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열 집사(영등포대교구) -

파더스드림 통해 ‘올바른 아버지상’ 정립

잘못된 아버지상이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이어져
파더스드림 통해 바른 정체성 찾고 비전 발견해

 사람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첫 터닝포인트였고 아내를 만난 것이 그 두 번째. 그리고 파더스드림이 그 세번째였다.

 아버지는 3남 1녀 중 셋째인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를 좋은 분으로 인자한 분으로 기억하지만 가정에서는 반대로 엄하고 때로는 무서운 아버지셨다. 그런데 그런 잘못된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도 나타나 아이들과 그리고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는 등 똑같이 행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사실 이 때만해도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전혀 몰랐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외국계 회사 대표를 맡기도 했었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세계최고의 기업을 만들겠다며 회사를 만들어 경영도 해봤다. 막연하게 ‘나는 잘 될거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당당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나는 거만해지고 자만하게 됐다. 특히 해외에서 사업을 할 때는 사업 핑계로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바벨탑이 그러했듯이 나의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고 자연스레 자신감 넘치던 사회생활도 위축되고 말았다. 가계에도 악영향을 주다보니 가정에서도 위축된 나를 발견하게 됐다. 사업이 흔들릴 때마다 가장이자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에 그 불안감을 가족들에게 잘못 표출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럴 때마다 가정을 지탱한건 내가 아닌 아내였고 그런 아내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 그녀의 강한 믿음이었다.

 ‘아직 바닥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나에게 하루는 아내가 파더스드림을 권유했다. 솔직히 휴일인 토요일에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등록 마지막 날까지 고민하다 불참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파더스드림 봉사자를 만나 적극적인 권유로 인해 21회 파더스드림에 참여하게 됐다.
 32명의 아버지 중에는 불신자도 있었지만 5주간의 교육에 한 명도 결석 없이 참여하면서 가정이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과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지만 파더스드림을 통해 완전히 회복했다고 고백했고 불신자였던 아버지도 결신하고 가정이 회복됐다.

 실제로 나도 파더스드림에서 내준 숙제로 처음 시작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안아서 진심으로 축복기도를 해주는데 언제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큰 은혜를 체험했다.

 파더스드림을 하면서 내가 몰랐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 많이 있었고 그 상처들이 치유되면서 올바른 아버지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이전에는 스스로 아버지에 대한 자화상이 없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렸다면 분명한 아버지상이 생기자 내가 순간적으로 실수해도 반성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었다. 가정의 회복은 사회생활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고 항상 문제가 많았던 직장에서의 문제도 파더스드림 이후에는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나갔다.

 파더스드림 이후 가정에서 아버지가 바로 서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것은 물론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을 나와 같은 다른 아버지들이 배우고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는 10월에 실시되는 파더스드림에는 봉사자로 참여하기로 했다. 봉사자로 파더스드림을 준비하면서 파더스드림이 그냥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준비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었고 여의도순복음교회라는 큰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고 참여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아버지들은 물론 예비 아버지들도 파더스드림을 통해 올바른 아버지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는 경험을 하길 소망해 본다.


장점옥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암이라는 절망 속에 주님 만나 새생명 얻어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해 7.5㎝ 암 덩어리 사라져
주일 2부 예배 때 신유기도 받고 기적 일어나

 유방암 3기 말에서 치유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 나는 2002년 남편의 전도를 받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오게 됐다. 남편은 청년 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며 믿음이 좋았다. 나는 교회에 나오긴 했지만 늘 불평불만이 많았다.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며 교회에 나가길 권유했지만 정작 나는 10여 년간 교회를 멀리하고 탕자처럼 생활했다.

 그러던 중 올해 4월 15일 국민건강검진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유방암 3기 말이고 임파선에 전이가 됐다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목에 이상소견도 발견됐다. 4월 26일 내 병에 대한 확진판정이 나왔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서울에서 가장 큰 병원에 가서 재검을 받았다. 하지만 진단결과는 똑같았다. 7.5㎝짜리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당장 수술이 불가능하고 8회 항암치료를 한 후 크기가 줄어들면 6개월 후에 수술을 하자고 했다. 얼마 전까지 건강히 잘 생활하던 내가 갑자기 암 환자라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특히 내 몸에 자라고 있는 암은 악성이라 자꾸 커지려는 공격성이 있다니 더 예후가 안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멀리했던 하나님이 생각났다.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기도할 줄 몰랐던 나는 생명을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매일 새벽마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6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남편도 아침, 저녁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1시간씩 기도를 해주었다. 6월말부터는 기도처에서 새벽기도를 계속 드리기 시작했다. 5월 11일  1차 항암을 받고 5월 13일 처음으로 금요철야에 갔다. 머리는 멍하니 피가 통하지 않았고 손이 퉁퉁 부어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 숨도 쉴 수 없었다. 나는 “주님 저의 죄가 너무 많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저의 모든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방언을 주시고 회개의 영을 부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힘을 다해 손뼉을 치며 찬양했다.

 5월 13일 금요철야예배 때 찬양 도중 가슴에서 트림이 크게 세 번 나왔다. 그 순간 혀가 꼬이면서 방언이 터졌다. 철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팠던 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가볍게 느껴졌다. 5월 15일 주일 2부 예배 때 이영훈 목사님께서 신유기도 시간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있는데 낫는다고 선포하셨다. 2차 항암인 6월 1일에는 암 크기가 5㎝이상 줄어들었다. 6월 5일 주일 2부 예배 때 이영훈 목사님은 신유기도 시간에 “오른쪽 가슴이 아픈 사람이 있는데 오늘 나았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 순간 “아멘” 외치면서 만져보니 2㎝정도 남아있던 돌처럼 딱딱했던 암이 모두 사라졌다.

 교구 기도처 예배에서 교구장 목사님의 금식기도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듣고 3일 금식을 작정했다. 3차 항암치료 전인 6월 중순에 금, 토, 일 3일간 집에서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 후 다음날 3차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갔는데 의사는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무조건 잘 먹어야 하는데 금식을 했다며 나무랐다. 그리고 내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무슨 특별한 약을 먹었냐고 물었다. 물밖에 먹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는데 몸 상태가  너무 좋아져서 믿을 수가 없다며 놀라워했다. 

 병원의 권유대로 3차와 4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CT촬영을 했는데 7.5㎝였던 유방의 암이 모두 사라졌다. 백혈구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암이 전이된 부분도 깨끗해져 있었다. 할렐루야! 지금은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암이 발생하기 전보다 더욱 건강하다. 암으로 인해 나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믿음도 더욱 굳건해졌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이경희 권사(강서대교구) -

“일천번제 새벽기도로 많은 기적 체험”

콩팥 이식 직전에 치유, 살아계신 하나님 만나
4차원의 영성, 십일조 생활 통해 넘치는 복 받아

 나는 구역장이다. 29살부터 조장으로 시작해 30여 년째 지·구역장을 맡고 있다. 30년전 사업이 망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장이 파열돼 대수술을 받았고 교통사고까지 났다. 아이에게 먹일 우유조차 없는 상황에서 죽음밖에 생각하지 못할 때 성령을 받았다. 그 때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빈 십일조 봉투를 보여주셨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돈이 아까워 십일조 생활을 안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십일조를 드렸다. 세금까지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꽉 채워진 금액을 드리고 싶어서 예를들어 150만원이 십일조라면 200만원을 드렸다. 30년동안 수입 이상으로 늘 십일조를 드렸고 하나님은 넘치게 채워주셨다.

 2005년 5월 나는 지역장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새벽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천번제를 드리라는 말씀을 주시며 작정헌금까지 정해주셨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조건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새벽에 나가 감사기도를 드렸다.

 새벽기도 기간 동안 몸도 아프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웠다. 없는 살림에 매일 새벽마다 만원씩 헌금을 드렸는데 그것도 어렵게 마련한 거라 저금은 하나도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엎드리니 우리 가정에 많은 복을 부어주셨다.

 새벽기도를 드릴 때 장막을 옮겨주셨고, 오랫동안 찾던 조카를 20년 만에 만나고, 큰 아들이 신학을 하게 됐고, 둘째 아들에게는 좋은 직장을 주셨다. 두 아들이 믿음의 배필을 만나 결혼도 했다.

 개인적으로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았다. 나는 늘 남이 쓰던 차만 사용해서 새 차를 타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하나님은 그 작은 소망까지 들어주셨다. 일천번제 새벽기도를 마치고 새 차가 3대, 집도 3채가 됐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해 12월 나는 야훼 라파 치유의 하나님을 체험했다. 10년 전에 몸에 기운이 없고 숨이 몰아쉬어져서 종합병원에 갔는데 당뇨 수치가 450에서 500까지 올라있는 상태였다.

 당뇨 수치는 95∼105가 정상인데 나는 500까지 올라 심각한 상태였다. 수치가 300이 넘으면 실명위기까지 오고 장기가 손상될 정도로 위험하다. 나는 급성당뇨 진단을 받고 입원했는데 다행히 장기 손상은 없었다. 의사는 퇴원해서도 인슐린을 계속 맞아야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까지만 살겠다고 다짐하며 인슐린을 버렸다. 예수님의 보혈로 치유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구역장 지역장으로 더 열심히 봉사했고, 새벽기도하고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며 치료의 말씀을 붙잡았다. 나를 지으시고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분명 고침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믿고 꿈꾸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늘 기운이 없고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일천번제를 드리며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3년 전 종합검사를 받아보니 콩팥에서 혈뇨가 나왔다. 다른 병원에 가서 재검을 해보니 혈뇨 뿐 아니라 단백뇨까지 검출됐다. 지난해 10월에 검사를 하면서 의사는 정말 심각한 상태가 왔으니 12월 말에 다시 검사를 해보고 콩팥 이식이나 혈액을 투석해야 한다고 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콩팥을 이식해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16일부터 12월 28일까지 당시 대교구장님이셨던 변성우 목사님의 인도로 강서대교구 일곱이레 기도회를 열었는데 기도회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성령 재충만을 받았다. 온 몸이 불같이 뜨거워 지더니 감사와 평안이 넘쳐났다. 일곱번째 기도회를 마치고 병원에 가서 검사결과를 듣는데 담당 박사님께서 혈뇨 단백뇨 모두 멈추고 콩팥도 깨끗하다고 말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할렐루야!

 내 수첩에는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평생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한다.


이재신 권사(성북교회) -

모든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

하나님 위한 봉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누리게 해
전국여선교회연합회 통해 봉사자들의 연합 꿈꿔

 지금까지 지난날을 돌아보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데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에 놀란다. 하나님께 부끄럽고 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할머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주의 종이 되기를 소원하셨고, 할머니의 기도는 응답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아버지는 신학교를 입학해 성결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며 천국가실 때까지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다. 

 오일쇼크 당시 어버지는 나를 데리고 성전이 지어지다가 중단됐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왔다.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철골 교회 아래로 데리고 가시더니 “재신아! 이 교회가 세계 최대 교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좀 의아했지만 그 말씀 때문에 나는 여의도교회라는 곳에 첫발을 내딛고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학창시절 사장의 딸에서 신학생 그리고 목사의 딸로 자랐다. 좋으신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형통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순복음교회를 다니는 좋은 분을 만났다. 남편이 된 그는 당시 토요일마다 오산리에 있는 기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통일로 주변에서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여의도성전이 다 지어지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교회라고 자랑을 하며 여의도로 자주 데리고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면서 또 다른 분위기 안에서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성북성전으로 교적이 옮겨졌다. 교구장님은 부족한 나를 구역장 지역장으로 세워주셨다.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리 고사를 해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구활동을 하던 중 우리 지역 탁방난 권사님이 성북성전 여선교회 회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권사님에게 도와드릴  것이 없냐고 물었다. 그래서 수요일 설거지 봉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자연스레 여선교회 봉사자가 되어 성찬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북교회 성찬부장, 총무부장을 거쳐 여선교회 회장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 진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가 하고 싶어서 걸어온 길이 아니고 그냥 바람에 떠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나에게 힘이 되어준 건 남편이었다. 자신은 교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는 않지만 아내인 나는 교회에서 봉사를 활발하게 하길 바란다며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총회 전국여선교회연합회 회장을 맡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더 큰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저 부족한 거 아시잖아요. 이렇게 큰일 못해요’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주님의 음성이 나의 마음 깊이 들려왔다. “나를 위해 헌신하라!”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했다.

 회장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무릎 꿇고 순종하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선교회연합회가 다문화가정 훈련병 위로 등 다양한 사역이 활기차게 전개되어 갔다. 회원들은 선교에 힘을 다하고 있다. 지난달 여선교회연합회 총회를 마치고 임회원들은 보광 휘닉스파크에서 열린 순복음실업인수련대회에 참석했다. 수련대회에서 우리는 꿈을 가졌다. 기하성 전국 여선교회연합회도 이런 수련대회를 열게 되는 아름다운 꿈을 마음에 그림으로 그려본다.         

 지금까지 봉사와 헌신을 하면서 나는 감사를 배웠다. 요나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빚어지는 곳이 물고기 뱃속이었다면 나는 봉사를 통해 빚어져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예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감사드린다.

 하나님은 고난만 예비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살아야할 인생의 빛나는 내일의 새벽까지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할렐루야!   

 


박지연 성도(마포2대교구) -

“암 치유는 물론 잃었던 신앙이 회복됐어요”

유방암 판정, 절망 속에서 ‘주기도문’ 계속 암송
조용기 목사 신유환상과 이영훈 목사 안수 받고 나아

 2011년 2월 유방암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결론은 유방암 4기였다. 더군다나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있었고, 간의 경우는 암세포가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당황이 됐다. 초등학교 6학년 큰 아이와 이제 5살된 둘째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암덩어리 크기는 어머어마해 손바닥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며 호통을 쳤다. 손쓰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큰 병원으로 어서 가라고 일러줬다.

 신촌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가 보름 만에 모든 검사를 마치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던 그때 주기도문이 생각났다. 어릴 적 교회를 다니며 외웠던 주기도문을 다행히 잊어버리지 않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시는 친정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닌 것은 중학교 때까지였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고, 나의 처지를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그저 주기도문을 외웠다. 외우고 또 외우고, 깨어있는 시간에도 심지어는 잠 들면서까지 오로지 주기도문만을 외웠다. 그렇게 한달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시 회사로 복직해야 했고, 복잡해진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조용기 목사님께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편지도 보냈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어느 날, 어디선가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내가 이미 다 고쳐 주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순간 우리교회 대성전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모습이 환상 가운데 보였다.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 후 아픈 자를 위해 안수해줄 테니 일렬로 줄을 서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리면서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교회를 출석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받겠다며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리둥절하던 나는 얼른 그 긴 줄에 합류했고, 치유를 사모하게 됐다. 어느새 내 차례가 됐고, 조용기 목사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주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지난 날이 후회스러워 회개했다. 꿈같았던 환상을 본 후 치유에 대한 말씀을 확신하고 회사에 바로 복직했다.

 남들이 힘들어하는 방사선 치료를 10회까지 받는 동안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했을 때 주님이 나를 인도해주신 것이었다. 다시 신앙생활하며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예전에는 왜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까.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내 삶에 힘이 됐다.

 항암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2012년 12월 MRI 검사결과 뜻하지 않게 뇌에서 암세포가 발견됐다. 그것도 온통 머리를 덮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2013년 2월 서부성전에서 열린 성회에 참석해 이영훈 목사님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았다. 목사님의 기도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머리를 뒤덮고 있던 암세포가 사라진 것이었다. 뇌종양 분야의 권위자셨던 의사선생님은 놀라운 일이라고 하셨다.

 단기간에 암이 크게 퍼진 나 같은 환자도 없었지만 이처럼 빠른 회복을 보이는 환자도 없었다며 병원 측은 놀라워했다. 현재 내 몸에서는 암세포를 발견할 수 없다.

 주를 외면하고 살았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다시 주의 자녀가 된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주님 앞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예정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요즘 들어 ‘감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또한 이웃 사랑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좀 더 주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를 다시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김수영 성도(마포2대교구) -

말씀에 의지해 선포한 대로 기도응답

갑자기 찾아온 마비증세로 직장 잃고 일상생활 불가능
주님의 치료하심 바라보고 기도하니 치료의 기적 임해

 2005년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 출근했는데 갑자기 양쪽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오십견이 아니냐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목도 돌리기 힘들었고 앉았다가 일어날 수도 없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바닥이 저려오는 등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류마티스관절염이라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유명하다는 병원이나 치료제, 치료방법은 다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원을 바꾸어 가며 진료를 받았는데 조금 차도가 보이는 듯하더니 1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당시 주택에서 살 때라 엘리베이터가 없어 난감했다. 그 때마다 119소방대원들이나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집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증상은 더욱 심해져 몸은 붓고 식사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일상생활이 점점 불가능해지다보니 다니던 회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의 범위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는 아예 침대에서만 생활했다. 당시는 컵도 들 수 없고 누워서 머리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때부터 하루 종일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나를 간병하시던 어머니는 설교 중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일만 번 쓴 권사님의 치유 간증 예화를 듣고는 그 말씀을 일만 번을 쓰시며 나를 위해 중보해주셨다. 나도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에 의지해 내가 나은 모습을 상상하고 꿈꾸고 바라보며 선포하듯 기도했다.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흔들릴 때는 이영훈 목사님의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를 떠올리며 “저는 이미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했다.

 내가 나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나았다라는 확신으로 바뀌자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상체는 제법 움직일 수 있었고 하체도 비록 제대로 걷지는 못해도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작정하고 지역장님께 매주일 교회에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지역장님의 부축을 받아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부족해 수요예배, 금요성령대망회도 참석했다.

 더욱 말씀을 의지해 기도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금요성령대망회에서 이영훈 목사님이 신유기도를 선포하시는데 무릎이 시원해지면서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혼자서 어렵게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던 나는 그날 어렵지 않게 계단을 올라 집에 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나았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교구사무실로 내려가던 중 그때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할렐루야!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걸을 수 있게 된 나는 제일 먼저 아파서 중단했던 성경대학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내가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봉사도 하고 더욱 확신을 갖고 기도하니 졸업이 다가와서는 아프기 전과 다름없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얼마 전 성경대학 졸업식에서 대표로 봉사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성경대학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상담에 대한 비전을 주셔서 지금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련의 체험을 통해 아픈 자들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학업을 준비할수록 길을 열어주시고 물질의 축복도 주셨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다.    


강병국 성도(대학청년국) -

하나님께서 강직성척추염 치료해주셨어요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하며 응답받아
하나님 중심의 삶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우리교회를 다녔다. 주일만 교회에 가는 무늬만 크리스천인 생활이었지만 몸도 건강하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아 내 앞길은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2011년 늦가을 내 인생 최고의 시련이 나를 찾아왔다. 회사 워크숍을 다녀온 다음날 갑자기 오른발이 너무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아무 영문도 이유도 모르는 증상이었다. 무리하거나 다친 기억도 없었다.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양발에 양 무릎까지 극심한 통증이 생기게 됐다. 제대로 일어서서 걸을 수도 없는 상태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보았지만 다들 원인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소염제만 잔뜩 처방했다. 그렇게 회사도 나가지 못하고 고통 속에 맞이하게 된 연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에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방구석에 혼자 누워서 TV를 켜놓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내가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고 구원해 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움직일 수 없기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철야예배와 주일예배를 드리고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내 자신을 욥과 같다고 생각했던 나는 비로소 내가 탕자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회사를 휴직하고 천안의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게 된 나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며 마음을 다 잡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집사님을 통해 대학청년국 카리스선교회를 오게 돼 성령 충만도 받게 됐다. 그 즈음 발병 두 달만에 경험 많으신 의사 선생님을 만나 내 병이 강직성척추염일 수 있음을 알게 됐고 유전자검사까지 한 후 확진을 받게 됐다. 강직성척추염은 면역체계 문제로 발생하는 류마티스쪽 질환인데 병이 계속 진행되면 척추마디가 굳어져서 등이 앞으로 굽고 목도 못 움직이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척추와 팔다리 관절 외에도 전신에서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난치병이었다. 

 나는 약을 먹으며 통증을 줄이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 사이 교회에서는 새가족 교육을 마치고 대학청년국 카리스선교회 열정구역에 들어가게 됐다. 열정구역에서 만난 형과 누나들은 정말 좋은 분들이었다. 덕분에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병세도 점차 완화됐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 여름 휴가 대신 함께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금식기도 3일째 되던 마지막날 새벽기도회에서 응답을 받게 됐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 부부와 함께 기도원에 가게 됐는데 그분들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 “너는 치료 받았다. 너를 통해 너희 집의 저주와 질병의 세력을 끊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고 3일간의 금식은 7일로 변했다. 그 기도원의 응답 이후 나는 척추염 관련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다. 다행히 병원에서 검사 결과 일반인의 6배 이상을 기록하던 나의 염증 수치는 약을 끊었는데도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내려갔다.

 야훼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결과였다. 나는 내 병을 고쳐주신 것도 감사했지만 세상적으로 살던 나를 다시 주님 곁으로 불러주신 것이 정말 감사했다.

 내가 힘들 때 용기를 주었던 성경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을 찾아와 아끼던 종의 질병을 고침받은 백부장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현재의 기준에서 본다면 나는 모태신앙이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방인인 백부장만한 믿음이 없어서 이 시련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백부장처럼 믿음으로 이겨내자는 용기와 의지가 생겼다. 혹시 고통과 시련 속에 계신 분이 있다면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의지하며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주님은 항상 신실하시며 주를 앙망하는 자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미즈타 미사키 성도(순복음후쿠오카교회)

하나님 사랑으로 위기에 놓인 가정 회복됐어요



남편의 잦은 방황, 심각하게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 기도로 미움 원망 사라져


 교회를 다니시는 어머니를 통해 내가 순복음후쿠오카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국제학교에 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복음을 전해 듣고 침례를 받았지만 가슴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람을 용서하고,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건지 믿기 어려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교회는 그저 형식적으로 예배만 드리는 곳일 뿐, 나는 세상이 더 좋았다. 재학시절부터 알게 된 남편과 결혼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들,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가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4살 연상인 남편은 아직 어렸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가정보다는 세상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첫 아이를 임신했다. 몸이 약한 나는 많이 아팠고, 복통이 심했다.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내 옆에 없었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도 남편은 곁에 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겼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그들의 걱정보다 심각했다.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됐지만 남편의 방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째를 임신했다. 편치 않는 마음에 몸 상태는 다시 나빠졌다. 몸과 마음이 지쳐 어린 딸을 안고 친정에 왔다. 우연히 후쿠오카기독교국제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남편을 위한 기도’라는 책이 눈이 띄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내 어려움을 말하고 기도해볼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새생명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그런 귀한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침대에서 떨어진 아이는 온 몸이 마비가 됐다. 순복음후쿠오카교회 성도들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한 마음으로 중보했다. 방황하던 남편도 아이를 살려보겠다며 교회에 와서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아이는 주님 품에 안겼다. 아이의 장례식 날, 성도들은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나를 위로했다.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만 임하는 것일까’ 원망이 생겼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김 일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순복음후쿠오카교회 성도들의 참 위로와 사랑, 무엇보다 김선교 목사님의 사모님 격려가 큰 위로가 됐다. 고난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그분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그리고 매일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현존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 사랑 변함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그 사랑 예수” 찬양만 부르면 눈물이 주룩 흘렀다. 기도할수록 용서할 수 없던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삶에 대한 원망이 가슴에서 녹아 없어졌다. 남편의 방황은 여전했지만 그때마다 기도하며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의 마음 뿐 아니라 남편의 마음을 만져주셨다. 방황하던 남편이 사회복지 일을 시작했다. 함께 지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을 돈을 벌기 시작했다. 교회도 꼬박꼬박 나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기도로 이룬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3년 전 나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셨다. 아들이었다.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던 나는 한나회(어머니모임)에서 활동하는가하면 찬양팀에서 싱어로 봉사하고 있다. 순복음후쿠오카교회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얻게 해주는 보금자리’였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처럼 “나의 길을 그분께 맡길 때 이뤄주시고 의를 빛같이 나타내어 보이시는 분”이셨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나.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난 중에 회복을 이루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중심으로 모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증거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겠다.  


신명철 안수집사(마포1대교구) -

공사현장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

받은 은혜 생각하며 사복음서부터 성경필사 시작
7년에 걸쳐 성경 4번 기록, 자녀에게 가보로 전달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결혼 후 수년이 지나서였다. 15살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했던 아내는 나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아내의 권유에도 주님께 나오지 않았던 나는 아내의 간절한 기도 응답으로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주님께 나온 나는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때서야 내 이름 ‘명철’이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귀한 이름임을 깨닫고 감사했다.

 나의 직업은 목공 인테리어였다. 1980년대 중동건설 붐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던 나는 동료들과 나들이를 나갔다 동료의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당했다. 차는 다행히 난간을 들이받으면서 기적처럼 섰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26개월 간의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일을 마치고 귀국 후 다음에는 싱가포르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된 나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잡았다가 그것이 떨어지면서 26층 높이에서 떨어질 뻔 하는 사고를 당했다. 순간 아찔했다. 몸이 조금만 더 앞쪽으로 기울었다면 바로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 주님은 그 상황에서 나를 살려주셨다. 또 한번의 기적이었다. 

 기적 같은 순간순간들은 해외 공사 일을 모두 마치고 국내에서 활동할 때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나님은 언제 사고가 일어날 지 모르는 공사 현장에서 매번 나를 살려주셨고, 그때마다 나는 구원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무엇으로 이 모든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적들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매일의 삶을 감사함으로 살던 중 2006년 안수집사회에 사랑방선교회 김태환 장로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적이 있다. 장로님은 성경필사에 대한 간증을 하셨고, 가만히 듣던 나는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볼 때 은혜와 감사뿐이었던 나는 그해 5월, 사복음서를 시작으로 성경 필사를 했다. 일을 하면서 필사를 해야 했기에 하루에 2∼3장 정도 밖에 쓰질 못했지만, 성경을 쓰면서 읽으니 은혜가 넘쳤다. 사복음서를 마치고 신약 그리고 구약 순으로 성경필사를 모두 마쳤을 때 그날 밤 꿈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님은 나에게 성경 필사를 멈추지 말고 4남매에게 줄 성경을 필사해 한 권씩 나눠주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세 아들과 막내인 딸이 하나 있다. 항상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아내와 기도한 결과 주님은 네 자녀 모두 믿음안에서 잘 자라 공무원과 교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활동하게 해주셨다. 또한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복된 가정을 만들어주셨다.

 나는 꿈에서 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했다. 매일 틈날 때마다 성경을 필사했고, 필사하면서 말씀을 읽고 묵상했다. 그렇게 해서 7년에 걸쳐, 2013년 10월 네 자녀에게 줄 성경 필사를 모두 마쳤다. 그동안 필사한 성경만도 신약이 5권, 구약은 상·하로 나누어 작성하는 등 그 양만해도 어마어마했다.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쓸 때마다 우리 가족에게 주신 은혜가 더욱 생각나 더 큰 감사가 다가왔다. 성경을 쓰면서 마음의 조바심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했다. 주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커져갔다. 나는 올해 구정, 이렇게 쓴 성경 필사를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자녀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항상 묵상하고 가보로 대를 이어 간직하라고 이야기했다.

 받은 은혜가 크기에 성도들에게 성경 필사를 꼭 권하고 싶다. 쓰면서 묵상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 그리고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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