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그리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④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1월 20일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3.1독립운동의 도덕적 차원
우리 겨레 정신과 육체 해체하려는 도덕적 학살 자행한 일제
한국 교회 도덕성 회복 위한 개혁안 제출하고 실행 요구


3.1독립운동의 도덕성 문제

정치에서 도덕성의 문제는 정치생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정치의 대의명분이 도덕성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성을 가진 많은 부류의 국민 전체의 국리민복을 성취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 같이 공명할 도덕성은 필수이다. 한데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에 이 도덕성의 문제는 행정 차원에서 처음부터 크게 문제 되어왔다.

 그러다가 3.1독립운동에 이 도덕성의 문제가 불붙는다. 3.1독립운동에 기독교와 함께 각 종교가 함께 발 벗고 나섰던 것은 종교적 이유 말고도 당시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심각하게 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영 성서공회는 바로 그 해 1919년에 3.1독립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의 현대적 가치나 윤리 도덕에의 저촉 때문에 터진 운동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식민통치의 도덕적 폐해

3.1독립운동의 격동이 지나고 나서 그해 8월 12일에 새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곧 문화정책이라고 해서 군사적 정치 행태를 벗어나는 정치개혁을 약속한다. 산업과 사회적 개혁도 약속한다. 그 정치적 변화를 천황의 선정조치라고 대서특필한다. 고문을 폐지하고 의료위생시설을 현대화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종교 자유 확대를 확인한다.

 하지만 사이토 총독은 부임한 뒤 처음 한 일이 비밀리에 조선에 육군병력 증강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통치상 당시의 병력은 과소하다는 것이고 그 독립운동 ‘소요’ 이후 조선 각도의 민심 안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가 나날이 거만해지고 있으니 조선인의 성질상 목전에 위력이 보여야 물러선다는 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육군병력은 통치상 과소하니 상당한 병력을 일본 본토에서 이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필로 쓴 ‘극비’문서를 동경에 보낸다. 이런 형편이면 육군 증파 문제에 국한하였겠는가. 선교사와 한국교회는 일제의 이런 시책을 ‘체계적인 기만’이라 맹비난하고 있었다.

 문화적 선정을 베푼다고 세계에 대놓고 약속한 일제가 바로 그 순간에 암암리에 군사 통치를 강화하려 하였다는 증거가 아닌가. 도덕성은 설 자리도 없었다.


식민통치에서의 비도덕성 ‘유곽과 아편’

3.1독립운동에서 교회는 도덕적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장 만연시킨 도덕적 폐해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의도적으로 만연시키고 확장시킨 도덕적 피폐와 그 병폐는 양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령 일제는 한국 도읍마다 유곽이라는 공창들의 집을 국비로 당시 50만 달러를 들여 세우고 있었다. 공창이 있는 거리를 홍등가라고 해서 번성시키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대세로 유명한 서북지방 선천에도 공창 유곽이 들어섰다.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박사는 가령 서울에서는 한국 남자 220명에 공창 1명 정도의 비율이라고 공개한 일이 있다. 이 비율은 통치 기간이 가면 갈수록 상승하고 있었다.

 아편의 실정은 땅을 치게 한다. 아편 생산은 정부에서 관할하였다. 행상인들도 아편과 모르핀 주사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한국 안에서 비도덕화는 총독부의 장려 후원 아래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한국인 선생님 두 분이 담임을 맡은 일이 있는데 두 분 다 ‘아편쟁이’였다. 그런 것이 일제 한국 통치의 뼈아픈 실상이다.  

 아편 생산은 1918년 2023관이었다. 그러다 3.1독립운동으로 격감하여 1920년에 41관으로 줄었다. 이 감산을 일제는 ‘처치를 잘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다시 늘다가 1929년에는 401관으로 상승한다. 총독부는 1929년에 아편생산과 판매를 전매청으로 옮긴다. 아편을 국가가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백주에 아편 판매에 바빴다. 총독부 수지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불성설이고, 그것만 가지고도 일제 한국 통치는 악마적 불의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체를 해체시키는 전대미문의 도덕적 대량학살을 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청청백일하에 자행하고 있었다. 문명과 인간, 그런 것을 완전히 떠난 악정이 대낮에 자행되고 있었다. 그 희생자는 몇 사람 중독자가 아니었다. 민족 그 전부였다. 


식민통치에서의 비도덕성/ 주초(酒草)

술 담배를 통해 우리 겨레의 도덕적 몰락 방조도 눈에 띄었다. 아홉 열 살 정도 어린이들의 흡연도 눈에 띄었다. 총독부의 주초 조세 비율 상승률을 보면 상처 깊어가는 우리 사회의 폐해가 가슴을 찌른다. 곧 1917년 11.5%, 1918년 13.91%, 1919년 33.1%, 1920년 39.98%였다. 국가 조세의 40%까지 주초세가 차지하게 했던 조선총독부의 범죄를 교회가 외면할 수 없었다.

 정치가 이렇게 악하면 교회가 뒷짐 질 수가 없다. 한국인의 심신을 흐리게 하고 해체시키는 그런 식민통치의 악정을 종식시켜야 했다. 3.1독립운동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일제가 공개 조장하는 아편 유곽 주초에 대한 저항이었다. 교회가 나서야 했다. 


도덕적 갱생으로서의 3.1독립운동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복음주의선교협의회는 개혁안을 제출한다. 그 항목 중 중요한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덕적 개선이다. 곧 관습 정서 인륜에 거슬리는 유곽의 폐기, 아편 모르핀 생산 제조 판매 금지, 주류 판매에 대한 법령 개정, 미성년 금주령을 일본 본토에서처럼 철저하게 실시하라는 것 등이었다. 이런 요구들은 일제의 의도적인 도덕적 폐습 조장 술책으로서 양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을 겪은 우리는 특히 정치의 도덕성에 예민하다.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


3.1운동 100년, 그리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오늘 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3.1운동 100년, 그 시대를 돌아본다
처음부터 우리나라와 민족의 실체였던 한국교회
잃어버린 거대한 민족적 신앙동력 회복해야


역사는 진실하다

모세는 그의 고별사에서 옛날을 기억하라는 말을 남긴다. 성서는 도처에 역사를 기록하라는 말을 한다. 역사에는 실체가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남기 때문이다.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왕조실록을 가장 오래 쓴 나라인데 네 가지가 있다. 곧 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이다. 역사에 일어났던 일은 수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확성을 기하노라고 네 가지를 쓰게 한 것이다. 무엇이든 대개 사방에서 보면 정확하다. 복음서도 사복음이다. 동서남북 춘하추동 연월일시 인의예지 건곤감리 그런 것들이다.  
 3.1독립운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특히 일제 한국통치 시대의 어간에 있었던 유일한 전 민족적 전국적 저항 독립운동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일제 군경이 그 계획진행을 몰랐고 같은 시간에 동시에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蜂起)하고 있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위대한 역사의 역할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주도한 것이다.


3.1독립운동 100년

역사는 한 100년쯤 지나서 되돌아보아야 의미와 가치가 크다. 정서적으로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3.1운동을 이제 냉정하게, 거리를 둘만큼 두고 바라보아야할 때가 온 것이다. 모세가 그 고별사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말한 뜻이 바로 여기 있다. 너무 역사가 가까우면 역사의 문맥에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이 목표

사실 3.1독립운동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랑할 것이 많다. 우리는 일제 치하 선정이나 참정 인도적 대우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과 똑 같이 대접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 같은 동급의 관리라도 봉급의 격차는 반토막이었다. 경찰 경부(警部)의 경우 일본인은 월급 133원 33전인데 한국인은 동급인데도 62원 50전이었다. 우리가 외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막바로 한국의 ‘독립’이었다.
 3.1독립운동에서 외친 한국의 독립이란 것은 당시로서는 번영 안정 인도적 대우 일본본토 일본인과의 동등한 대우, 그런 것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무조건 독립이었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 사람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나 죽으나 한번 우리들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우리가 이루어 나가는 그런 독립된 나라였다. 한데 당시로서는 일본 천황의 적자(赤子)로 은혜를 베풀고 인도적 정신으로 비추어 한국인을 선대하라고 한 소위 지식인들이 미국이나 일본 안에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3.1독립운동의 실상을 밝혀야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것은 나라라고 하는 것이 제나라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목숨을 내 놓을 만한 것인가를 확인해 주는 기회가 된 것이었다. 


교회는 사회의 실체이자 역사였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우리 나라와 민족의 실체 그것으로 우뚝 서 왔다. 그 존재가 그런 엄청난 인상을 처음부터 주어 왔기 때문에 더러는 한국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 일 것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더러는 게르만 민족을 몰아낸 훈족이 그 선조일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1888년은 기독교가 들어 온지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던 때이다. 우리나라에서 선교하던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이런 보고서를 낸다. 곧 “한국은 기독교의 열매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고 심지어 강대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 1000명 정도 때의 일이다. 1000명 정도의 기독교인의 열매 결실 행위 업적으로 보건대, 한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다는 예언이요 판단이었다. 믿음의 선조들이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런 말까지 들었을까.
 1909년은 1907년 정미조약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조정을 일제가 완전히 장악하였을 때이다. 그런데 바로 그해 미 국무성에 이런 글이 전달된다. 곧 “한국은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다.” 기수(旗手)는 그 팀을 대표하고 상징하고 선도하고 뭉치게 하고 선양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상징하고 대표하고 이끌고 뭉치게 하고 선도하고 선양하는 교회였다는 뜻이 아닌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1910년에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한국을 통치하는데 가장 우려되는 저해요소는 한국기독교회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는 한국 인구 1300만 명에 22만 명에 불과한 기독교인 곧 1.6%에 불과한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대대적인 기독교 괴멸정책을 전개한다. ‘105인 사건’이 그것인데 전국에서 지도자급 기독교인 700명을 구속하고 고문한다. 가혹한 고문으로  결국 105명을 실형에 살게 한다.


한국교회는 거대한 민족 동력 동원체제

3.1독립운동 때에 기독교인 인구 비례는 1.4%에 불과하였다. 1700만 인구에 기독교인 25만 명이었다. 한데 구속된 자의 40%가 기독교인이었다. 일제 군경이 소위 3.1독립 소요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였다는 증거이다. 이 거대운동의 주도세력이 기독교요 그 중심이 기독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회는 유일한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한국교회가 1907년 처음 독로회를 조직한 것이 한국의 전국적인 자발적 조직의 시작이다. 교회만이 전국적인 조직 곧 핏줄을 가진 유일한 실체였다. 한국을 상징하고 뭉치게 하고 선도하고 그리고 그 내재한 동력을 밖으로 치솟게 하는 유일한 메커니즘이 교회였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상징이요 그 대표였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우리교회가 소리치면 전국이 따를까.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8> 실천신학② - 예배학

교회는 예배없이 존재할 수 없다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실천신학 분과에 속하는 예배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단어는 샤하아와 아바드이다. 샤하아는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것으로 존경과 순종을 의미한다. 아바다는 ‘일하다’ ‘섬기다’는 의미로 영어의 서비스(service)에 해당된다. 아바다는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   지성 감성 태도 그리고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며 섬기는 것임을 말해준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말은 프로스쿠네오인데 이 말은 ‘누군가의 손에 입을 맞추다’ 또는 ‘자세를 낮추어 경배하다’는 뜻으로 상대방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이툴기아 역시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는 사역 경배 섬김 등을 뜻한다. 진정한 라이툴기아는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예배자로 사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처럼 예배와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을 보면 예배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며 크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선포이고 동시에 존경과 순종의 마음을 담아 온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2. 예배의 본질과 중요성

기독교 예배의 대상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다(출 20:3; 신 6:4).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며 인간이 창조된 이유이다(사 43:7).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구원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이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며 미래에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과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온전히 연결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온 삶으로 드리는 참다운 예배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배 자체가 또 다른 무엇을 위한 통로나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예배를 통해 또 다른 무엇인가를 간구하거나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예배는 결코 온전한 예배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은혜를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받기 위해 겨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배가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큰 섬김은 없다. 또한 예배는 교회의 여러 기능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임이요 예배는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곧 예배의 의미이다. 따라서 예배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교회는 예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3. 예배학이란 무엇인가?

예배학이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원리와 방법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과이다. 예배학의 대상은 예배의 역사와 원리 예배의식 교회력 교회음악 교회건축 교회장식 등 예배와 관련된 모든 것이다.

 예배학이 독립된 신학 분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이후 19세기에는 현대 예전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예배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예배학 연구는 활기를 띄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각 교파 내에서 예배 개혁운동이 결실을 보았고 세계교회운동에서 교회 일치의 신학적 기본 연구의 일환으로 예배학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신학이 설교 교회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들을 재고할 것을 요구했고 나아가 성서학에서 초대교회 예배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베드로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벧전 2:9). 한편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요 4:24).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그 찬송과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배학 연구를 통해 예배의 성서적 신학적 의미들을 고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예배내용과 예배형식을 논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보다 신실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7>-실천신학 ① - 목회학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목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 통해목회자의 역할과 임무를 성경적으로 제시

 보통 신학하면 학문적인 영역의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의 시작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神) 경험이라면, 신학은 결코 학문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과 맞닿아있다. 신학과 삶의 관계를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연구하는 신학 분과를 실천신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의 성과들을 어떻게 성도들의 삶 속에서 구현해내고, 그들의 삶에 접목시킬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해지고 복된 삶이 될지를 연구하는 것이 실천신학이다. 앞으로 3주간에 걸쳐 실천신학 분과에 속하는 목회학 예배학 설교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목회학에 대해 살펴보겠다. 


 1. 목회라는 말의 의미

 목회학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목회’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牧會)란 말 그대로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란 하나님이 세운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양육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교회공동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목회라는 말은 영어로는 ‘미니스트리’(ministry)인데, 이 말은 ‘목사의 직’ 또는 ‘장관의 직’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직분을 의미한다. 목회를 담당하는 목회자라는 직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목회자는 하나님으로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대로 행해야만 한다.
 목회라는 말과 관련된 이상의 의미들을 종합해보면, 목회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회자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곧 교회)을 말씀으로 섬기고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2. 성경에서 발견되는 목회

 구약성경을 보면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한다(창 49:24; 시 78:52∼52; 80:1). 목자되신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임지시고 사랑과 인자함으로 인도하신다(시 11:7; 렘 31:30).
 특별히 시편 23편 1절은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을 통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가 필요한 양으로 그리고 있다(시 100:3, 44:22, 119:176; 렘 23:1; 50:6 참조).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한 양이다(사 53:6).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며 바른길로 돌아오길 요구하신다.
 구약성경이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는 반면, 신약성경은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요 10:11; 벧전 5:4). 목자 되시는 주님은 양들을 부르시는 분이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이다(요 10:11∼16). 또한 예수님은 부름받은 사람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시며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그들을 인도하시고 목양하신다(골 1:18).
 이처럼 신·구약성경은 목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후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의 역할과 임무를 위한 성경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3. 목회자의 의미

 미국 감리교 신학자인 토마스 오덴은 목회자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받아 안수를 받고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 노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구성원”이라고 정의한다(토마스 오덴, 『목회신학』, 89).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신(使臣)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이며 진리의 해석자이다. 그렇기에 목회자의 권위는 자신이 아니라 양 떼를 맡겨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따라서 목회자가 행하는 모든 일은 목회자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목자장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행해지는 것이다. 


 4. 목회학의 의미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목회학을 정의하면 목회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목회자가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인도하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학이라는 말이 ‘목회신학’의 줄임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목회학의 정의는 좀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목회는 한 교회의 목회자가 수행하는 설교, 성례, 상담, 심방, 교회 행정, 기독교 교육, 교회 관리 등 교회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한편 ‘신학’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학문이다. 따라서 목회학이란 목양의 관점에서 목회자의 활동과 기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목회학의 중요성

 오늘날 영혼의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일은 더욱 귀한 일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은 더욱 윤택해졌지만 인간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학은 매우 중요한데 목회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목회현장에서 목회자들이 맞닥들이는 실제적인 문제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목회자에게 질문한다. 그 질문 앞에서 목회자는 성경적이며 복음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목회학은 이렇게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목회적인 질문과 상황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행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대안들을 제시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학은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을 몰라서 생길 수도 있는 무지와 무경험의 부작용을 미리 막고 보다 효과적인 목양을 할 수 있도록 목회자를 돕는 학문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성령님과 동행한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시대19-2018년 6~11월



전인구원 사회구원 소명… 희망의 70주년 향해 힘차게 전진
10년 만에 이룬 기하성 통합 한국 교회 하나 됨의 신호탄
예루살렘 방문해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설교 
다양한 국내외 성회 인도 세계복음화의 활력 불어넣어
복음평화통일과 한미우호협력에 헌신하며 세계종교지도자상 수상 

 교회 창립 60주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우리 교회는 ‘새로운 도약, 희망의 70년을 향하여’를 새로운 표어로 정하고 올해를 ‘변화’의 원년으로 삼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새 비전을 품은 우리 교회는 열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데 한 발 더 나아가게 됐다. 이영훈 목사는 성령 충만과 열정의 회복을 강조하며 순복음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미국 뉴욕 플러싱 대동연회장에서 11월 1일 열린 ‘아시아계 미국인 연합회’(Asian American Congress) 주최 올해의 인물상 시상식에서 첫 ‘세계종교지도자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영훈 목사는 한·미기독교지도자기도회를 꾸준히 개최하며 한국과 미국의 우호 증진과 상호협력에 기여하고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또한 이영훈 목사는 미국 뉴욕주 플러싱 뉴욕순복음연합교회에서 축복성회(10월 31일)를 인도하며 ‘네 장막 터를 넓히라’(사 54:1∼3)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올해 이영훈 목사는 이스라엘을 두 차례 방문해 예루살렘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지난 6월 5∼8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이스라엘 독립 70주년 기념 예루살렘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어 11월 4∼10일 우리 교회 성도 270명과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나서 성지를 순례하는 중에도 ‘한국·이스라엘 친선기도회’를 갖고 한국과 이스라엘의 평화와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

 올해 또 주목해야 할 일은 ‘이영훈 목사 초청 코트디부아르 대성회’(8월 15∼18일)로 이 대성회에는 연인원 30만 명이 참석해 이영훈 목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코트디부아르 수도 야무수크로에서 코트디부아르하나님의성회 주최로 개최된 이 성회에서 이영훈 목사는 ‘안디옥 교회의 신앙’을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서아프리카 부흥에 대한 비전을 선포해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조용기 목사 이후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영훈 목사는 캐나다 캘거리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오순절협회(PWF) 자문위원 회의(6월 26∼27일)에도 참석해 내년에 열릴 세계오순절대회를 준비했고 뉴욕 프라미스 교회에서 열린 ‘2018 할렐루야 대뉴욕복음화대성회’(7월 9∼11일) 주강사로 말씀을 전했다. 미국 일정 중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지도자들과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미지도자기도회’를 인도했다.  


 이영훈 목사는 또 8월 20∼22일 인도네시아 발리 락미니스트리와 더크리스탈베이리조트에서 열린 아시아리더스서밋 2018 발리대회(ALS 2018 발리)에 참석해 대회를 주관했다. 이영훈 목사는 “그동안 서양의 교회들이 희생과 열정으로 이끌어 간 세계선교를 이제는 아시아 교회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전 세계를 선교하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며 아시아 기독 리더들에게 아시아 선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이영훈 목사는 21일 락미니스트리에서 성회를 갖고 힌두교도가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발리섬에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다. 일본 일천만 구령을 위한 일본 선교도 활발했다. 이영훈 목사는 일본 순복음동경교회 삿포로 지성전 창립예배(9월 3일)에 참석하고 후쿠오카 축복대성회(10월 8일)를 인도했다. 순복음후쿠오카교회에서 열린 성회는 사단법인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임회원을 비롯 400여 명이 참석해 일본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 밖에도 일본 도쿄에서 ‘교회 성장과 리더십’을 주제로 초교파 교역자 세미나(10월 22∼23일)를 개최해 한일 교회 선교협력과 교회 성장에 대해 강연했다. 이영훈 목사는 국내에서도 전 세계 리더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다양한 연합사역을 펼쳤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주최한 ‘2018 세계선교대회 및 7차 선교전략회의’(NCOWE VII, 6월 18∼21일)가 부산 해운대구 수영로교회에서 열렸고 전 세계 1400여 명의 글로벌 리더들이 모인 이 행사에서 이영훈 목사는 ‘성령과 선교’(행 1:4∼8)라는 제목으로 성회를 인도했다.  

 그 밖에도 이영훈 목사는 2020 프랭클린 그레이엄 페스티벌 행사의 대회장을 맡아 준비하고 있다. 7월 2일에는 CCMM빌딩에서 열린 ‘2020 프랭클린 그레이엄 페스티벌 서울·경기지역 발대식’에 참석했다.
 광림교회에서 열린 세계감리교협의회(WMC) 대의원회(7월 14일)에도 참석해 인사말을 전했다.
 또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민족 복음화와 복음 통일을 위한 행보를 이어 갔다.

 11월 20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이하 기하성) 여의도순복음총회(총회장 이영훈 목사)와 서대문총회(총회장 정동균 목사)가 두 총회로 양분된 지 10년 만에 통합하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었다. 우리 교회 대성전에서 진행된 기하성 통합 인준 감사예배는 한국 교회 대통합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기하성 대표총회장 이영훈 목사는 “기하성 통합을 통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에 대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고 남북통일시대를 열어 나가야 한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 됨으로 다가온다”며 통합을 이룬 기하성에 대한 기대를 전했다. 기하성은 앞서 10월 29∼30일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에서 기하성연합회 워크숍을 갖고 양 교단의 하나 됨을 위한 기도회를 갖기도 했다.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 자격으로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10월 4∼6일)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와 남북 종교계 대표 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한반도 평화와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한 행보를 펼쳤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린 신사참배 결의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 준비를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10월 28일)에서도 이영훈 목사는 대표대회장으로서 대회사를 전하며 한국 교회 회개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이영훈 목사는 제7회 영남지역연합회 목회자 및 사모 세미나(6월 18일), 제28회 6.25상기 기독장병구국성회(6월 21∼23일), 제33회 전국직장인 및 일반성도 초청 금식기도대성회(7월 17∼20일), 제44회 교회창립 60주년 초교파여성금식기도대성회(7월 24∼27일), 제16회 장로수련회(9월 6∼7일), 제24회 순복음실업인수련대회(8월 30일∼9월 1일)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했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은 2018년 하반기에 맺은 우리 교회의 열매도 풍성하다. 다음 세대를 위한 ‘순복음 비전센터’가 완공(8월 26일)됐고, 교회창립 60년사 ‘성령님과 함께한 60년-고난과 영광의 여정’ 출판기념회(9월 5일)가 열렸다. 또한 우리 교회 목표인 교회 개척 500개를 초과 달성해 대성전에서 개척 500교회 달성 기념 감사예배(11월 21일)가 드려졌다.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 복음 통일을 위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 교회는 한국 교회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꿈을 가지고 희망의 70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끝>.

글 이미나 / 사진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6> 역사신학 ⑦ - 한국교회사 3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1928년, 메리 럼시 우리나라에 오순절 신앙 전파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1958년, 조용기·최자실 전도사 교회 개척… 세계최대 교회 성장


 3·1운동(1919)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자 우리 민족은 깊은 좌절과 무기력에 빠졌고 한국교회 역시 패배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와 같은 특출난 부흥사들이 등장하여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 한국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강조하는 오순절 신앙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 전파된 오순절 신앙은 한국교회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러한 오순절 신앙의 대표 주자이다. 이번 주에는 한국의 기독교를 성령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시켜온 한국 오순절운동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오순절 신앙의 전래

 우리나라에 최초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메리 럼시 선교사다.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럼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아주사거리부흥회(1906∼1909)에 참석하여 오순절 성령침례를 경험한 후 한국 선교를 열망하면서 뉴욕 로체스터에 있는 오순절 계통의 로체스터성경훈련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오랜 기도와 기다림 끝에 럼시 선교사는 마침내 1928년 봄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한국 땅을 밟는다. 럼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여러 오순절 선교사들도 차례로 한국에 들어왔다. 미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글래디스 파슨즈와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는 1930년에 영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엘시 메레디스와 릴리 베시는 1932년에 서울에 도착하여 럼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오순절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오순절교회가 차례차례 설립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오순절교회는 서빙고오순절교회였다. 1928년 한국에 입국하여 오순절 신앙을 전하던 럼시 선교사는 1933년 봄 허홍과 함께 서울 변두리 지역인 서빙고에 교회를 세운다. 교회 설립 초기에는 주민들의 핍박이 거셌지만 점차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훈련받은 오순절 사역자가 필요했던 럼시는 당시 일본 나고야 주재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인 존 주르겐센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성산을 담임 교역자로 청빙했고 그 결과 서빙고교회는 장년 70명 주일 학생 200여 명에 이르는 알찬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파슨즈와 오프스테드 선교사도 수창동교회를 개척한 후 존 주르겐센 밑에서 박성산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배부근을 담임 교역자로 초청한다. 오순절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서울 지역에 추가적으로 4개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한다.

 하지만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 주재 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등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 정책하에서 럼시, 메레디스, 베시 선교사는 자국의 선교사 대피 명령에 따라 1940년 모두 한국 땅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의 피와 땀으로 설립한 오순절교회들도 차례차례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한국 초기 오순절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한 오순절 선교사들이 모두 여성이었고 오순절 교단이나 선교 단체에서 정식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비량 선교사라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오순절운동의 토대를 놓을 허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 엘로드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한 후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한다. 이 무렵 박성산 목사도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조속히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한다.

  이러한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의 결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다. 조사를 마친 후 오스굿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넛을 1952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한다.  

  체스넛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헌신의 결과로 1953년 4월 8일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남부교회에서 체스넛 박성산 허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과 그 외 4인의 참관자를 포함해 총 1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교단이 정식으로 창립된다.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결정됐고 체스넛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허홍 목사가 서기 겸 재무로 선출됐다. 그리고 1953년 5월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남부교회에 순복음신학교가 설립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립과 발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된 지 5년 후인 1958년 5월 18일 순복음신학교 졸업생인 조용기·최자실 당시 전도사는 서울 변두리인 대조동에 작은 천막 교회를 개척한다. 조용기 전도사는 6.25전쟁 이후 질병과 굶주림 범죄와 폭력으로 소망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축복과 병고침의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신유 등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5명으로 시작한 천막 교회는 개척 3년만에 재적 1000명 출석 600명의 교회로 성장한다.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교회를 대조동에서 서대문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961년 10월 15일 건축 중이던 ‘순복음부흥회관’에서 개척예배를 드린다. 1964년 성도 수가 3000명에 이르렀을 때 조용기 목사는 출애굽기 18장 18절의 말씀을 근거로 구역 조직을 만든다. 그가 창안한 구역 조직은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73년 9월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다.

 교회 이전 후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을 계속 이어갔고 1979년에는 10만 성도 1980년에는 20만 성도 1983년에는 30만 성도 1984년에는 40만 성도 1985년에는 50만 성도 1990년에는 60만 성도 1992년에는 70만 성도로 성장했다. 2010년 20개 제자교회의 독립으로 인해 88만 명이던 성도 수가 불가피하게 45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제2대 이영훈 위임목사의 영적 지도력 아래 교세는 즉각 다시 증가세를 보여 교회 창립 60주년인 2018년 현재 오순절 신앙으로 무장한 56만여 명의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창립 70주년의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은 외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 성숙을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8년 이영훈 위임목사의 취임 이후 지금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통일을 준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힘써왔다. 교회 예산의 3분의 1을 구제와 선교에 투입하면서 강력한 성령운동과 사회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과 세계에서 오순절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5)-

역사신학(6) - 한국교회사 2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1. 한일합방과 한국교회의 수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이후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군사권을 차례로 빼앗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거쳐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조선을 강제로 합병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당시,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 270여 명, 조선인 교역자 2300여 명, 신도 20만 명의 인원과 전국에 1900여 개의 예배당과 300개 이상의 학교를 보유한 유일하고도 강력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다수의 인사가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나란히 전개하고 있었다.
 합병 초기 일제는 기독교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자 서서히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상실되어 가고 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4월에 안창호 전덕기 등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항일 비밀조직이었다. 기독교 세력이 신민회의 배후라고 확신한 일제는 항일 민족운동과 기독교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합방 직후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1911년 12월에 기독교인들이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여 100여 명의 기독교 인사를 잡아들이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한 악랄한 음모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가 겪어야 할 길고도 긴 핍박과 수난의 출발선이었다. 

 
2. 3·1운동과 기독교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하며 우리 민족을 경제적·문화적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를 통해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 경제를 철저히 수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가 강해질수록 이에 저항하는 한국 민족의 저항의식 또한 커져만 갔다. 이렇게 누적되었던 우리 민족의 반일의식과 항일 에너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호응하여 각계각층의 사람이 참여하여 거의 1년간 지속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 것이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시작과 전개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단계에서는 교회가 조직과 인원을 제공했다. 당시 2000만 겨레 중 10%인 200만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전체 참가자의 22%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가량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써 유교 불교 천도교인의 총수 1556명보다 많았다. 또한, 미국교회협의회 동양위원회가 1919년 출판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631명이 살해되고 2만 8934명이 체포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라는 시선을 불식시키며 ‘민족의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3. 사회적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교회
 3·1운동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강압적인 무단정치에서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내세워 이전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세력을 말살하려는 집요한 분열 및 이간책을 사용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다소 헐거워진 틈을 타서 국내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3·1운동 실패 후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구원에는 미진한 기독교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회·청년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공산주의자들은 1925년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반기독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거센 도전과 교회에까지 침투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기에 내적인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이 전개되어 우리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 지도력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정한 개인보다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진행된 집단적 신앙체험이 주류를 이룬 이전의 부흥운동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와 같은 특출난 개인이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신유와 기적을 동반한 부흥운동’(김익두)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용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길선주)을 한국교회 안에 정착시킨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주의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힘없는 다수 민중계층 교인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수난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를 위하여 식민지였던 한국을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과 동원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일제가 시행한 것이 ‘황민화정책’이었다. 황민화정책은 ‘천황 신앙’을 강제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고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추진된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하였고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그리고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론’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어 개별교회와 각 교단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학교 폐지와 선교부 철수 및 신사참배 거부 등의 강력한 수단으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사참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한국교회 파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성결교는 1941년 12월에 침례교회는 1944년 5월에 해산되었고 장로교는 1943년 5월에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1945년 7월 19일에 한국의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14) - 역사신학 5 - 한국교회사 1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조선말 전해진 기독교, 엘리트들 수용되면서 민족종교로 발전
서구문물 통해 민족자강 이루려던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등 입교

 조선말에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하면서 외래종교에서 민족종교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한 한국교회의 역사를 2회에 걸쳐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 수용 이전의 접촉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몇 차례 복음과의 접촉이 있었다. 7∼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번성하였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당시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 마리아상, 2점의 십자무늬장식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경교의 신라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1592∼1598) 때에도 기독교와의 짧은 접촉이 있었다. 1592년 12월에 일본 주재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을 방문하여 경상남도 웅천(오늘날의 창원)에 주둔하던 천주교도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1년간 돌보았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였지만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2. 천주교의 수용
 17세기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서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 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생겼다. 이들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었다. 그는 1783년 겨울 조선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다음해 2월 북경 주재 예수회 선교사인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이승훈은 동료 유학자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들은 교우 김범우의 명례동 집(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 등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견디며 성장했다.   


 3. 개신교와 한국과의 접촉
 1884년 고종이 개신교 선교를 허락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칼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선에 통상을 청원하는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충청도 지역에서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배포한 후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두 번째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목사였다. 영국 출신 중국 주재 선교사였던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품고 1886년 여름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9월에 순교했다.
 
 4.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한편 만주와 일본에서는 한글번역 사업이 진행됐다.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장사하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1882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출판했다. 그들은 1887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고 순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를 출판했다. 일본에서도 이수정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됐다. 1882년 9월에 수신사 박영효의 통역으로 일본에 온 그는 1883년 4월에 동경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언어에 뛰어났던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이는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됐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손에 쥐고 있던 성경이었다. 

 5. 한국 선교의 시작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1882년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복음의 미개척지였던 한국의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 1884년 7월에는 일본 감리교회 감독인 로버트 맥클레이 목사가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활동에 국한된 선교사업을 허락받음으로써 한국 선교의 문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됐다.  
 미국의 남감리교회는 헤론과 언더우드(북장로교회)를,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아펜젤러(남감리교회)를 의료 및 교육선교사로 임명했다. 북장로교회도 헤론과 언더우드를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국내에 거주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땅을 밟았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도 내한해 선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편, 북장로교회와 남감리교회에 이어 호주장로교회(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회(1892), 미국 남감리교회(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 선교사를 파견했다.   

 6. 교회들의 설립
  의주 청년 서상륜은 1883년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에 교회를 세운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혹은 송천교회이다. 한국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이어 언더우드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1893년 6월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장대현교회를 설립했다. 

 7.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은 ‘고전의 시기’였다. 1894년까지 한국 교회가 얻은 신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신자 증가율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신도 수는 1895년 750여 명, 1896년 2500여 명, 1897년 3300여 명, 1900년 1만2000여 명, 1905년 2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청일전쟁 이후, 하층민들은 물리적 보호와 정신적 위안을 찾아서, 엘리트층들은 서구문물 수용을 통한 민족의 자강을 이루기 위해 대규모로 입교했다. 이승만, 이상재, 안창호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됐다.

 8.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 개신교회의 초창기는 사람들이 종교적 목적에서보다는 실제적이고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에 입교하던 시기였다. 을사늑약(1905년)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한국 교회의 얼굴과 성격을 만들 원산부흥(1903년)과 평양대부흥(1907년)이 때맞춰 일어났다. 1903년 원산의 선교사 기도모임에서 점화된 부흥의 작은 불씨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의 큰 불길로 피어올랐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1908년에는 만주 지역의 교회에도 확산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게 됐다. 기독교를 서구의 문물과 사상으로 인식하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제 기독교 안에서 영적인 생명력과 깊이를 찾기 시작했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3) - 역사신학 ④ - 현대교회사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는 17세기 중반에서 현재까지 포괄하는 근·현대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대표되는 사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17세기 중반 - 근·현대교회사의 시작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반대해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세의 연장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공로 사상이나 연옥 같은 중세 기독교의 여러 종교적 신념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운동을 통해 형성되던 인본주의적인 관념이나 가치들도 함께 배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시대 역시 교회의 권력이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삶과 생각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강력한 지배는 17세기 초 일어난 30년전쟁(1618∼1648)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기독교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기독교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7세기 중반을 근·현대교회사의 시작으로 본다.

 
2. 17세기 후반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태동

 30년 전쟁 이후, 유럽 국가와 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신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성의 힘에 의한 사회의 개혁을 믿었다.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과 함께 개신교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과 교리를 논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개신교 정통주의 혹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직접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에 맡겨놓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계시와 기적을 부정하는 자연신론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계몽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건주의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운동은 신앙의 본질을 이성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서 찾았다.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6)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운동은 스페너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가 함께 세운 할레대학에서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1) 그리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3. 18세기 -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영국의 기독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1714∼1770)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엄격한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에 ‘감리교도’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다. 감리교운동은 영국의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의 상류층에서 노동계층까지 전 계층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웨슬리의 사회참여 주장은 영국 전 사회에 각성을 가져왔다. 후에 복음주의운동은 영국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71∼1901)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 감리교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즈음에, 북미에서도 영국 식민지들을 중심으로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 불리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을 이끈 영적 지도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조지 휫필드였다. 초창기의 청교도적인 신앙과 경건성이 사라지고, 종교적 열정이 무시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들은 죄의 회개와 개인적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던 미국 교회에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약 반세기 후에 일어날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적 토대가 되었다.  


 4. 19세기 - 위대한 선교의 세기

 19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린다. 현대 개신교 선교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1761∼1834)가 1793년 인도의 콜카타를 향해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이후 런던선교회(1795년), 미국 국제선교 본부(1810년), 바젤선교회(1815년), 영국 성공회선교국(1799년) 등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각국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기독교 해외선교는 드와이트 무디(1837∼1899)와 아서 피어선(1837∼1911) 같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도 모두 무디와 피어선이 조직한 ‘학생선교자원운동’을 통해 선교의 비전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5. 20세기 이후 - 교회일치운동과 오순절운동

 교파와 교단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교회일치운동은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교 현장에서 여러 교단의 과다한 경쟁과 분쟁을 피하고, 좀 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지역선교대회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세계 선교의 실제적 방향과 전략을 점검하기 위한 국제규모의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세계적 차원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1901년 1월 1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 미국 캔자스 주 타피카에서 찰스 팔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작은 지역 부흥운동에 불과하던 오순절운동은 1906∼19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부흥회를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확산 이외에도 오순절운동은 1960년대부터 성공회, 가톨릭교회, 장로교, 루터교 등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들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를 좀 더 성령 충만한 종교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순절운동은 비서구 지역에서의 놀라운 성장에 힘입어 서구 중심의 기독교를 비서구 중심의 종교로 변화시키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12> - 역사신학③ - 종교개혁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 살펴볼 종교개혁이란 16세기경 부패한 로마교황과 교황청에 대항하여 일어난 개혁운동을 말한다. 대체 당시 로마가톨릭의 부패는 어떠했길래 유럽 전역에서 개혁운동을 불러일으켰을까? 먼저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1. 종교개혁운동의 배경

 수백 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당시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일방적이었던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교황의 아비뇽유수). 교황무오설(교황은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성서 해석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는 주장)을 통해 쌓아온 절대적 교권은 르네상스를 통해 일어난 지식층의 도전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들의 타락이었다. 서품을 위해 큰돈이 오고 갔으며, 이를 회수하기 위해 비성경적인 면벌부(죄로 인한 형벌의 감면 또는 사면을 보증하는 증서) 판매에 앞장섰다. 독신이어야 할 사제들은 축첩을 일삼았으며, 사제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로 고아원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2. 종교개혁 시대 설정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1517년으로 알려졌다. 사실, 교황에게 대항하는 개혁의 요구는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14세기 존 위클리프, 15세기 얀 후스). 그럼에도 1517년을 손꼽는 이유는 마르틴 루터 때문이다.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의 양상은 점차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사이의 무력 충돌로 치달았고 ‘30년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 내 개신교도를 살육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측(오늘날의 체코, 헝가리, 독일, 덴마크,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의 저항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전쟁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었고 각국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종교개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3.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유럽 내 여러 국가의 개혁운동을 일일이 다루지 않고,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인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비텐베르크
 루터의 교구는 브란덴부르크의 대주교 관할하에 있었다. 루터의 교구를 넘겨받고자 했던 마인츠의 주교 알브레히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고, 교황은 그에게 베드로교회 신축을 위해 1506년 발행한 면벌부를 팔도록 했다. 알브레히트의 판매 대리인은 도미니크수도회의 요한 텟첼이었다. 그는 “돈이 금고에 떨어지자마자, 연옥에 있는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른다”라고 설교하며 잘못된 믿음을 부추겼다.
 비텐베르크의 고해신부였던 루터는 설교를 통해 이를 강하게 질타하면서,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게시,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 루터의 반박문은 마침 만성절을 맞이하여 비텐베르크교회에 전시된 엄청난 성(聖)유물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수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근래에 발명된 인쇄술 덕에 대량 인쇄된 전단지는 이들을 통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와 더불어 루터의 종교개혁 논문들(『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교회의 바벨론 포로 서곡』,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름스 칙령
 칼 5세가 황제가 되자 로마교황청은 “주여 분기하소서”라는 글을 통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 역시 1520년 12월 10일 로마교황청의 파문서와 여러 가지 잘못된 로마교황청의 지침서들을 모아 불에 태우면서 로마교황청의 모든 잘못된 제도를 따르길 거부했다.
 제국법에 따라 교회 파문에 이어 곧장 추방돼야 했기에 제국의회가 소집됐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루터는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제국회의에 나타났다. 심문 과정에서 황제는 루터에게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할지 물었다.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루터는 이튿날 자신의 주장에 대한 취소를 거부하며 말했다. “폐하!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심에 붙들려있습니다. 저는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잘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는 여기에 서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황제는 루터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보름스 칙령(5.26)을 반포하기로 했다. 그사이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루터는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러나 이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프리드리히 영주의 계획이었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인도된 루터는 이후 융커 요르크라는 가명을 쓰며 약 1년 동안 숨어지냈다. 이때 독일어 신약성경이 완성됐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보름스 제국회의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황제는 루터의 사건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터는 열광주의자들의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으며, 글을 통해 계속 종교개혁 운동을 펼쳐나갔다. 어려움도 있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이 결렬됐고, 결혼(1525)으로 인해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예상과 달리 보름스 칙령이 재추진되기도 했다(1526 슈파이어 제국회의. 이때 거세게 ‘항의’하는 종교개혁 측 제국의원들은 ‘프로테스탄트’, 즉 ‘항의자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개혁운동은 확산되어갔으며, 결국 개신교 진영은 1532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체결, 통일된 연합체가 되었다.

 독일 밖에서 루터의 영향
 독일의 종교개혁은 주변으로 확장되어갔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가 여기에 포함된다.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핀란드, 헝가리와 발트해 연안 리보니아 지역의 비독일어권에서도 예배 개혁과 성경 번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루터의 사상은 취리히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뱅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국 청교도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다음 시간부터는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교회와 그 이후 시대를 다루게 된다. 17세기 말부터 등장한 경건주의운동과 18세기 부흥운동, 19세기 해외선교, 20세기 오순절운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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