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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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참 바보같이 살앗 살았군요

 

가슴 아픈 사연!며칠 전 신문에 90을 넘긴 당대 최고 인기여배우최은희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옛날 조용한 지적 여인상으로최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그녀의 인생 파란 만장한속에

 

지금은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쓸쓸히혼자 떠날 날만 기다리시고 있답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하루 하루 즐기며 삶시다

 

입양해서 키워준 자식들도 최은희를 모시지 않구 양로원에 맡겨 놓고 있는상황

 

친자식도 그런데 키워준 자식은 오죽하랴자식들 모두 다 소용없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자신의 장례식엔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장송곡으로 해달라고 했답니다.!~


참말허무하고 아쉬움에 마음이 휑합니다

 

아! 김정일이 탐내어 납치까지 한 이런 미모의 배우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화려했던 삶에 무기력한 채 빈손으로 저승길에 나서니

 

돈도 명예도 부도 화려함도 다~헛된 물거품이란 것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노래가 더욱


실감나는 한순간입니다

 

인생길 황혼 속에 즐겁게 살면서 남은인생 친구나 혹은 연인과 함께


여행 다니면서 남은여생을 재미있게 보내는게 제일 값진 인생길이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모두 힘냅시다!!


자식위해 희생하고 고생 하지 맙시다. 아이들의 남은세계는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갈 시간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 먹은 우리가 급하고 시간이 없습니다나이는 속일수 없습니다.


남은 인생 즐겁게 재미있게 삽시다 화이팅!~!!

 

파티장에서 한 부인이 잠깐 넘어졌다.


구급차를 부를까요?라고 했지만


그 부인은 괜찮다며 구두가 새것이라서잠깐 휘청거렸을 뿐이라고 했다

 

여럿이 그 부인 옷에서 흙을 털어주었고음식도 새것으로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부인은 파티를 즐기고 귀가했다다음날 그 부인의 남편이 전화를 했는데

 

오후 6시에 그 부인은 사망했다고 했다파티에서 부인은 뇌졸중을 당한 것이다

 

만일 그때 누가 뇌졸중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기만 했어도 부인은 지금 살아 있을 것이다

 

신경과 의사의 말입니다뇌졸중 환자를 3시간 이내에 치료하면 뇌졸중에서


오는 결과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답니다

 

문제는 뇌졸중이 발병하면 즉시 증세를 인지하고진단해서 3시간 이내에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지요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뇌졸중을 영어로 STROKE 라 합니다

 

처음 석자 STR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뇌졸중의 징후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걸 알지 못하면 비참한 재앙이 발생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뇌졸중의 징후를 알지 못하면환자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당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질문을 함으로써


뇌졸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1. S - Smile 웃어보세요


2. T - Talk 말을 해 보세요. 제대로 완전한 문장으로 답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3. R - Raise 두 팔을 올려 보세요위의 3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하지


   못하면즉시 구급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구급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세요

 

뇌졸중의 새로운 징조 네번째 혀를 내밀어 보세요

 

혀를 내밀었는데 혀가 꼬부라졌다든가 이쪽 또는 저쪽으로굽었다든가


하면 이것이 뇌졸중의 또 다른 징조입니다.

== 옮겨온 글 ==

어느 불효자(의사)의 때늦은 후회                    

             

어느 불효자(의사)의 때늦은 후회 


지금도 시장길을 지날때면 시장구석진 자리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곤 한다.
예전에는 이 시장길을 지나는 것이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에게 이곳을 지날 여유도 없다.
어쩌다 가끔씩 들려보는 이곳 시장터.
난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분의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엄마 시장갔다 올테니, 밥 꼭 챙겨먹고 학교가거라"

난 장사를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잠을 자는 척 했다.
이 지겨운 가난. 항상 난 이 가난을 증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나고 말리라는 다짐을 굳히곤 했다.
내가 학교가는길 시장 저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할까봐 얼른 도망친다.


우리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 철근에 깔리신 어머니를 구하시려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일을 가시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나물을 캐서 팔곤 하셨다.
난 항상 들판에 절뚝거리시며 나가시는 어머니가 싫었고
밤새 나물을 다듬으시는 모습도 싫었다.

더더군다나 시장 한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 비슷하게
장사를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퉁퉁부은 다리한쪽을 주무르시며
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나를 보자 어머니는 기쁜 낯으로 3,000원을 주신다.
난 그돈을 보자 화가 치민다.
"난 거지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이런돈 필요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린다. 
  


다음날 아침 난 어머니가 시장 간 틈을 타
집에가서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학교길 약수터에서 간단히 세수를 한 다음 물로 배를채운다.
난 비록 풍요롭게 먹고 입지는 못했지만 공부는 악착같이 했다.
그래서 부잣집 자식들보다 공부는 항상 잘했다.
하지만 그자식들에게 사는 미움도 만만치않았다.
그날 4교시가 끝날무렵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거린다.
복도를 보니 어머니가 절뚝거리시며 교실로 들어선다.
선생님 드리려고 장사하려고 다듬은 나물을 한봉다리 들고서...
어머니는 내가 어제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셔서 학교에 오신거란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들이 한마디씩한다.
"야!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그놈은 그잘난 부잣집 아들 현우였다.
현우는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따라한다.
무엇이 우스운지 반 아이들은 웃어댄다.
난 화가 나서 그놈을 정신없이 두들겨 줬다.
그리고서는 교실을 나와 버렸다.


저녁무렵 집에 가니 집앞에
잘차려 입은 여자와 현우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거야 뭐야. 자식 교육좀 잘시켜,
어디감히 우리집 귀한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난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집에 들어가도 어머니는 아무말씀 없으시다.
난 어머니에게 한마디한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알았어? 챙피해서 죽는줄 알았단 말이야."
"그래 미안하다 난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난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난 해서는 안될말을 해버렸다.
슬픔을 보이시는 어머니를 못본척하며 자는 척 했다.
"난 꼭 성공할꺼야."
밤새 이렇게 외쳤다.
다음날 아침 수업료라며 엄마가 돈을 쥐어 주신다.
얼마나 가지고 계셨는지 너무도 꼬깃하고 지져분한 돈이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부르신다.
적어도 선생님만은 내편이셨다.
어머니께 잘 해드리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신다.
선생님께서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어머니께 전해 달란다.

난 그러마 했다.
하교 길에 길 모퉁이 배추가게 쓰레기통에서
배추잎들을 주어모으시는 어머니를 본다.
난 모른척 얼른 집에 들어와 버렸다.
그날 저녁 배추국이 밥상에 올라온다.
"이 배추!"
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께선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배추가게 아저씨가
팔다 남은거라고 버리기 아까우니 가져가서
민석이 국 끓여 주라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말에 난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난 거지자식이 되어버린것만 같았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어머니 생신이셨다고 한다.


   


ㅡㅡㅡ그후~17년후ㅡㅡㅡ


난 의사가 되었다.
가정도 꾸리고 병원도 장모님께서 개업해 주셨다.
난 너무도 풍요로운 생활에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
돈은 꼬박꼬박 어머니께 보내 드렸지만 찾아가 본적은 없었다.
아니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느날.....
퇴근길에 우리집 앞에 어느 한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걸 봤다.
다가서니 그노인은 내가 가장 잊고자하는 어머니였다.
전보다 더 야윈얼굴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신다.
"민석아 많이 좋아졌구나."
난 어이 없다는듯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난 차갑게 한마디 한다.

뭐가 모자라서 나에게 온단 말인가...
그동안 생활비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민...석....아....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
"전 민석이가 아니라 최영호입니다."
난 이 한마디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정부가 애써 돌려 보낸후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후 한달동안 난 악몽에 시달린다.


할수없이 난 다시는 되돌아 가기 싫은
시장이 있는 우리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장 한귀퉁이에 여전히 나물을 팔며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가만히 곁에 가서 지켜본다.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묻는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
"아니여. 우리 아들이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어머니는 자식자랑에 기분이 좋았는지
나물을 많이도 넣어 드린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난 예전의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변한게 없는 우리집
거의 쓰러져 가는데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이런곳에서 살았다는게 생각에 없을 정도였다.
난 방틈으로 돈봉투를 넣어놓고는 돌아선다.
1년이 지난후 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고교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발길은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장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정말로 보이질 않았다.
도착한 곳에는 선생님이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신 선생님 아무말씀도 없으시다.
무거운 침묵.......
"민석아 내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선생님께선 낯익은 보따리를 나에게 주신다.
바로 어머니가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보따리셨다.
이 보따리에다 밤새 다듬은 나물들을 싸서
시장에 팔러 가시곤하셨다.
"풀러 보거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난 보따리를 풀렀다.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동안 네가 돌아올까봐서 그리고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수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렸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셨다.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드렸단다.
그래서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선생님의 얘기들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의 얘기는 이러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적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
퇴근길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터라 나를 데리고가서 키웠다고 한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둘수 없어
항상 나를 공사판에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 어느날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뛰어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와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다고 한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난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로 살아난
운좋은 놈이라고 한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 다리마져 불편하신 어머니께
주위사람들은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어머닌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기에
나를 버리시지않고 키우셨다고 한다.
그후 어머닌 아버지를 잊기위해 이곳으로 옮기셔서
나물을 팔며 나를 키워오신거란다.


내가 대학다닐때 암인걸 아신 어머니는 자신의 몸보다
내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병원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암 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내가
내 어머니를 암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보고자
물어물어 서울까지 오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난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던
어머니를 버린 나 자신을 용서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조용히 내려보시는
어머니의 사진이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이런 자식마져도 어머니는 사랑하시나 보다.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그후 난 시간이 날때마다 가끔씩 이곳을 들른다.
혹시나 어머니가 나물을 파시고 계실것 같은 착각에 말이다...

 

 


심금을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                    

 

 

 


 ♡심금을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

 

나환자만 있는 소록도 촌장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찾아와서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촌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노인은 " 저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40년전11살때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아들에게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하고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아들의 간곡한 호소에 소록도로 아들만 떠나보내고  

저는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려 둘째, 세째, 네째--…를 찾아갔죠.
그런데 사정은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한번만이라도 보고 용서를 빌고 죽겠다고

 
다시 또 먼길을 떠나  오늘 그 아이를 찾아 만나보니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이제 저와 함께 살아요 " 합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촌장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촌장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 옮겨온글 -


 



어느 40대 가장의 눈물어린 사연                           

 


 어느 40대 가장의 눈물어린 사연


전 부산에 살고 있는 40초반의 가장이지만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지요.
결혼한지 1년쯤 되어서 전 그만 질병으로
직장을 그만두어야했습니다.

그 질병이란게 흔히 나이드신 어른들에게
많이찾아오는 퇴행성 관절염
젊은 사람에게는 흔치않는 병이
당시 나이 31살인 저에게 찾아오고 말았지요.

병원에서 너무 심하니
수술을 받아야 겠다고하여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장애4급이란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오래 서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하고
오래걷지도 못하게 되었지요.
그때 얼마나 괴롭고 살기 싫어는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내는

"자기야 내가 있잖아 내가 벌어서
먹고 살면 되지 뭔 걱정이에요."

하면서 방긋 웃던 아내...
하지만 그속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절 대신해서 아내는
힘든 직장생활을 해야만했습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앉아만 있을수 가
없다는 생각에 아내 혼자 벌어서
푼푼이 모아놓은 돈으로
작은가게를 차렸지만
경험부족으로 돈만 날리고말았지요.

그렇게 세번정도 망하다 보니
아내 얼굴보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나 자신이 자꾸 소심해지더라구요.
친구들도 안만나게 되고
친척들의 경조사에도 빠지게되구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제발 기운좀내요. 왜그래 우리보다 힘든사
이세상에 얼마나 많는데
우린 아직 젊잖아. 앞으로 우린 잘 살꺼야"

그렇게 위로하는 아내에게
전 번번이 짜증을 낸지요.
하지만 아내는 묵묵히
그짜증을 받아주었습니다.

어쩌다가 처가집에 가노라면 전 죄인아닌
죄인처럼고개를 숙었야만 했습니다.
장모님과처남들 보기가 얼마나 미안한지
그때마다 장모님은 제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이 사람아 왜그리 풀이 죽었서 아무생각 말고
몸이나 잘보살펴 좋은날 올껄세"

하시면서 관절에 좋다는 음식이면 식품들을
어디서구했는지 한보따리 싸주시지요.
당신의 귀한딸 데려다 고생만 시키는데
뭐가 이쁜 사위라고
그저 장모님께 고마울 따름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사다는것이
하염없이 싫어던 나는 그만 아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지요.

그 날은 못마시는 술을 마시고
아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전
직장에서 지쳐 돌아온 아내에게

"봐라 여기좀 앉아봐라"

술에 취해 있는 절보고 무슨일인가 싶어
제앞에 앉은 아내에게 다짜고자

"우리 그만 헤여지자...
이래 살아봐짜 니 평생 고생이다.
지금도 안늦었다.
좋은사람 만나가라 내가 니한테
해줄수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당황한 눈빚으로 빤히 바라보던 아내는

"지금 뭔소리합니꺼 술취했으면 그만 자이소."

하는 아내에게

"말귀 못 알아먹나. 그만 헤여지자고...
니 매날 이래 사는거 지겹지도 않나"

면서 소리를 쳤지요.

그렇자 아내도 화가난는지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 헤여지면 성치도 않는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끼라예."

"나는 그렇게 못합니더 당신하고
죽을때까지 살랍니더..그러니 앞으로 그
런 말 하지마이소. 한번만 그런 말 더하면 가만
안둘끼라예."

그만 아내는 돌아 앉았서 울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와 아내는 밤늦도록
부둥켜 앉고 울고 말았지요.
그렇던 어느날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해 줄 것이 없나하는 생각에
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헌데 생전 처음으로 장을 보는데
얼마나 쑥스럽던지

"두부한모주세요."파천원어치주세요."

얼굴이 화끈거리데요.

집으로 돌아온 전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나름대로 된장찌개를 끓었고 밥을 지었지요.
처음하는 부엌일이라 정신없더라구요.

직장에서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밥상을 차려가니
"어머"하면서 아내가 깜짝 놀라더라구요.
전"맛이 있을지모르지만 먹어봐"하면서 씩웃었죠.

아내는 씻지도 않고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한모금 먹더니
"진짜 맛있다. 환상이다. "하면 밥을 먹는데
저는 보았습니다. 밥을 먹었면서
두볼에 흘르는 아내의 눈물을
하지만 가끔 직장에서 돌아온 아내는
너무 피곤한지 씻지도 않고
저녁도 먹지않고 그냥 쓰러져 자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전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지요.

이못난사람만나 이고생하는 사람
가슴이 너무 아파왔습니다.

그렇게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전 얼마전 부터 노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정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쳐 들어오는 저를 보고

아내는 "힘들면 그만둬요.
성한 사람도 노점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하면 안스러워 하지만 그래도
전 요즘에 장사도 그런대로 되고 재미있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아내생일때 처음으로
제가 푼푼히 모아둔 돈으로

아내의 생일선물로 작은 귀거리를 사주었는데
귀거리를 받은 아내는 얼마나 목놓아 울던지
그리고 절 너무나 사랑하다고 하더군요.
전 지금껏 아내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소리한번 못해지요.
이방송을 통해

"나의아내 정애란 정말 정말 미안하고
고맙고 죽도록 사랑해"


 -모셔온 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줘 파킨스병 으로 고생을 하시던 할머니 시골에서 혼자 살수가 없어 서울에 사는 아들이 서울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되면 고향이 그립다고 말씀 하시던 할머니 살아 생전에 고향 땅에 한번 가봤으면 입버릇처럼 말씀 하셨습니다 봄이되면 산에가서 고사리도 꺽어서 말리던 생각 텃밭에 씨앗뿌리던 생각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웃 친구 할머니들이랑 이야기하던 경로당 모든게 한번 가봤으면 할머니의 그리움이었습니다 누가 날 내 고향에 데려다 줄거나 살아 생전 한번 가볼수가 있을까 내 고향 그곳에도 봄은 오겠지 고향의 꿈만 5년동안 꾸시던 할머니가 며칠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들이 장례를 치른후에 고향 앞산에 할머니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할머니는 죽어서 고향땅에 가실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병원에 함께 계시던 어느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에 내 고향으로 날 보내줘~! 흑인영가 노래소리가 귓전에 맴돈것 같습니다 일요일 아침 할머니의 이야기가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나이들어 힘 없어지면 가고 싶은곳도 마음대로 갈수 없고 젊어서는 생각나는 곳에 마음대로 갈수가 있는데 이제 늙어갈 인생 -- 마음이 생각이 머리를 - 그 이야기를 인생 산다는거 그게 그렇다니까요 누구나 말입니다 누가 아니라고 말할사람 있겠습니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세월앞에 어쩔수 없고 내고향르로 날 보내줘~!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다던 내고향 그곳에 봄이 오면 진달래 꽃 피고 새울고 할머니는 눈을 감고 고향땅에 가신 답니다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아침중에서>



아버님 제사상 위의 곰보빵                    

                 

  

 

아버님 제사상 위의 곰보빵



어린 시절 서산에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린 저는 
마을 어귀의 신작로에 나가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꽁무니에 가득 메달고 달려올 버스를 기다리며 
멀리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고개를 길 게 빼고 바라다보고는 하였습니다. 

이제 버스가 서면, 먼지가 한 바탕 휩쓸려 지나가고 
입을 막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에 
햇빛에 그을린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가 
땀에 전 작업복 차림으로 내릴 것입니다. 

제가 반갑게 뛰어나가서 안기면 아버지는 
엷은 웃음과 함께 남루한 웃옷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곰보빵을 꺼내어 제게 주실 겁니다. 

참으로 먹거리가 부족하던 그 시절의 곰보빵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맛이 있었기에 
저는 너무나 아까운 마음에 그걸 한입씩 베어 물지 못하고 
아주 조금씩 뜯어서 먹으며 집에까지 돌아오고는 하였는데, 
누나도 그걸 보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지만 
막내인 제 것을 빼앗아 먹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간이 되어 큰길에 아버지 마중을 나가려는 
저를 누나가 제지하며 못 나가게 하였습니다. 
어린 저는 누나가 저 혼자서 아버지가 갖다 주시는 곰보빵을 
먹는 것을 질투하여그런 것으로 생각해 
떼를 쓰며 억지를 부리다가 
결국 누나에게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여섯 살 아래인 제게 누나가 손찌검을 한 것은 
제 기억으로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떼를 쓰다가 매까지 맞고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잠이 든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누나는 다음날, 
지난밤에 아버지가 가져오신 곰보빵을 그대로 제게 건네주었고, 
오후가 되자 제 손을 잡아끌고 
트럭의 뒷자리를 얻어 태우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누나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공사현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우리는 무거운 질통을 등에지고 
힘겹게 이층까지 자갈과 모래를 실어나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인부들이 쉬는 시간에 새참으로 
곰보빵을 나누어주는 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피곤한 몸을 벽에 기댄 채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빵을 이리저리 구경만 하다가는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는 수돗가로 가서 꼭지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빵은 바로 매일 저녁에 큰길까지 마중 나오는 
저에게 주려고 아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걸 받아서 맛있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누나는.. 
"봤지? 너 때문에 아버지는 힘들고 배고픈데도 
네게 갖다 주려고 매일 새참을 거르시는 거란 말야.." 
하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결핵이라는 병으로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마저 돈을 벌어 온다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병석에서 일어나 
창백한 얼굴로 노동판의 막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곤 하셨는데 

그 모습이 철이 든 누나에게는

몹시도 안되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날, 서너 시간이나 걸려서 집으로 걸어오는 도중 
누나는 허기져하는 저에게 
싱아를 뽑아 주고 보리 이삭을 따서 비벼 주기도 했고,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비벼서 빼낸 다음 
버들피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럼 난 얼마 동안은 '삘 삐리리' 
그걸 불어대느라 흥이 나서 잘도 걸었죠. 
마을이 멀리 보이는 데까지 왔을 때쯤 
아픈 다리를 주물러 주며 누나가 불러주던 노래 
'뒷동산 콩밭 갈 때 엄마 찾을 때 누나하고 
저녁밥을 지어 놓고서 뒷동산 은행나무 밑에 앉아서 
돌아오실 어머니를 기다렸다네' 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곰보빵이 먹기 싫어졌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작업복 주머니 속에서 
찌그러지거나 부스러져 버린 곰보빵을 제게 건네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당신의 제사상 위에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곰보빵을 보며 
제 자식들은 의아한 듯싶지만 
아버지가 되기 전에야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아버지! 
그렇게 허기진 뱃속을 수돗물로 채우시게 만들며 
제가 빼앗아 먹었던 곰보빵을 
이제라도 마음껏 음향하십시오. 



박정희 대통령과 창녀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1963년12월~~~1979년10월. 15년10개월) ``종규야................................!! (옛..! 각하...! 부르셨습니까..?) 때는 1969년 가을철의 어느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장인 박종규씨를 불렀다. 수줍게 웃으면서, 손 짓으로 귀를 가깝게 대라는 것이다. ``종규야, 오늘 밤에, 나좀 조용히 나갔다 오고싶다. 준비 좀 해 다오......! 대통령을 쳐다보니, 노동자들이 입고 다닐듯한 어설픈 가을 잠바에, 찌그러진 중절모를 쓰고있다. 도데체 어디를 살짝 다녀오시겠다는 것인지..? - - - - - - - - - - - - - - 신분과 계급을 떠나서, 인간 박정희와 박종규는 이미 사사로운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선지, 평소에 박 대통령은..서슬퍼런 대통령 경호실장인 박종규를, 마치, 친 동생을 부르듯이 실장이라는 칭호를 빼고 `종규,라고 부르기를 즐기는 것이다. 그들의 인연은, 박정희 대통령이 육군 소령의 계급으로 육군 본부 정보국에 있을때 부터 시작되었었다. 당시에 박종규는, 육군 중사의 계급으로 정보국에서 근무를 했었고..... 그러던 어느날,, 박종규는 커다란 실수를 한다. 격무에 지쳐서.. 참았던 스트레스를 술잔을 넘기며,, 풀어 제끼다보니... 여자를 __게되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여관 방이고... 호주머니는 텅텅비어있는 것이다. 앗~차...! ``수령해서 보관하고있던, 1개월 분의 정보국의 정보비를 모두 탕진한 것이다. 박종규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 박정희 앞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무리 근무에 시달렸어도 그렇지, 그렇게 무단으로 군무를 이탈하고 정보비까지 몽땅 탕진을 해....!!! ( 잘못했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요.) 그는 눈물을 훔쳐 내리면서, 처벌을 기다렸다...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박정희는 한마디를 던진다. ```죽을 죄인줄 알면, 앞으로 다시는 그런일을 하지 않으면 되지,,, ```그러나 저러나, 없어진 정보비는 어떻게 메꾸어야 하지......... 턱을 괴고, 고민하는 박정희를 쳐다보며.. 박종규는 차라리 목을 매달고 자살하고 싶은 충동도 느껴야 했다. 단순히 죄송하고 은혜로움의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들의 상하관계는 예사롭지 않을 수 밖에 없었고.. 어느날인가... 박정희는 결심을 한다. ``하사관인 박종규를 장교로 만들자..... 그렇게 해서... 박종규를 단기 사관의 길을 인도해서. 육군 소위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만들었고... 세월이 흐르고, 서로간 근무지가 달라졌어도, 그들의 끊어질수 없는 핏줄 이상의 상하 질서는 변할수가 없었고.. 그래서, 역사의 수레가 용트림하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이미 탈영한 상태에서, 육군 소령의 계급장으로.. 주군인 박정희를 모시는 첨병이 된 것이다. ``좌... 지철, 우...종규는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다.... 공수부대원 육군대위 차지철은, 당시 출동했던 공수부대장 박치옥 대령의 추천이 포함된, 하루 아침 도박의 승리였고.. 박종규는 이미 평생을 나누는, 혈육과도 같은 삶의 연결 관계였던 것이다. 상당수의 비밀 경호원을 대동하고, 청와대를 몰래 빠져나온 박정희는 서울역 앞, 양동골목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당시에 서울에서 제일 큰 창녀촌 지역을 암행 시찰 하는 것이었다. 박종규와 비밀 경호팀들은 모두가 초긴장 상태다.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이는 민정 시찰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창녀촌을 급습하다니.... 경호원들을 절대로 표시내지않도록 단속을 한, 대통령은.. 아니 인간 박정희는 혼자서 터벅 터벅 창녀촌의 골목을 후벼든다. 누가 보아도 중년의 노동자다. ``빠~알간 전구불이 주렁주렁 매달린 어둠의 창녀촌에서는, 새악시들이 마구 튀어나와 대통령의 소매끝에 매어달린다. 곳곳에 숨어서 지켜보는 경호원들은 침이 마른다. 입속이 바싹 바싹 매말라간다. 머리통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아니 저 저애들이... 도데체 어느 안전에.... 튀어나가 말릴 수도 없다. 소리칠 수도 없다. 각하가, 특별히 소리치기전에는.. 절대로 옴짝 달싹 말라는 엄한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데 어떤애가 아예 각하를 껴안으며 숱제 매어달려 버린다. ```옵~빠.....잠깐만 쉬었다 가~~~~용.... (그래 좋다... 쉬었다 가자...!)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박종규는 절망의 한숨을 내어 뱉는다. ``세상에나 맙소사.. 각하가 어떻게 저런 창녀들이랑.. 같이 하룻밤을.... 대통령은 창녀와 손을 잡고, 2층의 다락방을 올라가는 삐끄닥 소리가 들린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두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은 창녀의 방에서, 두사람은 마주 앉았다. ```옵~빠...__타임은 200원이고, 긴밤은 1000원이에~~용..! 우선 화대부터 주세요.. 나는 씻고 와야 되니깐....! ```대통령은 깊게 눌러썼던 중절모를 벗었다.... ````워~매....``혹시 대통령 아저씨 아니세요.. 여자아이는 깜짝 놀라며 소리를 친다. 영락없는 대통령의 모습이니깐.. (야..이눔아.. 내가 대통령이라면 네가 믿겠냐...! 그러지 않아도 어렵게 살아가는 판에...여기저기서 감히 내가 대통령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려대서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괜한 소리 지껄이다가 잡혀가서 혼줄나지 말고 그만 닥쳐라 이눔아...) ``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대통령은 500원짜리 고액지폐 몇장을 쥐어주면서 이야기한다. ``아마 요사이 5만원짜리 지폐와 가치가 비슷할 것 같다. (```열차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갈련다... 그동안 나랑 이야기나 나누자구나...) ``순간 어린 창녀는 당황을 한다. 쉬었다가 간다면, __ 타임이 분명한데... 이렇게 많은 돈을.... 횡재한듯이 받은 돈을, 절대로 다시 줄수는 없고.. 한마디 내어뱉는다. ````옵~빠...! 그러면 내가 나가서 쏘~주랑 오징어랑 사올테니깐...술이나 한잔 하자....ㅎㅎ 그렇게 해서, 대통령과 어린 창녀는 양동의 창녀촌 2층 골방에서 한잔술이 시작되었고... 한잔이, 두잔 석잔이 되고..한병 두병이, 서너병이 금방이닷... 창녀 아이는 차츰 술이 취해간다. ``아저씨, 여기 포주들도 경찰들도 정화위원도 모두가 도둑놈들 이에요. 다~아..지네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이야우리들을 감시하면서 뜯어먹고,

서로 단속나온다고 알려주고 숨기고, 모두가 도둑놈 강도들이에요~~옹.. 나는 미용 기술이라도 배워서 깨끗한 미장원 한번 차려보고 싶은 것이 꿈인데.. 절대로 이뤄질수 없는 꿈이지 뭐에요...흥, 아저씨는 대통령하고 비슷하니깐 이야긴데,, 대통령도 도둑놈이에욧,,,,,,,,,,모른체 하면 도둑놈이지 뭐,,,, ```빡~`정희도 도둑~~~~~~~~노~옴.............! 어린 창녀는 혀꼬부라진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술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져.. 소로록 잠이 들었다. 잠든 창녀의 모습에서, 아롱진 눈물자욱을 쳐다보던 대통령은 글을 적는다. (````밝은 세상이 될것이다. 너의 희망도 이루어 질것이다. 희망이 이루어지면 열심히 살자.. 그래서 가난을 이겨내고, 정직하게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구나..) 그녀의 벼갯닢에 쪽지를 묻으며, 지갑에서 여러장 지폐를 빼어 놓는다. 저~벅 저~벅... 꼿꼿한 걸음으로 쪽방을 나오는 대통령의 모습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뿜어낸다...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은 새벽에 비상을 건다. 지금 즉시 내무장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장 집합..!!! (``님자들은 회전의자에서 폼만 잡으면 끝나는 줄 알~앗...!!!! ) 다음날부터, 서울역 앞 양동과 종로 3가의 창녀촌들은 철시가 시작된다. 갈곳 없는 창녀들을 보호하는 장소도 만든다. 미용기술을 비롯한 생계형 교육을 준비한다... 직업 훈련소의 새로운 시작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창밖을 본다. 키다리 코스모스가 빵~긋거리며 고추 잠자리를 희롱한다. 잘 살고 싶다고 소리치는 어린 창녀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만히 손수건을 꺼내든다. 조국 근대화를 생각하며,, 눈가에 비치는 눈물을 지우려고...

           

어느 할머니 祈禱

 

20세기의 마지막 해 1월 21일 아침 11시, 서초동 법원 5층 복도에는 
한겨울의 싸늘한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법정으로 바쁘게 들어서던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몸집이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문 잠긴 다른 법정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바닥 위에서 홑겹의 바지를 입고, 
잠시도 쉬지 않고 엎드려 절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내심 아마도 죄 지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할머니 무슨 일이신데 이렇게 추운 데서 기도하세요?”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는 우리 아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못된 에민기라요.”
할머니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한 내용은 이랬다. 
할머니의 아들 내외는 둘 다 약대를 나와 함께 약사시험을 쳤는데
 며느리만 합격해 하는 수 없이 며느리 이름으로 서울 변두리에 
조그만 약국을 열었다. 

 

 

그 뒤 아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며느리는
 약국을 경영하면서 생활을 꾸려 갔다. 

하지만 여자 혼자 약국을 경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늦은 밤 젊은 며느리 혼자 약국을 
지키다가 동네 불량배들한테 봉변을 당할 뻔했고, 

이따금씩 술취한 손님들이 희롱하며 덤벼들기도 했다.  

 

부산에 사는 할머니는 오랜만에 아들집에 다니러 왔다가 

이런 며느리의 모습을 보고 속이 무척 상했다. 

한편으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아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할머니는 집에서 공부만 하는 아들을
 다그쳐 약국으로 내보냈다. 

아내와 함께 약도 팔고 조제도 해주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은 세 번째 도전한 약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면허증을 받으면 흰 가운을 입고 

당당히 약사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행운이 다가올 때 늘 악마가 먼저 시기하는 법일까.
 갑자기 무면허 약사를 적발하는 단속이 나와 아직 약사 면허가 
나오지 않은 아들이 그만 구속되고 말았다. 

법은 국민건강을 위해 엄격한 약사법을 규정하고 있다. 
약사 면허증이 없으면 약국을 개설하지 못하고, 

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위반할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전과자가 되면 있던 자격도 박탈된다. 

“아들을 맨날 구박만 했어요. 

며느리는 약사인데 아들은 약사가 못 되었으니까요.

 그것만 해도 녀석은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이제 에미 때문에 감옥살이까지 하는기라요.”

할머니는 오열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콧잔등이 시큰했다.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 변호사는 선임하셨어요?” 
“우리 며느리가 변호사는 댔어요.”

다행이었다. 나는 그 변호사가 이 할머니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 재판은 기계적이고 냉혹할 때가 있다. 
사법경찰관리가 작성한 수사기록 안에는 위법만 있을 뿐 

온정은 없다.
 검사의 공소장 역시 자격 없이 약을 팔았다는 

몇 줄의 생명 없는 보고서인 게 현실이다.

 이럴 때 어떻게든 재판장의 피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

 그게 뭘까. 

몇 년 전이었다. 상습절도범으로 구속된 

한 소년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사십대 초반인 그녀는 수원역 광장 한 모퉁이에서
 핫도그를 파는 노점상인이었다.

 그녀는 하얀 손수건 속에 꽁꽁 뭉친 백만 원을 내게 내밀었다. 

얼굴에 가득 낀 기미와 누런 피부는 
그녀를 칠십 노파처럼 보이게 했다. 

찌든 삶이 그녀를 늙게 만든 것이다.
 나는 그 돈을 만들기 위해 

핫도그를 몇 개 팔아야 했느냐고 물었다.

 한 개 팔면 백 원짜리 동전 네 개가 남으니까 

핫도그 2천5백 개를 팔아야 남는 돈이라고 했다. 

그녀는 훔친 돈으로 놀기에 바빴던 
못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상습절도범인
 아들에게는 아무런 정상참작의 사유가 없었다.

나는 법정에서 그 소년의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속원 눈치를 보며 팔아야 했던 핫도그 갯수를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희생과 사랑을 강조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 어머니의 정성으로 소년은 석방됐다. 

어머니의 치열하기까지 한 사랑은 자식이 어떤 음침한 
골짜기에 있더라도 살려낼 힘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떠올리면서 나는 할머니의 담당 변호사가 기도하는

 이 모습을 꼭 보았으면 하고 마음으로 희망하고 있었다. 

“할머니, 아드님은 잘 될 겁니다. 만약 재판이 끝났는데도 
아드님이 나오지 못하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나는 명함을 꺼내어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
선생님 요, 정말 고맙습니다.”

한마디 위로에 할머니의 얼어붙은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다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다. 
할머니의 작은 어깨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데 할머니는 아직도 
법정 앞에서 얼어붙은 망부석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슬며시 걱정이 됐다.

 

~옮긴 글~

 

 
 


아내의 빈 지갑

 흰색 배경에 빈 지갑의 이미지 콘텐츠 - 17294878

 

아내의 빈 지갑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다 떨어진 후에야

놀이터 느티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어 놓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빈 몸으로 서 있었습니다.

묵빛 까치집 하나를 머리에 이고

혼자 겨울을 서 있었습니다.

 

아내의 가슴속에도 까치가

슬픈 집을 지었던 모양입니다.

 

병원의 아내에게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다가

화장대 서랍 속에 있던 아내의 지갑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사용했던 그 지갑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배부른 나의 지갑

그 속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화장대 위에 꺼내놓았습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거래처 사람들의 명함 몇 장

밥값 영수증,지하철 노선표, 카드와 주민등록증

서너 장의 지폐와 함께 현금인출기가 내뱉은 전표 하나

일곱 살 난 딸아이의 사진까지

그 조그만 지갑 속에

참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휴지통에 버리고

어떤 것은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아내도 나처럼

지갑 속의 물건을 꺼내보았겠지요.

하지만 아내는 아무것도 다시 넣어두지 않았습니다.

 

헤어짐이라든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는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런,.

우리가 전혀 바라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불행은

유리컵이 깨지거나

잠을 설치게 하는 새벽녘의 뒤숭숭한 꿈 같은

그런 하찮은 예고도 하나 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결혼 후 십여 해를 넘게 살았던 언덕 꼭대기

낡은 집을 떠나던 날

부서진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잡동사니들을 쓸어모으다가

시집간 딸에게 보낸 친정 어머니의 편지며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의 오래된 흑백사진 몇 장을

집어 들고 흘리던 아내의 눈물처럼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가 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저 혼자서

속으로 속으로 겪어야만 하는 마음 아픔이

못내 견디기 힘든 그런 것일지라도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마치 날이 차가워지면 제빛을 잃는 잎들이 그러하듯

미련 두지 않고 바람에라도 의지해

떨어져 내려주면 좋으련만...... ,

 

그런 아픔을 지우고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떨쳐버리는 일이

새 밑의 어느 날

오랜 수첩 속의 이름들을

다시 새것에 옮겨 적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쓸모 없는 이름이며 전화번호는

빼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아내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숨짓는 아내의

시리도록 아린 가슴속에 쌓인

나로 인한 슬픔이며 아물지 못한 생채기들을

지갑을 정리하듯 수첩의 이름을 옮겨 적듯

그렇게 훌훌 비워주고

말끔히 정리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곱던 아내의 머리카락이

암세포보다도 더 독한 방사선에 쫒겨나

지는 낙엽처럼 모두 빠져버렸을 때는

아직 첫눈이 내리기 전이었습니다.

 

한 해가 가던 저녁

딸아이가 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왜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깨고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에요?

 

아내는 아이를 껴안고 웃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빠는 맨날 울기만 해.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습니다.

 

아내의 병실 창 밖에도

빈 둥지를 이고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봄이 오고 잎이 새로 나면

까치가 다시 돌아올까요?

 

창 밖으로 보이는 까치집을 보며

나는 아내가 비워둔 그 지갑 속에

다시 뭔가를 채워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글 옮김~

 

 

 

 

 


심금을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

 

 

 

심금을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세째, 네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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