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신문고(國民申聞鼓) 

 

국회의원 비례대표 없애고 명예직으로 선출하자!

국회의원 1인당 지급되는 혈세가 연 7억9,254만 원이니 염라대왕도 부러워 한단다.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어 국민이 진짜 주인인 나라를 만들자! 

 

주권을 맡겨 놓으니 종놈들이 상전노릇 하며 기고만장하여 짐승도 안 하는

동성연애 합법화 하자고 미친개소리를 내며 꼴값을 떨고 있다. 

 

선진국 국회의원 세비가 1인당 GDP기준 평균 3배인 반면 한국의 국회의원은 5배가 넘는 

세비를받으며 전 세계 3위의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국민이 느끼는 가장 부패한 집단 1위가

정당과 국회요 국회의원 수준보다 국민의 수준이 높은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한 대한민국이다.  

 

선출권력의 부패는 공무원 부패로 이어지고 이들이 죄를 면하려는 온갖 술수로 인해 

수사기관과사법부까지 부패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의원 숫자를 100명만 줄여도 연 800억 원가량 절감되고, 의원 보좌진 인건비

연 1,467억을 절반만 줄여도 연 750억 원가량 절감이 되니 국회의원들의 의지만 있으면

도탄에 빠진 소상공인들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국회의원 지원예산 》 

 

1. 국회의원 보수

2. 의원보좌직원 인건비

3. 의원정책개발경비

4. 의원실 운영경비

5. 의원보좌직원 경비 등으로 구성 

 

2020년 국회의원 지원예산 총액 2,377억6,200만 원 

 

*의원 1명에 지급되는 국민들의 세금이 7억9,254만 원(×국회의원 300명) 

 

*국회의원 보수 총 462억 2,400만 원 

 

* 의원보좌관 등 의원실 직원 인건비 1,467억 4,600만 원(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등 정직원 총 8명과 인턴 채용 가능)

*사무실운영비 1년 564만 원 지원 

 

*차량유류비 및 차량유지비 매월 146만 원 지원 

 

* 입법 및 정책개발비 1년 2,779만 원 지원

* 정책자료발간, 홍보물유인비 1년 1,200만 원 지원

* 공무수행 출장비 총 20억400만 원/300명(1인당 출장비 연 평균 668만원) 

 

☞ 국회의원 수당 및 경비(연봉, 월급) 2020년 연봉1억5,187만원. 

 

1. 월 수당 (월평균 749만 8,910 원, 년 8,998만 6,420 원) 해괴한 수당이 다 있다.

일반수당 월 675만1,300 원

관리업무수당 60만 7,610 원

정액급식비 14만 원 

 

2. 상여금 (1,485만 2,860 원)

정근수당 675만1300 원

(1월과 7월 각 일반수당의 50% 지급) 명절휴가비 (810만1560 원)

(설,추석에 각 일반수당의 60% 지급) 

 

3. 경비 (4,704만 원)

입법활동비 313만 6,000 원

특별활동비 78만 4,000 원

(특별활동비는 300일 기준으로 회기 중 1일당 3만1360원이 지급) 

 

자료출처/ 기획재정부와 국회 사무처 

 

 

 

청와대 1년 유지비가 얼만 줄 아십니까?

일 천 억입니다!

 

청와대 사이트에 들어가면 연간 예산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 내내 청와대 예산을 꾸준히

늘어서 21년 970억을 넘었습니다.

공개된 예산만 그렇고 특활비등의 비용은 빠져 있습니다.

사실상 천억이 넘는 돈이 청와대 1년 유지비로 사용됩니다.

이런 구중궁궐에서 임금 놀이하면서 사는 건

문재인을 마지막으로 끝내겠다는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뜻입니다.

국민의 피같은 세금 천억을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임금 놀이하는 데 써야 합니까?

물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겨도 비용은 발생합니다만

지금 청와대 유지비에 반에 반도 안되는 금액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와대를 개방해서 국민의 품으로 돌려준다면

경복궁과 연계되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그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청와대 1년 유지비가 얼만 줄 아십니까?

천억입니다.

여러분은 국민의 혈세를 1년에 천억씩 쓰면서 대통령이

임금 놀이하는 대한민국을 원하십니까?

 

(펌글)

 

-? 그리움 ? -

 

화려했던 젊음도

이제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져 가고~

 

추억 속에 잠자듯

소식 없는 친구들이

가끔씩 그리워진다.

 

서럽게 흔들리는

그리움 너머로

보고 싶던 얼굴들도

하나 둘 멀어져가고....

 

지금껏

멈출수 없을것만 같이

숨막히도록 바쁘게

걸어 왔는데...

 

어느새 이렇게

서산까지 왔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흘러가는 세월에 휘감겨

휘몰아치는 생존의

소용돌이 속을

용하게도 빠져 나왔는데

 

뜨거웠던 열정도 이제

온도를 내려 본다.

삶이란 지나고 보면

이토록 빠르게 지나가는 .

한순간 인것을 ~

남은 세월에 애착이 간다.

 

보고싶은 얼굴들~

만나고 싶은 친구들 !!

오늘도 그리움 담으며

행복을 빌어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김경연
(33, 성남시 거주)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작

“불가에서는
현세에서 옷깃을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서
천 겁의 연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거늘

그렇다면
부모님과의 인연은
전생에 몇억 겁의
인연이
있어서였을까요?

그런데도
내 가슴에 각인된
불효의 죄스러움이
너무 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내 땅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딸로 태어난 제가

남편과의 결혼을
며칠 앞두고
식구들이 모인자리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부모님의 가슴에
처음으로 피멍을 들게
했습니다.

‘엄마, 아빠!
딱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결혼식장에서만큼은
큰아버지 손 잡고
들어가게 해 주세요.’

철썩!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앉아있던 오빠한테
뺨까지
얻어맞았지만
저는 단호할 만큼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잖아도
친정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부유한 시댁에 행여나
흉 잡힐까 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는데
꼽추 등을 하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많은 손님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었습니다.

‘걱정 말래이~~~
요즈음 허리가
하루가 다르게 아파 오니
내~ 그날은 식장에도
못 갈 것 같구나.



그러니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렇게 하그라~’

행여나
시집가는 딸이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까 봐
거짓말까지 하신
아버지!

상앗빛 순결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오신 손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행진하는 순간부터
북받쳐 오르기
시작한 오열로

결혼식 내내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습니다.



덩그러니
골방에 홀로 남아
쓴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실
아버지를 떠올리며

다시는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저는 또다시 용서받지 못할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를 가져
시집가자마자
심한 입덧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어려운 시어머니께는
감히 내색도
제대로 못 하고
늦은 밤 친정집에
전화로 고통을
하소연하곤 했었죠.



잔정 많은
남편이 사다 주는
음식들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고,

친정어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무쳐주시던 겉절이와
텁텁한 청국장이
먹고 싶어
흉내도 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햇볕 따스한 일요일 오후
화사하게 치장한 채
시어른들을 모시고

바깥나들이하기 위해
승용차에 몸을 싣고
골목 어귀를
빠져나갈 무렵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얼굴을
잔뜩 숙인 채 꼽추 등에
보자기를 들고서
건너편 슈퍼에서
두리번거리는 한 노인네는
분명 나의
아버지 같았습니다.

‘아버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으신데 설마~.’하면서
아버지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후
슈퍼로 물건 사러 나갔던
남편이 슈퍼 아줌마가
전해주더라며
조그만 보따리를
내밀었습니다.



‘야야!
너거 어미가
올 라카다가 일 나가서
못 오고
내가 대신 가지고 왔대이.
하나는 청국장이고
하나는
거절이 [겉절이]다.

배 골찌[배곯지] 말고
마싯게[맛있게]
먹그래이.’

맞춤법도 틀리게
어렵사리 쓰셨을
쪽지를 보면서
사돈댁에게 흠 잡힐까 봐
들어오지도 않고
전해만 주고 가실
생각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장인어른도 참!
여기까지 오셔서
왜 그냥 가셨지?’

남편도 미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만
올 수 있는 길을

언젠가 한 번
들린 적이 있는
큰 언니한테 묻고 또
물어서 찾아오셨던
아버지!

딸네 집이
눈앞이면서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 반이나
깨닫는다고 했던가요~

늦게나마 철이 든
저는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저지른 불효는
그 어떤 효도로도

깨끗이 치유될 수
없는지

날이 갈수록
한스러워집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남편 직장 때문에
따로 이사해서
친정과는 3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니 느는 건
눈물뿐이랍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부슬부슬
가랑비라도
내리는 날엔
사진첩을 벗 삼아
뒤적이다가

아버지 없는
결혼사진을 대할 때면
황량한 바람이
몰아칩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날의
불효자식이
이제야 철이 들었나
봅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앞으로 잘할게요~”



김경연(33. 성남시 거주)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



"후기"

서울 출판
문화회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경연 씨
(33, 성남시)
가 그 주인공이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그녀의 눈물!

수기를 읽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깊은 사랑 때문에 모두
말을 잃었다.



그녀는
‘몸이 편찮으셔서
아버지가
올라오시지 못했다.’라고
시댁에 둘러댄
핑계 때문에 지난 7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김 씨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었다.

딸의 수기 당선
소식을 모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김춘생 씨 (60세)
(경북 성주군 성주읍)는



‘아비의
마음 아픔은 말로는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시집간 딸자식이
행복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며

혹 이 일로
딸의 시댁에

누를 끼칠까 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아버지는
태어나실 때부터
꼽추는 아니셨어요.

제가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로 자주 뵙지
못하던
85년경 허리에

물이 차는 늑막염과
심한 열병을 앓아 등이
굽어버렸지요.’



김 씨는
‘어버이날’을
전후해 틈 나는 대로
남편과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면서
눈물을 훔쳤다.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김주영 씨는
‘딸의 수기는

골방 한 구석 편에
누워있던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그 위대한 부성애에
정당한 이름표를
달아준 것’이라며

‘우리들의
모든 아버지가
이와 같지 않더냐’라고
반문했다.



먼저 김경연 씨의
'아버지께 편지 쓰기'
공모 대상 입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제 자신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자식들이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께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다해
드리고 싶지만

이런저런
주변 제반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해
마음 한 편으로는

늘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비단 저뿐의 생각은
아니 겠지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날에

오늘 이 글을 잃으면서
시골에 계신
우리 어머님
만수무강 하시라고
전화 한 번 해 드려야
겠습니다.

 

효성 깊은 며느리

옛날 충남 공주 땅 팔봉산 자락에 효심이 지극한 청상과부가 병든 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본래 밭고랑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그나마 시집온 지 삼 년 만에

들일을 나갔던 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는 바람에 졸지에 죽고 기력 없는 시아버지만 떠안고

말았다.

말 잘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과연 몇 해나 버틸 거냐고 허구한 날 수군거렸지만

청상과부의 효성은 벌써 일곱 해를 하루같이 변할 줄 몰랐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은 변함없이 지극 정성이었으며

봄이면 날품팔이, 여름이면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팔아 힘든 생계를 이어갔다.

"아가야,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이제 좋은 상처 자리라도 만나 배나 곯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세상천지에 널 탓하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병든 시아비는 틈만 나면 며느리의 손을 잡고 통사정을 하며 울었다.

"아버님, 제 집이 여기인데 왜 저를 자꾸만 내치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살아도 이 집 며느리요, 죽어도 이 집 귀신인 제가 가기는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십시오.

아버님!”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이 돌아왔다.

그나마 받은 품삯을 시아버지 약값으로 다 쓰고 보니 정작 차례를 지낼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틀 후면 한가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상에 냉수만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병든 시아버지의 낙심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며느리는 방문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저 읍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며느리가 쪽마루를 내려서는데 시아버지는 그날따라 안간힘을 써가며 문구멍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나서는 며느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시아비는 피를 토하며 울고 있었다.

며느리는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했다.

걷다 힘이 부치면 냇가 미루나무 아래서 쉬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벼이삭을 주우며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더없이 야속하기만 한 서방의 얼굴이 어른거려 쉴 새 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걷고 또 걷고,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새 해는 한나절이 지나고 서쪽 하늘이 봉선화 꽃잎을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큰 재를 넘으니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버지, 어머니...”

딸은 실로 몇 해만에 보았을 친정을 내려다보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며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

얼마 후 딸은 친정 집 광속에서 제법 묵직한 자루하나를 들고 나와 미친 듯이 재를 넘고 있었다.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딸은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오던 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뭄이 들었다지만 요행히도 친정 집은 아직까지 보릿가루며 보리기울이 넉넉한지라 이고

갈 만큼은 퍼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곡식 자루를 이고 뒷동산을 넘고 있을 때 말없이 툇마루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동산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찌 이다지도 박복하더란 말이냐,

오죽이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 한가위에 친정 울타리를 다 넘었겠느냐,

아이고 불쌍한 내 딸아!”

며느리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온 몸이 땀에 절어 돌아왔다.

그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그녀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하나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한가윗날 아침에 산나물 반찬에 밀가루 전을 부쳐 흰쌀밥을 올리고 조상은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서방님께 제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 며칠이 되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사립문 밖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 밖을 나가보니 서너 말이 됨직한 좁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 흉년에 누가 이 귀한 낱알을 두고 갔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갈만한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남의 곡식을 덥석 축낼 수가 없어 며칠을 새벽잠을 설치며 전전 긍긍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던 터라 며느리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사이, 등에 지게를 걸머진 남자가 번개같이 담을 돌아 논둑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보셔요, 잠시만 저를 보셔요"

어느새 남자의 등 뒤까지 따라간 며느리는 그만 낚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멋쩍은 듯 웃으며 돌아선 이는 다름 아닌 친정아버지였다.

"이것아 집에 왔으면 어미나 보고 갈 일이지.

고구마다, 허기질 땐 꽤나 양식이 되고...

정 힘들면 대낮에 다녀가거라.

네 어미에게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아버지,

절 보셨으면 왜 한 번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딸은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들어가거라, 어서.

동네사람 볼까 무섭다. 어서!"

돌아서는 아버지의 볼에서도 어느새

하염없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카톡에서 받은글-

 

 

22세 경찰대생이, 현직 경찰에 "경사고 나발이고 무릎 꿇어"

 

중앙일보

경찰대학은 지난 3월 12일 경찰대학 제36기, 경찰간부후보생 제68기,

변호사·회계사 경력경쟁채용자 등 169명의 합동 임용식을 충남 아산 소재 경찰대학에서 개최했다.

 

“경찰대생인 피고인은 경찰관에 대한 평소 인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13단독 류희현 판사가 7월 공무집행방해·모욕 혐의로 기소된

박모(22)씨의 선고 공판에서 한 말이다.

경찰대 3학년이던 박씨는 1월 22일 현직 경찰관들을 폭행하고 모욕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씨는 경찰대생 신분을 내세우며 “경사고 경장이고 나발이고 무릎 꿇고 XX마세요”라며

경찰관들을 윽박질렀다.

류 판사는 “피해 경찰관이 상당한 모욕감과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박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경찰대는 2월 박씨를 퇴학시켰다.

? 어느 남편의 일기 ?

저는 한 3년전 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그때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갈등의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군요.

저도 회사생활과 여러 집안 일로 지쳐있던 때라 맞받아쳤고 순식간에 저희 부부는 각방을 쓰고 말도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갔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도 눈치가 있는지 언제부턴가 시무룩해지고 짜증도 잘 내고 잘 울고 그러더군요. 그런 아이를 보면 아내는 더 화를 불 같이 내더군요. 계속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가 그러는 것이 우리 부부 때문에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가끔 외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가지 긁을 때가 좋은 거라고 저한테 정내미가 떨어졌는지 외박하고 들어가도 신경도 안쓰더군요.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듯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러기를 몇 달, 하루는 퇴근길에 좌판에서 과일을 파시는 아주머니가 떨이라고 하면서 귤을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에 사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방 탁자에 올려놓고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아내가 내가 사온 귤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몇 개를 까먹더니 "귤이 참 맛있네" 하며 방으로 쓱 들어가더군요.

순간 저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아내는 결혼 전부터 귤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하고, 결혼 후 8년 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번도 사들고 들어간 적이 없었던 거죠.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생각치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뭔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예전 연애할 때, 길 가다가 아내는 귤 좌판상이 보이면 꼭 천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곤 했었죠.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져서 내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답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집에 어쩌다 갈때는 귤을 박스채로 사들고 가는 내가 아내에게는 8년 동안 귤 한 개 사주지 못했다니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 후에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먹고살기 바쁘고 애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반면 아내는 나를 위해 철마다 보약을 해주고, 반찬 한가지를 만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신경 많이 써 줬는데 말이죠.

그 며칠 후에도, 늦은 퇴근길에 보니 그 과일 좌판상 아주머니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샀습니다. 저도 오다가 하나 까먹어 보았구요. 며칠전 아내 말대로 정말 맛있더군요. 그리고 살짝 주방 탁자에 올려놓았죠. 욕실에서 나오는데 아내는 이미 몇 개 까먹었나 봅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던 아내가 "이 귤 어디서 샀어요? "
"응, 전철 입구 근처 좌판에서 " "귤이 참 맛있네 " 몇 달 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 입에도 몇 알 넣어주더군요. 그리고 직접 귤을 까서 아이를 통해 저한테도 건네주는 아내를 보면서 식탁 위에 무심히 귤을 던져놓은 내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뭔가 잃어버린 걸 찾은 듯 집안에 온기가 생겨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아내가 주방에 나와 아침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보통 제가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 사이가 안좋아진 후로는 아침을 해 준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냥 나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날 붙잡더군요. 한 술만 뜨고 가라구요. 마지못해 첫 술을 뜨는데, 목이 메여 밥이 도저히 안넘어 가더군요.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같이 울구요.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는 한마디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부끄러웠다고 할까요.

아내는 그렇게 작은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일에도 감동받아 내게로 기대올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정말 바보 중에 바보가 아니었나 싶은게 그간 아내에게 냉정하게 굴었던 내 자신이 후회스러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후, 우리 부부의 위기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가끔은 싸우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귤이든 뭐든 우리 사이에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주위를 둘러보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 출처 : 민들레 통신 / 생각의 씨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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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 글을 통하여 자식을 더 사랑하며 더 강한 엄마가 되고 부모님을 더 공경하고 사랑을 드리는 자식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

*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 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이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리며 '엄마~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동생인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 있었던 형의 뺨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 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 하시고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닌데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 거리다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 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 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 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꿈을 그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시 보고 보아도 또 다시 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아~~~ㅠ 네번째 본 오늘도 쏟아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습니다.

위의 글은 10 년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로서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 모 기업에서 뒷바라지를 하는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에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합니다.

이글은 한번만 읽기보다는 두서너 번 읽을수록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흐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적에 올라가던 암벽에서 생명의 밧줄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사랑과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 하고 노력도 해보기 전에 너무도 쉽게 포기하려 한다.

*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글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월북자에 뻥 뚫린 軍 경계..'비슷한 수준' 재발방지 대책만 반복

 

"보완대책 추진" 말해도..삼척 목선·태안 밀입국 '도돌이표'
'경계 실패' 책임자는 오히려 줄어..사단장만 보직해임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는 탈북민 김모씨(24)가 강화도 접경 지역을 통과했을 당시 포착된 영상을 군 당국이 분석중인 가운데 28일 김씨의 월북 경로로 추정되는 강화군 월곶리 인근의 한 배수로 앞 초소가 인적 없이 조용하다. 해병대 2사단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초소는 야간에 경계근무를 서고 오후2시까지는 비어 있다. 전방에는 (왼쪽)북한과 김포가 동시에 보인다.

군 당국이 탈북민의 '강화도 월북' 사건과 관련해 경계에 허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군은 지난해 6월 삼척항에서 벌어진 북한 목선 입항 사건 및 올해 4~5월 태안에서 발생한 중국발 밀입국 사건 때도 재발방지를 약속했었다. 군 경계 태세의 허술함이 드러나는 일이 반복되며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합동참모본부는 31일 오전 10시 이번 월북 사건과 관련해 합참 전비태세검열실이 조사한 내용을 공개했다. 당시 월북자의 이동 경로와 군의 대비태세가 주 조사 대상이다.

합참 관계자는 "전비태세검열실의 확인 결과 작전역량의 문제점이 확인됐다"며 Δ위병소 현장조치 미흡 Δ허술한 배수로 관리 Δ감시장비 운용인력 여건 등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군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 김모씨(24)의 재월북을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은 지난 18일 오전 2시18분부터다. 당시 김씨는 택시를 타고 강화도 월곳리에 도착, 인근 연미정 정자를 들린 뒤 곧바로 배수로로 향했다. 이러한 김씨 행적은 위병소와 민통선 폐쇄회로(CC)TV에 세 차례나 포착됐다.

김씨가 택시에서 하차한 뒤 배수로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10여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군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당시 200m 거리에 있던 경계병은 택시 불빛을 육안으로 봤지만 마을 주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씨가 통과한 배수로 관리도 엉망이었다. 내부에는 저지봉 역할을 하는 철봉과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지만, 몸집이 왜소한 김씨는 이 틈으로 유유히 통과했다. 철봉 사이 틈이 최대 30~40cm에 달했고, 노후화한 철조망은 제 기능을 못했다.

합참 관계자는 "배수로 점검은 지침상 매일 하도록 되어 있다"면서 "하지만 현장 관계자에 확인해보니 실제로 (매일)하고 있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합동참모본부가 31일 밝힌 탈북자 김모씨(24)의 재월북 추정 경로.

김씨가 입수한 뒤 북한 지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근거리·중거리 감시카메라에 5회, 열상감시장비(TOD)에 2회 포착이 된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관측 영상 상태가 좋지 않아 월북 장면을 가려내기 어려울 정도라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합참은 이번 사태의 후속 조치로 Δ전 부대 대상 수문·배수로 점검 Δ개폐식 등 경계 보강물 설치 Δ민간인 이동 통제 강화 Δ통합방위 작전 태세 강화 Δ감시장비 운용 여건 및 정신적 대비태세 보강 Δ감시 인원의 전문적 숙련도 향상 등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합참은 강화도 지역 경계를 담당하는 해병대 2사단장의 보직을 해임하고, 지휘 책임이 있는 이승도 해병대사령관과 최진규 수도군단장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로 했다. 또 주요 직위자와 관련자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경계 실패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징계 대상에서 남영신 지상작전사령관은 빠져 논란이 예상된다. 강화도 월곳리 지역의 작전통제 및 지휘계선은 해병 2사단(사단장 백경순), 수도군단(군단장 최진규), 지상작전사령부(사령관 남영신)로 올라간다.

지난해 군의 경계를 뚫고 삼척항으로 들어온 북한 목선 사건과 비교했을 때도 징계대상 범위가 줄었다. 당시 정부는 합참의장, 지상작전사령관, 해군작전사령관 등 군 지도부를 엄중 경고했다. 육군 8군단장은 보직해임됐고, 육군 23사단장과 해군 1함대사령관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는 탈북민 김모씨(24)가 강화도 접경 지역을 통과했을 당시 포착된 영상을 군 당국이 분석중인 가운데 28일 김씨의 월북 경로로 추정되는 강화군 월곶리 인근의 한 배수로에서 주민들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악마의 편집"→"어쨌든 죄송"..황운하, 뒤늦은 사과(종합)

 

'지역구 물난리 와중에 파안대소' 논란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이 뒤늦게 사과했다.

황 의원은 31일 페이스북을 통해 "전후 사정이 어찌 됐든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려 깊지 못했다. 먼저 수해 피해자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몹시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전날 황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대전의 수해 소식이 보도되는 가운데 웃고 있는 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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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김승원·박주민·최강욱·김용민·황운하·김남국 의원이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의원실에서 ‘처럼회’ 모임을 갖고 있다. 뒤에는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대전에서 폭우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페이스북 캡처

지역구 물난리 와중에 ‘파안대소’ 논란
황 “어찌 됐든 사려 깊지 못해” 사과글
‘악의적 보도’ 비판했다가 삭제하기도

‘지역구 물난리 와중에 파안대소’ 논란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이 뒤늦게 사과했다.

황 의원은 31일 페이스북을 통해 “전후 사정이 어찌 됐든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려 깊지 못했다. 먼저 수해 피해자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몹시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필요한 논란에 마음 아파하는 지지자분들에게도 송구스러운 마음”이라며 “더 진중해지고 더 겸손해지겠다.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앞서 황 의원은 언론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지우기도 했다.

그는 “사진 찍는 분의 요청에 따라 웃는 모습을 연출했고, 공교롭게도 TV 속에서 물난리 뉴스가 보도됐나 보다. 이 사진으로 ‘물난리 특보 나오는데 파안대소 구설수’라는 기사가 가능한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웃어야 할 순간이 있고, 심각해야 할 시간이 있고, 팔 걷어붙이고 일해야 할 때가 있겠죠. 웃는 모습이 필요한 순간에 침통해야 할 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하면 전후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속을 수밖에 없다. 악마의 편집”이라고 했다.

전날 황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대전의 수해 소식이 보도되는 가운데 웃고 있는 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사진을 보면 황 의원은 민주당 박주민, 이재정, 김남국, 김승원, 김용민 의원과 모인 자리에서 크게 웃고 있다. 사진 배경의 TV에서는 대전의 물난리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미래통합당은 이 사진을 두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라고 비판했다. 황규환 부대변인은 구두논평에서 “대전에서 물난리가 났다는 뉴스특보가 버젓이 방송되는데도 황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이 파안대소하고 있다. 민주당에는 자신들의 안위와 목적 달성에 대한 자축만이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전날 논란이 된 직후 황 의원이 “팩트를 교묘하게 억지로 짜 맞춰서 논란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관련 내용을 보도한 기사의 수준이 낮아 별로 언급할 내용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온라인상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6일 오전 대전시 중구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후보 사무실에서 황후보가 당선이 확정되자 꽃다발을 받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세월호 컵라면 장관 비난은 어떻게 생각하냐”

한 네티즌은 황 의원의 페이스북 댓글로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이 체육관에서 컵라면을 먹었다고 비난받았던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본인이 미흡했고 부족한 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었다. 죄송하다’ 이 말이 그리 어렵나”라며 비판했다. 이 사진은 언론사가 촬영한 것이 아니라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페이스북에 게시한 것이므로 ‘악마의 편집’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함께 사진을 찍은 김남국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사진 찍는 보좌진이 ‘싸우러 온 사람처럼 왜 웃지도 않고 있느냐’라고 해서 우리 이제 친하다는 모습으로 웃는 장면이 나갔는데 악의적인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해당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던 최 의원은 논란이vhr 일자 ‘사망자 발생 소식’ 자막이 포함된 사진 1장만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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