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아버지 저승 가실때                    



        "울아버지 저승 가실때" 부모의 마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식 위하는 마음은 한 마음인데 울 아버지가 저승에 가시면서 잊고 가신 물건이 있다 생전에 저승에 갈때 챙겨갈 여비와 짐을 준비 하셨으리라 예금통장 두개 금붙이 두개 오리털 잠바 새것 두벌 메이커 구두 두컬레 울 아버지 저승갈때 가지고 가시려던 짐을 왜 잊고 가셨을까 생전에 그리도 억척스럽게 아끼시고 모우시더니 만원짜리 식당 밥 보다 오천원짜리 장국밥이 더 좋다고 하시고 먼길도 차 안타시고 운동삼아 걷고 또 걸으시고 새옷 사드리고 왜 안입으시냐고 물어 보면 입던옷 낡으면 입지 새구두 챙겨 선물 하면 신발장에 두시며 다음에 신지 울아버지 살아 생전 저승 갈때 가져 가시려고 아끼고 챙기셨나 울아버지 살아 생전 저승길 험한길 갈때 힘들다고 준비를 하셨나 그러던 어느날 집안 대청소 하던 날 아버지 지갑을 발견 하였다 귀중한 보물 처럼 싸고 싸둔 지갑속에 오래된 기념주화가 2개 있었고 짧은 메모지도 있었다 메모지에는 모자란 저녀석을 "나" 죽으면 어떻게 살까? 모자란 아들하나 살아갈날을 그 걱정이 있었다 남기신 물건 물건 모두가 저승갈때 쓸 여비가 아니 었구나 모자란 자식 위해 남겨 두신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 예금통장 두개 금붙이 두개 오리털 잠바 새것 두벌 메이커 구두 두컬레 울아버지 평생을 절약하시고 평생을 사셨다 부모 마음은 저토록 애틋함인데 철부지 자식들은 왜 엉뚱한 생각으로 살아 생전 부모님의 깊은 속을 모르고 엉뚱한 짓으로 부모님 속을 애타게 했는지 "너도 세상 살아 봐라" 자식 키워 보면 알거다 그 말씀 한마디가 회초리 대신이었는데 울 아버지 이것이 인생의 삶이라고 생각하시고 사셨다 울 아버지 저승길 가실때 못난 자식 걱정 그 겅하시며 떠나셨으리라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중에서>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글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글

하나 밖에 없는아들을
일찍이 서울로 유학보내고,
두 부부는 고생 고생하며
학비를 조달하여 대학 졸업시키고….

지금은 재벌회사 과장까지 승진하여
강남 아파트에서
명문대학 나온 우아한 아내와
잘살고있는 아들은 정말이지
이 부부에겐 크나큰 자랑이었답니다..

아들은 여간 효자가 아니어서
추석이나 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와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곤 했었답니다

우아한 며느리와
공주같은 손녀딸을 볼 때마다 노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으쓱대는
기분을 느끼곤 하였지요.

아들 내외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버님 어머님 시골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아니다.
우리같은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서울이 다 무에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고향땅에 묻힐란다" 하고 사양했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부부는
언젠가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 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노부부중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상을 치르는 내내 아들 내외가
어찌나 애통하게 엉엉 우는지
동네사람들도 모두 가슴이 찡하였답니다.

초상을 치르고 나자
아들 내외는 또다시 간곡하게 청하였답니다.
"아버님,
이제 어머님도 가시었으니 어쩌시렵니까?

고향집 정리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저희와 함께 사시도록 하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할멈도 떠나간 이제, 그도 그럴것이다 싶어
노인은 몇날을 생각타 결심을 하였답니다.
논밭과 야산등…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답니다.

가산을 정리한 돈은 아들 내외에게 주어
32평아파트에서 42평 아파트로 옮기고
노인의 서울생활은
처음엔 그런대로 평안하였답니다.

그즈음 아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도 되었고,
회사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였으므로
매일을 새벽에 출근하였다가
밤12시가 넘어서야 퇴근 하는 일과가
몇 달이고 계속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집안이 썰렁하니 비어 있더래요.
다들 어디 갔나? 하던 차에
식탁위에 있는아내의 메모를 보았더래요.

메모에..
- 여보 우린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요.
식사 안하고 퇴근하였다면
전기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뒤져 반찬찾아 드세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속을 뒤져 맥주를 찾아서 마시고 있자니
현관쪽이 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 그런데 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게 아니겠어요?

"왜 둘만이지?"
"둘만이라니? 요기 밍키도 있잖아?
아내는 강아지를
남편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아니, 아버님은?"
"오잉? 아버님 집에 안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아버님이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나?"
남편이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웅, 으응…" 아내는 더듬거렸습니다..

사실 아내는 평소에
노인이 몇시에 나가서 몇시에 들어오는지
도통 생각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노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노인이 들어오실 때까지
자지않고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나 봅니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켠에 정성들여
접혀진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듯이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습니다.
잘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자정도 넘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노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잠깁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 시간까지 아버지가 귀가 안 하신걸 보면
가출하신것이 틀림 없는것 같은데...
한데…왜,왜,왜…???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평소에 햇볕이 잘 드는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정 넘은 오밤중이긴 하지만
왠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습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빨랫줄에는 팬티 두장과
런닝셔츠 두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것이겠지요.

방 한켠에는
어린 딸의 옷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이제 그만 지겨워한다고
옷장을 더 예쁜 것으로 바꿔주고 나서
아마 이 헌옷장을 아버지 몫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옷장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얼굴입니다.
상치를때 영정으로 사용하던 사진입니다.

방구석에 소반이 있었습니다.
소반 위에는 멸치 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김치등이 뚜껑있는 보시기가 몇개 있었고
마시다가 반병 정도 비어있는
소주병이 있었습니다..

아아~~, 아버지…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시고 계셨던가요?

아아~~, 아버지…
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을 손수빨고
이 방에서 손수 말리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고 싶은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나 노인이 어디선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있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가서는
노인의 가출을 신고하였습니다.
고향에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3번아 잘있거라 6번은 간다…
이 암호를 우선 풀어야
아버님을 찾을수 있을것같은 마음에
아들은 조바심을 쳤습니다

직장동료, 상사…대학동창등….
현명하다는 사람은 다 찾아
이암호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암호를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이제 부장진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없고…
오로지 아버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술한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자네 김아무개 영감 자제가 아니던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아, 예…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웅, 난 김영감 친굴세…
근데 요즘 왜 김영감이 안뵈네?
그리구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좋은가?

그래서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님에게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한
그 암호문을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쪽지를 한동안 보더니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흐으, 자네 이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다구?
이사람아,
김영감이 늘 얘기하곤 했지….

우리집에서는 며느리가 젤 위고
두번째는 손녀딸이고
3번이 아들이라고 했지
4번은 강아지 밍키고…
5번은 가정부라 했네.

그리고 김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 하고는
한숨짓곤 하였지…..
그러케 쉬운것도
자네는 풀지 못하나? 에잉…"

아흐흐흐흑…
아들은 그만 눈물을
주루루룩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6번입니까…
1번, 아니 0번 이지요…
돌아서는 아들의 등 뒤로
영감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고향엔 면목없고 창피해서
아니 가셨을 거여..
집 근처에도 없을거고..
내일부터 서울역 지하철부터 찾아보자구...
내 함께 가줌세.....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몇번입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아버지 여러분 ...
당신은 몇번이며
당신의 아버지는 몇번입니까..?

아버님..!!
영원히 사랑합니다..!
아버님..!!
영원히 사랑합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 받은메일옮긴글-

    



부모님 살아생전에..



천지인신 하나되어 이내일신 탄생하니.
부생모육 그은혜는 하늘같이 높건마는.
청춘남녀 많은데도 효자효부 드물구나.
출가하는 딸아이는 시부모를 싫어하고.
결혼하는 아들네는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의 앓는소리 듣기싫어 외면하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듣기좋아 즐기면서.
부모님의 말씀하면 잔소리라 관심없네.
자녀들의 대소변은 손으로도 주무르나.

 

부모님의 흘린침은 더럽다고 멀리하고.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은 모르도다.
개병들어 쓰러지면 가축병원 데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노환이라 생각하네.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하나같이 싫어하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한도없이 쓰건마는.
부모위해 쓰는돈은 한두푼도 아깝다네.
자식들을 데리고는 바깥외식 자주하나.
늙은부모 모시고는 외식한번 힘들구나.
아들있고 딸있는데 양노원이 웬말인가.

 

늙은것도 원통한데 천대받고 괄세받네.
너도늙은 부모되면 애고지고 설을지라.
살아생전 불효하고 죽고나면 효자날까.
예문갖춰 부고내고 조문받고 부조받네.

 

그대몸이 소중커든 부모은덕 생각하고.
내부모가 소중하면 시부모도 소중하다.
부모님이 죽은후에 효자나고 효부나네.
가신후에 후회말고 살아생존 효도하세
생각하고 말을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어느 퇴직한 교장선생님의 글 中에서


               

어느 노인의 유서와 죽음

 

그는 재산도 많아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건강도 죽기 전까지 좋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사회적으로 명망도 어느 정도 받으며 살았다.

자녀도 서넛이나 두었는데,모두들
여유 있게 살고 사회적 신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유산을 자신의 후처에게 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남겼다.
자녀들에게는 별로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녀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렇게 유언한 노인을 비난하였다.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지."
"후처한테 쏙 빠졌던 거야."
"젊은 마누라 마술에 걸려든 거지."
"후처로 들어갈 때부터 꾸민 계략에 걸렸어."

 

특히, 기르던 개한테도 막대한 돈을 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다.

자식들이 개만도 못하게 되었다'고
비아냥 거리기까지 하기도 하였다.


그 노인이 70세가 넘어서 아내가 죽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30대의 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일 때에도 사람들은 말이 많았었다.

그때 그는 몸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옆에서 간호해 줄 만큼 병고로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었다.

"늙은이가 주책이지, 그 나이에 무슨 재취야."
"아마 기운이 넘쳐나는가 보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젊은 여자를 맞아들여."
"막내딸보다도 더 젊어요, 글쎄."
"재취를 하더라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모두들 젊은 여자가 틀림없이
재산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부녀처럼 서로 재미있게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10년을 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80세가 넘어 죽은 그의 유서에는
자식들에게 주는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오래 동안
내게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고,
현재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나의 혈육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내가 괴로울 때 누가 진실로 위로해 주고,
내가 아플 때 누가 지켜보며 함께 아파했었는가?

 

울적할 때 마음을 풀어주고, 심심할 때면 함께
놀아준 게 누구였더냐? 너희들은 아느냐?


예쁜 꽃 한 송이가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
정겨운 노래 한 가락이 어떻게 가슴을 뛰게 하는지를.

정(情)은 외로울 때 그립고,

고마움은 어려울 때 느껴진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의 친구보다
불행할 때의 이웃이 더욱 감사한 것이다.


병석의 노인에게는 가끔 찾는 친구보다

늘상 함께 지내는 이웃이 훨씬 더 고마운 것이다.

 

한창일 때의 친구들이 재롱을 피우는 귀여운 자식들이라면,
늙어서의 이웃은 내 어린 시절의 부모와 같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너희들은 친구라 할수있고,
너희들의 젊은 계모와 검둥이는
내게는 부모와 같은 존재들이라 할수있다.

 

내가 왜 친자식인 너희들에게 보다 나의 젊은 아내와
우리 개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젊은 아내가 못된 계모로 살아도
내게는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분이다.

 

설령 유산을 노리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가 내게 잘 하는 이상
내게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내 인생의 가장 괴롭고 힘없고

외로운 마지막 시기를 그래도 살맛이 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힘없이 외로이 사는 노인에게는
어떻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어떤 사람이 진실로 소중한 사람인가를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한번더 해보게 하네요.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기쁠 때보다 슬플때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누구를 떠 올리겠습니까?

 

기쁠 때에는 생각조차도 않는 얼굴
일생동안 제 자식에게 하는 십분의 일만라도
정을 주지도 못하는 얼굴


가끔씩 이라도 삶이 힘든날이 아닌 기쁜 날에
부모님을 진정 생각하고 사시는지요.

 

우리는 부모에게 조금 해준것은 잘 기억하면서
받은 것은 기억 못하며 사는게
못난 자식의 삶인것 같습니다.


부모의 눈물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일생의 흔적인 것 입니다.

다시 내가 부모가 되어
삶의 굴레로 물려줘야할 귀중한
인륜의 도덕인 것입니다.


내 삶에 웃음이 흐를때 생각나는 사람
삶이 슬플때 생각나는 얼굴이 아닌
진정 기쁘고 행복할때 늘 가슴에 새기는
늙으신 부모님의 얼굴이어야 할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어버이날이 아닌
일년에 한번 생신이 아닌
늘 생각하고 걱정하는 자식이 되어야겠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삼복의 여름날.

작열하는 태양아래 너무도 무더운 삼복의더위.

열대야에 잠못들고 뒤척이다가 깨어

더위에 시달리는 화초들에게

물 한바가지씩 주며 시원한 목욕시키고

서둘러 다시 삼배이부자리 정돈하고

누어본들  바람소리 하나없으이 

잠을 못루고 우리님들 문안드리네요.

연일 기록적인 더위에 몸조심하시고

건강챙기셔서 곳 닥아오는 결실의계절에

알알이 익어가는 가을 들녁을보며

풍요로움으로 행복해지세요.

울님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사랑의 펜더(김병기)"


 

   

   

세상에서 가장 깊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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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깊은 감동

회장님은 왜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회장의 자리를 버리고 이렇게 고생을 하며 군고구마 장수를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회장은 크게 웃더니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곳에서 뭘 느끼나?”

? 사람들과 포장마차 그리고 빌딩들…….

뭐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회장은 포장마차 밖으로 나오더니 포장마차 오른쪽에 붙여 놓은손으로 쓴 듯 보이는군고구마 42천원 이라는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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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 42천원, 이걸 보며 느껴지는 게 있나?”

나는 많은 것을 가졌네.사업에 성공해서 돈과 지위를 얻게 되었. 그래 나도 그게 최고인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자네가 서 있는 그 곳에서 나도 어떤 군고구마 장수에게 고구마를 사기 위해 서 있었고 성공과 돈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네.

군고구마 장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어.

군고구마를 달라고 말하기 미안 할 만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었.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나봐.

한 아이가 그 군고구마 장수에게 다가오더니

아빠, 몸도 안 좋으신데 이만 들어가세요,

제가 대신 일하고 들어갈게요.’ 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그저 참 효심 깊은 아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마침 그때 내가 서점 하나를 인수했던 싯점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고 싶어서 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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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야, 학교 가서 공부하고 여기에 와서 밤늦도록 아버지를 도와드리면 힘들지 않니?’

그랬더니...

그 아이가 힘들지 않다고 말하더군.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서

혹시 학교에서 필요한 책 없니?

이 아저씨가 서점을 하나 운영하는데 네 예쁜 마음이 아름다워서 좋은 책을 선물하고 싶구나.’ 물었었지. 그런데 그 아이는 아무런 책도 필요하지 않다더군.

회장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연한 듯 말했다.

동정 받기 싫었던 거군요.”

회장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동정? 나도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지.

그래서 이 아저씨가 책을 주는 게 싫으니라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대답하길 "저는 하루에 한번씩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 깊은 책을 읽고 있는걸요."라고 대답하더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군고구마 장수가 가난한 살림에 그래도 좋은 책을 사주며

자식 교육은 잘 시키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물었지

"어떤 책이 가장 감동 깊었니? 그리고 나는 그 아이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대체 그 책이 어떤 책이기에 회장님이 놀라시기까지......”

어떤 책이 가장 감동 깊었냐 ?"

고 묻는 나에게 그 아이는

", 이 세상에 그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책보다 몸도 불편하신 아버지가 손수 수성 팬으로 삐뚤삐뚤 써 놓으신

군고구마 42천원, 이라는 문구가 세상에서 가장 감동 깊어요.

저 글씨 안에는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무리 자신의 몸이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저는 아버지의 저 글씨를 보며 마치 책장 넘기듯 가족을 사랑하아버지의 마음을 넘겨 볼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더군.


김종원의 세븐 데이즈(Seven Days) 에서



 


휠체어 아내가 행상 남편에 보내는 글 (감동실화)                    

휠체어 아내가 행상 남편에 보내는 글 (감동실화)

 
저는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서른아홉살 주부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저의 다리가 되어주는
고마운 남편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입니다.

저는 한살 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은후 장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멋진 글귀로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제가 남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방송을 통해서입니다.
 
지난 1983년 우연히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그램을 통해
문밖출입을 못하며 살고 있는 저의 사연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지금의 남편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들고 있던 펜으로 무심코 저의 주소를
적었답니다.
 
남편은 그 다음날 바로 저에게 편지를 했지만
저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글을 잘 몰랐던 탓도 있었지만
남자를 사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남편은
답장도 없는 편지를 1년 가까이 1주일에 한번씩 계속 보내왔고,
저는 여전히 답장 한통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그 먼
곳에서 서울 금호동의 저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장애자인 제 사정상 반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먼 곳에서 저를 찾아온 사람이기에
손수 정성껏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만나고 제주도로
돌아간 남편은 그날부터 1주일에 한통씩 보내던 편지를
매일 일기처럼 적어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포가 하나 왔는데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 걷지도 못하는 저에게
1,000개의 날개를 달아
이세상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며
보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남편의 청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결국 직장을 포기하면서 저를 보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고,
3년에걸친 청혼 끝에 저는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 했습니다.
85년 7월17일, 저희는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내 삶의 날개가 되어주는 당신께.-
 
여보, 지금 시간이 새벽 5시30분이네요.
이 시간이면 깨어있는 사람보다 아직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단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더욱 많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이미 집을 나서 살을 에듯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맡기고 있겠지요.

그리고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당신.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늘 힘겹기만 한 우리 생활이
당신을 많이 지치게 하고 있네요.

내가 여느 아내들처럼 건장한 여자였다면
당신의 그 힘겨운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으련만,
평생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는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나 안타까워 자꾸 서러워집니다.

자동차에다 건어물을 싣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당신.

그런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 한 방울,
전기 한 등, 10원이라도 아껴쓰는 것이 전부라는 현실이
너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불편한 나의 다리가 되어주고,
두 아이들에게는 나의몫인 엄마의 역할까지 해야 하고,

16년 동안이나 당뇨로 병석에 누워계신
친정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당신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어머니께 딸인 나보다 더 잘하는
당신이지요.
이런 당신께 자꾸 어리광이 늘어가시는
어머니를 보면 높은 연세 탓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속이 상하고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
남 모르게 가슴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답니다.
 
여보,
나는 가끔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지친 모습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당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생각합니다.

"가엾은 사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한평생 걷지
못하는 아내와 힘겹게 살아야 할까?" 라구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치지만
자고 있는 당신에게 혹 들킬까봐
꾸역꾸역 목구멍이 아프도록 서러움을 삼키곤 합니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당신을 따라 나섰지요.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게 되지요.

그런데 며칠 전 초겨울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 날,
거리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던 우리 부부나이 정도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가는 모습을 보았어요.

서로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게 하려고
우산을 자꾸 밀어내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이 비를 몽땅 맞으며 물건 파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내가 느꼈던 아픔과 슬픔은 어떤 글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어요.

그때 나는 다시는 비 내리는 날 당신을 따라 나서지
않겠노라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답니다.
 
그리고 여보,
지난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당신은 결혼때 패물 한가지도
못해줬다며 당신이 오래도록 잡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나에게 조그마한 반지를 사주었지요.
 
그때 내가 너무도 기뻐했는데
그 반지를 얼마 못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팔아야 했을 때,

처음으로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은 그때일을 마음 아파 하는데, 그러지 말아요.
그까짓 반지 없으면 어때요.
이미 그 반지는 내 가슴 속에 영원히
퇴색되지 않게 새겨놓았으니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3년 전 당신은 여덟시간에 걸쳐
신경수술을 받아야 했었지요.
 
그때 마취에서 깨어나는 당신에게 간호사가
휠체어에 앉아있는 나를 가리키며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 사람인데요"
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

나는 바보처럼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한없이 눈물만 떨구었어요.

그때 간호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세요" 라고. 그래요,
여보.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예요.
 
건강하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늘 나의 곁에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어린 시절 가난과 장애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늘 소원했던 공부를 시작했지요.

적지않은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야학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어머니 저녁 챙겨주고 집안청소까지 깨끗이 해놓고
또다시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와주는 당신.

난 그런 당신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어린 시절
여느 아이들이 다 가는 학교가 너무도 가고 싶어
남몰래 수없이 눈물도 흘렸는데
이제서야 그 꿈을 이루었어요.
 
바로 당신이 나의 꿈을 이루어 주었지요.
여보, 나 정말 열심히 공부해 늘 누군가의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예요.
 
여보,
한평생 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의 삶이지만
당신이 있기에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 삶의 바로 그 천사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늘 감사의 두 손을 모으며 살 겁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 임영자님의 글 -

 ♬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아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만나
어설픈 살림살이 서툴긴 해도 얼룩진 행주치마 정이 들었네
더러는 야속하고 미운 생각에
눈물많은 여자마음 애도 타지만젖은 손이 애처롭다 하신 그 말은
여자의 아픈 정을 달래줍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한 사람
하늘같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자는 뜻을 세워 천년을 살고 여자는 정을 심어 오직 한 평생
여자의 치마폭이 넓다 하여도
새는 마음 드는 근심 어이하리오
당신이 하늘이면 나는 땅이라 하늘이 울면 땅도 절로 젖는다는데
근심어린 당신얼굴 바라보면서 부질없는 서러움에 울기도 했죠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한 사람
당신만을 목숨처럼 믿고 삽니다

 


사나이 정주영 인생’ 그를 울린, 세 여인           

            

 

 

한국기업 세계화의 원조 선구자
도전과 개척으로 일군 신화창조의 주인공...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최고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부인 변중석 여사~
단골 요정의 마담~
고향의 첫사랑 여인과 운명적 관계~

.

2007년 8월17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참배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주영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인생을 통틀어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도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였다.


 

 


 

 미모의 마담, 큰돈 빌려주고 자살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해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 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
  정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다.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북한까지 가서 찾은 첫사랑 ‘이장 집 딸’

.

.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

2000년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북측은 정회장에게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다.

 

          {예쁜 꽃삽에 떠 온글}



어머니를 향한 뒤늦은 후회... [감동]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글!!


하나 밖에 없는아들을
일찍이 서울로 유학보내고,
두 부부는 고생 고생하며
학비를 조달하여 대학 졸업시키고….

지금은 재벌회사 과장까지 승진하여
강남 아파트에서
명문대학 나온 우아한 아내와
잘살고있는 아들은 정말이지
이 부부에겐 크나큰
자랑이었답니다..



아들은 여간 효자가 아니어서
추석이나 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와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곤 했었답니다

우아한 며느리와
공주같은 손녀딸을 볼 때마다 노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으쓱대는
기분을 느끼곤 하였지요.

아들 내외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버님 어머님 시골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아니다.
우리같은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서울이 다 무에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고향땅에 묻힐란다" 하고 사양했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부부는
언젠가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 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노부부중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상을 치르는 내내 아들 내외가
어찌나 애통하게 엉엉우는지
동네사람들도 모두 가슴이 찡하였답니다.

초상을 치르고 나자
아들 내외는 또다시 간곡하게 청하였답니다.

"아버님,
이제 어머님도 가시었으니 어쩌시렵니까?

고향집 정리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저희와 함께 사시도록 하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할멈도 떠나간 이제,
그도 그럴것이다 싶어
노인은 몇날을 생각타
결심을 하였답니다.
논밭과 야산등…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답니다.

가산을 정리한 돈은
아들 내외에게 주어
32평아파트에서 42평 아파트로 옮기고
노인의 서울생활은
처음엔 그런대로 평안하였답니다.

그즈음 아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도 되었고,
회사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였으므로
매일을 새벽에 출근하였다가
밤12시가 넘어서야 퇴근 하는 일과가
몇 달이고 계속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집안이 썰렁하니 비어 있더래요.
다들 어디 갔나? 하던 차에
식탁위에 있는아내의 메모를 보았더래요.

메모에..
- 여보 우린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요.
식사 안하고 퇴근하였다면
전기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뒤져 반찬찾아 드세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속을 뒤져
맥주를 찾아서 마시고 있자니
현관쪽이 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 그런데 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게 아니겠어요?

"왜 둘만이지?"
"둘만이라니? 요기 밍키도 있잖아?



아내는 강아지를
남편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아니, 아버님은?"

"오잉? 아버님 집에 안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아버님이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나?"

남편이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웅, 으응…" 아내는 더듬거렸습니다..

사실 아내는 평소에
노인이 몇시에 나가서 몇시에 들어오는지
도통 생각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노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노인이 들어오실 때까지
자지않고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나 봅니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켠에 정성들여
접혀진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듯이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습니다.
잘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자정도 넘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노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잠깁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 시간까지 아버지가
귀가 안 하신걸 보면
가출하신것이 틀림 없는것 같은데...

한데…왜,왜,왜…???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평소에 햇볕이 잘 드는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정 넘은 오밤중이긴 하지만
왠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습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빨랫줄에는 팬티 두장과
런닝셔츠 두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것이겠지요.

방 한켠에는
어린 딸의 옷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이제 그만 지겨워한다고
옷장을 더 예쁜 것으로 바꿔주고 나서
아마 이 헌옷장을 아버지 몫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옷장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얼굴입니다.

상치를때 영정으로 사용하던 사진입니다.
방구석에 소반이 있었습니다.

소반 위에는 멸치 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김치등이 뚜껑있는 보시기가 몇개 있었고
마시다가 반병 정도 비어있는
소주병이 있었습니다..


아아~~, 아버지…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시고 계셨던가요?

아아~~, 아버지…
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을 손수빨고
이 방에서 손수 말리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고 싶은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나 노인이 어디선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있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가서는
노인의 가출을 신고하였습니다.
고향에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3번아 잘있거라 6번은 간다…



이 암호를 우선 풀어야
아버님을 찾을수 있을것같은 마음에
아들은 조바심을 쳤습니다

직장동료, 상사…대학동창등….
현명하다는 사람은 다 찾아
이암호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암호를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이제 부장진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없고…
오로지 아버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술한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자네 김아무개 영감 자제가 아니던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아, 예…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웅, 난 김영감 친굴세…
근데 요즘 왜 김영감이 안뵈네?
그리구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좋은가?

그래서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님에게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한
그 암호문을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쪽지를 한동안 보더니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흐으, 자네 이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다구?
이사람아,
김영감이 늘 얘기하곤 했지….

우리집에서는 며느리가 젤 위고
두번째는 손녀딸이고
3번이 아들이라고 했지
4번은 강아지 밍키고…
5번은 가정부라 했네.

그리고 김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 하고는
한숨짓곤 하였지…..

그러케 쉬운것도
자네는 풀지 못하나? 에잉…"
아흐흐흐흑…
아들은 그만 눈물을
주루루룩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6번입니까…
1번, 아니 0번 이지요…
돌아서는 아들의 등 뒤로
영감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고향엔 면목없고 창피해서
아니 가셨을 거여..
집 근처에도 없을거고..
내일부터 서울역 지하철부터 찾아보자구...
내 함께 가줌세.....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몇번입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아버지 여러분 ...
당신은 몇번이며
당신의 아버지는 몇번입니까..?

아버님..!!
영원히 사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 감동 글 】



영국의 방송국에서 수년 전에 청취자들에게
좋은 상품을 걸고 현상문제를 내었었답니다.
문제라는 무엇인가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였답니다.


아침에 풀잎에 맺힌 이슬.
장미 송이.
호숫가에 수선화.
오래된 바위 위에 이끼.
닦여진 유리 구슬.
안개 템즈강..등등 여러 가지가 응모되었는데,
심사위원들의 숙고 뒤에 1등으로 당선된 응답은
'
우리 엄마의 '이었답니다.


어머니의 한쪽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마디 하지 않았고
마음의 문을 철저히 닫은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없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쪽 눈만이라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 가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며칠이지나 드디어 아들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풀고 앞을 보는 순간 아들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얘야, 눈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작고 못생긴 사과에 얽힌 감동이야기


어느 마을 길 모퉁이에 한 과일 행상이 있었답니다.


손을 다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리어카를 마련해 

자기 마을 어귀에서 과일행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장사를 하던 어느날 한 손님이 다가와 묻더래요. "이 사과 어떻게 하지요?"


"예! 천원에 두개 드립니다."

 

그사람은 삼천원을 내고 사과를 고르는데... 
작고 모나고 상처가 있는 사과만 여섯개를 골라서 봉투에 담아 가더랍니다.


며칠후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똑같이 그렇게 사과를 작고 모나고 상처난 것만 골라 담더랍니다.


 

그 사람이 세번째 오던날 행상이 말했답니다. 
"손님 이왕이면 좋은 것으루 좀 고르시지요...!"


손님은 행상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웃는 얼굴로 여전히 작고 시들고 

모나고 못생긴 사과만 골라 담으며 말하더랍니다.

 

"그래야 남은 사과 하나라도 더 파시지요. 저두 어렵게 사는데 댁은 더 어려워 보이세요. 

힘을 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행상은 숨이 멈춰지더랍니다. 
그리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답니다.


아직은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사과 봉지를 들고 돌아서 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않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생기더랍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가 이 세상은 살맛나게 만드나봅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봅시다. 아름다운 당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SBS홍보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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