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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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단(전체)

번제단(분리)

떡상

분향단

법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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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분리)

금촛대

성막덮개

성막(정면)

성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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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전체)

성막(전체)

성막(전체)

지성소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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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기둥

제사드리는모습

성막뜰

성소

물두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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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두멍(분리)

물두멍



고대 근동의 등잔                             

 초기 청동기 시대의 등잔은 아무 토기 조각에 동물성 지방을 이용하여 태우는 원시적인 것들이었고, 중기 청동기Ⅰ시대(서기전2250-2000)부터 본격적인 별도의 용기로서의 등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등잔은 심지가 나오는 아구리가 사방으로 네 개인 사각 등잔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중기 청동기Ⅱ시대(서기전2000-1550)부터는 납작한 접시형 토기에 가장자리를 약간 구부려 놓음으로써 심지를 꽂게 하였다.

 


성서 시대의 등잔

구약 시대의 등잔류는 아구리의 찌그러진 정도에 따라 그

시대가 판명된다. 즉 후시대로 내려올수록 아구리 부분이

점점 깊이 패이게 되어 전체적으로 마치 조개 같은 모습을 띄게된다. 특히 서기전 700년경부터는 등잔 바닥이 더 이상 둥그렇지 않고 받침대가 첨가되어 안정된 모습을 유지하는데 바로 이 시점부터 등잔의 원료가 고체의 동물성 기름에서부터 올리브유 같은 액체의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시대(서기전539-332)부터 납작한 접시 모양에 뚜껑이 있는 원통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청동제 등잔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카비 시대(Maccabian 서기전165년 이후)의 등잔은 그 크기가 매우 작고 심지 아구리가 그 이전시대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신약 시대에는 등잔이 많이 필요하게 되면서 더 이상 하나씩 손으로 빚어 만들지 않고 돌판을 파서 만든 두 개의 틀(mold)에다 진흙을 눌러서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따로 만든 다음 둘을 이어서 뚜껑이 있는 등잔들을 만들었다. 이 때 여러 종류의 무늬와 문자의 기록들도 틀에 새겨서 등잔 표면에 나타나도록 하였다.

 


로마-비잔틴 시대의 등잔

로마-비잔틴 시대의 등잔들은 모두가 석재 틀에 의해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다양한 무늬와 글귀가 자주 나타난다. 글씨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되어 있고 성경 구절과 성인들의 이름이 주로 나타난다. 무늬들은 대부분 등잔 주위에 돌아가면서 간단한 물결 모양, 빗금 모양 등이 나타나고, 특히 비잔틴 시대에는 십자가 표시가 찍혀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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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와 신석기 혁명

                

       

                                                                                                                                                       ]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창 9:2)


  노아가 첫 경작인 이었다는 성경본문의 말씀은 홍수 후 급격히 변화된 환경 가운데 노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환경의 변화와 경작의 시작 및 식생활의 변화는 소위 신석기 혁명으로 표현되는 인류 문화상과 유사하다. 이러므로 홍수 이후 노아의 생활이 신석기 시대 초기인들의 삶과 부합되는 점을 고찰하는 것은 노아 홍수 연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는 정착생활과 식량, 생산경제, 마제석기, 그리고 토기의 사용으로 특징 지워 지지만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을 신석기 문화가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1만 년 전에 자취를 감춘 후빙기 이후 지역에 따라 보통 1,000년에서 수천 년 동안의 후구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인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 농경의 시작으로서 농경으로 인한 잉여 생산의 축적은 궁극적으로 계급사회와 국가의 발생을 가져오게 하였다. 현재까지 농경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동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중동지역은 후빙기의 환경변화로 건조 지대가 되었지만 곳곳에서 발달한 오아시스에서는 동식물의 서식이 가능했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점차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게 되었다. 이것을 차일드의 '오아시스 가설'이라고 하는데 이 설은 석기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원자재의 변화양상에 의거하는 인류문화사 발전단계설의 난점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발전단계를 고찰함으로서 극복하려고한  시도였다. 이 이론은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도전을 받기도 하였지만, 많은 학자들은 농경의 시작이 기후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점에 상당한 공감을 표했다.    

 

환경 및 기후의 변화와 농경의 시작과 관계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은 노아홍수 이후의 기후 변화와 노아의 농경시작과의 관계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증거는 인간의 수명이 홍수 후 현저히 단축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홍수 전에는 900세 전후의 수명이 홍수 후에는 급격히 단축됨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오늘날 창조 과학회에서는 홍수 이후의 환경변화가 인간의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식생활의 변화는 홍수 후 환경변화에 다른 적응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육식의 문제는 동물의 사육화에 따른 육식의 편이성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창 9:3에서 채소와 함께 고기가 식물로 주어짐으로써 농경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하는 가축의 사육으로 인한 육식의 보편화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농경의 시작은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연관 되는데, 노아의 경작과 육식의 사실은 그러한 신석기 문화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전술한 바와 같이 홍수 후 인간 수명 단축으로 추정되는 환경의 변화 또한 신석기 혁명이 야기된 기반과 유사하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초기 농경의 연대를 통하여 노아 홍수의 연대를 추정 고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농경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역으로 레반트(Levant)와 자그로스(Zagros), 아나톨리아(Anatolia), 이 세 지역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중석기 시대에서 초기 신석기 시대에 걸친 유적들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결과를 살펴보겠다.


  레반트 지역에서 초기 농경의 흔적을 보이는 문화를 나투피안 문화(the Natufian Culture)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문화적 성격을 가진 유적은 동서로는 지중해 해변에서 내륙으로 80km까지, 그리고 남북으로는 베이루트에서 카이로까지 나타난다. 그 연대는 주전 1만년에서 8천년에 속한다. 이 후에 재배된 동식물의 조상종이 발견 되는 대가 9천-8천 년기인데, 아직까지는 확실한 재배의 증거가 없으므로 본격적인 농경과 사육 시기는 더욱 늦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그로스 지역의 중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 유적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자위 케미(Zawi Chemi)의 유적이다. 근처의 샤니다르(Shanidar)동굴 유적과 함께 농경의 시작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자위케미는 주전 8,900±300년, 샤니다르는 주전 8,650±300년으로 측정되었다.


  한편 아나톨리아 지역의 시원적 농경유적인 촤이외니 티페시는 주전 8천년기 중반까지 올라가고 그보다 좀 늦은 촤탈휘익 유전은 주전 6천 년기에서 5천 년기의 연대를 갖고 있다.


  요약컨대 신석기 혁명과 연관을 시킨 노아의 경작 시작 및 홍수 연대는 어셔나 딜레의 홍수연대보다 수천년 이상 상회하는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근동의 최고 석기를 10만년 이상으로 올려본 이후, 근동에서 발견된 인류의 흔적은 갈릴리 호수 남쪽에 위치한 우베디야(Ubeidiya)에서의 50만년 전으로 비약적인 상승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과학적 연대와 성경을 어느 정도까지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연대 측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다. 종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안정된 위치를 찾아 가고 있다. 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연대 측정법이 있는데, 어느 한 연대 측정법에 약점이 있을지라도 다른 영대 측정법과 상호 보완하면 상당히 신뢰도가 높은 결과를 얻을 수 가 있다.


  노아 홍수 연대의 검토에 있어서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치밀한 신학적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나 숫자만의  단순한 적용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는 이러한 이해의 차원에서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볼 때 노아홍수는 어셔의 연대기가 제시하는 주전 2,348년보다 훨씬 오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성서고고학의 업적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으로 고대 근동 세계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주전 3,000년경에 속한 설형 문자와 상형문자 토판들이 발견됨으로써 언어의 분화가 주전 3,000년을 훨씬 상회함을 알게 되었다.


  노아로부터 시작된 땅의 경작 사실이 신석기 문화의 도래와 연관 된다고 할 때 노아 홍수는 신석기 혁명 이전 시기가 될 것이다. 아직 확정적인 농경개시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주전 9천 년에서 7천 년 사이에 농경이 시작 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는 이를 앞서는 시기가 될 것인데, 그 확정적인 연대는 구약 성서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해석과 발맞추어야 할 것이다.


도시 문명의 발생과 니므롯


   인류 문명은 수천 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성경에서도 대홍수를 기점으로 이전의 문명시대와 이후의 문명시대가 구분되고 있다.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어떻게 도시가 건설되고 고대문명이 시작되었는가하는 점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의 확산과 종족 및 국가의 형성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 10장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는 아브라함의 10대조로 창세기 11장에 나와 있는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이미 중기 청동기 시대로 고대문명이 꽃피고 고대 제국의 흥망성쇠가 거듭된 지 오랜 시절인 것이다. 이러므로 노아 홍수 이후로 언제부터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있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화 과정이 규명되어야 하고, 노아가 최초로 성경에 언급된 제국의 건설자인 니므롯의 정체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도시화에 관한 가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위대한 문명의 발전 과정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고대 문명사회의 존재, 발전, 성장 요인에 관해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지만 대개는 경제와 환경과 인구의 세 요인들의 결합 내지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홍수 이후 인류 사회는 촌락 농경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 공동체는 사육 제배하는 동식물의 생리학적 개선과 토기를 비롯한 용기의 제작으로 가공과 저장, 교역 등의 기술발전, 그리고 인구 증가와 정착생활에 따른 조직의 구성이 양성적 환류 작용을 일으켜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들 공동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하수나 공동체, 사마라 공동체, 할라프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고, 도시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도시문명의 발전가설들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들 발전 이론은 관개를 통한 농경의 집약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은 자연 자원으로서의 물과 대규모의 관개 시설의 건설을 위한 중앙 집중적 협력과 감독의 필요성에 의해 소규모 사회보다는 더 효율적인 중앙 집중화된 사회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수력가설을 발표하였다.


  차일드(Gordon V.Childe)는 도시로 성장하기 이전에 순회 장인이 출현하고 노동이 전문화되며, 주전 4천년 경부터 효율적인 관개 농경이 개발됨으로써 특정지역에 생산물이 집중되어 도시가 이루어 졌다는 장인-전문화-관개 가설을 주장하였다.


  로버트 카네이로(Robert Carneiro)는 전 세계적으로 초기 문명은 산, 바다, 사막 등으로 한정된 농경지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농경지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발발되고 그 결과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 조직화, 기구의 확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인구-압력-갈등 가설을 제시하였다. 인구압(Population-pressure)가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국가 형성 연구에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특히 맥가이어 깁슨(McGuire Gibson)은 티그리스 와 유프라테스 강이 수로를 변형할 때마다 주변 주민들이 심한 입구압을 겪게 됨으로써 조직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밖에도 도시화의 다원론이 아담스와 플레너리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여 문명의 발전에 대한 체계, 생태학적 모델을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에서 자연 수로에 의존하는 농업 공동체는 물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토지 생산성이 달라지고, 그 결과 부의 축적으로 인한 권력의 차별과 이의 세습화가 야기되었다.


  (2)농경의 집약화와 함께 생산의 전문화가 수반되었는데 이는 교역과 생산의 재분배가 사원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종교 공동체에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다.


  (3)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족한 비가공재를 수입함에 따라 무역 전문 종사자와 교역품 생산 장인의 출현 등 도시사회의 특징인 복합성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은 양성적 환류를 일으켜 물품과 부의 편중을 낳았고 이에 따른 내외부적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가 창출되었다. 군대의 성장은 행정 엘리트들의 성장과 함께 행정 집단의 힘을 강화시키게 되었으며, 결국 통제 기능이 강력한 권력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도시제국의 출현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 초기 도시문화의 흔적은 우바이드(Ubaid)기, 우룩(Uruk)기, 젬뎃 나슬(Jemdet nasr)기의 세 시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바이드기(B.C. 5300-3600)는 우르 근처에 있는 텔 알 우바이드 유적을 쫓아 명명 되었는데 모두 4개의 시대로 세분되며 최초 정착생활의 증거로부터 나중에는 2,000명-4,000명 규모의 취락 형성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모습은 단색, 채색 토기의 형태와 문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종교적 건축물에서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다. 사원 유적은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증대하는데 높은 기단과 그 위에 세워진 성소와 측실 및 회랑, 그리고 기단과 성소를 잇는 계단이 수메르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수메르 문화를 대표하는 우륵기(B.C. 3600-3100)는 2기로 세분화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우르에서 북동쪽으로 65km 떨어진 와르카(Warka) 유적이다. 와르카의 옛 이름은 우룩이며, 성서에서는 에렉(창10:10)으로 기록되어 있다. 와르카는 백색의 사원이 높은 기단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의 발굴로 유명한데 이 건물은 하늘의 신 아누 의 지구라트(Anu ziggurat)로 여겨진다. 또한 이 지역의 수호신이자 사랑과 전쟁의 신인 이난나(Inanna)여신을 위한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이들 건축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노동력의 규모와 건축설계기술, 반복된 재건축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이미 대규모 경제력과 노동력 및 전문화된 장인을 통제하는 조직화 된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젬뎃 나슬기는 도시화의 뚜렷한 증거와 아울러 문자의 본격적인 발전이 특징적이다. 이 시기는 통상 주전 3,100-2,900년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다양한 내용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문자를 사용하려는 초기의 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우륵기에 이르러 집단의 규모가 증가하고 더욱 복잡성을 띄게 되면서 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 사원의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종교 집단은 특정한 신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종교 집단의 통합과 더불어 그들의 신들도 가족관계로 서로 얽혀지고, 권력의 위계도 갖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집단들은 제의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 경제 행위에도 직접 관여 하였다. 특히 재화의 재분배 역할을 주도함에 따라 사원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되었고, 사원 관계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니므롯 帝國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도시들이 시민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보호를 해줌으로써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그들은 전통적인 기존의 국경을 넘어 영역을 확장하였고, 급기야 인접 도시국가들을 병합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들이 건설되었다. 고 이집트, 수메르, 사르곤의 아카드제국, 에블라제국 등이 그것이다.


  성경에 보면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과 갈레 등의 도시 국가들을 병합하고,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건축하였다.(창10:10f) 그런데 아직까지 니므롯이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존재이며, 그 이름도 셈어에 속하는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그가 탁월한 사냥꾼이라는 성서 기사로 인해 그의 신원을 사냥과 연관시켜 파악하는 여러 가설들이 나타나게 되지만 설득력이 약하고,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가설은 니므롯이 아카드의 사르곤 1세라는 설이다. 사르곤은 셈족의 영도자로서 우룩과 우르, 그리고 페르샤만에 이르기까지 수메르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엘람,북으로 수바르투, 서로는 시리아를 정복하여 아카드 시대(B.C. 2360-2180)를 창립한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러나 용맹성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름의 유사성이 전혀 없는 것과 셈족의 통치자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폰 라트는 니므롯이 함의 아들 구스에게서 출생한 사실을 중시하고, 니므롯을 애굽왕 아메노피스 3세(Amenophis Ⅲ : B.C. 1411-1375)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엉거(Merrill F. Unger)는 폰 라트와 신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니므롯이 함의 후손으로 바빌론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점에 조금도 의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는 구스가 원래 바빌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구스족의 원고향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하류이며 니므롯은 이곳에서 성장하여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남쪽 인 예멘으로 확산 되었으며, 마침내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 누비아와 아비시니아를 식민지화 하였다. 그러나 구스족은 본래 바빌로니아의 기혼강 주변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창 2:13절의 내용과도 부합되고, 노아의 세 아들 함, 셈, 야벳이 같은 지역에서 살다가 흩어져 나가는 성경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남부 아라비아, 누비아를 연관시키는 고고학적 근거 자료가 부족하므로 더 숙고할 필요가 있으며 주전 3천년기에 출현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왕들과 연결시킬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정리하면,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관개에 의한 농경이 시작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 에 연결되어 니푸르, 라르사, 우룩, 우르 등이 도시국가로 성장하였다. 수메르 문명은 농업용 관개 수로를 그 용도를 넘어서 지역간의 교역을 촉진하는 교통로 역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강물이 운하를 따라 저지대로 흘러들게 되면 늪이나 호수가 형성되어 식량자원이 풍부해지고, 가옥과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갈대가 무성하게 된다. 반면에 주변 숲에는 맹수들이 서식하여 가축들을 위협하고 농경에 방해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사냥꾼의 역할이 중시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니므롯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여명기에 활약한 탁월한 인물이다.


  니므롯은 세상의 지배자들이 출현하는 시기의 첫 번째 영걸이다. 그는 개인적인 용맹과 정치적 권력으로 세상에서 찬탄 받았고 성경에서도 결코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그 다음이다. 그의 왕국이 바벨이란 도시로부터 확장 되었는데 이 도시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온상이 되었고(창 11:1-9참조), 마침내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된 것이다(계 18:2). 이를 통하여 성경은 이 땅에서의 번영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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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왕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사진설명]

1. 유다 왕들의 유골(?)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표현은 곧 에꼴 비블릭크 무덤의 안치대 밑에 있는 유골보관소를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기존의 유골을 안치대 밑에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는 것이 당시의 독특한 매장 풍습이었다.

2. 베이의 `다윗성의 무덤'

프랑스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가 1913~4년에 다윗성에서 발굴한 이 동굴들은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다윗성 안에 묻혔다는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왕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그 구조가 무덤과 차이가 있고 당시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뚜렷하게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3. 드 소시의 `왕들의 무덤'

드 소시는 1851년 초 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신약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아디아베네왕국 출신 헬레나 여왕의 가족무덤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시온산에 있는 다윗의 무덤을 찾지만 그 곳이 3천년 전의 무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 그 곳은 2~4세기에 건설된 교회 건물로 십자군시대 이후 다윗 왕의 기념묘로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다윗의 무덤을 찾는 작업은 1851년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의 한 큐레이터가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왕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한 바위굴 무덤에서 입구를 막고 있던 둥근 돌을 굴려서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깨진 석관 뚜껑을 갖고 나와서 다윗 왕의 관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럽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은 다윗을 비롯하여 모두 23명에 달하는 유다 왕들의 무덤 중 하나라도 찾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따라서 다윗의 무덤이라는 소식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 소시(F.de Saulcy)는 1807년 오늘날 벨기에에 위치한 `릴르'의 전통적인 군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도 군인이 되기 위해 포병학교에 진학했고,재학중 고고학에 흥미를 느껴 취미삼아 연구결과들을 발표했다.그러다가 결국 파리에 있는 포병박물관에 큐레이터로 취직하게 됐다.

43세 되던 해에 부인을 잃게 된 드 소시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예루살렘까지 가는 성지순례를 계획했다.경비 마련이 문제였으나 당시 파리 귀족들의 문제아들을 성지순례를 통해 순화시키는 프로그램의 후견인으로 나서면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다. 1851년의 탐사 후 드 소시는 파리에서 정치가로 지내다가 프랑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1863년 `왕들의 무덤'을 공식적으로 발굴하게 됐다.

당시 드 소시는 `여왕'이라 기록된 석관을 발견하고,이를 시드기야의 왕비로 해석했다.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전형적인 신약시대의 가족무덤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이곳이 당시 유대교로 개종했던 아디아베네왕국 출신인 헬레나 여왕과 그녀의 가족 무덤으로 확인됐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드 소시가 발견한 무덤은 성 밖으로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느헤미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윗의 무덤이 성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프랑스의 고고학자 라이몽 베이는 1913년~1914년 다윗의 무덤을 찾기 위해 성의 남쪽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사하던중 바닥을 파서 만든 여러 개의 바위굴들을 발견했다.

베이는 그중에서 길이 15.7m,폭 2.4m에 달하는 가장 큰 동굴을 다윗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굴이 도무지 무덤같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BC 10세기의 무덤이 아직 한군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 길은 없지만 여러 고고학자들의 지적대로 그 동굴은 구조상 창고나 물저장소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 곳은 후대에 채석장으로 이용됐는데 과연 누가 왕들의 무덤을 감히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3의 왕들의 무덤이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이 무덤은 오늘날 `에꼴 비블릭크'(프랑스 성서와 고고학 연구소)로 더 잘 알려진 성 스데반 수도원 구내에 있으며,1885년에 처음 발견됐지만 신약시대의 무덤 정도로만 알려졌었다.하지만 바르카이와 클로네르가 재발굴한 이 가족무덤은 전형적인 BC 8~7세기의 무덤으로 가운데 다섯평 정도의 전실을 일곱 개의 묘실이 둘러싸고 있고 한꺼번에 20여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시신 안치대 밑에는 모두 네 개의 유골보관소가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유골을 한군데 보관하는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의 바위굴 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족무덤의 특징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시신들이 안장됨에 따라 안치대에 있던 기존의 유골은 그 밑에 파 놓은 유골보관소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보관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다 왕들이 죽어서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열왕기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좋은 예다.

열왕기서에는 다윗 왕부터 아하스 왕까지는 다윗 성안에 묻혔고 그후의 왕들은 성 밖에 장사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오늘날 다윗 성에는 여러 채의 집들이 있어서 다 발굴하기가 어렵다.따라서 다윗 왕의 무덤은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현재는 에꼴 비블릭크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김성(협성대 교수·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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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과 다니엘

 


  바벨론에 끌려 간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하는데, 그의 예언대로 바벨론의 멸망 다음에는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성경의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그리이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면 그리이스와 바벨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세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그 단어들은 모두 그리이스의 악기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소한 한 개의 악기는 다니엘 시대 이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악기였습니다. 예전부터 써 오던 악기이므로 그리이스 말 그대로 바벨로니아에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서에 수메르 단어가 8개나 들어 있습니다.

'수메르'라는 나라가 언제 부터입니까? 아브라함보다 이전 아닙니까? 다니엘서가 기원전 500년경이라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전이므로 1500년도 더 된 단어가 8개나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느부갓네살 통치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언어가 전혀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니엘서에 수메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느부갓네살 시대, 혹은 그 이전에 다니엘서가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저작시기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시기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수메르 단어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조차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히브리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포로로 잡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사실이 너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한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중의 일부를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너무나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바벨로니아의 정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려던 바벨로니아 군인들은 방화복을 입고 했었는데도 오히려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불길이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명의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바벨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미쳐서 이슬을 묻혀가면서 풀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려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느부갓네살왕의 명각입니다.



왼쪽그림은 다니엘의 무덤인데요, 지금 이란(페르시아)의 수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 장례유물                                  

            

이집트 장례유물


46. 채색 목관 조각 (길이 14.6cm, 폭 5.6cm)
 

46,47 미이라 가면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
부활 신앙을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썩지 않게 보존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미이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모두 70일이 걸리는 미이라 제작은 죽은 자의 신인 아누비스(Anubis)의 제사장들이 쟈칼 모양의 탈을 쓰고서 만들게 된다.
맨 먼저 두개골 속의 뇌는 꼬챙이를 사용하여 코의 구멍을 통하여 모두 끄집어 낸후 짚이나 진흙으로 대신 채웠다. 다음으로 몸 속의 내장을 제거하기 위하여 시신의 왼쪽 옆구리를 날카로운 돌칼로 자르고 그 쪽으로 심장을 제외한 모든 내장들을 끄집어낸다. 심장을 미이라에 보존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심장에 담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장은 허파, 간, 창자, 위장 등으로 분류하여 각각 네 개의 용기에 담아서 보관하였으며 이들을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s)라 불렀다. 카노푸스 단지는 호루스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송골매, 비비원숭이, 쟈칼, 사람의 얼굴 등의 모습이 조각된 뚜껑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장을 제거한 시신은 40일 동안 광야 지역에서 채취한 천연 나트륨을 채워서 습기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 송진을 발라서 방습, 방충 효과를 높인 다음 비로소 아마포로 붕대 감기를 시작한다. 평균 20겹의 붕대가 미이라에 감겨졌고 사이에는 스캐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부적들이 끼워져 있으며 한 겹의 붕대마다 송진을 발라서 서로 단단히 접착되게 하였다. 신왕국 시대부터 미이라를 관에 안치할 때에는 저 세상으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안내서로서 "죽은 자의 책"이 파피루스의 형태로 같이 놓여지기도 하였다.

 


유대교 회당과 제의 용품들

(Synagogue and Judaica)                             

       

 유대교 회당의 기원은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된 사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성전은 서기전 515년에 스룹바벨에 의헤 재건되었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은 외지에서도 야훼께 기도함으로써 야훼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어느 곳에서든지 섬길 수 있는 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예루살렘의 성전 외에서 야훼께 예배드리는 모임이 회당의 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회당은 히브리어로는 "베잇트 크네셋트(Beith Knesset)", 즉 "함께 모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가장 최초의 회당터들은 대부분 서기 1세기에 건설된 것들로서 헤로디움(Herodium), 가믈라(Gamla), 그리고 맛사다(Masada) 등지의 것들이다. 오늘날 전세계에 흩어진 1600만의 유태인들은 매주 토요일 안식일마다 근처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이스라엘 종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대교의 제의와 관련된 여러 리물들을 유다이카(Judaica)라고 부르며 은으로 만든 제품을 최고의 것으로 선호하고 있다. "메노라(menorah)라고 불리는 일곱 촛대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중요한 등잔이었으며, 촛불을 밝히게 된다.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산양의 뿔로 만든 것을 선호하고 있다. 해마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열리는 하누카 축제가 8일간 지속되며 이 때는 아홉 촛대인 하누키야(hanukia)로 집집마다 창문을 밝히기도 한다. 모든 유대인들의 집 입구에는 문의 오른쪽 기둥에 "메주자(mezuza)"라 불리는 성경말씀이 기록된 양피지가 담긴 길쭉한 상자를 부착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쉰(shen), 달레드(Daled), 요드(Yod)의 세 글자가 곁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쇼레르 델렛트 이스라엘(Shoer Delet Israel)" 즉 "이스라엘 문의 문지기"라는 문구의 약자 표시이다. 안식일 각 가정에서는 향기로운 향품을 넣은 향상자(spice box)를 상위에 놓아서 안식일의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지도록 하고 있다. 유대인 남자들은 기도할 때 신명기의 말씀이 기록된 양피지들이 들어 있는 조그만 가죽 성구 상자, 즉 트필린(Tefilin)을 왼쪽 팔뚝과 이마에 끈으로 묶어 부착하게 된다.


카쯔린(Qazrin) 회당

오늘날 골란 고원의 행정적 중심지인 카쯔린에는 서기 5세기에 건설된 회당이 1980년대초 발굴되었다. 모두 여덟개의 기둥이 두 줄로 세워져 있는 이 회당은 실내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쪽으로, 즉 남쪽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회당 입구는 북쪽 벽의 중앙에 하나만 나 있고, 내부에는 전면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두 계단의 벤치로 둘러져 있다. 회당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계단 통로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여성들을 위한 이층 난간이 존재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초막절(Succoth) 축제

초막절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유대교 삼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감사절인 동시에 출래굽당시 광야의 초막 시절을 상기하는 초막절에는 대추야자의 어린가지(lulav),레몬의 일종인 에트로그(etrog) 등 네 식물을 양손에 쥐고서 회당이나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드린다.


토라 지시봉(Torah Pointer)

은, 길이 26.3 센티미터, 서기 19세기 말


향상자(Spice Box)

은, 높이 18.7센티미터, 서기 19세기 말


메노라(Menorah)

황동


트필린(Tefillin)

가죽, 양피지, 서기 19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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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 [Garden of Eden]

                

에덴동산 [Garden of Eden]

많은 사람들이 신화처럼 생각하고 있는, 인류의 시조(始祖)가 처음에 살았던 에덴동산의 위치를 지금 정확히 알 수 있을까?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화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땅에 둘렸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세기 2장 10절~14절]

 


창세기 2장 10∼14절 내용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강(江)이 발원하여 네 강의 근원이 되었는데, 그 중에 비손과 기혼 두 강은 현재 없는 것이어서 잘 알 수 없으나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헬라어:티그리스)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0∼15)

 

라는 말씀을 보아 이 두 강은 곧 현재 시리아 동쪽에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틀림없다. 두 강은 현재 이라크에 있다.  역사가들도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을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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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라테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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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크리스 강]

 

 1986. 3.20일자 스포츠 서울에 “현대판 에덴의 동산을 만든다”라는 제하에 이하와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터키 정부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우르 지역을 중점 개발 현대판 에덴의 동쪽으로 만들 대규모 개발계획을 발표. 터키 정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오는 2000년 까지 모두 13개의 다목적 댐을 건설하고 관개시설을 확충, 세계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심지였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킬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한편 외국의 고고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를 무분별하게 개발함으로써 이 지역 내에 묻혀 있는 세계 문명발상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귀중한 유적들을 모두 침수시킬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 터키 정부의 개발계획을 반대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네 강 중에 두 강은 아마 이스라엘 남쪽으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1982년 11월 28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콜롬비아호 고대 강 발견”이란 제하에 “미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에서 발사된 레이더가 아프리카 북부의 사하라 사막 깊숙이 묻힌 고대 강 줄기를 찾아내 고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작년(81년) 11월 두 번째 우주여행 때 콜롬비아호가 찍은 레이더 사진을 분석한 미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 8명이 공동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진이 수만년 동안 사하라 사막 땅 속에 숨겨져 있던 큰 강과 계곡, 홍수가 났던 들판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하라 사막에는 물 없는 큰 강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왔다. 사진을 분석한 과학자들 중 몇 명은 분석 결과를 입증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 현장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 사막에 묻혀 있는 큰 강이 에덴동산의 네 강 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주변에서 발견된 바위와 동굴 벽화에 큰 동물과 사냥하는 모습, 배를 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곳이 울창한 숲이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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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과학 뉴턴 ’93.12월호
“에덴동산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 -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과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는 신앙의 성서인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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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일보 ’93.8.12
“이라크 쿠르나 - 낙조 쓸쓸한 「에덴동산」 옛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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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 ’87.6.20
“에덴동산은 지금의 페르시아만(灣) - 중동지역서 성서고고학 발굴작업 활발. 미 미시시피대 조사단 「잃어버린 강」 비손 흔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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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일보 ’91.2.10   
“우르 주변 「에덴동산」 등 최초의 역사유적 수두룩 - 점토판에 갈대로 새긴 최초의 문자 출토”
 # 내셔날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983, 9월호(Sep) “사하라는 녹색초원(草原)이었다 - 물소 수렵 벽화 발견 등 입증자료. 급격한 기후변화로 사막화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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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 지역은 거의가 불모지이며 사막이다. 그런데 세계 석유의 70% 이상이 그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석유가 나오려면 그 옛날 그곳에 많은 동식물 유기물질이 갑작스런 천재지변에 의해 땅 속에 매장된 일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썩지 않고 뜨거운 지열 등의 화학적 변화를 받아 에너지를 자체에 갖고 있어야 한다.

 

옛날 에덴동산에는 특별한 기후 관계로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울창하고 엄청나게 큰 수목이 자라고 있었으며 온갖 거대한 짐승들이 활동했을 것이라는 증거가 많이 있다. 그것들이 대홍수 및 그에 따른 지각변동에 의해 다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지적한 성경 말씀이 있다.

 

“너의 영화와 광대함이 에덴 모든 나무 중에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 나무와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에스겔 31:18).

 에덴의 광대한 나무와 모든 것들이 지하에 묻혀 버림으로 그것이 훗날 석유가 되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중동 지방에서 기름이 흘러나왔다는 성경 기록도 있다.

이 지역에 세계70%이상의 석유가 나오고있다. 현재 황무지인 이곳 지하에서 이런 석유들이 나오는

것은 과거에 이곳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식물과동물이 왕성했던 곳이였다는 증거이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tar pits)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창세기 14:10).

 

정유공장에서 좋은 기름을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가 역청인데, 도로 포장(pave)할 때에 쓰이는 아스팔트가 그것이다. 그 옛날 중동지방에는 땅 속에서 기름이 솟아나온 곳이 있었는데, 휘발성이 강한 것은 다 기체화하고 남은 것이 여기저기 역청 구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소돔 고모라 왕들이 전쟁할 때 그 역청 구덩이에 군사가 빠져 죽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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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나무와 생명나무는 무엇일가?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나무와 선악과는 무엇일가?

            또 먹으면 영생한다는 생명나무와 생명실과는 무엇일가?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에 있는 다른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꼬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악과를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생명실과도 따먹고 영생 할 가하여 생명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동산에서 ?아 내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선악과는 무엇일까요? 또 생명실과와 생명나무는 무엇일가요?

세상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성경에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뱀이 하와를 미혹해서 선악과를 따 먹게 했는데 뱀이 하와와 대화를 한 것을 보면 그 때의 뱀은 사람과 대화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과연 뱀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과연 창세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기록해 놓으셨을까요?


신앙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말씀을 서로 거론해봐야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또 어디에서도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으니까 하나의 흥밋거리로만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창세기는 옛날이야기도 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신앙인들이 별로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의 계시록에 보면 선악나무와 선악과는 보이지 않고 생명실과와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생명실과를 주어서 먹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열두 가지에서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가 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좌가 있고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합니다.

성경의 첫머리의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왜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에 와서는 선악나무와 선악과는 보이지 않고 생명나무와 생명실과만 등장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도 될까요, 몰라도 될까요? 몰라도 천국 가는데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해답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십니까?"편 참조하시고 더 자세한 것을 아시려면 jd620@hanmail.net 으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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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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