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성경공부 - 7. 현모양처 사라

본문 : 창17 : 15-19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노력과 열정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던 사라의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다 같은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조카 롯은 악의 상징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현모양처의 사라가 있었으나 롯의 가정에는 물욕에 눈이 어두운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만을 강조한 히브리서에는 가장 힘있는 신앙인으로 사라를 능가하는 신앙인은 없다고 칭찬한다(히11:11).

1. 여자로서의 사라.
1) 성경은 사라를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아내로 기록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현숙한 처로 살다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2) 사라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평범한 부인이었으나 미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두 번에 걸쳐 아내 때문에 아브라함이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창12:13-20, 20:1-3).
3) 베드로는 아내가 남편에 대한 복종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단장하는 본보기로 사라를 언급하였다(벧전3:6). 그녀는 외모의 아름다움만 아니라 자기 남편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복종한 내적 아름 다움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4) 사라는 책임감이 강한 여자였다. 가나안에 들어온지 십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책임을 감당키 위하여 여자로서 참기 힘든 일을 해냈는데 그것은 하갈을 첩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 자식을 잉태케 한 것이었다(창16:1-3).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지 못하고 저지른 죄이기도 하였다.
5) 사라는 보통 여자들처럼 질투심도 있었다. 하갈이 잉태한 것을 알고 업신여기자 본처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했으며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편을 들었다.

2. 믿음의 어머니 사라.
1) 사라는 무엇보다 신앙으로 여자의 지위를 높였으며 신앙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2) 사라의 신앙은 자연 속에서 얻은 것도 아니고, 어떤 초자연적인 데서 얻은 것도 아니다. 그녀의 신앙의 뿌리는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얻어진 것이며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면서 평범한 지위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얻어진 값진 신앙이다.
(1) 고향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할 때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 나섰다.
(2) 가나안 땅에서 방황하고 옆에 친구 하나 없이 고독하고 쓸쓸해도 불평 없이 아브라함을 따라 다녔다.
(3) 바로의 후궁이 될 뻔한 일이 있어도 의연히 남편에게만 충실했다.
(4) 나그네 접대에도 불평이 없었다.
3) 이러한 사라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은혜를 주셨다.
(1) 끝까지 변치 않는 신앙을 주셨다.
(2) 인간의 힘으로나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태를 열어 주셔서 잉태하도록 하셨다. 장막 안에서 음식 준비를 하던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창18:10)는 약속을 듣고 웃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롬9:7)하신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인물성경공부- 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본문 : 창12 : 1-4
1. 부름받은 아브라함
1) 아브라함은 본래 '아브람(위대한 아버지)'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뒤에 가서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조상이다(롬4:11
). 우상숭배로 가득하던 그 시대에 아브라함은 홀로 유일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던 사람이다(약2:23).
2)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8). 신앙의 생애는 언제나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 있어서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3) 신앙이 있다 하지만 순종이 없는 사람은 뿌리는 있으나 가지가 마르는 나무와 같이 또는 열매없는 무화과와 같이 말라 죽고 만다. 야고보는 이것을 가리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약2:17,26).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순종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순종의 비결은 믿음이다. 믿음없이 순종은 불가능하다.

2. 믿음의 아버지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실은 그의 신앙의 절정을 보인 사건이다. 본토를 버리라, 친척과 아비 집을 버리라, 하갈이 낳은 아들을 축출하라는 등 모든 어려운 명령을 다 실행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하는 독자까지 버렸기에 살아있는 신앙으로서 최상의 행위를 보인 것이다.
2)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22: 12)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친 위대한 행위는 믿음에 근거한 행위였고, 또 그 행위는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실로 그의 신앙의 절정을 보인 사건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선민의 조상이 되었고, 위대한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고(마1:1),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본이 되었다(히11:8-9).

3. 복을 받은 아브라함
1)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면 버릴수록 하나님은 더욱 복을 주신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의 길로 나섰을 때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셨다(창12:2-3).
2)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단계가 있다.
(1) 먼저 믿는 자들이 복을 받아야 한다. "네게 복을 주겠다"
(2) 다음에는 복을 나누어 줄 만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복을 받야야 한다.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3)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약2:5). 믿음은 무진장한 보화의 창고를 여는 열쇠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복을 받는 근원이며 비결이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길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길이기에 우리는 이 길을 또한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아갈 수 있다.

 


인물성경공부- 5. 노아와 홍수 심판|

본문 : 창6 : 13-22
1. 올바르고 흠없는 사람 노아
1) 노아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 29)는 말씀처럼 노아는 인간의 고생을 '위로하는 자'로 성장하였다.
2) 노아가 살던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사람만드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실만큼(6:5-6) 악하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 악을 행하여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고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6:13). 이제는 인간의 죄와 악을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마음아파 하셨다.
3) '그 당시에 노아만큼 올바르고 흠없는 사람은 없었다'(9절). 여기서 흠없는 사람이란 완전 무결한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그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

'(9절)는 기록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아는
(1)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8절)
(2) 의인(9절) (3) 완전한 사람(9절)
(4)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9절)
(5) 당대의 심판을 확신하고 방주를 만들어 예비한 사람(히11:7).
(6) 의를 전파한 사람(벧후2:5)이었다.

2. 하나님의 심판
1) 노아 시대는 혼란과 음란의 시대요, 포악과 죄악이 만연한 시대였다. 사람들을 지면에 그대로 둘 수 없는 말세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멸망시킴에 있지 않고 구원함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120년이란 회개의 시간을 주시고 의인 노아를 세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마24:38-39).
2)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도록 하셨다. (1) 노아의 방주는 구원선으로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다.
(2) 방주가 잣나무로 만든 것처럼 교회는 영생하신 예수의 몸과 그 십자가로 건설하는 것이다.
(3) 방주가 위를 향해 창을 내어 빛과 공기를 통하도록 한 것과 같이 교회는 하늘을 향해 성령님의 기운을 호흡하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영교의 길을 가지고 있다.
(4)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 물의 침투를 방지한 것처럼 교회도 세상 풍조의 침입을 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5) 방주 안에 식물과 제물을 저장하여 둔 것처럼 교회에는 영생의 양식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제물이요, 우리는 그의 제단에 들여놓은 제물들이다.
(6)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친히 닫으셨으니 이와 같이 교회의 문도 하나님이 닫고 여신다.
(7) 방주는 키도 없고 돛이나 노도 없는 배였다. 그저 떠 있기만 하고 자력으로는 항행할 수 없는 배였기에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맡겨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인도하심에 절대 순종하고 살아야만 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는 부강을 자랑하던 인간의 문명은 자취를 감추고, 새 세계는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일부터 시작 되었다.



인물성경공부- 4.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본문 : 창5 : 21-24
1. 에녹의 시대
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던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다. 므두셀라는 사망이 장차 온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면 므두셀라 시대부터 사망이 다가오는 시대요, 홍수 심판이 가까운 죄악이 관영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 홍수가 시작되었으니 그 시대가 얼마나 악한 시대였던가를 알 수 있다.
2) 홍수 심판을 앞둔 시대에 사는 에녹은 밖에 나가면 동행할 사람이 없고 들어오면 마음을 함께 할 사람이 없어 외롭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일들이 나쁜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외로운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움이었고, 두려운 세상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절대 안전한 생활이었다.

2.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는가?
1)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히브리서 11:5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같이 살았다는 뜻이다. 서로 믿는 사이가 아니면 함께 살 수 없다. 에녹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도 에녹을 믿었기에 함께 살 수 있었다.
2)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은 하나님 뜻에 절대 순종하였고 그 뜻을 따라갔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길이나 가시밭길로 인도하여도 내 의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3) 그 생활이 성결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에녹은 시대가 어려운 때라고 해서 숨어 있을 비겁자가 아니었으며, 박해가 두렵다고 가만히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예언자였다(유1:14-15). 홍수가 임박한 시대에 에녹은 홀로 바른 신앙에 굳게 서서 깨끗하게 행동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3.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에녹
1) 인간의 죽음을 성경은 죽었다 혹은 잠잔다고 했는데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사야는 "올바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실상은 재앙을 벗어나 평화를 누리러 가는 것이다"(사57:1-2 )라고 하였다. 에녹은 홍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데려 가셨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특히 홍수 심판 전의 시대는 죄악이 관영하였으니 악 때문에 고통이 많았다. 그 고통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 위하여 데려 가셨다. 에녹은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지면의 홍수 심판을 보지 않고 천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니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이 지구상에 없다.
2) 에녹은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려 올라갈 성도들의 예표이다. 오늘도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신자들을 하나님께서 에녹처럼 마지막 심판 때에 데려 가실 것이다.



오늘은 요르단으로 갑니다 ???               

 요르단의 지도부터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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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 가볼까요??          


 한때 세계를 지배했고 이스라엘백성들을 430년간이나 속국으로삼아

노예로부렸던 찬란한 문화의나라 애굽, 그 애굽이 수많은 지하자원을

소유하고도 오늘에 이집트로서는 왜 낙후되여있을까요??

이제 사진으로나마 그 찬란했던 애굽으로 가볼까요?

 먼저 지도를 확인해보세요  주변국가보다 엄청나게 넓은땅을 소유하고도.........

 

 애굽(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상공에서 내려다본 사진

 

 이집트의 4~5세기경의 성경사본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 입구

 

 이집트의 곱틱 공동묘지

 

 이집트의 곱틱 박물관

 

 이집트의 국립 박물관

 

 이집트의 나일강변

 

 이집트의 라마의 우물

 

 이집트의 라암셋의 성터

 

 이집트의 람세스 2세의석상

 이집트 람세지운의 벽화

 

 이집트의 람세지움

 

 이집트의 르비딤(베두인족의 본거지)

 

 이집트의 마가 기념교회

 

 이집트 마가요한의 순교지

 

 이집트 마라의 우물가의 베두인족

 

 이집트 맴논의 거상

 

 이집트 바란수도원(4세기경 세움)

 

 이집트 바벨론 성채

 

 이집트의 비둠(출애굽후 처음 머문곳)

 

 이집트 성 조지교회

 

 이집트 스핑크스

 

 이집트 시내산의 일출

 이집트 시내산입구 캐더린 수도원

 

 이집트 시내산입구 캐더린 수도원 가시떨기나무

 

 이집트 시내산입구 캐더린 수도원 모세기념우물

 

 이집트 시내산입구 캐더린 수도원입구 금 송아지모형

 

 이집트 시내산 정상의 교회

 

 이집트 시내산 중턱의 모세기념우물

 

 이집트 아무르모스크

 

 이집트 알라바스타 핑크스

 

 알무아리카교회

 

 이집트 애굽교회 제사장예복

 

 이집트 애굽왕들의 무덤계곡

 

 이집트 애굽의성읍. 비세벳

 

 이집트 에시온게벨

 이집트 예수피난교회

 

 이집트 죠서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이집트 체오프스왕의 보트

 

 이집트 초대교회 벽화

 

 이집트 카르낙 신전

 

 이집트 카이트베이 성채

 

 이집트 투타카멘왕의 황금마스크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집트 하세롯(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곳)

 이집트 핫셉슈트 여왕의 신전

 

 이집트의 홍해

 

 이집트의 홍해(수에즈운하 195Km)

 

 이집트의 홍해바다

 



터키 다녀왔남요                           

 중동 성지의 하나인 터키의 여러곳을 가보진 못해도,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서 둘러보세요

 당시에 당당하고 찬란했던 문화유산을

지금 사진으로라도 볼수있다는것은 행운???

 여기는 2000년전 당시의 공중화장실입니다.

 

 터키의 당시교회 내부 벽면

 

 교회내부의 벽화

 

 2000년전 교회내부의 주거공간

 

 당시 기독교인 2만명이 살았다는 거주지

 

 2000년전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의모습

 

 터키 동굴교회

 

 동굴교회에서 바라본 경이로움

 

 터키에있는 어느 동양인의 무덤 / 누가 여기에 잠들었을까요??

 

 터키의 로마 아르테미스 여신상

 

 로마시대의 신전터

 

 터키의 로마시대 목욕탕

 

 로마시대의 무덤

 

 터키의 로마시대 원형극장

 

 터키의 로마시대 원형극장 주변아래서...

 

 터키-로마시대황제가2000년전  다녀간 기념문

 

 터키의 로마시대황제가2000년전  다녀간 기념문

 

 터키-로마시대황제가2000년전  다녀간  분수대

 

 목욕탕 내부-고온탕, 온탕, 냉탕으로 구분됨.

 

 터키의 목욕탕 입구

 

 터키의 버섯바위 동굴집

 

  터키의 버섯바위

 

 터키 사도요한의 무덤이있는 성채

 

 터키의 석회암온천

 

 터키의 석회암온천

 

 터키의 석회암온천

 

 터키의 석회암온천

 

 터키의 신. 구 시가지의 공존

 

 터키의 에베소

터키의 에베소에서 항구로 통하는 길

 




노아의 대홍수-기독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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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7

  선화성결교회 차승환 목사 심방을 다녀오다가 교회 앞에서 목욕탕에 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보았습니다.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흔히 말하는 목욕 바구니에다 샴푸, 린스 같이 고만고만한 목욕제품 몇 가지와 우유랑 수건까지 담아 편하게 가는 모습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저는 목욕에 관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대구에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 일입니다.

어느 모임이 끝난 후 함께 했던 분들과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저보다 연배가 위인 목사님과 장로님들이었습니다.

같이 목욕하는 것이 불편했던 저는 빨리 몸을 씻고 후다닥 탈의실로 나왔습니다. 제일 먼저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장로님 한분이 저보다 앞서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계시더군요.

순간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제 몸을 보시고는 “차목사! 백돼지 같데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혼할 때는 29인치였던 허리가 아내의 음식 솜씨 덕분에 갈수록 차곡차곡 살이 붙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백돼지 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 몸이 부끄럽고 창피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가족을 제외한 어떤 사람과도 함께 목욕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구에서의 목회를 마감하고 안성에서 부목사로 8년여를 지내면서 효도관광이나 부흥회강사를 모시면서 수 십 번의 목욕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삼아 밖에서 기다릴 뿐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전에서도 동료 목회자들과 가끔 축구를 하고 2차로 목욕을 하러 가면 저는 약속을 핑계 삼아 도망쳐 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목욕탕에서 혼자 목욕을 했습니다.

무심코 던진 장로님의 ‘백돼지’란 말이 내겐 큰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축구를 마치고 역시나 혼자 집으로 돌아와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보통은 집에서 좀 떨어진 목욕탕을 이용했었는데 그날은 귀찮기도 하고 월요일 낮이라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남탕 안을 들어가 살펴보니 다행히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습니다. 안심하고 온탕에 들어가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아~ 좋다’하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인사를 하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서 보니 부목사님이 목욕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냥 집에서 씻을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서둘러 나오는데 부목사님이 “목사님, 꼭 백돼지 같으십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병입니다. 아주 심각한 정신병. 백돼지 같다는 말 한마디에 저는 10여 년째 목욕유목민이 되었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인해 목욕탕에 갈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집에서 먼 곳을 택하게 되었고 혼자서만 목욕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살을 빼면 되겠지만 붙어버린 살들은 그마저도 도무지 떨어지지가 않으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살을 먹으라”고 하셨는데 저도 우리 교인들에게 제 살을 떼어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언제나 백돼지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목욕할 수 있을지. 요즘 텔레비전이나 한국영화를 보면 왜 이리 나쁜 말과 욕들이 난무 하는지 아이들과 함께 볼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절반은 욕이 섞여 있습니다.

나쁜 말과 욕을 들으면서 자라는 청소년들이 걱정이 됩니다.

하긴 국민의 대표라는 분들도 국회에서 서로 막욕을 하는 시대이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납니다.

자기가 무심코 내 뱉은 말이 때론 다른 사람에게 비수가 되고 큰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었던 나뭇가지마다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새싹과 꽃들처럼 우리 혀의 말들이 푸르고 예뻤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혀를 가지면 좋으련만

 

리로이쿠프만이라는 사람이 쓴 "혀를 아름답게 가꾸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분의 책에 보면 아름다운 혀는
 
1) 조용한 혀라고 했습니다.

건설적인 침묵을 지킬 줄 아는 혀라는 말입니다.
건설적인 침묵은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더 좋은

조화를 이루도록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큰 유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2) 감사하는 혀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혀는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어주고, 우리의 소원을 가능케 만들어주고,
더 행복하고 즐겁고 나은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했습니다.
 
3) 증거하는 혀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믿음을 open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언제나 예수님을

위하여 말할 준비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신뢰하며 훈련받을 수 있는 혀가 된다고 했습니다.
 
4) 깨끗한 혀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혀는 경외심을 보여주고 모든 거룩한 것, 인격적인 것, 개인적인 것,
중요한 것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하고 간결하면서도 다채로운 재능을 청지기로서

잘 관리하게 하며, 깨끗한 혀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증거된다고 했습니다.
 
5) 친절한 혀라고 했습니다.
집(house)을 가정(home)으로 만들어주고, 언어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화평을 도모해 주고, 예수님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혀가 된다고 했습니다.



6) 험담하지 않는 혀라고 했습니다.
험담은 도로 주어 담을 수 없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험담하는 이유는 건전한 자기 신뢰와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충분히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한가하기 때문이고, 험담하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라 하면서
아름다운 혀는 험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7) 진실한 혀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혀는 반쯤의 진실(반쯤의 거짓말)을 피하고,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사실과 의견을 구별할 줄 알고, 결정적인 말을 할 때는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된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을 주의한다고 했습니다.
 
8) 만족하는 혀라고 했습니다.
만족하는 혀는 아픈 것을 용기와 조용한 힘으로 다스리고, 명백한 불의 앞에

자신을 단련하고,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을 개선해 나간다고 했습니다.
 
9) 소박한 혀라고 했습니다.
소박한 혀는 단순히 "예, 아니요"라고 말하고, 아첨하는 말과 과장된

말을 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바리새인처럼 장황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세리처럼

소박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혀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기대감을 가져봅니다. 
 
야고보 사도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약3;1-10)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번 한 주간만이라도, 아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주신
혀를 가장 아름답게 써 보면 어떨까요?
 

 가장 아름다운 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혀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아름다운 혀가 될 수 있는가하면,
가장 볼품 없고 지저분한 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청지기로 맡겨주신 혀를 가장

아름다운 혀로 만들고, 우리들 자신과 가족들과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작은 행복이라도 선물로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번 도전해 봅시다.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어 주시면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잖아요.
그러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도전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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