충성함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아 멘!>


(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같이 명령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전16:13-14). 그러나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사56:10참고).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잠만 자는 성도가 있습니다. 사순절도 고난주간도 아랑곳없이 겟세마네 동산의 세 명의 제자들처럼 잠만 자느라고 새벽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말씀입니다.


(3) "이제는 자고 쉬라" 고 하셨습니다.


         마26:45-46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제자들은 이 위기에서 주님을 따름에 그대로 실패했습니다. 자기의 직분을 못 지키고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던 제자들은 급히 일깨워 같이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말고의 귀를 자르고 다 흩어져 달아났고 마침내 주님을 부인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바로 바라보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제자들처럼 실패 없는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6.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구레네 시몬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의 그 뜻과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골1:24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과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의 사업에 충성하며 주님 때문에 희생과 고통을 받으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습니까?
        아마 그날 아침까지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방, 구레네 에 거주한 유대인으로 이때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순례자입니다. 그는 예수의 처형되는 광경을 구경하러 나온 수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무 지쳐 십자가를 지시고 가지 못하는 것을 본 로마 병정이 길가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웠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재수 없는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시몬이 주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자신도 신자가 되고 그의 아들들도 저명한 성도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억지로라도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기왕이면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기 바랍니다. 기쁨과 감사로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7.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려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700여 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역을 예언하였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지친 몸으로 체포되어 새벽부터 끌려 다니면서 온갖 수모와 천대를 당하시고 대제사장의 군관들의 구둣발에 채이고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헤롯의 관저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견딜 수 없는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눈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뺨을 치면서 조롱을 합니다. 발길로 찹니다. 갈대로 때립니다. 채찍으로 때립니다. 예수님의 온 몸이 부어오릅니다.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얼굴은 피투성이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가셨습니다. 힘에 겨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올라가시다가 쓰러집니다. 무자비한 군인들은 가죽 채찍으로 때립니다. 매 맞은 자국은 터져서 퍼가 흐릅니다. 골고다 언덕길에서 예수님이 걸으신 자국 자국마다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골고다에 이르러서는 십자가 형틀에 눕히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 처절한 광경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굵은 쇠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골고다 온 산야를 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고통을 참으시면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2. 한마디 또 한마디 용서의기도 드릴 때
           저들모두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네
           골고다 언덕위에 살을 찢는 망치소리
           쓰리고 아픈 고통 누굴 위해 참았나요.
           주님의 용서의기도 내가 어찌 알리요
           주님의 용서의 눈물 내가 어찌 알리요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제1말씀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제2말씀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3말씀 요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4말씀 마27: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5말씀 요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제6말씀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제7말씀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그 죄 값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세 개의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을 둘러 서 있는 군중들을 화폭에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의 광경을 그리면서 그 전체 그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한사람을 그려 넣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림 중에 있는 어울리지 않는 그 사람을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이 십자가 주변의 군중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렘브란트 화가처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8.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 와서 눈물 짖는 여인들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넘어지며 쓰러지며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여인들이 울며 울며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눅23:27-28)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는 데까지라도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마27:55-56)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고 하셨지만 끝까지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연약한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말로만 주님을 따른다고 하고 실제 행함은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9.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눅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간악한 유대인의 제사장들과 교권자들은 예수를 강도들과 함께 처형함으로 예수님을 흉악범으로 매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있는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나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왼편에 있는 강도와 같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불평과 원망만을 하다가 지옥의 멸망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오른편의 강도와 같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영원한 천국의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은 지금 어느 강도의 모습입니까? 오른편입니까? 아니면 왼편입니까? 그도 저도 아니면?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찬송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아우성치던 무리들입니까



10.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공회원이요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 위원이나 되는 듯 위협을 무릅쓰고 당돌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정한 세마포로 싸서 예비 된 자기의 빈 무덤에 안장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눅23:50-54)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은 감히 아무도 엄두도 못 내고 생각지도 못한 큰 일을 했습니다.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고 하였습니다.
        이 요셉은 마19:21절 이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던 사람인데 그 후로 크게 후회하여 재산을 많이 들여서 마련한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비굴해 질 때 요셉과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 30여년이 지난 후에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일컬어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마27:57)고 기록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신자가 있는가 하면 비록 예수님의 제자의 수에 들지는 못했어도 제자들보다도 훨씬 훌륭한 일을 해낸 요셉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내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이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몸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그 은혜를 받고도 무감각 상태로 있어서야 어찌 하겠습니까?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이 주님의 은혜에 만 분의 1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 은혜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립니다. 저는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 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앞으로 이런 사례가 발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



사순절 설교.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히브리서 61-12)

  

로마서 10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괜찮을까요? 구원을 이미 확보 했는데 대충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지 않나요? 라고 생각하신다면, 대답은 “NO,! 아니오!”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은 어떠한 죄를 짓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고 지극히 비 성경적인 발상입니다. ‘구원파 이단이 이렇게 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 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구원받은 자는 오히려 옛사람의 행실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 될수록 더 나은 말과 행실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징표(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일시적이고 확정적으로 발생하지만, 구원을 뒷받침하는 개인의 거룩한 생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럼 한 걸음 더 나아가 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변화되기는커녕 예전 보다 더 온갖 죄를 지으면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성경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도 준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구원이 취소가 됩니까? 여기에 대한 답도 역시 “NO,! 아니오!”입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이 취소되거나, 변경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구원이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것이라면, 구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구원파랑 다른 게 뭡니까? 어차피 구원 받았음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 머 적당히 살아도 되지 않나요?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결정은 하나님만의 주권이십니다. 사람이 섣불리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구원이라는 것을 결정함에 있어 어떤 사람이 지닌, 믿음의 진실함, 회개하고 돌이킴의 분명함, 구원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겸손함,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삶,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삶,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전체적인 삶의 족적들을 다 평가하신 후에, 그것이 믿음에 기초한 것인지를 보고 판정을 내리십니다.

 

학창시절에 새 책, 새 노트 가지면 의욕이 넘칩니다. 전교 1등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책에는 밑줄을 치면서, 침을 묻혀가면서 열심히 읽습니다. 노트에는 형형색색 표시를 하면서 정성스럽게 써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중간시험 지나면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아서 깨끗합니다. 노트 필기는 흘림체이진, 필기체인지 모를 정도로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습니다. 초반전에 강하지만 인생의 후반전, 신앙생활의 종반전에 가면 갈수록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냥 주저앉아 쉬고만 싶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 다 지켜 가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대충 사는 것이 편해지다 보니 말씀 따로, 나 따로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는 것이, 시험 답안지를 백지제출해도 다 100점주는 것처럼 그렇게 물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의 인생이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는 구원의 일정표는 결코 끝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구원을 잃지는 않을까? 내가 구원의 방향에서 빗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조심하고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로 몸과 마음을 돌이키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5절의 말씀을 읽으면 매우 심각해집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어떻습니까? 말씀을 접하면서 두려움이 느껴지십니까? 과거에 저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 “은혜 받고 타락한자들은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는 말씀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자신하고 살아가다가도, 이 말씀만 읽으면 찜찜한 기운이 나를 덮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빛 되신 주님을 만난 기억이 분명합니다. 방언을 하는 것을 보면 은사도 주어 진 게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리고 시인하고, 순간순간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성령 받았음도 맞습니다. 말씀이 그저 텍스트(문자)에 불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살아 역사한다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제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겠습니까?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말씀 속에 살아가지만, 내가 여전히 타락한 자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동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동부 친구들 모두가 다 천국에서 만나 잔치하게 되기를 원하세요. 다 천국 갈수 있죠?” 라고 했더니, 다연이가 저에게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목사님이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해요?” 저는 당황해서, “목사님도 예수님 잘 믿어야 천국 갈수 있지, 천국에서 함께 만나자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연이의 그 말이 4-5절의 말씀과 매치되면서 심한 괴로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바뀔 것이 없다, 끝이다라고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의무감으로 외식적인 신앙생활과, 여전히 세상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의 이중적인 태도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으로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이거, 대충 살았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다시 새롭게 되는 회개의 기회가 내개서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강력한 경고조차도 무시하고, 계속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 듣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멋대로 살아가도 구원 받았다는 상황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7-8절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7절은 은혜를 은혜답게 사용하는 좋은 예입니다. 좋은 땅은 은혜 받고 순종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은 풍족하게 주신 것에 감사하여 많은 열매(복음의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 의의 열매 등)로 화답합니다. 은혜 받고 삶의 열매로 반응하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은혜 받고, 성령 받고 타락한 자들은 8절과 같이 됩니다. 하늘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비를 내려 줍니다. 비는 곧 쉼 없이 부어지는 풍성한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땅은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땅은 은혜만 받고 입 싹 닦고, 도무지 열매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 은혜의 비가 내려오자 눈치 보이기는 싫어서 가끔은 무어라도 내놓기는 하는데, 그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쓸모없는 것들만 내 놓습니다. 땅에서 화답이 없자 비는 점점 줄어들고 땅은 불모지로 변해 갑니다. 마침내는 버려진 땅으로 저주까지 받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고 저주 받은 땅은 불에 타 없어지는 폐기 처분을 당하게 됩니다. 은혜와 성령이 비 같이 주룩주룩 내리는데도 끝까지 거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저주와 버려짐 뿐 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이 말씀대로 하실 것입니다.

 

복을 받는 7절의 삶을 살아가느냐, 저주를 받는 8절의 삶을 살아가느냐는 오로지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30:19)고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과의 책임은 순전히 선택하는 자의 몫입니다. 결과를 오픈하고 가르쳐 주는데도, 복을 택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저주를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으실 겁니다. 여기쯤에서 다시 고민해 봅니다.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나는 유익한 농작물을 내는 좋은 땅입니까? 아니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입니까? 나는 7절 라인에 속해 있습니까? 8절 라인에 속해 있습니까?

 

실제로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살면서도 왜 복 안주십니까?” 불평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살면서도, 저주 받고 불사름 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위기감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려 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믿는다, 안다, 필요하다, 심지어는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타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아, 더 이상 듣기 싫다, 그만해라, 나도 너희에게 돌이길 수 있는 기회를 끊어 버리겠다정말 무섭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데도, 과연 우리가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자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단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인, 변화, 새사람, 정직, 겸손, 예의, 사랑, 미소, 소망, 행복...많은 단어들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들을 보기 좋으라고, 폼 잡으라고 적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단어들에 어울리도록 각자 삶의 자리에서 얼굴로, 말로, 태도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결과물이 없는 홍보성 문구나 발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잠언 25장에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원한 얼음냉수를 가지고 나아가야 된다고 합니다. 그 얼음냉수는 우리가 이 땅에서 땀 흘려 수고한 삶의 열매들입니다. 그 얼음냉수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고 합니다. 주님 다시 만날 때 빈손으로 그냥 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좋은 땅, 시원한 비를 내려 주었으면, 좋은 수확물을 많이 준비해서 주인에게 나아가는 것이 종 된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는 다른 사도들 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고백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일생에 이런 고백들을 남겼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그늘에서 나를 건져내랴”,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요, 만물의 때만도 못한 자요,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노라이런 말들이 위대한 사도라고 칭함을 받는 한 인간이 주님 앞에서 말하는 자기인식의 고백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정할 줄 아는 사람은 죄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주님을 결코 홀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식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교회 역사의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견주어서 우리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아주 사소한 죄 의식조차 희미해진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부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뭐가 그렇게 당당하고 잘났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실 인식은 왜 이렇게 깜깜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앞에 제대로 무릎 꿇지 않는다면, 주님의 크신 위엄 앞에 나의 자존심을 굴복 시키지 않는다면,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의 죄를 다 꺼내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회를 갖지 못하는 타락한 자들로 인생을 끝내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대부분이 8절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에, 가장 강력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 앞으로 다시 우리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 받으며 살아가는 7절을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가 삶아가면서 적용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 제가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들어 보십시오.

 

1. 1, 죽은 행실()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2,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 의심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3. 9, 내가 구원에 속해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4. 11, 주님 오실 끝날 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5. 12,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본을 보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드린 이 다섯 가지는 우리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오늘 설교 제목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주어에서 나는 쏙 빠지고 너와 너희들만 들어가면 곤란합니다. 나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는 타락한자들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매우 슬픈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고통을 참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주어를 넣으니, 내가 지금 주님을 바라보고 올바로 행동하며 살아가는지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나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가?” 이 말씀을 카톡 에도 올려놓고, 차 안에도 붙여놓고, 사무실 책상에도 붙여 놓고, 침대 머리맡에도 붙여놓고, 내 눈이 뛸 만한 곳에는 붙여 놓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멈칫 하실 겁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리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은혜 받고, 성령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말씀의 권능을 경험한 내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가지 실천 사항을 꼭 되새기시고, 기름진 좋은 땅을 잘 일구어 가셔서,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 복음의 열매를 많이 수확 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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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타락한 자로 인생을 마치는 불쌍한 영혼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큰 은혜와 성령 주심에 항상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삶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난주간 성경구절

 

로마서 5장 8절 말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성경 주석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즉 스스로 어떻게 도리가 없어 멸망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죄가 있으므로 멸망 받아 마땅한 피조물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경건치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어 줄 사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비할 데 없는 사랑의 예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8절 -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 사람들은 좀처럼 '의인' 즉 부당하게 정죄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자를 동정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2) 사람들이 혹시 의인보다 조금 더 낳은 선인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선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은 이 사실마저도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즉 그렇게 선인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극히 소수이며 그것도 결국 '혹'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8절). 그처럼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즉 그 사랑을 입증 하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확대하여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논의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놀라운 경이와 찬미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으시기 위하여 그 성령을 권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밖으로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었습니다.

 

(4)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원수였습니다.(로마서 8장 10절 -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그를 인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진대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그를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즉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역자이며 모반자이였습니다. 이 같은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 했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이며,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그 사랑에 놀라고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의 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분께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그분의 나라의 한 법률로 삼으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

이사야서 53장 3~12절 말씀 -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그는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그는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도다. 그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사 그에게 고통을 두셨은즉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고 자기 날들을 길게 하며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번영하리이다. 그가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리니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리라.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죄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

 

히브리서 2장 9~10절 말씀 -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브리서 9장 22~28절 말씀 -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은 이런 것들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의 것들 그 자체는 이런 것들보다 더 나은 희생물로 하여야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2장 21~25절 말씀 -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또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느니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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