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조선말 전해진 기독교, 엘리트들 수용되면서 민족종교로 발전
서구문물 통해 민족자강 이루려던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등 입교
조선말에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하면서 외래종교에서 민족종교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한 한국교회의 역사를 2회에 걸쳐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 수용 이전의 접촉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몇 차례 복음과의 접촉이 있었다. 7∼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번성하였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당시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 마리아상, 2점의 십자무늬장식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경교의 신라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1592∼1598) 때에도 기독교와의 짧은 접촉이 있었다. 1592년 12월에 일본 주재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을 방문하여 경상남도 웅천(오늘날의 창원)에 주둔하던 천주교도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1년간 돌보았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였지만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2. 천주교의 수용
17세기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서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 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생겼다. 이들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었다. 그는 1783년 겨울 조선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다음해 2월 북경 주재 예수회 선교사인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이승훈은 동료 유학자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들은 교우 김범우의 명례동 집(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 등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견디며 성장했다.
3. 개신교와 한국과의 접촉
1884년 고종이 개신교 선교를 허락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칼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선에 통상을 청원하는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충청도 지역에서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배포한 후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두 번째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목사였다. 영국 출신 중국 주재 선교사였던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품고 1886년 여름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9월에 순교했다.
4.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한편 만주와 일본에서는 한글번역 사업이 진행됐다.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장사하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1882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출판했다. 그들은 1887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고 순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를 출판했다. 일본에서도 이수정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됐다. 1882년 9월에 수신사 박영효의 통역으로 일본에 온 그는 1883년 4월에 동경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언어에 뛰어났던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이는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됐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손에 쥐고 있던 성경이었다.
5. 한국 선교의 시작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1882년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복음의 미개척지였던 한국의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 1884년 7월에는 일본 감리교회 감독인 로버트 맥클레이 목사가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활동에 국한된 선교사업을 허락받음으로써 한국 선교의 문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됐다.
미국의 남감리교회는 헤론과 언더우드(북장로교회)를,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아펜젤러(남감리교회)를 의료 및 교육선교사로 임명했다. 북장로교회도 헤론과 언더우드를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국내에 거주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땅을 밟았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도 내한해 선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편, 북장로교회와 남감리교회에 이어 호주장로교회(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회(1892), 미국 남감리교회(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 선교사를 파견했다.
6. 교회들의 설립
의주 청년 서상륜은 1883년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에 교회를 세운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혹은 송천교회이다. 한국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이어 언더우드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1893년 6월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장대현교회를 설립했다.
7.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은 ‘고전의 시기’였다. 1894년까지 한국 교회가 얻은 신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신자 증가율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신도 수는 1895년 750여 명, 1896년 2500여 명, 1897년 3300여 명, 1900년 1만2000여 명, 1905년 2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청일전쟁 이후, 하층민들은 물리적 보호와 정신적 위안을 찾아서, 엘리트층들은 서구문물 수용을 통한 민족의 자강을 이루기 위해 대규모로 입교했다. 이승만, 이상재, 안창호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됐다.
8.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 개신교회의 초창기는 사람들이 종교적 목적에서보다는 실제적이고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에 입교하던 시기였다. 을사늑약(1905년)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한국 교회의 얼굴과 성격을 만들 원산부흥(1903년)과 평양대부흥(1907년)이 때맞춰 일어났다. 1903년 원산의 선교사 기도모임에서 점화된 부흥의 작은 불씨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의 큰 불길로 피어올랐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1908년에는 만주 지역의 교회에도 확산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게 됐다. 기독교를 서구의 문물과 사상으로 인식하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제 기독교 안에서 영적인 생명력과 깊이를 찾기 시작했다.
<국제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