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어떻게 성지가 되었나?
2023.07.21 / 김용두 기자
예루살렘전경
서쪽벽의 유대인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은 예루살렘이다.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이다.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곳이며 하나님의 도성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장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루살렘은 성지가 되었을까?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성지일까? 아니면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들도 예루살렘을 성지로서 여길까? 여기에 대한 답은 모든 종교는 아니지만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성지가 예루살렘이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해가 가지만 왜 이슬람은 이곳을 성지로 삼고 있을까? 세 개의 종교가 성지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은 복잡하고 얽혀 있는 역사가 존재한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한번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이르(도시)와 살렘(평화)이 합쳐진 말이다. 즉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이 최초로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4장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높은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를 살렘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살렘이라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여부스 성읍이다. 기브아 땅의 성읍 중 가장 큰 성이었다. 이 성읍은 이후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된다. 사무엘하 5장에는 다윗이 시온산성, 여부스 사람들의 성을 탈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은 이 성읍을 탈취한 후에 다윗의 도시라 칭하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면서 하나님의 도성으로 불린다. 다윗은 실로의 성막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솔로몬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 도시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읍은 폐허가 되었다. 누구도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B.C.5세기경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귀환하여 작게나마 성읍을 보수하였고 성전도 작게 다시 지었다. 

 이후 수많은 제국들이 지나쳐 가며 예루살렘을 거쳐 갔지만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헤롯대왕을 통해서 예루살렘은 다시금 그 영광을 보이는 듯 했다. 헤롯이 지은 커다란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되고 로마의 통치로 인해서 이곳은 평화의 도시로서 되돌아 간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워 진다. A.D.70년 예루살렘 성은 불타게 되고 성전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구시가지 다메섹문앞
 

그 후 A.D.132년에 일어난 바르코크바 유대 항쟁으로 인해서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A.D.136년 모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이름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뀌게 되면서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이후에 다시금 등장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된 4세기 경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인 아브드 알마리크는 유대인들의 성전 자리에 지금의 바위의 돔(황금돔사원)을 세우게 된다. 이 자리는 무하마드 선지자가 승천한 자리라고 한다. 14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황제인 술레이만 대제는 꿈을 꾸게 되고 지금의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읍을 완성한다. 이후 이 성읍 안은 19세기 초반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아르메니안의 4개 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대인들은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예루살렘으로 이주가 허락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4번의 전쟁 가운데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을 통해서 온전히 예루살렘 탈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그리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이슬람 종교의 중심으로서 굳건히 서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으로 알려진 시온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로서 지금도 굳건히 서 있다. 

 평화의 성읍이라는 이 성읍이 그 평화로움을 가져본 적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미디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시위와 테러 이야기를 한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이지만 평화로움은 코로나 때만 잠깐이었던 것 같다.

 감람산 자락에 올라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곳에서 그의 왕 되심이 선포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김요셉 목사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22. 요나의 예언과 니느웨 멸망-­I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 말씀 선포한 유일한 예언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 3:10~4:1)

요나는 전통적인 개념의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았고(호 1:2~3), 이사야는 3년 동안 맨발과 벗은 몸으로 이스라엘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사 20:2~3). 그러나 요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났다.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선포했으나 재앙이 내리지 않자 하나님께 화를 내기도 했다(욘 4:1).

요나는 특별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유일한 예언자이며 바울의 선교가 시작되기 무려 800여 년 전에 선교 여행을 떠났던 구약시대에 활동한 선교사였다.

 

1. 요나와 앗시리아

 

여로보암 2세는 41년 동안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앗시리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왕이었고 요나는 이 시기에 활동한 북왕국 예언자이다(왕하 14:23~25).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했는데 여로보암 2세의 재임 기간을 B.C. 793~753년으로 본다면 북왕국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기 30~50년 전에 요나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했다고 볼 수 있다.

여로보암 2세 때 앗시리아가 잠시 근동에서의 세력이 약해졌던 틈을 타 북왕국의 영토 일부를 회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앗시리아는 북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예후 왕 때부터 조공을 바쳐야 했던 최대의 적군이었다. 북왕국은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요나에게 앗시리아는 마치 구한말 우리나라를 서서히 침탈하다 결국 식민지화한 일제와 같았을 것이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씀은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1) 욥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바에서 배를 탔다(욘1:3). 욥바의 현재 지명은 텔아비브(Tel Aviv)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유엔의 허가를 받아 독립을 했을 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토에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텔아비브를 수도로 정했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1967년 3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고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나 아직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헌법상의 수도일 뿐 국제법상의 수도가 아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55㎞ 정도 떨어져 있는 고대 근동에서부터 발달해 온 역사적 장소이다. 성경에서도 욥바는 다양한 시대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욥바는 솔로몬의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고 특별히 성전 건축의 주재료가 된 백향목이 운송되어 오던 곳이다(대하 2:16).

솔로몬이 두로 왕 후람에게 받은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백향목을 옮기는 짐꾼만 7만 명에 이르렀고, 8만 명은 산에서 벌목을 했으며 3600명에게 일을 감독하게 했다(대하 2:18). 물론 이렇게 많은 백향목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만 쓰인 것은 아니다. 13년 동안 솔로몬 성을 건축할 때 들어간 재료도 포함되어 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스룹바벨의 제2성전이 건축될 때 다시 한 번 욥바 항구를 통해 운반되어 왔다(스 3:7). 그러나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신약시대에 욥바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닥친 박해를 피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8:1).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교 거점들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이다. 안디옥교회는 초대 교회의 선교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욥바가 사마리아 지역과 함께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병에 걸려 죽었던 여(女)제자 다비다(도르가)를 살리기도 했다(행 9:36~40).

또한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환상을 보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성령을 받게 했다(행 10:6~45).

 

2) 다시스(Tarshish)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욘 1:2) 욥바에서 니느웨가 아닌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Tarshish)를 향하는 배를 탔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을 말하는데 유대 성서학자들은 스페인 남부 타르테소스(Tartessos)를 성경에서 말하는 다시스로 보고 있다. B.C. 700년 이전부터 아프리카 대륙과 근접해 있는 스페인 남부에는 켈트(Celtic), 이베로(Ibero) 등과 같은 다양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타르테소스는 스페인의 고대 원주민이 살던 지역들 중의 하나였지만 주석 은 동 철과 같은 광물이 풍부했고 고대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과 관계 무역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최초로 배에 돛을 달아 항해를 한 것은 B.C. 35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나 원시적인 모습이었고 요나의 시대만 해도 완전한 범선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풍력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노예들이 노를 저어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시스는 그 당시 조선술과 항해술로 이스라엘에서 갈 수 있는 최장 거리의 상징이었다.

이사야 66장 19절, 시편 72편 10절에서 다시스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서쪽 끝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다시스와 이스라엘의 관계 무역은 솔로몬 왕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열왕기상 10장 22절에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한 번씩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스와의 무역은 분열 왕국 시대에도 이어졌다. 여호사밧은 오빌의 금을 취하기 위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새롭게 만들어 출항했으나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한 사건도 있었다(왕상 22:48). 요나가 욥바에 정박해 있던 여러 배들 중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7. 바울의 유언 : 마가와 바울 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바나바와 함께한 마가, 실라와 동행한 바울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1. 버가에서의 뒷걸음

버가는 소아시아 남쪽에 위치한 밤빌리아 지역의 고대 도시 중 하나이다. 버가의 현재 지명은 터키 남부지역에 위치한 무르타나(Murtana)이다. 버가에 대한 잘못 알려진 것중 하나는 항구도시라는 오해이다.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지나 도착한 첫 소아시아 도시라는 것 때문에 항구도시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버가는 해안에서 약 17㎞ 정도 떨어진 내륙 도시이다. 1차 선교 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곳을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다(행 13:13~14). 그리고 선교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도 버가를 거쳐서 돌아갔다(행 14:25).

바울의 선교는 로마 빌립보 에베소 등과 같이 대도시 중심의 선교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정뿐만 아니라 교통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고고학자들에게 버가는 유적들로 가득한 행복한 보물찾기 장소이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보존이 잘 된 방사형 노천극장 아스펜도스(Aspendos)와 투기장이 있다. 아스펜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A.D. 161~180) 때 지어진 것으로 부분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여 질만큼 잘 보존이 되어 있다. 그 외 1만 2000명의 관객을 수용하고 길이 234m 너비 34m의 경기장에서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던 안틱스 스타디온(Antikes Stadion)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가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두 번이나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지만 로마인들을 위한 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온 몸을 찢기며 믿음을 지켰던 초대 교인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또 다른 오해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계 1:11; 2:12) 버가모교회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중 버가에서 세운 교회라는 오해이다. 버가모의 현재명은 베르가마(Bergama/Pergamon)이다. 버가와는 약 620㎞ 정도 떨어져 있다. 버가모는 해발 3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버가모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사탄의 권좌'를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이로 인해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순교를 감당해야 했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순교자 안디바의 순교가 이곳에서 일어났다(계 2:13). 요한계시록 2장 14~15절은 버가모교회의 책망으로 교회 내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킨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한 부류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황제숭배 등과 같은 방만한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로마인들 사이의 인사말은 '황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였다. 상대방에게 이 말을 들으면 똑같은 말로 화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초대교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니골라 당은 이들에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쳤다. 그 중 핵심 내용은 육체로 짓는 모든 죄는 구원의 문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니골라 당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나 성적인 타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교회 내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찍어 내지 못해 책망 받은 두 교회가 있는데 에베소교회(계 2:1~6)와 버가모교회(계 2:12~16)이다.

2.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어떤 이유에서 마가가 버가에서 선교여행을 중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행 13:13). 그러나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보면 이 결정은 지극히 마가의 개인적인 이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떠나…돌아가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코레사스'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리를 버리고 떠나다'의 의미인 '아포코레오'라는 단어에서 왔다. 누군가에게 자기의 일을 맡기고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던져버리고 떠났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은 이런 마가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마가의 행위를 배신행위로 간주했던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가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행 15:38). 바나바는 이 일로 바울과 심하게 다투었다(행 15:39).

바나바의 인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며 많은 무리가 바나바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었다(행 11:24). 바나바는 레위족속 사람이었고 유대식 이름은 요셉이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행 4:36).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돌봤고 구제와 헌신에 앞장섰던 사람이다(행 4:37). 또한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사람이다(행 9:27). 심지어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가 부흥하자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사역을 했다(행 11:24~26). 그랬던 그가 바울과 심한 논쟁을 하고 결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이다(행 15:39~40).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을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록쉬스모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 15장 39절과 히브리서 10장 24절에 두 번만 등장한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격려'로 번역되었지만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신랄한 반대, 말다툼'(sharp disagreement / sharp contention)으로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행 15:37~41). 이후 바나바의 이름과 행적은 더 이상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바나바를 언급하며 사역자로서의 바나바를 인정하며 서로 교제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 9:6; 갈 2:1,9,13; 골 4:10).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5.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 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과 다윗의 축복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야훼께 복을 받을지어다"(삼하 2:5)

세찬 바람에 곧 쓰러질 듯 몸을 숙이던 갈대는 잔잔해진 바람에 사군자 마냥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어느 방향인지 묻지도 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떨군다. 권력 앞에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요동친다.

사울의 죽음 이후 대세는 이미 다윗에게 기울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다투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죽임을 당한 아말렉 청년도 있었다(삼하 1:10~15). 그러나 사울의 처참했던 시체를 수습하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장 5절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울의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사울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칭찬과 축복의 말이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에게 괜한 오해와 미움을 살 수 있었음에도 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 끔찍했던 사울의 죽음

사울 왕의 등극은 이스라엘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뜻을 따라 나라의 대소사들을 결정하던 신권정치제(神權政治制, theocracy)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에 입각한 원시 군주제(君主制, monarchy)로 전환된 것이다. 사울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지냈다. 불안한 왕권을 가지고 시작했지만(삼상 10:26~27)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삼상 11:11~15).

사울은 자기의 고향인 기브아(Gibeah)를 이스라엘의 초대 수도로 정하고 모압 암몬 에돔 블레셋 아말렉 등과 같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국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물론, 사울 왕이 이방 민족들을 다 섬멸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사울 왕은 그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군사력을 동원해 다윗을 제거하고자 쫓아다니는 데 허비했다.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죽음 또한 비참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울의 죽음은 단순히 전쟁 중에 자살로 끝난 것은 아니다.

사무엘상 31장 9절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튿날 전리품을 취하려 전장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삼상 31:8~9) 죽은 사울의 목을 잘라 블레셋 여러 지방으로 보냈다. 사울의 머리는 조롱거리와 승전의 상징으로 블레셋 여러 지방을 떠돌다 돌아와 다곤 신전에 매달렸다(대상 10:10). 그의 갑옷은 블레셋의 다산과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의 집(신당)에 진열되었다(삼상 31:10). 그의 시체는 목이 없는 채로 벧산 성벽에 그의 세 아들 시신과 함께 못 박혀 걸려 있었다(삼상 31:10~12).

2. 길르앗 거민과 사울의 인연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 주민과의 관계는 사울의 재임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갖지 못했다. 여러 명의 사사에 의해 국지적으로 다스려졌고 대부분 지파의 장들이 책임을 지는 지방분권적 체제였다. 길르앗 야베스는 갈렙 자손들이 점령한 땅이었다(대상 2:50~55).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지만 아직 중앙집권적 통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은 암몬 족속의 왕인 나하스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그를 섬기고자 했다(삼상 11:1). 하지만 나하스는 화친의 조건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는 것을 제시했다(삼상 11:2).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협박에 그치지 않고 종종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런 암몬 족속의 위협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선택은 궁색함 그 자체였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나하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삼상 11:3).이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들었던 시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삼상 11:5). 이미 사무엘상 10장에서 왕으로 공포되었던(삼상 10:24) 사울이 소를 몰고 있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정체제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아가 암몬 족속들을 전멸시켰다(삼상 11:11). 이것이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입었던 은혜였다.

 

 

3.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의로운 선택

40년 후 블레셋 진영의 벧산 성벽에 사울의 시신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수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가지고 왔다(삼상 31:12).

'밤새도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벧산은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약 20㎞ 떨어진 지역으로 밤길을 아주 빠르게 5시간 이상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밤을 선택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은 매장이었다. 율법은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화장(火葬, cremation)을 허용하고 있었다(레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화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삼상 31:12) 그만큼 시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의 장막 밖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가져다가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사울에 대한 예를 다했다(삼상 31:13).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사울의 죽음에 대해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의로운 선택이었다.

다윗은 이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유골을 사울의 가족묘가 있던 베냐민 땅 셀라에 이장함으로써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장례를 완성했다(삼하 21:12~14).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3. 고스비 사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영적·육체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8)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도 발굴 중인 여리고성은 그 규모와 구조에서 철옹성(鐵甕城)이라고 할만하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리고성은 인간적으로 볼 때 좌절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리고성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사의 첫 패배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도 만만해 보였던 아이성 전투에서 일어났다(수 7:2~7).

여리고성을 빼앗았던 환희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큰 슬픔으로 바뀌었다.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언약을 지키지 않았던 유다지파 갈미의 아들 아간 때문에 일어났다(수 7:1).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민족 전체가 위험에 빠진 사건은 광야 생활 중에도 여러 번 발생했다. 그중에 한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민 25:18).


1. 고스비 사건의 배경

고스비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 싯딤은 '아카시아 언덕'이라는 뜻으로 요단강에서 동편으로 11㎞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족장시대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을 무찌르고 재물을 약탈했던 곳이다. 이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갔던 곳이기도 하다(창 14:8~12).

가나안의 문턱이었기에 모세가 마지막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며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민 27:12~22).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과 매우 근접해 있었기에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던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자 이것을 막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영적 타락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자멸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


2. 고스비 사건과 이스라엘의 영적인 자멸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가데스바네아의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40여 년 전에 했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정탐꾼을 보내기도 했고 이것저것 재보고 미루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싯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 '음행하다'의 히브리어 '리즈노트'는 '창기같이 행동하다'(신 22:21),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창 38:24) 등으로 쓰였지만 단순히 육체적인 간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세속에 물들어가는 영적인 간음을 내포한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압 외에도 미디안 족속과의 음행으로 이어졌다.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스비 사건의 고스비는 모압 족속이 아닌 미디안 족속의 여자였다(민 25:15).

 

3. 바알브올의 집단적 타락과 영적 각성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알브올은 '바알을 섬기는 브올'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 모두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바알 신당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이곳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제의 중의 하나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음행이 이루어졌다.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알브올에서 음행을 행했던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가담했다'로 번역된 '차마드'는 재귀형(Niphal)으로 쓰여 '자기 스스로 묶다' '스스로를 연결하다'(KJV, joined himself)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거하면서 스스로 바알브올로 찾아가 음란에 빠지고 바알을 섬겼다는 의미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명령하신다(민 25:4). 이스라엘 백성의 수장들도 바알브올에서 행했던 음란과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민수기 25장 15절은 고스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고스비는 바알성전에서 음란을 행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미디안 가문 중의 수령의 딸이었다. 바알브올의 음행이 미디안 귀족들에게도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의 장들은 미디안의 귀족들과 어울려 음란과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다. 이런 바알브올의 우상숭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염병으로 2만 4000명이 죽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민 25:9).

그런데 어느 날 시므온 지파의 수장이었던 시므리(민 25:14)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고스비를 이스라엘 회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민 25:6).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시므리의 막사로 들어가 한 번에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 죽였다(민 25:7~8).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고 있던 염병이 그쳤다(민 25:8). 이 일로 미디안 족속과 이스라엘은 화합할 수 없는 숙적 관계가 되었다.

가나안 입성 후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확할 때가 되면 아말렉 족속과 연합해 모든 곡식을 약탈해 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동굴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런 약탈이 7년 동안 이어졌으며(삿 6:1) 미디안 족속으로 인한 궁핍함이 극에 달했다(삿 6:7). 하지만 미디안의 압제는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로 일단락됐으며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0. 이스라엘의 제갈공명 아히도벨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최고 지략가의 잘못된 선택과 악한 계략, 비극적 최후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중국 삼국시대 때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중국의 전 역사를 통해 최고의 지략가로 알려져 있다. 조조에게 패한 후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그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갔다. 삼고초려(三顧草廬)후 유비는 제갈량을 얻었고 지방 호족 정도였던 유비는 제갈량의 도움으로 촉한을 건국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이후에도 촉한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바람에 파도가 바뀌듯이 적벽대전에서 일순간에 극적인 승리를 일궈낸 제갈량이 중국에 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에는 아히도벨이 있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제갈량이 되지 못했다. 사무엘하 17장 23절은 비극으로 끝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책사(策士) 아히도벨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1. 아히도벨의 등장

아히도벨의 계략은 일반적인 책사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사무엘하 16장 23절은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는 말은 제사장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받은 말씀처럼 신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히도벨의 지혜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탁(oracle)에 비유될 만큼 위엄과 권위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히도벨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히도벨은 유다 땅 길로 출신이었다. 그의 아들은 엘리암이었고(삼하 23:34),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었다(삼하 11:3). 그러니까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였고 다윗은 아히도벨의 손녀사위인 셈이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삼하 23:23~34).


2. 압살롬의 난 : 잘못된 선택과 악한 계략

성경은 다윗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자기편으로 만들었다(삼하 15:6). 그리고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된 후(삼하 15:10) 길로에 있던 아히도벨까지 그의 책사로 얻음으로써(삼하15:12) 역모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단숨에 거침없이 다윗성까지 무혈입성했다.

다윗성에 입성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베푼 첫 모략은 아버지인 다윗 왕의 후궁들을 강간하는 것이었다(삼하 16:20~23).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취함으로써 다윗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표식을 삼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아버지였고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기하는 것이었다(레 18: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는 반율법적이고 패륜적인 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짓도록 했다.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잡기 위해 그가 세운 책략도 악했다. 그가 세운 모사는 군사 1만 2000명을 자신이 직접 이끌고 그날 밤에 쫓아가서 다윗을 죽이고 돌아오겠다는 것이다(삼하 17:1~2). 반란의 주체인 압살롬이 아니라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아오겠다는 것으로 볼 때, 압살롬의 난은 아히도벨이 계획했고 이 역모의 방점을 본인이 찍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히도벨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삼상 24:3~4; 26:7~12).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울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삼상 24:6; 26:9).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볏단을 베듯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취했던 다윗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히도벨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책사였지만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반인륜적이고 반율법적인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려고 한 것이다.  


3. 아히도벨의 몰락

역대상 27장 33절은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謨使)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충신이었던 후새는 다윗이 예루살렘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성에 남았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에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다윗에게 그들의 계략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무엘하 17장은 아히도벨과 목숨을 걸고 다윗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후새의 전략이 숨 막히게 대립하고 있다. 만약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선택했다면 다윗은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새의 전략을 선택했고 결국 압살롬의 왕자의 난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아히도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목을 매고 죽었다. 그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분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압살롬의 난이 실패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산발한 채 맨발로 도망할 때(삼하 15:30), 계속 쫓아오며 저주를 퍼붓던 사울의 친족 시므이를 살려 줬던 다윗의 관대함을 몰랐던 것이다(삼하 16:5). 지략에 뛰어났던 아히도벨의 이름의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리석음의 형제''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처럼 아히도벨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사무엘하 17장 23절은 제갈량에 비교할 만한 최고의 지략가로서 왕의 책사는 될 수 있었지만 왕의 친구는 될 수 없었던 아히도벨의 비극적 삶을 말해 주고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9. 다니엘의 소명과 제국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세 개의 제국과 네 명의 왕을 보필한 최고의 재상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단 1:21)


17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왕정시대가 저물어가고 왕에 의한 1인 통치가 아닌 의회에 의한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왕은 존재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왕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나라의 전반적인 대내외적인 일은 의회의 수장인 총리가 감당하게 되었고 역할과 권한도 강화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총리를 손꼽으라면 저마다 다른 인물들을 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현대의 입헌군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지만 왕을 대신해 총리로서 제국을 다스렸던 위대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형들에게 팔려 히브리 노예에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창 41:41)과 전쟁 포로에서 신(新)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 벨사살, 메대의 다리오,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까지 세 개의 제국, 네 명의 왕을 보필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고의 재상(宰相) 다니엘이다(단 2:48; 6:2).다니엘 1장 21절은 짧은 한 절의 말씀이지만 다니엘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왜 벗고 싶은 짐을 벗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는지 그의 소명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1. 남유다의 멸망

성경에 느부갓네살로 기록된 네부카드레자르 2세(Nebuchadnezzar II)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 유브라데강 하류 지방까지 점령했다(왕하 24:7; 렘 46:2~12). BC 625년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은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바벨론 제국(BC 625~539)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국의 기틀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느부갓네살은 재임기간 동안(BC 605~562)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켰고 신바벨론은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과의 전쟁 이후 근동의 패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고 이스라엘을 여러번 침략했으며 남유다를 멸망시켰다(BC 586).예루살렘에 입성한 느부갓네살은 솔로몬 성전을 파괴했고 성전 기물들을 빼앗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단 1:2). 유대인들은 네 번에 걸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을 바벨론유수라고 한다. 1차는 다니엘을 포함한 귀족과 왕족이 끌려갔고(BC 605, 단 1:1~6), 2차 때는 여호야긴 왕을 포함 방백들과 군사들 그리고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들과 각 분야의 장인들 외에 일반 백성들까지 1만 명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BC 597, 왕하 24:14).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친애굽 정책을 폈던 시드기야 왕은 남유다의 멸망과 함께 마지막 왕이 되었다. BC 586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솔로몬 성전까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때 시드기야 왕과 다수의 백성들이 세 번째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네 번째는 BC 581년 느부갓네살 왕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에 의해 남아 있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비천한 사람들 약 2만 명 정도만 유다 땅에 남게 되었다(왕하 24:14).

2. 노예 소년의 성장

BC 605년 귀족출신인 다니엘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19년 전인 1차 바벨론유수 때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왔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린 소년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쳐 왕궁에서 일을 시키고자 했다(단 1:4). 마케도니아의 펠리포스 2세(BC 382~336)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을 위해 알렉산더가 13세가 되던 때 당대 최고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들였다. 알렉산더는 20세에 왕위에 오른 뒤 바사(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헬라제국을 완성해 위대한 대왕의 자리에 올랐다.

바벨론과 헬라 시대는 시간적 차이가 있으나 그 당시 근동의 교육은 대부분 성인식을 치른 13세에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느부갓네살이 교육을 시켜 왕궁에서 쓰려고 유다의 소년을 잡아 왔다면 다니엘의 나이도 13세 쯤 되었을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교육의 시간은 3년이었다(단 1:5). 이 기간 동안 다니엘의 이름은 바벨론 식의 이름인 벨드사살로 바뀌었고(단 1:7) 전혀 생소한 언어 문화 학문을 익혀야 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무자비한 왕이었다.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죽였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데리고 왔다(왕하 25:7; 렘 39:6~7; 52:11). 그리고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술사들의 몸을 쪼갤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왕이었다(단 2:5). 하지만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부했다(단 1:8). 이것은 참으로 목숨을 건 위대한 신앙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    

3. 다니엘의 소명과 고레스 원년

바벨론에 잡혀온 유대인들이 꿈에 그리던 일이 고레스 원년에 일어났다.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포로로 잡혀 왔던 유다 백성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스 1:1~3; 대하 36:22~23). 다니엘 1장 21절은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에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까지 관직에 있었고 그 후에 그만 두었다는 의미이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볼 때(단 6:28), 수많은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궁정에서 다니엘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거나 왕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70년 동안 바벨론 메데 바사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며 네 명의 왕 밑에서 재상을 지냈던 예언자이며 정치가였던 다니엘은 고레스 원년 이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성경에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레스가 유대인의 포로귀환을 결정할 때 다니엘이 대단히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3세에 바벨론으로 왔다고 가정한다면 70년의 세월이 지나 다니엘의 나이는 83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세 개의 제국에서 네 명의 왕을 모시며 수많은 음모와 사자 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의 조국 남유다가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이 두 눈이 뽑혀 사슬에 메어 바벨론으로 잡혀오는 굴욕과 복받쳐 오르는 오열을 참아냈다. 마침내 예언되었던 70년의 시간이 차고, 고레스가 유다 백성의 포로귀환을 칙령으로 반포하자 다니엘은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말씀이 다니엘 1장 21절의 말씀이다. 이후 그는 다니엘 7장부터 정치가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8. 완전한 성전:제2차 유대-로마 전쟁(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완전한 성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요 2:19~20)

46년 동안 이어지고 있던 성전 건축은 유대인의 오랜 기다림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이미 솔로몬 성전을 압도했고 헬라의 건축술과 화려함의 상징인 고린도 양식이 접목되어 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겉은 화려하지만 성전의 기능을 상실한 불완전한 성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이루실 온전한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다.    

1. 불완전한 성전

  1)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 역사에 두번의 성전 건축과 한번의 대대적인 증축이 있었다. 출애굽한 지 480년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4년째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해서(왕상 6:1) 7년 만에 완성한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이었다(왕상 6:38).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유대인 학자들은 이때를 B.C. 957년으로 보고 있다.성전 건축에 들어간 재료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그 외 놋 철 재목과 석재의 무게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재정을 마련했다(대상 22:14~16). 그 외 금 3000달란트 은 7000달란트에 해당하는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대상 29:3~5).

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해 성전 건축의 주재료로 사용했다. 백향목은 20~30m까지 곧게 자라는데 이 나무에 대한 레바논인의 자부심이 어찌나 큰지 전 세계 국기들 중에 유일하게 나무가 들어간 것이 레바논의 국기이다.

이 모든 건축 재료들을 아낌없이 사용해 7년 만에 완성한 솔로몬 성전은 눈을 의심케 하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솔로몬 성전은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되었고 성전 기물은 전리품이 되었다.  

  2) 스룹바벨 성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다. B.C. 537년 경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인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방 민족과의 혼인 우상숭배 등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사마리아인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먹고 사는 일이 바빠 성전 재건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이때 학개를 통해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이 선포되었다(학 1:8). 그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된 성전 재건은 규모와 웅장함에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역경 가운데 B.C. 516년에 완공되었다(슥 6:13~15).

  3) 헤롯성전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예루살렘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스룹바벨 성전도 완전히 파괴될 위기를 여러 번 맞이했다. 하지만 모진 폭풍우를 견뎌내고 앙상한 가지로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헤롯이 즉위 한 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스룹바벨 성전의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순전히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성전 증축은 꽤 오랜 시간 크고 웅장하게 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라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후(A.D.) 46년에 1차 완공이 있었고 건축 기간이 길었던 만큼 완공은 헤롯이 아닌 A.D. 63~64년 경 아그립바 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지만 불과 6~7년이 지난 70년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되었다. 이어 132~135년에 일어났던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의 패배 후 예루살렘은 더욱 철저하게 훼손돼 성전의 서쪽 벽만 겨우 남게 되었다. 이 서쪽 벽이 지금의 통곡의 벽이다.

유대 반란을 진압한 후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는 유대인의 성전을 모독하기 위해 성전 터에 주피터(Jupiter)를 위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638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691년 우미야드 칼리파 칼리프(Umiyad Khalifa Caliph)에 의해 지금의 황금돔이 건설되었다.

이 후에도 바람 잘 날 없는 역사의 격랑 속에 놓이게 되었는데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도미니크 수도회는 황금돔 위에 십자가를 달고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187년 모슬렘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이 점령된 후 십자가 대신 모슬렘 상징인 반달 모양의 장식이 지붕 위에 달리게 되었다.  

2. 완전한 성전

예루살렘 성에는 야파문(Jaffa Gate) 시온문(Zion Gate) 분문(Dung Gate) 황금문(Golden Gate) 또는 동문(Eastern Gate) 스데반문(St. Stephen Gate) 또는 사자문(Lion''s Gate) 헤롯문(Herod''s Gate) 다메섹문(Damascus Gate) 새문(New Gate) 등 여덟 개의 문이 있다.

그 중 황금문은 성전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성전을 정화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이 거세지고 예루살렘의 함락이 임박한 것을 알고 이 문을 돌로 막아 지금은 문의 형체만 남았고 성벽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문이 열리고 성전이 회복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 19~20절의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완전한 성전을 이루셨다.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는 이미 2000년 전에 황금문을 지나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며 그의 몸을 통해 3일 만에 완전한 성전을 일으키셨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7. 완전한 성전 : 제2차 유대 - 로마 전쟁 I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유대인들의 삶의 근간이자 중심 '성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 2:19~20)

유대인들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부심이 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과 솔로몬 이후 몇 번에 걸쳐 건축됐던 성전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중에 유대인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의 근간이자 이스라엘의 종교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삼일 안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 2:19~20).

 이 사건은 성전에서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던 사람들을 채찍을 들어 쫓아내신 사건(요 2:13~16) 직후여서 더욱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1. 성전 정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요한복음 2장에 기록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성전 정화를 대부분 후반부에 기록하고 있으며(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고난 주간 중 첫째 날 하신 사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을 요한복음 2장 13~16절에서 다루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초창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결 작업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두 번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와 공생애를 마치시는 고난 주간에 그의 몸인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

 성전 하나만 있는 단일 건물이었던 솔로몬 성전과 달리 헤롯은 부속 건물까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20%에 달하는 면적으로 성전을 증축했다. 그래서 성전의 규모가 아주 컸고 성전 외에 성전 뜰이 있었다.

 성전 정화는 성전 자체(나오스)가 아니라 '히에론' 즉 성전 뜰(temple precincts)에서 이뤄졌다. 로마인과 유대인들이 성전 뜰에서 그들의 전례 행사와 예식 행사를 하기도 했고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도 열렸다.  

성전 뜰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성전 안쪽에는 할례 받은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이 있었고 중간에는 유대인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이 있었다.

 바깥쪽에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돈을 바꾸고 물건을 파는 일은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졌고 제사장들과 물건을 팔고 환전을 하는 사람들과의 부적절한 거래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당시 성전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사두개인이었는데 이런 관계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곳은 괜찮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조금 덜 거룩해도 되는 곳은 없다.

2. 기초석(The Foundation Stone)

예루살렘에 길이 13.7m, 폭 11m, 높이 1.8m의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반석 하나가 있다. 평수로 계산하면 141㎡(43평) 쯤 되는 널찍한 바위이다. 값비싼 보석이 박혀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수천 년 동안 이 돌을 차지하기 위해 수억 명의 피를 흘렸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로 한 번씩 이 돌을 차지했었다. 유대인들은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게 기도 제목을 넘기며 이곳을 되찾기 위해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이것의 히브리어 명칭은 '에벤 하쉬티야'(Even ha-Shtiyya)이다. 영어로는 'The Foundation Stone'(기초석)이다. '모리아 산의 바위'(The Rock of Mt. Moriah)로 불리기도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믿고 있다.

창세기 22장 2절에 모리아 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모리아 산은 해발 630m 고지에 위치한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또한 바벨론 포로기에 그렇게 사모했던 약속의 땅은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 이뤄 간 것이다.

이곳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 이곳을 지성소로 삼아 성전을 건축한 후 언약궤를 안치시켰다. 유대인들에게 이곳은 하나님의 지성소가 있었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니 그 어떤 곳보다 거룩한 곳이다.  

이 돌 위에 세워졌던 성전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함락된 후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지금은 이슬람 사원인 황금돔이 세워져 있다. 예루살렘 정중앙에 위치한 황금돔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황금색의 지붕색으로 인해 황금돔이라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바위사원'(Dome of the Rock), 아랍어로는 '쿠밧 알사크라'이다.

 원래는 황금으로 지붕 전체를 만들었지만 많은 전쟁과 화재를 겪고 난 지금은 금으로 도색을 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아주 얇은 24k 금판을 니켈 판 위에 덧붙인 것이다.이슬람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이곳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주입했다. 황금돔은 비잔틴 제국의 궁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이슬람교 사원 중에 가장 오래 된 것 중의 하나이다.

황금돔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만큼 굴곡지고 모진 세월을 겪어 왔다. 예루살렘 한 가운데 석양과 아침 햇살을 받을 때면 더욱 경이로움과 아름다운 자체를 드러내지만 황금돔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는 굴욕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요한복음 2장 19~20절의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요한복음 2장 19절을 얼핏 읽으면 예수님이 유대인과 대화를 할 시점에 이미 성전이 완성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헤롯성전은 A.D. 46년에 이르러서야 1차 완공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도 계속된 확장 공사가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할 때 아직 한창 성전 증축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짓고 있는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성전이 어떤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될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6. 예수님의 눈물과 제1차 유대-로마전쟁(A.D. 66~7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철저히 파괴될 예루살렘 예견한 예수님의 통곡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1)

성경은 세 번 예수님께서 우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첫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우셨고(요 11:33~35), 둘째 잡히시기 전날 감람 산에서 우셨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은 예수님께서 감람 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의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곧 일어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예루살렘성의 철저한 파괴로 인해 우셨다(눅 19:41).

'우셨다'는 헬라어 단어로는 '클라이오'가 쓰였고,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울다'(눅 7:38) '곡하다'(요 11:31)로 사용된 것을 볼 때 '흐느꼈다'는 의미가 아니라 큰 슬픔으로 인해 통곡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의 참혹한 파괴와 잔혹한 살육은 주후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3년) 중에 일어났다.


1. 예루살렘의 파괴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유대전쟁사』(War of the Jews)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약 2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11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들을 볼 때 1세기 예루살렘 인구는 4만 5000명~5만 명 정도였고 순례자들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그 당시 예루살렘은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요세푸스가 일일이 인구를 센 것이 아니기에 270만 명의 인구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예루살렘 인구의 약 5분의 2정도가 희생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B.C. 44년 3월 15일) 때부터 유지하던 유대인의 율법과 생활방식을 존중하던 관용 정책을 폐지하고 혹독한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소수를 제외한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들은 대부분 로마 지배 계층의 노예로 선물되거나 검투사로 전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예루살렘을 함락했던 티투스는 약 2500명의 유대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쫓겨 다니다 죽게 했으며 로마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도 박탈되어 유대인의 법 행정 종교의 중심이었던 산헤드린의회가 해산되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중들을 선동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 유대인들이 내던 성전세(Temple Tax)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로마인들의 신전인 유피테르 신전으로 보내졌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슬픔과 아픔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실 때 우셨던 것이다.


2.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원인

주후 66년 로마 네로 황제 때 가이사라 지역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 제사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일방적으로 헬라인들의 편을 들었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저항과 함께 더 나아가서 로마 시민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유대 총독이었던 제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화 17달란트를 몰수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66년 6월 소수의 수비대로 유지되던 로마 군대를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에 로마 네로 황제는 로마군 3개 군단 6만여 명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병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로마 군대의 파병과 예루살렘 점령은 한 해 동안 로마 황제가 4명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으며 잠시 정체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문제가 해결된 후 로마군이 유대 전역을 휩쓸었고 69년 7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천해의 요새가 되어 있었던 예루살렘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벽과 높은 성곽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로마군마저 허둥대게 만들었다. 이렇게 몇 차례 패배를 맛보았던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더욱 잔혹하게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유린했다.      


3. 예루살렘의 파괴와 티투스의 개선문

개선문(Triumphal Arch)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황제나 장군을 환영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장군은 30살 밖에 안 된 티투스(Titus, A.D. 39년 12월 30 ~ A.D. 81년 9월 13일)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A.D. 9년 11월 17 ~ A.D. 79년 6월 23일)였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후 티투스는 로마의 10번째 황제가 되었다.티투스아치(Arch of Titus)로 잘 알려진 티투스의 개선문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콜로세움(Colosseum)이 보이는 벨리안(Velian) 언덕에 세워져 있다. 티투스아치는 파리의 개선문을 포함한 후대에 만들어진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티투스의 개선문과 로마 건축술의 결정체로 불리는 콜로세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겐 견디기 힘든 패배의 굴욕과 혹독했던 박해의 상징이다.

몇 번의 실패를 맛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7개월 간 포위하고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물과 양식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성 안에서 작은 먹거리에도 서로 차지하고자 큰 싸움이 일어났고 어린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70년 8월 10일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진입했고 헤롯이 재건했던 제2성전을 불태웠으며 9월 20일까지 모든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예루살렘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전 기물을 약탈해 전리품으로 메고 로마로 들어오는 모습을 티투스의 개선문에 부조로 새겨 넣었다. 메노라는 히브리어로 '촛대'라는 뜻으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형상화 한 것으로 성소에 있었던 성전 기물 중의 하나이다.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항쟁을 진압한 후 로마로 돌아와 주후 7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 있었던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로마의 최대 휴양지였던 폼페이는 도시 전체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티투스는 황제가 된지 2년 만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열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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