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언어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을 움직인다니 조금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민 14: 28에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행하리니"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걸고 맹세까지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 행동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창조자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말에 따라 움직이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곤고하고 피곤하다고 짜증만 낼것이 아니라 내 언어가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었습니다.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앞에 도착했으나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그들은 거민이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외쳐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행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한 땅을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 28-30)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축복의 땅을 눈앞에 두고 구경만 하고 다시 광야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축복의 땅의 구경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 밥이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민 14: 9) 고 외쳤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너희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말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언어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축복된 언어’를 전하자/

조용기목사님의 설교중에서,,,,,



학부모들이 자녀교육의 지침으로 삼아주길 바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28)가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현지에 보내 그 땅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그중 10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우리가 싸워야 할 그 원주민들이 얼마나 기골이 장대한지 우리는 너무 초라하여 메뚜기 같다는 열등감이 들 정도였습니다.우리 힘으로는 그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단 두 명의 정탐꾼,즉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아닙니다.그들이 힘이 센 거인이긴 하지만 이길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장애물들은 우리 밥입니다”

이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숫자가 우세한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한 정탐꾼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백성들의 마음은 부정적이 되어 “우리는 이길 수 없다.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밤새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그때 하나님이 노하시며 주신 말씀이 민수기 14장28절이다. 무슨 뜻일까.너희들이 말한 대로 해주시겠다는 것이다.스스로를 메뚜기처럼 초라하게 생각하며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또 그렇게 습관처럼 말하면 그 말한 대로 초라한 인생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반대로 비록 여건이 좋지 않고 장애물이 높다 할지라도 믿음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그 말한 대로 풍성한 삶을 사는 인생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이 놀라운 언어의 법칙이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최근에 읽었던 어떤 책에 인간의 언어 사용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언어학회의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이 하루에 주고 받는 말 가운데 긍정적인 언어는 3∼5개에 불과하지만 부정적인 언어는 이보다 9배에 가까운 27.5개나 된다는 것이다.

험한 시대를 살다 보니 많은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지난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 때문에 본인도 모르게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이런 어른들의 부정적인 언어 습관이 자녀들을 향해 여과 없이 던져지고 있다.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오늘 하루 동안 우리 자녀들을 향해 던졌던 수많은 말들을 점검해보자.부정적인 말들이 훨씬 많이 사용되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아예 습관적으로 내뱉는 부정적인 언어도 많을 것이다.

“병신 같은 녀석,내 그럴 줄 알았어”“너까짓게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겠어”“너 그 정도 공부해서 시험 성적이 오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넌 할 수 없는 인간이야” 왜 여러분의 자녀들이 초라한 문제아가 돼버렸는가.언제부터 그랬는가.부모들이 아이를 향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습관처럼 던지는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많은 자녀들이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오로지 성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그러다 보니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한 독설과 저주의 말들이 놀랍게도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들의 입술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진다.그리고 그 말들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하신 하나님께 전달된다. 
오늘 심각하게 자녀를 향한 습관적인 언어들을 점검하자.그리고 부정적인 말로 자녀의 장래를 가로막는 무지한 언어 폭력을 중단하고 자녀를 축복하는 언어만 담아 전하겠다고 결심하자.이 결심만 제대로 행해진다면 여러분 가정의 자녀교육은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 던지는 말의 내용 그대로 되게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말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말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님도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인생은 말한 대로 이루어집니다(잠 18:21).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잠 6:2). 더구나 성도의 말에는 영적인 권세까지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
하지 말고, 말로써 먼저 영적 세계를 점령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
안에 들어간 것도 말로 먼저 점령했기 때문입니다(민 14:9).



말은 씨가 된다

 

잠언 18:20-21



사람은 그 일생을 입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먹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입으로 말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입이 우리의 생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나오는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로 서로 교제하면서 우리 인격을 표현하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은 자기가 말한대로 산다고 말합니다.

찬양과 저주도 말이요, 감사와 불평도 말이요, 친절과 온유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며 인간의 운명도 그 말로 결정이 됩니다.

유명한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에 의해서 그 자신을 비판한다. 말은 남 앞에 자기 초상을 그려놓는 셈이다."

말은 곧 인격이요, 삶이요, 사상이요, 운명입니다. 말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말이 마음에 있으면 사상이요, 말이 입을 통해 전달되면 언어요, 말이 고정되면 뜻이요, 말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행위라고 말합니다.

금년 설에 어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세배를 했을 때 아버지가 자녀들을 앉혀놓고 덕담하기를 "금년에 너희들에게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내가 세배 돈은 못주고 복받는 지혜를 주노니 잘 들어라. 말이 씨가 된다. 그러니 너희들이 말을 잘 심어서 열매를 거두어라. 우리가 이 세상에 조상적부터 받은 물질의 유산은 없지만 입에서 말로 씨를 잘 심으면 큰 노력없이 복 받고 잘 살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좋은 말 많이 심고 자녀들에게 좋은 말을 많이 심어두면 이 가문이 빛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양수리 수양관에 들어가서 내가 수십년동안 외쳤던 설교집의 수십권을 전부 탐독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목사로서 일생동안 말하고 사는 사람인데 말로 복을 빌어주고, 말로 은혜를 끼치고, 말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데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 그동안 전했던 말들이 어떤 면을 많이 전했으며 어떤 면은 전하지 않아서 우리 교인들이 복받는데 장애가 되었나' 스스로를 성찰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명하고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의 설교를 검토하면서 '이 분은 어떤 말을 많이 하고 어떤 면에서 부족한가'를 분석하면서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만큼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한 만큼 행복할 수 있으며, 내가 말한 만큼 성공할 수 있으며, 내가 말한 만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대한 교훈을 오늘 말씀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은 씨가 된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20절)

다시 말하면 입에서 나가는 열매로 배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 좋은 열매가 나가면 좋은 것으로 배부를 것이고 나쁜 열매가 나가면 나쁜 것으로 배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21절)

여기에서 열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말은 곧 씨가 되기 때문에 그 씨가 열매를 맺는대로 배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는 말은 나쁜 말을 좋아하면 나쁜 것으로, 선한 말을 좋아하면 선한 것으로, 악한 말을 좋아하면 악한 것으로 채운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얘기입니까?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입을 잘 놀리면 단 것을 실컷 먹고 입술을 잘못 놀리면 쓴 것을 들이켜게 된다. 죽고 사는 것이 혀 끝에 달렸으니 혀를 잘 놀려야 잘 먹을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심는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심으면 반드시 거둔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 심는 종류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말을 심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심는 양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 안들이고, 힘 안쓰고, 큰 재주없이 잘될 수 있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입으로 좋은 씨를 많이 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심하라는 말은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심판하신다.

내가 한 말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는 말을 하나님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보다 내 말을 하나님께서 더 들으시고 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들을 생각을 않고 내가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심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우리는 온전해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온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실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천사가 호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말이 기도가 됩니다. 하늘에 바로 응답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큰 헌금해서 영광 돌리겠습니까 이것은 어쩌다가 몇 사람 있습니다. 큰 능력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어쩌다가 한 두 사람씩 나옵니다. 그런데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영광은 말로 하고 있습니다. 말로 찬송하고, 말로 감사하고,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요점은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을 많이 하는 자에게는 감사의 열매를, 불평을 많이 하는 자에게는 불평의 열매가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말은 원망이었습니다. 광야 40년동안 저들이 불평, 불만, 원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7-28)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할 때 "그래 원망하면서 거기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했으니 내가 죽여주마" 해서 20세 이상 된 장정들을 다 광야에서 쓰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말은 기도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잘 안되는 때가 있습니다. 위선적인 기도를 드리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을 만들어가지고 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때 말한 것은 제 진실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대로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보다 말하는 것의 응답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석에서나, 가정에서나, 교인들이 모일 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 자매가 유능하고 인물 좋은 남자와 교제하다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워낙 인물이 좋았기 때문에 주위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정관계가 복잡했습니다. 너무 속상해서 부인이 속으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려라' 그런데 어느날 밤 남편이 한강변 조용한 숲속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부인이 이제는 울면서 "일년내내 바람을 피워도 좋으니 살아만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말한대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매몰찬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못된 면이 있어도 막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말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쓰고 있는 말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세같이 위대한 사람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의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이 원망할 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 하고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백성들을 향해서 분노해서 반석을 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심은대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왜 말을 조심해야 되느냐?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어서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좋은 말 심어주면 좋은 것이 나에게 거두어지는데 친절한 말은 친절한 것으로, 선한 말은 선한 것으로 거두어집니다.

한 번은 어떤 시어머니가 밖에 볼 일이 있어서 외출하다가 놓고 온 것이 있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며느리의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직도 새파란데 언제 받아?" 빨리 가야 재산을 받는다는 말 아닙니까 시어머니가 창밖에서 섬짓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누렇게 생기면 좋겠습니까? 말조심 해야지요. 그래서 집을 사서 내보내려고 했다가 조그만한 월세방을 얻어서 얼마 후 내보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라고 했습니다.

부부가 살면서 언제나 말로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 그 말을 해야 합니다. "늙어가지고 뭐 간지럽게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런데 늙었다고 그런 말을 안하면 안됩니다. "여보, 당신은 나이가 들수록 고상해" 이런 말 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기 꺾는 말만 골라가지고 합니다. 좋은 말 하고 살기도 인생이 짧은데 나쁜 말 하면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말로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존경하는 말을 써야 합니다. 친절과, 온유와, 겸손과, 매사에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대문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이 문안에 들어오는 자는 모두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시오. 이 말을 하기 싫거든 입이나 다물고 계시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모든 직장생활, 가정생활에 있어서 성공과 행복의 모든 문제는 언어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데이라는 사람이 쓴 "세 황금문"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든지 세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첫째문은 참말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했다고 해서 자기도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할 때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말이라 할지라도 이 말이 꼭 필요한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이라도 필요없는 말은 안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친절한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이 온유한가, 그 말을 할 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했는가

필요한 말일지라도 친절하게 말할 때만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황금문을 지날 수 있다면 좋은씨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많이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말로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입니다. 인간 성장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 부모라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말의 상처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많이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처로 받고 있는 사람은 불효자식입니다. 그 상처까지도 '오, 하나님의 은혜로다.' 해야 합니다. 그 상처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아, 우리 주님의 채찍에 맞는 십자가의 상처를 더 많이 받으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구나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 하는 사람은 효자입니다. 가정에서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은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부는 말 한마디 상처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오년, 십년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때마다 칼내놓듯이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될 것은 나쁜 말을 썼다가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린시절 가출하여 타락의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교도소를 자기집 안방 드나들 듯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믿음 좋은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생활하는데 지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과자'라는 말만 들으면 머리가 섭니다.

어느날 밤에 부부가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언성이 좀 높아지면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인이 남편에게 "당신이 전과자라 그래"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이 말에 이성을 잃은 남편이 일어나더니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서 자기 아내를 찔러 죽였습니다. 자기 남편을 전과자로 만들었으니 전과자한테 죽은 것이죠. 자기 남편으로 만났을 때는 회개한 남편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과거에 대한 전과를 들추어내면 안됩니다. 분노하면 정신을 잃습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떻게 끼칩니까? 좋은 말을 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남에게 좋은 말로 심어야 됩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들어오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들어옵니다.



넷째, 내가 한 말은 내 인격을 이룹니다.

말은 자기 마음에 자기가 심고 있습니다. 말은 자기가 듣고 자기 속에서 먼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자기 생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듣는 것이 내 귀입니다.

남은 못알아들어도 자기는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말을 할 때는 내 마음이 선해지고,

악한 말을 할 때는 마음이 악해지고, 격한 말을 하면 스스로 격분하게 됩니다.

더러운 말을 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영향을 받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내 인격이 그 말로 추해집니다. 말이 마음에서 나오지만 또한

그 말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방향을

조정하듯이 말이 인격을 좌우하고 운명을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말이 가는대로 인격이 형성되고 인격이 가는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어떤 부부가 잘 살다가 3년만에 이혼했습니다. 그 남편이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집에만 들어오면 '이별의 부산항'으로부터 '목포의 눈물까지' 13곡을 불러야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별의 부산항'을 부르다가 결국 이혼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들려오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내 운명을 내 말로 이루고 있습니다. 말은 씨가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습니다.

무슨 열매를 맺어있는지 말씨대로 결정이 됩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대로 그 열매를 먹게 됩니다.

좋은 말 쓰기 좋아하면 좋은 열매를 먹게 됩니다. 나쁜 말 쓰기 좋아하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말 한마디'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한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

은혜스러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한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다.



우리는 모두 다 말로서 내 운명을 창조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좋은 말로

씨를 심어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자손 대대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대상을 마음 속에 그리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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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시편 66장 19절)

내가 목회한지 몇 달밖에 안되는 아주 궁색한 때였습니다.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으므로 조그만 방에서 나 혼자 살았습니다. 방 안에는 책상은 물론, 의자도 침대도 없어서 마룻바닥에서 그냥 먹고 자며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영적으로는 승리감에 충만하여 매일 몇십리 씩을 걸어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심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요 14 : 14). 또한 내가 하나님의 당당한 아들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의 자녀 (요 1 : 12)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나는 성경의 약속을 믿으며 내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제게는 책상도 없고, 의자도 없고, 침대도 없습니까? 더구나 자전거 하나 없이 매일 몇십리씩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녀야 합니까? 적어도 조그만 책상이나 앉을 만한 의자, 심방할 때 타고 다닐 자전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주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물건들이 속히 내게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응답도 없이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 석 달, 넉 달, 다섯 달, 무려 여섯 달이 지나갔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던 날, 나는 정말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먹지못해 배도 고프고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하염없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여러 달 전부터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놓고 기도했는데, 아직 하나도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가난한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주님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자신도 체험하지 못한 믿음이나 기도 응답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굶어 죽을 지경인데 저들에게 어떻게 인생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지금 너무나 낙심되어서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저의 이번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시간이 지나면 다 응답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래 전에 드린 기도가 언제,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지금 당장 분명히 확신할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만일 제가 죽고 난 다음에 응답하시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왕 응답하시려면 지금 저의 형편을 보시고 제발 좀 빨리 응답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한참 울며 신세 타령 반, 기도 반 쏟아놓고 나니 마음이 아주 평안해 지고 안정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성령의 음성이 마음 속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영혼의 깊은 곳에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성령께서 나의 영혼을 진동시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오래 전에 너의 기도를 들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불쑥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 책상과 의자, 자전거는 다 어디 있습니까? "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비롯한 내 자녀들이 온갖 부탁과 요구를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응답하기에 합당치 않은 막연한 말로 달라고만 하는구나. 너도 마찬가지다. 너는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의 종류가 수십 종이나 되는 것을 모르느냐? 네가 언제 내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에 대한 분명한 종류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있느냐? 단지 막연하게 달라고만 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책망하신 이 말씀은 나의 일생 일대에 놀라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것은 신학교에 다닐 때,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큰 실수를 했지만,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진정 분명한 말로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때 성령께서 나에게 히브리서 11장을 펴 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는 서두부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책상을 놓고 기도할 때 종류를 분명히 했습니다. 책상 종류는 내가 좋아하는 필리핀제 마호가니 책상이라야 하며, 크기는 어느 정도라고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의자는 철로 테를 두른 것으로, 아래에 작은 바퀴가 달린 가장 좋은 것이라야 책상 주위를 밀고 다닐 수 있어 사용하기에 편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정말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제, 일본제, 대만제, 독일제 등등, 자전거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주 튼튼한 자전거가 필요했기에 그 당시 자전거의 품질 중 최고인 미국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기어가 있어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튼튼한 미국제 자전거를 갖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대로 착오 없이 응답하시도록 분명한 말들로 항목들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믿음이 뱃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떨렸습니다. 그날 밤,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깊이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4시 30분에 일어났을 때에는 갑자기 가슴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 전날 저녁에는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믿음이 있었는데, 자고 나니 믿음은 날개를 치고 날아가 버려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의 마음속에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믿음을 간직한다는 것과는 정말 별개의 문제군요.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반사로 겪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집회에서 아주 은혜로운 강사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믿음이 강해져서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고 나면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믿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그날 새벽,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적절한 성경구절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눈길이 로마서 4장 17절에서 멈추었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나는 이 말씀에 사로잡혔고, 이 말씀은 내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 나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를 수 있다. 벌써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믿음을 간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이 성경 구절에서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 둘씩 모여 기도하고 있는 천막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몇 장 부른 후에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로마서 4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필리핀제 마호가니로 만든 아주 좋은 책상과 끝에 작은 바퀴가 달리고 쇠로 테를 두른 아름다운 의자와 또 기어가 달린 미제 자전거를 제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다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나의 형편이 어떤지를 다 잘 알고 있는데 너무 엄청난 말을 하니까 놀란 것입니다. 내가 계속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자랑하자, 우리 성도들은 혹시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귀를 의심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음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데 세 명의 청년들이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따라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께서 자랑하신 물건들을 보고 싶습니다. 좀 보여 주세요." 나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나는 믿음의 고백을 했을 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천막 교회는 빈민촌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새벽 예배 때 한 이야기가 성도들에게 굉장한 간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성도들이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면 그로써 끝장입니다. 누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들으려고 다시 교회에 오겠습니까? 나는 진퇴양난에 빠져 속으로 잠시 묵도했습니다.

"주여, 처음부터 이번 일은 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순전히 당신 탓입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지 순종하여 이미 응답받은 것처럼 말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항상 도와 주셨으니 제발 지금도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성령께서 지혜로운 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모두 내 방으로 가봅시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면서 자전거랑 의자랑 책상을 찾느라 두리번거렸습니다. "뭐 그렇게 둘러볼 것 없어요. 제가 나중에 보여 드리지요."

나는 박 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목사로 훌륭하게 시무하고 있습니다.)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소. 만일 박 군이 내 질문에 대답하면 여러분에게 그 물건들을 보여주리다. 박 군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얼마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었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음, 아홉달이요." "그러면 아홉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야 자라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도 당신을 보지 못 했잖소?" "어머니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거지요." "맞아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여도 여러분들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분명히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요. 저도 어제 저녁 이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제 마음 속에 아까 말한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하나하나 그려가며 기도했어요. 그것들은 지금 눈에는 안 보여도 믿음으로 여기 내 마음 속에 자라고 있어요. 이제 때가 되면 사람들이 보게 될 바로 그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가 내 속에 들어 있어요."

이렇게 말을 하자, 그들은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임신한 남자는 처음 본다구요. 그들은 방에서 뛰쳐나가자마자, 온 마을에 남자 전도사가 의자, 책상, 자전거를 임신했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나는 이일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 모여서 비웃을까봐 밖에 나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개구쟁이 꼬마들은 주일이면 내게 와서 배를 만지며 놀려댔습니다. "전도사님, 어디 좀 봐요. 얼마나 더 커졌는지요."

나는 온 동네에 웃음거리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지극히 담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한 물건들이 믿음으로 내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해서 낳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여 기도한 것이 응답되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원리를 되새기며 계속 기도한 물건들을 주실 주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줄로 믿고 감사하고 입술로 줄기차게 시인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자, 내가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응답하셨습니다. 기도한 내용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내가 원한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가서 보니, 책상은 마호가니로 만든 것이었고, 의자는 일본 미쯔비시에서 만든 것으로 바퀴가 달려서 앉은 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 좀 쓰던 것이긴 했지만 기어가 달려 있는 튼튼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주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매우 막연한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을 깨달은 이후로는 지금까지 한번도 막연한 말로 기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막연한 기도에 응답하시면,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분명하고 특별하게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믿음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그대로 응답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즉각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직접 물어 보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는 그의 분명한 뜻을 듣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바디매오는 그 즉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가 눈을 치료해 달라고 특별히 간청하기 전에는 치료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자신의 분명한 소원을 믿음으로 말했을 때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그대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연히 중언부언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정한 대상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신유를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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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사도행전 8장 7절)

몇 년 전에 유럽에서 집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집회 때, 1천 5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제 앞에 한 부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그 부인의 다리가 심하게 뒤틀려 있어 정말 보기에도 안쓰러웠습니다. 나는 걱정스러워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왜 하필이면 이 부인을 제 앞에 두셨습니까? 제가 그 부인을 쳐다보니 너무 상태가 심하여 고침받을 것 같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설교하는 동안 그 부인을 보지 않으려고 내내 애썼습니다. 다른 쪽을 보고 설교하면서 그 부인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녀의 모습만 보면 나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듯 간담이 서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말씀하셨습니다. "걸어 내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워라." 나는 아연 실색하여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이시여, 정말 저보고 내려가 일으켜 세우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너무 뒤틀려서 절망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능하시겠지만, 제가 어떻게 그녀를 일으킬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못 해요. 저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단호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가서 일으켜 세우라." "오, 안됩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 나는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휠체어에 앉은 부인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성령께서 보여주신 치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처음에 소경 여인이 치료받았습니다. 내가 그녀를 향해 나으라고 소리치자, 그녀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눈을 뜨게 되자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다음 강당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받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병에서 고침받게 될지어다. 라고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집요하게 명하셨습니다. "내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라." 나는 또 다시 "아버지, 그녀의 다리는 너무나 뒤틀려 있습니다. 저는 겁이 납니다." 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갈 무렵 결국 나는 성령의 음성에 못 견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회를 맡은 목사님이 사람들을 다 일어나게 하여 폐회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그 부인에게로 살짝 내려가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도록 작은 소리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부인, 당신이 원한다면 그 의자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내가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소리치며 박수를 쳤습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부인이 휠체어에서 걸어 나와 강단 주위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무도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아예 처음부터 그 부인을 일으켜 세웠더라면, 그날 밤 예배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더욱 강하게 임했을 터인데, 두려워서 감히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신유 기도를 하는 것이 믿음의 은사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유의 은사로 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나 혼자서는 어떤 은사도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역사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대표적인 아홉 가지 은사를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나를 통해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 이십니다. 나는 오직 성령을 모시고 살며 성령께 전적으로 복종하고 성령을 의지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은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막 16:17, 18)는 말씀대로 여러분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갈 때 이런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법칙을 따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믿음의 통로를 따라 끊임없는 표적이 여러분의 일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내주하시는 순간부터 성령의 모든 자원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믿음과 고백이 이루는 기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새벽까지 설교 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는데,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국립 서울대학병원에서 건 전화였습니다. "조목사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 "조목사님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를 낸 운전사가 자동차 뒷좌석에 태운 채 밤새도록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택시에 치어 죽었을 경우 사고를 낸 운전사가 그 유족에게 100만원 정도만 배상하면 대개 돈 문제는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인 사람이 다치기만 하고 살아 있으면 운전사가 모든 치료비를 물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운전사가 사고를 냈을 때, 목격자가 없으면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태우고 달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 편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사고를 당한 그 성도는 사고가 나기 직전에 아름다운 모자와 몇가지 다른 물건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샀습니다. 그는 그 선물을 아내에게 빨리 주고 싶어서 들뜬 마음으로 신호등도 안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택시에 치인 것입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택시 운전사는 그 성도를 차에 싣고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밤새도록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끝내 죽지 않았고 마침내 이 택시는 경찰의 눈에 띄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환자가 병원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사고의 충격이 심해서 그 성도는 내장을 크게 다친 상태였습니다. 독이 든 피가 벌써 그의 온 몸에 쫙 퍼져 있었습니다. 의사가 나를 알아보고 불렀습니다.

"조목사님, 그 사람을 꼭 수술할 필요가 있을까요? 의학적으로는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패혈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서 수술하십시오. 저는 크리스마스 예배 설교가 끝나는 대로 곧 다시 오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국립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그 성도는 계속 혼수 상태였고 의사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다시 말했습니다. "목사님, 조금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위를 수술하려고 절개해 보니 세 군데나 손상되어 있고, 위 속에는 배설물과 찌꺼기가 꽉 차 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그런 줄 아십시오."

"그래요? 하여튼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전혀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5분만 시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5분간만 그를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기도 중에 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얼른 보니, 그 사람이 의식이 돌아왔는지 눈을 떴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죽겠습니다." 그가 울부짖었습니다.

기도대로 최소한 5분의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형제님,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면 믿음을 갖지 못하므로 형제님은 죽습니다. 형제님은 이 고통을 이기고 살아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형제님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이 3차원적인 세상의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오직 한 길은 형제님의 믿음입니다. 형제님은 믿음으로 다시 낫는다는 비전과 꿈을 가져야 살 수 있습니다. 온몸이 다 치료된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아주 건강한 젊은 사람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보세요. 그는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출근 인사를 합니다. 그는 젊음과 건강미가 넘쳐 흐릅니다. 그는 활기에 차서 일을 성공적으로 잘 처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찬탄합니다. 그는 저녁이 되어 일을 끝내고 아내에게 줄 멋진 선물을 샀습니다. 아내는 그가 집에 돌아와 식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아내는 현관까지 뛰어나와 포옹하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집에서 조용하고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형제님, 제가 지금 얘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형제님의 마음 속에 그 모습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은 바로 나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형제님, 제발 당신이 죽는 그림을 마음에 그리지 마세요. 죽은 시체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지금 생각한 그 건강하고 멋진 젊은이만 꿈꾸세요. 저는 기도할 터이니 형제님은 그냥 머릿속에 그림을 계속 그려보십시오. 기도는 제게 맡기시고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예, 목사님. 저의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저는 그 건강한 젊은이가 바로 저라고 믿겠습니다. 저는 그 꿈과 비전을 저의 현실로 삼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런 저의 모습이 지금 눈에 보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킬킬대며 나를 비웃었습니다. 나를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는 심각했습니다. 나는 성령의 4차원의 영적 법칙을 알았고, 그 성도는 성령의 언어를 말한 것입니다. 외국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통역 없이 직접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태로 죽어가던 사람이 성령의 깊은 언어를 배워 성령과 직접 대화한 것입니다.

나는 그 성도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 성도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이시여, 당신은 오늘날 온 세상의 치료자이십니다. 이제 이 형제는 성령의 언어를 말합니다. 이 형제는 자신이 완전히 치료받고 회복된 비전과 꿈을 가졌습니다. 형제의 육신에 임하시고 주관하셔서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료의 능력으로 가득하여 깨끗이 나을지어다!"

이 때 갑자기 간호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왜 이리 덥지? 온도가 너무 높은데." 그러나 실제 바깥 날씨는 매우 추웠습니다. 방이 더운 까닭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열기는 이 성도를 치료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불 곁에 있는 것처럼 덥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들의 귀는 열기로 인해 붉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의 힘이 그 방안에 얼마나 강하게 임했던지 침대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성도와 내가 믿음을 풀어놓자,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치료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 성도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성도는 일주일만에 다 나아서 병원을 퇴원했습니다. 그는 현재 건강한 몸으로 화학 약품 사업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아침마다 대성전 2층 발코니에 앉아 예배드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카네기성공전략-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라

    [다이렉트셀링 99년 7월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며 단한번의 경기로 1000만 달러를 받는 등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내 승리의 반은 주먹이 아닌 말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의 무서운 힘이다.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는 신이 인간에게 주신 능력 중에서 가장 놀라운 능력이다. 내가 선택한 직장, 가정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시시하게 선택하면 시시한 직장·가정이 되고, 성스럽게 선택하면 성스러운 직장·가정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말을 하고, 시시하게 선택을 하면서 그들의 인생을 되는대로 그럭저럭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힘들다’ ‘때려치워야겠다’ ‘미치겠다’ ‘적성에 안 맞는다’고 말하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을 시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물론, 그들의 남은 인생마저도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 신나고, 가치 있고, 보람있게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시시하게 살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 내 자신은 어떻게 말하고,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생각을 해보라. 현재, 무슨 말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그리고 지금부터 부정적인 말은 사전에서 지워버려라. 신나고 성스러운 말만을 선택해서 말하라. ‘즐겁다’ ‘신난다’ ‘보람 있다’ ‘재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신나게, 성스럽게 선택을 하면 우리의 인생은 신나고 성스럽게 되는 것이다.

    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놀라운 힘이 있다.
     

      각인력이 있다. 어느 대뇌학자는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매일 5분씩 3번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부에 위대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발휘되지 않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말을 하다 보니 그는 가슴속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자신감, 열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견인력이 있다. 말은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다. 말하면 뇌에 박히고, 뇌는 척추를 지배하고, 척추는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뇌에 전달되어 내 행동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할 수 있게 되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행일치라고 한다. 그러므로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

      성취력이 있다. 말은 견인력을 넘어 성취력이 있다. 젊은 청년이 노만 빈센트 필 박사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박사님 어떻게 하면 세일즈를 잘 할 수 있을까요?” 필 박사는 조그만 카드를 꺼내어서 그 청년에게 주면서 적게 했다. “나는 훌륭한 세일즈맨이다. 나는 세일즈 전문가다.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프로다. 나는 내가 만나는 고객을 나의 친구로 만든다. 나는 즉시, 행동을 한다” 필 박사는 청년에게 그 카드를 갖고 다니면서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 반복해서 외우라고 했다. 청년은 되풀이하여 읽었다. 고객을 방문하기 전에는 몇 번씩 되풀이 해서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이렇게 반복해서 하는 동안에 청년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말이 그 청년을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가수들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서 수천번의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수들은 그들이 부른 노래와 같이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쨍!하고 볕들 날, 돌아온다네’를 부른 송대관은 그 노래로 인하여 쨍!하고 빛을 보았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처럼 몹쓸 병으로 쓸쓸하게 돌아갔고,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은 노래 가사처럼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죠 프레이져와의 15회전 권투 경기에서 1000만 달러, 버그너와의 경기에서 250만 달러 등,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유명한 권투 선수였다. 그는 권투 경기에 앞서 꼭 명언을 남기곤 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소련 전차처럼 쳐들어갔다 프랑스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오겠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같이 하겠다” 등등. 수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받은 그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승리의 반은 주먹이었고, 반을 말에 있었다”

      이같이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한 하였다. 말에는 각인력, 견인력, 성취력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적극적, 긍정적, 소망적, 미래적인 말만 하라.

    부정적인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마라

     데일 카네기는 “성공한 사람들은 세가지 말 곧, ‘없다’ ‘잃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들은 농담이라도 하지 마라.

    ‘너는 그것을 못해’ ‘사람이 되기는 틀렸어’ ‘그런 짓을 하면 못 써’ ‘보나마나 실패할거다’ ‘기회가 없었던 거야’ ‘모두가 네 잘못이다’ ‘그건 절대로 안돼’ ‘쓸데없는 짓 하지마’ ‘이 어리석은 녀석아’ 등등.

    어떤 점쟁이가 “너는 시집가서 잘 살기는 다 틀렸어”라고 말했는데, 이 말 때문에 그 여자는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말이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새겨져서 계속하여 반복됐기 때문이다. 반복은 확실한 논법이다. 실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또 스스로 말하는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고 마음 속에서 창조시킨다.

    마음의 양동이에 긍정의 생각을 집어넣어라

     자! 이제부터는 당신의 말을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말로 바꾸어라. 그러면 당신은 성공을 위하여 탈바꿈을 하게 된다. 잠시 당신의 마음이 커다란 양동이라고 시각화해 보라. 이 양동이 속에는 당신의 과거에 축적해 온 온갖 종류의 경험과 정보와 아이디어와 느낌들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당신의 양동이 속에 담겨진 것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당신은 ‘이런 것을 하면 안돼’ ‘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왔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들어왔고, 당신의 마음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할 때까지 시키는 대로만 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마침내, 당신의 양동이는 당신의 열정을 식히고 호기심의 불꽃을 꺼뜨리고 솔선하려는 의지를 가라앉히는 차디찬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제 당신의 마음에 의도적으로 긍정의 생각을 집어넣어라. 긍정으로 가득 찬 따스한 조약돌을 집어서 양동이 속에 던져라. 돌이 양동이 속에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차디찬 물이 넘쳐 흐른다. 조약돌을 던질 때마다 더 많은 물이 빠져나가고 결국은 미지근하게 변한 약간의 물이 남게 된다.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의 마음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서서히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당신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태도는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변화를 반영하게 된다. 부정적이었던 당신의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체된 것이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당신이 원하는 성과를 결정하라. 세일즈 목표도 좋고 건강에 관한 성과도 좋다.

    둘째, 당신이 가진 장점과 태도를 규정하라. 열정, 끈기, 따뜻한 마음, 긍정적인 태도 등 말이다.

    셋째,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 서술하라. ‘나는 열정적으로 행동을 하겠다’, ‘항상 긍정적으로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겠다’ 등등. 마지막으로 이러한 당신의 장점과 태도가 야망을 성취하는데 중요한 이유를 상세히 기술하라. 열정이 없이 성취된 위대한 일은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내 자신을 좋아하며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나는 최고의 세일즈맨이다’

    긍정적인 말은 나를 삽입해서 현재 시제로 해야 한다. 개인적 의지가 들어가고 미래에 성취된 느낌을 미리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보험회사를 설립한 클레멘톤 스톤은 집이 가난해서 12살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매일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유하다”고 외쳤다. 그는 그의 말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하게 일생을 살았다.

    에밀쿠레 박사는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나는 건강하다. 나는 매일 매일 조금씩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환자 중 50%의 사람들은 박사의 말을 따라서 매일 매일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사해 보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박사의 말을 따른 환자들은 박사의 말을 무시한 환자들에 비해서 40% 이상의 빠른 회복을 보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힘차게 외친다.

    “오늘은 신께서 만드신 날이다. 내가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라” 세수를 하면서 거울 앞에 써 붙인 문구를 읽는다. “나는 세계 최고의 성공 동기 부여가이다” 차를 몰고 가면서도 말을 한다. “나는 최고다. 나는 프로다. 나는 세계 최고의 성공 동기 부여가이다” 계속해서 말을 한다. 내가 말을 하면서 이미 된 것을 느낀다. 기분을 맛보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라. 당신의 비전을 향해서 열정적으로 행동하며 나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긍정적인 생각            

 

여러분 ~~~~~~~~~~~~~~~~~~~~`

 

반 컵의 물을 보고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아직 반이나 남았네" 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고,  "반 잔 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생각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난파된 두 사람이 조그마한 뗏목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조금밖에 남지 않은 물통의 물을 보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한 사람 중 누가 살아 남겠습니까?  당연히 긍정적인 생각을 한 사람은 살아 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에서 저자 스티븐 코비는 첫 번째 습관으로 '주도적이 되라(Be Proactive)' 를 들었습니다.

   항상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실패를 책임 전가시키는 사람들은 항상 인생을 어두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념을 세우고 자신의 신념대로 자기 인생의 환경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적극적 사고 방식입니다.

  그것을 한 단계 더 기독교 신앙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면, 어쨌든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직 최고의 것은 오지 않았다."라고 늘 되뇌었던 청교도들처럼,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의 결론은 승리임을 믿고 어려워도 힘차게 사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요셉은 인생의 억울함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몇 번씩 체험한 사람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충성을 다해 섬긴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까지 가게 된 정말 억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기에 대해서 자신을 상황의 피해자로 여기며 원망하고 욕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초월한 그의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있었고, 결국 그는 세계 최강대국 이집트의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 한국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개인의 능력으로 비교해 볼 때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총체적 피해 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래서 안 된다." , "현실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가니까 나 혼자 성실하게 살아 바야 소용없다" , "좋은 부모 만나지 못한 사람만 억울하다."란 말들을 너무 자주 듣습니다. 모든 것을 환경과 부모 탓, 나라 탓으로 돌리지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들과 늘 비교하면서 스스로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좀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인 언론인 '기시 도시로'가 "내가 한국을 택한 이유'란 글을 썼습니다. 일본 NHK 방송의 서울 지국장을 지냈던 그는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어 있었는데, 심사숙고 끝에 NHK를 퇴직하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독립해 서울에서 활동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40대 중반의 이 엘리트 일본인이 몸담았던 조직을 버리고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것은 '한국다운 것' 에 대한 애착과 '일본다운 것' 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잘 살고 있지만 생기가 없고 어두운 일본인들의 얼굴에 비해, 고난의 역사를 걸어 왔으면서도 앞으로의 미래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희망과 패기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은 서양에서 배운 기초 기술을 개량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 그것을 팔아 잘살게 되긴 했지만, 富를 쓰는 목적과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이외의 타인을 위해 공헌한다는 비전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한국인의 장점으로서 남북 통일이라는 국가적 목표의 존재, 기업의 기민한 의사 결정 시스템, 디자인의 힘, 개인주의, 낙관적인 민족성 등을 들었습니다.

   국제 사회 전체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온 기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일본. 그 일본의 최고 언론인이 보기에 한국은 뜻밖에 '괜찮은 나라' 였다는 것입니다.

  교육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기 유학 운운하면서 무작정 서구 교육을 따르자고 하지만, 미국의 중고등 학생들은 예의를 모르고 교내 폭력이 심하고 학구열이 떨어지니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배우자는 움직임들이 상당수의 미국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종합 대학 시스템은 세계 수준으로 탁월하지만, 배움을 중시하는 한국의 유교적 교육 시스템에도 대단한 장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 기술 분야에서도, 얼마 전 유럽의 한 유력한 비즈니스 전문지는 유럽의 정부들이 반도체 기술 같은 첨단 과학 분야 기업에 아시아의 새 나라 즉 한국, 싱가포르, 대만처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해서 유럽이 이 분야에서 낙후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기에게도 장점이 많은데, 스스로 늘 환경의 피해자로 자처하던 피해 의식에 젖어 사는 국가나 개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아관(Self-image)이 분명하고, 자존감(Self-esteem)이 건강한 사람이 세상을 건강하게 보고 남을 잘 배려해 줄 수 있습니다.

   환경이 힘들수록 생각을 건강하게 하지 않으면, 정말 '슬픈'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같은 고난을 당해도 그 책임을 환경에 돌리면 그는 한 많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미래의 꿈을 버리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면 한없는 축복의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긍정적인 사람, 주도적인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삽시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키우려면 부모부터 모범을

아이들 중에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아이들이 있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우울한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긍정적이고 행복한 성격을 가졌는지 혹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을 가졌는지가 단순히 그 때 그 때의 기분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소니아 류보머스키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먼저 성격검사를 통해 학생들의 행복지수를 산출하였다. 그 다음 단어퍼즐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반으로 나눠 한 그룹에게는 다른 그룹의 학생들이 더 좋은 점수를 얻었다  거짓정보를 주었다. 그런 뒤 모든 학생들에게 대학원 입학시험에 해당하는 시험을 보도록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성격검사의 행복지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던 학생들이 시험성적도 낮았다고 한다. 류보머스키는 비관적인 학생들이 자신들이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읽는 속도도 느려지고 수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는 유전적인 영향이 50%를 차지한다고 한다. 즉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경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10%는 사는 동안의 즐겁거나 힘든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나머지 40%는 후천적으로 학습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난 월드컵을 통해 아이들의 신명난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들이 일과 공부에도 신명나게 몰두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낙천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부모들부터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겠다.

 

한솔교육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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