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와 놀라운 보혈
 

이것을 보는데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너무나 놀랍게 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밀함과
완전함에 그저 놀랍고 감사할뿐입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꼭 짜면 피가 나온다고 말씀이 더욱 실감이 나네요.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브리서9:22절 말씀처럼 창세기로 부터 범죄한 인간에게

구원에 길은 오직 피를 통해서만이 가능함을 말씀해주시는데

 이것은 바로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나니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와 연결되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기에 누군가가 대신 죽음을 당하지않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히9:18) 십계명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히9:7) 성막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예수님 완성
 
계시록의 힌옷입은자는 바로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자들을 말하고 있다.
결국 창세기로 부터 계시록까지 피를 통한 속죄는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이다.
 
출애굽에서 유월절날 피를 바르지않고 자기의 생각을 쫓아 선하고 의롭게 생활했다면 그는 구원을 받았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집 문설주에 피를 보시고 넘어가신다고 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땅의 소산을 드린 가인의 제사와  피흘림이 있는 약속의 예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로 나누어 볼수가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이 말씀을 통해 그 예물에 해답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한자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하는 자인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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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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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64년 로마를 통치하고 있던 네로 황제는 헤롯의 손자였던 아그립바 2세를 이스라엘의 분봉왕으로 세우고, 아그립바 2세는 풀로루스를 유대지역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풀로루스는 유대인들을 학살하였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반대한 유대인들이 주후 65-66년 사이에 로마에 대항하는 대반란을 일으켰고, 로마는 베스파시안과 아들 디도장군에게 반란의 진압을 명하였습니다.

네로는 "이스라엘을 삽으로 깊이 떠서 지중해 바다 속에 던져 버리라." 고 명령하였습니다. 1948년과 1967년 그리고 1973년 이스라엘과 아랍세계와의 전쟁이 있었을 때 아랍은 이스라엘을 삽으로 떠서 지중해로 던져 버리겠노라 장담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지만 옛날부터 따라다녔던 치욕이 오늘날까지 재현되는 아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즈음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 이후 자살하였고,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어 아들 디도장군에게 반란진압 총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70년 4월 유월절 즈음에 시작된 전투가 70년 8월 28일 예루살렘 멸망으로 종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살에 살아 남은 자 중 960명의 열심당원 사람들이 엘리에젤 장군의 지휘 하에 마사다로 결사항전을 위한 피신을 하였습니다. 로마는 이들의 뒤를 실바장군의 지휘 하에 10군단 1만 5천명이 마사다로 내려갔습니다.

 

이 곳에서 73년 5월 2일 멸망당할 때 까지 3년여간을 자유를 향한 마지막 몸부림을 쳤습니다. 절벽 높이 450m, 둘레 1,280m, 길이 남북 800m, 동서 300m나 되는 천연요새인 바위 암벽 마사다는 BC 167년에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나단에 의하여 에돔지역에서 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요새화 되었던 것입니다.

BC 103-76 알렉산더 야나이라에 의해 확장되었고, BC 30년 헤롯 대왕에 의해 지금도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건축되어졌습니다. 동서남북 절벽으로 되어진 곳에 높이 3.5m의 성벽을 쌓았고, 38개의 망대를 설치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로마 장군 실바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포위공격에 들어갔고, 지형적인 이유로 일시에 점령하지 못하자 서쪽 약간 낮은 지역에 토성을 쌓아 올려 마사다보다 높이를 더하려 하였습니다.

날마다 쌓여져가는 토성을 보고 유대인들은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최후가 다가온 날 엘리에젤은 용맹스런 동료들과 모든 요새안의 유대형제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섬겼소. 참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는 자유롭고 고귀하게 죽을 수 있게 되었소. 살아 노예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 보다... 중략... 우리의 자유를 위한 고귀한 선택을 하도록 합시다."

간곡한 연설에 일부는 동조하였으나 가족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일부가 망설이자 재차 연설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자유를 추구하면서 영원한 자유를 꺼리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결국 성경의 예언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이 최후로 읽은 성경은 겔 37:1-6, 11, 12, 21절입니다.

자신들은 죽지만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고, 고국 땅은 반드시 부활될 것을 확신하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시 81편, 85편, 150편, 레위기 일부, 겔 37장 신 33장, 34장 등입니다.

마사다는 시편 18편에 나오는 산성, 요새, 바위라는 히브리어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사다는 실패한 땅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발견되어지는 성공의 땅이 됩니다.

여호와는 지금도 산성이 되셔서 믿는 자를 지켜 주신십니다.  비굴하지 말자.  두려워 하지 말자. 믿음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힘을 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국립공원으로서 사해쪽 아래에서 케이블카(84인승)을 타고 5분이면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동쪽에 만들어진 거대한 물저장고를 볼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 물을 저장하는 신기한 방법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출입문으로 올라가면 마사다 요새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곳곳 마다 놓여진 모형도를 놓고 안내인이 설명하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발걸음을 옮겨 채석장을 지나면 요새의 창고지역이 나타납니다. 거대한 요새의 병사들과 관리들을 먹이기 위한 식량창고와 무기 창고 등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헤롯의 사우나탕은 전형적인 로마 스타일의 목욕문화를 보여 줍니다. 이곳을 지나 북쪽궁전으로 나아가면 발밑에 아스라이 보이는 로마군의 진지들과 방어선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3층 궁전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잡힐 듯 다가오는 엔게디의 모습이 보이고, 북서쪽으로 마온 황무지, 십광야, 유대광야 등이 보입니다.

이제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보자. 서쪽에 저수지가 있고, 회당이 있습니다. 최후의 연설이 있었던 곳이며, 요새의 거주민이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며 기도하던 곳입니다.

회당 옆 부속건물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구멍 뚫린 집이 보이는데 비둘기집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연락용으로 키웠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다사 중간부에 가면 서쪽 구릉이 보이고 로마군진지가 보이고, 돌 포대도 보입니다. 로마군들이 쏘아올린 돌 포탄들을 지금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비잔틴 문을 통과하여 로마군 진지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도 있습니다.

 

모두가 케이블을 타고 마사다에 오르지만 가끔은 아라드 쪽에서 버스로 마사다로 와서 로마군진지에서 출발하여 정상에 오르는 길로 오를 때도 있습니다. 곳곳에서 로마군이 쌓아올린 경사로를 볼 수 있는 묘미가 있습니다.

서쪽 궁전은 천연돌로 만들어진 2,000년된 모자이크를 볼 수 있고, 남쪽으로 계속 가면 거대한 저수지와 묘지, 비들기집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대부분이 이 서쪽 궁전을 본 후 5세기에 지어진 비잔틴 수도원을 보고 다시 케이블카로 이동합니다. 마사다 매표소는 현대식 건물로 냉난방이 잘 되어있고, 영화를 보는 곳도 있으며,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쇼핑센터와 조그만 가계가 내부에 있고, 외부에는 노천 카페에서 생과일 쥬스를 팔고 있습니다. 과일 쥬스를 마시면서 마사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역사를 음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배우려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마사다로 올라가고, 이방인 순례객들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면서 마사다를 이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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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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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8일 2차 인티파터(팔레스타인 무장봉기)로 인하여 한 동안 여리고는 일반인들이 출입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2004년 10월 아라파트 사망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지도자 아부마젠이 선출되었고, 이스라엘에 매일같이 일어났던 테러도 멈추었다.

이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웨스트 벵크와 가자지구 곳곳마다 보안장벽이라는 높이 9M 콘트리트 장벽이 세워지기는 했어도 이전보다는 훨씬 좋은 분위기 인 것 같다. 이제는 여리고를 일반인들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한 여리고는 해저 258m지역이다. 만년 된 구조물이 발굴되어진 것으로 미루어 도시역사를 만년으로 생각한다. 연중 강우량이 100mm에 불과한 사막과 농경지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주변에 6개의 샘을 통하여 충분히 물이 공급되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28km 가량 떨어져 있고, 요단강은 동쪽으로 9km정도 떨어져 있다. 처음으로 성벽이 건축 된 것은 이 도시를 열망하는 이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의 정복이 주전 1,400년 전에 있었고, 이후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될 때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눈을 뽑힌 채 잡혀가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후에 페르시아의 행정도시가 되었으며, 주전 336년 알렉산더의 권력자들에 의해 물이 독점되자 점차 도시가 황폐하게 된다.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세를 주고 샘을 사용하다 그녀의 사후 여리고를 차지하고 겨울 별장을 건설한다.

헤롯은 여리고 언덕 위에 어머니를 기념한 요새를 만들었는데 “싸이프러스" 라고 부른다. 헤롯 사후 아켈라오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아켈라오는 종려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얻었다. 유대 전쟁시 로마 10군단의 본부가 되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살았고, 순례객들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십자군시대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하셔서 처음으로 정복케 하신 도시이다.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수기인 요단강을 건너서 이 도시에 접근하였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본 사람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다.

학자들 중에는 라합은 기생이 아니고, 달신을 섬겼던 여리고 신전에서 봉사하던 여 사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라합의 신분이 어떠한 가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위치보다는 그 사람의 믿음의 모습이다.

언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도 라합은 들려오는 소문의 소리만 듣고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참 귀하게 보인다.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오직 한 분뿐임을 고백하였고, 그 고백은 그녀의 가족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고, 라합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위대한 성경상의 여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함락 작전명을 받았는데 오직 성 주위를 매일 돌되 엿새 동안하고 7일째는 7번 돌며 제사장이 나팔을 불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을 하나님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직 순종으로 이 말씀을 들고 나아 갈 때 견고한 진이 무너졌다.

오늘날 여리고 성 무너진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텔엘 슐탄 이라고 부르는 곳이 고대 여리고 성이다. 일찍부터 여리고 는 달신을 섬겼던 종려나무 성읍이었고, 주변에 산재한 샘들을 통하여 풍부한 관계 농업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주변에 다른 마을보다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하였고, 견고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로서는 여리고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함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겠지만 하나님은 한 가지 방법, 오직 기도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보라는 것 밖에 다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오늘날 여리고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보는 현대인들은 겨우 이 것 가지고 하지만 3,400년 전의 문화는 그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보았던 거창한 구조물을 본 사람은 여호수와 와 갈렙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곳에서 교훈을 삼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것이다. 언약궤가 항상 앞서 갔음을 기억하여야 한다(수 6:4).

무너진 언덕 위에서 서쪽을 보게 되면 벌거숭이 산 하나가 보인다. 바로 이산 넘어 유대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하셨고(마 4장), 기도 후 우리가 보는 산 정상부근에 보이는 헬라정교회(주후 6세기 건축)가 있는 곳에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이 있었는데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라고 하는 첫 번째 시험을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여리고 함락작전의 뜻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말씀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여리고 작전이 많은 교회에서 경쟁적으로 시도되어지고 있다. 왜 여리고 작전인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단순한 소위 “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통, 물통(물을 담는 통이 아니라 물질이 형통함을 나타냄), 건강통, 사업 통 이런 것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혁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갈망하며, 오직 기도하고 나아갈 때 여리고는 무너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라합의 신앙고백이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여리고 시내에는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가 있다. 나무의 수령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모두가 알다시피 삭개오를 만나준 예수님의 행적은 곧 라합의 구원을 생각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삭개오와의(눅 19장) 만남을 통하여 극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소경거지 바디매오를 만나 주신 것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나타내 주신 것이라 볼 수 있겠다(막 10:46).

삭개오의 뽕나무 옆에 흐르는 시냇물은(지금을 시멘트로 뚜껑을 만들어 놓았음.) 엘리사 시대에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던 여리고 백성들을 위해 엘리사가 단물로 만들어 주었던 그 물이다.

여리고에 가면 이와 같이 여리고 성의 흔적, 삭개오의 뽕나무, 엘리사의 샘물을 만날 수 있고, 그 외에 서쪽에는 헤롯의 겨울 별장의 유적이 있고, 동쪽으로는 8세기 아랍시대에 만들어진 히샴의 궁전 유적이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시험산에 올라 예수님이 시험받으셨다는 헬라 정교회의 내부를 둘러보는 것도 묘미가 있다.

여리고 건너편 느보산 에서 여리고를 내려다 보면 그 푸른 모습에 한달음에 달려 내려오고 싶은 곳이다. 유대광야와 사해, 그리고 요단강 주변에 가장 발달했고, 과실수와 물이 풍부했던 오아시스의 도시 여리고, 그 도시에 가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아름다운 가나안의 첫 성은 오직 말씀으로 인하여 정복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도시는 1996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되었다. 이 도시에는 오직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만이 살아간다. 이들은 아직도 모슬렘의 종교를 가지고 이 도시를 유지하고 있다.

여리고는 옛날 여리고로 돌아간 것 같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흥왕하는 여리고의 모습을 그려본다. 우리는 여리고에서 다시 한번 라합이나 삭개오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여리고 건너편 요단강에 동편 베다니 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곳이 있고, 엘리야는 이곳에서 불 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하였다. 그리고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받고 여리고에 선지학교를 세워 선지 생도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구약과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여리고가 다시 문을 열어 반가운 마음이 든다. 순례객들은 구약과 신약의 주제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오직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성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할 때 지나다니셨던 것이 기억난다


광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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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대 광야

   - 유대 광야

   - 유대 광야

   - 아라드 유대 광야

   - 아라드 유대 광야 

 

손양원 목사-순교자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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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孫良源, 1902. 6. 3~1950. 9.28) 목사

 

 

 

경남 함양군 칠성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1902년 6월 3일 태어났다.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중

궁성요배를 거부, 퇴학당하였으나 선교사 L. 맥레이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철원보통학교졸업.
1929년 중동중학교입학 중퇴
1923녀 도쿄 스가모중학교졸업. 경남 성경학교입학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27회)
1938년 야양원교회 부임

 

삼일운동에 가담한 죄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했으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통해 큰 영향을 받으며 신학을 공부했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소압중학교)]를 졸업, 귀국 뒤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부산나병원교회·울산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에 여수의 나병환자요양원 애양원(愛養院)의 전도사로 부임한 이후로 평생동안 애양원의 목회자로 섬기며 애양원 사람들을 사랑했다. 문둥병자의 환부에 입을 접촉하여 병든 환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했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아 1940년에 체포되어 광복 후에 출옥하였다.

손양원 목사님의 곁에는 훌륭한 사모님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감옥에 계셨을 때, 사모님은 면회 갈 때마다 꼭 성경 한 구절씩을 외워 가서 목사님께 읽어 드리곤 했다.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감옥에 있는 목사님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946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동년 9월 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서울이 수복되는 날 9월 28일 전세가 역전되어 퇴패하는 공산군에 의해 미평과수원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사랑의 사도 /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지 탐방을 위하여 애양원을 방문하였다.
여수로 가다가 여수공항 옆길로 좌회전하여 쭉~~ 들어가면 애양원이 나오고
애양원 안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이 나온다.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1902년 6월 3일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고 1923년 일본 동경 소압중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1월 17일 정양순 여사와 결혼
1925년 동인 출생  1930년 동신 출생
1935년 평양신학교 입학  1936년 모친 별세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깐,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관훈




입구 소개판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도로 산 손양원 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의 생애



손양원 목사 생가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
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손양원 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 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 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
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출옥 후 옥종면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안하기위해 애양원을 떠나서
하동군 옥종면 산속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성도들이다.
둘째 줄 꼬마가 둘째아들 동인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일제는

군입대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온 가족이 흩어져 신사참배를 안하도록 의논하였다.
이에 동희와 동장이는 구포 고아원으로 동신이는 옥종면으로 
동인, 동수, 어머니는 남해 산골로 각 흩어져 살다가 해방 후 모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청주구금소에 있는 손목사님에게 어린딸이 보낸 편지  



손양원 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 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손양원 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사모, 안고있는 아들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 낳은 아들이다.



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막내는 손동길 목사, 세째 사위 김원하 목사, 큰 외손자 박유신 목사)



손양원 목사 장례식



순교자 동인, 동신 장례식, 1948. 10.24 애양원 교회 장례식 장면

1948. 10. 19 여순 사건 발생으로 동년 10.21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동인 나이 23살, 동신 나이 18살이었다.



손양원 목사 안장후 손동인,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
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 목사님의 묘가 있다.



순교자 손동인

1925년 11월 6일 손양원 목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절대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1948.10.21  여순사건 때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23세에 순교하였다.



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 목사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안재선
손양원 목사 순교 후 가족들과 함께한 안재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으나 손 목사님이 양자로 삼았다.



아홉가지 감사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영화화한 사랑의 원자탄 포스터와 비디오



대한민국건국훈장, 1995.8.15







지하 전시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손양원목사님은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사랑으로,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순교자요,사랑의 사도였다.그는 기도를 호흡으로 삼고,성경을 양식으로 삼고,전도가 생활이 되어 사신 분으로 원수에게는 사랑으로,고난받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서는 소망을 던져 주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또한 그의 설교는 몸으로 하는 설교였으며,그의 삶과 죽음을 통한 설교였다.

 

그의 사상에는 항상 민족의 정황이 문제가 되었고,민족 정신을 복음으로 승화 시켰다.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사상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국가와 민족의 사랑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았으며,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사상,종말에의 소망 말씀과 삶의 일치 등의 사상을 가지셨다.다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손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으며,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다가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사랑의 화신이요,한국 교회 일백년 교회사에서 세계 교회에 내 놓을수 있는 자랑거리이다.

 

주님께 부름 받기까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하였다.

 

1908년 7세 되던 해에 부친의 입신(入信)과 함께 자신 도 입신하고 같은 해에 본당(本洞)의 한문 성당에 입학했다. 이 때서부터 그는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 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도와 신앙 생활에 힘썼다.1914년 4월 1 일,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 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 고 천황 사친 배례와 요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합병 직후, 관공 서와 각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 때마다 거기에 최경례를 하게 함으로써 천황 숭배의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주입 하고자 했다.

1912년 7월 30일,그들이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는 각지에 요배소(遙拜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요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요배의 강요는 일반인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각종 제일, 축일마다 학생들에게까지 계속 강요되었다.

 

기독교 학교는 총독부의 결의에 따르지 않았으나 문제는 관공립 학교에 다니는 기독 학생들이 문제였다. 1915년에는 개정 사립 학교령을 공포하여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등 탄압을 가중화 시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한편 관공립 학교에서는 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 주입에 광분하였다.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동방 요배)를 표함으로써 수업이 시작된다. 신도 의식이 모든 공휴일마다 개최되고 학생들은 천황 사진에 절을 하게 된다. "

 

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이러한 궁성 요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 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하여 계속 학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복학 후 주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라고 했으나 주일은 학교에 갈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면서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가는 가운데 마침내 1919년 3월 24일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남달리 공부에 재간이 있고 배우려던 의욕이 강했던 그는 1919(18세)년 칠원 보통 공립 학교 졸업과 함께 서을 중동 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학업에 임하고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학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국동 교회를 다니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손 목사가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1920년4월3일 3·1운동의 여파로 아버지가 칠원 읍내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다가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는 일이 일어났으며, 손목사 자신도 철저한 주일 성수로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흔들리게 되자 극심한 생활고에 빠진 그는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70전을 출석하던 안국동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낙향하고 말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심신을 달랜 뒤 1921년, 다시 향학의 불꽃을 태우고자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한다. 이번에는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등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이 때 그는 일본 동양 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동경의 판교(板橋)성결 교회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게 되며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손 목사는 고향 칠원 교회에서 1914년 3월 17일에 이종윤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고, 1917년 10월 3일에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24년 1월, 손 목사는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자란 정양순씨(19세)와 결혼하고, 그 해 3월 23일에 일본에 다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임하는 도중 신앙의 새로운 도전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중생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 10월 23일에는 봉사하던 교회에서 집사로 피선되어 봉직하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동인이가 한 살이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에 교회를 세웠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감만동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던 중 1932년,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에게 은혜를 받은 문신활이란 성도가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손 목사가 왜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1932년, 감만동 교회에서 손양원 전도사님은 성조지(聖朝誌)를 가지고 사경 공부처럼 일주일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시로부터 부산 감만동 나병원의 배후에도 복음의 꽃송이들이 드문 드문 피게 되었지요. 암흑에 잠겨 있던 감만동 교회는 광명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곪아졌던 생명들은 생생하게 소리를 쳤더이다. 아! 모든 법과 의식에 결박되어 고통과 번민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는 소생은 날로 때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나이다. 뭇생명들이 그처럼 자비스럽게 해방을 받아 나가던 중도에 불행하게도 소위 목회자라고 하는 몇 사람의 시기로 인하여 손양원 전도사님도 감만동 교회 일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

 

손 목사는 당시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 조선의 잡지를 가지고 사경회처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된 것이다. 문신활의 편지 가운데 "부민정으로 떠난 뒤로"라고 한것으로 보아 감만동 교회를 사임한 후 손 목사는 그가 개척한 부민정 교회로 옮겨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민정 교회에서 목회를 전념한 것으로 사료된다.

 

신학교에서

 

손 목사는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 연구를 깊이하였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에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시무 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손 목사는 이 때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선교사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심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평양 신학교 교장 나부열(R. L. Roberts)목사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결국 손 목사가 1938년 3월 제33회로 졸업하고 나온 그 해에 신학교는 교문이 닫혀 버리고 말았다.따라서 33회 졸업생들은 학교가 폐쇄되어 버린 까닭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는 일까지 생겼다.

 

손 목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 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호통을 치고 그냥 들어갔다고 했다.

 

이 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청빙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손 목사의 이러한 외침, 어쩌면 와락 터져 나오는 벌떼와도 같이 신앙의 저 깊은 저변에서 용솟음치는 회개를 역설하는 설교로 인하여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 바다를 이루는 역사가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 목사는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라 한센병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들일 수 있는 처지 또한 못되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였다

 

한센병자의 영원한 벗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 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설사 그들이 자유롭게 밖에 나간다 할지라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가 일쑤였고, 차를 탄다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극장,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 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양원에 딸린 병실로 쓴 가옥은 모두 17호실로 되어 있는데 1호실부터 10호실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호실부터 13호실은 경환자실,14호실은 중환자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실에 거주하는 몇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흥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간호원 둘이 매달려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음으로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흥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손 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 목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 목사님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손 목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녹여 낸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된 사랑이 넘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한 목자

그가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병자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한 커다란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여순 사건이 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묘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

하고 보복하는 인민 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

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 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긴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부등켜안고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 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 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일대기

 

 

장로교 목사로서 순교한 손양원(孫良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孫宗一)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1813∼1873)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산돌은 1913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선교사 맥레이(Macrae, F.J.L.·孟浩恩)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회 때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당하자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여 퇴학당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교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복교되었으며, 1917년 7월 졸업하였다. 산돌은 1918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신문 배달과 만두장사를 하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녔는데 이때도 안국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20년 봄 부친이 풀려나자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10월 칠원읍 교회의 집사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정쾌조(鄭快兆)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24년 3월 도일(渡日)했다가 성결교회의 나카다 주이치(中田 重治)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결교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에 큰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할 것을 각오한 산돌은 매일밤 열심히 기도하던 중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그 해 10월 귀국해 부산에 있던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초량교회의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친교를 맺고 그의 지도와 신앙에 감명받았다.

 

한편 부산 감만동 상애원이라는 나환자수용소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산돌은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다고 전한다. 산돌은 "내 주소는 주님의 품속이며, 생일은 중생된 날입니다. 생일의 기쁜 잔치는 천당에 들어가는 그 날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산돌은 10여 년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南倉)교회, 부산 남부민동교회, 양산 원동(院洞)교회 등을 개척 설립하였다. 그는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열중하면서 능라도(綾羅島)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신학교에서도 산돌은 뜨거운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로 유명했다.

 

졸업한 다음 부산지방 시찰회 강도사로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다. 이때도 그는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1939년 7월 15일 산돌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산풍리에 있는 나병환자 요양원 애양원(愛養院)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그는 버림받은 나환자들의 몸을 씻기고 상처난 손과 발을 싸매주었으며, 때로는 입으로 더러운 피고름을 빨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언행이 일치된 산돌의 사랑에 넘친 신앙 실천은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감동시켰다. 거듭되는 신사참배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던 산돌은 마침내 1940년 9월 25일 연행돼 여수경찰서에 미결수로 감금됐다. 1941년 7월 광주구치소로 이감된 산돌은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1943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 위협에 "당신은 전향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앙이 문제"라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결국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산돌은 독방에서 감식과 독감으로 고생하면서도 "빈 방 혼자 지키니 고적함을 느끼지만, 성삼위(聖三位) 함께 지내니, 네 식구 되는 구나"는 한시를 지었다. 이처럼 뜨거운 일념으로 주님을 섬겼던 그의 신앙은 오로지 감사와 자족의 충만함이었다. 그는 기도와 찬송과 암송한 성경읽기로 신앙을 굳게 지켜 '옥중성자'로 널리 알려졌다. 산돌은 감옥에서도 수감된 사람들과 간수들에게까지 전도하고 설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취조 때도 기독교의 국가관, 신관, 그리스도관, 성서관, 말세관 등을 설명하느라 조서가 무려 500여장에 달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 만에 출옥하자 산돌은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나환자 목회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21일에는 당시 순천사범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 아들 동인(東仁)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동신(東信)이 좌익에 의해 '예수쟁이' '친미주의자'라며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기독교 신앙만 버린다고 약속만 하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아, 마침내 그의 두 아들은 총살당했다.

 

10월 27일 애양원에서 산돌의 두 아들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그는 '아홉 가지 감사'라는 설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 두 아들이 함께 순교하였으니 더욱 감사, 자식들이 총살당하면서도 전도했음에 감사,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더욱 감사,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회개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셨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후 반란이 진압되고 아들 형제를 죽인 안재선도 체포되어 계엄사령부에 의해 총살당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산돌은 가해자의 구명을 탄원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마침내 담당관들을 감복시켜 그가 출감되자 양아들로 입적하여 손재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산돌은 양아들을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부모까지 기독교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산돌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28일 새벽 여수 근처 미평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죽는 순간에도 기도했었음이 밝혀졌다. 10월 13일 오종덕 목사에 의해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애양원 뒤쪽 바닷가 동도섬에 산돌과 그의 두 아들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3년 4월 이곳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준공되었다. 한편 안용준(安瑢濬) 목사가 쓴 '사랑의 원자탄'(1949)이라는 산돌의 일대기가 출판되었으며, 훗날 이 책은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돼 해외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 신양흥업 제작으로 1966년 6월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산돌은 경건한 신앙인으로 평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항상 찬송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소외된 이웃인 나환자들의 등불이자 친구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을 정도로 경이로운 인물이다. 산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초인적인 사랑의 사도'였으며, 무신론자에 반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지켜 결국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교자였다.


골리앗의 죽음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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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키가 정말로 2m 90cm일지 궁금하죠?

놀랍게도 현대에도 그의 키에 근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퍼싱 와들러우 세계공인 최장신

공식기록 2m72cm

 

비공식기록으로는,

2m85cm를 기록한 22세에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발견이 이루어 졌습니다.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미터

90센티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위 그림은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거인의 해골입니다. 이마를 한번 보십시오.

물매돌이 아직도 정통으로 이마 한복판에 확고히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신문의 영어표현이 절묘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물매에서 날아간 돌이 아직도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영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사실이라는 것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골리앗의 해골인 이유는

첫째는 연대가 b.c 1000년 경. 즉 다윗시대에 죽은 것이고

둘째는 2미터 90센티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골리앗의

키하고 동일합니다.
(사무엘 상 17장 4절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규빗 한뼘이요.

여섯규빗 한뼘: 약 2m 90cm 가량 됩니다.
(참조: p436 [큰 성경]. 해설찬송가 편찬대표 김의환 박사 성서원 출판사)

셋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넷째는 돌이 이마에 박혀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도 골리앗의 이마에 돌이 박혔다고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 49절 =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리고 참고로 아무리 노력해도 돌이 인간의 머리를 뚫거나 박히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아무리 위조하려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일은 일어나지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에서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골리앗을

물매돌로 죽였다는 근거이자 성경이 사실이라는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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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덮개

 

 

 

수놓은 덮개

덮개 바깥쪽 두터운 것

빨간 덮개

회색 덮개

 

 

 

 

성막의 덮개      ( 출 26: 1-14 )

 

       성경 요약

* 성막덮개는 넷으로 덮었다.

 

* 제 1 덮개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를 수 놓아 만들었다.

   ( 5폭+5폭=10폭,  청색 고 50개+50개=100 개, 

             연결 금갈고리 50개, 규격20mx 14m )                

* 제 2덮 개=흰 염소 털실로 짜 만들었다.

   ( 5폭+6폭=11폭,  청색 고 50개+50개=100개,연결 놋 갈고리50개,  규격 22mx15m)

 

*제 3 덮개=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제 2 덮개보다 약간 크게 만들었다.)

 

*제 4덮 개=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제 3 덮개보다 약간 크게 만들었다.)

 

         영적 교훈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덮개 속에는 황금빛이 찬란 합니다.

 

*제 1 덮개는 청색실, 자색실,홍색실,가는 베실로 짰습니다.

  ( 청색은 생명을 의미 합니다. )

  ( 자색은 왕권을 의미 합니다. )

  ( 홍색은 고난을 의미 합니다. )

  ( 흰색은 성결과 부활을 의미 합니다. )

 

* 제 2 덮개는 흰 염소 털실로 짜서 만들었다.

  ( 버림받은 예수-구원 받은 예수를 의미합니다. )

 

* 제 3 덮개는 붉게 물들인 수양 가죽으로 만들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에수그리스도를 의미 합니다.)

 

* 제 4 덮개는 해달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을 의미 합니다.

 

* 덮개는 교회의 모습 입니다.

*덮개는 목회자와 성도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 [Garden of Eden                       

            

에덴동산 [Garden of Eden]

많은 사람들이 신화처럼 생각하고 있는, 인류의 시조(始祖)가 처음에 살았던 에덴동산의 위치를 지금 정확히 알 수 있을까?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화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땅에 둘렸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세기 2장 10절~14절]

 


창세기 2장 10∼14절 내용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강(江)이 발원하여 네 강의 근원이 되었는데, 그 중에 비손과 기혼 두 강은 현재 없는 것이어서 잘 알 수 없으나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헬라어:티그리스)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0∼15)

 

라는 말씀을 보아 이 두 강은 곧 현재 시리아 동쪽에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틀림없다. 두 강은 현재 이라크에 있다.  역사가들도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을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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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라테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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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크리스 강]

 

 1986. 3.20일자 스포츠 서울에 “현대판 에덴의 동산을 만든다”라는 제하에 이하와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터키 정부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우르 지역을 중점 개발 현대판 에덴의 동쪽으로 만들 대규모 개발계획을 발표. 터키 정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오는 2000년 까지 모두 13개의 다목적 댐을 건설하고 관개시설을 확충, 세계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심지였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킬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한편 외국의 고고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를 무분별하게 개발함으로써 이 지역 내에 묻혀 있는 세계 문명발상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귀중한 유적들을 모두 침수시킬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 터키 정부의 개발계획을 반대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네 강 중에 두 강은 아마 이스라엘 남쪽으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1982년 11월 28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콜롬비아호 고대 강 발견”이란 제하에 “미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에서 발사된 레이더가 아프리카 북부의 사하라 사막 깊숙이 묻힌 고대 강 줄기를 찾아내 고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작년(81년) 11월 두 번째 우주여행 때 콜롬비아호가 찍은 레이더 사진을 분석한 미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 8명이 공동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진이 수만년 동안 사하라 사막 땅 속에 숨겨져 있던 큰 강과 계곡, 홍수가 났던 들판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하라 사막에는 물 없는 큰 강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왔다. 사진을 분석한 과학자들 중 몇 명은 분석 결과를 입증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 현장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 사막에 묻혀 있는 큰 강이 에덴동산의 네 강 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주변에서 발견된 바위와 동굴 벽화에 큰 동물과 사냥하는 모습, 배를 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곳이 울창한 숲이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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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과학 뉴턴 ’93.12월호
“에덴동산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 -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과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는 신앙의 성서인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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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일보 ’93.8.12
“이라크 쿠르나 - 낙조 쓸쓸한 「에덴동산」 옛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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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 ’87.6.20
“에덴동산은 지금의 페르시아만(灣) - 중동지역서 성서고고학 발굴작업 활발. 미 미시시피대 조사단 「잃어버린 강」 비손 흔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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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일보 ’91.2.10   
“우르 주변 「에덴동산」 등 최초의 역사유적 수두룩 - 점토판에 갈대로 새긴 최초의 문자 출토”
 # 내셔날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983, 9월호(Sep) “사하라는 녹색초원(草原)이었다 - 물소 수렵 벽화 발견 등 입증자료. 급격한 기후변화로 사막화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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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 지역은 거의가 불모지이며 사막이다. 그런데 세계 석유의 70% 이상이 그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석유가 나오려면 그 옛날 그곳에 많은 동식물 유기물질이 갑작스런 천재지변에 의해 땅 속에 매장된 일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썩지 않고 뜨거운 지열 등의 화학적 변화를 받아 에너지를 자체에 갖고 있어야 한다.

 

옛날 에덴동산에는 특별한 기후 관계로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울창하고 엄청나게 큰 수목이 자라고 있었으며 온갖 거대한 짐승들이 활동했을 것이라는 증거가 많이 있다. 그것들이 대홍수 및 그에 따른 지각변동에 의해 다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지적한 성경 말씀이 있다.

 

“너의 영화와 광대함이 에덴 모든 나무 중에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 나무와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에스겔 31:18).

 에덴의 광대한 나무와 모든 것들이 지하에 묻혀 버림으로 그것이 훗날 석유가 되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중동 지방에서 기름이 흘러나왔다는 성경 기록도 있다.

이 지역에 세계70%이상의 석유가 나오고있다. 현재 황무지인 이곳 지하에서 이런 석유들이 나오는

것은 과거에 이곳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식물과동물이 왕성했던 곳이였다는 증거이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tar pits)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창세기 14:10).

 

정유공장에서 좋은 기름을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가 역청인데, 도로 포장(pave)할 때에 쓰이는 아스팔트가 그것이다. 그 옛날 중동지방에는 땅 속에서 기름이 솟아나온 곳이 있었는데, 휘발성이 강한 것은 다 기체화하고 남은 것이 여기저기 역청 구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소돔 고모라 왕들이 전쟁할 때 그 역청 구덩이에 군사가 빠져 죽게 된 것이다.

많은사람이 신화처럼 여기던 성경에기록된 에덴동산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하였던것이다



여리고 / 고고학 / 성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마주친 첫번째 요새는 여리고였다.육중한 성문과 높은 성벽을 앞에 두고 그들은 오늘날의 전술로는 이해하기 힘든 성벽 돌기를 하루 한 차례씩 6일동안 시행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성벽중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 어디인지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성경 여호수아서(6장)에 의하면 일곱째 날 성벽을 일곱 바퀴 돌면서 뿔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만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기적적으로 파괴시켰다는 여리고의 성벽은 성서고고학 발굴사에서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다. 광활한 요단평원에 24m의 높이로 우뚝 솟은 여리고는 약 4만㎡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였지만,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엘리사 샘가에 자리잡은 여리고는 광야 한가운데 위치한 비옥한 오아시스로,로마시대에는 비싼 값에 팔리는 향유의 생산지로 클레오파트라의 영지가 되었고,헤롯의 궁전과 별장이 위치한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

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결국 그들은 기원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성벽을 선택했고,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사건도 기원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1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거느린 영국이 이 위대한 발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젤린의 발굴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리버풀대학의 가르스탕(J.Garstang)은 1930년부터 새로운 성벽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특히 그는 처음으로 여리고에서 기원전 3000년~1500년 사이의 무덤들을 발굴했다.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특히 잘 보존된 토기들을 통해 여리고의 주거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하지만 7년동안의 발굴결과 가르스탕이 내린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단지 연대를 1백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기원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여리고 발굴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이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한 것이다.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토기 분석을 통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한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이곳에는 이미 1만년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한편 그녀의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 결과는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1868년부터 1백여년동안 유럽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네차례에 걸쳐 샅샅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리고의 주거역사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여호수아의 성벽이 아직도 흙속에 파묻혀 있다는 낙관론과 오랜 세월 빗물에 씻겨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으로 선포된 여리고는 지금도 새로운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에서 발췌 (김성 교수)(협성대학·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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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왕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1. 유다 왕들의 유골(?)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표현은 곧 에꼴 비블릭크 무덤의 안치대 밑에 있는 유골보관소를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기존의 유골을 안치대 밑에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는 것이 당시의 독특한 매장 풍습이었다.

2. 베이의 `다윗성의 무덤'

프랑스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가 1913~4년에 다윗성에서 발굴한 이 동굴들은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다윗성 안에 묻혔다는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왕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그 구조가 무덤과 차이가 있고 당시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뚜렷하게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3. 드 소시의 `왕들의 무덤'

드 소시는 1851년 초 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신약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아디아베네왕국 출신 헬레나 여왕의 가족무덤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시온산에 있는 다윗의 무덤을 찾지만 그 곳이 3천년 전의 무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 그 곳은 2~4세기에 건설된 교회 건물로 십자군시대 이후 다윗 왕의 기념묘로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다윗의 무덤을 찾는 작업은 1851년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의 한 큐레이터가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왕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한 바위굴 무덤에서 입구를 막고 있던 둥근 돌을 굴려서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서 다윗 왕의 관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럽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은 다윗을 비롯하여 모두 23명에 달하는 유다 왕들의 무덤 중 하나라도 찾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따라서 다윗의 무덤이라는 소식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 소시(F.de Saulcy)는 1807년 오늘날 벨기에에 위치한 `릴르'의 전통적인 군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도 군인이 되기 위해 포병학교에 진학했고,재학중 고고학에 흥미를 느껴 취미삼아 연구결과들을 발표했다.그러다가 결국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에 큐레이터로 취직하게 됐다.

43세 되던 해에 부인을 잃게 된 드 소시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예루살렘까지 가는 성지순례를 계획했다.경비 마련이 문제였으나 당시 파리 귀족들의 문제아들을 성지순례를 통해 순화시키는 프로그램의 후견인으로 나서면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다. 1851년의 탐사 후 드 소시는 파리에서 정치가로 지내다가 프랑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1863년 `왕들의 무덤'을 공식적으로 발굴하게 됐다.

당시 드 소시는 `여왕'이라 기록된 석관을 발견하고,이를 시드기야의 왕비로 해석했다.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전형적인 신약시대의 가족무덤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이곳이 당시 유대교로 개종했던 아디아베네왕국 출신인 헬레나 여왕과 그녀의 가족 무덤으로 확인됐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성 밖으로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느헤미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윗의 무덤이 성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프랑스의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는 1913년~1914년 다윗의 무덤을 찾기 위해 성의 남쪽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사하던중 바닥을 파서 만든 여러 개의 바위굴들을 발견했다.

베이는 그중에서 길이 15.7m,폭 2.4m에 달하는 가장 큰 동굴을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굴이 도무지 무덤같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BC 10세기의 무덤이 아직 한군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 길은 없지만 여러 고고학자들의 지적대로 그 동굴은 구조상 창고나 물저장소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 곳은 후대에 채석장으로 이용됐는데 과연 누가 왕들의 무덤을 감히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3의 왕들의 무덤이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이 무덤은 오늘날 `에꼴 비블릭크'(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로 더 잘 알려진 성 스데반 수도원 구내에 있으며,1885년에 처음 발견됐지만 신약시대의 무덤 정도로만 알려졌었다.하지만 바르카이와 클로네르가 재발굴한 이 가족무덤은 전형적인 BC 8~7세기의 무덤으로 가운데 다섯평 정도의 전실을 일곱 개의 묘실이 둘러싸고 있고 한꺼번에 20여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시신 안치대 밑에는 모두 네 개의 유골보관소가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유골을 한군데 보관하는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의 바위굴 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족무덤의 특징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시신들이 안장됨에 따라 안치대에 있던 기존의 유골은 그 밑에 파 놓은 유골보관소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다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좋은 예다.

열왕기서에는 다윗 왕부터 아하스 왕까지는 다윗 성안에 묻혔고 그후의 왕들은 성 밖에 장사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오늘날 다윗 성에는 여러 채의 집들이 있어서 다 발굴하기가 어렵다.따라서 다윗 왕의 무덤은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현재는 에꼴 비블릭크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김성(협성대 교수·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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