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자세를 가지십시오
빌립보서 4장 11-13절
오늘날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는 공통적인 것은 바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자세와 관련한 몇 가지 원리를 한 번 살펴볼까요?
1. 긍정적인 자세란 매사에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예견하고 말하고 사는 자세가 바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좋은 것을 보고, 장점을 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비관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듭니다.
대개 불행하고,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해서 언제나 그 사람이 들어가면 어두워집니다.
2. 우리의 생애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할 수 없다고 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같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부부도 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대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경우에 긍정이 부정을 이기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3.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부정적 장소가 긍정적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이 거의 불행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 자체가 긍정적 자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충성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과 인간관계를 자세히 보십시오.
긍정적인 사람은 대개 충성을 알고 헌신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생활도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 교회에서도 충성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긍정적인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거기서도 하나 흠잡을 것을 생각하다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여기는 그 하나의 흠 때문에 전체가 은혜를 다 망각하는 망각의 장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 잘 믿어서 누가 복을 받았다고 말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개는 예수 잘 믿더니 사업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잘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가지 잘못된 것을 보려는 마음 때문에 은혜가 주어질 공간이 없습니다.
목사가 "아무개는 열심히 기도해서 축복 받았다."고 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새벽기도 나가서 어려움 당한 얘기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는 새벽기도 나갔다가 넘어져 다리 부러졌다"고 합니다.
꼭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긍정과 부정은 체질이요 습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처럼 긍정적인 자세와 부정적인 자세가 체질이고 습관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팔자야. 자기 팔자지...."
그렇게 얘기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또 이렇게 트집을 잡습니다.
"목사가 팔자란 소리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 나라 언어에서는 이미 '팔자'란 말이 '사주팔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 하나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부정적 자세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5. 부정적인 자세는 결국 자기를 수렁에 빠뜨리고 어렵게 만듭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남의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그러면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자기는 좋은 삶을 영위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다가 자기도 망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정적인 것만을 보니까 긍정적인 삶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남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남의 장점을 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단점도 장점으로 바꾸어집니다.
자세히 보면 남의 장점을 발견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저 사람이 성공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남들로부터 저 사람은 존경을 받았을까?"
이런 장점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 장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그 장점이 생겨서 그 장점 때문에 성공적인 인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부정적인 사람은 성공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불행해집니다.
보십시오. 불평한 사람 중에서 정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습니까?
불평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꾸 좌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그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사장님을 칭찬하고, 동료를 세워주면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출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긍정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가난했고, 가정도 없어 위로 받을 사람도 없었고, 항상 나그네로 지냈고 거의 반생을 굶고 헐벗고,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현실을 원망하거나 탄식한 흔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전 삶을 언제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을 별장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슬픔의 눈물을 찬란한 진주로 만들며 사도 바울은 언제나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가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좋은 것을 누렸으니 얼마나 축복된 존재입니까? 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긍정적 자세를 가지십시오(2)
고린도후서 4장 7-11절
어제는 긍정적인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면서 감옥과 같은 환경을 별장의 환경으로 만들어 갔던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그런 자세를 배우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의 그런 자세가 은혜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그런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와 그러한 자세를 통해서 얻게 되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긍정적 자세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이 교훈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매맞으면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을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질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큰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서 <질그릇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질그릇 의식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무능함을 알아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기 원합니다.
그 말은 포장도 중요하겠지만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제가 처음에 인터넷 사역을 시작할 때 무심결에 시작했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성범 전도사님이 소박하게 겉 페이지를 만들어 주고, 호산나에서 게시판 6개를 얻어다가 그냥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저도 인터넷에 익숙해지다가 보니까 다른 사이트, 다른 교회 홈페이지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잘 꾸몄는지 모릅니다.
그런 홈페이지와 비교할 때 저의 홈페이지는 질그릇과 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사람은 금그릇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금그릇 속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질그릇 속에 계셔야 하나님의 존재가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약할 때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바로 참된 축복입니다.
우리가 무능함을 느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길이 막히는 것 같아도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 주님이신데 그냥 길을 막겠습니까?
하나님이 한쪽 길을 막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길이 열립니까?
새로운 길, 위로 향한 길을 크게 뚫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해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하다보면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 형제간도 소용없어!"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 친구도 소용없어!
내가 잘 살 때는 자주 찾더니 어려우니까 이처럼 나를 외면하지 않느냐?"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아, 교회도 소용없어!"
그러면서 아주 굉장한 것이나 발견한 것처럼 말합니다.
"아, 세상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이 세상에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러나 우리가 원래부터 세상을 믿고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도 소용없어!"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형제로부터 어려움을 당해도 그 형제가 좋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믿음의 대상,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 시간에 새롭게 각오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버릴지라도 절대로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지냈던 세월이 또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3. 긍정적인 신앙인이 되는 가장 바른 길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죽고 주님이 나타나기를 항상 원했습니다.
우리도 매일 우리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우리 자신을 죽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갈등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판단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열리게 되면 신앙생활에 놀라운 진전이 있게 됩니다.
사람의 믿음을 가장 좌절시키고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성질이고, 자기 속에 있는 똑똑함이고. 자기 속에 있는 판단이며, 자기 속에 있는 잘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는 정말로 똑똑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예>하는 모습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우리가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매사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그러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긍적적인 자세로 사랑의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할 때 감동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억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