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요나의 표적     

사흘 밤 낮

유대적 배경으로 신약성경을 공부하세요

  • 다른 종류의 달력들

    이 이야기를 분석하는데 몇 가지 단서들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다른 종류의 캘린더" 입니다: 유월절은 종파에 따라서 다르게 계산됩니다. 바리세인 유월절 날짜와 사두개인 유월절 날짜는 하루가 차이가 납니다, 이것으로 요한 복음과 공관 복음서의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에세네 역시 그들의 달력을 사용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달력에 따라 에세네 시설에서 유월절을 축하 하셨습니다.
     

    첫 번째 자식의 금식

    더욱 중요한 사실은 갈릴리 지방 출신으로써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의 전통을 따랐을 것입니다. 갈릴리인과 유대인의 유월절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특별한 금식인 the Fast of the Firstborns 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금식 전 마지막 식사는 매우 특별한 행사 입니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금식 전 마지막 식사는 최후의 만찬을 하게 됩니다.
     

    요나의 표적이 성취되었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목요일, 니산월 14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경우 요나의 표적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는 정확하게 실현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월절과 관련된 유대인의 관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유대적 배경으로보는 신약성경 과정에 등록하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에 마지막 일주일이 주가 더욱 확실하게 느껴질 것 입니다.

  • 퍼왔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삶과 고난’ 묵상해야


우리 신앙 돌아보는 회개와 경건의 시간 필요
코로나19로 어려운 이웃에 나눔과 사랑 실천할 때

사순절은 기독교 최대 절기인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말한다. 올해는 2월 26일 사순절이 시작됐고 부활주일 전인 4월 11일까지이다. 예로부터 이 기간에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며 보냈다.

29일(오늘)은 사순절 다섯 째 주일이며 다음 주일(4월 5일)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 뒤이어 6일부터 11일까지 고난 주간이 된다.

매년 수요일에 시작돼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불리는 사순절 첫 날에는 전년도에 사용한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는 의미에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순절에 맞춰 주님이 겪으신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금식도 실천했다. 식사는 저녁 전에 한 끼만 허용됐는데 어류 육류 및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 금지했다.

사순절은 크리스천에게 있어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고 훈련하기에 아주 좋은 기간이다. 우리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는 기회로 삼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고 감사의 신앙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금식과 절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주님의 백성 된 자로서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에도 나서야 한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 사순절을 맞이한 탓에 신앙과 예배 회복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고난에 처한 이웃을 위한 기도는 물론 사회의 거룩을 위한 기도에 특별히 나서야 한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문화가 아닌 사회를 건강하게 살리는 문화가 회복되도록 또 정직하고 건강한 경제관이 회복되고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넘어 화목의 영을 통해 이 땅이 회복되길 간구해야 한다.

주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은 없는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미자립교회는 없는지 우리의 관심을 이들에게 돌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남기신 생명의 빛을 전해야 한다.


 

기사입력 : 2020.03.29. am 10:16 (편집)
오정선기자
 
 

























 

[교회사로 보는 대재난과 그리스도인] ③ 종교개혁자들과 흑사병


"흑사병 가운데 있던 종교개혁자들, 그 참된 신앙인의 자세"

14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유럽 인구 거의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창궐했다. 1차 흑사병의 대유행(팬데믹)으로부터 약 200년이 지났지만 병의 전염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흑사병은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신의 징벌이었다. 전염과 죽음의 위기는 당시 종교개혁의 리더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글에서는 흑사병의 위기를 겪었던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울리히 츠빙글리

루터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리더였다. 그가 1519년 1월 1일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흑사병의 물결이 거침없이 라인강 상류를 향해 들이닥쳤다.

라인강 인근에 있던 바젤과 샤프하우젠에 이어서 그해 여름엔 취리히까지 초토화되었다. 당시 약 7000명이었던 취리히 인구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2000명 가량으로 격감했다. 성직자로서 츠빙글리는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신의 공동체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떠나 홀로 남겨진 환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그러던 9월 중순, 츠빙글리 자신도 흑사병에 전염됐다. 그는 약 두 달간 사경을 헤맸지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훗날 그는 자신이 지은 '역병가'에서 당시 겪은 죽음의 공포와 그 가운데 얻게 된 견고한 믿음을 이렇게 고백했다.

"<1절> 주 하나님, 저를 도와주옵소서. 죽음이 문 앞에 와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저를 죽이고 있는 이 화살을 빼주옵소서. 그러나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를 만드실 수도 부수실 수도 있습니다.

<2절> 하나님, 위로해주옵소서. 병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통증과 두려움이 제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저의 유일한 위로가 되는 주님!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제 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감각도 거의 마비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싸워주실 시간입니다. 저는 미쳐 날뛰는 이 악마에게 저항할 힘조차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주님만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3절> 하나님! 당신이 저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원상태로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 입술은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가 받은 엄청난 죽음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세상을 향해 저항해 나아갈 것입니다. 오직 당신이 도우실 때 저는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얻었다. 마치 풀무불에서 연단되어 나온 정금 같은 그의 믿음은 로마가톨릭의 파문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2. 마틴 루터

1516년 1527년 1535년 1538년 그리고 1539년 마틴 루터의 도시 비테베르크에도 수차례에 걸쳐 흑사병이 창궐했다. 당시 독일 사람들 역시 전염병의 창궐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불신앙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종교개혁의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루터는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통해 사람들의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려 했다.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일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물에 빠지면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합니까? 배고프고 목마를 때 먹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됩니까? 만일 누군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입니다.

약을 먹고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십시오!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감염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언제든지 거절하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흑사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 주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시장이나 판사 의사 등과 같은 공무원들은 계속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병자를 돌보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받은 은혜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루터는 전염병을 피하는 일은 불신앙이 아니며 감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일에 부름 받은 직분자들은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간에 자리를 지키고 병자나 약자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 자신도 전염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자들을 돌보고, 죽어가는 자들의 곁을 지키기 위해 비텐베르크에 남았다. 루터는 섬김을 위해 부름 받은 직분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3. 장 깔뱅

깔뱅은 프랑스 출생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흑사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파리로 옮겨 학교에 다녔다. 깔뱅은 1540년 이델레뜨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이델레뜨는 아이가 둘 있는 과부에다가 허약한 여인이었다. 깔뱅 역시 가난한 목회자로서 당시 다섯 달 동안이나 사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랑 앞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깔뱅은 찰스 대제가 소집한 제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석 달이나 집을 비워야 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슈트라스부르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걱정으로 회의를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가 절친한 동료들과 주고 받은 편지에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이 잘 나타난다.

"지금 내 집은 매우 안 좋은 상황입니다. 내 동생은 이웃 마을로 피했고, 아내는 내 동생의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밤낮 내 머리엔 아내 걱정으로 가득합니다"(기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나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로조차 해 줄 수 없습니다"(삐에르 비레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다행히 6개월 후 깔뱅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개혁을 위해) 제네바로 가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맞이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고백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된 지 거의 석 달이 되어간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을 교훈 삼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① 전염병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참된 성도! ② 부름 받은 사명을 기억하고 섬기는 일에 용기를 내는 참된 성도! ③ 소중한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참된 성도!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약속의 땅을 사모했던 요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24:32)


출애굽은 아주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유월절 음식은 신발을 신고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출 12:11). 마치 전쟁이 난 듯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를 피해 도망하듯 급히 출애굽을 해야 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모세가 잊지 않고 챙겨서 출애굽 한 것이 있었다. 죽은 지 360년이나 된 요셉의 유골이다. 출애굽기에는 요셉의 유골을 들고 200만 명은 족히 넘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맨 앞에서 가나안으로 출발하는 모세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출 13:19).


1) 요셉의 유언

출애굽기 13장 19절의 사건은 요셉의 유언에서부터 시작된다. 요셉은 그 당시 세계 최강국의 총리로서 이집트 왕을 제외한 그 누구도 누리지 못했을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는 그가 묻혀야 할 땅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야 할 곳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이집트에서 17년을 살았다(창 47:28). 아들이 출세의 가도를 걷고 있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기름진 이집트 땅이 아닌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족묘로 준비해 둔 헤브론 땅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기를 원했다(창 50:5).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요셉의 유언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텐데 그때 그의 유골을 이집트에 남겨두지 말고 가나안 땅으로 가져가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요셉은 17세(창 37:2)에 팔려와 110세에 죽을 때(창 50:26)까지 93년을 이집트에서 살았다. 가나안 땅의 기억보다는 이집트에서의 기억과 영광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요셉과 그를 팔았던 형들의 재회는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된 후 7년의 풍년이 지나고 2년의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창 45:6). 39세에 가족과 재회가 이루어졌고 야곱을 비롯한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은 요셉의 나이 40세쯤이었다. 성경은 이때를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간 이집트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출 12:40). 가족들과 다시 만나 70년을 이집트에서 함께 살았으므로 출애굽은 요셉이 죽고 360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 어떻게 360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뼈가 썩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2) 약속의 땅을 위해 미라가 된 요셉

전통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장례 문화는 가족장이었고 땅에 묻는 매장이 아니라 동굴에 시신을 안장하는 입굴장(interment)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은 400세겔을 주고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을 사서 가족묘로 사용하기 시작했다(창 23:16~20). 이렇게 동굴에 안장하는 방식은 신약시대에도 이어졌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체를 동굴에 안장하고 입구를 돌로 막았다(요 11:41~44). 예수님을 위해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도 바위 속에 굴을 파 만든 무덤이었다(막 15:46).

야곱과 요셉의 장례는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경은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의 의원들이 야곱의 시신을 40일 동안 향료로 처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50:2~3). 40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시신에 향료를 넣어 장례를 치르는 것은 시체를 미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장례 절차는 히브리인의 장례 관습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향료를 넣었다는 히브리어 ‘라하노트’는 구약성경 전체에 단 3번만 등장한다. 창세기 50장에서 야곱과 요셉의 장례를 언급할 때만 등장한다(창 50:2,3,26). 야곱과 요셉 외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렇게 향료를 넣어 장례를 치른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의미이다.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은 보통 70일이 소요됐다. 이 기간 동안 애굽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 곡을 했다(창 50:3). 이집트 사람 모두를 사후에 미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왕족과 그에 준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방인이었지만 요셉이 총리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왕족에 준하는 장례절차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보통 미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7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야곱에게는 40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창세기 50장 3~4절에 따르면 40일 동안 향료를 넣고 30일이 더 지나 70일의 곡하는 기간이 끝난 후 요셉은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겼다. 야곱의 시신에 향료를 넣는 시간을 단축한 것은 야곱을 완전한 미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더운 날씨 속에 이집트에서 헤브론의 막벨라 굴까지 가는 동안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약품처리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막벨라 굴에 도착해서 야곱의 시신은 히브리인의 전통에 따라 이장됐을 것이다.

요셉의 장례는 이와는 달랐다. 창세기 50장 26절은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 전체에서 입관이라는 말은 단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창 50:26). 이집트의 장례절차를 따라 요셉의 시신은 미라로 만들어져 묻혔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유골이 360년이 지난 후에도 썩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3) 요셉의 유언과 성취, 그리고 완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 이집트의 풍족함과 성공 속에서도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자신의 뼈를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했던 요셉. 이 요셉의 유언을 360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미라가 되어 있던 요셉의 뼈를 파내어 출애굽 대열의 가장 앞에 두고 출애굽을 한 모세, 그렇게 요셉의 유언은 성취되었다(출 13:19).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한 요셉의 유골은 40년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정복 전쟁과 기업의 분배가 이루어질 동안에도 요셉의 유골은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기록한 여호수아서는 요셉의 유골이 세겜에 장사됐다는 말씀과 함께 마무리되고 있다(수 24:32).

요셉은 17세에 가나안을 떠나서 23년 후인 40세에 가족과 상봉을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430년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생활이 끝나고 또 다시 40년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5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이후 유골이 되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야곱이 수백 년 전에 준비해 놓았던 세겜의 묘지에서 안식을 얻었다.

요셉의 유언과 성취, 완성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 24:32).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성막 서론 (출 40:1-9)

 

성막에 대해서 언젠가 말씀한 적이 있지만 다시 몇 차례에 걸쳐서 복습해 보고자 합니다. 

 

성막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앞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나 그림은 성막 전체적인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었거나 그려놓은 것입니다. 

 


이 성막은 우리나라 곤지암 갈보리교회 성막 축소형입니다.

1/5 축소했는데 물개의 가죽 등 많은 비용이 들어간 성막모형입니다.

 


이 성막은 두레마을의 성막입니다.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 재료는 다르지만 성막원형 크기로 지은 것입니다.  

바닥은 광야처럼 모래이고 박물관을 만들어 성경의 풍습이나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광야의 성막 상당도입니다.

가운데 성막이 있고 레위지파가 성막을 둘러서 진쳤고

12지파가 그 둘레를 진친 모습이 되겠습니다. 

 


이 그림도 광야의 성막의 상상도입니다.

불기둥이 성막 위로 치솟아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성막모형인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모형입니다. 이 모형 그림을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막은 멀리서 보면 천으로 된 울타리 같습니다. 흰 세마포 울타리가 약 50×25m 크기로 성막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흰 세마포 울타리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을 들어서면 성막 뜰이 있다. 성막 뜰 안에는 조각목과 놋으로 된 번제단이 있고, 조금 더 안쪽에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을 조금 지나면 안쪽에 있는 막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성소라고 하며 성소는 두 부분, 휘장을 사이에 두고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집니다.



성막에 관한 명칭들


성막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지고 있습니다.  

1. 성소  2. 회막 3. 증거막 4. 증거의 장막 5. 여호와의 집 6. 여호와의 성막

7. 여호와의 전 8. 여호와의 장막 9. 법막 10. 실로의 성막 11. 요셉의 장막

 

 

 

성막의 평면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방향은 동서남북 표시대로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대략의 구조는 여기 동편에 문,  성막뜰, 성소, 지성소, 울타리 밖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성막에는 여러 기구들이 놓여져 있는데 놓여진 위치를 말씀드리면,, (넘버 표시대로 위치를 설명한다) 

(시청각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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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구들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이 시간에는 성막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막의 의미는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막을 알아야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알게 됩니다. 

 

1. 성막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보여줍니다.

 

출25:22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그랬습니다. 
성막이란 본래의 단어는 ‘미쉬칸’으로 거처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만나려고 하면 만나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를 자세히 알고 복음에 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성막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계시해 줍니다.

 

히10:20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막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휘장만 예수가 아니라 휘장도 예수님, 제사장도 예수님, 제물도 예수님, 제단도 예수님,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도 예수님입니다. 한 곳의 문은 바로 예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보여줍니다. 

 

3. 성막은 성령의 인도 받음을 보여줍니다.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은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성막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오면 성령 충만이 있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요1:16-17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성막 중심으로 살았든 우리들도 예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4. 성막은 예수님을 중심한 신앙생활 전체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막문에서 구원론을 봅니다. 예수밖에는 구원이없다는 것이지요.

번제단에서 죄론과 보혈론을 배웁니다. 내 죄 때문에 주님이 희생하셨다는 것이고 그랬기에 그 공로로 사함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등대에서 사명론을 배우고, 떡상에서 말씀과 축복론을 배우고,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배우고,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삼위일체론을, 각종 기구에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타 다 열거할 수 없는 여러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전체요, 성경 전체입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우리를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인도해 줍니다.

 

5. 성막은 예수 복음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성경에 모형이 많지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예수님 모형이라 했습니다. 또 홍해의 사건은 고전10장에서 세례와 중생의 모형이라 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놋뱀을 만들어 달았는데 이 역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라합의 붉은 줄도 예수님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혹은 도피성도 죄인의 도피처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이처럼 성막은 그 구체적인 것 하나 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모형입니다. 성막의 양도 어린양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성막 안에서 제사도 예수, 제물도 예수님이요, 성막 자체도 예수님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보이는 복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에서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보이는 복음임과도 같이 성막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6. 성막은 예수님 앞에서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막 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구주로 믿고 있는가를 점검합니다. 또 번제단에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큰가? 또 나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또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를 점검받게 됩니다. 그리고 물두멍에서 나는 나의 마음을 얼마나 주의 말씀과 피로 씻어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또 촛대 앞에서 나는 얼마나 빛된 생활과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또 떡상 앞에서 말씀 양식을 얼마나 먹고 있으며 헌신하고 있는가? 또 분향단 앞에서 기도 생활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 등등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고 사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예수님이 누군지 가르쳐 주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는 진리를 알게 하며, 성령의 인도 받는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 성막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고 잘 믿을 수 있도록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2019 수험생과 취업생 자녀를 위한 기도회 개최


교회학교는 9월 29일 비전센터 6층 브니엘성전에서 ‘2019 수험생과 취업생 자녀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신준우 교감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도회에서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담당)가 ‘축복의 통로’(창 39:1∼5)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김호성 목사는 “요셉이 만사형통한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임마누엘하면 주변 사람들도 복을 받게 된다”면서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눈앞에 있는 목표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교 후 기도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은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비전에 따라 자녀가 형통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수험생과 취업생 자녀를 위한 기도회는 11월 10일까지 매주 드려지며 마지막 일곱째 주에는 오전 8시 30분에 학생과 학부모가 연합해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기사입력 : 2019.10.06. am 09:54 (입력)
김주영기자


역사와 전통으로 중심에 서다 예멘 유대인들


늦은 밤 트럭에 올라탄 이들은 모두들 자기 짐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아덴(예멘의 수도)을 떠난 트럭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넓은 공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을 태우고 이스라엘로 가기 위한 쌍발기 한 대가 서 있었다. 중동 각지에서 일고 있는 반유대주의와 예멘 내에서 일어나는 유대인들을 향한 폭행으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멘에서 살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그들을 비밀리에 실어 나르기 위한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비행기의 거대한 몸체를 보자 트럭에 타고 있던 이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한 이들이 보기에는 이 강철의 날개를 가진 물체는 낯설고 두렵기만 했다. 비행기에 타던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랍비는 자신의 가슴에 안고 있던 두루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 두루마리는 토라(모세오경)였다. 그 토라는 조상들이 대대로 보던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토라를 무사히 고국 땅-이스라엘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놀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랍비는 문득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강철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이 거대한 철의 몸체를 보자 떠오른 구절이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던 랍비를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도 각각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이야기는 1950년대에 있었던 예멘 유대인들 구출작전인 ‘독수리의 날개작전(Operation Eagles’s wing)’의 이야기를 각색해 본 것이다. 필자가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것들 중 하나는 이스라엘 내에서의 예멘 유대인들이 갖는 위치였다. 예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동계 유대인들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다. 예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넘어올 당시, 무식하고 문명화되지 못한 사람들로 치부되면서 비하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예를 들어 그들이 비행기를 탔을 때 추워서 비행기 안에서 모닥불을 피웠다는 얘기도 있고, 또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잘 키울 줄 몰라서 많이 죽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예멘 유대인들을 잘 몰라서 일부 서구 유대인들 사이에게서 나온 이야기이다. 실상 예멘 유대인들은 중동 유대인 가운데 독특하고 강한 종교성을 가진 유대인들이었다.

 예멘 유대인들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땅에 입을 맞추면서 고국 땅에 돌아옴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마다 토라 두루마리를 하나씩 들고 왔다고 했을 만큼 유대교 가운데서도 오랜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가진 토라 두루마리들은 보통 1000년에서 500년 된 두루마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전통에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요 종교행사에는 예멘계 유대인들이 주류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은 대우는 너무나 처참했다. 예멘 유대인들은 연고 없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고 그들은 불평등한 대우로 고생을 하게 된다.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버려지다시피 하게 되고 제대로 된 집이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잠재력은 놀라웠다. 현재 이스라엘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악 장르 가운데 미즈라히 뮤직(동양음악)이라는 것이 있다. 다른 말로는 오리엔탈 뮤직이라고 불리는 장르이다. 아랍풍의 음악 스타일과 창법은 독특해서 많은 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중동계 유대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 음악의 중심에 예멘계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의 음악은 중동스타일의 아랍식이지만 가사는 성경의 가사를 끌어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영성과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독수리 날개에 실려 온 작은 사람들인 예멘 유대인들. 서구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얼굴과 다른 삶을 가진 이들이었다.

 비록 무시당하고 불평등한 취급을 받았지만 그들은 당당히 유대인 사회에 한 획을 긋고 있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열망과 순수함이 이스라엘 사회에 파고들고 있다. 한 민족이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유대인 사회에서 이들은 또 다른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하는 얼굴이 되고 있다. 오늘 잠시 인터넷에서 미즈라히(동방 혹은 동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음악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들의 가사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쉽게 풀어쓴 교회사 산책 - ⑤ 초기 그리스도교의 내적 위기(1)

교회사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역사라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교회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고대(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근대교회사. 여기에 종교개혁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하여 종교개혁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2018년 10월 14일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참조). 각 시대마다 유구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로 충만하다. 교회사 산책을 통해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향해 출발해보자. <편집자 주>


“지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몬타누스 운동”

지중해 세계 도처에 세워진 초대교회들은 하나의 통일성을 갖춘 가톨릭(보편적) 교회가 아니었다. 당시 초대교회는 다양한 그룹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단의 등장은 초대교회의 큰 내적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이단 역시 다양한 초기 신앙공동체 가운데 섞여 있었고 이들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처방안이 마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당시 중요한 이단들 가운데 몬타누스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초대교회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 나아갔는지 알아보자.

1.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는 재림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을 약속하셨다(요 14:3).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었다(행 1:11).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면서 초대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난감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재림하기 전에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살전 4:15∼18), ‘재림은 언제 이루어지는가?’(살전 5:1) 등과 같은 것이었다.

2. 재림 시기의 계산

재림의 시기에 대해 초대교회는 시와 때를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도둑처럼 언제 임할지 모른다고 강조했다(마 24:43; 눅 12:39).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날과 시간을 계산하려 했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에 근거, 종말 직전 천 년 동안 있을 평화의 왕국(계 20:2∼3)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했다(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 터툴리아누스).
 어떤 이들은 창조된 세상의 역사를 6000년으로 계산하면서(창 1∼2장, 시 90:4 - 바르나바의 편지)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어디 즈음 위치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재림의 시기를 설명하려고 했다(5500년-히폴리투스). 이러한 시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장래 반드시 일어날 사건임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3. 몬타누스 운동의 등장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주후 156년경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프리기아 지방에서 ‘새로운 예언’ 운동이 일어났다. 키벨레(Kybele) 여신을 섬기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몬타누스라는 남자가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라는 두 여인과 함께 황홀경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소위 ‘새로운 예언’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령께서 우리를 칠현금처럼 연주하시므로 우리는 노래한다. 우리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우리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영은 그 보혜사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의 뜻을 알려야 한다. 이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 페푸자에 새 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며 천년왕국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이들이 그곳으로 모여야 한다.” 그들은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기 때문에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강요했다. 먼저 사도 바울을 끌어들이며 결혼을 가급적 포기하라고 권면했고 재혼은 아예 금지했다. 특별한 장소에서 행하는 단식을 강조했으며, 침례 이후에 범하는 죽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순교를 장려했다. 순교의 상황에서 도망하는 것은 배교행위였다. 몬타누스 운동은 다른 소아시아 지역과 갈리아 지역, 더 나아가 로마와 북아프리카에까지 급속히 확산되었고 주후 3세기까지 꽤 많은 추종세력을 얻었다. 이들은 몬타누스를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예언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 육체로 나타난 보혜사라고 믿었다.

4. 제도적 교회와 몬타누스 운동

자유로운 영의 활동과 카리스마적 권위를 강조하던 몬타누스 운동은 당시 제도화(직제 및 직임)된 교회 안에서 식어버린 초대교회의 뜨거운 영성 회복과 관련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터툴리아누스는 스스로를 열렬한 몬타누스주의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몬타누스 운동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를 고취시킨다는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기존의 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제도화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선포했던 예언자들에 대해 무조건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헤르마스의 ‘목자’는 5개의 환상이 포함된 교회적인 예언서로서 당시 매우 많은 성도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그러나 몬타누스 운동이 갖는 예언의 형태들, 즉 황홀경을 추구하며 극단적인 윤리를 강요하는 점 그리고 기존의 신약성서(정경)와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신탁을 동등하게 만들려는 시도 등은 조직과 제도를 세워 나아가던 초대교회가 받아들이기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5. 초대교회의 대응

몬타누스주의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해 주교들은 160년경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운동과 관련된 자들이 파문됐고 교회의 친교에서도 축출됐다. 곧이어 갈리아 지방과 소아시아 지역 그리고 로마의 교회들까지 파문에 동참했다. 더욱이 몬타누스파가 주장했던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고 당시 뛰어난 저술가들(밀티아데스, 아폴로니우스)이 몬타누스 운동을 비판하면서 이 운동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점차 많은 교회가 극단적-카리스마적 영적 권위보다 순수한 영적 권위를 추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은사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객관적인 직임 제도를 공고히 만들어 나아갔다. 보편적 교회가 인정할 수 있는 정통적인 교리를 세워갔으며, 교회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과 규율 등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이단들로 비롯된 교회의 내적 위기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으면서도 믿음 안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체질로 개선되어 나아갔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 ② 로마제국 내 그리스도교

교회사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역사라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교회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고대(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근대교회사. 여기에 종교개혁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하여 종교개혁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2018년 10월 14일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참조). 각 시대마다 유구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로 충만하다. 교회사 산책을 통해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향해 출발해보자. <편집자 주>


불합리한 종교적 미신 이교도의 도전 극복한 교회

로마제국 내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를 쉽게 만든 요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면서 당시 어느 종교도 이루지 못한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제국 내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에 도움이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극복해야 할 도전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통망의 발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로마제국 당시 사통팔달되어 있던 육상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말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철도망은 로마제국 시대의 도로망 연결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현재 이탈리아의 국도들 가운데 많은 도로가 로마제국 당시 붙여진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하에 건설된 로마에서 제노바까지의 1번 국도는 여전히 ''아우렐리아 가도''라고 불리고 있다).
 도로를 이용한 이동 및 운반 수단은 마차였다. 다만 마차는 하루에 60㎞ 이상을 갈 수 없었기에(예외: 황제의 마차는 하루에 150㎞를 갈수 있었다) 사람들은 잘 발달된 해상로를 통한 이동 수단을 더욱 선호하였다(우리는 사도 바울이 ''276명의 승객을 운반하는'' 여객선을 탔음을 잘 알고 있다 ; 행 27:37).
 당시 항해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이루어졌지만 7월과 2월 사이에는 계절풍을 이용, 홍해를 거쳐 인도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로마제국 내 교통망의 발달은 활발한 서신 왕래도 가능케 했다.
 

2. 공용어 사용

거대한 로마제국 안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진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다(아람어 시리아어 켈트어 베르베르어 등).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어(헬라어)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특별히 그리스어는 주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당시 그리스어를 가리켜 ''코이네''(평범한)라고 불렀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였다. 그리스어는 문학과 철학 그리고 상인들이 사용하는 가장 친숙한 언어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영어에 비교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읽혔고(칠십인 역), 신약성경은 물론 많은 그리스도교 작품들이 그리스어로 쓰였다. 반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던 언어인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널리 사용되는 언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국에 반포되는 법령이나 규율 등은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3. 황제숭배

알렉산더 대왕(주전 323년)이 정복했던 드넓은 지중해 인근 영토는 그의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이 나누어 통치했다. 그들은 통치 강화를 위해 ''황제숭배''를 강조했다.
 후에 이 지역이 로마제국에 의해 복속되면서 ''황제숭배''는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황제를 ''신께서 보낸 구원자''로 칭송했으며 황제의 탄생을 ''기쁜 소식''(복음)이라고 불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의 일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로마제국 시민들의 열광 속에서 황제숭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만큼은 황제숭배의 위험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구세주로서의 황제를 반대하여 ''참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황제의 상''에 어울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었다. 


4. 신비종교

황제숭배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종교적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제국 내 많은 사람이 신비종교(밀교)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거룩한 식사를 하며 몰아지경에 빠지는 광란적인 의식을 일삼으면서도 육체의 윤리적인 의무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은 육체적인 구원이 아닌 영혼의 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비종교 참여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갈망은 황제숭배와 마찬가지로 당시 제국 내 그리스도교 신앙이 맞닥뜨린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비이성적인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진정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며 더 나아가서 윤리적인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5. 우상숭배

로마제국 내 가정에서 우상숭배는 일상적이었다. 부엌 찬장을 수호하는 신(페나테스), 뜰과 거실을 지켜 주는 신(라라), 불을 지켜주는 신(베스타)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일상생활 계절 출생 혼인 죽음 여행 등을 관장하는 수호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제물을 바쳤는데 이러한 가정 제신들을 섬기는 곳을 가리켜 라라리아(Lararia)라고 불렀다.
 값비싼 신상들은 은이나 금으로 만들어졌다. 어린이들은 제물에 바치는 과자를 먹으며 수호신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그들은 수호신 앞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했으며 가축의 피를 수호신들에게 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위직, 군인, 교사, 수공업 등은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직업들을 기피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가 얼마나 불합리한 종교적 미신인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헝겊으로 장식하거나 기름을 바른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들이 어떻게 복을 주고 건강을 줄 수 있겠는가!" 목청을 높이면서 차라리 칠장이나 건축공이 되라고 권면했다(터툴리아누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신화를 비웃으며 우상을 하찮게 여기는 용감하고도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디딤돌] 마틴 루터 킹의 ‘꿈’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시에서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파크스 부인은 그날 버스에 타고 있었다.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뒤에 앉았는데 한 백인 남성이 버스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파크스 부인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일어나 뒤로 가!” 부인은 뒤를 보았으나 빈 좌석이 없었다.

운전기사의 명령을 따라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가야 할 상황이었다. 부인은 오랫동안 참고 견뎌온 울분 섞인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

 몽고메리 시의 버스에선 흑백차별이 심했다. 운전기사들은 흑인들을 향해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고 부르기 일쑤였으며, 흑인 승객들의 경우 버스를 탈 때 앞문으로 타서 차비를 낸 뒤 다시 내려 뒷문으로 가서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비를 내고 뒷문으로 가는 동안 버스가 출발 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빈 좌석이 있어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서서 가야 했다. 백인이 한 명도 타지 않은 경우에도 ‘백인전용’으로 지정된 앞줄 네 좌석엔 절대 앉을 수 없었다. 또 파크스 부인의 경우처럼 백인전용 좌석이 가득 찰 경우 버스기사는 흑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명령했으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경찰에 연행됐다.

 평소 조용하고 침착하며 상냥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아온 파크스 부인은 이날 버스에서 체포돼 며칠 뒤 공판을 받아야 했다. 이 사실이 몽고메리 시의 흑인 사회를 분노하게 했고 참아 온 흑인들의 울분은 마침내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다. ‘버스 보이콧 운동’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 운동의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루터 킹 목사는 이듬해 이 일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운동은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쳐서 모든 나라 국민들의 귀를 울리는 심오한 메아리가 되었으며… 주님은 미국 내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이 가능한지 그리고 승리가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대상으로 몽고메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루터 킹 목사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기점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찾는 일에 헌신했고, 1968년 4월 4일 한 백인우월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킹 목사의 장례예배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무릎에서 슬픈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다섯 살 딸 버니스 킹의 모습이 언론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그로부터 51년이 흐른 지금 버니스 킹은 ‘마틴 루터 킹 비폭력사회변화센터’의 대표로, 변호사이자 목사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등사상과 비폭력의 철학을 알리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바로 그 버니스 킹 목사가 세계사에 또 하나의 위대한 비폭력 민권운동사건으로 기록된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를 찾았다.

 우리 교회의 초청으로 2월 27일 방한한 버니스 킹은 정부가 주관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3일 주일 3부 예배에서 설교하며 우리 교회의 청년들과 만나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다양한 일정들을 소화한 뒤 6일 돌아갈 예정이다.

 3.1운동 100주년과 버니스 킹 목사의 때맞춘 방한이 우리 사회에 다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을 소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절정이자 최대 규모의 집회로 기록된 1963년 8월 28일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남겼다. ‘백인전용’이라는 표지판에 의해 흑인 아이들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자존심이 발가벗겨지는 세상을 더 이상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며 미국 국민들과 나눈 꿈이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꿈을 설파하기 몇 달 전 버밍햄의 한 교회에선 폭탄이 터져 주일학교에 온 흑인 어린이 네 명이 죽었고, 또 그 꿈을 설파하고 몇 달이 안 되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또 많은 흑인들이 희생되었으며, 루터 킹 목사도 쓰러졌다. 그 시대 미국 사회를 뒤덮은 그 ‘증오의 바이러스’는 유령처럼 온 세계를 배회하며 루터 킹 목사의 꿈을 옥죄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은 성취되었는가? 미국 아닌 대한민국의 2019년 오늘, 그의 꿈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과연 그의 꿈을 공유하고 있을까? 버니스 킹 목사의 첫 방한을 맞으며 우리가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야 할 질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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