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 -

4. 불꽃처럼 타오른 성령충만


성령충만의 불길 한국을 넘어 세계로
교회학교 기구 정비, 여의도성전 건축
 
순복음의 영향력 국내를 넘어 해외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우리 교회의 첫 해외선교 시작은 1964년이었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 요청으로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 창립 5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첫 선교여행길에 올랐다. 미국 하나님의성회교단 창립 50주년에서 한국 하나님의성회 대표로 참석한 조용기 목사는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의 상황과 비전을 제시하고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전했다. 기념식 후에도 조용기 목사는 2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한국과 한국기독교를 전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1967년 5월 31일 세계오순절총회에 아시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스라엘, 이란, 태국, 베트남, 중국, 일본 등 18개국 30여 개의 도시를 100여 일간의 일정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최자실 목사도 10월 28일 일본선교여행을 떠났다. 일본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최자실 목사는 비자를 연장하면서까지 동경지방을 중심으로 선교집회를 약 40일간 계속했다. 1966년에는 대만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최자실 목사는 약 50일간 신소회를 비롯해 내포교회, 기룡신소회 등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대만에 성령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한편 조용기 목사는 1966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1967년에는 오순절세계협의회 고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를 통해 1969년 7월 7일 제3회 하나님의 성회 동북아아세아대회를 우리 교회에서 개최하게 됐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피지, 말레이시아, 호주 등 13개 국가 대표 130여 명의 목회자 및 성도들 그리고 방송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7월 11일까지 진행된 이 행사에는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과 김현옥 서울시장 등 정계 관계자들도 참석해 축하를 전했다. 이 대회를 통해 전 아시아에 한국교회의 위상을 보이는 한편 아시아 교회들간의 교류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교회학교 기구의 정비

 서대문으로 교회를 이전하면서 장년 성도들의 증가와 더불어 아동 및 청소년 성도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주일학교 설립의 시급함을 느껴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국민학생과 미취학 아동들이 중심이 됐다. 여러 가지로 준비가 미비했던 주일학교는 서울 지역에서 교육제도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다는 19개 교회를 선정해 매주 견학과 탐방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 제도를 정비했다. 수개월의 과정을 거쳐 정비된 행정제도를 통해 주일학교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됐고 뒤이어 C.A(Christ’s Ambassador)중·고등부가 발족했다. 당시 교사들은 주일 저녁 예배 후 조용기 목사의 사무실에서 주일 공과 공부를 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면 성령 충만한 믿음과 탁월한 열심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매주일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는 물론이고 여름성경학교, 부흥회 등에는 교사들이 큰 북을 둘러메고 교회 인근 동네인 서대문 네거리와 금화초등학교, 미동초등학교 등을 돌며 어린이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방법이나 시설 등이 많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교단 차원의 어린이찬송가도 없던 시절 처음으로 어린이 찬송가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300여 곡의 찬송가를 실어 1000권을 출간했는데 순식간에 절판되어 재판을 발행하기도 했다.

 1964년 1월에 청년선교회를 설립했다. 청년선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선교단체로서 근로 청소년들의 영적 신앙교육과 ‘청년선교는 청년들이 담당한다’는 큰 사명을 가지고 시작됐다. 이후 구로공단 내 가스펠 하우스를 설치하고 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대문을 넘어 여의도를 바라보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는 나날이 부흥성장을 거듭해 1968년에는 8000명에 이르렀다. 3부로 나뉘어 주일예배를 드렸지만 그래도 좌석이 없어 일부 성도들은 주차장에 비닐을 깔고 앉아 스피커를 통해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특히 예배가 있는 날이면 서대문 로터리 일대가 마비가 되면서 서울시내 교통혼잡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당회에서는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대지를 물색하였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터가 부족하지 않으면 너무 비쌌다. 그 때 비행장만 있는 모래벌판의 섬 여의도가 논의됐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반대했지만 조용기 목사는 내일에 대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여의도로 이전할 것을 천명했다.

 결국 당회에서도 여의도로 이전을 결정, 1969년 4월 여의도 땅에서 첫 삽을 떳다. 당시 당회에서는 공사비가 부족해 교회 옆에 아파트를 지어 공사비를 마련코자 아파트 건축을 강행했다. 1970년 가을, 아파트는 완공되었으나 교통불편 등의 이유로 입주자가 거의 없었다. 거기다가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오일쇼크와 달러 하락으로 건축자재의 값이 엄청나게 오르면서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됐다. 당시 오일쇼크로 많은 성도들이 직장을 잃었고, 은행의 신용융자가 축소되는 등 교회의 재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기 목사는 냉천동 집을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지만 당시 교역자들에게 사례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정도로 시련의 깊이는 더해갔다.

 조용기 목사는 지붕도 씌우지 못한 교회 건물의 녹슨 쇠기둥을 붙들고 울며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성도들도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함께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골조만 겨우 서 있던 여의도성전에 매일저녁 수백 명의 성도들이 여의도 특유의 칼바람 속에서도 금식하며 기도했다.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기도할 때 결코 하나님은 그 기도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기도회에서 한 80대의 할머니 성도가 대대로 쓰던 놋그릇이라며 돈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내놓겠다는 말에 조용기 목사는 통곡하며 “이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성도들은 조용기 목사와 같이 함께 울며 한 명, 한 명 교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패물을 팔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여성도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팔아 헌금하기도 했다. 이런 성도들의 헌신 속에 1973년 8월 18일 1만 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복음의 7대 신앙]③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

 ‘순복음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100% 믿으며, 일상생활에서 100% 실천하는 복음을 말한다. 이 순복음 신앙은 일곱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를 ‘순복음의 7대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곧 ①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 ② 오순절 성령충만 신앙 ③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 ④ 좋으신 하나님 신앙 ⑤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신앙 ⑥ 다시 오실 예수님 신앙 그리고 ⑦ 나누어 주는 신앙이다. 이처럼 순복음 신앙은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내년 5월 교회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7회에 걸쳐 순복음의 7대 신앙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오순절 성령충만의 신앙… 땅끝까지 복음전하는 선교사명 감당해야”

 지난 호에서 살펴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초대교회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 증거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열정과 능력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다. 순복음 신앙은 갈보리 십자가의 메시지를 성령충만한 가운데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적 영성을 지닌다. 이번 주에는 순복음 7대 신앙 가운데 세 번째 단계인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오순절 성령 강림과 복음 증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복음 증거의 명령(마 28:18∼20; 막 16:15; 눅 24:46∼47)은 교회 가운데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해 가능하였다. 사도행전은 실제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유럽의 마게도냐 지역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복음의 확장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시작과 확장이 ‘성령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오늘날 교회의 사명 또한 분명해진다. 성령 안에서 그 기초가 세워진 교회는 성령 안에서 성장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확장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충만을 입은 교회는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복음의 신앙은 성령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선교적 신앙을 지닌다.  

 2. 순복음 신앙과 선교적 영성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복음 증거의 선교적 영성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선교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오순절 사건은 교회의 복음 증거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 왕, 선지자와 같이 특수한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이 오순절 사건을 계기로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었다. 이를 가리켜 베드로는 구약 요엘서의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고 선포하였다(행 2:17∼18).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부으심과 복음 증거가 동전의 앞뒤와 같이 하나로 연결되는 사건인 것처럼 보편적 성령의 임재는 보편적 선교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수한 사람들에게 한정되거나, 제한된 지역에 머무는 선교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구나 선교를 꿈꾸고, 어느 곳이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증거하는 그것이 바로 순복음 선교가 지향하는 바이다.  

 둘째,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선교이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행 1:8)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 간절히 성령을 사모하였다. 이때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것은 복음 증거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주님의 현재적 임재를 체험하며(요 14:26), 그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행 1:8). 따라서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선교에 효과를 나타내는 신앙이다.

 셋째, 지금 여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이다.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와 활동을 믿고 증거하는 신앙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능력을 체험하고 선포하는 신앙이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죄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죄사함과 치유와 회복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며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널리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로 임하는 것을 믿고 선포하는 신앙이다.

 3. 순복음의 선교적 영성의 특징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적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복음 증거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준비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일종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제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복음 증거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순복음의 선교적 사명은 초대교회의 그것처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믿음이 열정적인 선교로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신은 순복음 선교의 특징적 요소로 나타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다. 선교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의 역사를 나누는 것이다. 순복음의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에 나타난 선교적 개념은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 정의와 사회적 관심을 포괄하는 사회 구원의 차원으로 그 영역이 확대된다. 이것은 포괄적 선교이자 총체적인 선교로 개인 영혼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더불어 사회적 나눔과 돌봄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구원을 위해 한국과 세계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순복음 선교는 사회적 나눔과 돌봄이라는 과제에 대해서 신학적, 제도적, 교단적 차원을 넘어 협력하며 국경을 초월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폭넓은 개념을 지닌다.

 순복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믿으며, 그 기반 위에서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복음 증거의 명령에 따라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적 열정을 지닌다. 이러므로 순복음의 성도들은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따라 만민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하나님의 역사하심(1962∼1972)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서대문서도 부흥의 불 타올라

 서대문시대 개막

 

1961년 대조동 천막교회가 계속 부흥성장한 결과 400명이 넘어가면서 최자실 목사와 당시 조용기 전도사는 중요한 결단을 필요로 했다. 앞서 9월에 서대문 로터리에서 천막대부흥성회가 열렸는데 성회가 진행된 한 달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이 때 조용기 목사는 성령을 통해 천막대성회가 열린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라는 강한 소망이 생겼다. 그해 10월 15일 천막대부흥성회가 열렸던 서대문 네거리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개척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1962년 2월 18일 순복음부흥회관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4월 26일 조용기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5월 13일에는 교회명칭을 순복음부흥회관에서 순복음중앙교회로 변경했다. 서대문시절에도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꾸준히 부흥했다. 서대문으로 이전하면서 교회 성도수가 늘어 교회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첫 집사 임명이 1961년 거행됐다. 송재덕 집사를 비롯해 5명이 집사로 임명됐고 1966년 4월 5일에는 최초의 장로장립식이 거행됐다. 이 때까지 교회는 당회가 구성되지 않아 제직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장로를 세움으로 인해 조용기 목사를 당회장으로 하는 당회가 구성되어 교회를 치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1975년에는 장로들의 신앙향상을 위해 장로친목회가 결성됐다. 장로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교인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설립됐던 장로친목회는 1988년 장로회로 거듭나 사역변경을 보다 확대했다. 당시 초대회장에 이규화 장로가 선임됐다.
 


교회부흥 일조한 구역조직의 탄생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최대교회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구역조직도 이 때 시작됐다. 1964년 성도수가 3000명이 넘고 1965년에는 2배가 넘는 7500명으로 부흥했다. 이렇게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조용기 목사는 어느 날 오후 2시간에 걸쳐서 수백 명의 성도들에게 침례를 베풀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1주일간 요양했지만 그 다음주 주일 설교하러 올라갔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조용기 목사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는 도중 출애굽기 18장 18절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다음 주일 제직들을 부른 조용기 목사는 사역을 분담한 구역조직을 발표하게 된다.
 구역을 처음 조직하던 당시에 여성을 리더로 삼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조용기 목사는 20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구역을 발족하고 그들을 구역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각 구역에 있는 성도들을 모아 양육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나아가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구역모임과 교회로 초청할 것을 당부했다. 구역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고 운영될 수 있도록 구역장들을 교육하고 지침들을 발표했다. 구역원이 15명이 되면 분리하도록 한 결과 19678년에는 수백개의 구역으로 성장해 교회부흥에 크게 일조했다. 

 
남녀선교회 태동 남친목회·여전도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최대 봉사기관인 남녀선교회는 서대문시절에는 남친목회와 여전도회로 각각 창립됐다. 남친목회는 남성구역이 생기기 이전인 1962년 남성 성도들의 모임의 필요성을 느껴 송재덕 집사를 비롯한 남성 집사들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짐으로 시작됐다. 처음에는 회원들의 가정을 순회하며 정기모임을 갖고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독려하는 것이 주였다. 그러나 2차 정기총회 이후 본격적인 조직을 갖추어 노방전도를 실시하고 신설된 남성구역 심방, 교회의 환경미화, 시설 완비, 조용기 목사의 설교집 제작 등을 시작했다. 교회가 부흥될수록 남친목회의 회원도 증가함에 따라 회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적극적으로 활용,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성도들의 증가에 따른 교통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교통봉사를 비롯해 교회 대내외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선교회라는 명칭은 1968년 임시총회를 통해 개칭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봉사기구로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전도회는 1959년 대조동 천막교회시절 발족해 당시부터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서대문시절에는 교회 교구조직에 참여하며 노방전도, 가정심방, 병문안, 결신자 심방, 장례 등 교수 일에 우선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구치소 방문, 신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 등 사역영역을 지속적으로 넓혔다. 1970년에는 부인선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최자실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절대순종의 자세로 교회의 봉사에 임했다. 1975년 부인선교회는 지금의 여선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성찬 떡과 포도주를 만드는 등 교회를 위한 사역 지경을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다. 

 매스컴 통한 전도 시작

 1966년 12월 12일 순복음문서전도회 창립회의가 열렸다.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교회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월간 신앙계를 발간하게 됐다. 1967년 2월 5일 발간된 신앙계 창간호에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 최자실 목사(당시 전도사)의 일본 부흥성회 화보, 성도들의 신앙시, 간증 그리고 신앙상담 등이 있었다. 또한 성도들의 올바른 성경공부를 위해 ‘복음통신’이라는 통신성경공부가 실려 있었다. 이후 기관지의 성격에서 발전해 초교파적으로 기독교문화를 이끄는 대변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9월 4일에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극동방송을 통해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성도들의 간증이 담긴 ‘순복음의 시간’이 방송됐다. 또한 교회 5층에 녹음실을 갖추어 설교테이프를 제작, 전도용으로 활용했다


성령의 역사로 폭발적 부흥 일어난 ‘천막교회’


대조동 빈민가에 일어난 기적천막교회, 기사와 이적 나타난 초대교회 행전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 주셨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으며 가시는 곳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도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조용기 전도사는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을 큰 소리로 읽고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믿으면 아멘 하시오”라며 믿음의 고백을 시켰다. 예배에 모인 사람이라곤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 그리고 최 전도사의 세 자녀와 그 집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뿐이었다. 그러나 설교하는 조 전도사의 목소리는 마치 수천 명을 상대하듯 우렁찼다. 조 전도사는 “하나님, 대조동 30호 모두가 몽땅 예수 믿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최 전도사의 자녀들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며 귀를 틀어막기까지 했다. 이날의 예배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이요, 출발이 되었다.

 1958년 5월 18일 굵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는 늦봄 저녁, 서대문구 대조동의 산기슭의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허름한 집에서 조용기 전도사의 설교로 예배가 드려졌다. 대조동은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빈민촌으로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근근이 살아가는 환경이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조용기 전도사는 더위와 추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대조동 빈민가를 발이 부르트도록 순회하며 읽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겉으로 보아도 가난에 찌든 오두막에 살던 무성이 엄마는 7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중풍병을 앓게 되어 단 한 번도 자기 발로 일어선 적이 없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조용기 전도사가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악취로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방치되다시피 한 두 아이의 위생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과 병자를 물로 씻긴 후 조용기 전도사와 함께 이 여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바싹 야윈 무성이 엄마가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했다. 두 사람의 방언기도가 다시 이어졌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는 성경말씀에 의지해 간절히 기도하며 병마를 쫓았다.
 30일간의 영적 전쟁 끝에 무성이 엄마는 걷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어서 교회에 나타나자,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7년간 중풍병을 앓던 무성이 엄마가 고침을 받은 이 사건은 천막교회에 첫 번째 일어난 신유의 기적으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부흥의 촉발점이 되었다. 천막교회의 놀라운 소식은 서울역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앉은뱅이 소년에게도 전해졌다. 어느 날 소년은 천막교회를 찾아와 조용기 전도사에게 걷게 해달라며 기도를 요청했다. 성도들과 함께 있던 조용기 전도사는 “하나님 저 소년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소년을 고치지 못하면 저도 이곳에서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라며 뜨겁게 기도했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리를 펴라”고 외쳤다. 그리고 소년은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떼더니 곧 뛰기까지 했다. 또 알코올 중독으로 10년간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 유화문과 심장병에 걸린 아내 이초희 씨 사이엔 9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들 부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 같은 신유의 기적이 거듭되면서 주민들은 물론 동네 불량배들조차 회개하고 천막교회를 찾아왔다. 심지어 무당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등 수많은 결신자가 생겨 났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마 11:12). 천막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는 극진한 정성과 능력 있는 설교, 거기에 신유의 기적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개척한지 1년 반 사이에 200여 명이 영혼 구원을 얻으며 급속도로 부흥했다.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세워진 천막이 일곱 개나 되었다. 가난한 성도들이 드린 헌금으로 더 큰 천막을 구입해 넓혀가는 일은 서대문 로터리로 교회를 이전할 때까지 계속됐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처럼 천막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키워드는 바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 교회 성장의 영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천막교회에 울려 퍼진 희망의 메시지

 1960년대 초기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국민들이 살 길을 찾아 서울로 대거 몰려들던 시기였다. 그들에겐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필요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헐벗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믿음과 꿈을 가지라고 도전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강단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천막이 찢어질 듯한 강렬한 음성과 깊고 오묘한 말씀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으며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했다. 

천막교회의 또 다른 영적 유산 ‘주일학교’

 천막교회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물려받은 영적인 유산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주일학교 운영이다. 천막교회의 주일학교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학교의 모태가 된 것이다.
 대조동 주민들은 낮에는 대부분 일을 나가고 어린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병자들은 집에 있었다. 천막교회가 세워지기 전 최자실 전도사는 고아원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아원 부지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서 육의 고아만이 아니라 영의 고아도 고아라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의 영적인 어머니가 될 것을 결심했다. 최자실 전도사는 동네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을 씻기고 품에 안아주면서 노래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미 천막교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인 아이들이 60∼70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해 주일학교는 천막교회 부흥의 또 다른 중심축 역할을 했다. 주일학교 규모는 점점 커지면서 주로 20대 후반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주일학교는 교회가 서대문으로 이전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20여 명의 교사가 3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됐다.
 성령의 역사로 역동했던 천막교회는 개척 3년만인 1961년 3월 그 동네 주민들 보다 많은 4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났다. 그 이듬해엔 800여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이렇듯 대조동 천막교회는 부흥의 뜨거운 열기 속에 서대문으로 이주하기 위한 모든 준비와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하나님의 부르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단일교회로는 세계최대교회라는 타이틀처럼 전 세계적으로 부흥성장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큰 교회로써가 아니라 오순절성령강림 역사의 재현이라는 평가와 함께 전 세계에 불고 있는 성령바람의 근원지다. 기독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성장의 아이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보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1958년 5월 18일 창립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내년이면 창립 60주년을 맞이한다. 이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성령의 역사를 다시한번 발견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사과 상자를  강대상 삼아 드린 첫예배…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하는 씨앗 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효시(1958∼1961)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조동 깨밭에 세워진 천막교회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성령과의 동행이었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 이전에 조용기 목사와 성령과의 만남 그리고 최자실 목사와 성령과의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조용기 목사 

 조용기 목사는 조두천 장로와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1936년 2월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동래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조용기 학생은 갑작스러운 폐병으로 그의 삶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당시 폐병은 전염성이므로 가족들과도 격리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그는 병마와 함께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술을 총동원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그에게 누나의 친구가 전해준 것이 성경이었다. 조용기 목사가 처음 복음을 접한 순간이기도 했다.

 별다른 차도가 없어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조용기 목사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켄 타이스 선교사가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 들려오는 말에 이끌려 천막에 들어선 조용기 목사는 그 곳에서 선교사의 기도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맛보게 됐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통곡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됐다. 부흥회를 마치고 선교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켄 타이스 선교사는 조용기 목사의 영어실력에 깜짝 놀라며 통역을 부탁하게 됐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선교사를 따라 다니며 그의 설교를 통역하게 되는데, 통역을 하며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신유체험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생기게 됐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제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오늘밤이라도 주님이 저에게 현현해 주신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지 사흘 때 되던 날 새벽 2시경 인기척에 잠을 깬 조용기 목사는 흰 옷을 입은 사람의 형체를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인줄로 착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버지가 아닌 선교사가 말한 그 예수님임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라게 됐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줄테니 평생 내 종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네 저를 치료해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일순간의 체험이었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폐병에서 자유함을 얻는 조용기 목사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됐다.
 조용기 목사는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신학교에서 목회 동역자인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된다. 

동역자 최자실 목사와의 만남

 최자실 목사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7세에 간호원을 시작으로 이후 서울에서 성냥공장과 비누공장 등을 운영하며 사업가로서 기질을 보였다. 6.25전쟁으로 진해로 피난한 그녀는 다시 사업을 시작하며 재물에 집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심지어 어머니와 맏딸을 하늘나라로 보낸 이후 그녀의 삶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운영하던 사업체들이 도산하면서 삶에 대한 남은 의지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자실 목사는 자살을 결심하고는 극약을 들고 삼각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부흥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체험하게 됐다. 이후 신학을 결심하고 순복음신학교에 응시해 합격해 조용기 목사를 만나게 됐다.

 신학교시절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는 각각 학생회장과 전도부장으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노방전도에 앞장 섰다. 특히 조용기 목사는 노방전도시 설교를 도맡아 하며 신학생들을 이끌었다.
 조용기 목사는 원래 목회자의 길을 가기보다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 신학자로서의 꿈을 꾸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둔 조용기 목사가 급성폐렴을 앓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의 꿈에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고열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는데 최자실 목사가 앞장 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간호하면서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건강을 회복한 조용기 목사는 감사의 뜻을 담아 최자실 목사에게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최자실 목사가 고민 끝에 조용기 목사의 뜻을 수락하면서 서로가 기도로 중보하는 동역자로서 첫 발을 딛게 됐다. 

다섯 명이 드린 첫 예배

 신학교를 졸업한 최자실 목사는 교회개척을 결심하고 기증 받은 대조동 산기슭 땅 위에 집을 짓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됐다. 조용기 목사를 초청해 드린 첫 예배에서 최자실 목사는 강대상이 없어 사과상자를 세로로 세워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대신했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 그리고 최자실 목사의 자녀들인 성혜, 성수, 성광 삼남매 다섯 명이 예배를 드렸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마가복음 16장 17절을 본문으로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비록 다섯명이었지만 조용기 목사는 언제나처럼 강한 성령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 예배가 세계최대교회를 이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첫 예배로 영원히 기록될 줄은 당시 말씀을 증거하던 조용기 목사조차 상상도 못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알고 계셨다.     


[순복음의 7대 신앙] ①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인도해”

 ‘순복음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100% 믿으며, 일상생활에서 100% 실천하는 복음을 말한다. 이 순복음 신앙은 일곱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를 ‘순복음의 7대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곧 ①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 ② 오순절 성령충만 신앙 ③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 ④ 좋으신 하나님 신앙 ⑤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신앙 ⑥ 다시 오실 예수님 신앙 그리고 ⑦ 나누어 주는 신앙이다. 이처럼 순복음 신앙은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내년 5월 교회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7회에 걸쳐 순복음의 7대 신앙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은 단지 철학이나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의 사역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의 사역과 순복음의 신앙과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갈보리 십자가와 인간 이해

 인간은 타락 이후 육적으로는 숨을 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놓였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살던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재 속에 살게 되었다. 영이 죽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게 되었다(창 6:3).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 안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창 6:4).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바뀌었고, 인간의 삶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뀌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인간의 상태와 존재 양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죄 값을 청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후 5:17). 

 갈보리 십자가와 전인구원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인류에게 죄의 문제뿐만 아니라 저주와 질병,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환경의 저주를 불러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가시와 엉겅퀴같은 고난의 쓴 뿌리들이 돋아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끊임없이 고난이 다가오고 환난이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 살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공급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만 미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영역에까지 미쳤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극히 제한된 수단과 방법, 나약한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스로 가시와 엉겅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영적 죽음(창 2:16∼17), 육체적 죽음(창 3:19), 환경의 저주(창 3:17∼18)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고 오직 갈보리 십자가의 전인구원(全人救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단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단지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순복음의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은 환경의 저주와 질병의 문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게 모두 해결하셨음을 믿는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사 53:5)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3분의 2는 병을 고치는 사역이었다. 열두 제자와 칠십인의 제자들도 복음을 증거할 때 병든 자들을 치료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질병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채찍에 맞고 고난당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질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희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철저히 낮아지고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가난, 저주, 공포, 절망, 실패, 좌절과 같은 문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간의 영혼, 환경의 저주, 질병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시고 전인구원을 이루셨다.   

 갈보리 십자가와 순복음의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없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인류에게 복된 소식이 될 수 없다.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은 누구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과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전인구원을 이루셨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 영혼의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의 문제도 해결 받게 된다. 타락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 환경의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신 구원을 믿는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은 순복음 신앙의 기반이고 출발이다. 순복음 신앙은 갈보리 십자가 신앙의 기초에서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충만 신앙,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 좋으신 하나님 신앙,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신앙, 다시 오실 예수님 신앙으로 나아가며 마지막으로 나누어 주는 신앙에서 완성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점에서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은 순복음 신앙의 기초이자 순복음 7대 신앙 가운데 가장 우선시되는 신앙이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성서의 7가지 절기 규례

 

 

  1. 유월절

 

[출 12:11, 14]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2. 무교절

 

[출 12: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3. 초실절

 

[레 23:10, 14]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4. 칠칠절, 오순절, 맥추절

 

[레 23:16, 21]

16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21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5. 나팔절

 

[레 23:24, 27, 31]

2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6. 속죄일

 

[레 23:24, 27, 31]

27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31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7.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

 

[레 23:41]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목사는 제사장인가? 

 


최근 대형교회들의 세습 문제가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는 가운데, 감리교단은 세습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를 비롯해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세습을 옹호하는 근거로 구약시대 제사장직을 들고 있다. 제사장직이 세습됐던 것처럼 목회자의 세습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성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제사장적 사고의 특징은 이 세계를 거룩과 속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 또 거룩함도 그 정도를 구분해 만물을 '거룩'의 위계질서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핵심을 요약하자면, 더 거룩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계층)'이 존재하며 공간적으로는 성전이,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이,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제사장 자신들이 더 거룩하고 우월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제사장들에 의해 상당 기간 일종의 '신정정치'가 행해졌던 제2성전시기를 거치며 유대사회에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에서 이런 세계관은 완전히 전복된다. 그는 적법한 제의의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은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실 뿐이라고 답한다(
요한복음 4:24). 제사장들의 '공간적 거룩'의 개념을 부인한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 또한 제사장들과는 다르게 이해했다. 신이 휴식한 날이므로(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인간도 일할 수 없다고 규정했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는 (안식일에)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요한복음 5:17) 제사장적 안식일 개념의 근간을 뒤흔든다. 거룩한 계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스스로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규정하면서(요한복음 14:6) 자신 이외에 누구도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될 수 없다고 사실상 선언한다. 또한 신이나 신앙심을 내세워 남다른 대우를 받거나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모습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이렇게 예수는 당시의 지배적 관념이던 제사장적 세계관을 획기적으로 뒤집는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 역시 제사장적 규정들을 재해석하여 일상생활에 세세히 적용하고자 했던 율법적 형식주의자들에 집중되었다. 예수는 당시 종교권력이었던 제사장들과 그들의 관념에 대해 대척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신약성서히브리서에서는 예수가 레위인들의 전통적 제의제도를 폐했다고 선언되기에 이른다(히브리서 7:18).

그러므로 이런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의 (특히 개신교) 성직자들이 은연중 자신들을 제사장에 준하는 특권계층으로 여기거나 세습을 합리화하는 논거로 이 제도를 차용하는 것은 예수가 개혁하고자 했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며, 그가 가리켰던 삶의 방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물론 예수 자신도 제사장적 구실을 한 것으로 이해되지만(히브리서 4:14), 그는 세습적 특권계층인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닌, 신비적 존재로 인식되던
멜기세덱의 계열로 여겨졌다(히브리서 6:20 등). 또한 이후 교회 공동체에도 제사장적 기능이 부여되고 있지만(베드로전서 2:9), 이는 옛 이스라엘을 대치하는(출애굽기 19:6) 집단적 개념이지 교회 내의 일부 계층에 특권을 부여하자는 취지는 결코 아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질서의 유지를 위한 권위도 필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일정한 신학적 소양을 갖춘 리더십을 양산해 내는 것은 일면 무척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양산된 리더십들이 다시금 종교적 특권계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과연 예수가 진정으로 뜻했던 바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특히 요즘같이 일부 성직자들의 도덕적 수준이 우리 사회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고, 적지 않은 경우 목사라는 계급적 특권이 그들에 대한 비난을 방어하는 방패막이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권을 포기하고 낮아짐으로써 얻어지는 권위가 하나님 나라의 권위다. 이것이 예수 자신이 삶으로 보여준 본보기다.

전재영 성서학박사


설교를 성공하는 3가지 방법
 
1. 영감있는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면 구원이 일어난다. 성도들은 설교를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지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설교도중 성경의 몇장을 펴라, 몇장을 읽으라고 하면 안된다. 설교를 완전히 소화해 결론만 내어 놓으면 된다. 주석설교도 문제이다.
 
일본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이유는 나도 선한일을 하면 예수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교회가 다 망가진다. 핵심은 지금 살아있는 예수이다. 예수는 병을 고친 것,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아직도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핵심이다.
 
유진 피터슨의 저서인 <이책을 먹어라>를 보면 산책에 나간 개가 뼈다귀를 발견하고 좋아하고 두고두고 먹는 모습을 보고 나도 성경을 이렇게 즐기고 있는가 생각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깨닫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순간 변화가 오는 것이다. 말씀을 지식으로 받으니 이제 말씀을 실천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진정한 설교는 말하는 순간 깨닫고 저절로 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말씀을 듣는 순간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생명종교이다.
 
2. 창의력이 있는 설교
말씀을 어떻게 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사람에게는 영어로 아무리 잘 말해도 통역이 문제이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의 통역이다. 말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인격과 삶을 통해 증인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기 위해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알기 위해서는 드라마 주몽도 보아야 한다. 항상 설교가 새로워야 한다. 성도들에게 생전 처음 듣는 말로 들려져야 한다. 새로운 소재를 내놓아야 한다.
 
3. 검증된 진리에 대한 신뢰감 필요
추상적인 것은 소용없다. 개톨릭 신부의 설교는 감동이 없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과 자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감동이 없다. 결혼하지 않는 김동길씨가 하는 가정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부유함, 가난함, 건강함, 병약함을 경험하고 검증된 상황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때 독립투사였으며 7년간 감옥에서 있었던  목사가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라는 이야기는 감동을 받았다. 그의 배에는 고문에서 생긴 인두자국이 있었다. 이것이 설교이다. 이것이 검증이다. 그때 나도 감동을 받고 목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목사는 책상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주 평양에 다녀왔다. 청년들이 나에게 평양에 안가느냐고 묻는다. 내가 북한에 다녀오면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한달은 설교가 뜨거워 진다는 것이다. 봄바쳐 설교를 안하면 설교가 죽는다.
 
연역에서 귀납적 설교로
 
연역에서 귀납으로 변하고 있다. 애들에게 효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연역적인 방법이다. 귀납적인 방법은 이렇다. "너 몇살이야,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너와 같은 애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니?"라고 물어 본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대와 같은 위치와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귀납적인 방법이다. 설교를 듣는 사람을 파트너십으로 영입하여 같은 위치에서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설교가 30분이라면 20분이 지날때까지 교인은 결론을 몰라야 한다. 드라마 주몽에도 반전요법이 있다. 20분후에는 포인트를 내놓고 성경을 제시한다. 그러면 성도들은 성경에 놀라게 된다.
 
결론을 내지 말고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하는 사람의 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늑대와 소년이야기를 하면 맨 나중 "3번째는 아무도 안나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유도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넌 픽션 사건을 픽션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록을 써지 말아야 한다.
 
휴스톤에 있는 조엘 오스틴 목사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휴스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지역 교수들의 평을 들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설교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용언어, 신학논리, 성경강해가 없다. 그의 설교는 자동차 사고난 이야기등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설교는 무조건 쉬워야 한다

 


고대의 가족제도-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가족제도 -1

제목:고대 유대인들의 가족제도는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족 공동체였다.

그들이 생각한 '가족'의 개념은 혼인으로 이루어진 한 가정뿐만 아니라 가

족, 씨족 더 나아가 부족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참조, 창17:7,46

:8-27, 수7:16-18,렘35:3). 여기에는 남녀 종들과 함께 거하는 우거자들

및 실향자, 과부, 고아들도 포함되었다. 즉 가족은 혈연 공동체와 동시에

거주 공동체를 통하여 결속된 모든 자들로 구성되었다. 아울러 한 씨족에

속한 이 들은 친형제가 아니더라도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참조,삼상 20:

29) 가족구조가 부권 제도엿던 이스라엘의 가족 소속개념은 '아버지의 집'

이었고, 족보는 부계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예외적인 경우에만 여인들이 언

급되었다. 심지어 고대에는 아버지에게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리까지 있었

다(창38:24). 이 가족의 결속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과 연대

책임을 강조하는 처벌법을 가족들에게 적용함으로 유지되었다. 가족은 또

한 과거의 전승을 보존하고 교훈과 예배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종교로서의 공동체 기능도 수행하였다.

가족이 서로 돕고 보호하는 모습이 이스라엘에서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를 돕도록 하는 '고엘 제도'라는 독특한 형태로 나

타난다('고엘'은 '되사다', '반환을 요구하다', 특히 '보호하다'는 뜻이다

). 친척은 아버지 쪽만을 인정하였으므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삼촌이 되었

다. 고엘은 부채를 갚아주거고 원수에게서 방어하는 자로 피의 복수까지도

대신해 주어야 했다(참조,레25:25,48-49, 룻2:20,4:3-12). 고엘은 권리를

포기 하거나 의무에서 면제받을 수 있었고 그럴때에는 다음 서열의 사람이

그 의무를 져야 했다(레25:49, 신25:9, 룻3:12).

농사를 짓게 되면서 한 곳에 정착하게 되고 마을과 도시가 발달하게 되자

이스라엘의 전통 가족제도는 점차로 변환되었다. 한 가족이 자급 자족하던

것에서 전문 직업인이 생겼으며 이들끼리 모여사는 마을도 생겼다(대상 4:

14, 느 11:35). 또한 자녀들은 결혼하면 자신들의 집을 지어 분가 했다(삼

하13:20, 욥1:4,13,18).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감은 허약해지고 개

인의 책임이 더 강조되었다(신 24:16, 왕하14:6). 가장의 권위 역까시 더

이상 절대적이지 못하게 되었으며, 가족과 가장에 대한 율법(출20:12, 신5

:16)도 신약시대에 오면서 많이 완하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막7: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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