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마음의 연단. 17:1~7


우리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급변하는 예측치 못할 인간의 마음을 빗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이나 여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 상대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시시각각 마음이 변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루에도 조석으로 심하면 매 순간마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3절에서 도가니와 풀무가 금과 은에 포함된 고르지 못한 불순물을 제거하듯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 그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얼굴이 제 각각이듯이

각자의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정금같이 깨끗하게 만들어 놓길 원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쓰임 받는 성도는 연단을 통해서 겸손과 순종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곁길로 걸어가도 기다리기도 하시고 참으시기기도 하시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여도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은 연단을 통해서 철저하게 부서뜨리고 스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으로 연단하신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이 영혼은 인간정신의 모든 기능과 아울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죄의 종으로 팔려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기능이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벽으로 인해서 영원한 죄인으로 땀을 흘리며 살고 내세에서도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선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였다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죄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뜻을 알기보다는 죄를 짖고자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의 눈도 열린 상태가 되였기에 유혹을 받는 그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훈련하시고 연단을 하십니다.

때문에 생활가운데서 때때로 마음의 갈등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전이라면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자그마한 일에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갈등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말씀으로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작은 것에도 선과악의

대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분명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 입니다.

세상적인 경우 선이 악으로부터 점령을 당하는 경우가 잇지만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어서 선을 지원하기 때문에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도 악에 사로잡혀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범하면서도 어진 양 인양 위장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심장을 찌를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씀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16:7에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 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라고 하는가하면 51:10 에서 하나님42-2

께서 자신의속에 정한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영을 새롭게 하여주시길 위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속에서

죄를 잉태하고자하는 악을 이길 수 있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책망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2.환경과 인간을 통해 연단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한 훈계나 권고에 그치지 않고 환경과

인간을 통해서도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상치 못한 불행한 사건들을 자신과 가장 아끼는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게 주기도하고,

얽혀오는 삶의 시련들이나 가시와 같은 주변의 인물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가시가 되여 나를 훼방하고 불평하는가 하면,

하는 일들마다 잘 될것 같은데 하고보면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첩첩산중이요 오리무중의

연단을 만나기도 합니다.

구약의 족장시대의 야곱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출생의 과정에서도 형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먼저 태여 나고자 했는가하면 그는 심한 경쟁의식의

소유자인 동시에 교활하고 간교하여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 권을 빼앗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험한 인생도피의 여정과 딸 디나의 강간사건, 장인 라반에게 이용당하며 속고속이는

삶의 여정 속에서 그는 결국 애굽의 바로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 이니 이다 나의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조상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 나이다하고 창47:9 에서 지나온 험한 노정의

한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한 백성을 자신의 백성답게 성장시키기 위해 환경과 인간을 통해 깨뜨리고

고통을 주어 그의 마음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종국에는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겸손한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윗역시 사울을 통해 수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았음에도 왕이 된 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와의간통

사실을 숨기려다 하나님의 호된 질책과, 아비의 죄로 해서 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처첩이 백주에

강간을 당하는 연단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에 의해 또는 환경과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뜻을 잘 분별하는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5: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연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대표적인인물 욥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고자하는 사단의 괴계에 의해 철저하게 깨여지는

연단을 받으면서도 인내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신 하나님의 축복은 지난날보다 갑절로

큰 것으로 주시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대원 여러분!! 금을 연단할 때 그것이 순금이 되였다는 것을 아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금에 얼굴을 비춰서 가장 정확하게비취는 것이 순도가 높은 결정의 척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엔 지금 어떤 모습이 비추이고 있습니까?

아무쪼록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그분의 모든 방법을 통해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축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41. 성도의 소망. 벧 전1:3~7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살아야할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 나의 삶이 조금은 고달프고 역경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내일은 나아지리라는 , 바로

잘되리라는 소망을 갖을수 있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일을 바라보고 살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내일에 대한 소망이란 가진 자나 적게 가진 자나 빈 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차원에서 볼 때 명예나 지위 부와 권세 학식과 같은 세상적인 인간의 욕망이나

욕심은 모든 것이 헛된 것 이라고 성경의 전1:2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참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39:7다윗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역시 본문의 3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 소망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의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1.이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명예나 지위 부와 권세를 통해서만이 행복해지기를 추구하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를 원하며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가하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와 지위에 군림해있던 사람도 어느 날 필부만도 못한 자리에서 수많은 지탄과

원망을 듣는가 하면 평생을 먹고 써도 다 쓸 수 없는 부를 누리면서도 더 만이 갖기를 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건강도 재산도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뜻하지 않던 사고로 가족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해여 날수 없는 재앙으로 해서 아무리 고뇌한들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주저 않는 것을 많이도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찌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이미 얻었는데 눈에 보이는 소망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을 기다릴 줄 알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 것에 소망을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주어진 세월이 다 마쳐질 때쯤에 가서야 자신의 소망이 헛된 것이 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이 인생의 삶에 대한 용기와 가치를 불어넣어준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무가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애서 추구하는 탐욕적인 것들은 그자체가 헛된 것 이므로 이 헛된 것을 바라는 소망 또한

헛된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모든 욕망들이 해가 지는 시점에 가서보면 가지고

갈 것 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생의 온갖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솔로몬왕은 전12:1에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이 늙어 세상 것에 흥미를 잃기 전에 젊었을 때 하나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것만 추구하다보면 인생의 삶은 조금 윤택해질지 몰라도 영혼은 피 패해 지고

천국의 소망은 점점 멀어져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2.성도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 입니다.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41-2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력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채워주시는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세뿐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평강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보십시오. 세상이 달라 보이고, 보이는 것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고, 늘 평강과 기쁨이 삶을 채워지게 됩니다

 내세의 약속뿐 아니라 현세의 참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욥의 삶을 보십시오. 소유한 것들이 풍족했던 그의 삶에 사단의역사로해서 모든 것을 일어버리고

몸까지도 병들었음에도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둔신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찬 고백을

통해서 지난날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16:11에서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복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왔다가는 나그네 길에 불과한 것 입니다.

짧은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해서 영원한천국의 소망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성도의 소망은 산 소망이다.

사람이 병이 들면 약으로 병을 고치기도 하지만 환자가 나는 나을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투병생활을 함으로 해서 병을 물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 이란 말이있듯이 만일 환자가 병으로 인해 자포 자기한다면 그 환자에게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고 할 찌라도 그의 병은 쉽게 치료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소망은 삶을 지탱케 하고 촉진케 해주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의 산 소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소망이란 결코 죽거나 희미해지거나 위태로워지는 일이 없이 우리에게 언제나 신선하고 맑게

울려나는 평화와 기쁨과 안위를 가져다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늘의 유업은 첫째썩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 중 썩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유업만은 썩지 않고 성도의 영원한 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늘의 유업은 더러워 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더러워지며 인간의 사고까지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하늘의 유업은 쇠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세월이 흐르면 모두가 쇠하여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아무리 호화찬란한 집도 견고한 성벽도 우리의 인생까지도 시간이 흐르면 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원 여러분!! 이세상의 소망은 결국엔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지는 것들뿐인 것입니다.

다만 하늘의 유업만이 결코 썩거나 더러워지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산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늘의 유업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40. 복의근원이 되려면 12:1~5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심과 탐욕이 내제 되여 있어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고, 더 잘난 척 하고픈 것들을 마음 깊은 곳에 깔아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이런 잠재되어 있는 욕심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 둘 현실로 나타나서

그것들로 해서 자신을 꼼짝할 수 없이 얽매이게 하는 올무가 되기도 하고, 길지 않은 나그네 여정의 길에

돌부리가 되어 넘어지게도 하고, 넘어져 피가 나고 피부가 상하고, 뼈가 다치고 망신창이가 되기도

하는가 하면 가시로 박혀 와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게도 하고, 지금까지 공 드려 쌓아올린 공든 탑들이

와르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버리고 다시는 재개도할 수 없는 경우를 맞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버리자.

오늘 본문 1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아낌없이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5절에서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미완의 인간이기에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욕심들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가솔과 재산들을 가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아낌없이 버리지 못하는 소유욕으로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을 꽁꽁 묶는 올무가 되는 것을

10~20>>>>> 에서봅니다.

자신의 시변이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느껴지자 아내를 동생으로 속여 진상하고 자신의 살길만을

찾고자하는 인간의 내제 되여 있는 그릇된 탐욕이 거리낌 없이 표출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도 더 이상의 가시가 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이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고향땅을 떠나는 순종의 믿음을 보셨고 인정하셨기에 아내를 영영 잃어버리는 일은 막으신 것입니다.

17~20>>>

아낌없이 버려야 할 것들이 우리에겐 너무 많이 있는데, 특히 믿음 안에서 살아야하는 우리들에게 입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실제 생활은 그에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선택된 믿음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에 걸 맞는 행위가 뒤따라야하는데 우리의 말과 행위가 믿음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 되어 진다면 우리의 삶의 질이 변화될 것이고 불신자들이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하고, 그리하면 나 자신이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을

버릴 때 나 자신이 원망을 받지 않을 것이고, 시기 질투하지 않을 때 나또한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고, 혈기와 분함을 버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릇된 고정관염과 사고방식, 아집과 교만, 탐욕과 욕심, 거짓과 술수, 방종과 무관심 >>>>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찾아내서 과감히 버려야 할 것 들이 없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라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과감히 버림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신 성경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를 보면 사십여 년 동안 다져놓은 왕궁의 왕자의 자리를 버림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허나, 모세 역시 가시가 없었던게 아닙니다. 모세에게 혈기가 가시가 되어 하나님은 그를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외롭게 살게 하시고 훈련시켜서 80고령의 노구에 혈기가 꺽기자 그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크고 작은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각자 마음 판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깊이 쌓아놓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 인양

착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믿음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님이 원치 않는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아는

믿음위에 바로 서도록 노력 해야겠습니다.


2.복의 근원이 되려면 하나님만 보고 따르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많은 것들이 바라보기를 원하고 만져보기를 원하고 가져보기를

원하면서 유혹의 손길을 내밉니다.

허나 수렁에 잘못 발을 디뎌 빠지면 나오려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수렁이 보이면 돌아가는 것이 지혜이고, 상책입니다.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것들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탐욕의 굴레들은 맛을 보면 더 먹고 싶고,

더 갖고 싶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이들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나와 여러분은 좌우 곁눈질 하지 말고, 내 삶의 길의 참 인도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욕된 것들은 멀리 피하고 돌아보지 않는 삶이 요구됩니다.

135~9절에서 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아브라함의 지혜를 봅니다.

정해진 목초지에 아브라함과 조카 롯과 가나안사람 브리스사람 등이 모여서 살게 되니까 자연히

분쟁과 시기, 질투가 가시로 또는 올무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러한 분쟁이 생기기전에 분쟁을 피하고 서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길로

가야겠다는 과감한 행동을 봅니다. 같은 사물 이라고 할지라도 바라보는 눈에 따라서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13:10-13>>>>

롯의 눈에 비친 요단의 들은 넓고 푸른 평지이며 물이 넉넉하니 유목민인 그들의 생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듯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이라고 어찌 넓은 요단평야가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허나 바로눈앞의 탐스러움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는 있었습니다.

롯은 그곳을 택하고 소돔까지 지경을 넓혀 갔지만 소돔사람은 큰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요?,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아십니까?...>>>>>

유혹과 타락이 편만하고 쾌락의 길만을 추구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진노함에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실과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축복 이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눈으로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실과였습니다

탐욕의 눈으로 본 결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최고의 걸 작품인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삶이 결코 쉽고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배금 만능주의 사상이 가득한 이 시대는 너나없이 돈이면 뭐든지 다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 해치기도하고 때론 생명까지도 우습게 알고 위해를 가하며 

 돈을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사고와 범죄의소리가 매일같이 우리의 귀를 따갑게 하고 있습니다...>>>

한탕주의의 욕심은 복권을 사기위해 밤12시가 넘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는가하면 직장도 그만두고

3천만원의 빛을 얻어 전국을 돌며 복권을사 맞춰 보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결과는 뜬구름만 잡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배당금과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피라미드와 유사한 떳다방 사업장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돈방석에 앉을 것만 같던 꿈은 꿈으로 끝나고 엄청난 빛만 않고 통한의 눈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해일 수 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본분은 믿음의 동역자 들과 힘을 합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의 길을 걸을 때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한 축복의 약속을 우리 모두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귀여운펜더 김병기


39.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자. 18:13~26


한 국가에는 그 국가를 치리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있고 각 부서에는 그 부서에 합당한 수장과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직분에 합당한 인물들을 세워서 한나라를 경영해 가는가 하면

어느 공동체나 단체등도 조직을 통해 각자에게 직분을 주어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사는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잘 짜여진 조직 속에서 주어진 직분에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적응 하느냐에 따라 성공여부가 달려 있는가하면 동물의 세계에서도 위계질서가 엄격해서 무리의 리더에게

도전을 하게 되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이기지못하면 죽든지 무리에서 쫓겨나게 되고 또한

각각 맡은 일이 달라, 분담해서 일을 하는 동물들을 우리의 주위에서 쉽게 볼 수 가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심지어는 식물의 세계에도 이 질서는 적용이 되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에 합당한 질서가 있고

거기에는 직분에 충실함이 요구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이 무엇이며 얼마나 충실하게

그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일은 직분을 주어 나누어서 할 때 효과적이다.

오늘본문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사위인 모세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재판 하는 것을

보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21절 이하에서 모세에게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46 이스라엘 백성의수가 군대에 갈수 있는 장정만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남녀노소를 합치면 3~4백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이처럼 많은 백성들의 송사를 모세혼자서 처리 한다는 것은 일의 효율성으로 보나 능률면에서나

불합리 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권면을 받아드려 재덕이 겸비한 자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 부장과 십 부장

뽑아서 그들에게 직분을 주고 직분에 맡는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일의 효율성과 능률이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것입니다.

허나 이 직분 자들 중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에 주어진 직분을

남용한다면 문제는 커집니다.

의회의원들이 연수라는 명목으로 세비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힘없고 어려운 서민을 돕는 일에는

인색하면서 자신들의 급료는 인상을 해서 원성을 듣는가 하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정부일을 잘못해놓고도

누구하나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맡은 직분을 남용하고 효과적인직분수행을 하지 못함입니다.

여러분 물이가득담긴 커다란 저수지가 이유 없이 갑자기 뚝 이 무너져 물난리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조그만 구멍을 뚤 어 놓으면 졸졸 새는 적은 물줄기가 급기야 저수지 뚝 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생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여러분 모두는 자신의 위치에 맡는 직분이 모두 주어져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모임에서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할 때

그  단체의 힘과 능력은 배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2.직분의 도전은 질서파괴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했는데

3절부터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만물이 하나하나 창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날>>, 낮과밤 둘째날>>하늘 세재날>>, 풀과 과일 넷째날>>밤과낮,

해 달 별 다섯째날>>새와 물고기 여섯째날>>땅의 짐승, 끝으로 사람을 질서에 따라 지으신 것입니다.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모든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을 하신 것을 주목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축복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했고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나 어떤 공동체나 사회나 국가나 직분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면 질서는 무너지고 그 구성체는 제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어온 우리나라는 가정에서부터 각자가 직분에 충실함으로 작은 공동체 부터

질서가 잘 지켜져 왔었으나 근간에 이르러 간혹 직분을 도전하는 일로해서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파멸에 이르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됩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가지일을 이룰 수 있다는家和萬事成 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직분의도전은 페륜을 불러오고 가족의 사랑과 행복은 깨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도전이 시도되는 공동체는 어느 곳일지라도 온 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직분의도전이 얼마나 큰 질서파괴며 나아가서 사회의 커다란 악이 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깨달아서

적은 곳에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고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몸의 각 지체는 다르나 한 몸이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 하니라(교회, 구역,^^중대 14 몸은 한 지체 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 한 것이 아니요(구역식구가 나는 구역장이 아니니...^^대원이 나는 소대장이 아니니..) 

 15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가각 주어진 직분이 서로 다름) 16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곧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구성원 모두가 같은 직분을 맡는다면 다른 일은 누가 할 것인가?

지역장 구역장 ^^중대장 소대장 ...)

12:6~8 우리에게 주신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일이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율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 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 얼굴모습이 각기 다르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이 다르므로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서 즐겁고 감사함으로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말씀 인 것 입니다.

각기 다른 직분을 가진 많은 지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 지체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서로 협력하며 주어진 직분에 충실 하느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바라는 목적을 초과해서

발전 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서 사회나 국가를 형성해가는 근본을 이루는 것 또한 직분의 충실한

수행에 있음을 잊지 마시고 지금 이 시간 여러분 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수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8. 믿음이란 무엇인가? 11:1~6

본문의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어떤 실체를 우리로 하여금 그 실체들이 존재함을

알게 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그것이 지식이 아니라 그 실체에 대한 지식이상의 확신을 갖게 되는

초이성적인 것 이라고 봅니다.

저는 전형적인 농촌의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70여 호의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의 한가운데에 세멘트로된 4각형의 커다란 우물이 있었는데

온 동네모두가 그 우물하나로 사용을 해도 그 우물물은 언제나 넘쳐흐르는 주위에서도 아주 이름난 물맛이

좋은 우물 이였습니다.

한데 어른들의 얘기를 들으면 그 우물물이 한밤중에 위 아래로 뒤집힌다고 합니다.

위아래가 바뀐 물을 먼저 떠다가 정하수로 놓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해서 저의 어머님이 누구보다

먼저 새벽 일찍 그 물을 길러다가놓고 정성을 드려서 비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을 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세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아닌가 합니다.> 저의 어머님이 누구에게 무엇을 빌며

정성을 다 했겠습니까? 정성을 쏘다 붓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막연하지만 자식들이 잘되라고 그리고

집안이 평안하게 해달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나의 정성을 통해 내 자식과 내 집안이 잘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추우나 더우나 바가 오나 눈이오나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숫한 세월을 고통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고 삶의 일과라고 여기며 정성을 드리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 인 것 입니다. 다만 그 믿음이 누굴 향한 어떠한 실체를 향한 믿음

이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12:1~에서 아브라함은 하란 땅에서 조상대대로 부요하게 많은 종복들을 거느리고 살던 중 75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셨을 때 순종하고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음이 없이는 받아 드릴 수 없는 것이고 어찌 믿고 삶을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스라엘 배성들은 출애굽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갔습니다. 가나안땅은 그들이 하나님

으로부터 약속받은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실상을 붙잡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들은 그 실상을 손에 잡은 것처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이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저와 대원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라는 실상을 붙잡기 위해 나그네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함께 나그네 길을 가면서도 실상을 붙잡는 것보다는

현실에 미혹 되어서 돈과 명예와 지위와 세속적인 것에 취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실상을 손에 붙잡은 것처럼 확실하게 믿지 못하였기에 자신들의 광야생활을 불평하며

하나님께 원망했던 것처럼 오늘 현실에 미혹된 성도들 역시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가운데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나그네 인생길에 늘좋은일만주어질수는 없는것입니다.

때론 힘들고 숨차고 참기 힘든 고비 고비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확실하게 잡고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려운 고비 때마다 넘어지지 않고

지혜롭고 슬기롭게 감사함으로 나그네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실상을 믿었기에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주저 없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순종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가운데서여호와이레곧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역사를 체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저와 대원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와 영생과 같은 것을 아직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에 대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그 증거를 보여주며 우리는 그 증거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형체를 믿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장래에 하나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고 그 나라에 들어 갈수 있겠지만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 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다위에 뛰어내렸을 때 물위를 걸어

갈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붙잡았기에 물위를 걸어 다닐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넘실대는 물보라와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고 내가 빠지면 어떡하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때

그에게서는 이미 믿음은 떠낫고 대신 현실이 눈앞에 닥아 와서 물속으로 빠지고만 것입니다.

성도라면 보지 못하는 실체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나아갈 때 믿음의 길에서 요동치 않고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25:14~ 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에 하나님은 분노하시며 징계하시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상을 주신다고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백성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을 많이 체험 했지만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했던 민족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배하게하시고 고통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의 첫 왕 이였던 사울의 처음은 믿음과 겸손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기에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교만으로 해서 패위 되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다윗은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지만 확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한 결과

수많은 고난이나 환난을 이길 수 있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으로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옷이

벗어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며 주를 찬양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칭찬 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왕으로서 표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원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잠시 왔다가는 나그네 인생길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그네 여정의 길목에 수많은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상처도

나고 어떤 이는 넘어져도 거뜬이 일어나고 어떤 이는 넘어져도 지혜롭게 피해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걸림돌을 만났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위에 여러분이 서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 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은 요20: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 되도다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닥아 오는 것이 아닌 것을 이유 없이 받아드리고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란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해서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소유했음을 자부심을 갖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7. 모든은혜를 잊지말고 감사하자. 103:1~5

1.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평생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모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자는 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103편을 읽으면서 저와 여러분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를 드려야 할 것들이, 생각하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1. 죄 사함의 은혜를 잊지 말자.(3)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의롭지못한 죄인의몸으로 죄를짊어지고 세상에태어난것입니다.

또한 성장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알게 모르게 수많은 죄를 지으며 그 죄 값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에 무뎌진 우리의 삶은 반복된 죄 지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크던 적던 모두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만 되면 지금까지 지은 죄의 짐은 예수그리스도의 발 앞에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가 있습니다.

9:13에서 예수님은 내가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믿는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병을 고쳐주신 은혜를 잊지 말자.(3)

옛날 중국에 편작이라고 하는 의원 3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들의 명성이 하도 유명해서 임금이 그 3형제를 궁으로 불렀습니다.

융숭하게 대접을 한 후 임금은 3형제에게 각각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말하기를 소인은 병이 커진 후에 아무리 큰 병이라도 치료합니다. 둘째는 말하기를 소인은 사람에게 질병이 오는 것 을 보고 초기에 바로 치료를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병이 올 것을 미리알고 예방하는 의원의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모두 훌륭한 의원들이죠?

중병을 고치는 큰형, 병을 초기에 치료하는 둘째, 병을 예방하는 셋째. 여러분은 그중 누가 제일 훌륭한 의원이라고 생각합니까?.

현대는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웬만한 병은 의술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허나 고도의 의학에서도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치료인 것입니다.

문둥병과 중풍 병, 소경과 혈루 병, 절름발이와 벙어리는 물론 죽은 자까지도 살리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질병에 고통 받는 세상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치료 하고 계십니다.

이사야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까지 인류의 질병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 중국의 편작 3형제가 하는 일 모두를, 아니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병 고침의 역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육신의 병뿐이 아닌 영혼의 병 고침을 받은 우리는 만입으로 그 은혜를 감사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육신의병은 치료

하지 못하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고통을 받다가 결국 아픔가운데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만 영혼의병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치료받지 못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삶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가운데 지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영혼의 구원을 통해서 천국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3.생명을 파멸해서 구속받은 은혜를 잊지 말자.(4)

어느 한적한 시골에 하루는 아버지와 어린 딸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녀간에 공을 차며 즐겁게 놓는데 아버지가 찬 공이 이번에는 좀 멀리 갔습니다.

어린 딸은 그 공을 잡으러 뛰어 가다가 패 유정으로 방치 되여 있는 구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딸은 아빠 나 좀 꺼내 주세요, 하고 외치고 있었지만 깊이는 10M도 더되고 폭은 30Cm 정도 밖에 안 되서 아빠가 들어갈 수도 없고 구해낼 재주가 없어 장비를 동원해서 딸을 꺼냈을 땐 딸은 이미 싸늘하게 죽은 후였습니다.

죽어가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딸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살려낼 수 없었던 아비의 비통함, 얼마나 가슴이 아팥겠 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삶이 끝난 후 지옥에 떨어져서 울부짖는 내 가족 형제 친지 이웃들의 외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구의 지하철 화재로 뜨거운 불속에서 죽어가며 구조의 전화 매세지를 보낸 자녀들을 구하지 못하고 울부짖는 가족의 몸부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여기까지 입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구할 수 없는 한계 말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은 백성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현실로 닥아 왔을 때는 후회를 해봐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수박에 없기에 택함 받은 우리를 파멸에서 구해주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4.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신 은혜를 잊지 말자.(5)

8:15~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에서 훈련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목을 적시게 하시고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모른다며 떠나지 않도록 훈련하시 기위함이며, 삶 가운데 때때로 가시를 주심도 하나님을 떠나 모른다하며 곁길로 나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삶 가운데 어떠한 고난과 역경의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 하심 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해 주셨는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우주 만물을 주셨고 삶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고, 용서를 원하는 자에게 자유 함을 주셨고, 병났기를 원하는 자에게 건강을 주셨고, 직업을 바라는 자에게 직장을 주셨는데 그것들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감사할 것 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발견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감사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믿음안에서역사하시는하나님(기적).10:46~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시간 우리 다함께 생각해 봅시다.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거나 잡히지 않고 현실적으로 불확실하고 믿기 어려운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입으로만 믿노라 하는 것이 아닌 실행에 옮겨 실천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이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다시 말해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 감각적인것을 뛰어넘는다른세계에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통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 참 지식에 이르는 것, 바로 무엇이든 경험하거나 인간의 논리로 입증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고 지식의 차원을 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 이상의 확신을 말하는 초 이성 적인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 얘기가 나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그는 그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두 눈이 잘 보이는 정상인도 거친 세파를 해쳐 가자면 한생애가 좋은날보다는 힘들고 가슴 아파 눈물 짖는 삶의 날들이 많은데 하물며 소경의 삶이 어찌 평안 할 수 있으며 고단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누더기 겉옷을 걸치고 여리고의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구걸을 하며 수많은 세월을 운명이라고 체념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까지 소경 바디매오 와 다를게 없는 세월을 살아온 것 아니었습니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냥 세상의 헛된 것들을 쫓아 그것들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기를 원했고, 평안을 누리기를 바랐고 행복한 삶이되기를 꿈꾸며 그것이 다 인줄 알고 운명으로 받아 드리며 그렇게 살다 명이 다하면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고,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까?

축적된 부와, 소유한 지위를 통해서 육신의 괘락과 안락을 즐기고자 했고 더 크고 높은 명예와 지위를 얻어 조금이라도 더 굴림 하고자하는 그릇된 교만의 삶이 나 자신도 모르게 나의 삶을 지배해 왔고 그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생애를 허망하게 보내면서도 그 길이 옳고 그름조차도 헤아리지 못한 날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를 만남으로 소경 바디매오의 운명도 우리들의 운명도 바뀔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소경 바디매오는 어제와 변함없이 허름한 누더기 겉옷을 걸치고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비참한 운명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구걸 하고 있을 때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소경 바디매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를 만나면 나도 운명이 바뀌고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불현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사하고소리를 지르자 예수의 수행원들이 그를 밀쳐 버렸으나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모함으로 예수를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소경 바디애오의 절규에 가까운 안타까운 외침에 예수께서 그를 부르자 소경 바디매오는 이제 나도 예수를 만남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은 필요가 없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더 이상 거지 소경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구걸의 징표요 거지의 자격증과도 같았던 누더기 겉옷을 집어던져 버리고 예수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유일한 재산입니다.

눈비가 오면 그 눈비를 막을 수 있는 우비가 되고 저녁에는36-2

이부자리로 추운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용으로 구걸의 징표요 수입원의 근본이 되는 누더기 겉옷. 이것이 없으면 더 이상 거지노릇도 유일한 수입원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스스로 나는 더 이상 소경이나, 거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겉옷을 과감히 집어던져 버릴 수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이러한 행동은 확신에 찬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며 달려오는 소경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찌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허나 그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는 것을 예수님은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도 예수를 만남으로 해서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입술로시인하여 예수를 구주라 부르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백성으로 천국 생명록에 기록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디매오 못지않은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1:12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엄청난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16:19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 에서도 풀리라 고합니다. 천국 열쇠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땅에서의 삶에 따라 하늘에서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했던 지난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찾아 해매였고, 나라고하는 지극히 작은 개체만을 생각하며 먹을 것과 입을것과 마실것을 얻기에 급급했던 삶이였고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의 노예가 되여 헛되고 헛된 뜬구름을 잡기위한 삶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으며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짧기만 한 나그네 인생 여정의 길을 달려온 것이 바로 우리들의 지난날의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디매오와 같이 세상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겉옷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예수 앞에 나올 수 있는 용기가 필요로 한때입니다. 지난날 예수 믿기 전 가지고 있던 구습들은 모두 집어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생명줄과 같았던 누더기겉옷을 믿음으로 과감하게 집어 던 져버림과 같이 우리도 지난날의 아집과 교만 세속적 인 삶 모두를 던져 버릴수 있기 바랍니다.

소경 바디매오 에게 무엇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알고 게셨습니다.

바디매오 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나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입술로 고백한 바디매오와 같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각자가 필요로 한 것을 구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더 이상 소경이 아니고 눈을 뜬것과 같이 오늘 우리의 필요로 하는 것이 응답될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소경이 아닌 정상인으로 예수를 따르며 복음을 전하는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 모두는 주의 종의 길을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61. 말은 씨가 된다. 잠언 18:20-21 (P-931) 61-1


사람은 그 일생을 입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먹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입으로 말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입이 우리의 생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나오는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찬양과 저주도 말이요, 감사와 불평도 말이요, 친절과 온유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며 인간의 운명도 그 말로 결정이 됩니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가 말 한대로 산다고 말합니다.

 

지난 설에 어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세배를 했을 때 아버지가 자녀들을 앉혀놓고 덕담하기를

"금년에 너희들에게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내가 세배 돈은 못주고 복받는 지혜를 주노니

잘 들어라. 말이 씨가 된다. 그러니 너희들이 말을 잘 심어서 열매를 거두어라. 우리가 이 세상에

조상 적부터 받은 물질의 유산은 없지만 입에서 말로 씨를 잘 심으면 큰 노력없이 복 받고 잘 살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좋은 말을 많이 심고 자녀들에게 좋은 말을 많이

심어두면 이 가문이 빛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내가 말한 만큼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한 만큼 행복할 수 있으며, 내가 말한

만큼 성공할 수 있으며, 내가 말한 만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대한 교훈을 오늘 말씀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은 씨가 된다.

(20)"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다시 말하면 입에서 나가는 열매로 배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 좋은 열매가 나가면

좋은 것으로 배부를 것이고 나쁜 열매가 나가면 나쁜 것으로 배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여기에서 열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말은 곧 씨가 되기 때문에 그 씨가 열매를 맺는대로 배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입을 잘 놀리면 단 것을 실컷 먹고 입술을 잘못 놀리면

쓴 것을 들이켜게 된다. 죽고 사는 것이 혀 끝에 달렸으니 혀를 잘 놀려야 잘 먹을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6:7-8)"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심는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심으면 반드시 거둔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 심는 종류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7:16-18)"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말을 심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심는 양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 안들이고, 힘 안쓰고, 큰 재주없이 잘될 수 있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입으로 좋은 씨를

많이 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심하라는 말은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심판하신다.

내가 한 말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는 말을

하나님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12:36-37)"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심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을 많이 하는 자에게는 감사의 열매를, 불평을 많이 하는 자에게는 불평의 열매가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말은 원망이었습니다. 광야 40년동안 저들이 불평, 불만,

원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4:27-28)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할 때 "그래 원망하면서 거기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했으니 내가 죽여주마" 해서 20세 이상 된 장정들을 다 광야에서 쓰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모세같이 위대한 사람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의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이

원망할 때 (20:10)"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백성들을 향해서 분노해서 반석을 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20:12)"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말은 남에게 심은대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말을 조심해야 되는 것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어서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좋은 말 심어주면 좋은 것이 나에게 거두어지는데 친절한 말은 친절한 것으로, 선한 말은 선한 것으로

거두어집니다.

부부는 언제나 말로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말로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존경하는 말을 써야 합니다. 친절과, 온유와, 겸손과, 매사에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말로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입니다.

인간 성장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 부모라고도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말의 상처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많이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처로

받고 있는 사람은 불효자식입니다. 그 상처까지도 ', 하나님의 은혜로다.' 해야 합니다.

그 상처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 우리 주님의 채찍에 맞는

십자가의 상처를 더 많이 받으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구나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

하는 사람은 효자입니다. 가정에서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은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부는 말 한마디 상처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오년, 십년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때마다 칼내놓듯이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될 것은 나쁜 말을 썼다가 자기 생명을 잃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떻게 끼칩니까? 좋은 말을 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남에게 좋은 말로 심어야 됩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들어오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들어옵니다.

넷째, 내가 한 말은 내 인격을 이룹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자기 생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듣는 것이 내 귀입니다. 남은 못 알아들어도

자기는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말을 할 때는 내 마음이 선해지고, 악한 말을 할 때는

마음이 악해지고, 격한 말을 하면 스스로 격분하게 됩니다.

더러운 말을 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영향을 받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내 인격이 그 말로 추해집니다. 말이 마음에서 나오지만 또한

그 말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방향을 조정하듯이

말이 인격을 좌우하고 운명을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말이 가는대로 인격이 형성되고 인격이

가는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어떤 부부가 잘 살다가 3년만에 이혼했습니다. 그 남편이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집에만

들어오면 '이별의 부산항'으로부터 '목포의 눈물까지' 13곡을 불러야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별의 부산항'을 부르다가 결국 이혼한 것입니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우는 돌아가 버렸고, 낙엽따라가버린사랑..하다가 낙엽따라 가버렸고,

아무도 날 찿는이 없는..평생외롭게살고있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마음속에 들려오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말로서 내 운명을 창조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좋은 말로 씨를 심어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자손 대대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5.그리스도인 善行 6:1~4(P-8) 24:19~22


성탄절이나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 들이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성금을 내고 물건을 나누어 주기도 하며 선행을 베푸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그뿐 아니라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이재민이 생기면 온 국민이 따뜻한 동포애를 나누고자 이재민 돕기에 참여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려운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의 세계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더 없는 흐뭇하고 정겨운 모습 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선행의 수고가 아무런 보람도 없이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헌데 오늘 본문은 모든 선행이 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선행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타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 선행 입니다.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고 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선행들 중에서 오늘 본문1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 선행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에게 자신의 선행을 알리고 인정받고 싶고 그로 해서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자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을 하셨습니다.

물론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사람, 메스컴의 보도와는 전혀 무관심한 선행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방송이나 신문등 메스콤을 통해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기를 원하고 그 때문에 선행의 대열에 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방송이나 신문이 이를 보도하지 않는 다면 과연 어떻한 결과가 나타날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행 숫자의 감소, 금액의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자랑 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하면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을 보시고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5:1~3 아나니아 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 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책망 하는 것을 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의 재산을 감춘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공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하는 선행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눈에는 가소로운 행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오만함을 보시고 아무런 보상도 내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선행이 이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 에게 요구되는 참된 선행입니다.


2.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행입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고 오늘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의를 과시하고 자랑 한다면 이런 외식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하는 것 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 되고 말뿐 이라고 딤전 4:2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의 구제 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 같이 오랜 세월 음지에 35-2

숨어서 왼손이 모르게 불우한 이웃을 돕는가 하면 자신의 전 재산을 익명으로 헌납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먹고 쓰는 것은 지극히 인색하면서까지 모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는 노인도 있고, 넉넉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어서 살만한 세상 이라고도 합니다.

15: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반듯이 네 손을 그에게 펴서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주어라 10 너는 반듯이 그에게 구제 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 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가 어느 곳에 잇든지 우리주위에 가난한사람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넉넉히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하는 모든 일 위에 복을 주실 것 이라고 합니다.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의를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선행 인 것 입니다.

3. 더 큰 것을 바라며 하는 선행입니다

아무런 보상이나 기대도 없이 무조건 구제만 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내 마음속에 오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브란스 선교사는 나의 주는 기쁨이 당신의 받는 기쁨 보다 큽니다 라고고백 했다고 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도 즐거운 일의 하나가 되겠지만 주었을 때의 편안함과 기쁨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늘 베푸는 삶은 비록 외형은 풍요롭지 못할지라도 그 마음은 누구와 비교 할 수 없는 부자가 되는 것이고 마음에 즐거움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크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분도 경험한 일중의 하나가 될 것 입니다.

주는 기쁨 그 자체로도 편안함과 즐거움 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숨긴 선행에 대해 복을 내려 갚아 주시겠다고 까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3:34절에서 겸손과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주어진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4:19~22 을 읽어봅시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 버렷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 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 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감을따고 새의 밥을남김>>.....

예수님은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외식을 벗어 버림으로써 보다 큰 기쁨을 얻게 하려는 배려이며 선행을 베풀고 인간으로부터 선행의 대가를 받는다고 한들 뭘 얼마나 받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늘 우리를 보고 계시는 만물의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고 삼상 26:23에서 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선행은 곧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 순전한 동기에서 나온 선행, 인간으로부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선행,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을 기대하는 선행 인 것입니다.

 


입술의고백을지키는 삶, 14:27-31(예언). 66-72이루어짐


베드로:예수님의 열두제자가운데 수제자였고 본명은 시몬이였으며 이외에도 여러이름으로

          불려 졌지만 예수님을 따 른후에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불려졌습니다.

고 향:뱃세다엿으나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였으며 형제인 안드레와 세베데의 아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고기 잡는어업에 종사하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예수님께 충성을 바치기 위하여 말과 행동을 준비하고 있던 열정적인 인물 이라고

14:29 17:24-25등 수 많은 곳에서 묘사 하고 있을 만큼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때로는 그 충성심이 지나쳐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도 하던 순종의 표본이 되여 질수 있는 수제자 베드로 

그가 이 밤에 자신의 입술의 고백을 지키지 못하고 변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베드로의 자리에 감히

라고 하는 존재를 개입시킨다면 과연 나는 어찌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는 깨닫고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여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다짐한 것을 지킬 줄 아는 삶을 살자.

16:15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는 베드로는 수제자로서의

자질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다른 제자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 이였습니다.

또 오늘 본문 27절에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말씀하시자 29-31절에서 보세 요 --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않겠나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31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가장 신임 받는 수제자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예수님의 질문에 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했던 베드로 그의 신변에 자그마한 위험이 다가오자 어떤 모습으로 변 하는가 66절 이하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이기주의 속에 자신의 고백을 지키지 못하고 통곡하며 후회하는 보습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믿음의 형제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살면서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내입으로

고백하고 다짐을 하면서 때로는 그것들을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지키지 못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말에 男兒一言重千金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나이의 한마디 말은 천금 보다 더 무겁다는 뜻이 아닙니까.

여러분께서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아니면 새해첫날 .또는 첫 주일에라도 일년 아니면

한달을 어떻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다짐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며 한해를 살아가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33.000가지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대부분이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어떻게 하면?) 실감이가지 않습니까

다른 곳을 볼 까요

12: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오며 별 부족함을 모르고 종복과 양 때를

거느리고 75년을 살아온 아브람에게너는 너의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절 이하에서는 약속을 지킴으로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축복으로 믿음의 조상이 됨.........)

이처럼 다짐한 것을 지킬 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34-2

것을 기억하고 다짐한 것을 지키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을 갖는 삶을 살자.

14:66-72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그렇게도 당당하며 자신에 차있던 베드로는 자신의 안위가 불안하자 자신이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것도

까마케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부인 하는 것도 모자라서 세 번이나 부인하며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며

부인한 후 닭이 두번째 울자 예수님께서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눅 22:62 밖에 나가 심히 통곡 했다고 했습니다.

? 좀더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수제자라고 말하지 못했을까요??

모멸과 모욕 .아니 죽음의공포가 그를 비열한 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요?

정죄.심판.죽음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허나 베드로는 이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 까요?

여러분!! 혹 여러분께서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는 행동을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두움의 길. 자신의 양심까지 속이는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떳떳치 못 하기 때문입니다.

헌대 이 보다 더 나뿐 것은 떳떳치 못한 일을 하고도 전혀 아닌 척 가증스럽게도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이 죽고 싶도록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별되고 선택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세태는 이밤의 베드로의 모습과 비교해봐서 많은것등을 생각하게하는..................

세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는 행동과 입술의 고백을 지키는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을 갖는

삶을 사시는 한 해가 되 시길 바랍니다.


3.회개 하는 삶을 살자.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 되여 생각하고 울었더라.

22:62에서보면 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 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책과 절망에 사로잡혀 통곡하는 연약한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1:9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를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누구나 죄를 지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회개 할 줄 아는 모습을 주님은 우리들에게 원 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에 주님이 가장 아껴쓰셨던 사람중의 한사람인 다윗 !!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인물중에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였습니다.

다윗?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것은 그의 출신이 명문가 출신이거나, 인물이 잘난것도 아니고

남다른 특별한 교육을 받은것도아니고, 오직하나 자신의죄를 숨기지않고 죄를 깨달았을때 지체없이

자복하고 눈물로회개하고 다시는 같은죄를 저지르지 안았다는것입니다.

지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통곡하며 회계하는 베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맨 먼저 베드로를 만나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다짐한 것들을 돌아서서 부인하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죄를 지었을 때는 주저 없이 베드로의 한 서린 회개의 눈물과 같이 회개할줄 아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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